소설리스트

제5장 새끼를 밴 암소 (69/104)

제5장 새끼를 밴 암소

1998년 6월 16일.

정부로부터 설명을 들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정말이지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인생 2회 차인 나조차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내가 MS와 접촉하며 200억 불 외평채 중 100억 불을 팔아 줬을 때, 정헌몽 회장은 대북 사업을 훅훅 밀어붙였다.

나는 지금 오전 6시를 가리키는 시계 앞에서 왕회장의 청운동 자택에 들어와 있다. 내 전략은 단 한 가지.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마지막까지 다짐을 반복했다.

“남북 경협에서 공단 하나 만드는 것은 흔쾌히 받아들이시고, 민간인 교류는 손 담그지 마십시오. 만약 금강산 관광이든 백두산 관광이든 그런 협상안이 나오면 필히 북한 국영 기업이 나서서 관광객을 인솔해야 한다고 하셔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안전을 북한이 직접 담보 못 하면 민간 교류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야지요.”

“오이야, 알겠다.”

왕회장과 정헌몽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지겨워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나와 대현은 한배를 탔다는 연대 의식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대현이 내 말대로 일을 추진하면 금강산 관광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 김정일도 바보가 아니다. 북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만면에 웃음을 띠고 관광 가이드를 할 수 있겠나? 접촉하는 북한 인민들이 북한 경제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남한의 자본주의 또한 인정해야 하는데, 검토하면 검토할수록 절대 불가능함을 알게 될 거다.

“먼 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오이야, 잘 다녀오꾸마.”

“아버님, 나가실 시간입니다.”

오전 6시 10분. 정헌몽 회장은 왕회장에게 갈색 외투를 걸쳐 주었다. 나는 옆에서 흰색 중절모를 권했다. 역사적인 쇼맨십을 보여 줄 때가 되었으며, 주인공은 언제나 패션부터 남달라야 한다.

저벅저벅.

끼이이익.

“오, 나오신다!”

찰칵! 찰칵! 찰칵! 펑! 펑!

“방북 일정은 어찌 되십니까?”

“고향에도 들를 계획이십니까?”

“김정일 국방장관과 협상을 직접 하십니까?”

“소 떼는 북한이 요청한 것입니까? 트럭도 같이 지원하시는 게 맞습니까?”

카메라 세례와 함께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지고 금세 주변은 소란스러워졌다. 왕회장은 딱히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그들에게 그냥 손을 흔들어 보이며 옅은 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드디어 내가… 다시 고향에 가는구나. 내 생전에 이런 날이 올 줄은….’

왕회장의 표정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소리 나지 않게 박수를 보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고향 가니까 좋지, 뭐. 어제 돼지꿈 꿨어.”

“와아아아아!”

왕회장은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는 답을 해 줬다. 나는 차를 타고 청운동 자택 앞에서 배웅을 하는 것으로 끝냈다. 쇼는 TV로 봐야 제맛이잖은가.

    • *

“지금 대현그룹 정영주 명예 회장이 앞장서서 출발합니다.”

“총 500마리의 소 떼를 실은 트럭들이 그 뒤를 뒤따릅니다.”

“와아아아아!”

대현그룹 직원 1,000여 명이 트럭이 지나가는 길 옆에서 태극기와 대한적십자사 깃발을 흔들며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그룹 총수 일가의 성공적인 방북을 기원하는 1990년대 방식이다.

트럭 대열은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으로 향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TV 카메라는 왕복 4차선 통일대교 위를 달리고 있는 왕회장 일행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한국 언론사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기자들도 앞다투어 취재 경쟁을 벌였다.

“국민 여러분,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정영주 회장이 민간인으로서는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통일대교 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통일대교 이북 구간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 과거 반세기 동안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출입 가능 지역이 되었다.

왕회장이 소 떼를 몰고 갈 때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해서 가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독일이 장벽을 무너뜨렸다면 자신은 끊어진 다리를 잇겠다는 뜻으로 말이다.

왕회장이 판문점의 북측 지역 판문각에 도착하자 그를 초청한 단체인 북한 아세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 송경호가 그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 선생님.”

“아이고,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83세 왕회장의 얼굴에 벅찬 감회와 설렘이 가득 찼다. 굳게 닫혀 있던 분단의 문이 열리는 역사적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취재진, 그 앞에 선 그는 준비한 소감문을 읽어 내려갔다.

“저는 어린 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탓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왕회장은 아버지의 소를 성실함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삼고 인생을 걸어왔다.

“이제 그때 그 소 한 마리가 500마리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찰칵! 찰칵! 찰칵! 펑! 펑!

그의 말이 끝나자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텔레비전 방송 3사의 생중계로 왕회장의 소 떼 방북을 지켜보는 국민들에게도 감동스러운 장면이었다. 한 개인의 인생 유전에 통일의 꿈이 덧씌워지니 한 편의 드라마나 다름없었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미국과 중국 간의 ‘핑퐁 외교’에 빗대어 왕회장의 방북을 ‘황소 외교’로 평했다. 프랑스 유명 비평가 기소르망은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까지 평가했다.

미국의 CNN도 이 상황을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주요 외신들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이 최초로 휴전선을 열었다며 대서특필할 것은 당연하다.

왕회장은 6월 23일까지 8일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평양, 원산, 금강산 및 고향인 통천 등을 방문할 것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 개성공단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지워질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금강산을 못 보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이 장사가 남는 장사가 된다.

“이야, 왕회장님 아주 말씀 잘하시네요.”

케이가 TV를 보며 감상평을 쏟아 낸다.

“연설문 직접 쓰셨어. 책을 많이 읽으시더니 문장이 아주 멋지더라고.”

“호호호! 딜 잘하셔야 하는데.”

“잘되겠지.”

케이가 꼈잖아.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틱.

나는 TV를 끄고 밥이나 먹고 일하자며 케이를 일으켜 세웠다.

    • *

왕회장 일행이 북한에 머문 지 2일 차.

“지금 배가 불뚝한 암소들은 모두 새끼를 품고 있으니, 어디 조용한 데서 쉬게 해 줘야 합니다. 새끼 낳으면 바로 핥아 줄 수 있게 양지바른 곳이면 더 좋고요.”

“감사합니다, 정 선생님.”

왕회장은 북한 아세아태평양위원회라는 긴 명칭을 가진 이들의 안내를 받으며 북한의 공동 농장에 방문해 있었다. 이미 왕회장이 몰고 온 소 떼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기에, 관리인에게 이것저것 세심하게 일러 주었다. 이왕 주는 소, 새끼까지 끼워 준 것은 순전히 왕회장의 호의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헉!”

그런데 설명을 해 주는 와중에 공동 농장 관리인의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하더니 삽시간에 훅 하니 물러서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척. 척. 척.

멀지 않은 곳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가왔다. 왕회장은 바짝 얼었다. 척 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그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있던 터라 천하의 왕회장도 긴장을 안 할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정헌몽 회장도 마찬가지.

“피곤하실 텐데, 연일 강행군이십니다.”

“아이고, 여기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현지 지도를 핑계로 마중 나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내가 이리 왔으니 봐주십시오.”

“별말씀을….”

“이리로, 이리로. 소 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야지요.”

김정일의 첫 인상은 예상과 상당히 달랐다. 권위적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왕회장을 깍듯이 예우했다. 기념사진 촬영 때도 가운데 자리를 왕회장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왼쪽에 섰다.

“하하, 날씨도 좋으니 산책이나 같이 하시죠. 저쪽에 나무 그늘이 좋군요.”

“예, 그러시지요.”

사진을 찍고서는 농장 주변을 돌며 산책을 빙자한 대담을 요청했다. 정헌몽 회장과 왕회장을 양옆에 두고 번갈아 눈을 맞추며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북측은 주한 미군 주둔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미군이 계속 남아서 북과 남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 주어야 합니다.”

“헉!”

“으흠… 아, 예. 말씀은 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뜬금없이 내뱉은 김 위원장의 말에 왕회장은 깜짝 놀랐고, 정헌몽 회장이 간신히 말을 받았다.

-절대 평정심! 평정심! 김정일 위원장은 바보도 미치광이도 아닙니다. 노련한 정치가예요. 말려드시면 안 됩니다.

정 회장은 유수한 회장의 그 말에 매달려 최선을 다해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편견을 깨는 말을 하여 충격을 가하는 것. 그게 진실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상대가 가진 마음의 벽을 깨고자 하는 말이었다.

“하하, 금강산 사업은 나누지 말고 정영주 회장님이 모두 추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발해만에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석유가 생산되면 남쪽에 주겠습니다.”

“헌몽, 석유는 니 전문이다 아이가. 장군님께 말씀드려라.”

“석유시추선은 실행에 옮겨 보겠습니다만, 민간 교류는 신중히 접근해야 합니다. 공화국에서 직접 관광청을 운영하시면 저희가 모객까지는 시도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솔직히 그것도 양쪽 정부에 효율적이지는 않다고 보입니다.”

김정일이 왕회장을 지목했지만 그가 자연스레 공을 넘겼기에, 다행스럽게 정헌몽 회장이 대화를 받을 수 있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시오? 북남 긴장 완화에 민간 교류보다 나은 방법이 어디 있소? 게다가 금강산은 남쪽 분들도 꿈에 그리는 명산이 아니오.”

김정일이 의외라는 듯 이맛살을 살짝 구겼다.

‘유수한 회장이 그게 가장 큰 리스크라고 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정헌몽 회장이 입을 열었다.

“아직 육로 관광로를 뚫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배를 띄워야 하는데 수익성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합작 공단에 대현그룹이 직접 투자할 여력을 잃게 됩니다. 공화국도 경제가 어렵지만, 남쪽도 외환위기의 여파를 완전히 걷어 낸 것은 아닌지라….”

“으흠, 합작 공단? 대현이 직접 투자?”

김정일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공단을 조성하면서 대기업이 직접 투자한다고 하니 말이다.

“역사적인 남북 합작 공단인데 봉제 공장 따위를 지을 수는 없잖습니까? 컴퓨터와 소형 가전 같은 전자 제품을 만들어야지요.”

“전자 제품!”

정헌몽 회장의 말이 예상 밖이었던지 김정일은 깜짝 놀랐다. 단박에 금강산 관광 따위는 훅 하고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예. 전자 제품 위주의 공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생필품 기업도 일부는 입주해야겠지요.”

“오호!! 정헌몽 회장, 그리만 해 준다면 공화국에서 뭐든 적극 지원하리다.”

김정일은 뻔히 이름과 직책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왕회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공단 위치를 개성으로 했으면 합니다.”

“개성? 남측과 이미 신의주로 합의를 했는데 굳이….”

개성은 판문점에서 겨우 4㎞가량 떨어진 곳으로, 지하에 군사 시설이 많아 북한이 남측 기업에 공단 부지로 선뜻 내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유수한 회장이 개성으로 정해야 남북 긴장 완화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했다. 대북 리스크를 확 줄이는 공단이라고 말이다.

“크흠!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개성에서 만들어 남쪽으로 실어 가서 수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효율이 높고 타당합니다.”

왕회장이 훅 하니 끼어들었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나이 많은 그의 몫이었다.

“개성에 위치해야 전력도 안정적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신의주까지는 너무 멀지요. 발전소를 단기간에 지을 수도 없고.”

“전력이라… 일리가 있긴 있습니다.”

김정일이 넘어올 듯 말 듯 했다.

“게다가 인터넷 회선을 일부 이으면 투자 회사도 입주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투자 회사?”

“버지니아 트레이딩이라고 하는 다국적 회사인데, 남북 간 경협에 다리가 되겠다고 하더군요. 공화국이 개성공단에 입주한 회사들의 자산 보호를 보장하면, 수억 불 현금을 담보로 맡기겠다고 합니다. 들고나는 물품 대금의 계좌 운용 수수료를 챙기는 조건입니다.”

“수억 불이라 함은….”

김정일은 자산 보호 보장이니 수수료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현금 담보를 맡긴다 함은 무이자로 자금을 빌려 준다는 소리지 않나. 북한에 주는 공식적인 뇌물이나 다름없으며, 경제 제재가 완벽히 풀리지 않은 시점에서 정말이지 알토란 같은 돈이다.

“정확한 액수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장군님께서 보증하신다면 대략 5억 불은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5억 불?! 크흠!”

김정일은 오늘따라 자신이 왜 이리 휘둘리나 싶었다.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제안이 너무 달콤했다. 훅 치고 들어오는데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듯했다.

“한데 그 회사 이름이 영…. 혹시….”

“예, 한국에서 활동하는 기업이지만 본래 다국적 기업이라 미국 자본이 일부 있습니다.”

남한 돈과 달리 먹고 배를 째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렇지만 개성공단이 유지되는 한 5억 불은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최악의 경우, 홀라당 까먹어도 개성공단을 돌려서 갚거나 공장 임대료로 가늠하면 그뿐이다.

결국 김 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멀찌감치 졸졸 따라오던 아세아태평양위원회 관계자를 불렀다.

“내일 당장 이분들을 모시고 개성으로 가시오. 공단 조성 현장을 보여 드리시오.”

“개성공단… 예, 알겠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감히 대꾸할 자 없음이다.

다음 날 왕회장 일행은 개성공단이 들어설 천만 평이 넘는 땅을 답사할 수 있었고, 드넓은 평지를 보며 대북 사업에 자신감을 얻었다.

‘휴우~ 큰 고비는 넘겼어.’

금강산 관광 따위를 언급하는 북한 고위직은 아무도 없었다. 개성공단에 언제 몇 개의 업체가 입주하며, 생산하는 전자 제품이 뭐냐고 물어봤을 뿐이다. 간혹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은행이냐고 묻는 관계자가 있어서 그런 셈이라고 정헌몽 회장은 답했다. 아세아태평양위원회 관계자를 포함해서 모두들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어이구야. 1차 사업이 100만 평, 나머지가 천만 평이라니… 대현건설 노났다. 그챠, 헌몽아.”

“예, 아버님.”

언덕에 올라 감격해하는 왕회장의 등 뒤에서 정 회장이 답했다. 조심스러웠지만, 그도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한이한테 전화해 줘라.”

“여기서 전화 안 됩니다, 아버님.”

“에잉, 휴대폰도 별수 없구먼.”

“휴대폰이 문제가 아니라 전화선이 없어서요. 스마트 클라우드가 깔아야지요. 우리는 토목 하고요.”

    • *

1998년의 하반기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한민국 전체를 보자면, 경기는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7월부터 무역 흑자를 기록하면서 한국은행은 경제 성장률을 3%대로 예측했으며, 시중의 체납 임금도 200억대로 급격히 내려왔다.

외평채 200억 불 중 100억 불은 국내로 반입되었으며, 정부가 해당 자금을 벤처 기업 지원에 올인했기에 하루에도 몇 개씩 벤처 회사가 생겨나고 있다. 그중 10%만 살아남아도 내년의 경제 성장률을 9%는 무난히 찍을 것 같다. 원래 역사에서 그 정도 수치였으니 더 높아질 것이다.

재계로 시점을 축소해 보면, 화두는 단연 대북 산업이다. 왕회장의 활약으로 개성공단은 준공식을 마쳤으며, 대현건설은 특유의 불도저식 개발로 개성공단에 기초 인프라를 만들었고, 용인밸리 업체들 몇몇이 입주를 결정하자 다른 공단의 전자부품, 조립 업체들도 입주 신청을 해 댔다.

IT 업계는 플래시 풍년이었다. 한국 반도체 3사가 모두 플래시를 찍어 냈고, 공급이 원활해지자 전 세계적으로 관련 완제품 시장이 커지기 시작했다. 애플의 아이팟과 에그박스가 유행의 정점을 차지했으며, 덩달아 중국에서도 ‘C-앰팩’이라 불리는 저가 앰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플래시 매출만 2조를 넘길 것이 확실하며, 다른 회사는 그 절반 정도일 것이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국내 정세 속에 당장 회사에서도 조금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원래 이때쯤 시제품을 들고 나오는 것이 스마트 클라우드의 관례이긴 한데 이번엔 내가 챙기지 못한 사이에 너무 많이 나와 버렸다.

“오 이사님, 권 부장님, 김 팀장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K폰, 핸드 터미널, 에그박스, 디지털 카메라, 블루투스 이어폰, 심지어 애플의 아이팟까지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기에 나는 세 명 모두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제품을 업그레이드했다면 세 명 모두가 합의한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세 명 외에 나운영 부장도 생산을 보증했다 보다.

“사장님, 아니 회장님께서 작년 외환위기 때부터 자리를 비우시고, 올해도 워낙 바쁘셔서 융단 폭격을 했습니다.”

“융단폭격이라고요? 디자이너들, 개발자들을 얼마나 굴렸길래….”

“외환위기 때 우수 인력들이 대거 스마트 클라우드에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여기 있는 양반들은 실질적으론 임원급이기에 재량권이 있다. 내가 작년 말부터 최근까지 인력 충원과 제품 전략은 이들에게 전권을 맡긴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해 말, 오 이사를 종합연구소 소장, 권 부장을 총괄영업부장, 김 팀장을 스마트 클라우드 총괄 개발팀장으로 임명했다.

“인력이 풍부하다곤 해도 이 정도 결과는 대단한데요.”

“시제품보다 혁신적인 신제품을 내놨어야 하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첨단 제품 선점과 부품 경쟁력 확보라는 전략을 구현하다 보니 올해에는 부품과 펌웨어 경쟁력을 올리는 쪽으로 추가 기우는 바람에….”

오 이사가 말은 그리 하지만 결국 올해 신규 제품으로 뭘 만들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내가 여태 천기누설했던 제품들이 모두 대박을 쳤으니까, 오 이사가 섣불리 나서서 ‘올해엔 이것을 밀어 보자!’라고 주장하기는 부담스러웠겠지.

아쉽긴 하지만 올해 혁신 제품 출시는 이미 불가능하다. 업그레이드된 제품으로 11월 쇼케이스를 치르는 수밖에.

“뭐, 업그레이드 제품도 신제품이긴 하죠. 어디 한번 살펴볼까요?”

나는 탁자 앞으로 나아가 K폰부터 만져 보았다. 역시 조너슨의 디자인을 반영했던지라 그립감도 좋고, 디자인도 럭셔리하다. 특히 후면 배터리 부위가 아주 미려하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일단 저희가 DRAM과 플래시 모두 512메가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것은 이미 보고드렸으니 아실 겁니다. 그뿐 아니라 1,000만 화소짜리 CIS 모듈과 그에 걸맞은 이미지 프로세서, 220MHz GPU 또한 개발했음을 알아주십시오.”

올해 들어서는 신성에 한발 뒤지고 있던 DRAM마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뺏어 왔다.

통신칩이야 퀄컴, ARM사와 협업하는 것이니 세계 최초를 따질 것도 없다. 전 세계 통신칩의 35% 정도가 우리 칩이다. 1999년부터 모토롤라와 일본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맛이 가기 시작하니 조만간 스마트 클라우드와 노키아가 휴대폰 시장을 양분하게 될 테고, 통신칩 시장만큼은 독점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좋네요. 해당 업무 관련자 전원은 A급, 핵심 개발 인력은 S급 인센티브를 주도록 하죠. 비서실에서 직접 처리하지요.”

이 실장에게 시키면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잘 평가할 거다.

“K폰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메모리 용량부터 대폭 증가시켰습니다. 음원을 200곡 이상 저장할 수 있고, 블루투스 이어폰 음질도 대폭 개선했습니다. 배터리는 기존 대비 두께는 20% 줄였고, 통화 대기 시간도 30% 이상 개선했습니다. 특히 펌웨어에서 통신사와 협업해 발신자 확인이 가능해졌습니다.”

생각보다 괜찮은 업그레이드다. 발신자 확인 기능은 정말 좋다. 조만간 전 국민이 사용하게 될 거다.

“고객의 목소리를 잘 반영했군요.”

“예. 영업 쪽에서 고객 요구 사항을 세심하게 수집해 줬습니다.”

“경력 인원들이 많이 보강된 덕분입니다.”

오 이사가 권 부장을 추켜세워 줬고, 권 부장은 인력 충원에 그 이유를 뒀다. 흠잡을 데 없는 협업이다.

“로고가 안 보이는군요. 모델명은 어찌하기로 했습니까?”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K1, K-블레이드, K-네오 블레이드, K-뮤직… 모든 이름이 특징적이었는데, 이번 제품은 딱히….”

“업그레이드 제품이라 작명이 어렵다, 그 말씀이시군요.”

“예.”

매년 제품에 특징적인 모델명을 추가하기란 어려운 일. 충성 고객도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니 이제 모델명에도 번호를 붙일 때가 되었다.

“K-블레이드5라고 하죠.”

“그냥 숫자를 붙이는 겁니까?”

“앞으로 그래 보죠. 매번 모델명으로 특징을 언급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올해부터 제품군에 모두 적용하면 어떨까요? K-터미널4, K-포토3처럼 말입니다. OEM 제품이야 애플 쪽에서 이름을 지을 테니 상관없고요.”

“좋네요. 쉽게 가 보죠, 다른 것도 볼까요?”

“전반적으로 동일합니다. 메모리를 모두 512메가 이상으로 확장했고, OS를 Mac OS X 10.5 버전을 기반으로 모두 업그레이드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는 1,000만 화소를 적용했으며, 펌웨어에선 코닥과 협업해 연속 촬영 기법을 이미지 프로세서에 적용했습니다.”

오 이사의 설명에 이어, 상세한 기술적인 사항은 김 팀장이 덧붙여 주었다. 김 팀장이 설명 중에 인력 얘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걸 보니 인력은 충분히 보강했나 보다. 여하튼 모든 부품을 이 정도로 업그레이드했다면 올해도 김 팀장은 정말 뺑이쳤다는 의미다.

“김 팀장.”

“예, 회장님.”

“총괄개발팀을 개발실로 격상시키겠습니다. 하부 조직을 각 디바이스별로 나눠서 개발팀으로 꾸미세요. 내년부턴 김 팀장을 개발실장으로 부를 수 있게 말이죠.”

“허헉.”

나는 깜짝 놀라는 김 팀장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별이라도 있으면 장난삼아 하나 달아 주고 싶다. 30대 임원을 만드는 것은 1990년대 시대상에는 시기상조이니 내년에 부장 정도로 승진을 시키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만 해도 초고속 승진이다.

“아내분에게 내년부터 부장 사모님 소리 들을 거라고 자랑 한번 하시고.”

“헉!”

“하하하! 축하합니다, 김근업 부장님.”

“오 이사님, 벌써 축하하시면 어쩝니까? 승진 턱 내고 나서 부장이라 불러 줘야죠. 하하하.”

옆에서 오 이사와 권 부장이 즐겁게 호응을 해 준다.

“오 이사님은 연구소 조직을 개발실과 발맞춰 개편해 주시고, 권 부장님은 총괄상품기획실로 조직명을 바꾸시면서 영업과 상품 기획 업무를 동시에 맡아 주세요.”

“헉! 저도 승진하는 겁니까?”

“혁신 제품도 안 내놓고 승진하시면 안 되죠. 내년에 상품 기획 잘하시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미 권 부장은 상품 기획 임원이나 마찬가지다. 고객 요구 사항을 이처럼 섬세하게 제품으로 옮겼는데 조직을 거느리게 함은 당연하다.

“말이 나온 김에 나운영 부장도 내년엔 제조실장으로 발령 내도록 하지요. 공장 건설이며 폐수 처리장이며 온갖 업무를 잘해 왔잖습니까? 동의하시죠?”

“하하, 나 부장에게도 축하 전화를 해야겠군요.”

“제가 말씀 전하겠습니다, 회장님.”

오 이사와 김 팀장이 쌍수 들어 환영했고, 권 부장은 환하게 웃으면서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나요, 권 부장님?”

“아, 제가 나 부장과 좀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영업팀장으로서 원가 절감을 요청했더니 무척 난감해하더군요. 반도체 집적도 때문에 공정은 늘어나고 인건비 비중이 높아지는데 경비 절감이 여의치 못하니 책임과 고민이 너무 크다고 말입니다.”

나운영 부장은 내게 따로 할 말이 있었군. 그래서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거다. 괜히 개발팀에 딴죽을 거는 모양새가 될까 봐 말이다. 그 말을 지금 권 부장이 대신해 주는 꼴이고.

“으흠, 애플이 가격 인하를 요청하고 있나 보죠?”

원가 대비 가격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제품이라면 에그박스와 아이팟밖에 더 있나.

“인하 요청이라기보단 상승폭 제한입니다. DRAM, 플래시, GPU 등등 모든 부품이 업그레이드되면서 가격이 올랐는데, 제품 출고가는 인상률을 최대 9%로 한정하는 계약서를 보내왔습니다.”

하긴 스티브 잡스도 남는 장사를 해야지. 소비자들이 받아들이는 가격 상승은 10% 정도가 적정선이다. 이래서는 스티브 잡스가 원래 역사대로 중국으로 조립 공장을 넘기게 될 것이 뻔하다. 부품 생산 단가를 낮추겠다고 하루아침에 공장을 서너 개씩 세울 수도 없고, 결국 나도 인건비 절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건에도 시중쉰을 껴 넣어? 아니야. 시중쉰에게 약은 충분히 먹였어. 이권을 더 주는 것은 낭비인 데다 오히려 그가 수면 밖으로 드러나게 만들 수도 있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회장님, 혹시 개성공단에 조립 업체를 두는 것은 어떤가요? 인건비가 확 줄 겁니다.”

권 부장이 조심스레 대안을 꺼냈다. 요즘 분위기에서 누구나 떠올릴 법한 아이디어다. 문제는 너무 불안하다는 것. 제조업에서 수급 밸런스가 깨지면 대책 없다. 물류의 안전은 원가 절감보다 백배는 더 중요하다.

“북한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믿어서도 안 되고요. 개성공단에 입주하는 중소기업과 달리 우리 사업은 수급 체계가 매우 빠듯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低)수율 웨이퍼를 생산에 투입하면 납품 리스크 없이 단가를 낮출 수 있지 않을까요? 솔직히 갑자기 공장이 멈춰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

나는 저수율 웨이퍼 소리에 머리가 퍼뜩 깨어났다. 회귀 전에 내가 했던 일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불법 회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인력으로 합법적인 생산을 하는 거다.

“권 부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수율 웨이퍼는 폐기하는 게 오히려 이득입니다.”

김 팀장이 훅 끼어들었다. 개발자는 저수율 웨이퍼가 이슈 되는 것을 극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공정상의 문제로 양품 반도체가 15% 이하로 존재하는 웨이퍼이기에 개발팀의 치부다. 그걸 반도체 조립 공정에 투입하면 단위 시간당 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져 버리니까, 대량생산 체제에서는 오히려 생산 원가를 상승시키는 짓이다.

“김 팀장, 그건 우리 얘기예요. 북한처럼 인건비가 저렴하고 공장 임대료조차 국가에서 보증하는 곳에선 전혀 다른 얘기라고요. 남는 장사가 됩니다.”

내가 하고픈 말을 권 부장이 대신 해 줬다.

“단가가 얼마나 떨어지나요?”

“생산하면 보너스나 다름없기에 원가 절감 효과는 4%쯤 됩니다.”

“4%!”

“헉!”

“오오오!”

나는 물론, 오 이사와 김 팀장마저 놀랐다. 제조업에서 원가 절감률 4%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대체 저수율 웨이퍼 수량이 얼마나 되기에 그럽니까?”

“현재 월 1만 장 정도입니다. 생산량의 5% 정도는 메워 줄 수 있을 겁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생산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긴 8인치 웨이퍼로 월 20만 장을 양산하고 있으니 1만 장 정도 저수율 웨이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개성공단이 멈춘다 해도 수급에는 전혀 문제없는 물량입니다.”

권 부장은 정말 실행하고 싶은지 말을 이었고,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안전장치만 있으면 이거 대박인데. 반도체 부품 단가를 4%나 낮추는 일이야.’

운영할 수 있으면 대박, 없어도 본전. 그런 공장이라면 당연히 세워야지. 문제는 안전장치. 즉, 북한이 아무리 막나가려고 해도 아쉬워서 어쩔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알겠어요. 오늘 회의는 이쯤 할까요?”

“회장님, 더 지시할 사항은 없으십니까?”

“11월 쇼 케이스만 잘 준비해 주세요. K 시리즈를 강조하는 타이틀이 좋겠습니다.”

“예.”

“아! 오 이사님은 따로 준비하실 게 있군요.”

“말씀하십시오.”

“연구소 라인 리빌딩할 때가 되었죠? 오래된 순으로 조립 설비를 옮길 준비를 해 주세요. 나 부장과 협의해서 월 웨이퍼 1만 5천 장 생산 가능토록 장비 대수를 맞춰 주세요.”

“오… 알겠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오 이사야 좋아할 일이다. 연구소 라인은 언제나 최첨단을 달리기 마련이기에 예전 장비가 수두룩하게 쌓인다. 게다가 스마트 클라우드의 초창기 3층 건물에 구닥다리 조립 설비가 잔뜩 쌓여 있다. 단위 시간당 생산량(UPEH)이 좋지 않아 언젠가 처분하려고 했던 장비들. 그걸 옮겨 가면 개성공단에 설비 투자를 따로 할 필요도 없다.

    • *

나는 대회의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달력부터 확인했다. 아마 왕회장이 소 떼를 한 번 더 몰고 가는 때가 10월 말이었을 거다. 오늘은 9월 28일! 시간은 충분했다.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정헌몽입니다.

“유수한입니다, 정 회장님.”

-오, 웬일인가?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하, 제가 전화하면 큰일부터 걱정하십니까?”

-하하, 아니라곤 못 하겠군. 솔직히 가슴이 철렁한다네.

“오늘 전화드린 건 그런 일이 아닙니다. 아주 느낌이 좋습니다.”

-무슨 일인가?

“왕회장님께서 북한에 한 번 더 가기로 하셨지요?”

-그러네. 아마도 10월 27일에 가실 거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10월에는 기존의 액셀을 버리고 럭셔리한 다이너스티를 몰고 방북한다.

“제가 동행했으면 합니다.”

-유 회장이 직접? 놀랄 일이군. 정치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정치와 경제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힘들죠. 달리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있겠습니까.”

나는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솔직히 경제는 정치, 역사, 사회, 문화, 심지어 예술 문제와도 연관된다. 현대사회에서 돈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회현상은 없으니까.

-북한에 무슨 제안을 하려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개성공단에 반도체 조립 공장을 지으려고요. 조그맣게 말입니다.”

-오호! 정말 의외로군. 스마트 클라우드가 직접 공장을 세운다니.

정 회장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공장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번 방북 때 왕회장님은 제가 잘 모실 테니 정 회장님은 쉬십시오.”

-고맙네. 방북이 생각보다 부담스럽고 힘들었다네. 자네도 매사 신중하시게.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생각대로 정헌몽 회장은 나의 방북에 동의했고, 왕회장은 물으나 마나 허락할 것이 당연하다.

삐리릭. 삐리릭.

나는 오랜만에 국제전화도 걸었다.

-헬로.

“재훈이냐?”

-어! 수한이냐?

“응. 잘 지냈어?”

-이야, 이 미친놈아, 이제야 전화를 하냐? 외환위기 때 그리 전화를 해도 안 받더니.

재훈이는 몇 번이나 나를 돕겠다고 했다. 내가 허락하지 않았고 그 뒤로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재훈이의 파이오니어 지분은 나중에 백 배 가까이 오를 텐데 팔기엔 너무 아까웠으니까.

“너 일 좀 해라. 북한에 인터넷 좀 깔자.”

-뭐? 미친놈. 북한에 무슨 인터넷을 깔아!

“북한 전역을 말하는 게 아니야. 개성공단까지만 깔자. AT&T에서 국제 회선 하나만 받아 와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무슨 이득이 있다고 북한에 인터넷을 깔아!

재훈이를 이 판에 끼워야 한다. 북한에 인터넷을 깔만한 기술력은 파이오니어밖에 없다. 파이오니어의 보안 로직은 파이오니어 본사도 해킹 못하는 매우 중립적인 보안망이다.

“너 VOD 사업이라고 들어 봤냐? 요즘 내가 MS랑 얘기하고 있는 사업이다.”

-VOD? Video On Demand?

재훈이는 전문가답게 알아챈다. 내가 나서면 단박에 돈이 될 아이템인 것도 당연히 알 거다.

“사업 검토는 나중에 하고, 내 요구 조건은 아주 간단하다. 네 회사도 미국 회사니까 내 보험 노릇 좀 해라.”

-보험?

“개성공단 문 닫으면 인터넷 기간망 투자도 날아가잖아. 네 인터넷이랑 내 반도체 공장이랑 같이 묶자.”

전화기 너머로 재훈이 녀석이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수한아, 내가 네 덕분에 부자가 됐지만 북한은 아닌 것 같다. 손을 담그기엔 너무 위험해. 너도 정치를 가까이해서 좋을 것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러냐.

“정치를 멀리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해. 하지만 아무리 내 전략이 그렇다 해도 사업이 커지면 정치와 100% 무관할 수는 없어. 어차피 그렇다면 오히려 정치를 이용해서 위험을 최대한 비껴가는 게 현명해.”

-북한에 투자하는 게 무슨 회피 전략이냐? 내 눈에는 무모해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는 게 아니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걸 중국에 바로 넘기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래.”

-중국 얘기는 왜 나오냐?

“재훈아, 큰 그림을 그려 줘. 난 제조업이야. 물건을 만들어야 수익이 나오지. 내 사업이 아무리 부품 위주라 해도 최종 제품 생산이 완전히 남의 손에 넘어가면 주도권을 잃을 수밖에 없어.”

-애플 얘기냐?

재훈이는 바로 감을 잡는다. 내가 에그박스와 앰팩을 스티브잡스에게 넘겼다는 것은 재훈이도 알고 있다.

“그렇지. 결국 싼 인건비를 핑계로 중국으로 조립 업체가 넘어가면 얼마 안 가서 부품도 자체 조달하기 마련이니까. 그럼 마케팅 능력을 높이 사서 애플에 라이선스를 넘긴 효과가 사라진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막아도 벌어질 일이야. 가치 사슬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 제조업은 결국 중국이 다 먹을 거야.

녀석, 미국 물 좀 먹더니 앞을 내다보는 눈이 많이 밝아졌다. 21세기 용어로 하면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지.

“용인밸리는 내 그룹이나 마찬가지야. 대안이 필요해. 저수율 공정, 노동집약적 공정 일부만 개성공단에 심으면 중국 제조업 폭발을 늦출 수 있어. 솔직히 10년만, 아니 5년만 지연시켜도 대한민국엔 충분하다.”

-애국자 납셨네. 우린 사업가지 정치인이 아니야. 정신 차려.

“야이, 누가 정치한대? 대한민국은 내 권역이라고. 네가 시카고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단 말이야. 애국이고 나발이고 일단 내 집은 지켜야 하고, 중국 공장의 대안은 가지고 있어야 해. 이 형님 좀 도와! 이거 생각보다 원가에 엄청 도움 되는 일이라고!”

-다시 생각해. 결국 개성공단은 정치적으로 폐기될 거야. 그러니 너도 제조업만 고집하지 말고 중국에 뺏기는 일거리만큼 IT 소프트웨어로 사업을 이전시켜. 그게 답이야.

재훈이가 달리 보인다. 녀석도 명확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소프트웨어 사업가로서 미국 산업 전반이 어디로 향하는지 꿰뚫고 있다. 그런 방향이 반도체 시장을 얼마나 키울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개성공단 폐기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내 공장은 그 리스크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어. 운용하면 대박, 폐쇄되면 본전이야.”

-폐쇄돼도 본전이라고?

“그래. 실질적인 목적은 애플의 중국 조립 공장 설립을 지연시키는 거야.”

애플만 지연시키면 된다. 차후 애플이 얼마나 커질지를 알려 줄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스마트폰은 애플과 같이 시작하는 게 전략상 굉장히 유리하다.

MS, 노키아, 모토롤라 등도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안드로이드를 알려 줄 바엔 극히 어렵더라도 차라리 내가 혼자 시작하고 만다. OS를 양분하며 스마트폰 시장의 파이를 폭발적으로 키워야 한다. 중국 IT 제조업의 태동을 조금만 늦춰도 내 시장 장악력은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재훈이의 침묵이 길어졌다.

-형님~ 한 번 도와주세요! 라고 해 봐. 그럼 손 담근다.

그러곤 튀어나온 소리가 뜬금없다.

“미친놈. 누가 형님인데? 내가 생일이 더 빨라!”

-후후후, 정신연령은 내가 더 높잖아.

재훈이 녀석이 농담을 시작했다는 것은 내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의미다. 어디까지 본 걸까? 솔직히 상관없다. 몇 년만 지나면 명확하게 알게 될 테니까.

“어허, 감히 인터넷 회사 주제에 제조업 형님을 물로 봐. 너 그러면 부자는 몰라도, 재벌은 못 된다. 재벌 안 하고 싶은가 보지?”

-코호. 협박하는 거냐?

AT&T한테서 국제 인터넷 회선 하나 정도는 충분히 가져올 능력이 되는 녀석이다. 이래저래 AT&T를 이 판에 끌어들일 거다. 버지니아 트레이딩, 파이오니어, AT&T, 그리고 애플까지. 적당히 엮으면 보험은 확실하다.

“끊는다. 10월 중순까지 AT&T 국제 인터넷 회선 하나는 꼭 가져와야 해.”

-마, 내 얘기 안 끝났어. 왜 10월 중순이야? AT&T는 뭐라고 설득해야 해?

“네가 알아서 해. 대신 닥터 케이슨을 만날 빌미는 알려 줄게. 개성은 북한의 군사 요충지야. 거기에 공단을 조성하면 남북 긴장은 확 풀어진다고. 정치적으론 도움이 될 거다.”

-헉!

“AT&T가 핵심이 아니야. 미 대통령 특별 자문 역인 닥터 케이슨이 핵심 인물이야. 정치 문제는 정치로 접근하라고.”

-으윽, 자칫 우리 물주들 투자금 날리는 거 아냐?

“뭔 소리야. 대북 사업에 대형 투자는 절대 안 되지. 개성까지 회선하나! 수백억 수준에서 투자해야지. 여차하면 회선 끊어야 한다니까! 그게 보험의 핵심이야. 정말 끊는다.”

-우, 일이 그렇게….

툭.

나는 전화를 끊었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이득으로 큰 그림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리라. 중국에 공장 세우면 발 빼기 어렵다. 북한의 인건비를 최대한 이용했다가, 여차하면 발 빼면 된다. 외려 자유도가 높다. 핑계는 정치권에서 수도 없이 만들어 줄 테니까.

    • *

한 달 뒤, 평양 근처 공동 농장.

나는 왕회장을 따라 북한으로 올라왔다. TV에서는 한차례 방송을 하긴 했지만 6월 달과 달리 대대적인 특보 형식은 아니었다. 덕분에 내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아주 잠시였다.

음매~ 음매~

소들이 불안한지 연신 울어 댄다.

털컹덜컹.

두두두두… 음매~ 음매~

“천천히, 천천히! 소들이 놀라면 안 됩니다. 트럭 문을 하나씩 여세요.”

이번 대북 방문은 대현그룹의 서산 농장 사람들도 같이했다. 1차 소 떼 전달 때 암소들이 새끼를 낳다가 폐사한 경우가 간혹 있어, 북한 농장 관리인에게 기술 지도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놀란 소들이 농장 방목장 쪽으로 흩어져 나간다.

“허허, 조금 더 늦었으면 이 녀석들이 뜯을 풀이 전혀 없을 뻔했어.”

“왕회장님, 소 떼 501마리는 무슨 의미인가요? 500마리도 아니고?”

나는 왕회장이 끌고 온 소 떼 숫자를 물었다. 풍문으로만 듣던 그의 의도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으음, 불안해서…. 숫자가 딱 떨어지면 마지막 거래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한 마리를 더하면 김 위원장이 내 의도를 알기라. 이 거래는 이어져야지. 내 서산 농장에 아직 소 3천 마리는 더 있다.”

“그러셨군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왕회장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다르긴 하다.

“니도 조립 공장 하나 세운다면서?”

“예.”

“헛거래 안 되게 의도를 전해 바라. 우리는 정치꾼이 아니고 장사꾼이다. 안 그러나?”

“그래야죠.”

“내가 떠들썩하게 만들어 놨으니까 웬만한 건으로는 니를 겁박하지 못한다. 확 질러 봐라.”

“하하하! 든든한 보험이십니다, 왕회장님.”

“이곳 전기며 수도를 모두 우리나라랑 연결시킬 기다. 수틀리면 끊으면 된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죠.”

북한이 아쉬워할 것들이 개성공단에 꽤나 모여들었다. 해 볼 만하다.

왕회장은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농장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의 인생에 이건 마지막 사업.

잘되든 잘못되든 이 사업의 끝을 알기 전에 눈을 감을 것이다. 평화로운 소 떼를 눈에 담아 가는 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 *

1998년 10월 30일. 평양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김정일과 면담이 벌써 두 번이나 미뤄졌다. 시답잖은 사람 애태우기 전략이라 웃음부터 나온다.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왕정정치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김정일이 바쁘면 다른 사람이 면담하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똑. 똑.

“누구십니까?”

“존엄하신 민족의 영도자이시자 위대한 국방위원 장군님께서 친히 뵙겠다고 하십니다. 준비하십시오.”

군복을 차려입은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한다. 지금 시간이 밤 10시 25분,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뭐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찾아온 것이 호의라면 호의라고 여길 수는 있겠다. 한데 나는 짜증부터 난다. 확실히 이성적으론 이용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곳이 북한이다. 호칭부터가 전근대적이며 병신 같잖아. 그걸 자랑스러운 어투로 내뱉는 이들은 더욱 병신 같다.

“가십시다.”

“예, 왕회장님.”

왕회장은 내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앞장을 섰다. 내가 오늘쯤 연락이 올 거라고 해서 이미 준비를 마쳐 둔 상태였으니까.

척! 척!

“어서 오십시오. 늦은 시간인데 아직 깨어 있어 다행입니다.”

이름 모를 군바리가 절도 있는 경례와 함께 우리를 김정일 앞으로 안내했고, 김정일은 경례를 받지도 않고 양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했다. 능구렁이 정치가.

“이제라도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왕회장은 깍듯이 인사를 하며 화답했다.

“지방으로 현지 지도를 하느라 이제야 시간이 비었습니다. 정 선생이 이해 바랍니다.”

김정일의 사람 속 태우기 전략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다. 결국 나중에 볼일 다 봤을 때는 대현 총수 일가를 만나 주지도 않았지.

“현장 지도보단 개성공단 협의가 백배는 중요합니다. 장군님께서 사안의 경중을 착각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헉, 수한아!”

“…….”

나는 나름 도발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김정일이 정치적으로 우리를 대하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뭐, 이런 도발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이번 한 번뿐일 테고.

옆에 서 있는 군바리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김정일은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장군님하고만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회의록 써서 공표할 일도 아닌데….”

“유수한 동지! 지금 당신이 누구 앞에 있는지 알고나….”

“그만! 나가 봐!”

김정일의 단호한 말에 경호하던 군인이 얼어붙는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도 척! 하니 경례를 하더니 절도 있게 문밖으로 나갔다. 나를 쏘아보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이 회의를 마치면 왕회장과 함께 바로 판문점을 넘어서 돌아갈 테니까.

옆에서 듣고 있으면 김정일이 자세가 안 나온다. 위대하신 수령이 한낱 남한의 자본가와 거래하는 꼴을 보면 좀 그렇잖나.

“감사합니다.”

“그래,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

“개성공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한민국 직원들의 안전입니다. 일단 그것부터 장군님의 확답을 들었으면 합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개성공단에서 인명 사고가 난 적은 없다. 그래도 대답은 들어야지 싶다.

“당연하지. 그런 기본적인 걸 말하고 싶어 독대를 원했나?”

“기본이라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개성공단을 정치와 분리해 주십시오. 10년은 버텨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남한 정부의 의지 아니겠나?”

“장군님의 의지도 필요하죠.”

“대규모 투자를 하면 자연 해결될 일이 아닌가?”

정치가답게 돈 얘기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말려들면 안 된다.

“대규모 투자는 정치 여건상 어렵습니다. 외려 섬유 공장처럼 물건이 곧 돈이 되는 사업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전자 제품 조립처럼 원부자재 구입과 완제품 판로가 확보되지 않으면 돈이 안 되는 사업 위주로 입주를 종용하고자 합니다.”

“수, 수한아… 말을 가려서 하거라.”

내가 도발에 가까운 말을 또 꺼내자 왕회장의 얼굴색이 파리해졌다. 괜찮다. 김정일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사업 계획서를 보면 뻔히 드러날 걸 숨기려다 일만 커진다. 솔직히 나도 도발의 수위를 제어하느라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잠시도 쉬지 않았던 이미지 트레이닝이 도움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건 남한의 지도자와 협의할 일이야.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지.”

여기서 물러서면 김정일은 가면 뒤에 숨어 정치꾼으로 얘기한다. 그의 밑에 있는 북한 당원들은 이걸 위대하신 수령 동지의 기만전술로 여기며 언제든지 판을 뒤집을 수 있다. 기회는 이번 한 번뿐, 물러서면 손해다.

“돈의 대부분은 제 주머니를 거칩니다. 미국 은행도 연결시키고 공장을 지을 사람도 저니까요.”

첫 단추를 잘못 끼울 바엔 지금 관둬야 한다.

“아이고, 수한아….”

왕회장이 몸을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어 댈 정도였다.

“뭘 원하나?”

그런데 대뜸 김정일이 훅 하고 치고 들어왔다. 넘어가면 안 된다.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10년간 공단 유지에 최선을 다하시는 겁니까?”

“이미 공단 유지는 남한 정부와 합의한 사항이야.”

“상황은 변합니다. 핵 개발이든 미사일이든 서해 도발이든 파투 날 일은 많지 않습니까? 장군님이 정치와 개성공단을 분리하지 않으면 5년도 못 갑니다.”

나도 훅 하고 치고 들어가니 김정일도 깜짝 놀란다. 표정 관리하는 데 몇 초 정도가 지나간다. 난 정치고 통일이고 상관없다. 북한이라는 패가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이리저리 굴려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게 10년 정도는 되어야 내가 인건비에서 경쟁력을 가진다.

“신중히 검토하도록 하지. 한데 어째서 10년인가?”

“남한은 수십 년의 적, 일본은 백 년의 적, 중국은 천 년의 적이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해당 문구는 죽은 김일성 주석이 말년에 했던 말이다. 그는 중국이 세계 경제의 수면 위로 떠오를수록 북한에 호의적이지 않게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교육받은 김정일도 당연히 안다.

“천 년의 적, 중국이라….”

“개성공단 10년만 돌리죠. 그 정도면 중국 IT 제조업체 태생을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남북한 모두에게 득이 됩니다. 현금이 돌고 무엇보다 북한 식량 문제가 해결됩니다.”

“식량은 원조로도 해결 가능한 일이야. 대가가 부족해.”

식구들 밥을 얻어다 먹일 생각을 하다니. 김정일은 개성공단 운영의 대가가 식량 문제 해결 정도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제 사업은 반도체 조립 공장입니다. 안정적인 전력과 수도가 꼭 필요한 사업이죠. 이걸 남한 쪽에서 해결합니다. 심지어 인건비는 달러입니다.”

“좀 더 확실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해.”

“더 이상은 힘듭니다. 미사일 발사 시험 몇 번이면 개성공단은 금세 멈추는 곳입니다. 이런 위험한 곳에 대형 투자는 기업가에게 미친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투자 대비 수익이 확실하다면 투자하지 말래도 할 겁니다. 이런 확신을 주는 것이 위원장님 몫입니다.”

“결국 하는 걸 봐서 차근차근 하겠다?”

김정일은 무던히 참는다.

“개성공단 운영 협의안입니다. 신중히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이쯤에서 김정일이 서명을 해 주면 일이 쉬워질 텐데.

“남한 정부와 협의된 사안인가?”

“일단 대통령께 보여 드리긴 했습니다.”

나라고 한 달을 그냥 보냈겠나? DJ, 재경부 총리, 통일부 장관 등등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초안을 작성했다. 기업가인 내가 나서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이는 모양새가 좋다. 여차하면 정부는 북한과 거래한 적이 없다고 손을 떼면 되거든.

“결국 이면 계약이란 말인가?”

“서로 수틀리면 언제든지 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신 전기, 수도, 국제 은행 전산도 한꺼번에 닫히는 것을 감안해 주십시오.”

“우리의 이득은?”

“인당 월급 80불. 상황을 봐서 100불까지는 점진적으로 인상토록 하죠.”

“자본가의 착취야.”

착취가 아니라 북한의 유일한 경쟁력이다. 10년 동안 100불의 인건비를 유지할 수 있다면 10년 뒤 조립 공장 하나쯤 날아가도 이득이다.

“개성공단 매출은 3년 내에 20억 불, 5년 내에 50억 불까지 갈 겁니다. 보너스는 차후 협의하시죠.”

“보너스… 비료 지원 말인가?”

보너스라는 말에 김정일은 식량이나 비료 같은 물품 지원을 떠올리는 것 같다. 식량 문제가 심각하긴 한가 보다. 하지만 그런 단발적인 보너스를 줘서는 안 된다. 언제나 뇌물은 기브 앤드 테이크가 되어야 지속성이 생긴다.

“개성공단은 남북 합작 회사! 생산 목표와 출하량이 엄격히 통제됩니다. 원부자재와 완제품 목표치도 미리 정해질 겁니다. 한데 작업자가 정해진 목표치를 초과하면 어떨까요? 불량률을 줄이거나, 작업량을 늘이거나, 무슨 방법으로든.”

“……!”

“두 가지 모두 곧 돈이죠.”

“……!”

나는 내가 제의할 수 있는 최고의 뇌물을 꺼내 놓았다.

    • *

1998년 11월 2일.

“조심, 조심! 좀 더 왼쪽으로, 그렇지. 조금만! 됐어. 이제 놔!”

쿵!

지게차가 비닐로 단단히 감아 놓은 장비를 무진동 트럭으로 옮기고 있다. 3층 건물을 통째로 비우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동원된 트럭만 수십 대다.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설비 이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닥다리 설비이긴 하지만 엄연히 생산이 가능한 기계들이다. 무엇보다 용인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애지중지하던 장비들이라 엔지니어들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묻어난다.

“나 부장님, 아쉬워요?”

“쩝, 그보단 시원섭섭하다고 해야지요. 그렇다고 개성공단에 신규 설비를 투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셋업 인원은 몇 명이나 보내기로 했나요?”

“50명으로 했습니다. 코딱지만 한 조립 공장 셋업 하는 데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하, 코딱지만 하다니요. 그래도 개성공단에서 제일 큰 공장인데.”

“하도 큰 공장만 셋업하다 보니 이제 웬만한 공장은 눈에 안 차서 말이지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실사는 다녀왔죠?”

“올해 말까지 셋업 완료하겠습니다. 벌써 개성공단에 입주할 건물은 완성됐고 유틸리티도 연결되어서 문제없습니다. 게다가 반도체 패키지 공장이라 그다지 어렵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2천 평 규모의 공장이라지만 벌써 건물을 다 짓고 유틸리티도 연결이 되었다고? 토목 공사를 시작한 지 4개월 남짓인데, 대현건설이 정말 일을 잘한다.

“공장 셋업하면 북한 엔지니어들에게 설비 운용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처음 반년 정도는 우리 쪽에서 전담하고, 나중에는 그쪽에서 자체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북한이라는 껄끄러운 존재는 최대한 시간벌이로 이용하며 언제든지 공장이 날아가도 된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자체 운영이 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반도체 칩 제조가 아니라 반도체 패키지라는 후공정이라 기술 노출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음, 구닥다리 설비라 장비 에러나 부품 교체 같은 일이 비일비재할 텐데요.”

“우리 쪽 인원을 20명 정도 상주시켜 일 처리를 해 보죠. 두 달 간격으로 로테이션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운영 부장이 가슴을 텅텅 치며 알아서 하겠다고 한다. 이 양반도 이제 재량권이 커졌다.

나 부장의 일 욕심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억대 연봉에 인센티브도 그 못지않으며, 심지어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까지 1%나 가지고 있기에 갑부나 다름없지만 일을 놓긴 싫겠지. 맡은 일에서 나오는 권력은 마약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몇억 원어치 생산 물량이 오락가락하는데 그 짜릿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잘 부탁합니다.”

여하튼 일 하나는 끝장나게 잘하니 회사에서 두루두루 인정받고 있으며, 반도체 공장 셋업에 관한 한 한국에서 최고 권위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고졸 출신의 생산 엔지니어들에게 나 부장은 우상이나 다름없다.

또각또각.

“수한 씨, 전화 좀 받아요. 한참 찾았잖아요.”

나 부장을 떠나보내고 잠시 혼자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날 찾았어?”

휴대폰을 꺼내 보니 부재중 통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

“내게 시간 좀 내주세요.”

“그래, 그러지 뭐.”

케이가 눈을 찡긋찡긋하기에 자연스레 그녀와 따로 걷기 시작했다. 여기 공장에서 본사 사무실까지는 산책 겸 걸어갈 만한 거리다. 늦가을이라 날씨도 좋고.

또각또각. 뚜벅뚜벅.

“개성공단 자금 운용은 버지니아 트레이딩에서 맡기로 했어요. 이름은 ‘슬기금융’으로 했고요.”

대뜸 꺼내는 말이 희소식이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개성공단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 재훈이도 석 달 이내로 인터넷을 연결한다고 연락해 왔으니, 보험은 완료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야, 슬기그룹에 합류한 거 축하해.”

“처녀금융보다 나은 이름이었을 뿐이에요.”

개성공단에 들어설 때 회사 이름으로 영어를 쓸 수 없었다. 내 조립 공장은 ‘슬기전자’로 정했으며 케이는 ‘처녀금융’ 또는 ‘슬기금융’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여하튼 고생 많았어.”

“수한 씨, 공짜는 아닌 거 알죠? 이제 중국의 5개 이권은 사정권에 들어온 거 맞죠?”

“그럼, 당연하지. 우리가 개성공단 세우는 이유가 뭔데. 돈 벌자고 하는 짓이잖아.”

11월 11일이면 DJ가 중국을 국빈 방문 한다. 개성공단 설립을 두고 서로 도장을 찍을 거다. 정부에서는 나와 경제 단체장들을 초대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중국에서 행하는 일은 웬만하면 이 실장을 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일관성이 있으며, 내게 일이 몰리지 않는다.

중국 정부가 대북 긴장 완화의 조건으로 한국 정부에 내세운 것은 총 다섯 가지. 핵발전소 건설 참여, 완성차 조립 공장 건립 허용, 이동통신 및 인터넷 인프라 사업 참여,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금융 기관의 위안화 영업 허가,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고속철도 건설 참여다.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그중에 세 번째와 네 번째에 참여하고 싶어요.”

“통신 사업이랑 금융 사업 말이군.”

“예, 맞아요.”

“두 가지나 하겠다고? 너무 욕심이 큰데? 이미 MS 윈도우 판권의 7.2%를 먹기로 했잖아.”

MS 수익의 40%를 내가 가지기로 했고, 그중 10%를 시중쉰에게 떼어 주며 그다음 20%를 케이에게 준다. 계산이 복잡하지만 케이 몫은 7.2%이며 꽤나 큰 이권이다.

“통신 사업의 지분을 욕심내는 게 아니에요. 중국 본토에 버지니아 파이낸스를 입점시킬 테니 수한 씨의 차이나유니콤 지분과 자금 운용, 시중쉰 일가와 대현그룹의 자금 운용까지 맡았으면 해요. 도와줘요.”

“버지니아 파이낸스?”

“수한 씨 덕분에 버지니아 트레이딩도 덩치가 꽤 커졌어요. 내년부턴 스마트 스토어를 중심으로 무역 사업체는 버지니아 트레이딩으로 두고, 회계와 법무 사업은 버지니아 로직스, 그리고 대망의 상업은행 업무는 버지니아 파이낸스로 분리하려고 해요.”

케이는 엄청 감격스러운지 두 주먹을 쥐고 마구 흔들어 댔다. 내가 스마트그룹을 만든 것처럼 케이도 그룹을 만들겠다는 거다.

“투자 회사가 무슨 상업은행을 겸업해?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은 엄연히 분리가 되어야 한다고.”

“그건 한국법이죠. 미국 회사는 내년부터 합법적으로 투자회사가 상업은행까지 겸업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개성공단의 ‘슬기금융’은 그래서 세울 수 있는 거라고요. 아주 멋진 그림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고 보니 케이는 한국에서 은행 사업권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 미국에서 금산분리법이 개정되는 게 1999년이었나? 하긴 그래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접수할 수 있었지. IMF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이때쯤이 맞나 보다.

어찌 되었든 케이에겐 행운이 따르고 있다. 중국의 네 번째 제안이 케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 수수료 깎아 줄 거지?”

“고객님께서 대현과 시중쉰 일가를 끌어당겨 주신다면야!”

“하하하, 내 이름 팔아서 두 군데 접촉해. 스마트그룹은 중국 거래에 한해서는 거래 은행을 버지니아로 바꾸지.”

사업 계획이 아주 탁월하다. 중국이 내건 제안 중 세 가지는 대현이 적극적으로 달려들 테니 유동자금이 조 단위로 돌아다니게 될 거다. 내가 주거래 은행으로 버지니아 파이낸스를 이용하면 시중쉰과 대현도 자연스레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호호호! 역시 수한 씨는 대인배예요.”

“5억 불 투자해 줘서 하는 거야. 10년 동안은 개성공단 잘 돌아가게 해 줘.”

“뭘 걱정해요. 유수한이란 사람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할 텐데. 나야 환전만 잘해 주면 되는 거고.”

“허!”

나에게 내가 잘할 거니까 걱정 말라고 한다. 협박인지, 부탁인지. 게다가 5억 불은 안중에도 없다. 하긴 개성공단 건을 물고 들어가 한미 양측에 은행 사업을 인가받았으니 케이는 그것만으로도 크게 남는 장사다.

뚜벅뚜벅.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무실 건물까지 오다 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든다.

“케이, 계열 분리하려면 돈이 좀 필요하겠네? 나는 대한민국 금산분리법으로 은행지분을 가지기 어려우니까, 이참에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 비율을 높여야겠군. 케이 지분이 30%지? 절반만 내게 넘겨.”

“어머, 저 돈 많아요. 계열 분리 정도는 알아서 해요.”

“설마 내게 버지니아 로직스나 버지니아 파이낸스 지분을 안 주려고 했어? 열혈 동업자인 케이 님께서?”

“그건 아니고요. 줘 봐야 관심 없을…. 아니, 은행 지분은 가지지도 못하잖아요.”

“사업체가 하나일 때야 대주주와 사장이 동일해야 하지만, 그룹이면 다르지. 내가 버지니아 트레이딩 1대 주주가 된다고 해서 케이가 버지니아 그룹 회장이 아닌 게 아니잖아?”

“으음, 으음… 그건 그런데….”

“나는 케이를 믿지만 돈이란 냉정하잖아? 버지니아 그룹이 커져도 스마트그룹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는 보험이 필요해. 특히 대안을 찾기 쉬운 회계나 은행 거래면 몰라도 물류는 아니야. 그러니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지분이 꼭 필요해.”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말을 할수록 케이는 울상이 된다. 버지니아 그룹에 내 기여도가 절대적이니 거절하기 어렵다. 그룹으로 성장한 것도 솔직히 내 덕분이잖나. 물론 나도 케이 덕을 많이 봤지만.

“내 지분 25%, 케이 지분 15%.”

“똑같이 20%씩 하면 안 돼요?”

“안 돼. 10%는 차이가 나야 나에게 보험 역할을 하지.”

“5%도 극복 불가능한데…. 22.5%, 17.5%로 하면 안 돼요?”

“우린 둘 다 소수점 싫어하잖아. 25 대 15.”

“그럼 23 대 17이라도….”

“외우기 힘들어서 안 돼.”

“우우….”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 변경은 계열사 지분 교환으로 처리해 줘. 세금 많이 내기는 싫으니까.”

서류상으로 내가 버지니아 로직스, 버지니아 파이낸스 지분 10%씩을 받아 처분한 걸로 처리하면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 이전 비용은 대고도 남을 거다. 나는 가벼운 허그로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망했어… 어설프게 말 꺼냈다가 망했어.”

“하하하. 그게 망한 거면 망하고 싶은 사람이 부지기수겠다.”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 15%를 넘기는 일은 현 시세로 따지면 3조 가까이 되는 돈을 증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내가 증여받은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을 팔 것도 아니고 나라는 존재가 대주주로 있으면 외려 계열사 설립에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케이도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기에 말은 이리하지만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할 거다.

“안 되겠다. 쇼핑이나 하러 가야겠다.”

케이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휙 하니 사라졌다. 그래, 큰 거래를 했는데 쇼핑해야지. 나는 케이가 차를 몰고 사라지는 쪽으로 손을 흔들어 주고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회사 덩치가 커지다 보니 내 결정 하나에 천문학적인 돈이 오간다.

    • *

뚜벅뚜벅.

산책을 빙자해 장비 이전도 살피고 케이도 만나고 자리로 돌아오니 내 사무실 앞에 오 이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다.

“회장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쇼 케이스 건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대회의실에서 최종 시연도 보여 드릴 겸.”

“저번 시연과 크게 달라진 게 없으면 따로 보여 주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저도 시카고 쇼케이스에 참석할 겁니다.”

“아, 그러십니까?”

올해는 꼭 미국으로 가야 한다. 1998년 말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거든. IT 버블이 터지기까지 불과 1년 반 정도밖에 안 남았으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한다. 간 김에 빌 게이츠에게 VOD 사업성도 증명을 해 줘야 하고 말이다.

“그럼요. 올해는 군대나 컨소시움에 속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그럼 여기 최종 제품과 팸플릿만 두고 가겠습니다.”

“그래요.”

오 이사는 회장실로 들어와 탁자에 제품을 두고 돌아갔다. 나는 이것저것 뒤적거려 보다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작동시켜 보았다. 조너슨의 작품이라 외형이며 직관적인 유틸리티가 흠잡을 곳이 없다.

연속 촬영 모드로 동작시켜 보니 역시나 작은 캠코더 못지않으며, USB를 통해 컴퓨터와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VOD 사업이 어떻게 돈이 될지 보여 주기엔 이만한 것이 없다. 개인적으로 꼭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것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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