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챕터 5(2) (68/104)

“뭐예요. 왜 숫자가 거꾸로 가요.”

“9 대….”

“아아악! 아니에요, 아니에요. 7 대 3! 7 대 3! 수한 씨.”

“9 대….”

“아아악! 8 대 2! 8 대 2요! 수한 씨.”

“그러게 7 대 3일 때 하겠다고 하지 그랬어.”

케이가 확보한 정보라면 신빙성 100%다. 결국 빌 게이츠는 나와 윈도우 기반의 에그박스를 출시하고 싶은 거다.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다. 다른 사업으로 유도해야 한다.

“8 대 2로도 충분히 만족하옵니다, 수한 회장니임~”

“하하, 알았어.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어머, 그럴 리가 있겠어요? 수한 씨 사업 중에 대박 아닌 게 없었는데!”

“그럼 사업권을 빈칸으로 두고 계약서 작성해 줘. 케이가 먼저 서명해서 나한테 보내.”

“당연하죠! 금방 드릴게요. 호호호!”

케이는 좋다고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내가 맘이 변하기 전에 계약서를 가져오려고 서두르는 것이다. 안 그래도 청와대 가기 전에 케이를 만나야 했는데, 제 발로 찾아와 정보도 주고 계약을 해 주니 좋다. MS와 딜을 하려면 케이의 버지니아 트레이딩이라는 미국 유통사가 꼭 필요하다.

빌 게이츠를 만나긴 해야 할 것 같다. 인터넷 시대는 PC부터 시작을 하니까. 외려 그 자리를 DJ가 주선했다는 점이 마음이 걸린다. 너무 엮이면 위험한데….

    • *

청와대 영빈관.

“오늘 세계 경제의 큰 거목을 모시고 이렇게 자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말 한마디도 통역을 거친다. DJ는 영어를 곧잘 하지만, 정치인은 통역을 통하고 종이에 적힌 연설문을 읽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외려 중요한 자리에선 꼭 그리해야 한다고 말했던 분이다. 말실수가 거의 없었던 사람, 생각이 매우 깊은 양반이다.

“허허, 다들 바쁘신 분들이라 인사치레도 못 하고 본론부터 나누게 됨을 양해 바랍니다.”

“하하, 반가운 말씀이십니다.”

DJ답게 빌 게이츠의 성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는 겉치레를 매우 싫어하고 일 중독자에 가깝다. 한국식 예의보단 비즈니스 대화가 훨씬 그의 구미에 잘 맞는다. 나는 옆에서 정중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 그뿐이었다.

“200억 불 외평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마트그룹과 협의할 사항이 있으시다고요.”

“긍정적이란 대답을 드린 적이…. 여하튼 저는 스마트그룹이 아니라 스마트 클라우드와 협의할 건이 있군요.”

“이 접견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대한민국 정부가 도울 것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DJ는 대통령이 아니라 마치 비즈니스맨처럼 대화를 이끌었다. 외평채 구매를 확답받은 양 처리해 버리고 공을 내게로 넘겼다.

이미 나는 청와대에서 보낸 사전 질의서에 회신을 했으며 빌 게이츠에 대한 정보까지 건네주었다. DJ와 나는 한통속이라고 보면 된다. DJ는 최대한 내게 맞장구를 쳐 주겠다며 판을 깔아 주고 있다.

“미스터 유, 혹시 내가 한국 정부의 초청에 응한 이유를 예측해 볼 수 있겠습니까?”

빌 게이츠는 시작부터 독특한 그만의 대화법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스티브 잡스가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면 빌 게이츠는 대화보다 질문을 좋아했다. 질문과 대답 중에 문제의 핵심이 드러날 것이라는 그만의 철학이다.

두 명의 IT 천재의 대화 철학은 OS의 구조에도 명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Mac. OS는 ‘이런 유틸리티 기능을 쓸 수 있어!’라고 선언하는 식으로 되어 있기에 심플하고 버그가 적은 반면, 자유도가 떨어지는 면이 있다. 그게 반해 MS의 윈도우는 ‘일단 내가 OS를 만들었어. 각 유틸리티를 깔아서 돌려 봐. 아마 돌아갈걸.’라고 하듯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자유도는 높지만, 라이브러리가 계속 늘어나며 무수한 버그들이 존재한다.

“짧게 말씀드리죠. 윈도우 기반의 멀티미디어 기기를 만들고 싶으신 거죠? 에그박스를 넘어서는.”

“으흠, 내 질문이 그리 쉬웠나요? 그럼 그에 대한 답은 어찌 생각합니까?”

“그 대답은 더 쉽군요. 정중히 거절합니다.”

“왜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이미 저는 애플과 계약 중입니다. 비슷한 플랫폼으로 고객을 경쟁시킬 수는 없지요.”

“플랫폼 계약은 엄연히 스마트 클라우드의 몫입니다. 계약은 매년 갱신할 수 있지요. 그게 자본주의 기본이 아닙니까.”

물론 자본주의 기본이긴 하지. 그런데 내가 애플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하고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 같아. 스마트폰까지 같이 하겠다고 했거든.

“한국에선 의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로 기사도라고 할까요. 애플에 신세 진 적이 있어서요. 마음의 빚은 이자가 크죠.”

“으흠….”

“미국엔 실리콘밸리가, 한국엔 용인밸리가 있습니다. 플래시 모듈, GPU, 메인보드, 펌웨어 등을 납품할 회사는 부지기수입니다. X-박스 개발팀을 용인밸리에 파견해 보심이 어떨지요.”

“하아, X-박스… 개발팀을 어찌 아는 겁니까?”

“실리콘밸리에 제 친구들이 있어서 말이죠. 파이오니어, 엔비디아 등등 말이죠.”

“아, 그렇군. 그들도 스마트 클라우드 계열이었지.”

생각할수록 내가 시장 선점을 했다는 느낌이 드는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는 빌 게이츠다. 내 물건이 잘 팔릴수록 Mac. OS의 시장 지배력이 커지는 격이라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다. OS는 결국 많이 팔리는 것이 표준이 되기 마련이다.

“X-박스 개발팀을 용인밸리에 파견하시면 저희 협력 회사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스마트 클라우드가 필요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필요한 게 아니라 윈도우 OS의 시장 지배력이 필요하신 거겠지요.”

“흐흠. 그게 더 정확한 표현이긴 하군요. 그 윈도우를 활성화시킬 제품 개발에 스마트 클라우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제가 꼭 멀티미디어 기기만 하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MS는 소프트웨어 회사인데 소프트웨어로 협업해야죠.”

“음?”

“VOD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VOD? Video On Demand?”

지금이 딱 VOD 시장을 공략하기 적당한 시점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도 ADSL이 본격적으로 깔리기 시작하거든. 현시점에서는 동영상을 PC로 보는 게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지 않나.

“맞습니다. 각종 동영상을 PC로 보는 거죠. 저는 해당 특허를 이미 보유 중입니다. MS가 힘을 보태 주신다면 라이선스를 맺고 싶습니다만.”

MS가 라이선스를 같이 보호하겠다고 나서면 아주 강력한 특허가 될 것이다. 감히 누군가 특허 무효 소송을 걸거나 하지는 못할 거다.

“감이 잡히질 않는군요. 이미 에그박스에서 각종 영화나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그걸로 짧은 동영상을 보지는 않지요. 몇 달러씩이나 내고 10분 내외의 동영상을 다운받지는 않으니까요. 뉴스나 코미디 TV 방송 같은 것 말이죠.”

“그런 걸 누가 돈을 내고 본다고….”

“누가 돈을 내고 본답니까? 광고를 보는 조건으로 공짜로 시청하는 것이죠.”

“……!”

“대충 감이 오시나 보군요. 우리는 음원 파일에서 증명했듯 각종 디지털 정보를 50% 이상 압축하고 인터넷으로 유통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영상도 마찬가지지요. 물론 이런 기술적 협조는 공짜가 아닙니다.”

“뭘 원합니까? 솔직히 VOD 시장이 그리 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중국 시장의 MS 윈도우, 오피스 판권을 주시죠. 수익의 40%는 가졌으면 합니다.”

“중국은 불법 카피가 판치는 곳입니다. 판권은 그게 해결되어야 가능합니다.”

이때만 해도 MS는 중국 시장 공략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일본과 대만까지만 진출하고 말았다. 내가 내건 조건은 MS의 가려운 등을 긁어 주는 것들이었다.

“여기 대한민국의 대통령께서 계십니다. 조만간 중국 국가 주석을 만나실 예정이거든요. 매우 유익한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만.”

“……!”

“으흠, 내가 대통령으로서 할 일도 있나 보군요. 나에겐 200억 불 외평채 발행이 최우선이며, 외교는 그다음입니다.”

“만약 중국 불법 카피 시장의 절반만이라도 정상화시킬 수 있다면 200억 불이 문제겠습니까? 그 방법이 궁금하군요.”

“파이오니어의 보안 프로그램을 구매해 주시죠. 최초 인터넷 접속 시 정품 인증을 하는 방식입니다. 윈도우 98부터 적용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이전 윈도우는 불법을 용인하는 거죠. 반발이 심할 테니까.”

“판권을 가져가면서 외려 나에게 프로그램을 파는 꼴이군요.”

“카피당 20불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15불로 하죠.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판권 수익률 40%를 가져가니 최종 수익 배분은 50 대 50이 되겠군요.”

빌 게이츠는 단번에 내 의도를 계산해 낸다. 그러면서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잇는다.

“중국 정부에 로비하는 비용은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부담하시죠.”

“그럼 200억 불 외평채는 구매하시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100억 불은 석 달 이내, 나머지는 올해 말까지 매입하는 것으로 하지요. 용인밸리 업체와 협업, VOD 라이선스, 중국 진출 모두를 포함하는 옵션입니다.”

빌 게이츠는 옵션을 걸면서 성공 여부를 살필 것이다. 나름 괜찮은 거래다. 빌 게이츠도 중국에 진출하는 것이니 속으론 남는 장사라고 여길 것이다.

“정부에서도 MS에 대해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DJ는 은연중에 한국에서도 윈도우 불법 복제에 신경을 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빌 게이츠도 알아들었는지 살짝 묵례로 답한다. 그 뒤로 DJ는 빌 게이츠에게 정책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당연히 그는 인터넷이 미래 산업이라며 대한민국이 적극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나 또한 청와대 오찬을 마칠 때까지 그의 조언에 가볍게 맞장구를 쳐 줬고, 영빈관을 나설 때 배웅도 함께 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배웅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DJ가 나를 잡는다.

“좀 더 얘기를 했으면 하네. 자네 생각에 빌 게이츠가 약속을 지키겠나? 200억 불 외평채는 아주 중요하네. 아무리 지지율이 높다고 해도 정권 첫해부터 추경을 꾸미기란 쉽지 않네.”

“지킬 겁니다. VOD 지원은 차기 윈도우에 마케팅 포인트가 될 것이며, 중국 시장 진출 또한 아주 매력적이지요. 둘 다 가려워했던 일인데, MS는 아무런 책임 없이 과실만 따먹는 꼴이 아닙니까?”

“으흠, 중국 국빈 방문에 이 안건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가 않네. 미국 기업의 이익을 한국 대통령이 대변할 수는 없잖은가?”

“대통령께서는 인터넷 서버 보안 프로젝트 정도만 언급해 주시면 됩니다. 윈도우 건은 알아서 하겠습니다.”

“중국에도 인맥이 있는가?”

“중국에서 외환위기 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 인맥이 이번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내 말에 DJ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쩌민 주석 세력은 아닌가 보군.”

“예, 아닙니다.”

“나는 모르는 것으로 하고 장쩌민 주석에겐 적당히 감사를 표하겠네.”

“예, 감사합니다. MS 건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DJ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인답게 수읽기가 노련하다. DJ가 장쩌민 주석에게 인터넷 서버 사업만 적당히 띄워 주면 시중쉰은 좀 더 안전해진다.

원래 역사에서 DJ는 중국 국빈 방문에서 크게 한 가지씩을 교환했었다. 중국은 위안화 평가절하를 하지 않는다고 합의했으며, 대한민국은 ‘하나의 중국’을 재차 지지했다.

“유 사장에겐 어떤 대가를 줘야 하는가? 원하는 게 있는가?”

“딱히 바라는 대가는 없습니다. ADSL 인터넷 구축 사업에 입찰하게만 해 주십시오.”

예상치 않게 얘기가 자꾸 길어진다. 정치인이 대가로 뭘 원하느냐고 묻는 것은 나에게 시킬 일이 남았다는 말이다. 빨리 자리를 피하라는 촉이 왔다.

“그거야 쉽지. 그것 말고도 자네가 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저는 인터넷 사업과 중국 판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북 경협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DJ가 훅 하니 치고 들어왔다. 햇볕정책에 한 손 거들면 어떠냐는 제안이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싫습니다!’ 하고 소리칠 뻔했다. 솔직히 200억 불 외평채를 성공시켜 줬으면 충분하지 않나.

“저는 IT 기반이라 딱히 대북 사업에 적용할 만한 아이템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있지 않겠나?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때 코너에 몰린 것도 지정학적 리스크가 컸던 이유도 있지 않나.”

하긴 육로로 물류가 뚫려 있었다면 수출로가 그렇게 단박에 끊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배를 통해 대부분의 수출을 한다. 그러다 보니 결국 대량 거래가 되고 국가 신용장이 필수적이다. 원유 수출입도 그렇고.

“너무 큰 건이라… 일단 스마트그룹은 적임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대북 사업을 신중하게 생각하시라고 조언하고 싶었다.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북한이 핵을 개발한 상태에서 대한민국이 평화통일을 하면 베스트라고 하겠지만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식 왕정(王政)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심지어 지금 김정일 정권의 목표는 ‘강성대국’이다. 제국주의 시대도 아니고, 군대에 기반을 둔 나라 운영이라니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잖나.

“으흠, 그리 말하는 게 당연하겠지. 일단 생각은 해 보는 게 어떤가 하네.”

“…….”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인사만 꾸벅 했다. DJ가 인사를 받아 줬기에 그제야 영빈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게 억지로 대북 사업을 맡기지는 않으리라. 일단 200억 불 외평채가 급한 불이고, 그걸 끄기 위해서는 내 협조가 꼭 필요하니까.

    • *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청와대를 방문한 지도 벌써 한 달하고 보름이 흘렀다. 윈도우 중국 진출에 클레임이라도 걸리면 어쩔 거냐며 방방 뜰 줄 알았던 케이는 예상외로 아주 침착했다. 이 실장과 함께 단박에 중국으로 날아가서 물밑 작업을 잘도 해냈다. 내 수익에서 10%를 시중쉰에게 넘기는 것으로 합의를 이뤄 냈다. 뇌물이 너무 싸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오히려 대현에서 이슈가 터졌다.

외교통상부에서 대현그룹 정헌몽 회장 앞으로 협조 공문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공문의 내용은 뻔하다. 내가 대북 사업을 정중히 거절하니, 대현에 공문이 간 것이다. 정헌몽 회장이 와 달라고 청을 넣었고 나는 케이와 함께 급히 대현전자로 향했다.

부르릉, 철컥.

내 차는 이제 대현전자 정문은 무사통과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현전자의 사무동으로 급히 들어갔다. 이제 이곳은 대현그룹의 본사 사옥이나 다름없다. 기존의 그룹 본사 사옥은 기하자동차 합병에 따른 자금 압박을 최소화한다며 팔아 버렸다. 대한민국의 대기업이 거품을 빼고 있다는 증거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오, 케이 사장님도 같이 오시네요.”

“제3자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예. 올라가시죠.”

최 상무는 여전했다. 내가 오면 늘 이렇게 마중을 나온다. 오늘은 한층 공손한 것 같다. 또다시 내가 손절한다고 화분을 걷어찰까 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최 상무님, 왕회장님께서 국책 사업 결정하신 것 아니시죠?”

“절대 아니지요. 왕회장님이고 정 회장님이고 유 회장님 의견을 듣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으실 겁니다. 엇나간 경우는 그때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휴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대현그룹과 나의 관계는 단단해졌다. 나는 대현이 대한민국의 중공업을 든든하게 책임져 줬으면 한다. 내가 IT 회사를 경영한다고 해서 다른 산업과 관련이 전혀 없는 게 아니다.

딸깍.

‘으음?’

회장실에 들어섰는데 왕회장, 정헌몽 회장 이외에 낯익은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

“어서 오이라, 수한아.”

“아, 예.”

“이쪽은….”

“홍영순이라고 합니다. 외교 통상부의 자문을 맡고 있지요.”

자문을 맡고 있는 게 아니라 얼마 전까지는 독일 대사를 맡았고, 조금 있으면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실 분 아닌가. 지금 내각에 있는 외교통상부 장관은 ‘정부는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한다’라는 뜬금없는 발언으로 경질 직전이다.

여하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양반은 내가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국민 정부에서 활약이 대단했다. 외교통상부 장관에 이어 중국 대사를 거쳐 통일부 장관에 올라 DJ가 가려워하는 부분을 모두 긁어 준 최측근이다. DJ가 이런 양반을 이 자리에 보냈다면 대북 사업에 대해 정중하면서도 매우 강력한 압박을 하는 거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케이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스마트그룹의 물류를 담당하고 계신다고요.”

“예.”

홍영순의 섬세함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케이마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이제 오실 분은 다 오셨으니 설명부터 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홍영순은 서류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한 부씩 나눠 줬다. 누구 하나 이게 뭐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대통령님께선 오는 11월 11일 중국을 국빈 방문 하실 예정입니다. 일단 양국의 물밑 교섭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나눠 드린 공문은 중국 정부와 1차 합의한 사항입니다. 특급 보안 사항이니, 설명 후에 다시 거둬 가겠습니다.”

이미 국빈 방문은 6개월 뒤로 결정되었고, 정부끼리 주고받을 사항도 정해졌다는 말이다. 보통 공문이 아니다. 정헌몽 회장이 나를 이곳에 부를 수밖에 없었겠군 싶다.

“첫 페이지는 양국 정상들의 표면적인 합의입니다. 중국 정부는 위안화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지 않는 것이며, 한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세부 항목은 뒷장을 보시면 됩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중국에 취한 요구 조건을 그대로 답습하는 수준이다. 앵무새처럼 미국과 같은 말을 하러 DJ가 국빈 방문을 할 리 없다. 국빈 방문은 양국 정상이 서로 간에 이득을 챙길 큰 사업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국빈 방문이 정권 교체마다 매번 이뤄지지는 않는 이유다.

다음 페이지에 적힌 협상안은 하나같이 굵직한 사업들로 채워져 있었다.

첫째, 중국 핵발전소 건설에 한국 기업의 참여.

둘째, 완성차 조립 공장 건립 허용.

셋째, CDMA 이동통신 및 인터넷 인프라 사업 중국 진출.

넷째, 중국에 진출한 금융 기관에 대한 위안화 영업 허가.

다섯째,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고속철도 건설 참여.

‘어이구, 이렇게 대가가 클 줄이야.’

협상안을 보고 머리가 어찔해졌다. 중국답게 한 방 대가가 너무 먹음직스럽다.

5개 중 3개는 마치 대현그룹을 타깃으로 두고 만들어 낸 협상안 같았다. 내가 관심을 둘 만한 내용은 세 번째 항목 정도였다. 정부가 이걸 두고 대현에 요청할 것은 뻔했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주문하였으며, 상반기 내에 대북 식량 지원과 함께 경협을 이뤄 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예상한 말이 튀어나왔지만 나조차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대북 사업에 걸린 이득이 생각보다 너무 크다. 내가 몰랐던 원래 역사에서 숨겨졌던 이면일 것이다. 이래서 왕회장이 뜬금없이 6월에 소를 끌고 북한으로 갔던 거다. 한창 IMF를 겪고 있던 그 시기에 왕회장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로 보였던 것이리라.

가히 외교의 달인 DJ다운 협상이다. 그는 재임 중 ‘미·중·일·러’ 일명 4강외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반도는 열강들의 각축장이었지만 지정학적 위치를 잘만 이용하면 큰 이득을 꾀할 수 있다고 강연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DJ는 국내 정치는 실수를 하더라도 수정할 수 있지만 외교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수없이 강조하며 역대 대통령 중 외교통상부 장관을 가장 많이 교체했었다. 각 사안에 걸맞은 인물을 임명했으며, 지금 상황에선 그 주인공이 여기 홍영순이다. 그는 중국과 북한 전문가. 독일 대사로 있었을 때부터 꾸준히 양국과의 물밑 접촉을 담당해 왔다. 대북 사업에 최적격인 인물이다.

“유 회장,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정헌몽 사장이 물어 왔다. 서류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살짝 떨린다. 핵발전소, 중국 자동차 시장 공략, 고속철도 사업…. 솔직히 10년 치 먹을거리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내가 봐도 자동차 공장 설립만큼은 정말이지 대박이다. 어떻게 대현자동차가 글로벌 판매 순위에서 톱 5 안에 들어갔는지 이제 알겠다. 중국 진출이 이때부터 논의되었던 거다.

“식량 지원은 인도적 측면에서 할 수 있겠지만 대북 경협은 너무 리스크가 큽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중국은 우리의 5개 요구 조건에 단 한 가지 조건만 내건 겁니다. 이 대북 경협을 거부하면 우리 거 다섯 개가 모두 물 건너갑니다.”

“아니, 중국에서 왜 이런 조건을….”

사업의 크기와 그 못지않은 리스크에 놀란 정헌몽 회장이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한반도의 주도권을 미국에 뺏길 수는 없으니까요. 미국이 경수로 사업으로 한발 앞서 가니 위기감을 느끼는 거죠”

누구 하나 선뜻 말을 잇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 솔직히 내 거 하나만 걸려 있었다면 이 판을 엎고 독자 노선으로 중국을 털었을 거다.

“홍 선생, 우리끼리 의논해서 알려 주리다. 이게 하루아침에 결정할 일이 아니잖은가.”

“아휴… 그렇긴 합니다. 하나 제가 이리 직접 방문해서 설명드리는 것도 오늘 아니면 못 합니다.”

“정부의 배려는 감사하지. 대통령께도 그리 전해 주시게. 의도는 충분히 알았으니 우리에게 시간을 좀 주게.”

“정 그러시다면야….”

다행히 왕회장이 나서 홍영순을 돌려보냈다. 홍영순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중하게 서류를 돌려받았다. 국빈 방문 전에는 절대 밖으로 새면 안 되는 기밀이니까. 그마저도 불안했던지 대북 사업은 아예 글로 적어 두지도 않았다.

    • *

홍영순 차기 외교통상부 장관이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실 안은 조용했다. 케이조차 계산이 복잡한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수한아, 이거 남는 장사다. 해야 한다.”

“잘만 되면 남는 장사기는 하죠. 한데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북한은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직접 만나 보면 다를 수도 있지 않겄나? 내가 가꾸마.”

솔직히 왕회장은 북한으로 올라가고 싶어서 미칠 거다. 그는 북한 출신이자 옛날 사람이다. 성공해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일지도 모른다.

“아버님, 북한에 아버님이 생각하는 고향은 없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시고, 적당히 경협을 하는 척 작전을 짜야 합니다.”

내 말을 정헌몽 회장이 대신 해 준다.

“내도 안다. 아는데… 아까 그 양반 말 듣고 심장이 막 떨린다.”

“아버님.”

“내는 아버지 소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지. 내 꼭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지. 그 약속을 한 지도 벌써 몇십 년이 훌쩍 넘었다.”

역시 사람 사는 일에 순수한 경제 활동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정치, 미래 전략, 심지어 개인사까지 얽혀 들어간다. 왕회장은 태생부터 DJ의 햇볕정책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양반이다.

“여러분, 리스크가 있다고만 하지 말고 위험한 게 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그래야 작전을 세우든 말든 하죠.”

케이가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나는 대북 사업의 미래를 알고 있기에, 정헌몽 회장은 북한을 불신하기에, 왕회장은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이 넘치기에 평정심을 잃은 거다.

“케이, 미국인들도 북한을 불량 국가 취급하잖아. 믿기 어려운 상대인 데다 언제나 돌발 행동을 하는 집단이야.”

“그렇다고 중국이 합의한 대박 찬스를 거절하겠다고요? 수한 씨답지 않아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수한 씨 정도면 방법이 있을 거잖아요. 요즘 미국 정부도 북한하고 사이가 좋은 편이에요. 대미 리스크도 줄어든 좋은 기회라고요.”

케이는 내가 뭐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넘친다. 열혈 동업자답다고 해야 할지,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식량 지원은 몰라도 경협은 필히 돈이 오가게 되어 있어. 북한은 분명히 뒷돈을 원할 거야. 그것부터가 불법 송금이며, 차후 정치 공세를 받으면 아무리 대현이고 스마트그룹이고 간에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 있어. 대한민국 정부도 공식적으론 부정해야 하는 일이라고.”

“우리가 뇌물 한두 번 줘 봐요? 대체 북한이 얼마를 요구할 거라 여기기에 그러시는 거예요?”

“못해도 5억 불은 요청하지 않을까?”

원래 역사에서 대북 불법 송금액은 4억 5천만 불이었다.

“에… 지금 50억 불이 아니라 5억 불이라고 얘기했어요?”

“……!”

케이 말에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하며 깜짝 놀랐다. 지금은 원래 역사와 상황이 사뭇 달라졌다. 나와 케이라는 아주 큰 변수가 끼어 있는 거다.

“수한 씨, 환율 계산 잘못한 거예요?”

“아냐. 북한은 지금 아사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야. 북한에 5억 불이면 대한민국에선 50억 불을 주는 거와 다름없어.”

“그 정도면 제가 주면 되잖아요. 다른 리스크는 뭐예요. 말해 보세요.”

나는 케이를 왕회장을 말리기 위한 제3자로 데려왔는데, 외려 그녀가 판돈을 대신 내놓겠다며 도박판에 훅 하고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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