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챕터 5 (67/104)

제4장 챕터 5

1998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 앞.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이 벌어졌다. 예상대로 DJ가 대선에서 압승을 하였으며, 국내외 귀빈과 각계인사 45,000여 명이 참여하는 이 자리에 나 또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나름 DJ 선거 유세에 한두 번 카메라에 잡혀 주는 것만으로도 당선 기여에 한몫은 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 50년 만에 처음 이루어진 여야 간 정권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한차례 박수가 쏟아지고 DJ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는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치유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 대기업 연합과 각 우방의 도움,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20억 달러가 넘는 금을 모아 주신 국민 여러분 덕분에…(후략).”

DJ답게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연설을 했으며, YS도 연설 내내 단상 옆에 자리하여 축하를 해 주었다. 내 옆에 앉은 왕회장은 연신 내 무릎을 툭툭 치며 이 자리에 함께한 것을 자축했다. 55분간의 짧다면 짧은 취임식이었는데, ‘내 나라 내 겨레’라는 노래를 합창하며 폐회를 선언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 자체였다.

다들 모르겠지? 원래 외환위기는 이것보다 100배는 심각했다는 걸 말이다. 발전하는 대한민국이 어찌 될지 나조차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나비효과 따위는 걱정하지 말자. 5~6년쯤 대한민국의 역사를 앞당겼다고 여기면 그뿐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결국 바뀔 수밖에 없는 미래다.

다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어느덧 폐회식마저 끝나 버렸다. 만찬에 초청받았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더 이상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사절이다. 정경유착의 고리는 언제나 그런 사소한 곳부터 시작하니까. 다른 대기업 회장들도 정중하게 사양했다고 들었다.

“가자. 오늘 많이 바쁘다.”

“한데 약속 장소가 수정각이 맞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사한다고 예약을 안 받던데요.”

“오늘 다시 열었다. 우리가 개시해 줘야지.”

부우웅.

이 실장은 훅 하니 차를 몰아 수정각으로 향했다.

    • *

“호호호, 어서 오세요. 나라 구하신 분들을 뵈니 영광이에요.”

“어이고, 가게는 싹 바뀌었는데 말투는 여전하구마.”

“시절이 시절이라 사람만 빼고 싹 바꿨지요. 요정 분위기를 지우고 유니폼도 만들고.”

그러고 보니 최 마담의 옷차림이 바뀌었다. 한복은 한복인데 개량 한복이다. 정원은 더욱 근사하게 변했다. 솔직히 예전엔 일본 색이 곳곳에 묻어 있었는데, 그것들이 싹 지워지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최 마담 같은 장사꾼은 확실히 시대 흐름을 잘 읽는다.

“허허, 수한이가 좋아할 만한 분위기네.”

“호호호, 이제 재벌가도 젊어지고 있잖아요. 대세에 따라야지요.”

“메뉴가 바뀐 건 아니죠? 여기 요리는 정말 맛있는데.”

“메뉴를 더 추가했죠. 어서 오르세요. 다들 곧 오실 거예요.”

바뀐 정원 분위기를 한껏 느끼며 방 안으로 들자 다들 속속 도착했다. 정헌몽 회장, 이희건 회장, 구무본 회장 모두 컨소시움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다들 시장하실 테니 식사부터 하고 말씀 나누세요.”

“그러는 게 좋겠군.”

“최 마담, 시원한 맥주부터 먼저 주게.”

“잠시만 기다리세요.”

최 마담이 방을 나서자 직원들이 부지런히 상차림을 했고, 수정각 특유의 가야금 연주 대신 조용한 피아노곡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나 350억 불, 대현 50억 불, 신성 20억 불, LK 10억 불에 대한 권리 정산을 해야 할 때다. 빠진 지분이 있다면 케이의 20억 불인데, 이 또한 정산해야 할 것이다.

꼴꼴꼴.

“한 잔 하세. 우리끼리 축배를 들지는 못했잖은가? 자네와 정 회장 둘만 했지.”

구 회장이 내 잔을 채우며 말문을 텄다. 연이어 주변의 잔을 채우고 쨍! 하니 건배를 하니 모두들 가볍게 원샷을 한다.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다. 다들 그룹 주가가 미친 듯이 올랐으니 전리품 배분이 어찌 되건 기본적인 수혜는 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탁!

“LK 지분이 제일 적으니 나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LK는 서우전자를 취했으면 합니다. 여타 파산한 그룹에서 디스플레이 관련 사업체도 몇 개 있던데 이 또한 합병을 했으면 합니다.”

“…….”

구 회장이 건배 제의를 하더니 전리품 분배 제의도 가장 먼저 했다. 나를 비롯해 정헌몽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범주 내였으니까. 가전 사업에서 경쟁하고 있는 신성의 이 회장도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다들 동의하시는군요.”

“전경련에서도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함세, 구 회장.”

“감사합니다, 왕회장님.”

자연스레 왕회장이 의장을 맡은 격이다.

“이러면 이제 신성 차례인가?”

“내놓은 돈이 크신데, 대현부터 전리품을 챙겨 가심이 맞지요.”

“허허, 양보하는 겐가? 헌몽, 말해 보이라.”

“예. 대현은 기하, 서우, 이룡자동차 3개사를 가지고 싶군요. 서우중공업과 서우조선 둘 중 하나도 합병했으면 합니다.”

정헌몽 회장은 확실히 회장으로서 사안을 처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할 요량이었으면 서우 건설부터 달라고 했을 것이다.

“반대합니다.”

“으응?”

신성도 아니고 내가 반대를 하니 다들 깜짝 놀란다.

“재계 개편은 무릇 공정한 경쟁 체제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대현이라도 독점은 곤란합니다. 더욱이 자동차 산업 국내 독점은 타국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으음! 그렇다고 자동차를 할 수 있는 회사가 어디 있나?”

“신성이 해야지요. 신성이 서우와 이룡을 합병해 신성 자동차를 발족시키고, 대현은 기하자동차만 합병하셔도 충분해 보입니다.”

정헌몽 회장은 턱을 쓰다듬었고, 신성의 이 회장은 나름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선 자동차 사업 독점도 문제거니와 대현자동차의 정구몽 사장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도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

“두 그룹에서 자동차를 나누신다면 스마트 클라우드는 정밀 기계, 부품, 소재를 담당하겠습니다. 생태계가 건강해질 겁니다.”

“오호, 생태계라. 듣기 좋구먼. 허허.”

왕회장이 맞장구를 쳐 준다. 정헌몽 회장의 몫이 작아졌음에도 외려 웃기까지 한다. 나이가 들더니 오히려 소탈해진 느낌이다. 아마도 내 속내를 짐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대현이 자동차 일부를 포기해 준다면 신성은 서우 쪽은 탐내지 않겠습니다.”

이희건 회장이 훅 치고 나왔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자동차 얼마나 하고 싶겠어. 외국에 넘기느니 차라리 신성이 하는 게 낫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동의합니다. 대신 서우건설, 서우중공업, 서우조선, 한부철강 모두 대현이 접수하셨으면 합니다.”

“헉!”

“한부그룹에 법정 관리 중인 조선사가 있습니다. 그건 신성이 가졌으면 하는데.”

“그 또한 동의합니다.”

나는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신성은 중공업 계열을 신성물산에 붙여 경영권을 강화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대현도 충분히 챙겼다고 할 것이다. 서우조선만 해도 정상화만 시키면 20억 불이 족히 넘어가는 회사니까.

“하하, 다들 시원시원해서 좋구만. 수한이가 나머지를 다 가지면 되겠네.”

“톰슨, 서우통신, 서우증권, 신라증권, 기하정밀, 서우정밀 등등 IT, 정밀 기계, 부품 소재, 증권사를 가졌으면 합니다.”

“으흠, 그것만으로 되겠나? 지분 대부분이 자네 몫인데.”

“다른 여타 기업은 자생시키고, 회복세가 뚜렷해지면 컨소시움이 투자했던 주식 지분을 팔아 유동자금으로 쓰려고 합니다. 최근 법정관리에서 벗어난 해티제과가 좋은 일례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컨소시움이 보유한 지분과 부동산에 대한 권리는 모두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면 적당하겠군.”

“디스플레이 업체만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동의함세.”

정헌몽 회장과 구 회장이 맞장구를 쳐 준다. 신성의 이 회장만 조금 어두운 표정을 해 댔다.

“조만간 신성을 압도하겠군. 자본력이든 인력이든 말이오.”

“제 전리품입니다. 신성도 전리품을 챙기지 않았습니까?”

“자동차는 내 선택권이 아니네. 되가져가려면 가져가시게.”

신성의 이 회장은 내 약점을 잘도 찌른다. 내가 아무리 대현에 치우쳐 있다고 해도 자동차 산업 독점은 안 된다. 자동차 산업은 내수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더욱이 내 부품 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고객도 경쟁 체제가 되어야 한다. 고객이 경쟁해야 부품 기술 개발이 가속화되며 세계 무대에서도 살아남을 만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뭐, 인정해 드리죠. 추가로 뭘 원하십니까? 양도할 만하면 하지요.”

“전리품 중엔 없네. 난 자네의 플래시메모리 라이선스를 원하네.”

“또 그 말씀입니까?”

“공정한 경쟁 운운하지 않았나? 이미 연구 단계에선 신성에서도 128메가 플래시를 만들었네. 생산 라이선스가 없을 뿐이지. 라이선스를 주게. 내 아무리 친분이 있다곤 하지만 도시바와 계약하고 싶진 않아.”

후후, 애국심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 플래시 구조가 훨씬 좋으니까 저러지.

뭐, 말이 나왔으니 풀어 줄 때도 되긴 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올해부턴 신성이고 대현이고 플래시를 양산하지 않나. 도시바와 마이크론이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전에 국내 기업끼리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단합 아닌 단합을 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대신 대현에도 라이선스를 주도록 하지요. 로열티는 3%. 크로스 라이선스 같은 추가 협상은 없습니다.”

“대현은 당연히 오케이네. 당장이라도 계약함세.”

“좋네. 3%면… 외려 고맙다고 해야겠군.”

텅! 텅!

“허허, 이거 싱겁게 끝났네. 나는 고성이 오가고 이번 회동은 누가 파투 낼 거라 생각했드마.”

왕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하다 보니 의사봉을 두드리는 버릇이 생겼나 보다.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너털웃음을 쏟아 냈다. 내가 표면적으로 양보를 많이 해 주고 큼지막한 산업에 손을 얹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동차나 중공업은 내 목표가 아니다. 결국 팔아 버릴 회사라면, 좀 더 처리하기 쉬운 주식 지분과 부동산이 훨씬 낫다.

“왕회장님께서 지금 그림대로 처리해 주시죠. 서우그룹을 해체하려면 정부와 협의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래. 정치권엔 늙은 내가 붙어 줘야지. 불리하면 그냥 다 끌어안고 저승 가믄 그뿐이다.”

“아버님.”

“하하, 정정하신데 왜 그런 말씀을….”

“하하하, 역시 왕회장님이십니다.”

“필요하면 신성에서 법무팀을 붙여 드리지요.”

“뭐이 이래 반응하누! 농담도 못 하나. 다들 한잔 하자. 호쾌하게 거래했으니 늙은 내가 봐도 보기 좋구마!”

왕회장이 맥주잔을 높이 들었고, 모인 사람들은 계약서에 도장 찍듯 말끔하게 잔을 비웠다.

콸. 콸. 콸.

“유 사장, 아니 이제는 유 회장이라고 불러야겠군. 무용담 한번 늘어놔 보시게. 컨소시움을 꾸며 놓곤 사무실에 일단 발을 들이면 집에 안 보내 준다고 해서 밖에서 TV만 봤지 않은가!”

“나도 듣고 싶네. 간혹 전화는 주겠거니 했는데, 브리핑만 듣게 하니 참기가 아주 힘들었어.”

전리품 분배가 그럭저럭 끝나니 어느새 회장들은 최전방에서 환란을 겪은 내 얘기를 듣겠다며 잔에 술을 콸콸 부어 주었다.

“제가 말이지요, 회장님들과 컨소시움을 꾸미고 제일 먼저 한 게….”

무용담이 진행될수록 ‘오, 그랬지.’ ‘어이구, 그런 의미가.’ ‘허억!’ 하는 감탄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환투기꾼과 담판에 나선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래서 어떻게 협박했소?’ 하며 신성의 이희건 회장마저 얼굴을 들이밀고 질문을 했을 정도다. 물론 ‘어허이! 말을 끊으면 어쩌누. 이런 얘기는 차근차근 들어야 제맛이다. 그냥 들어야지!’ 하고 왕회장이 호통을 치기도 했다.

수정각에서의 늦은 점심은 저녁 무렵이나 돼서야 끝이 났다. 술 마시며 하는 수다가 가장 재미나기 마련이다.

    • *

「재계 개편의 윤곽이 드러나다.」

「스마트그룹 발족 예정. 순환 출자를 하지 않는 최초의 대기업.」

「서우그룹 사실상 해체. 각 계열사는 기존 대기업에 편입 수순.」

「자동차 산업, 새로운 주인을 찾다. 1강 1중 2약에서 2강 체제로 전환!」

「한국 대기업, 문어발식 확장에서 주력 산업 위주로 재편하나?」

「스마트그룹의 조직 발표는 언제? 재계의 표준이 될 듯.」

신문지상에서는 이미 스마트그룹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놨다. 그룹 창립일은 4월 11일로 정했다. 4월 달에 휴일이 마땅히 없어서 말이다.

“스마트그룹 유수한 회장님 취임사가 있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용인밸리 공설 운동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서우와 신라증권을 합병한 스마트증권사 본사는 용인밸리로 옮겼다곤 하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사업체를 모두 용인밸리로 모을 수는 없었다. 대충 임직원 중 30% 정도가 참석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인원만 해도 2만 명이 훌쩍 넘어갔다. 각계에서 축하 하객을 보내왔지만 엄연히 이 자리의 주인은 임직원들이다.

“오늘 스마트그룹이 발족합니다. 그 일면을 살펴보면 스마트 클라우드로 대변되는 IT 계열사, 스마트정밀로 대변되는 정밀 기계 계열사, 스마트화학을 앞세운 소재 계열사, 스마트증권으로 대변되는 금융 계열사입니다. 스마트그룹은 향후 5년간 용인밸리에 30조를 투자해 4, 5, 6구역까지 공단을 조성할 것이며, 각 소 그룹의 협업을 바탕으로 10년 내에 세계 재계 순위 10위권에 합류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각 소그룹 계열사의 사장은 모두 공석으로 두었다. 합병 전의 사장들은 전부 정리했고, 기존 임원을 일일이 면담하여 가장 진취적인 사람을 사업부장으로 승진시켰다. 기존 인력에서 계열사 사업 부장이 된 이는 소재 쪽의 미와자키가 유일했다.

“스마트그룹의 전략은 명확합니다. 모든 임직원에게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질 것이며, 각 계열사의 사업은 평등하고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추진해 나갈 것이며, 결과는 임직원 전원에게 정의롭게 분배될 것입니다.”

“우아아아아아!”

“세계 재계 순위 10위권 진입은 중간 목표이며, 우리의 목표는 절대 달라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객은 고객일 뿐!”

“고객은 고객일 뿐!”

“임직원이 왕이다!”

“임직원이 왕이다!”

“우린 부자가 될 거다.”

“우린 부자가 될 거다! 와아아아아아!”

새로 합류한 임직원들만 조금 당황했을 뿐, 기존 스마트 클라우드 임직원들이 크게 소리 지르니 자연스레 합창이 되었다.

펑! 펑! 펑! 펑!

내가 짧은 취임사에 이어 구호까지 마치자 내 등 뒤에 세워진 구조물 위에서 폭죽이 수없이 터졌고, 새로 만든 스마트그룹 로고가 촤르륵 펼쳐졌다. 스마트(Smart)라는 영어 단어가 클라우드(Cloud)의 C 자를 형상화한 구름 모양 아이콘에 음각으로 파묻혀 있는 모습이었다. 사선으로 파란 띠가 지나가는 색감도 아주 멋지다. 가히 조너슨이라는 특급 디자이너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로고가 아닐까 싶다.

“와아아아아! 멋져!”

“우와! 우와! 우리 회사 최고다!”

“우리 회사는 뭐든 잘해!”

「스마트그룹 발족. 세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두다.」

「스마트그룹 발족. 용인밸리에 5년간 30조 투자 예정.」

「스마트그룹 발족. 정부의 벤처 산업 육성 전략의 선봉에 서나.」

그날 모든 석간신문은 비슷비슷한 제목의 기사로 도배되었다.

    • *

삐리릭.

“유수한입니다.”

-어이, 수한아. 니 뭐하노? 바쁘나?

나에게 직접 전화하는 양반은 별로 없다. 왕회장은 그 많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바쁘다 해도 전화 끊으실 거 아니잖습니까.”

-하여간 틱틱대기는! 이누마, 니 준비하고 있나? 궁금해서 전화했다.

“준비요?”

-뭐긴 뭐이라. 청와대 가야지.

“…청와대요?”

-그래, 청와대. 국책 사업에 니가 꼭 필요하단다.

국민 정부의 국책 사업은 벤처 사업 육성과 햇볕 정책으로 대표된다. 둘 다 골치 아픈 내용이라 솔직히 내키질 않는다. 정치 거물로서는 DJ를 인정하지만, 정부 주도의 사업을 하다 보면 결국 불필요한 잡음이 나기 마련이다.

“재계 3위가 왜 나섭니까? 1위 대현과 2위 신성이 나서도 충분하죠.”

-에헤이, 또 그란다. 실질적으론 니가 재계 1위 아이가. 중공업을 쏙 떼어내 버렸으니 외형만 그렇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라고 초청한 양반이 니처럼 젊은 기업가와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야.

“초청을 했다고요? 누가 누굴요?”

-누구긴 누구고? 대한민국 정부가 빌 게이츠 초청했다는 소리 못 들었나? 전경련에서 공문도 발송해 줬구마. 공문 못 받았나?

그러고 보니 공문을 본 생각이 난다. 원래 역사에서도 DJ는 빌 게이츠와 손정의를 초청하여 의견을 들었다. 인터넷이 미래 산업의 핵심이라는 조언에 DJ는 대한민국 전역에 인터넷을 연결하는 대규모 국가사업을 실시하게 된다. 한국인답게 불과 1년 만에 국토 전역이 ADSL 인터넷 망으로 연결된 세계 최초의 국가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번 역사에서는 그 회의에 손정의 회장 대신 내가 들어가는 꼴인가?

전국 인터넷 확장 사업이 탐이 나긴 하는데, 그 대가로 벤처 사업이야 지원한다고 해도 대북 사업은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담그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DJ는 내가 단물만 빨아먹는 걸 보고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고민이 된다. 내가 애써 공문을 무시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대현과 신성이 나서시죠.”

-안 된다. 빌 게이츠가 니가 안 오면 투자 안 한다고 공언했다. 그 말은 니가 오면 투자한다는 말 아이가. 이거 200억 불짜리 외평채를 발행하는 건이다.

으응? 나는 왕회장의 말에 깜짝 놀랐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200억 불 외평채 발행은 단박에 무산된다. 빌 게이츠는 투자의 조건으로 MS 프로그램 불법 카피에 대한 보상을 먼저 요구했고, 손정의는 국내 인터넷 사업 진출과 면세를 요청했거든. 경기 부양을 바라던 DJ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다.

결국 DJ는 외평채 발행을 포기하고 1998년 5월 ‘대한민국 금융 구조조정’이라는 타이틀로 경기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을 퇴출시켰고 구조조정 재원을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공채 50조 원을 발행했다. DJ다운 논리적인 돈 찍어 내기였기에 재정 축소를 강권하고 있던 IMF의 눈초리도 회피했었다. IMF를 극복하는 금쪽같은 돈이었지만, 외환은행이 론스타 같은 회사에 넘어간 빌미를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IMF 사태로 최소한 50조 이상의 국부를 날렸다는 근거가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은 환투기꾼에게 당했던 때나 그런 거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환율은 1,250원대로 떨어졌으며, 수출도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외평채 200억 불 발행에 성공한다면 굉장한 희소식이다. 원화로는 25조. 정부 예산이 80조이니 국가 예산의 30%가 넘는 돈을 안정적으로 시중에 풀 수 있게 된다면 확실히 경기가 나아질 것이다.

“제가 가면 200억 불이 생긴다고요?”

-그래. 미국 양반이 니하고 같이 할 일이 있다는 투로 말했다 하더라.

빌 게이츠가 대한민국 인터넷 사업에 직접 투자하지는 않을 텐데. 200억 불 외평채의 이자라고 해 봐야 그에겐 푼돈에 불과한데 말이다. 나하고 같이 할 일이 뭐지?

여하튼 가긴 가야겠다. 이 정도의 돈이 나로 인해 국내로 유입된다면, 정부는 내가 인터넷 사업의 주관자로 나선다고 해도 따로 조건을 걸지 못할 거다.

“예, 갈게요. 언제 가면 됩니까?”

-아고, 진짜 공문 안 읽었나 보네. 내일모레다, 내일모레!

“오, 모레입니까? 그럼 청운동에 계세요. 제가 왕회장님 모시고 갈 테니까요.”

-그런 수고 필요 없다. 그 자리에 초청받은 이는 니 혼자다. 나는 따로 가마.

“대현도 참여하시는 건가요?”

-해야지. 국책 사업이 뭐가 됐든 간에 토목건설이 필요할 거 아니가. 대현건설이 먹어야지.

“아, 예.”

늙은 양반이 계산도 잘한다. 박수를 쳐 주고 싶다.

그 뒤로 몇 분 정도 통화를 더 하다 전화를 끊었다. 나와 얘기하면 회춘하는 느낌이 든다니, 왕회장 전화만큼은 용건만 말하고 끊기가 야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

벌컥!

“수한 씨! 들었어요? 빌 게이츠가 온대요.”

“케이, 노크 좀 하고 들어와. 깜짝깜짝 놀라잖아.”

“강심장이 이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요. 여하튼 빌 게이츠가 왜 온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수한 씨~ 저는 언제나 수한 씨 곁을 지키는 열혈 동업자랍니다.”

“허! 열혈 동업자? 그런 양반이 나랑 얘기하기 싫다며 뛰쳐나갔어?”

케이는 아직도 전리품으로 신코아백화점 하나 먹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다며 버티는 중이다. 케이는 여태 많이 먹었다. 백화점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건 며칠 전의 저죠. 지금의 제가 아니라고요.”

“오늘 정말 마지막 제안이야. 내가 20억 불을 돌려줘? 아니면 신코아 백화점 하나로 땡칠 거야?”

“산미유통도 끼워 줘요.”

“또 그 소리네. 산미유통은 회생 직전이야. 조만간 경영권 돌려주고 지분 매각할 거야.”

“신코아백화점 회생에는 20억 불을 고스란히 쏟아부어야 한다고요. 언제 키워서 언제 현금으로 만들어요?”

“아무리 우겨도 소용없어. 현금 20억 불, 신코어 백화점, 둘 중 하나만 택해.”

케이는 절대 백화점을 포기 못 한다. 쇼핑을 너무 좋아하니까. 이 기회에 제대로 된 명품 백화점을 만들고 싶을 거다. 연말마다 미국 가서 쇼핑하는 거 너무 힘들거든.

“우우… 대신 MS와의 거래에 끼워 줘요. 큰 건일 것 같은데.”

“무슨 건인지 맞혀 봐. 내 동업자로서 능력이 있는지 검증부터 해야지.”

케이 정도의 정보통이면 빌 게이츠가 왜 한국에서 나를 지목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짐작은 가지만 확신이 필요하다. 회의에서 상대의 의도를 미리 아는 것은 매우 유리하니까.

“에이, 당연하죠. 앙숙인 스티브 잡스가 에그박스와 더불어 아이팟까지 선보이며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잖아요. 그게 수한 씨 덕분인 건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고.”

“뭐, 누구나 그리 짐작은 하지. 한데 MS는 제조업체가 아니야. 앙숙이라고 해서 MS가 제조업을 할 게 아니잖아.”

“문제는 그런 첨단 제품의 OS로 애플의 Mac. OS가 채용되었다는 거죠. 윈도우 기반의 혁신 제품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소니의 차기 플레이스테이션도 Mac. OS와 호환되도록 한다고 하더라고요. 호호호! 이 정도면 동업자로서 잘 이해하고 있는 거죠?”

케이는 뺨에 팔랑팔랑 손부채질을 하며 고급 정보를 잘도 떠들어 댄다. 내가 알고 있는 원래 역사에서 조금 변경된 수준이다. 내가 유추할 수 있는 나비효과 범주 내라고나 할까.

마이크로소프트는 미래 개발 전략으로 DirectX를 통해 윈도우 OS를 거실용 종합 엔터테인먼트 허브 장치의 중추로 만들고 싶어 했다. 비디오, 게임, 음악, 인터넷까지 지원하는 강력한 플랫폼 말이다.

한데 내가 한발 앞서 에그박스를 내놓았고,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을 내놓으며 열심히 쫓아오고 있는 형국이다.

원래 역사에선 빌 게이츠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을 윈도우 프랜차이즈에 대한 거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하고 X-박스를 내놓게 되는데, 나와 스티브 잡스가 연합한 더 우수한 에그박스를 보고선 다급함이 도를 넘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에그박스가 출시된 지 2년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 나와 할 일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X-박스 개발팀은 500불이 넘어가는 윈도우 기반의 멀티미디어 기기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결국 윈도우를 빼고 자체적으로 OS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빌 게이츠는 격노했고, 그는 이를 두고 MS에서 겪은 가장 모욕적인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지금 한창 X-박스 개발팀 전원을 갈아 치우냐 마냐를 두고 고민하는 와중이며, 원래 역사대로라면 X-박스 개발팀 전략이 빌 게이츠를 이긴다. 윈도우 OS와 호환성을 갖게 하겠다는 합의점을 찾게 되거든.

“뭐, 그 정도 이해력이면 합격이네. 7 대 3까지 봐줄게.”

“5 대 5. 유통은 저한테 시킬 거잖아요.”

“8 대 2. 내가 직접 유통시켜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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