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올인
한국과 미국의 시차는 반나절.
부우우웅.
조지 소로스는 한밤중에 론스타 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급히 사무실로 향했다.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거물 투기꾼이 당황한 어투로 전화를 했기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벌컥.
“그레이켄, 대체 무슨 일인가? 이런 시간에 나를 불러내고.”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게.”
“나 참, 우리 자산 그래프 아닌가. 계단식으로 레버리지가 척척 이루어지고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
모니터는 수없이 많다. 환율, 주가, 금리 등등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된다. 그중 소로스가 눈여겨보는 것은 자산의 변동이다. 원화 환율을 반영한 자산 변동 그래프인데 소로스 펀드가 100억 불, 론스타 펀드가 100억, 도합 200억 불로 시작해 지금은 220억 불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시적 경향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야. 미시적으론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한국에서 보내온 자료를 보게.”
“으음?”
론스타 회장 그레이켄이 건네준 팩스 자료를 보니 소로스의 눈에도 특이점이 포착되었다. 스무 개가 안 되는 개별 종목이긴 하지만 순익을 보고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수익률 0%가 되어 버렸고, 두 개의 종목은 수익률이 -20%까지 되었다.
두 개 종목 때문에 잃은 돈이 3억 불 가까이 되었다. 론스타와 자신이 쏟아붓고 있는 돈은 200억 불이 아닌가. 1.5%,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비율이다.
“보이나? 단박에 14개 회사가 주식 소각을 해 버렸어. 이번 주말이 지나면 공매도 상환으로 현금화하기 직전이었는데 말일세. 그리고 두 개의 회사는 아예 단 2시간 만에 15%나 올라 버렸네. 우리 쪽 딜러가 종목당 5억 불씩 매도 주문을 냈음에도 공매도가 실패해 버렸다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원래 지금쯤 우리 돈이 230억 불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220억 불밖에 되지 않네. 이게 누군가의 카운터펀치라면 확대되기 전에 손을 빼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손을 빼다니. 수익률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원화로는 수익률이 자그마치 40%가 넘어! 환율 폭등 때문에 수익률이 10%로 줄어든 것뿐이야. 개별 종목 파산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변수라고.”
“정말 그리 생각하나? 개별 종목 이름들을 봐! ‘산미(Sanmi)’로 시작하는 종목들이네. 뭉텅이로 망했지만 두 개의 종목만 상한가를 쳤다고! 이건 전문가가 나섰다는 의미일 수 있어! 느낌이 좋지 않네.”
그레이켄은 정말 불안했다. 공매도 전략을 깨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막대한 자본과 배짱, 심지어 금융 전문성까지 있어야 한다. 이 일이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라면 정말 위험하다.
“후후, 한국에 금융 전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금융 파생 상품 하나 만들지 못하는 애들이야. 주식 시장도 커피잔 크기에 불과해. 한국인들도 이번 기회에 교육 좀 시켜 줘야지. 왜 그래?”
소로스는 피식 웃어 대기까지 했다. 자신의 작전은 영국, 동남아 몇 개국에서 수차례나 반복해서 검증한 일이었다. 몇몇 금융인이 꿈틀댄다고 실패할 거라면 여태 연전연승을 할 리가 없잖은가?
“잘 생각해, 소로스. 오늘을 넘기면 공매도 차입 상환 약정은 11월 말로 자동 연장된다고. 한 달 동안 이런 일이 확대되면 우린 거덜 날 수도 있어.”
결국 론스타 회장은 소로스에게 같이 손을 빼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지금 들어간 공탁금의 향방을 오늘 중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한 달간 주식 시장에 묶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탁금은 예금과 달리 오늘 맡기고 내일 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손 빼려면 혼자서 빼. 물주들에게 배당 주고 세금 빼고 나면 그 손해는 어쩌고? 그것뿐인가? 앞으로 장사 어떻게 하려고? 한국 시장 정도에 겁먹고 물러선 우리를 물주들이 믿어 줄 것 같나?”
“그럼 어쩌자는 건가?”
“세상에 돈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어. 미 국채 담보를 가진 물주는 차고 넘치잖아. 물주들을 더 물고 들어오지.”
“여기서 더 집어넣겠다는 말인가?”
“생각 좀 해. 당신 말처럼 갑작스러운 파산이 변수라면 파산 안 할 기업에 공매도를 올인하면 되잖아. 안 그래?”
“으음….”
“한국에는 재벌이라는 회사가 있다던데. 그쪽으로 올인하자고. 어때?”
“일단 얼마나 더 할 거야? 그것부터 묻지.”
“나 200억 불, 자네 200억 불!”
“자네 너무 지르는 거 아닌가?”
“그 정도면 재벌 한 개쯤이면 파산 리스크도 감당할 수 있어. 한꺼번에 들어가면 환전 손실이 있으니, 50억 불씩 끊어서 번갈아 들어가도록 하지. 그래서 11월 말 IMF에서 구제금융을 들이밀면 단박에 빼서 나오면 되는 거야.”
“으음.”
론스타 회장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한참을 고민했다.
“뭘 그리 고민하나? 한국 정부가 그 돈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나? 그쪽 정부 예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돈이야.”
“그래, 이왕 지른다면 규모가 클수록 안전하겠지.”
“앞으로 이런 일 때문에 부르지 마. 그냥 전화로 하라고! 이 정도 데이터는 나도 볼 수 있으니까.”
“그래, 그러지.”
소로스는 추가 공격에 대해 론스타 회장이 확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먼저 50억 불을 집어넣기 시작하면 따라 올 것이 분명했다.
- *
1997년 11월 3일 월요일.
-산미그룹은 모든 자산을 스마트 클라우드에 위임하며, 컨소시움의 감독하에 부실 계열사의 주식을 모두 소각하여 소액 주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산미특수강과 유통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회생 절차를 밟을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총수 일가는 겸허한 마음으로….
산미그룹은 이미 나와 계약한 항복 문서를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화했다. 산미그룹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미 시중 은행에서 어음 부도가 임박했고, 수출입 외채까지 갚아야 하니 파산은 불 보듯 뻔했으니까. 이대로 파산하는 것보다는 차후에나마 경영권 회복을 논의하겠다는 문구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모든 자산을 전리품 테이블에 올리는 조건으로, 모든 외환 부채를 컨소시움에서 인계받았다.
-기하그룹은 이 시각부로 기하자동차, 기하정밀만 남기고 모든 계열사의 주식을 소각하고 우리사주연합으로 경영권을 이전하고자 합니다. 경영진은 현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자산을 인계하는 스마트 컨소시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모쪼록 위기 극복에….
산미그룹이 경영권 회복을 논의한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데 진통을 겪었다면 기하그룹은 정말 신사답게 컨소시움에 귀의했다.
두 그룹의 계약이 알려지자마자 참로그룹, 대동그룹, 청호그룹, 해티그룹, 쌍울림그룹, 가평그룹, 나한그룹, 산립식품, 신라증권이 모조리 컨소시움을 자산 인수자로 지정하며 항복 의사를 밝혀 왔다. 각 그룹마다 수십 개의 계열사를 죽이는 대신 한두 개 정도의 기업을 살리는 계약에 동의해 왔다.
환란이 닥치니 오히려 제정신을 차렸다고나 할까. 전경련 회장을 억지로 꿰찬 왕회장이 협상 테이블에 강제로 그룹 총수들을 데려다 앉히고 계약서를 들이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의 진행 속도로 봐서 사실인 듯하다.
여하튼 10월 말은 그리 넘겼으며, 투기 세력 또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공매도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부실기업의 외채를 떠안아 주가 상승에 돈을 쓰고, 투기꾼들은 주가 하락에 돈을 쓴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종합 주가 지수는 400선이 무너졌지만 일부 종목은 상한가가 속출하는 이변 또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스마트 컨소시움이 주가 조작을 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 총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발표를 했으며, 한부 특검과 기하 특검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더 이상 특검을 꾸밀 여력이 없기에 스마트 컨소시움에 대한 판단은 차기 정부의 몫이라고….
일부 언론은 기업 파산에만 주목하지, 내가 주가 상승을 꾀하는 것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여차하면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나를 엮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고 하겠다.
다행히 DJ와 YS가 아직까지는 나를 보호해 주는 느낌이 든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지금은 정치권까지 신경 쓰기엔 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나는 한국은행, 외환은행, 대현증권 팀장을 앉혀다 놓고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롭다.
“한국은행에서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찍어 내야 합니다. 못해도 30조 정도는 찍어야 합니다. 그 정도 값어치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는 한은 총재를 대신해 전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행 팀장에게 제의부터 했다.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그였지만 쉽게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그가 결정을 하면 외환은행에서도 같이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은행 잔고를 털겠다고 했지만 결정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나 보다.
“유 사장님, 30조를 찍어 내고 저 혼자 구속되는 것으로 끝나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한데 30조면 우리 국가 1년 예산의 절반에 해당되는 금액 아닙니까? 자칫 회수가 되지 않고 투기꾼들 손에 넘어가면 인플레를 넘어 환율을 되돌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아슬아슬 버티고 있는 대한민국은 정말 국가 부도가 날지도 모릅니다.”
“국가 부도를 우리 돈으로 해결할 생각을 마세요. 도박판에서 하우스 주인이 새가슴이면 어쩝니까?”
“예? 하우스라뇨.”
환투기도 도박판과 똑같다. 결국 하우스 주인이 남는 장사를 해야 하는 거다. 이렇게 피를 말려 가며 남 좋은 일 시킬 수는 없잖나.
“들어 보세요. 지금 환율이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지요?”
“예, 당연합니다. 컨소시움에서 100억 불을 내주시고, 종금사 외채 100억 불도 갚아 주시긴 했습니다만 아직도 총 외채는 1,300억 규모입니다. 단기 외채도 이 중 290억 불이나 되고요.”
“투기꾼들이 환전한 돈 200억 불은 한은에 있지요?”
“예, 그 또한 당연합니다.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돈이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급 요청을 못 들어주면 국가 부도 아닙니까.”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이미 놈들은 공매도에서 꽤나 손해를 봤어요. 여기서 손절하고 나가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예? 놈들이 손 털고 나가면… 환란은 끝입니다. 그게 우리 목적 아닙니까.”
“아니에요. 착각하신 겁니다. 우린 그놈들 돈으로 단기 외채를 갚아야죠. 대한민국이 겪은 고통은 돈으로 보상받아야 하는 겁니다.”
“어… 그놈들 돈으로 외채를 갚아요? 어떻게….”
한국은행 팀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짝!
“오오오! 유 사장님 정말 천재네요!”
“아! 저도 알 것 같아요. 놈들이 손절 못 하게 환율을 천장 밖으로 쏘아 보내는 거죠. 맞습니까?”
외환은행 팀장과 대현증권 팀장이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맞아요. 지금 환율을 2천 원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놈들은 980원 정도에 최초 환전을 했고 지금은 1,300원에 해요. 2천 원까지 끌어올리면 못 빠져나갑니다. 놈들은 공매도로 손실을 봤는데, 환전 손실액까지 더해지면 손실률은 50%가 훌쩍 넘을 겁니다. 한국은행은 투기꾼들이 환전하는 원화를 최종적으로 소각해 버리면 그뿐이에요.”
“오! 그런 방법이.”
“그리고 그 뒤를 생각하면 어찌 될까요? 대현증권 팀장님은 아실 것 같은데….”
나는 똘똘한 증권사 팀장에게 대답을 넘겼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증권맨의 말이 좀 더 객관적이지 않겠나. 나 또한 확신을 얻고 싶고 말이다.
“주식판에서 선택은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손절하거나, 아니면 물타기!”
“택해 보세요.”
“제가 투기꾼이면 물타기 합니다. 환율 2천 원이면 달러로 원화를 바꾸면 기존 대비 엄청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한국 주식 시장을 휘저어 볼 겁니다.”
“실물 달러를 원화로 바꿀까요? 그럼 결국 총알 채운다고 우리 외환보유고를 채워 주는 격입니다.”
“어, 그러네요. 놈들이 어떻게….”
“도박꾼은 결국 집문서를 들고 오기 마련입니다.”
나는 증권맨 대신 외환은행 팀장에게 얼굴을 돌렸다.
“저라면… 장기 외채를 우리에게 담보로 맡기고 원화를 대출할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래야 우리 외환보유고를 안 채우고 판돈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
“아아아, 너무 큰 도박입니다. 놈들은 30조가 아니라 50조, 100조를 퍼부을지도 모릅니다. 미국 월가 아닙니까. 장기 외채는 물론, 미국 국채를 가진 물주가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놈들이 단박에 환전할 것 같습니까? 원화가 풀리면 자연스레 환율은 또 오를 텐데.”
“그런 면이 있군요. 단계를 나눌 것 같긴 합니다.”
“도박판에선 레이스도 중요하지만 콜하는 타이밍도 중요하죠. 우린 30조 정도가 주식 시장에서 물레방아 돌려는 타이밍에 가지고 있는 카드를 모두 내려놔야 하는 겁니다. 환율을 단박에 1,200원대로 급락시키면 놈들은 깡통 찹니다.”
물레방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주식 시장에서 30조를 공탁하고 물레방아 돌릴 때 주가를 끌어올리면 급히 손절하고 나가려고 할 것이다. 환율 2천 원에 30조를 갚을 땐 150억 달러만 있으면 되지만, 환율 1,200원에는 250억 달러가 필요하다. 환차손으로 자그마치 100억 달러를 먹을 수 있다.
문제는 타이밍, 돈 지랄에 장사 없다. 정말 적당한 타이밍에 호재를 띄워 주가를 끌어올려야 한다.
“놈들이 어떤 주식을 노릴지 모르잖습니까. 융단 폭격하면 우리가 버틸 수 없습니다.”
“이건 심리전입니다. 덩치 작은 기업은 이미 우리가 수도 없이 파산시켰습니다. 공매도로 남기지도 못했고 그냥 원금만 찾아간 격이지요. 기회비용만 날린 겁니다. 그럼 그들이 어찌 나올까요?”
“아! 컨소시움!”
대현증권 팀장이 무릎을 친다. 역시 척 하면 척척 알아듣는다.
“맞아요. 이젠 그들도 컨소시움의 존재를 인정할 겁니다. 대현, 신성, LK, 스마트 클라우드,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포철 정도가 아닙니까.”
포철은 1990년대 한국 기업에서 유일하게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는 회사였다.
“이제 잘 알아듣겠습니다. 도박장 하우스 역할을 하라는 의미도 알겠고요. 하나 아직도 미심쩍습니다. 이 와중에 기업의 가치를 확실히 올릴 만한 호재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 개.”
“제일 확실한 것은 성공 가능성이 몇 프로입니까?”
한국은행 팀장이 훅 하고 찔러 들어왔다. 순발력은 없지만 일 처리는 철저한 양반이다. 호재 개수가 아니라 성공 확률을 묻고 있다.
“글쎄요. 60%?”
“그 정도로 30조를 어떻게….”
“어떻게라뇨? 나는 그 확률에 300억 불이 넘는 돈을 전부 걸었는데, 한국은행은 왜 못 합니까? 배팅하면 확률 60%, 지금 백기 들면 0%입니다.”
나는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행도 합니다. 투기꾼들이 집문서를 들고 오면 우리도 집문서로 배팅해야죠.”
“다들 힘내십시오. 짧으면 열흘, 길어도 20일이면 결판납니다.”
“예.”
“후우~”
한숨과 다짐이 교차한다.
“컨소시움에 모인 담보를 모두 가져가세요. 정부 쪽 설득해 주시고요. 지금 바로 출발하시죠.”
“예.”
“외환은행은 환전 모니터링 바랍니다. 투기꾼들 환전액이 30조가 될 때를 알려 주세요. 그때 제가 호재 터뜨립니다.”
“예.”
“대현증권 팀장님, 증권사들에 재벌 할당해 주세요. 대현, LK, 신성, 제 회사, 포철까지. 이 다섯 개로 승부 봅시다.”
“예. 30조까지 무한으로 사자 주문 내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조용히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째서 아직까지 아무도 전화를 안 주는 걸까. 하다못해 이 비서는 전화를 줘야 하는데 말이다.
- *
삐리릭. 삐리릭.
드디어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접니다, 사장님.
“오, 조너슨!”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품 검증이며 특허 계약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어찌 되었나요?”
-직접 바꿔 드리지요. 그게 낫겠습니다.
조너슨의 억양으로 보아 일은 잘된 것 같은데, 어째서 누굴 바꿔 준다고 하지?
딸깍.
-미스터 유!
“잡스!”
-오랜만이네요.
“우리 물건은 봤죠?”
-하하, 정말 급하긴 급한가 보군요. 미스터 유가 이렇게 속내부터 드러내다니.
“하아, 급한 것이 사실입니다. 50억 불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것 때문에 이사회를 설득한다고 좀 소란스러웠죠.
“소란스러웠다고요? 신제품의 가치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나는 완전 방수가 되는 앰팩과 블루투스 이어폰이라는 첨단 기술을 내놓았다. 원래 역사에서 블루투스 기술은 에릭슨, 인텔, IBM, 노키아 등이 주도해 1998년에 출시한다. 이번 역사에서는 나와 애플이 그 자리를 꿰찰 것이다.
무선 통신 기술에 있어 첨단을 달리는 스마트 클라우드 개발팀에 블루투스 이어폰 개발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2.4GHz 주파수와 파이오니어 프로토콜로 기기 간의 상호 인식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를 준 것만으로 불과 6개월 만에 시제품을 만들어 냈다.
-알다마다요. 그래서 계약 조건을 변경했으면 합니다.
“애플에 2년간 50억 불은 그리 큰 돈이 아닐 텐데요. 최소 규모의 납품 금액입니다.”
-너무 작습니다. 10년간 200억 불 OEM, 올해 안으로 특허 크로스 라이선스 30억 불, 선발주 보증금으로 50억 불을 현금으로 지원하지요.
“10년간 200억 불 OEM, 80억 불은 선결제라….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크로스 라이선스에 장기 OEM 계약을 맺으면 내가 신규 앰팩을 출시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진다. 잡스는 이참에 신형 앰팩의 완전한 독점을 바라는 것 같고, 나보고 부품 납품 업체로서 자리매김하라는 듯하다.
나쁜 거래는 아니다. 솔직히 앰팩 시장은 이제 애플이 고급 시장을 주도하고 나는 부품을 팔아먹어도 되는 시점이 왔다. 조만간 중국에서 저가형 앰팩이 쏟아지면 부품 시장이 훨씬 커질 것이다.
-그 정도 규모는 돼야 환투기꾼이 움찔하지 않겠습니까?
“알고 계셨군요.”
-모를 리가 없지요.
스티브 잡스는 돈놀이를 극히 싫어했다. MS가 마케팅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특허 소송으로 돈을 버는 특허 괴물과 싸우기 위해 경쟁사와도 연합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첨단 제품을 내놓을 때 뭇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환호와 존경이었다. 환투기 세력을 백안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입니까?”
이런 대형 거래에는 원하는 것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스티브 잡스라고 해도 단지 환투기꾼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이런 호의를 베풀 리 만무하다.
-앰팩 이름을 아이팟으로 바꾸길 원합니다. 개발은 애플에서 한 걸로 했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쇼 케이스는 내가 직접 하지요.
“당연하죠. 11월 안에는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죠. 그럼 마지막입니다.
“무엇입니까?”
-휴대폰의 꽃! 그 프로젝트, 나와 같이 합시다. 그게 이 모든 계약의 전제조건입니다.
“……!”
결국 최종 목적을 숨기고 있었군. 어째 너무 쉽다 했다. 스티브 잡스는 벌써부터 ‘휴대폰의 꽃’이라는 화두를 마음에 새기고 있나 보다. 결국 몇 년 뒤에는 스마트폰까지 생각이 닿을 것 같다.
-미스터 유?
“좋습니다. 같이 한다고 약속드리죠.”
-하하하! 휴대폰에 꽃을 꽂아 줄 생각 하면 안 됩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시는 분을 제가 어찌 배신합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80억 불을 옮기는 데 2주 정도 걸릴 겁니다. 그동안 파산하면 안 됩니다.
“서둘러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환투기꾼들에게 승리하면 미국에서도 축배를 같이하죠.
“고맙습니다, 잡스.”
-행운을 빕니다, 미스터 유.
딸칵. 삐이익….
통화를 마치자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 히든카드 세 장 중에 벌써 에이스 한 장이 떠 버렸다. 현금 80억 불이라니! 사무실 창문으로 보는 이들만 없었다면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스트레칭을 빙자해 창밖을 향해 팔을 쭉 뻗어 댔다.
‘이 느낌! 너무 좋아~ 너무!’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 *
다음 날.
한번 전화가 오기 시작하니 연이어 소식이 도착했다.
삐리릭.
“여보세요.”
-사장님, 미와자키입니다.
“미와자키 님, 결과는 어찌 됐습니까?”
-히로아키 사장과 손정의 회장이 정치인들을 만나며 백방으로 뛰었지만 통화 스와프나 신용장 개설을 해 줄 수 없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손정의 회장은 3년 뒤 예정된 주식 지분 교환은 지금 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 사정이 여의치 않았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미와자키 님이 죄송해할 이유는 없지요. 쉬십시오.”
딸깍.
히든카드 하나는 꽝이다. 소프트뱅크야 내가 주식을 100억 불 넘게 팔았으니 자금이 달릴 만하지만, 히로아키는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뛰지 않은 모양이다. 일본 정치인도 그렇고 주류에 속한 일본인도 어려울 땐 별로 도움이 안 된단 말이지. 내 경험으로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일본 문화는 힘에 굴복할 뿐 인간관계에 대한 존중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결국 일본산 소재며 정밀 부품을 현금 박치기로 사 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아무리 용인밸리를 가지고 있어도 100% 국산화란 매우 힘든 일이다. 힘들수록 더 해내야 한다.
이제 중국만 남았네. 이건 꽝 되면 안 되는데….
- *
같은 시각.
‘빌어먹을… 가이트너. 미 재무부 차관보라는 놈이 이런 후진국 정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니. 그리고 마중은 또 왜 안 나와?’
IMF 캉드쉬 총재는 한국으로 입국하는 와중에도 욕이 절로 나왔다. 이미 가이트너 차관보가 한국에서 경제부처를 쥐락펴락하고 있어야 할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리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전혀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벌써 한국의 은행들과 기업들 지분을 수십 %씩 챙기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빌어먹게도 기업을 챙길 만하면 파산부터 해 버리고, 파산한 자산이 한 곳으로 몰리며 쓸 만한 몇몇 기업은 아예 회생 절차를 밟고 있었다. 만약 환율을 조작하지 않았다면 이미 IMF 구제금융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을 거다.
부우우웅… 끼이익!
일단 공항 입구를 빠져나가고 난 뒤 연락을 하든가 해야지 싶었는데, 시꺼먼 관용차 한 대가 휙 하고 다가왔다.
“총재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작은 일도 이리하니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뻔하군.”
“휴우, 드릴 말씀이 없군요. 가시죠. 1시간 뒤 이곳 대통령과 면담이 있습니다.”
“소로스와 그레이켄은? 언제 들어오기로 했나?”
“오늘 저녁에 호텔로 바로 올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일본을 압박해 한국 수출을 막고 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한국을 해쳐 먹어 봐야 겨우 수익률이 20%가 될까 말까입니다.”
“허 참, 600억 불을 쏟아붓고 20%밖에 못 먹다니. 이 작은 나라에.”
“질책은 나중에 하고 일단 타시죠.”
가이트너는 캉드쉬를 차에 밀어 넣고 청와대로 달렸다. 미 행정부 관료가 IMF 총재와 사적으로 아는 관계라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어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마중 나온 것인데, 이미 기분이 잔뜩 상한 캉드쉬에게 그걸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따위 후진국에서 보안이 뭐가 중요해?’ 하며 어쭙잖은 변명으로 치부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 *
“어서 오시오, 캉드쉬 총재.”
“반갑습니다, 대통령님.”
“여독도 못 풀고 곧바로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이다. 미 행정부에서 지속적으로 경고를 하며, 총재님을 만나라고 하더이다.”
털썩.
악수를 마친 캉드쉬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앉아 버렸다. YS는 그런 캉드쉬에게 인상만 살짝 구겼을 뿐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아하, 당연하죠. 한국 정부는 인정할 것은 빠르게 인정하셔야 됩니다. 외환위기는 이미 닥쳤고, 11월 말 만기가 도래하는 외채 300억 불은 저희 IMF가 나서지 않는다면 만기 연장이 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정부 각료들과 기업인들이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소이다. 우리를 믿고 내년 상반기까지만이라도 만기 연장에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겠소. 뭐든 하겠소이다.”
YS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일단 만기 연장이 급했기에 한껏 자세를 낮췄다.
“뭐든 하신다는 분이 왜 구제금융을 받지 않겠다는 겁니까?”
“안 받는다는 게 아니라 요구 조건이 너무 과하더이다. 긴축재정까지는 받아들인다고 해도 조세협정까지 맺으라니요. 수출 지향적인 국가에서 외국인들에게만 소득세를 2.5%로 한다는 것은 자국 기업에 세금을 떠넘기는….”
“그 정도 혜택은 줘야 외자가 들어올 것 아닙니까. OECD, WTO까지 모두 가입했는데 자유시장경제에 합류하셔야죠.”
“그 어떤 나라도 세금을 그렇게 깎아 주지는 않는다고 들었소만.”
“어허! 그러니까 이 나라가 이 꼴이 된 게 아닙니까! 한국에는 경제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단 말입니다. 아! 그 미스터 임이라고 한 사람 있긴 하죠. 그 사람을 통해 한국에 담보로 잡을 만한 것도 선별하고, 조세협정도 손보고, 구제금융도 받고, 외환위기도 탈출하고 다 합시다.”
“미스터 임? 임창영 통상산업부 장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지요.”
캉드쉬는 그리 말하며 배석한 가이트너 차관보와 눈을 마주쳤다. 차관보는 살짝 고개를 까닥거려 임창영이 물밑 작업을 한 사람이 맞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줬다.
“캉드쉬 총재,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내뱉은 줄 아시오?”
YS는 내정간섭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캉드쉬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뭘 말씀입니까? 저는 지극히 정중한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11월 말이면 한국은 국가 부도가 납니다. 경제는 파탄 날 것이고, 슈퍼 인플레가 발생할 것이며, 농산물 수입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회복 못 하겠지요. 약은 제때 드셔야 하는 겁니다.”
연이은 도발에 붉으락푸르락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강식경 경제부 총리 및 고려일보를 비롯한 각종 언론들조차 똑같은 내용을 경고해 왔으니까.
“조세협정만 빼 주시오. 그럼 IMF의 구제금융도 받고, 권고 사항은 뭐든 따르겠소이다.”
“더 드릴 말씀 없습니다. 이건 최종 권고이며 저는 11월 21일 한국을 떠날 테니 기회는 그때까지입니다. 제가 한국에 온 것은 최선의 호의임을 알아 두십시오. 원하시면 이 자리에서 바로 서명할 수 있으니까요.”
YS는 태어나서 외국 놈에게 이런 공격적인 말을 들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빚쟁이가 오면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화가 나기보단 이런 처지의 국민이 얼마나 많을까 싶은 마음에 가슴이 컥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가서 좀 쉬시오. 내 연락드리리다.”
“기억하십시오. 11월 21일입니다. 2주도 안 남았습니다.”
“…….”
뚜벅뚜벅.
캉드쉬와 가이트너는 손님처럼 왔다가 점령군임을 밝히고 되돌아갔다. 청와대 통역관조차 부들부들 떨며 모멸감을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통역하느라 수고 많았네. 돌아가서 좀 쉬게나. 대화록은 일단 공개하지 않도록 해 주게.”
“예, 대통령님.”
독대를 한다고 각료들을 대동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YS는 터벅터벅 집무실로 돌아가 전화기부터 들었다. 내선을 통하지 않는 전화 회선이었다.
- *
삐리릭.
드디어 전화가 왔다. 중국인가? 나는 바로 휴대폰을 펼쳤다.
“여보세요.”
-유수한 사장. 날세, 대통령.
이 비서가 아니라 YS였다. 조금 외의다. 아직 결심하기엔 이른 때인데 말이다.
“예, 대통령님. 말씀하십시오.”
-청와대로 와 주게. IMF 총재가 최후통첩을 하고 갔어. 자네가 말한 그때가 온 것이 아닌가?
으음, IMF 총재가 최후통첩을? 그런 도발을 했단 말인가? 내가 놈들을 코너로 몰기는 했나 보다. 하긴 지금 주식 시장에선 박빙의 승부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을 믿어 보기로 하셨습니까? 그러셔야 제가 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YS를 도발했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YS가 직접 사과를 하고 국민들의 힘을 한데 모으는 일이다. 원래 IMF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지금이라면 훨씬 큰 힘이 된다.
-자네까지 나를 도발하는가?
“대통령님, 도발이 아닙니다. 지금 결심하시면 구국의 용단이 되는 겁니다.”
-알았네. 나는 이미 결심했네. 내 치부를 드러내고, 국민들께 도움을 요청하겠네!
“큰 결심 하셨습니다, 대통령님. 큰 결심 하셨습니다.”
-바로 와 주게.
“예, 바로 가겠습니다.”
- *
YS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캉드쉬 IMF 총재가 입국하자마자 YS를 도발할 정도라면 판돈이 모두 올라왔다는 의미. 곧이어 환투기의 주범인 조치 소로스와 그레이켄마저 입국을 할 것이다. 구제금융과 우리 외환 잔고를 탈탈 털어서 가져갈 생각으로 꿈에 부풀어서 말이다.
‘이 비서가 왜 아직도 연락을 안 하는 걸까? 내가 걸어 봐?’
카드를 한 장이라도 더 가져가고 싶었다.
삐리릭! 삐리릭!
주저하는 찰나에 휴대폰이 울렸다. YS가 할 말을 놓쳤나 싶어 조심스레 받았다.
“여보세요. 유수한입니다.”
-사장님, 접니다. 이 비서.
“하!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어찌 되었나요?”
-아주 잘됐습니다. 여기 시중쉰 님께서 옆에 계십니다. 통역을 위해 스피커폰으로 통화하시죠.
“그래요, 그래요.”
삐이익.
-안녕하신가, 유 사장.
“예, 선생님. 오랜만에 통화합니다.”
-마음이 급할 테니 내가 한 일부터 일러 줌세. 5년간 총 300억 불 규모의 거래일세. 요청한 철광석 20억 불어치는 선적 대기 중이네.
“정말 감사합니다.”
-대가는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중국으로 수출할 때 물량을 10% 추가하고 통신칩 로열티 제어와 앰팩 제조권을 나에게 넘기며, 차이나 유니콤 지분 25%를 대신 매입하는 것. 맞는가?
“예, 맞습니다. 거래 규모만 공식화해 주신다면 해당 권리는 모두 시 선생님 것입니다. 단, 차이나 유니콤 투자는 외환위기를 넘겨야 매입이 가능합니다.”
나는 부품을 납품하며 모든 선적 화물에서 불량률을 핑계로 10% 치 물량을 무상으로 주기로 했다. 5년간 30억 불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로열티 제어와 차이나 유니콤의 지분까지 뒷배로 세워 주면 정치자금은 차고 넘칠 것이다. 돈이 커질수록 시중쉰의 몫도 커지고 내 보험의 효력도 커진다. 건네는 것이 돈이 아니라 물품이기에 내 사업을 잘 돌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네에게 배팅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네.
“당연한 의견입니다. 하나 이 위기만 넘기면 시 선생님께선 한국 최고의 부자를 동맹으로 두시는 겁니다.”
-한국 최고 부자로는 부족하지. 아시아 최고 부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아시아 최고 부자는 시 선생님 아드님이 되셔야죠. 저는 두 번째로 하겠습니다.”
-아니야, 내 아들은 세계 최고 부자로 만들어 주시게. 하하.
역시 대륙인답게 통이 크다.
“늘 저보다 생각이 한 수 위십니다.”
-허허, 발표는 언제 하면 되나?
“오늘! 저녁 6시면 좋겠습니다. 가능하십니까?”
-역시 한국인들은 빨라. 문제없네. 이미 조율은 다 끝냈네.
“감사합니다. 시 선생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고맙네. 들어가게.
-사장님, 저는 이곳 발표 보고 귀국하겠습니다.
“알았어요, 이 비서실장.”
-헉!
나는 이 비서를 단박에 승진시키고, 휴대폰을 접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하하하! 갑시다, 여러분.”
기분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한국은행, 외환은행, 대현증권 팀장의 등을 차례로 두드려 일으켜 세웠다.
“엇! 유 사장님.”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어디로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기분 좋게 웃자 모두들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들이 봐서는 폭풍 전야이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디긴요, 청와대죠! 컨소시움 회장님들에게도 모두 전화해 주세요. 청와대로 오시라고.”
“오오오!”
“드디어 올인할 때가 온 거군요.”
“올인하러 갑시다!”
“와아아아아!”
- *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긴급 속보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청와대에서 긴급 담화를 발표하기로 하였습니다. 청와대를 연결합니다.
-청와대에 나와 있는 김성욱 기자입니다. 지금 대통령께서 직접….
카메라는 기자의 코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단상으로 화면을 옮겼다.
“본인은 국민 여러분 앞에 송구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현 상황은 국란이라 칭할 수 있으며, 대기업이 연합하여 국제 환투기 세력에 대항하고 있으나 …(중략)… 국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히 도움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와아아아아!”
대통령 담화에 이런 환호성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기자들도 환호를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곧이어 내가 단상에 나서자 카메라 셔터 소리와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찰칵! 찰칵! 펑! 펑! 펑!
“스마트 컨소시움은 국제 투기 세력에 대규모 반격을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
“투기꾼들의 금액은 총 600억 불 규모입니다. 그들로부터 주식 시장을 보호하며, 11월 말까지 단기 외채 총 290억 불을 갚으면 대한민국의 승리입니다.”
“으으윽!”
“국민 여러분, 첫 번째 아군은 미국 애플! 10년간 200억 불 OEM 계약을 채결했으며 이 중 80억 불은 곧 현금으로 지원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두 번째 아군은 중국! 5년간 총 300억 불. 이에 더해 20억 불 상당의 원부자재가 지금 배를 타고 있습니다.”
“와아아아!”
“세 번째 아군은 국민 여러분입니다. 컨소시움의 외환보유액은 총 270억 불이며, 국민 여러분께서 같이 투자해 주신다면 이 환란을 끝장낼 수 있습니다. 저희를 믿어 주신다면 투기꾼들 돈으로 국민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합류하십시오!”
“와아아아아아아!”
내 눈에는 벌써 환란의 끝이 보였다.
우리 국민의 힘은 위대하니까.
전시에는 더더군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