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환율은 하늘을 뚫고
외환은행 본점.
뻑. 뻑.
외환은행장은 연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은행에 근무하며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워 보긴 처음이었다. 외환 계좌를 동결하는 것은 국가 신용도에 큰 타격임에도 불구하고 이틀째 지속되었지 않나. 방금 전 TV에서 계좌 동결을 풀겠다는 대통령 담화가 발표되었지만 어째 한국은행으로부터 공문이 내려오질 않았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기가 울리자마자 받았다.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놓고 구둣발로 밟아 꺼 버렸다. 사무실 바닥이 더러워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보세요. 한은 총재님?”
-아, 예. 접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공문 발송은 조금 있다 할 테니, 일단 환전부터 합시다.
“예? 환전이라니요? 외환 계좌부터 풀어야죠. 당장 부도 위기에 처한 회사가 수십 개입니다.”
-아뇨, 환전이 우선입니다. 스마트 컨소시움 원화를 달러로 환전부터 해 주고, 외환 계좌 풉시다. 계좌 푸는 것도 프랑스, 일본, 미국 순으로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 어, 외자 투기 자본이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습니까?”
-말씀 잘 알아들으시네요. 순서가 중요하고 변동환율제 시행령도 타이밍을 적용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투기 자본 들어올 땐 고정 환율, 국내에 있는 프랑스와 일본 자금이 빠져나갈 때 변동환율 적용!
“우우… 제대로 돼야 할 텐데. 선후가 꼬이면 나라 망합니다.”
-스마트 컨소시움이 상황을 그리 만든다고 합니다. 우린 장단 맞춰서 북을 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실시간으로 연락 주십시오.”
-저 말고 스마트 컨소시움으로 연락, 아니 여기 제가 있는 대현전자로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한국은행 인력도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당분간 이곳이 우리 금융권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현재 컨소시움에서 보유한 달러가 300억 불이 넘는다고 합니다.
“어헉… 당장! 당장 인원을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협조 고맙습니다.
툭. 삐이익.
이렇게 한은 총재와 업무 얘기만 하고 전화를 끊은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벌컥.
외환은행장은 사무실을 튀어 나가 팀장들을 불러 모았다.
“이보게들. 지금 한은 총재에게 전화가 왔네.”
“은행장님, 대체 어쩌라고 하던가요? 지금 달러 지급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살아날 것 같네. 일단 달러 지급 요청은 모조리 환전해 주고, 일 잘하는 이들을 추려서 대현전자로 가게. 어서!”
“예?”
“스마트 컨소시움. 그곳에 활로가 있네. 모든 외환 거래는 그쪽과 협의해서 진행하게.”
대한민국 특유의 응집력. 위기 때 집결하는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 *
같은 시각, 일산 DJ 서재.
“휴우.”
DJ는 TV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기는 처음이었다. 다행히 YS가 협의를 받아들여 변동환율제를 대통령령으로 공표한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신이 YS의 차남을 특별 사면하는 데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YS가 정치 공작으로 받아들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롯이 믿고 행동해 주었다.
절대 문서로 남길 수 없는 협의였고, 그것도 직접 대면이 아니라 전화상으로 제의한 것인데 YS는 DJ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한때 군부 독재와 맞섰던 야당의 리더들이 아닌가.
“다행입니다. 역시 DJ께서 나서니 YS도 믿어 주는군요.”
“음,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DJ는 왕회장과 눈을 맞추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왕회장은 이틀 연속 자신을 찾아와 YS를 움직여 주기를 꾸준히 설득했었다. 정치적 거래로 경제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어 DJ는 갈등했었다. 변동환율제를 적용해야만 외환위기 극복이 가능하다는 왕회장의 말이 DJ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천재가 국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니 믿으셔도 됩니다.”
왕회장이 이틀 동안 설득했던 말이 함축적으로 녹아 있는 한마디였다.
“스마트 컨소시움의 유수한 사장이 그렇게 천재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대현건설이 회생한 것도 그가 성수대교 붕괴를 예측했기 때문이지요. 다리 무너질 것도 예측하는데, 외환위기는 진즉에 알았겠지요. 아마도 몇 번이고 작전을 짜고 고치고 했을 겁니다.”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왕회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거짓말은 같은 말을 반복할수록 어투와 논리가 어긋나게 마련인데, 주야장천 똑같았다.
“사업하는 양반들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하기 힘듭니다. 하는 말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되지요. 특히나 재벌에 근접할수록 그렇습니다.”
“돈밖에 모르는 저 같은 늙은이가 재벌이고, 그 천재 녀석은 재벌 말고 귀족이 되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믿으셔도 됩니다.”
“휴우, 이 와중에 농담을 하시는군요. 여하튼 저는 그 청년이 아니라 왕회장님을 믿는 것입니다.”
“으흠….”
“왕회장님은 제가 익히 봐 왔지요. 정치 자금 때문에 고생 많으셨고, 그걸로 뒷주머니를 차신 경우도 없었습니다. 탐욕스러운 재벌과는 다르다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DJ와 왕회장은 꽤나 잘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YS가 야당 인사이긴 하지만 집안은 그럭저럭 부유하고 교육도 잘 받은 편인 데 반해 DJ는 정말로 맨땅에서 자수성가한 정치인이었다. 왕회장도 그런 측면에서는 DJ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지난 대선에 나섰을 때도 DJ 쪽과는 거리를 뒀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DJ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치 자금은 언제나 부족했죠. 정치인에게 금전적 도덕성은 참으로 양날의 검입니다.”
“그렇지요.”
쓰윽.
왕회장은 품에서 무기명 채권을 꺼내 서재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정치 자금은 제 것만 쓰십시오. 제 마누라가 평생 모은 쌈짓돈이니 아주 깨끗합니다.”
“어허, 그런 돈을 어떻게 저에게….”
“국란이 닥쳤는데 금권 선거가 펼쳐지면 되겠습니까? 모자라면 제가 집이라도 팔아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허니 아무에게도 대선 자금을 받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왕회장은 다른 재벌에게 돈을 받지 말라는 말에 잔뜩 힘을 주었다. 표정도 따라서 굳어졌다. 유수한이 전화로 알려 주기를 서우그룹이 DJ를 포섭하게 되면 국란의 후속 처리는 곤경에 빠질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이 있으십니까?”
DJ는 정치인답게 물었다. 정치인은 정치자금이란 똥물에 손을 담글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야당이든 여당이든 이면으로 대가를 챙겨 주기 마련이다.
“대가가 없는 것이 조건이며, 다른 재벌에게 정치자금을 받지 않는다는 게 조건입니다.”
“어째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정권 교체를 이루시게 될 텐데, 깨끗한 돈으로 위대한 대통령이 되십시오.”
“정권 교체라.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군요.”
“천재 녀석이 그리 말하더군요. DJ는 하늘이 이때 쓰라고 아껴 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오호.”
DJ는 채권을 품 안에 넣었다. 마치 그것 이외에는 대선 자금을 쓰지 않겠다는 듯이 안주머니를 툭툭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사람을 불러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후문으로 조용히 나가야지요. 그 천재 녀석이 시킨 일도 있고 말이죠.”
“왕회장님을 부리는 사람이 있군요.”
“그래서 귀족인가 봅니다. 허허.”
왕회장은 중절모를 눌러쓰고 지하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러곤 후문에서 기다리는 액셀 기사에게 전경련으로 가자고 했다. 침침한 눈으로 휴대폰 버튼을 꾹꾹 눌러 전화를 걸었다.
부우우웅.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최현종 회장. 날세, 정영주.”
왕회장은 SJ 최현종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재 전경련 회장이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저에게 전화를 다 하시고.
“전경련에 출근 좀 하게. 나와 점심이라도 한 끼 하자고.”
-허허, 오랜만에 식사를 함께 하겠군요. 긴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올해 전경련 회장 임기가 다 됐지 않나? 내년에 누구에게 넘겨줄 건지는 최 회장 입김이 제일 셀 것 같아서 말이네.”
-어이쿠, 누굴 천거하려고 그러십니까? 내년엔 서우그룹 김중우 회장이 내정된 거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서 그러네. 내 부탁 하나 함세. 내가 앞으로 4년만 하겠네.”
-10년 전엔 퇴임하시며 다신 안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재임을 안 하는 관례도 있고….
“그땐 대현그룹 회장이었고, 이젠 대현그룹 명예 회장 자격일세.”
-아이고.
“내 부탁이라고 하지 않나. 들어주시게. 현임 회장이 그 정도 힘은 있잖나.”
-왜 그러십니까. 요즘 경제 상황도 이런데….
“그래서 더욱 해야겠어. 들어주게.”
-아이고, 이거 참….
“조용히 식사하면서 마저 얘기하지.”
왕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 정도 언질을 해 두면 차기 전경련 회장은 자신이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최 회장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재벌 1세대 아닌가. 왕회장인 자신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으음, 이것만 하면 녀석이 내 준 숙제는 모두 끝난 건가?’
왕회장은 그리 생각하면서 뒷좌석에 몸을 눕혔다.
‘그 녀석은 왜 서우그룹을 타깃으로 잡는 걸까?’
그러곤 서우그룹 김중우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되는 것은 막아 달라는 유수한의 부탁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느라 생각에 빠졌다.
‘서우그룹이 소련 방산 프로젝트를 가져만 갔어도 컨소시움에 합류했을 텐데….’
하나 유수한의 의도를 깨닫기는커녕 예전 일만 자꾸 떠올랐다. 예전 한소 경협 프로젝트를 논의할 때 자신은 소련 방산(방위산업) 프로젝트를 서우그룹에 주려고 했는데, 김중우 회장이 거절하고 결국 신성이 꿰차 버렸다. 지금에 와서는 신성이 10억 불짜리 러시아 국채를 가진 꼴이 되어 버려 그걸 총알 삼아 스마트 컨소시움에 합류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자신이 김중우 회장에게 방산 프로젝트를 넘긴다고 했을 때, 유수한은 피식 웃었던 것 같다. 마치 서우 측에서 거절할 줄 알았던 것처럼.
‘허… 녀석은 그때 이미 알았던 건가? 하아, 정말이지 믿기 힘들구만.’
왕회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받이에 더욱 몸을 밀어 넣었다. 결국 이 일에 협조하면 대현은 물론, 한국 기업 전체가 한 단계 성장한다는 말만 붙잡고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 *
우르르.
“여기 컴퓨터 셋업하면 됩니까?”
“예.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은행 전산을 따로 연결해야 합니다. 개별 포트를 열어 주세요.”
“독립 IP를 부여하겠습니다. 보안 프로그램은 파이오니어 V1.4를 쓰시면 됩니다.”
한국은행, 외환은행, 대현증권 등등 금융권에서 한 끗발 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집결했다. 요청하기도 전에 몰려들어 대현전자 전산 담당자를 앉혀 놓고는 컴퓨터를 셋업한다고 난리 법석이다. 역시 다이내믹 코리아답다.
“외환은행 팀장님, 환전은 모두 끝났나요?”
“예. 컨소시움이 요청한 5천억을 달러로 환전했고, 환투기 세력으로 의심되는 이들에게도 원화 환전을 모두 끝냈습니다.”
아예 환투기 세력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외환은행 팀장이었다. 외환은행 측에서 최고들만 뽑아서 보냈다고 한 말이 사실인가 보다. 외환은행은 1990년대 금융권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런 집단이 나중에 론스타 때문에 구조 조정 당하며, 한아은행에 합병되면서 흔적조차 사라진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면 이들은 내 전리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투기꾼들은 얼마나 뽑아 갔나요?”
“정확히 128억 불입니다. 이로써 외환보유고는 219억 불입니다.”
“계좌 오픈 시작하죠.”
“예!”
“프랑스 계좌부터 오픈하죠.”
촤르르르륵.
“2.1억, 1.4억, 3.2억… 으흠, 프랑스 쪽은 합계 43억 불 정도 예상됩니다.”
“걱정 말고 지불하세요.”
계좌를 오픈하자마자 달러 지급 요청이 쇄도한다.
“만 불짜리 지급 요청이 수백 건입니다. 개인들도 달러 사재기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국란이 오면 의병도 나타나고 이런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돈 좀 벌어 보겠다고 국고가 어찌 되건 달러 사재기를 시도한다. 제 입으로 사회 지도층이라고 얘기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서민들이야 달러를 살 돈도 없을 테니 어차피 부자들의 게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나중에 자본주의 방식으로 응징을 해 주면 된다.
“모두 지급해 주세요. 대신 계좌주(主)를 파악해 두기 바랍니다. 나중에 쓸데가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촤르르륵.
달러를 사재기하는 개인들의 힘도 대단하다. 30분 정도를 지켜보니 자그마치 천만 불 가까이 빠져나간다. 한 푼이 아쉬운데 말이다.
“일본 계좌 오픈합니다.”
“일본 자금은 100억 불은 족히 될 겁니다. 위험….”
“오픈하세요.”
“예.”
촤르르륵.
외환 팀장의 예상은 정확했다. 거래 체결 화면이 수도 없이 갱신되며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순식간에 100억 불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 큰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수가 없는데, 정부의 외환 계좌 동결이 외국 투자자를 자극한 거다.
“외환보유고가 80억 불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지급 정지해야 합니다. 위험합니다.”
외환은행 팀장의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안 됩니다. 계좌 동결을 했던 마당에 지급 정지라니, 그러면 이번엔 외국 은행이 우리나라 계좌를 동결할 겁니다.”
국제 금융은 결국 신용 싸움이다. 한번 삐끗하는 것은 몰라도 반복되면 치명적이다. 내 돈이 들어오는 게 막히면 이 싸움은 끝장난다.
“으윽, 미국 쪽 계좌에서 150억 불이 빠져나간다고 이미 대기 중입니다.”
“미국 계좌는 정확히 오후 4시 29분 30초에 오픈합니다. 지급 요청 들어온 첫 계좌만 결제하세요. 5억 불이 넘지 않도록 하세요.”
“지급 정지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지불하면 내일 오전 중으로 외환보유고는 제로입니다. 환율 폭등 정도가 아니고 국가 부도입니다. 계산하신 상황이 맞습니까?”
“문제없어요. 내일 오전 8시 컨소시움에서 100억 불 입금합니다. 그와 동시에 변동환율 적용합니다. 환율 폭등만 시키면 됩니다.”
털썩.
“오, 하느님! 부처님!”
외환은행 팀장은 다신교를 믿나 보다. 부하 직원이 도저히 컴퓨터 엔터키를 누르지 못하자, 그 자리에 대신 앉았다. 그러곤 열심히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과 부처님을 찾는다.
“엔터 누르고 로비로 나오세요. 외환보유고 현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해야 하니까.”
“아이고, 이 판을 기자들에게 알리신다고요?”
“전쟁은 같이 하는 겁니다. 선동도 필요하죠. 누르고 나오세요.”
현재 시각 3시 58분, 외환은행 팀장은 꼼짝없이 30분은 저러고 있을 거다. 나는 복도로 나와 자판기부터 찾았다. 재수 좋게 박카스를 파는 자판기였다.
털컹. 딸깍… 꿀꺽 꿀꺽.
박카스를 마시고 자판기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자니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 수한 씨 심장도 강철은 아닌가 봐요. 박카스에 기대는 걸 보니.”
“케이, 언제 왔어?”
“수한 씨 브리핑 들으러 왔죠. 호호, 일은 잘돼요?”
“뻔히 알면서 그래. 100억 불은 준비됐지?”
“당연하죠. 이미 이 법인 계좌에 담겨 있어요. 내일 오전 8시 정각에 외환은행으로 이체하면 되잖아요. 호호호.”
케이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펄럭거리며 좋아라 한다. 손에 명품 핸드백 대신 돈다발을 드는 걸 백배는 좋아하는 여자다.
“그만 좀 웃어. 이 판국에 웃음이 나와?”
“아이, 저는 돈을 벌면 그냥 웃음이 나와요.”
“돈을 벌어? 설마 파라곤이 환투기 동참한 거 아니지?”
나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파라곤이 환투기에 동참하면 그냥 게임 셋이다.
“에이, 무슨 소리예요. 원유 말이에요. 대현상선에서 맡긴 원유!”
“브리핑 들으러 온 게 아니고, 정헌몽 회장에게 보고하러 왔구나.”
케이는 카자흐스탄 구리채굴권을 팔고 원유를 사 뒀다. 그걸 처분했나 보다.
“호호, 들켰네요. 제가 얼마에 팔았는지 아세요? 자그마치 33억 불이에요, 33억 불!”
채굴권 25억 불에서 원유로 바꾸면 10% 정도를 더 먹을 줄 알았는데 30%가 넘는 수익률이라니 놀랍다. 예상보다 총알이 5억 불은 더 생긴 격이다. 정말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케이가 너무 좋아한다.
“하하, 좋아해야 할 사람은 정 회장님인데 케이가 더 좋아하네?”
“호호호. 저도 1억 불 치 원유를 사 뒀거든요. 몇 달 만에 1.3억 불이 되었네요. 호호호호호.”
“잘됐네. 그 돈도 같이 컨소시움에 합류시켜 줘.”
“에에? 그건 제 돈인데요, 수한 씨.”
“그러니까 넣어 줘. 당신도 내 편이잖아. 아냐?”
“오오, 드디어 껴 주는 거예요? 그럼 전리품도 같이 나누는 거죠. 맞죠?”
원래는 미국인인 케이에겐 수수료 정도만 주고 전리품 분배에서는 배제하려고 했다. 한데 불안해서 안 되겠다. 케이를 분배에 끼워 파라곤이 적대할 가능성 자체를 아예 지워 버려야겠다. 지금 아시아 외환위기는 미연방준비제도(미국 중앙은행)가 주도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파라곤은 중립을 지켜도 감지덕지다.
“껴 줄 테니까 달러 있는 대로 합류시켜 줘. 얼마 가지고 있어?”
“으음, 20억 불 정도?”
“당신이 재벌이네.”
“호호호호.”
웅성웅성.
케이와 얘기하다 보니 벌써 브리핑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나 보다. 외환은행 팀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게 서류를 가져온다. 외환보유고 잔액이 80억 불 밑으로 떨어졌다는 종이일 것이다.
“갔다 올게.”
“저는 그럼 정헌몽 회장님과 같이 TV로 볼게요.”
“그래.”
뚜벅뚜벅. 또각또각.
- *
미국 뉴욕 모처 호텔 VIP실.
-속보입니다. 외환보유고가 80억 불 밑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입니다. 전문가들은 속히 달러 지급 정지를 해야 하며, 정부가 사태 해결에 직접 나서야 한다며….
딸칵.
깔끔한 양복 차림의 백인 사내들이 이례적으로 한국 뉴스에 자막까지 넣은 녹화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 티모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부 차관보, 소로스 펀드의 조지 소로스, 론스타 펀드의 존 그레이켄이었다. 하나같이 월가에 입김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캉드쉬 총재님, 저 자막이 제대로 된 것이 맞습니까? 스스로 외환위기를 인정하고 있잖습니까?”
“후후, 스마트 컨소시움인가 뭔가가 정부와 엇박자를 내고 있다고 봐야지 않겠나. IMF에 손을 벌리라고 정부를 압박하는 게지. 기업가들이야 저 살기 바쁠 테니까. 쯔쯧.”
IMF 총재는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한 한국 경제를 비웃는 듯 혀까지 찼다.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여하튼 회장님들 작전은 잘되고 있습니까? IMF가 나서면 물러나야 하니, 시간이 별로 없어 보이네요.”
가이트너 차관보는 소로스와 그레이켄에게 말을 돌렸다.
“후후, 한 달이면 충분하죠. 나야 제조업으로 레버리지(물레방아) 돌릴 테니 별문제 없는데, 론스타가 좀 문제이지 않을까 싶군요.”
“문제는 무슨. 자네보다 나을 걸세. 원래 환투기는 은행을 먹어야 수익률이 좋은 거야.”
“한국에서 종합금융사라는 2금융권이 박살 난 것 같던데. 소식 못 들었나?”
“그 정도야 뭐, 좀 아깝긴 하지만 원래 쓰고 버릴 카드였으니 잊어버려야지.”
“아아, 알겠습니다. 레버리지 전략은 알아서 하시고, 단지 너무 크게만 벌이지 마십시오. 구제금융은 IMF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해서 고작 350억 불밖에는 안 되는 거 아시죠?”
가이트너 차관보는 숫자까지 들이밀며 환투기 거물들에게 다짐을 받았다.
“정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빚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후진국 경제를 적당히 휘저어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정확합니다. 정말로 죽여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차관보님, 확인이 필요한 것이 있군요.”
“뭔데 그러십니까?”
“큰손, 아니 일단 파라곤이 이 판에 끼어들지 않는 게 확실합니까? 몇 년 전 영국에서는 파라곤 때문에 제가 재미를 크게 못 본 거 아시지요?”
소로스는 파라곤이 끼면 짐짓 이 투기판을 망쳐 버리겠다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안심하십시오. 파라곤은 지금 우리 재무부에 한국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고 은근히 압박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IT 기업에 투자한 돈이 좀 있나 봅니다.”
“빼지 않을 셈인가 보군요. 공격할 리 없겠어요.”
“당장 빼기 힘든 지분 참여를 했나 봅니다. 여하튼 아무리 파라곤이라고 해도 연방준비제도(미국중앙은행)의 의도에 반기를 들 순 없을 테니 중립을 지킬 겁니다. 소로스 펀드가 파라곤 펀드를 넘어설 좋은 기회지 않겠습니까?”
“그럼 하나 더. 시타델은 어떻게?”
“시타델은 이 판에서 빠지는 조건으로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니 명심하세요. 중국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중국은 잘만 키우면 미국 국채를 잔뜩 사 줄 놈들입니다. 우리 목적은 어찌 됐든 빚을 수출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중국은 절대 건드리지 마십시오.”
“후후, 당연하지요. 일본은 소재와 정밀기계, 한국은 반제품 및 부품, 중국은 제조! 국제 분업이 미국의 최종 목표 아닙니까. 론스타도 한몫 거들겠습니다.”
“미국은 왜 뺍니까? 미국은 꼭대기에서 소비를 해야죠. 소비는 자본주의의 꽃이니까. 아시아 놈들이 허리띠 졸라매며 생산해서 대미 수출에 목숨 걸게 만드는 겁니다. 하하하!”
재무 차관보는 말끝마다 큰 그림을 설명하느라 바빴다. 미 정부가 이 일을 용인하고 그 이유를 투기꾼들이 오해하면 큰일이니까. 아시아 경제를 너무 몰아붙여 세계 거시 경제를 하락세로 몰아서는 절대 안 된다.
“충분히 이해하니 설명은 그쯤 하십시오. 한 달 뒤면 아시아 놈들은 미 국채 모으기에 바빠질 거 아닙니까! 미국인은 놀면서 소비만 하면 되고 마침내 미국은 파라다이스가 될 겁니다.”
“오호, 파라다이스! 내가 미국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지요. 하하하.”
“후후, 이런 선구자들. 내가 자랑스러워할 수밖에 없다니까.”
IMF 총재는 투기꾼들을 선구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농담인 듯 말했지만 뼛속 깊이 진심이었다.
“곧 신용 평가사들이 한국의 국가 신용도를 일제히 5단계 하락시킬 겁니다. 허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공격합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판은 한 달 이상은 못 끕니다.”
“아, 차관보! 알았다니까. 론스타만 잘하면 된다니까.”
“어이, 소로스. 당신만 잘하면 돼.”
“하하, 누가 많이 버나 내기할까? 난 이미 100억 불이나 환전했고, 네 배는 더 할 수 있어.”
“후후, 난 25억 불은 환전했고 80억 불은 곧 환전할 걸세. 두 배는 더 할 수 있네.”
“총공격 규모가 600억 불을 넘으면 안 됩니다. 한국 1년 예산이 딱 그 정도입니다.”
펑!
“하하, 멋지군. 다들 축배를 듭시다.”
소로스는 VIP실 오픈 바에서 샴페인을 들고 와서 펑 하고 뚜껑을 땄다. 그러곤 각자의 잔을 가득 채워 줬다. 원화에 대한 달러 환율이 너무 빠르게 폭등하는 것 같았지만, 사소한 불안쯤이야 샴페인에 훅 하고 녹여 버리기로 했다.
좔좔좔좔.
“건배!”
“건배!”
꿀꺽꿀꺽.
‘후후, 후진국 원숭이들이 금융을 어찌 이해해? 단순히 우연일 뿐이야. 지금부터 레버리지(환투기 물레방아)를 가동시켜도 충분해.’
소로스는 청량한 샴페인을 목으로 넘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손을 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10월 28일 새벽 1시.
“수한 씨, 급보예요. 신용 평가사들이 대한민국 국가 신용도를 하락시켰어요.”
“몇 단계나?”
“5단계요.”
“이제 투자 부적격 등급이겠군.”
“예, 맞아요. 외평채 발행은 원천 봉쇄되었어요. 수한 씨 예상대로예요.”
케이가 속삭거리자 옆에 있던 금융인들이 국제 전화를 걸어 본다.
해외 지사에 물어보지만 결국 케이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수준이다.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략 80명, 숙식을 모두 이 건물 내에서 해결하고 있다.
전화 회선도 전부 교환원을 둬서 통화 내용을 상호 검토한다. 보안은 생명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헌몽 회장이 이곳에 못 들어오는 이유라고 하겠다. 일단 들어오면 퇴근을 못 하거든.
“다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요. 모두 예상 범주입니다. 우린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대현증권 팀장님, 기업들 자산 매각 현황은 파악되었습니까?”
“예. 말씀하신 대로 모든 상장사의 조사를 끝냈습니다.”
“어떻습니까? 부채 비율이 200% 밑으로 떨어진 기업이 있습니까?”
“그런 회사는 대략 10%에 불과합니다. 대기업에선 대현, LK, 신성 정도입니다.”
“으흠,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부채 비율 300%를 가이드라인으로 하면 SJ, 한하, 로테, 효신 등등 몇몇 대기업이 더 들어옵니다.”
대현증권 팀장은 그곳까지는 공격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부채 비율 300%면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견딜 수는 있을 것 같다. 모든 부채가 투기꾼들 자금은 아니지 않나. 외환위기 후반에 외채 만기 연장을 시도해 볼 만하다.
“좋습니다. 300%를 가이드라인으로 하지요. 다들 아시죠? 몇 시간 뒤 오전 8시에 변동환율을 적용하고 100억 불을 원화로 환전합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환율은 단번에 1,000원을 돌파할 거고 10조의 자본금이 생깁니다.”
몇 번이고 강조한 내용이라 잘 이해하고 있다.
“9시부터 일제히 공격 시작합니다. 목표는….”
“하한가!”
“맞습니다. 부채 비율 300% 이상인 모든 상장사는 우리의 공격 대상입니다. 10조 내에서 모두 공매도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한 가지 여쭙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습니까?”
“네. 확신합니다. 자본잠식해 들어가서 부채 비율 높은 순으로 파산시킵니다. 그것만 생각하세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엄연히 주가 조작입니다.”
대현증권 팀장이 다른 이들을 대표해 보험을 드는 말을 꺼낸다.
“책임은 오롯이 제가 집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에 대해 지체하지 않고 답해 주었다. 사무실 내부에는 CCTV가 갖춰져 있으며 모든 대화는 녹음까지 되고 있다. 보안뿐 아니라, 여기 참여한 금융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다.
“한국은행 외환 담당자로서 컨소시움 회장님을 지지합니다. 투기꾼에게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 맞습니다.”
“외환은행 외환 거래 팀장으로서 컨소시움 회장님을 지지합니다. 위험하지만 현재로선 유일한 대안입니다.”
대현증권 팀장을 향해 각 은행 팀장들이 일어나 지지 의사를 밝혔다. 와중에 증권사보다 외환 거래라는 큰 그림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일명 물레방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뭣들 해요? 다들 들었잖아요. 우린 우리 일을 합시다.”
“예, 팀장님.”
타타타타타….
대현증권 팀장이 자리로 돌아가며 손을 마구 휘젓자 증권사 직원들의 손이 바빠진다. 투기꾼들에게 앞서 일거에 공매도를 때리려면 준비가 필요하니까. 종목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나.
“이런 일을 내 손으로 하게 될 줄….”
“그만해!”
타타타타타.
증권사 직원들 중에는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글썽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처음으로 상장사 1천 개를 돌파했다며 환호를 질렀던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이젠 이 중 수백 개가 무너질 것이 뻔했다.
무심코 혼잣말을 하던 직원에게 불호령을 내린 대현증권 팀장. 그조차 눈이 시뻘게져서 더 크게 타이핑을 해 댔다.
- *
10월 28일 오전부터 매일같이 속보가 쏟아졌다.
-속보입니다. 대한민국의 신용도가 5단계 하락하였습니다. 1,500억 달러의 외채에 비해 외환보유고가 턱없이 부족한 이유….
-속보입니다. 변동 금리 시행령이 적용되자마자 환율이 1,100원대를… 아니, 방금 1,200원을 돌파했습니다. 금융권은 당혹감을….
-속보입니다. 스마트 컨소시움이 100억 달러에 달하는 긴급 수혈을 실시했습니다. 금융권에서는 가뭄에 단비라며 환영….
-속보입니다. 연일 증시는 하한가 행진 중에 있습니다. 오늘로 다섯 번째 사이드카가 발동되었으며, 주가 600선이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
뉴스 앵커조차 표정 관리를 못 했을 정도였다. YNT 뉴스 채널은 아예 1층 로비에 진을 치고 실시간으로 뉴스를 전했다. 매번 기자회견을 요청할 필요가 없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타타타타.
사무실에선 딜러들의 타이핑 소리만 가득했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간혹 이마를 짚으며 길게 한숨을 쉬는 것이 전부였다. 누구 하나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 *
10월 31일.
“컨소시움을 당장 해체하라!”
“주가 하락의 주범! 매국노를 당장 체포하라!”
대현전자 정문에는 시위대가 몰려들어 난장판이었다. 이미 온갖 방송에서 스마트 컨소시움이 주가 하락을 조장한다는 투의 뉴스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확성기까지 틀어 댔기에 고함 소리는 사무실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 아니던가. 조만간 항의가 응원으로 바뀌길 기대할 수밖에.
척. 척.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대현증권 팀장이 내게 다가왔다. 오늘따라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투기꾼들에게 한 방 먹일 때가 왔나? 생각보다 빠르다.
“산미그룹 자본 잠식 60% 달성했습니다.”
“빠르네요. 불과 나흘째인데.”
“저도 이리 쉬울 줄은 몰랐습니다. 산미 주식이 이미 하락세였던 데다 800%가 넘는 부채 비율을 까발리며 공매도를 시도했더니 팔자 주문만 쏟아졌습니다. 게다가 자산은 부동산으로 모두 묶여 있어 경영진은 일체의 반등을 시도조차 못 했습니다. 계열사 모두를 나흘 연속 하한가로 밀어붙이고, 공매도 보증을 모두 산미유통에 걸쳐 놨습니다.”
“산미유통이 순환 출자 목줄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이제 그룹 전체를 언제든지 파산시킬 수 있습니다.”
“흑자 계열사는 있던가요?”
“산미특수강이 유일하게 분기 흑자 5%를 달성한 적이 있습니다.”
대현증권 팀장이 서류를 내밀었다. 산미그룹의 자본 잠식 결과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산미그룹은 원래 1997년 상반기에 파산했었다. 내가 한부그룹에 긴급 수혈을 했기에 특수강 사업을 보유했던 산미그룹은 그 나비효과로 여태 생명줄이 붙어 있었던 거다.
“산미의 자산은 얼마입니까?”
“부채 비율을 감안하면 부동산으로 1.7조 정도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21세기 인간으로선 이해가 안 되는 숫자지만 사실일 것이다. 1990년대엔 재계 26위 그룹의 자산이 고작 1.7조이며, 빚으로 여덟 배나 부풀려져 14조짜리 그룹이라고 떵떵거리고 있었다.
“1.7조면 회사 두 개는 건질 수 있겠군요.”
“예. 산미특수강과 산미유통을 추천합니다.”
“오늘 중으로 상한가 자신 있습니까? 오늘은 토요일이라 이제 2시간밖에 안 남았습니다.”
1997년에는 우리나라 증시가 토요일 오전까지 장이 열렸다. 31일 토요일 미국 투기꾼들에게 한 방 먹이기엔 적당한 날이다. 놈들은 공매도 때리고 월말 정산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투기꾼들에게 한 방 먹이셔야죠. 10조나 배팅하셨는데, 지금 흔들리시면 어쩝니까?”
대현증권 팀장다운 말이다. 아마 나 말고 자신에게도 하는 말일 것이다.
“상한가 자신 있냐고 물었습니다.”
“…발표만 해 주시면 문제없습니다.”
대현맨답게 문제없다고 한다. 신성맨이었으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을 거다. 내가 대현을 좋아하는 이유다.
“좋네요. 즉각 두 회사는 공매도 멈추고 매입으로 돌아서십시오.”
“예.”
뚜벅뚜벅.
나는 대현증권 팀장이 준 서류를 들고 곧바로 로비로 내려갔다.
“컨소시움 정례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주식 조작 즉각 중단하라!”
“즉시 긴급 수혈하라!”
고려일보, 동하일보 기자가 고함을 쳤지만 깨끗이 무시하고 발표를 이어 갔다. 고함이나 칠 줄 알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다.
“컨소시움은 산미그룹에 최후통첩을 합니다. 산미 총수 일가는 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고 산미특수강과 산미유통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의 주식을 즉각 소각하고, 청산 절차를 밟기를 권고합니다. 총수 일가가 경영권을 포기하고 1.7조의 자산을 컨소시움에 위탁하면 산미특수강과 산미유통의 회생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경영권 복구는 청산 이후에 추가 논의하겠으며, 이 최후통첩은 경영권 복구의 마지막 기회이지, 협상 대상이 절대 아님을 밝힙니다.”
“헉!”
기자들은 입을 쩍 벌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긴급 수혈은커녕 그룹을 통째로 파산시키겠다는 의미였으니까.
“미쳤어! 뭐 하나 싶었더니 산미그룹을 노리고 있었냐! 그다음은 어디야! 기하그룹이냐!”
고려일보 놈이 또 발작을 한다. 다른 이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내 발표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가? 직접 의도를 털어놓으면 명백히 주가 조작이 된다. 투기꾼들이 나를 소송전으로 끌어당길 빌미가 될 수 있다.
“YNT 속보입니다. 지금 스마트 컨소시움에서 산미그룹을 파산시킨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주가 조작의 실체가….”
속이 타는 와중에 YNT 기자가 TV 카메라를 향해 속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으잉? 앗! 그런 거구나! 이거 반격이네! 만세! 스마트 컨소시움 만세!”
드디어 내 의중을 아는 이가 나타났다. 그래, 한국 기자들이 다 어용이고 바보는 아니다.
팟!
소리친 기자가 달려가 YNT 기자의 마이크를 뺏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국민 여러분, 대한경제 김준수 기자입니다. 지금 컨소시움 발표를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반격할 때입니다. 공매도 때린 투기꾼들을 박살 내고 성실한 투자자가 수확을 시작할 때입니다. 기회는 시장 닫힐 때까지 단 2시간입니다. 방금 유수한 사장이 발표한 상한가 종목에 주목하십시오. 이건 주가 조작이 아니라 경제 독립운동….”
휴우, 정말 다행이다. 경제부 기자 중에 내 의도를 알아차린 이가 있었다.
퍽!
대한경제 기자는 말을 맺기도 전에 YNT 기자에게 멱살이 잡혀 나뒹굴었다.
“죄송합니다. 방송 진행에 다소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르르르르.
“뭐해, 어서 가야지! 어서!”
말귀를 알아들은 기자들은 서둘러 주식 시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YNT 기자의 공허한 보도가 텅 빈 로비를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