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벌컥.
“수한 씨, 큰일 났어요. 한국은행이 외환 계좌들을 모두 동결시켰어요.”
“뭐 그리 놀라? 이미 예측했던 일이잖아.”
“설마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죠. 외환보유고가 얼마 없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건데.”
제3자인 케이가 보기에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간에 그 일에 정치를 섞어 대면 적을 이롭게 하는 짓거리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와중에 내 계좌는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통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어쩌고 있어? 신호탄 쐈어?”
“예, 쐈어요. 투자자들은 그 어떤 손실을 감수해도 한국 시장에서 즉시 철수하기를 권고한다며 아주 강력한 경고를 했어요.”
“국가신용등급은?”
“10월 28일에 발표할 거래요. 자그마치 5등급이나 내리는 걸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예요. 아마 역사상 가장 큰 폭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가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서 독단적으로 외환 계좌를 동결한 거다. 원래 역사에도 그랬지. 미 정부가 순순히 돈을 빌려 줄 리 만무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의사를 타진해야 ‘한국 정부가 위기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구나.’ 하는데, 신용평가사는 외환보유고가 텅텅 비어 버리자 한국 정부에서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여긴 거다.
“휴우… 5단계가 하락하면 투자 부적격 등급이군. 외평채 발행은 꿈도 못 꾸겠지. 역시 총알은 우리 것밖에 없겠어.”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일이 눈앞에 닥치니 씁쓸하다.
“수한 씨, 외평채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환투기꾼들이 집결하고 있어요. 지금 환율로 레버리지 시작하면 아무리 수한 씨라고 해도 못 막아요.”
환투기의 기본은 말 그대로 원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가정하에 자본을 부풀리는 데 있다.
환투기꾼의 물레방아는 공격 초반에 원화를 달러로 지속적으로 환전하며 원화 환율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환율이 정점에 달하면 달러를 원화로 바꿔 엄청나게 부풀려진 자본으로 한국 기업과 은행을 사냥하거나, 잠시 환율이 정상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억 불씩 챙겨서 한국 시장을 떠나는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 원화 환율이 1달러당 2천 원에 육박했다가 사흘 만에 1,500원으로, 일주일 뒤에는 1,300원까지 떨어진 이유가 그것이다. IMF 구제 금융이 들어와서 환율이 안정되었다고 언론에 밝혔던 것은 그게 유일하게 합법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투기꾼들에게 당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따라서 환투기꾼들의 약점은 두 가지라고 보면 된다. 일단 원화를 달러로 바꾸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론 한국 기업을 사거나 환율 안정기에 재차 달러로 바꿔서 반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아, 일단 환율 가드 밴드부터 풀어야 한다는 거.”
환투기에 대항하려면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 우선 환투기 물레방아의 첫 번째 단계가 원화를 달러로 바꾸는 거니까. 환율을 방어할 것이 아니라 확 풀어 버려야 환투기꾼들의 달러 부풀리기가 초장부터 차질을 빚게 되는 거다. 피해가 없을 순 없고, 최소화하는 방안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쩌려고요. 국회에서도 반대가 극심했잖아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말 바꾸기를 잘해. 적당한 카드만 내밀면 된다고.”
“적당한 카드라니.”
“미국인들은 잘 이해 못 하는 일이 있어. 내게 맡겨.”
나는 주섬주섬 재킷을 챙겨 입었다.
“어디를… 혹시 청와대와 직접 담판을 지으려고요?”
“잘 아네. 케이, 내가 일할 동안 부탁이 있어. LK가 맡긴 5천억 있지? 그거 한국은행에 달러 환전 대기 시켜 줘. 그리고 곧 돌아올 테니까 저녁때까지 종금사들 모두 모아 주고.”
“알았어요. 이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죠.”
나도 사무실을 벗어났고 케이도 버지니아 트레이딩으로 돌아갔다. 이 비서가 차분히 차를 내 앞에 댔다.
“사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일산으로 가 줘요.”
“일산이라고 하시면….”
“DJ가 동교동에서 그쪽으로 이사를 했잖아요.”
“아, 그랬죠. 알겠습니다.”
나는 가는 와중에 박준태 의원에게도 전화를 했다. 그야 당연히 같은 당의 정치인이니 DJ와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문제없었다. 나는 연이어 왕회장에게도 전화를 했다.
삐리릭. 삐리릭.
-수한이가?
“저인 줄 어찌 아셨습니까?”
-요즘 나한테 전화 주는 사람은 니밖에 없다.
“시간이 없어서 짧게 말씀드릴게요. 저와 함께 DJ 좀 만나 주세요. 연이어 YS도 만나러 가셔야 합니다.”
-어이구, 급하긴 급한가 보네. 한데 내가 도움이 되겠나?
“하하, 한때 대통령 선거에서 여러 번 보셨던 분들 아닙니까. 약속을 하기엔 왕회장님만 한 분이 없죠. 박준태 의원을 YS 앞으로 들이밀 순 없잖습니까.”
-알았다. 가꾸마. 어디로 가면 되누?
“일산 DJ 자택으로 오시죠. 박준태 의원을 통해 방문 약속은 지금 막 해 뒀습니다.”
-가서 보자.
“예.”
부우웅.
이 비서는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잘도 달려 나갔다. 운전대 앞에서 내비게이션이 실시간으로 길을 잘도 알려 줘서 그런가 보다. 용인밸리에서 생산한 물건이며, 국책 과제에서 상금도 받은 프로젝트다.
이 IMF만 화끈하게 넘기면 이런 알짜배기 회사들이 하늘을 날 것이다. 내가 이런 기업들을 수도 없이 거느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IMF는 스마트 그룹이라는 새로운 대기업을 탄생시킬 것이며, 내 꿈은 완벽히 제 궤도에 들어설 것이다. 내가 IMF 극복의 선봉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 *
“유 사장, 어서 오시게. 지금 DJ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지.”
내가 DJ 자택의 후문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박준태 의원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증거였다.
“아뇨, 잠깐만요. 정영주 명예 회장님도 오시기로 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 그랬던가?”
“잠시만 기다리면… 아, 저기 오시네요.”
저 멀리서 회색 액셀이 굴러 오고 있었다. 10년이나 됐으니 바꿀 때도 됐는데 말이다.
차가 멈추자 중절모를 쓴 왕회장이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기사가 열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 급한 성격은 여전하다.
나는 왕회장에게 천천히 걸어가 부축해 줬다. 원래 열심히 일하던 양반이 갑자기 일을 멈추면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다. 예전과 달리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기에 보고 있기가 민망했다.
“어이, 됐다. 뭐, 부축까지 하고 그러나.”
“계단 조심하시라고요.”
저벅저벅.
DJ가 기다릴 곳은 뻔했다. 워낙 자택 연금을 많이 당했던지라 지하실의 대형 서재를 아주 사랑하는 분이잖나.
정원을 지나 자연스레 지하실로 향했다. 단아한 흑단목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와 특유의 책 냄새가 섞여 차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어서 오시게. 시절이 시절인 만큼 직접 마중을 못 나갔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시간이 없지 않나. 본론부터 말해 줘도 괜찮네.”
DJ는 정치인이긴 하지만 여러모로 박학다식한 양반이다. 현 상황 따위를 설명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직접 친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 변동환율제를 적용해 준다면 차후 김철현 씨의 특별 사면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입니다.”
“…….”
“그리고 올해 말까지 국고에 맡기는 외환에 대해서는 출처를 묻지 않겠다는 대통령 명령도 발표해 달라고도 해 주십시오.”
“그 말은 특검을 이대로 종료하자는 말인데….”
“그리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일을 합니다.”
“나보고 야합을 하라는 건가?”
시간이 아쉽게 흘러간다. 이런 얘기를 할 시간이 없는데 말이다.
“신용평가사들이 국가 신용도를 5단계나 떨어뜨리기까지 고작 하루하고 반나절밖에 안 남았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총재님, 아마도 총재님이 대통령이 못 되신 게 하늘이 이때 쓰시겠다고 했던 게 아닐까 싶군요. 이 청년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국란을 극복하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입니다.”
“정영주 회장.”
왕회장의 말에 DJ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수한아, 여기는 내가 일 처리 하꾸마. 니는 돌아가서 일해라. 청와대도 원래 내보고 친서 들고 들어가라고 하려 한 기제?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하꾸마.”
“왕회장님, 내일 오후에 외환 계좌 동결을 풀면서 변동 환율도 같이 하시면 됩니다.”
“내일 오후. 알았다.”
왕회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등을 떠밀어 계단 위로 내몰았다. 내가 이대로 정치권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배려였다. 역시 왕회장. 내 편이다.
“그럼 저는 종금사 파산시키러 갑니다.”
“오이야.”
“허헉!”
“유 사장, 그게 정말인가?”
내가 대답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왕회장을 앞으로 들이밀었고 작전과 시각까지 알려 줬으니 여기서 해야 할 일 처리는 끝난 거다. 나는 허리를 굽혀 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정치는 내 소관이 아니다. 내가 직접 대선 자금을 대 줄 수도 없잖나.
- *
웅성웅성.
이 비서는 다시금 나를 용인밸리로 데려다 놓았다. 벌써부터 중앙 회관 대회의실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있었다.
“정숙해 주세요. 사장님 오십니다.”
“오!”
“으흠, 대체 뭘 어쩌려고 하시는지.”
케이는 용인밸리에서 잘나가는 투자사. 종금사 못지않게 발언권이 있기에 간사를 맡았다. 용인밸리에 입주한 세 개 종금사 이외에도 열 곳은 넘게 참석한 것 같다.
국내에 30개 정도 있는데 내가 모두 쓸어버려야 하는 회사들이다. 그런 의도를 알고 있는 자들이 있는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꽤나 된다.
꾸벅.
“바쁘신 와중에 이리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급박한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허면, 긴급 수혈을 종금사로 확대하시려는 의도로 봐도 되는 건가요?”
먼저 치고 나오는 어느 종금사 사장. 이름 따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도 마찬가지인지 자기소개를 건너뛰어 버린다. 돈놀이를 하는 양반들이 이런 자세로 나온다는 것은 내가 일전에 했던 선전포고를 제대로 인식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 아직도 그런 헛된 기대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오늘은 선전포고에 이어 최후통첩을 하려고 이리 모은 겁니다.”
“최후통첩이라니요?”
“긴말 필요 없고요. 단기 외채 상환권을 한국은행으로부터 위임받을 겁니다. 허니, 종금사 여러분들께서는 투자하고 있는 부동산, 대출 채권, 기타 담보를 모두 처분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셔야지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허억!”
쾅!
“이보시오, 유 사장. 감히 무슨 권리로 우리 자산을 팔라고 하는 거요? 단기 외채는 국가 보증을 통해 가져온 건데 우리가 뭔 불법을 저질렀다고 그러는 거요? 이건 정당한 금융 거래였소이다.”
“누가 불법이라고 했습니까? 삽질이라고 해야죠. 한마디로 개지랄에 가까운 멍청이 짓을 한 겁니다.”
쾅!
“이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런 회의는 필요도 없어. 긴급 수혈은커녕 우리를 헐값에 집어삼킬 셈이야!”
“맞아, 듣고 있을 필요도 없어! 다들 나가자고! 어서!”
“뭣들 해! 나가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자고 종용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하하하. 멍청이들.”
“호호호, 내 평생 이런 꼴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내가 피식 웃어 버리자 케이는 옆에서 맞장구를 쳐 준다.
쾅!
“말 다했어!”
종금사 사장 중에 가장 공격적인 언사를 내뱉던 이가 내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 가소롭기 짝이 없다.
“퇴장하십시오.”
“뭐?”
“나가라고요! 이 비서, 저 양반 끌어내요!”
“옙!”
이 비서가 종금사 사장의 팔을 휙 잡아챘다. 나가자고 종용하던 놈이 진짜 나가라고 하니까 버틴다. 여기서 밀당 따위를 하려는 놈은 내보내야 한다.
“놔! 놓으라고!”
“나가야 놓지요! 안 그렇습니까!”
퍽! 쾅!
이 비서가 사장 한 명을 회의장 밖으로 훅 하고 밀어 내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문틈 사이로 어이없어 하는 놈의 얼굴이 잠시 보였다.
“또 나가실 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산을 제값 받고 팔수 있는 시점은 오늘 이 자리뿐입니다.”
“…….”
좌중에 누구 하나 일어서지 않았다. 아까 쫓겨난 이와 목소리를 같이 내던 누군가는 의자를 꼭 붙잡고 앉아 있다. 결국 내게서 돈이 나올 것 같으니 자리를 지키는 거다.
“유 사장님, 처분 내역은 이미 살펴봤습니다만… 부동산을 공시지가의 80%로 내놓으라 하시면 어쩝니까? 그리고 대출 이자까지 넘기라 하시면 저희는 파산입니다.”
“이왕 파산하시는 거 저에게 파산하라는 의미입니다. 안 그러면 단기 외채를 스스로 갚으시든지.”
“도와주십시오. 단기 외채만 해결해 주시면 종금사는 회생할 수 있습니다. 종금사 직원들이 전국적으로 2만 명이 넘습니다. 우리 직원도 중소기업과 똑같은 직장인들 아닙니까.”
공격적인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이젠 감정에 호소하는 이들. 역시 영업하는 사람들답다.
“여러분은 돈놀이한답시고 나라 경제를 도박판에 올려놓으신 분들입니다. 은행에 다시 입사를 하든, 증권사에 입사를 하든 하세요.”
결국 종금사 직원들이야 IMF가 지나면 새마을금고나 신협 같은 제2금융권으로 자연스레 직장을 옮긴다. 종금사 경영진은 여기서 모두 잘라 버려야 한다. 어설프게 살려 뒀다간 세계 금융 위기 때마다 우리나라 전체가 흔들흔들한다.
“종금사 자산을 담보로 가지시고 단기 외채 상환을 부탁드립니다. 지금에야 어디다 팔 순 없지만 부동산은 언제든 큰돈이 되지 않겠습니까. 없어지는 돈도 아닌데, 제발 도와주십시오.”
“분명 오늘까지만 거래하겠다고 했습니다. 케이, 이 분들에게 현실 감각을 좀 일깨워 주겠습니까?”
“그러죠. 나눠 드린 자료에는 동남아, 홍콩, 싱가포르의 일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상위 30%의 금융 회사를 기준으로 평균 자본 잠식률은….”
케이가 서류를 뒤적거리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쭉쭉 해 갈수록 종금사 사장들은 인상이 구겨지다 못해 울상으로 변했다. 케이가 들이미는 자료는 근거 및 수치가 명확했기에 감히 딴죽을 걸지 못했다.
“…금융 회사들의 자본 잠식률이 80%가 넘다니 너무 과장되어 있습니다. 뭐, 동남아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우리나라 종금사는 그렇게까지는 절대….”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아니라고 거짓말하실 거면 나가세요. 사장님 회사와는 거래 안 합니다.”
“헉! 유 사장님, 제 말씀은 그게 아니고.”
“이 자료에서 조사된 바를 근거로 각 종금사의 자산을 내가 처분해 줘도 당신들이 빌려 온 단기 외채의 50%도 채 못 갚아요.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면 더 떨어지겠죠. 다시 오르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까요? 그때까지 사장님들 회사가 유지될 것 같습니까? 내가 외채 막아 주고 대출을 인수하겠다고 할 때 파산하세요! 지금 당장! 그럼 구속은 면할 겁니다.”
“파산이 답이에요. 그게 여러분이 고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책이에요.”
케이마저 단호하게 한목소리를 냈다.
종금사들은 대부분 상장회사다. 이 부실 덩어리는 공매도가 열흘 정도만 이어져도 단박에 자본 잠식이 일어나고 파산하게 된다. 즉, 환투기꾼들에게 환전 창구 역할밖에 못한다. 지금 외환 계좌가 묶여 있을 때 단박에 파산시켜야 한다.
“도, 동양종금은 서명하겠습니다. 자산 처분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한 명이 나섰다. 자산 담보를 정리한 서류를 품에서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빌어먹을 인간. 뻔히 준비를 해 와서는 나를 몰아붙여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했던 거다. 내가 워낙 강경하게 나가니 압박을 포기한 거다. 고객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전과자가 되는 것보다는 재기에 유리할 거라는 계산이 섰을 거다.
“외채 상환 9억 9천만 달러. 10억 불 안 넘기려고 고생하셨네. 자산은… 케이, 동양종금은 어찌 되지?”
“빌딩과 부동산이 많네요. 7억 7천만 불까지는 쳐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중 주식 소각에 3천억, 대략 3억 불을 지출해야 하니 4억 7천만 불이 남네요.”
“4억 7천만 불이라고 하네요. 남겨 드릴 돈은 없겠군요. 서명하시겠습니까?”
“예, 하겠습니다.”
동양종금 사장은 신음성을 흘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산 매각 서류에 서명을 했다. 이 작자들 회생 불능이라는 거 뻔히 알고 있다.
“다음 없습니까? 동양이 마지막인가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뛰어왔다.
“제양종금은 자산을 넘기겠습니다.”
“저희 경신종금도!”
“이보게들, 원래 약속과 다르지 않은가?”
“그럼 산와는 빠지시게.”
저들끼리 분열을 일으킨다.
“으음? 이 와중에 담합을 하려고 했어요? 산와종금 거래 안 합니다. 나가세요, 당장!”
“아….”
“이 비서, 끌어내요!”
“옙!”
“유 사장님, 그런 의미가 아니고 제 말씀 좀….”
퍽! 쾅!
산와종금까지 내쫓자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다.
“저희도 팔겠습니다.”
“저, 저희 회사도!”
“진작 그러시지.”
다음 날 모든 조간신문에는 속보가 실렸다.
「28개 종금사 파산 선언! 스마트 컨소시엄이 모든 자산과 권리를 승계!」
대한민국의 30개 종금사 중 2개의 종금사를 제외하고 모두 파산해 버렸다. 주식시장에서도 당연히 거래 중지. 주식은 소각되어 주주들에게 나눠 줬다.
공매도를 준비 중이던 환투기꾼들은 손쉬운 먹잇감이 없어지자 솔직히 당황했을 것이다.
나 또한 종금사 처분에 자그마치 100억 불 가까운 돈이 들어갔기에 어퍼컷이 아니라 잽을 날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들어와, 환투기꾼들. 대한민국 제조업 주식에 들어와서 공매도 한번 날려 봐!”
내가 깔아 놓은 판에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제 환투기꾼은 환전 창구로 제조업 주식을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조간신문을 보고 있노라니 첫 단추가 아주 잘 끼워졌음을 실감했다. 신문에서는 종금사 파산에 대해 수많은 우려를 내놓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경제학 교수들은 기고문을 통해 내 행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교수들이 기고문에서 아주 어렵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속칭 물레방아의 1단계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잘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환투기꾼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국내 은행에서 원화를 대출받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보증하는 수출 신용장이나, 외자 채권 등을 담보로 맡기고 원화를 대출받는다. 물레방아를 돌리는 1단계라고 하겠다.
2단계는 그렇게 대출받은 원화를 한꺼번에 달러로 환전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금융시장이 그리 크지 않은 데다 2.25%의 가드 밴드를 가지는 고정환율제 국가이기에 단박에 2.25%만큼 환율이 올라 버린다. 시중 은행에서 달러 품귀 현상이 발생되기 시작하니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2단계이며 비로소 물레방아가 한번 돌아간 거다.
여기서 국가 중앙은행, 즉 한국은행이 외환보유고가 충분하면 투기꾼들이 아무리 물레방아를 돌려도 별로 실익이 없다. 한국은행이 환율 방어를 위해 시장에 달러를 공급하고, 금리를 올려 원화 가치를 끌어올리고, 외환보유고 잔고를 보여 주며 외평채를 발행하면 환율은 제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투기꾼들은 물레방아를 한 번 돌릴 때마다 1.75%의 수수료를 물어야 하며, 연리 수 의 대출 이자, 심지어 대규모 자금을 운용해 얻을 수 있는 기회비용까지 감안하면 2.25 내에서 움직이는 환율제에서는 아무리 귀신같은 투자자도 수익을 남길 수가 없다. 물주들에게 돈을 돌려줄 때 뺨 맞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금 환투기꾼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임을 이미 눈치챘다. 따라서 물레방아를 계속 돌려 국가가 고정환율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만드는 거다. 환율이 폭발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단계로 접어들면 3단계라고 할 수 있다.
3단계가 IMF 구제 금융이 들어오는 시점이다. 이때서야 환투기꾼은 환호성을 지르게 된다. 왜냐고? 드디어 공격을 멈추고 돈을 싸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때가 다가온 거거든.
IMF가 구제 금융을 지원한다느니 긴축재정을 권고한다든지 떠벌리며 한국 정부를 돕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환투기 세력에 ‘많이 먹었다 아이가. 그만해라. 더 먹으면 진짜로 한국이 회복 불가능까지 망가진다.’라고 신호를 주고 ‘너희가 먹은 자금도 안전하게 챙겨 갈 수 있도록 한국 정부 조져 줄게. 그만해.’라는 다짐까지도 해 주는 거다.
그럼 환투기꾼은 달러를 일시에 원화로 환전하며, 끝까지 빨대 꽂겠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그 돈으로 한국 기업을 사냥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때부터 한국에 외환이 급속도로 쌓이며 환율은 단 며칠 만에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원래 역사에서 IMF가 들여온 돈은 고작 35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돈이 다 들어오기도 전에 1,500억 달러의 외채가 해결되어 버렸다. 단기 채권이 만기 연장되기도 하고, 일부는 장기 채권으로 변하기도 했다. 600억 달러 이상이라고만 여겨지던 환율 공격도 단박에 멈춰 버렸고 말이다.
환율이 정상을 찾아가면 이제 4단계. 환투기 자금은 수십, 수백 %의 수익을 챙겨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우리나라 돈은 외환시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돈을 싸 들고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대규모 송금이 필요한데, 우리나라가 막판에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잖나. 조세법을 들이밀며 세금을 부과하고 불법적인 요소가 없었는지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원래 역사에서 IMF의 위력이 여기서 발휘되었다. 한국의 경제 주권을 넘겨받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한국 조세법에 개입해 대한민국 정부가 외국 자본이 얻은 수익에 세금을 고작 2.5%만 부과하게 만들어 버렸다. 외자 유입을 촉진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결국 환투기 세력이 공격을 멈추고 돌아가게 만들 구실을 만들어 준 거다.
IMF 위원장이 한국에 입국하고 조지 소로스가 며칠 뒤 따라서 입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로스 펀드는 호텔방에서 공격을 멈추는 대가로 거금을 챙겨 한국을 떠났고, 론스타 같은 악독한 놈들은 환전한 원화로 외환은행을 비롯해 서우, 신성 같은 대기업 주식을 닥치는 대로 매입하며 적대적 M&A를 시도한 것이다.
나는 이런 환투기 단계에서 1단계에 발목을 잡고 나선 거다. 종금사라는 대규모 원화 대출 소스를 없애 버린 격이다. 그럼 환투기꾼들은 원래 역사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초기 원화 자본을 마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케이, 환투기꾼들 자금 이동은 어떻게 되고 있지?”
“외환은행에 달러가 몰리고 있어요. 환투기꾼 자금이라 특정 지을 수는 없어요.”
케이는 환투기꾼 자금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하지만 환투기꾼 초기 자금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부분 환투기 초기 자금이라고 봐도 돼. 대충 얼마지?”
“환전 대기 중인데, 환전이 완료되면 외환보유고가 220억 불 내외가 될 거라는 정보가 있어요. 그중 97억 불 정도가 원래 외환보유고라고 보면 투기꾼들 돈은 120억 불 정도예요.”
원래 역사와 비슷한 숫자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는 97억 불에서 10월 말에 225억 불까지 올랐다.
원래 역사에서는 종금사를 통해 400억 불에 상응하는 초기 원화 자금을 더 확보하지만 이제 불가능하지. 그럼 환투기꾼은 다른 방식으로 원화를 끌어당기는 수밖에 없다.
“어찌 생각해? 120억 불, 원화로 10조 정도의 돈인데 놈들이 물레방아 돌리기를 시작할 것 같아?”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수한 씨가 대기업을 연합하고 있는데 그 정도론 턱도 없어요. 대한민국 한 해 예산이 70조 정도 되니까 최소한 40조 정도로 시작해야 70조까지 단박에 물레방아가 돌죠. 그 정도가 되면 대한민국 정부가 고정환율제를 폐기한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케이의 숫자 개념은 아주 좋다. 역시 금융 수학을 배운 인재답다.
환투기 세력의 최종 금액은 600억 달러, 원래 역사에서 1달러당 2천 원까지 치솟았던 환율을 감안하면 120조, 그 후 급락한 환율인 1달러당 1,300원을 감안해도 78조 정도 된다.
“나도 케이 생각에 동의해. 그럼 투기꾼들이 어디서 원화를 끌어당길까?”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 같은데요?”
“나도 확신이 필요해서 그래. 이번 도박은 판이 너무 크잖아.”
“달러의 유입 없이 원화를 대출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감안하면 답은 뻔하죠. 종금사 같은 허접 금융권이 있었다면 투기꾼들이 해외 자산을 담보로 빌렸겠지만, 지금은 다르죠. 제 생각엔 주식시장밖에 없어요. 그것도….”
“공매도! 맞지? 케이 생각도 그렇지?”
“예, 맞아요. 외환은행에서 달러를 환전한 이유도 그것 때문일 거예요. 10조로 주식시장을 흔들려는 거죠.”
“그럼 물레방아 설계도는 뻔한데… 그걸 당신 입으로 듣고 싶어. 내게 확신을 줘.”
“뭐, 꼭 그렇게 해야 안심이 된다면야. 말하는 거야 어렵지 않죠. 10조를 담보로 마구 공매도를 질러서 원화를 부풀리고, 그걸 달러로 바꿔서 환율을 폭등시키고, 다시 원화로 바꿔서 돈을 부풀려 주식시장에 공매도 작전 펼치고! 반복이에요. 주식시장과 환전 시장을 연결하는 설계를 할 수밖에 없어요.”
“원화는 준(準)기축통화라고 할 수 없으니, 영국에서 펼쳤던 환투기와는 전혀 다른 식의 물레방아를 돌린다. 맞아?”
“예, 맞아요. 원화는 외환시장이 따로 없기 때문이에요. 동남아 외환위기 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원부자재 선물 시장과 연계시키고, 태국은 왕실이 운영하는 국영 기업 주식과 연계시킨 설계와 비슷해요. 일본의 엔화는 준기축통화이니 외환 위기가 번지면, 외환시장에서 직접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어요.”
케이는 언제나 나와 말이 잘 통한다. 이런 이들이 한국 금융권에 주르륵 깔리면… 어휴. 아니다, 더 큰 도박이 될 수 있겠네.
자꾸 생각이 딴 쪽으로 흘러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케이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집중하자.
“몇 가지만 더 묻지. 생각을 정리하는 거니까 좀 도와줘.”
“예, 얼마든지.”
“일본에서 먼저 환투기가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해? 우리 쪽 작전을 펼치는 주요 레퍼런스니까 신중하게 답해 줘.”
“외환보유고가 탄탄하고, 국가 재정 규모가 미국 못지않게 커요. 그리고 변동환율제라 단기 수익률이 그다지 크지 않아요. 그쪽에서의 환투기 도박은 장기전으로 갈 거예요.”
“좋아. 그러면 일본 자금이 지금 환투기에 끌려올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요. 일본 정부는 수성을 택할 거예요.”
“지금 외환 계좌 동결만 풀리면 일본 자금은 판에서 빠지겠네. 맞아?”
“당연하죠. 그럼 환율은 폭등하겠죠. 뇌관이 터지는 거예요.”
“이미 폭탄은 터졌어. 중요한 건 이왕 터질 폭탄이라면 한꺼번에 터지는 게 나아. 연쇄적으로 터지면 다 타 죽어.”
“오~ 수한 씨 생각이 뭔지 알겠어요. 그래서 그리 꼬치꼬치 물었군요.”
케이가 환하게 웃는다. 여태 진중한 표정에서 갑자기 변하니 나 또한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려 웃음이 난다.
“하하! 내가 뭘 할 것 같은데?”
“판을 휘저을 셈이군요! 그쵸? 너 죽고 나 죽자! 터지기 직전의 수류탄 집어서 적진에 던지는 꼴이잖아요.”
“이야, 군대 갔다 왔어? 비유가 아주 찰진데?”
“호호호! 이래 봬도 제가 군인 집안의 딸이라고요.”
“비유 말고 정확한 답을 말해 봐. 그래야 내가 안심되지.”
“투기꾼이 움직이기 전에 환율 폭등! 주가 폭락! 시키겠다는 거잖아요.”
“맞아.”
“자칫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역적으로 몰리겠어요. 견뎌 낼 자신 있어요? 원상회복시키겠다는 걸 공개적으로 알릴 수는 없잖아요.”
환율 폭등과 주식 폭락을 시켜야 환투기꾼들의 물레방아가 삐거덕거리고 최종 수익률마저 떨어진다. 심지어 놈들이 주식 폭락장에서 공매도에 올인하면 내가 어느 정도만 원상회복을 시켜도 놈들은 돈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급하게 무릎까지 폭락시킨 주식시장에서 놈들이 발바닥까지 공매도를 때릴 때 내가 허벅지까지 복원시키면 최후의 승리는 내 것이 되는 거다.
문제는 말 그대로 그런 폭락장에서 개미 투자자들과 자금력이 부족한 중견 기업들이 무수하게 타격을 받는다는 것. 끝까지 견뎌 내면 되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알릴 수가 없다.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대한민국은 내 권역이라고. 내 권역에서 내 걸 뺏어 가는 놈은 죽어도 못 봐. 차라리 같이 자폭하는 한이 있어도 내가 먹을 거야.”
“수한 씨, 멋져요.”
“멋져? 어이구, 이 여자야. 그런 소리가 나와?”
“멋진 걸 어째요! 어서어서 터뜨려요. 수한 씨, 내가 뭘 하면 돼요?”
“우린 종금사 단기 외채 채무를 승계했으니, 100억 불을 써 버린 거나 다름없어. 그러니 우리 곳간부터 채워야지. LK가 내놓은 5천억에다 종금사로부터 받은 담보로 국가 외환보유고를 비워야 해.”
“그러면 정말로 국가 부도가 날 수 있어요.”
막상 막장 짓을 하려니 케이도 내키지 않나 보다.
“이미 국가 부도는 났어. 믿어. 놈들은 달러를 환전할 거야. 만약 이대로 놈들이 공격을 포기하면 대현에서 가지고 있는 원유를 풀어서 이번 겨울을 넘기면 돼. 그럼 우리 컨소시엄의 돈으로 단기 외채를 갚아 나가며 만기 연장을 협상하면 된다고.”
“어후, 살 떨려.”
“환전하면 알지? 공매도 마구 질러. 서우그룹부터 작살내는 거야.”
“시점은 언제예요?”
“아마도 오늘 오후부터겠지. 늦어도 그때는 해야 해.”
“오늘 오후. 급박하네요. 여하튼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하필 서우그룹이에요?”
이번엔 케이가 나를 통해 확신을 얻으려 하고 있다.
“부채 비율 1000%가 넘어가는 게 회사야? 그걸 방치한 회장을 경영자라고 부를 수 있어?”
“그러네요. 빚쟁이라고 불러야죠.”
“이번 기회에 세금으로 회장 행세하는 이들을 작살내는 거야. 확신을 가져도 돼.”
“휴우. 네. 알겠어요. 수한 씨! 파이팅!”
소파에 앉아 연신 팔을 위아래로 흔드는 그녀를 두고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빠져나왔다.
철컥.
회사 정문 앞에서 이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고, 이 비서 또한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아 일단 고속도로로 향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사장님?”
“글쎄요. 컨소시엄 사무실이 있는 대현전자로 갈 지, 일산 DJ에게 가야 할지….”
버지니아 트레이딩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TV에서 속보가 나오지 않았다. 왕회장님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전화조차 없다.
내가 직접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유 사장, 날세.
“예, 회장님.”
왕회장이 아니라 정헌몽 회장이 전화를 했다.
-지금 TV를 보게나. 긴급 속보를 내보낼 것이네. 정부가 우리 요구 사항을 들어줄 참인가 보네. 한국은행장이 이곳으로 직접 찾아오겠다고까지 하네.
“다행입니다.”
-어떻게 일 처리를 했기에… 뭐, 유 사장 능력에 감탄밖에 못 하겠군.
“아닙니다. 왕회장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오, 그런가? 아버님께서?
“예. 가서 뵙겠습니다.”
부우우웅.
이 비서가 속도를 올렸다. 영동고속도로로 휙 하고 올라섰다.
“이 비서, 내가 부탁한 일은 어찌 되었죠?”
“중국에는 제가 직접 가야 할 것 같고, 일본에는 미와자키 사장이, 미국에는 조너슨이 갔습니다. 시제품은 모두 들고 갔습니다.”
“아직 별다른 반응은 없나요?”
“관망 중인 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날짜를 11월 말로 말씀하셔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다른 쪽은 몰라도 중국 쪽 분위기는 잘 알 것 아닙니까?”
“기필코 성사시키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언제 출국하나요?”
“원하시면 내일이라도 가겠습니다.”
“내일부터 운전은 내가 하죠. 멀리서 수고해 줘요.”
“예.”
히든카드 세 장. 그중 하나만 에이스가 떠도 이 판은 극히 유리해진다.
잠시 눈을 붙이고 생각이 정리될 즈음 차의 속도가 확 줄어든다. 연이어 빙그르르 돌아 이천 톨게이트로 접어드는 이 비서. 손에 잡힐 듯 대현전자 정문이 가까이 보인다.
-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정부는 구국의 결단으로 대통령령을 공표합니다. 지금 이 시각부로 대한민국은 고정환율제 대신 변동환율제를 적용키로 하였습니다. 여야 최고 수준의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말씀드리니, 국회에서는 조속히 시행령을 승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동결되었던 외환 계좌 또한 즉시 재개될 것이니, 달러를 가진 뭇 기업인과 금융인들은 달러로 국고를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1인당 50만 불까지는 출처를 묻지 않을 것이며….
대현전자에 마련된 컨소시엄 사무실에 도착을 하니 이미 속보는 방송을 타고 있었으며,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YS가 직접 발표를 했다. 여야 합의를 했다는 것을 대통령의 명예를 걸고 공식화하니 국회에서 발목 잡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YS가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선포할 때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유 사장님, 이제 한국은행은 어쩌면 됩니까? 외환보유고는 97억 불밖에 없습니다.”
“고정환율제를 폐기했으니 왕창 비우죠. 제가 먼저 환전하겠습니다.”
“헉!”
“실시간으로 외환보유고 현황을 주식시장에 뿌려 주세요.”
“그, 그럼 단기 외채는! 당장 부도입니다.”
“걱정 마세요. 투기꾼들 달러 들어옵니다! 만약 안 들어오면 외환위기 자체가 안 오는 데다 단기 외채는 컨소시엄에서 막으면 최소한 올해 12월까지는 안전합니다.”
“아아, 어쩌자고….”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지 이식경 한국은행장은 죽을상을 지었다. 상관없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이순신 장군께서 멋진 말을 남겨 주시지 않았나. 죽으려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외환위기도 전쟁이다.
“이럴 시간 없습니다. 스마트 컨소시엄의 원화가 달러로 환전이 완료되면, 투기꾼들의 달러를 원화로 바꾸세요. 그다음 외환 계좌를 차례대로 오픈하세요. 변동환율제 적용해서요. 제일 먼저 프랑스, 그다음 일본, 그다음 미국!”
“어, 그럼 외자가 썰물처럼… 아!”
한국은행장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듣는다. 우리나라에 투자한 외국 자본은 미국, 일본, 프랑스 순이다. 순차적으로 빠져나가면 환율 폭등이다! 그 폭등이 내가 노리는 바다.
환율이 폭등하면 투기꾼들이 빌린 원화를 달러로 바꿔 총알을 부풀리는 2단계에서 물레방아가 덜컥하고 멈춘다.
미국 투기꾼들! 한국에서는 동남아에서 한 것처럼 쉽게 되지 않을 거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