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시대의 톱니바퀴
딩. 동. 댕.
-9시 뉴스입니다. 국회에서는 오늘 추경 1조 5천억을 가결하였습니다. 그간 한부 사태의 책임 소재를 두고 합의에 진통을 겪었던 여야는 한수승 경제부총리와 박준태 여당 최고의원이 동반 사퇴함에 따라 일단락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정부의 긴급 담화 발표를 들어 보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저 경제부총리는 한부 사태라는 초유의 부도 사태를 두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과와 우려 말씀을 드리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정경 유착의 폐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저와 여당 최고 의원은 책임을 통감하고… (중략)… 이러한 와중에 문민정부는 특검을 구성하여 철저하게 정경 유착의 고리를 척결하고…(후략).
참으로 오래도 걸렸다. 초유의 부도 사태를 맞이했다고 하면서도 추경 처리를 6월 마지막 날까지 끌다니 어이가 없다. 와중에 4월에 탈당을 하고자 했던 박준태 의원은 두 달이나 늦게 탈당한 셈이 되었다. 시간을 두고 DJ 대선 진영에 합류해야 하는데, 철새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겠군. 이래저래 쉬운 일이란 없는 듯하다.
“휘우우. 참 아슬아슬하게 일을 처리하네요. 보름만 늦었으면 추경도 편성 못 할 뻔했어요.”
케이가 TV를 보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는 수 없지. 야당도 대선을 위해서라면 이번 기회에 여당을 확실히 눌러놔야 하잖아. 말만 경제가 문제라고 얘기할 뿐 실제 상황이 벼랑 끝임을 아는 정치인은 별로 없을 거야.”
“DJ 정당을 믿을 수 있어요? 지금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케이는 국민회의라는 정당 이름보다 DJ 정당이라는 말을 썼다. 1990년대 한국 정치가 보스 정치임을 알고 있음이다.
“내가 볼 땐 최선이라고 할 수 있어. 정치 얘기는 그만하고, 나라 밖 상황 좀 알려 줘.”
DJ가 차기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IMF는 서우를 갈아 넣고 성공적으로 빠져나오지 않나. 내 작전은 원래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쓸데없는 나비효과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추경이 늦었다고 박준태 의원을 압박하지 못한 이유라고 하겠다.
“태국 중앙은행이 내일 오전 중으로 고정환율제를 변동환율제로 변경할 예정이에요. 태국 정부가 더 이상 환율 방어에 쓸 외환이 없다고 선언한 셈이니, 이제 환투기꾼이 환율을 폭발시켜서 한탕 하고 빠져나올 거예요.”
케이가 파라곤을 통해 얻은 정보이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일부터 환율이 변동되면 벌어질 일은 뻔하다. 환투기꾼뿐 아니라 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 은행들도 바트화 투매에 동참하게 될 거다. 지금 바트화에 묻어 두었던 달러를 빼내면 나중에 더 많은 바트를 얻을 수 있을 게 뻔한데 금융업자들이 그걸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자기 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8월이면 동남아는 초토화되고 싱가포르와 홍콩 증시까지 폭락하게 될 거고, 동남아를 뒷주머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일본도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일본 정부는 반응이 어때?”
“일본 정부는 동남아에 자금 지원을 할 생각이 없나 봐요.”
“풋! 케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본 놈들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 난 그들이 언제 자금을 빼는지 궁금할 뿐이야.”
“그렇군요. 그 질문에 답을 해 보자면 벌써 빼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태국의 타농 재무장관이 항의 겸 자금 요청을 하러 일본을 방문했는데 퇴짜를 맞았거든요. 내일 고정환율제 포기가 그 방문의 결과죠. 태국 정부는 참담할 거예요.”
“쩝. 그 정도면 상황이 뒤집어질 가능성은 없겠군. 그럼 우리 쪽 일본 자금도 벌써 움직이고 있는 건가?”
“한국에 있는 일본 자금은 주저하고 있어요. 하지만 홍콩, 싱가포르 증시까지 폭락하면 일본 은행들은 발을 뺄 것이 확실해요. 자기자본비율을 지켜야 하니까.”
“결국 한 달 내에 빠져나간다고 봐야겠군. 계산은 해 봤어?”
“대충 100억 불이 빠져나갈 거예요. 그것도 일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원래 역사보다 20억 불 정도는 줄었다. 아마도 내가 사기 친 종금사의 부동산에 묶인 금액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은 한부 사태를 지원한다는 핑계로 은행과 금융 업무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에 숫자는 정확할 것이다. 원래도 파라곤의 한국 출장소나 다름없잖나.
“1년 내 돌아올 단기 외채는 얼마지?”
“전체 외채 1,500억 불의 60% 정도 돼요. 대략 900억 불이죠. 이 중 올해 연말까지 만기인 초단기 외채는 490억 불이에요.”
“490억 불만 완벽히 막으면 나머지는 만기 연장을 할 수 있다는 얘기야?”
“490억 불을 막고 300억 불, 아니 200억 불만 외환보유고를 채워 두면 한국 시장에 믿음이 생길 거예요. 연리 8.5%를 받을 수 있는 한국 시장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한국은 미 국채 금리 5.5%에서 자그마치 3%나 가산 금리를 더 얹어 준다. 21세기에선 상상하기도 힘든 금리지만 1990년대에는 가능한 숫자다.
“알았어. 그럼 미국에 AOL과 일본 소프트뱅크 주식을 좀 팔아 줘. 10월에 돈이 들어오도록. 10월에 현 주가 대비 97%로 넘기겠다고 해 줘.”
“허억! 3%나 프리미엄을 주겠다고요?”
“그래야 100% 계약이 되지.”
“지금 AOL이나 소프트뱅크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어요. 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백억은 손해예요. 그 두 회사 지분 합산이 300억 불은 족히 넘는다고요.”
케이가 깜짝 놀랄 만하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그녀는 꾸준하게 내 돈으로 주식을 사 두었다. 둘 다 공히 5천억씩 투자를 했고, 대략 40배씩 올랐다. 10월이면 좀 더 오를 테니 350억 불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상승장에서 먹는 것은 이쯤에서 하고 IMF 몇 년 뒤에 두 주식은 폭락장이 오니 그때 한탕을 노리면 될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 투자할 때야. 수십 배 벌 수 있으니 믿어 봐.”
“수한 씨,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는 거 아니죠? 아무리 스마트 클라우드라고 해도 그 돈을 잃으면 타격이 엄청나요. 대형 적자에 주가 폭락이라고요.”
“그럴 리 없을 테니 안심해.”
케이는 모르겠지만 IMF를 거치며 우리나라 기업은 환골탈태를 한다.
아니, 우리나라 국민들이 환골탈태를 일으킨다. 일부 부유층만 달러 사재기를 했을 뿐, 금 모으기 운동, 달러 모으기 운동, 심지어 은행 예금까지 급속도로 늘었다. 외국인들이 보기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했거든.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도 시원찮을 판국이었는데 국민들이 앞장서 국란 극복에 나섰고, 심지어 차기 대통령 DJ를 중심으로 정치인들까지 대동단결한다.
케이는 주저주저하더니 주식 선물 계약서를 꺼냈고, 나는 곧바로 서명했으며 프리미엄을 기재하는 빈칸에 3%라고 숫자까지 직접 써 주었다.
내가 마련한 총알은 350억 불 정도, 막아야 하는 490억 불에 비하면 140억 불이 부족하다. 대현이 여기에 50억 불을 보탤 것이고 LK가 못해도 10억 불은 마련 할 테니, 결국 80억 불 정도를 더 마련해야 된다는 뜻인데….
삐리릭. 삐리릭.
9시 뉴스가 끝나자마자 내게 전화가 걸려 왔다. 왜 전화가 안 오나 싶었다.
“여보세요.”
-날세.
“예, 뉴스 보고 전화 주시는 겁니까?”
-그러네. 이 또한 자네가 뒤에 서 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더 늦었으면 환율이 요동쳐 추경은 꿈도 못 꾸었을 거야.
“뭐, 그런 셈이죠. 그건 그거고, 결정은 하셨습니까?”
-내일 왕회장님을 찾아가 직접 기하자동차 지분을 대현 증권에 맡기도록 하겠네. 은행에 맡기는 것보단 그게 일이 편하겠지?
오호, 역시 이희건 회장. 돈 들지 않는 일에는 생색을 잘 낸다.
“뭐, 좋으실 대로 하시죠. 제 조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만.”
-우리도 유동 자금이 그리 많지는 않네. 현금 10억 불에 러시아 국채 10억 불짜리를 내놓겠네. 어떤가? 그럼 전리품 밥상 앞에 앉을 수 있지 않겠나?
신성은 나의 회귀 초창기, 소련 프로젝트에서 대현 중공업을 대신해 참여했었다. 원래 역사에선 1998년에 모라토리움 선언으로 폭망하는 국채이지만 지금에는 팔리긴 할 거다.
“이왕 수고하시는 김에 러시아 국채를 일본 물주에게 팔아 주시지요. 거기까지 신경 쓰기엔 좀 힘들어서 말이죠.”
-그럼 일본 물주에게 프리미엄을 좀 줘야 할 텐데….
“프리미엄 3% 주시고, 달러로 받아 주십시오. 신성은 20억 불 투자한 걸로 하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으흠, 3%씩이나? 알겠네. 보름 내로 처리하지. 돈은 버지니아 트레이딩으로 주면 되겠지?
“예. 정확하십니다.”
툭. 삐이익.
역시 이 회장답게 용건만 마치고 전화를 끊어 버린다. 신성이 20억 불을 보탠다는 것은 괜찮은 소식이다.
“신성이 아군에 합류하는군요.”
“아군이 아니라 헐거운 연합이지.”
“여하튼 전리품으로 뭘 가져가라고 할 거예요?”
“서우조선.”
“대현한테 안 주고요?”
“대현은 자동차를 가져야지. 조선까지 먹으면 대현은 소화 못 시켜. 일단 인수해서 회생시키는 데 수천억, 수조가 들어갈 거야.”
“여하튼 다행이다. 혹시나 서우증권을 주면 어쩌나 싶었는데.”
케이는 마치 벌써 나를 서우그룹 해체 위원장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나보고 서우증권을 먹으라는 압박을 은근히 해 댄다. 자연스레 금융 업무는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위임받지 않겠냐는 논리다.
“오늘은 이쯤… 아, 내가 일전에 부탁한 거 있잖아. 서우가 톰슨사 인수에 성공하도록 기름칠하는 거. 어찌 됐어?”
“그거요? 걱정 마요. 우리 쪽에서도 기름칠을 해 뒀으니까요. 30억 달러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1프랑에 넘길 거예요.”
“서우는 확실하게 넘어가겠군.”
“네, 확실히요.”
서우그룹의 총수 일가가 한부의 정수태처럼 경영권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들면 작전이 완전히 망가진다. 이왕 파산할 거 확실하게 파산시켜야 한다.
“계약 발의를 10월 초에 맞춰 줘.”
“예. 문제없어요. 프랑스 정치인들 뇌물 주는 것은 톰슨사 지분으로.”
“1%로 만족해. 더는 안 돼.”
“쩝. 오키요.”
케이가 양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한다. 케이와 함께하는 일과가 그렇게 끝이 났다.
- *
1997년 9월.
대한민국의 정기 국회가 열리는 달이며, 국민 모두에게 충격을 가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기하 사태는 정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여야 할 것 없이 총력전을 펼쳐 구제 방안을 살펴야 합니다. 지금 국고에 외환이 텅텅 비어 갑니다. 이제 채 100억 불도 남지 않았습니다. 한부 사태에 연이어 기하그룹까지 무너지면 그야말로 국가 부도입니다. 여야 정치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당장 불법 대출의 책임자를 엄벌하고, 지하에 있는 달러를 끄집어 올려야 합니다.
-그게 뭔 소리요! DJ! 국가 부도라니요! 그런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하시오!
-우우우우! 정치 공략이오! 당장 연설 멈추시오!
DJ라는 정치 거물이 국회 연설을 하는데 여당 의원들이 떼를 지어 반발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각종 뉴스에선 이례적으로 DJ의 국회 연설을 보여 주며 ‘국가 부도’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외환보유고가 비어 가는 것은 사실이며 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국민회의에 입당하겠다는 박준태 의원의 행보는 그 뉴스에 묻혀 이슈거리도 되지 않았다.
-현재 국가 외환보유고는 정확히 97억 불, 그런데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외채는 490억 불에 달합니다. 이는 8월에 IMF에 구제 금융을 받은 태국의 상황과 거의 유사합니다. 가히 국가 부도 위기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률은 올해도 6%를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외채 만기 연장은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지금 정부에서는 개인의 외환보유 한도를 50만 달러까지 출처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취지의 시행법을 만들었습니다. 이건 외환위기를 인정했다고 봐야 합니다.
뉴스에서 경제 전문가들이 패널로 참여해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고, 재정경제부를 대변하는 교수는 국가 부도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IMF의 구제 금융을 받으면 이미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IMF 관리 감독하에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예산을 대폭 축소시켜야 하고, 세금을 늘려야 한다.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은 물론 금리도 통제받아야 한다.
한 나라의 거시정책이 IMF의 다국적군에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할 재무당국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한마디로 세금을 거둬서 IMF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격이니까. 그 등 뒤에 숨은 환투기꾼 주머니도 두둑해지고 말이다.
“케이, 투기꾼들 자금은 어디까지 왔어?”
“홍콩까지 왔어요. 공매도 모두 처분하고 한 달 내로 한국 공습에 나설 거예요.”
“일본은?”
“홍콩 시장 공매도에 아예 동참해서 자금을 뺐어요. 저항 자체를 안 했다고 해야죠. 한국 자금도 내가 볼 때 보름 안에는 빠져나가요.”
“어째 부정적인 예측은 틀리는 경우가 없어. 우리나라 국가 신용도는 어떻게 되고 있지?”
세계 3대 신용평가사라고 하는 이들도 투기꾼들에게 동참하는 세력이다. 그들이 우리나라 국가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시점이 환투기꾼에게 공습 신호를 알리는 때다.
“최소 3단계 하락일 거예요. 발표는 10월 중순, 늦어도 10월 말에는 할 거예요.”
원래 역사에서는 1997년 10월 28일이었다. 국가 신용 등급이 A2에서 Ba1으로 자그마치 5계단이나 미끄러진 날이다. 이날의 충격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다. 나 또한 그러했다.
“우리 총알은?”
“모두 10월 말로 선물 처리했어요. 투기꾼들에게 안 들키게 미국 시티은행으로 모았고요. 대략 430억 불 정도 될 거예요.”
원래 역사에서 97억 불에 불과하던 외환보유고는 출처를 묻지 않는 외환까지 양지로 끌어올려 225억 불까지는 늘어났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환투기꾼이 레버리지로 일으킨 환투기 공격의 규모는 600억 불에 달했으니까.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 같다. 우리 쪽 자금이 430억 불, 국고 225억 불, 총 655억 불이면 한번 붙어 볼 만하다. 문제는 490억짜리 단기 외채를 갚아 가면서 600억 불짜리 환투기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건데.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그야말로 회복 불능이다.
“자! 우리도 선전포고해야지. 기자회견 준비해 줘. 대현, LK, 신성도 원하면 참여하게 해 주고.”
“수한 씨, 중소기업 구제에 2천억 이상은 절대 쓰면 안 되는 거 알죠? 지금 우린 총알이 빠듯해요. 크게 보세요.”
“알아. 중소기업 구제엔 2천억만 쓸게. 본목적은 말 그대로 선전포고야.”
“좋아요. 그럼 선전포고는 10월 25일. 월말 정산 일로 하죠.”
10월 25일은 10월 28일의 불과 3일 전이다. 케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거대한 톱니바퀴가 아귀를 척척 맞춰 나가는 느낌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IMF는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는 듯 말이다.
- *
10월 25일 오전. 대현전자.
“협의된 바로 컨소시엄의 의견을 발표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대현은 적극 동의하네.”
“LK도 마찬가지네. 현금 5천억과 휴대폰 사업부를 넘기니 20억 불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기를 기대하네.”
“신성은 현 정부를 비판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신성에서 중도일보를 통해 추가로 의견을 내겠습니다.”
나는 정헌몽 회장, LK 구무본 회장, 신성 이희건 회장의 대리로 참석한 이수학 비서실장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었다. 컨소시엄 합의안에 모두 서명하고 정헌몽 회장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다들 합의안 및 발표안에 서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모두들 외환위기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었고, 정부의 대응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구책을 강구해야 했다. 아마 이들에게도 내가 유일한 탈출구로 보일 것이다.
국회에서는 추경이 확보되었지만 한부그룹의 연쇄 부도를 수습하는 것만으로 벌써 바닥이 보이고 있었다.
20개가 넘는 한부그룹 전체를 살려 보려는 채권 은행단의 한심한 작태에 어이가 없었을 뿐이다. 기껏 3개월 동안 한 일이라곤 한부 계열사 중 상하제약을 녹십자 컨소시엄에 매각한 것이 전부였다.
정작 공적 자금 지원을 조속히 지출해야 할 한부제철은 헐값에 팔 수 없다고 채권 은행단이 버티고 나오니 추경 예산을 회생이 아니라 경비로 쓰는 꼴이었다. 포항제철 아니면 대현제철에 넘겨야 비로소 공장이 공장다워지는데 말이다.
게다가 은행들이 기하그룹의 어음할인을 거부하고 있기에 한부 사태 못지않게 중소기업들만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빌어먹을 정도로 답답한 한국 금융계라고 할 것이다. 부실 경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정부가 공적 자금을 풀고 은행은 그 덕분에 부실 어음을 털어 내며 이자까지 챙겼던 수십 년간의 행태가 독이 되고 있다.
위이이잉.
웅성웅성.
“오, 회장단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대현전자 로비는 또 한 번 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내 등 뒤에는 정헌몽 회장, 구무본 회장, 이수학 비서실장이 늘어서 함께함을 증명해 주었다.
뚜벅뚜벅.
찰칵! 찰칵! 번쩍, 번쩍, 펑! 펑!
단상 앞으로 걸어가 인사를 하자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단상에는 십여 개의 마이크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경제부 기자들은 이미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한수승 전(前) 경제부총리는 추경이라는 아이디어라도 냈지만, 후임인 강식경 경제부총리는 기하 사태가 발발했음에도 해결은커녕 어떻게 하면 차기 정부로 넘길 수 있는지 잔머리만 굴리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자로 스마트 클라우드는 재계 1위부터 3위까지의 그룹과 연합하여 스마트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현재의 경제위기에 직접 대응코자 합니다.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이 6천억이 넘어가고, 스마트 클라우드와 대현이 6개월 가까이 외환위기 극복을 조언했음에도 정부의 대책은 참담할 정도로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동남아 환투기를 주도한 세력이 이젠 대한민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그 와중에도 종금사는 단기 외채를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으며, 시중 은행들은 한부 사태의 공적 자금을 어떻게 나눌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한부 사태에서 스마트 클라우드가 긴급 수혈을 했던 이력 있습니다. 그때처럼 수혈을 하시겠다는 의미입니까?”
내가 잠시 숨을 고르자 어느 기자가 벌떡 일어나 질문을 했다. 모든 기자들이 숨죽이고 있는 걸로 봐서 기자단 대표인가 보다. 먼젓번 기자회견과 달리 어떤 질문을 할지 이미 논의했는지 누구 하나 그를 말리지 않는다.
“긴급 수혈은 기하그룹 산하의 협력 업체에 한하여 2천억을 지원할 것이며, 4개사 컨소시엄에서 지원 대상을 협의해 발표할 방침입니다.”
기자들이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는 듯하다
“기하그룹뿐 아니라 시중 기업에 체불 임금이 6천억이 넘는데, 컨소시엄에서 그걸 해결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한번 일어난 기자는 앉지 않고 답답한 소리를 해 댄다.
여전히 숨죽여 내 말을 기다리는 기자들. 199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아무리 위기라고 얘기해 봐야 믿지 않으며, 설령 위기가 와도 누군가 나서면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팽배한 사회다.
우리 컨소시엄을 자선 단체로 취급하다니 서글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긴급 수혈은 2천억 내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이후에 닥쳐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기업주가 과감히 자산을 매각해 부채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와 별도로 스마트 컴소시움에 자산 매각을 위임할 경우 올해 12월부터 순차적으로 매입하여 부채 상환을 지원하겠습니다.”
내 말은 망할 것 같은 기업은 어서 빨리 자산을 매각해 빚부터 갚으라는 말이었다. 시장에 내놓아도 당장 팔리지 않으면 컴소시움이 기업을 통째로 먹고 알아서 빚잔치를 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몰려 있는 기자들 대부분이 경제 담당이었기에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듣는 듯했다.
“헉!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기업을 헐값에 매입하시겠다는 의미인가요?”
“답답합니다. 대체 사태의 위중함을 알고나 계십니까? 기업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 기업주는 그리하시고, 빚잔치에 직원들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여기는 기업주가 있으면 우리가 돕겠다는 얘기입니다. 컨소시엄의 목적은 건강한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의 알량한 경영권을 보장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절대적으로 오산입니다.”
털썩.
그제야 기자 대표가 자리에 앉았고, 좌중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첫째,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은 이 시간부로 부채 비율을 200% 밑으로 떨어뜨리며 외국 환투기꾼, 기업 사냥꾼으로부터 기업을 방어하십시오. 처분 가능한 자산을 모두 처분하고서도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면 스마트 연합의 우산 밑으로 들어오십시오. 경영권을 회수하는 대신 직원들의 생존을 책임지겠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그제야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지기 시작했다.
“둘째! 이 시각부로 스마트 컨소시엄은 국내 30개 종금사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합니다. 단기 외채 상환권을 외국 은행으로부터 사들이고, 종금사 파산을 최종 목표로 삼겠습니다. 개인 투자자들은 지금 즉시 원금을 회수하십시오.”
“헉!”
찰칵! 찰칵! 찰칵!
“셋째, 달러 사재기를 하는 국내 세력, 환투기를 목표로 삼는 외국 세력 모두에게 경고합니다. 대한민국 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그 어떤 행위에도 스마트 컨소시엄은 철저하게 응징할 것입니다. 누가 이기나 해봅시다. 끝까지 갑니다.”
“…….”
찰칵! 찰칵! 찰칵!
“넷째, 대한민국 현 정부는 재정경제부, 한국은행을 비롯하여 외환 관련 조직을 비상 체제로 운영하실 것을 제안합니다. 한부 사태와 기하 사태에 대한 특검을 조속히 마무리 짓고, 그와 별도로 스마트 컨소시엄에 국고 외채 운용권을 넘겨주시면 스마트 클라우드를 담보로 전쟁에 임하겠습니다.”
“전쟁!”
“전쟁이래!”
“오오오오!”
찰칵! 찰칵! 찰칵! 펑! 펑! 펑!
뚜벅뚜벅.
“정헌몽입니다. 대현그룹은 제 사재와 더불어 전 사업체의 자금 운용을 컨소시엄에 위임합니다.”
“LK 구무본입니다. 현금 5천억을 비롯하여 20억 불 상당의 자금 운용을 컨소시엄에 위임합니다.”
“신성입니다. 현금 10억 불과 타국 국채 10억 불을 컨소시엄에 위임합니다. 차기 자산 매입이 필요한 경우 추가적인 자금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오오오오!”
등 뒤에 서 있던 이들이 한 명씩 단상으로 나와 컨소시엄 계약을 공식화했다.
찰칵! 찰칵! 찰칵! 펑! 펑! 펑!
“속보, 속보 뿌려!”
“외국에도 알려야 해. 환투기꾼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어.”
“KBC 너희들 특집 방송 할 거지? 우리도 끼자.”
“종금사 쪽은 우리가 맡을게.”
와글와글.
벌써부터 카메라를 방송국으로 연결해 특보를 내보기까지 했다.
「4대 대기업 컨소시엄, 투기꾼과 환율 전쟁을 선포하다.」
「스마트 컨소시엄, 부실 금융계와 전쟁을 선포하다.」
「대기업 연합, 경제 위기 타파를 위해 생존 전쟁을 선포하다.」
신문은 호외를 찍어 배포했다.
그동안의 시각에서 달라진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경제 위기를 전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스마트 클라우드를 대기업의 범주에 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
쾅! 쾅!
“강식경 부총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그게…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유수한? 그 작자가 대통령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놈이 뭐기에 금융 전쟁을 선포해! 게다가 뭐? 특검을 조속히 마무리해? 그게 일개 사장이 할 소리야! 어!”
“그러게 말입니다.”
YS는 책상을 마구 쳐 대며 소리를 질렀다. 집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외환위기에 대해선 감을 잡고 있었지만, 한부 사태 특검으로 구속된 자신의 차남을 빼낼 생각이 우선이었다. 특검을 조속히 마무리하는 게 아니라 대선까지 끌고 가서 야당이 금융 개혁에 동참하지 않아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정국을 휘저어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는 거다.
“당장 그놈 회사 세무 조사 착수하고 특검 꾸려서 그놈을 쳐 넣어. 알겠나!”
“그… 아니, 그게 좀 힘듭니다.”
“어째서 힘들어!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놈이 어디 있나.”
“그게 아니고, 그 작자는 한부 사태에도 그리고 지금 기하 사태에도 수천억을 내놓았습니다. 그런 회사를 세무 조사 한다고 하면 여론이….”
“으익!! 그놈이 다 판을 짜려고 그리 적선을 한 거군. 빌어먹을 놈.”
YS는 치를 떨었다. 감히 자신의 레임덕을 이용해 판을 짰다고 여겼다.
“이미 박준태와는 끈끈한 사이인 것 같고, 그가 국민회의에 입당했으니 DJ와도 연결고리가 생긴 겁니다. 차기 대선에 민자당이 밀릴 수도….”
박준태가 민자당을 탈당하고 국민회의에 입당한 것을 재차 상기시키자 YS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박준태는 포항을 비롯한 경북에서 탄탄한 지지 세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DJ가 경북에서 득표율 10%만 올려도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지극히 높아진다.
YS와 강식경 경제부총리의 머리는 언제나 대선으로 향해 있었다. 정치인의 한계였지만, 그걸 탓할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밀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YS는 자신의 눈과 귀를 스스로 닫아 버린 꼴이었다.
쾅!
“뭔 소리를 그리해! 위기는 곧 기회라는 것을 모르나? 나는 야당 시절 이것보다 더한 고초와 위기를 수도 없이 겪었어. 자네들이 생각을 안 하니까! 생각을 안 하니까! 이런 사태가 연달아 오지 않나!”
“일단 국고의 외환을 대기업 컨소시엄에 넘겨서 외환 위기부터 수습하고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종금사와 은행을 재편하면 어렵게나마 금융 개혁을 이뤄 냈다는 성과는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놈이 일을 하면 DJ가 일을 한 거고, 박준태가 일을 한 거야. 그리고 그놈이 그리 자신하는 이유가 뭐겠나? 그놈 주머니에 달러를 그득그득 꿍쳐 놨다는 소리 아닌가! 그걸 뺏어! 그걸 뺏어서 당신이 전쟁을 진두지휘해. 내 이름을 걸고 이 전쟁에서 이기란 말이야. 알겠나!”
“그 작자의 돈을 어찌….”
“세무 조사를 하든! 계좌를 막든! 집 안을 털든! 뭐든 하란 말이야. 뭐든! 커어억! 쿨럭!”
YS는 이렇게 소리를 질러 본 것이 평생 처음인 것 같았다. 이대로 사태가 진전되면 그의 정치 생명이 끝장나는 것은 물론 평생에 걸쳐 투쟁해서 얻은 대통령직이 역대 최악으로 남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의 아들까지 인생을 조지는 것이었다.
“각하! 각하! 이리 앉으십시오.”
강식경 부총리는 기침을 해 대는 YS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언제나 단정하게 염색해 깔끔한 인상의 YS가 힘없는 영감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군부 정치의 산물이라며 각하라는 호칭을 없애 버린 YS에게 각하라고 불러 버렸다.
“가… 국회로 가서… 일 처리해. 달러를 뺏어 와서 당신이 진두 처리해. 그리고 내 아들을… 아니, 대선에서 기필코 승리를 해야 해.”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10월 26일.
국회에선 연일 대정부 질문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당은 금융 개혁안만 통과되면 외환위기 따위는 단박에 해결될 것처럼 떠들어 대며 정부를 두둔했고, 야당은 어서 빨리 대형 부도 사태에 대한 특검을 마무리 짓고 스마트 컨소시엄에 외환을 지원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었다.
“강식경 경제부총리 나와 주십시오.”
“예, 박준태 의원님. 질문하십시오.”
텅! 텅! 텅! 우우우우!
“배신자! 철면피도 분수가 있지!”
“거 국회의원이면 기본적인 예의가 있어야 하잖소. 지금 대정부 질문은 생방송 중이오.”
한때 민자당 최고 의원이었던 사람이 정부를 공격하러 나오자 여당 의원은 책상을 두드리며 야유를 보냈고, 누군가는 배신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박준태 의원은 잠시 눈을 감으며 야유를 흘려보냈고, 야당 의원이 TV 카메라를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소란이 잦아들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스마트 컨소시엄에서 경제 부처에 비상 가동팀 운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당장 조직 구성이 어렵다면 환율 가드 밴드라도 풀고 완전한 변동환율제를 적용해야 합니다. 정부의 조속한 협조가 필요합니다.”
“정부에선 검토한 바가 없습니다.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리는 격입니다.”
“지금 환율을 풀지 않으면 국내에 있는 외국 자본의 원화가 모두 달러로 바뀝니다. 심각한 국부 유출입니다. 사태를 모르십니까?”
박준태 의원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강식경 부총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단면만 보시는 꼴입니다. 수입, 수출 대금은 어쩌고요? 환율이 널뛰기를 하면 기업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현재 2.25% 가드 밴드는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탱해 온 정책입니다.”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금융 개혁안도 결국 은행을 뭉쳐 변동환율제로 나아가는 것이 기본 골자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스마트 컨소시엄을 도와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정부는 외려 스마트 컨소시엄에 경고합니다. 즉각,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국고에 위임하고 금융 개혁과 재벌 개혁에 동참하기 바랍니다. 정부의 경제 전문가들이 시중 은행과 더불어 신속하고 투명한 개혁을….”
“닥치십시오. 제가 탈당한 이유가 뭔데 그러십니까? 신속하다니! 특검조차 6개월째 끌고 있습니다. 심지어 투명한 개혁이라니요! 밀실 정책이 주야장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외환보유고 현황마저 국회에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박 의원께선 말조심하십시오. 저는 정치인이 아닌 공무원이지만, 특검을 질질 끄는 것은 야당임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외환보유고는 경제부처의 일급비밀입니다. 정치인들이 그걸 알아서 어떤 정치 공세를 하려는 겁니까! 야당은 조속히 정치 공세를 멈추고 금융 개혁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대체 금융 개혁안의 실체가 뭡니까! 혈세로 부실 대출을 막겠다는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그건 개혁이 아닙니다. 심지어 여당이 진정 의지가 있다면 여당 단독으로라도 통과시키면 됩니다.”
박준태 의원은 한때 여당 최고의원답게 TV를 통해 핵심을 까발리고 있었다. 사실이라고 해도 강식경은 그걸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계속 끌려가다간 정권 교체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질문을 받으러 나왔지 질책을 받으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겠군요.”
“이봐, 강 부총리! 자리를 뜨면 어쩌나! 공무원은 어떤 질문도 받아야 한다는 거 모르나!”
“말씀이 과하시네요. 그건 정치 공세이지 질문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스마트 컨소시엄은 즉시 달러를 국고에 위임하기 바랍니다.”
강식경은 마지막 경고를 하고는 단상을 내려가 버렸고, 국회 의사당에서 퇴장해 버렸다.
와아아아!
“정치 공세다! 당장 멈춰라!”
“정회를 선언해! 선언하라고!”
“퇴장해! 다들 퇴장하라고!”
“정회를 선언합니다. 2시간 뒤에 다시 개최토록 하지요.”
땅! 땅! 땅!
여당 의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 버리자 국회의장도 한통속이었는지 정회를 선언해 버렸다. 박준태 의원과 야당 의원들은 어이가 없었다. 특검도, 외환보유고 위임도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었다.
- *
삐리릭. 삐리릭.
강식경 부총리는 국회의사당을 빠져나가며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한국은행 총재에게 직접 전화를 한 것이다. 그와는 성만 다를 뿐 우연찮게 이름이 똑같았다.
-여보세요.
“이식경 총재. 나요, 강식경.”
-예, 부총리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시고.
“어제 논의한 바가 있잖소. 잠시만이라도 외환 계좌를 모두 동결해 주시오.”
-예에? 대체 무슨 일로… 그랬다간 단숨에 외환시장이 요동을 칩니다.
“정부의 힘을 보여 줘야지. 외환위기를 막는 것은 일개 기업이 할 일이 아님을 명확히 해 줘야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그랬다간 단박에 외환이 빠져….
“허이, 걱정 마시오. 설마 국가가 부도나겠소이까? 스마트 어쩌고 하는 놈들이 저 살기 위해서라도 달러를 위임할 거요. 못해도 수백억 달러가 있다는 소문이 있잖소이까.”
-정말 그들이 달러를 위임할지….
“어허, 강하게 나가야 줄 것 아니오. 정치권과 은행이 압박하면 그놈이 어쩌겠소. 내놔야지. 결국 한국에서 벌어먹고 사는 거 아니오. 애국은 기업의 기본이오. 기본!”
-예, 정 그러시다면 이틀 정도….
“그래요, 일단 그 정도 압박해 봅시다.”
강식경 경제부총리는 전화 한 통화로 화끈하게 폭탄을 터뜨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