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재계 재편(2) (61/104)

“협박이자 조언을 하겠습니다. 저와 맞서기 싫으시면 기하자동차 지분은 은행에 맡기시고, 현금 2조 정도는 내놓으세요. 그럼 아군으로 여기고 전리품은 나눠 드리겠습니다.”

“환투기꾼을 이길 것 같은가? 동남아를 휩쓸고 있는 놈들은 미국의 월가야. 돈이 넘치는 놈들이라고.”

“도박 잘하시잖아요. 6월 말까지 시간을 드리죠. 제 승패를 가늠해 보세요.”

“전리품이 대체 뭔가?”

“전자사, 증권사, 조선사… 전쟁이 끝나면 원하시는 대로 신성물산에 갖다 붙이시죠. 그러면 저도 신성을 못 건드릴 정도가 될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인가? 대현이라도 잡아먹겠다는 건가?”

“뭔 소립니까. 대현은 이미 아군임을 밝혔는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럼 그런 회사가 대체 어디에…!”

“서우그룹! 유 사장님, 서우도 위험한 겁니까?”

“제 조언은 여기까지. 모쪼록 제대로 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선전포고는 이쯤이면 충분하다.

뚜벅뚜벅.

내가 밖으로 나갔지만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하겠지.

    • *

“이 실장, 저놈의 말이 사실인가?”

“글쎄요. 서우그룹은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거 말고! 저놈이 유동 자금을 우리보다 열 배나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40조는 일본 물주도 보유하기 힘든 돈입니다. 그런 돈이 있는데 여태 사업 확장도 하지 않다니 거짓이 분명… 아니, 믿기 힘듭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은 거짓말이 분명하다고 하려다 말을 바꿨다. 가슴 깊은 곳에서 ‘유수한 사장이라면 혹시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그라면 외환위기를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화가 빠져나갈 리스크는 우리도 예측하지 않았나. 저놈이라면 더 빨리 알아챘을 수도 있어.”

신성은 일본 은행들의 자기자본비율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플라자 협의에다 미일 반도체 협정 때문에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몇 년 전 고베 지진까지 겹쳐 대부분의 일본 은행들의 자기자본비율이 100% 아래로 떨어졌다. 아시아의 외환 위기가 동남아를 벗어나면, 한국에 있는 일본 자금은 일본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고 그리 큰돈을 묵혀 두고 있었을 리가….”

“아니, 저놈이라면 이때를 노리고 묵혀 뒀을 수 있어. 큰돈이 무지막지하게 큰 돈이 될 테니까.”

“여전히 믿기 힘듭니다.”

“우리가 스마트 클라우드를 노릴 순 있나?”

“어렵습니다. 순환 출자할 계열사도 없는 데다 무차입 경영이나 다름없습니다.”

“성을 아주 견고하게 지었군.”

“견고한 정도가 아니라 난공불락입니다.”

이수학의 대답에 이 회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유수한 사장의 말은 정말이지 협박이자 조언이 확실했다. 실제로 외환 위기가 닥쳐 신성이 기하자동차를 일거에 먹으려고 달려들면, 스마트 클라우드는 신성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왠지 유수한의 칼날에 자신의 갑옷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촉이… 이리 살벌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회장님.”

“아냐, 혼잣말일세. 신경 쓰지 말게.”

이 회장이 그리 말하고는 어디론가 빠져나가 버렸다. 뭔가 지시 사항이 있을 줄 알았던 이수학은 멀뚱히 혼자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부우웅.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몸이 피곤하다. 그래도 진행 사항은 아군에 알려 줘야지?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왕회장님, 접니다.”

-오, 수한이가 어쩐 일이고.

“그냥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해서요.”

-보고라도 하라는 것이냐. 허허, 내 해 주마. LK 구 회장이 한부 사태 보고 조금 생각을 달리할 것 같더라. 그래도 여전히 휴대폰 사업을 만지작만지작하는 게 아깝긴 아까운가 봐. 다른 걸로 안 되겠나?

“하하, 다른 건 별로 탐나는 게 없습니다. 디스플레이를 달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라면 좀 더 기다려 봐라. 내 6월 말까지라고 확실하게 말해 뒀으니까.

“그러죠. 여하튼 신성도 지금 협박하고 오는 길입니다. 느낌상 기하자동차 지분을 넘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먹다가 체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왕회장이 농담을 한다. 베짱이 두둑한 양반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리스크가 크기는 한가 보다.

“기하자동차는 가진다고 생각하십시오. 리스크는 왕회장님이 가지시고, 열매는 정헌몽 회장님이 가져야죠.”

-그래야지. 한데 구몽이한데 직접 안 주고 어째 일을 그리 돌아가게 하는고? 수한이 니답지 않다.

“정헌몽 회장님도 자세 잡아야죠. 형을 경쟁자로 보는 게 아니라 그룹의 산하 사장으로 대접하는 거 아닙니까.”

-……!

전화기를 통해 흠칫 놀라는 느낌이 넘어온다. 역시 대현 총수 일가는 맨땅에 헤딩만 잘했지, 정치는 못한다. 이 정도 정치로 놀라다니…

“그럼 오늘 안부 인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다음에 또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래, 언제든지 전화해라.

“예.”

나는 전화를 끊고 뒷좌석에 푹 하고 스며들었다. 높은 확률로 LK와 신성은 아군 진영에 합류할 것이다. 이제 정부의 헛짓거리를 잠자코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크게 한탕 할 기회이니 기뻐야 하는데, 어째서 피곤함이 몰려오는지 모르겠다.

외환위기를 원천 봉쇄할 방법은 분명 없었는데, 마음속 한구석에선 그걸 방조했을 뿐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지 않은 거 아니냐고 자꾸 되묻는다. 다른 한편에서 재계를 재편할 유일한 기회이니 일부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도 항변한다.

역시 인간은 알량한 도덕심과 강력한 물욕이 교차하는 동물이다. 물욕이 너무 강하면 천박한 재벌이 될 것이며, 도덕심이 쓸데없이 강하면 가난한 자선사업가가 되는 거다. 회귀 초기 목표를 ‘귀족’이라 정했는데, 새삼 귀족의 본질은 뭘까? 하는 생각을 들자 잠이 쏟아졌다.

뇌가 연산을 뚝! 하고 멈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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