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아군을 모으다
처음엔 뭔가 하는 눈초리의 왕회장이었지만, 정헌몽 회장과 내 표정을 보더니 소파에 푹 기댄다. 하고 싶은 말은 꽤나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을 참는 모습이다. 이제 그룹의 리더는 정헌몽 회장, 왕회장은 이 자리의 주인이 아니다.
“유 사장, 국란이라니… 10월에 무슨 일이 있나? 어느 정도의 크기인가?”
정헌몽 회장은 국란이라는 말에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이들에게는 독일 통일도 예측했던 사람이다. 외려 어느 정도의 여파가 있는지 묻는다.
“으흠, 최악의 상황으로 간다면 외채 지불 유예 직전까지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환란이라고 해야겠네요.”
“모라토리움! 설마!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나? 아니,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네.”
“일어나선 안 되지만 일어날 것 같습니다.”
“믿을 수 없네. 미 연준의 금리 인상 때문에 그러나? 아니면 동남아 화폐 가치가 추락하고 있어서 그러나? 여하튼 아니네! 우린 그들과 달라. 우리나라는 작년 수출액이 1,300억 달러나 되고, 경제 성장률은 7%가 넘었네. 우리 경제는 튼튼하네.”
정헌몽 회장의 입에서 국가 부도를 의미하는 모라토리움이라는 단어에서부터 각종 숫자가 막힘없이 쏟아져 나온다. 역시 그도 최근 상황이 심상찮게 보였던지 이래저래 조사를 해 본 것이 분명하다. 지금의 논리는 안심하고 싶은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수입은 1,500억 달러에 무역 수지 적자는 200억 달러로 역대 최고였습니다. 환율도 900원대가 깨졌고, 외채는 1,00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외채가 1,500억 달러까지 갈 겁니다. 언제 환투기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무역 적자는 개발도상국이 거치는 통과의례라는 거 알잖나. 외국 물주들은 경제 성장률을 보고 돈을 투자하네. 지속적으로 외채가 늘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야.”
“종금사 사람들이 그걸 믿고 단기 외채를 미친 듯이 쓰고 있지요.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미국 투기 세력들이 자신감에 넘치죠. 그렇지, 케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월가에서 환투기 세력이 각광받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여태 실패한 적이 없거든요. 영국에선 성공했고, 동남아에선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까요.”
케이는 그녀답지 않게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투기 세력들이 실탄을 잔뜩 마련해 뒀을 거다. 월가의 신용평가사가 한국에서도 외환위기가 임박했다고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만 기다리고 있겠지.
만약 나와 케이가 한국에 있지 않았다면 파라곤마저 대한민국에서 환투기에 참여했을 법하다.
하긴, 내가 그걸 욕할 처지는 아니다. 나 또한 영국에서 환투기로 한몫 챙기지 않았던가. 수천억밖에 못 먹었다고 해도 말이다.
“다들 왜 이러나. 대한민국 경제 규모는 GDP 기준으로 세계 14위일세. 말마따나 우리 정부가 배 째고 디폴트나 모라토리움을 선언한다면 어찌 되겠나? 미국이고 일본이고 투자사의 피해가 막심할 거네.”
디폴트(채무불이행)는 부채 탕감을 해 달라고 배를 째는 거고, 모라토리움(지불유예)은 당장 빚 갚을 돈이 없으니 상환을 유예해 달라는 말이다. 모라토리움은 비교적 유연한 대응 같지만 유예 기간을 못 박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디폴트와 똑같이 국가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극단적인 대응이다.
이런 물귀신 작전은 때론 효과를 발휘해 환투기를 억제하는 측면도 있다. 대표적인 일례로 원래 역사에서 러시아가 1998년에 모라토리움을 선언함에 따라 LTCM이라는 월가의 투자전문회사가 5억 5천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며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LTCM의 투자 상품이 1,400억 달러에 이르렀기에 미 연준까지 합세해 가까스로 봉합했다. 이후로 미국의 환투기 세력은 러시아를 노리지 못했다. 러시아니까 가능한 시나리오다.
“저는 모라토리움 직전까지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한민국은 배를 못 쨉니다. 그러니까 일본 놈이고 미국 놈이고 대한민국 부도에 배팅하는 겁니다. 피해는커녕 한몫 잡는 거죠.”
우리나라는 모라토리움 대신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아 단기 외채를 땜빵했고, 남은 빚은 국내외 자산을 헐값에 팔고, 온갖 구조조정, 증세로 처리했다. 그로 인한 국민들 고통은 다 아는 얘기니 말할 필요도 없겠다.
“유 사장, 우리나라 각료들이 아무리 무능해도 그리 바보는 아니네. 극단적인 경우에 모라토리움 카드를 들이밀어 외채 만기를 연장시키는 것은 충분히 협상 가능하네.”
“아이다, 헌몽아. 수한이 말이 맞다. 우리나라는 못한다.”
“아버님!”
“수한이가 10월에 그 일이 벌어진다고 안 하나. 더더욱 배 째는 거 못한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10월이 뭐 어떻다고….”
“투기꾼들이 겨울을 앞두고 한 방 터뜨린다는 소리 아이가. 석유 없으면 우리 얼어 죽는다. 공장도 못 돌리고, 심지어 북한이 꿈틀하면 비축유도 못 풀 거 아이가.”
“석유!”
“그쯤 되면 아무리 간 큰 외국인도 돈 빼서 나간다. 케이야, 니도 그쯤 되면 돈 빼서 미국으로 돌아가겄제? 수한이만 쏙 빼 가지고 말이다. 허허허.”
“휴우….”
역시 왕회장. 그림을 크게 볼 줄 안다. 물론 내 말을 극히 신뢰하기 때문에 생각해 낼 수 있었을 거다.
실제로 아시아 금융 위기 때 모라토리움을 선언해 경제 주권을 IMF로 넘기지 않은 나라는 러시아와 말레이시아 딱 두 곳이다. 둘 다 산유국이며 천연 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우리나라는 북한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이라도 그리 못 한다.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즉시 국제법상 국가 간 금융 거래가 중단되고 석유 수입은 꿈도 못 꾼다. 누가 달러가 아닌 원화로 석유를 바꿔 주겠나.
털썩.
“아아, 이거 참.”
결국 나와 논리 싸움에 패한 정헌몽 회장이 소파에 등을 파묻어 버린다. 어지러운지 이마에 올린 손을 떼지 못한다.
“수한아, 니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어서 왔을 거 아이가. 어찌 막으면 되나?”
“못 막죠. 이 자료를 보시면 총 외채가 1,500억 달러로 추정되고, 그중 단기 외채가 900억 달러가 넘습니다. 단기 외채만 80조가 넘는 돈을 누가 어찌 막습니까? 아, 환율이 올라가면 150조가 훌쩍 넘겠네요.”
내 말에 왕회장도 당황하는 표정이다. 숫자를 들이미니 더욱 당황한다. 80조만 따져도 대현그룹 두 개를 팔아도 될까 말까 한 돈이다. 1990년대에 900억 달러면 미 연준도 움찔할 정도로 큰돈이다.
“수한 씨, 그리 말하면 어떡해요. 친정집 살린다고 오셨잖아요.”
“우리 목적은 환란을 막는 게 아니고 사람을 건지는 겁니다.”
“사람을 건져?”
“예, 왕회장님. 듣기 좋게 양질의 회사는 건진다고 표현을 바꿔 보죠. 이참에 단기 외채 당겨서 가계 대출해 준 종금사도 싹 쓸어 내고, 은행돈 마구 써 재낀 부도덕한 대기업들 정리하고, 부동산 불패 신화도 걷어 내야 합니다. 양질의 회사와 함께 일반 서민들만 무사히 건져 내면 경제는 다시 돌아옵니다.”
솔직히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1997년에 우리나라에 환란이 온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IT 버블이 터져 세계 경기가 하강세로 접어들기 전에 IMF를 떨쳐 내는 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면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유 사장, 내가 어찌하면 되는가?”
여전히 이마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로 정헌몽 회장이 의견을 물었다. 사람만 건져 내자는 내 말에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환란을 인정해 보려고 노력하는 느낌이 든다.
“대현이 잘하는 걸 하셔야죠. 정밀기계, 중공업, 철강, 건설업계에서 양질의 회사를 깡그리 접수하셔야죠.”
“허! 그게… 가능한 일인가?”
“환란이면 뭐든 가능합니다. 우리에겐 10개월이라는 시간과 자금이 있습니다.”
“자금이라…. 빅딜을 말하나 본데 그다지 유동 자금이 남지 않았네. 물물교환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알잖나.”
“그걸 말씀드린 게 아닌데 말입니다. 대현에서 아껴 둔 자산이 있잖습니까?”
“대현에서 아껴 둔 자산이라니….”
탁!
“아! 카자흐스탄! 유 사장님, 그걸 말씀하시는군요.”
여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 상무가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 정답이다.
“유 사장, 대체 미래를 어디까지 예측했던 건가?”
정헌몽 회장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측했다기보다 예상치 못한 위험에 대비했다고 봐야죠. 여하튼 카자흐스탄 광산 채굴권을 처분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중국발 원부자재 대란으로 구리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으니, 우리가 코너로 몰리기 전에 처분하십시오.”
“휴우….”
“최 상무님, 그거 처분하면 자금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영국 증시에 상장되어 있습니다. 현재가로 처분한다면 25억 달러는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일시에 처분을 하면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최 상무답게 업무 파악 능력이 좋다. 원래 역사에서는 20억 불 정도 되는 가격에 처분되었다. 지금 서두르면 5억 불 이상은 더 받을 수 있을 거다.
“처분은 케이에게 맡기죠.”
“나? 수한 씨, 내가?”
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파라곤이 인수하라는 말이냐? 하는 눈치다. 안전한 곳에 투자하길 선호하는 파라곤에 적당한 물건은 아니다.
“파라곤이 인수하라는 말이 아니야. 영국에 적당한 물주가 있잖아.”
“영국에 누가 있다고… 아! 헉슬리 가문!”
헉슬리 가문은 나와 케이가 영국에서 환투기를 했을 때 케이를 납치한 이력이 있잖나. 파라곤의 후계자를 위협한 대가로 분명 모종의 조치가 있었을 거다. 게다가 헉슬리 가문의 브린스톤 마인즈는 이름부터가 광산업이다. 전문 분야에 투자하라는 권유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 헉슬리 가문. 이참에 당신을 납치했던 일은 깔끔하게 잊어 주겠다고 해 봐. 그리고 이거 남는 장사야. 연간 1억 불은 꾸준히 벌 수 있는 사업이라고.”
“문제없을 것 같아요. 대신… 25억 불 이상 받으면 25억 불을 제외한 차익의 50%는 제가 챙겨도 되나요?”
“제가 말씀드릴 사항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단, 최대한 빨리 처분 부탁해요.”
최 상무가 주저하자 정헌몽 회장이 케이에게 확답을 준다. 그러면서 나와 눈을 맞춘다. 25억 불로는 내가 언급했던 정밀기계, 중공업, 철강, 건설업계를 아우르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유 사장, 기가 막힌 자금 조달 방법이지만 25억 불로는 결코 충분하다고 볼 수 없네. 하청 업체들은 생각보다 많아. 어림잡아도 200개는 족히 넘어갈 거네.”
“25억 불을 굴려야죠. 올해 연말 환율은 못해도 두 배는 올라갈 거고, 국제 원부자재 가격도 10%는 뛸 테니까 원화로 5조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헉! 5조! 원부자재라 함은… 원유를 사 놓으라는 말이겠군. 그래, 대현상선에서 유조선 계약을 맺고, 최대한 배를 빌려 보겠네.”
정 회장의 생각이 다행히 원유에 닿았다. 맞긴 맞는데 그냥 배를 빌리면 손해지.
“유조선을 연말까지 덩그러니 바다에 띄워 놓을 셈이십니까?”
“어쩌겠나. 10월쯤 원유가 도착하게 선물 계약을 해야지. 땅 위에 저장 탱크를 만들겠다고 부지를 매입할 수는 없잖나.”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앞바다에 폐선을 집중 매입하시죠. 기름 탱크로 이용하는 겁니다. 10월 이후에 기름 뽑아서 팔고, 고철로도 팔고….”
“헉!”
짝짝짝!
“어머, 수한 씨! 천재예요. 딜러들에게 배를 통째로 팔 수도 있겠어요.”
케이가 이 정도로 반응한다면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겨울에는 어쨌든 원유 소비가 활발해질 테니 거래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다. 수입상에게 조금 싸게 팔아도 환율을 감안하면 원화로는 두 배 이상 뻥튀기가 된다.
“케이 양, 좀 더 서둘러 줘야겠어요. 폐선 구매는 대현상선에서 알아서 하리다.”
“예, 회장님. 광산권은 최대한 비싸게 팔아 드릴게요.”
정 회장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라면 양질의 회사를 잘 건져 올릴 거다. 그런 일련의 작업은 원래 역사에서 대현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노사 갈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다. 왠지 잘될 것 같은 느낌. 이번 생엔 내게 운이 따르고 있잖나.
“수한아, 내가 뭐 도와줄 거… 아니, 내가 할 일은 없겠나?”
“당연히 있지요. LK 구 회장님에게도 조심스레 알려 주십시오. 왕회장님 말씀이면 믿지 않겠습니까. 말도 새어 나가지 않을 테고요.”
대현의 총수 일가들과는 달리 LK 구 회장은 내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할 거다. 입단속 측면에서도 왕회장이 직접 말하는 게 좋다.
“으흠! 구가한테 뭐라 하면 되겠나? 일단 정유 회사 가져갔으니까, 원유는 잔뜩 사 놓으라고 하마.”
“그것도 중요하지만 가전, 화학, 소재, 배터리, 디스플레이 업체를 건지라고 하시죠.”
“LK가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이참에 정리할 사업부가 있으면 저에게 넘기라고 해 주십시오.”
내가 직접 LK에 말하기 껄끄러운 이유 중 하나다.
“제가 말씀드리기 뭐합니다만, LK 휴대폰 사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하니 스마트 클라우드의 K폰에 합병하는 것을 조언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옆에서 최 상무가 말을 보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니 고맙다. LK는 디스플레이, 가전, 배터리, 좀 더 확장한다고 해도 정밀화학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고 여성적인 성향의 그룹 문화에도 잘 어울리고 말이다.
“수한이 니… 대기업의 재편을 바라는구나. 그래, LK는 휴대폰보다 가전에 어울리지. 허면 신성은 어쩌면 되누?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큰 대기업이다.”
“알려 줄 필요 없습니다. 신성은 알아서 잘할 겁니다. 외려 일본과 줄이 닿아 있으니 우리 작전이 빠져나가면 안 됩니다.”
신성에 알려서는 안 된다. 만약 정보가 새서 일본 애들이 주춤함에 따라 1997년 말이 아니라 환란이 늦춰진다면 나도 모르는 나비효과가 나타난다. 이왕 벌어질 일이라면 내가 아는 역사대로 일어나야 한다.
“일본 애들이 알까 봐 안 된다고?”
“예. 환란의 시작은 일본 애들이 단기 외채를 일거에 빼는 시점에서 시작될 겁니다. 우리도 그때 같이 움직여야 하고요.”
“아하! 그누마들이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구만.”
“원래 그런 놈들이죠. 일본은 절대 우리나라가 잘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뭐, 인접한 나라끼린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왕회장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정헌몽 회장과 최 상무도 마찬가지. 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믿음이 가나 보다. 이제 내가 준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면 시나리오를 읽을 수 있을 거다.
“니는 어찌하려고? 일본 애들 작살낼 기가?”
“작살낸다기보다 받은 대로 고스란히 돌려줘야죠. 제가 뭐 깡패도 아니고요.”
우리나라에서 무역수지 흑자를 엄청 남긴 주제에 우리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행위는 대가를 받게 해 줘야지 않나. 국가 이윤이 걸린 문제라 사심 없이 행한 일이라고 한다면, 나 또한 똑같은 말을 돌려주면 된다.
“하하, 기대되는구나.”
“뭐, 당장은 아니고요. 환란부터 극복하고 난 뒤에 응징해야죠.”
“뭐부터 할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종금사부터 작살내야죠. 원래 전쟁은 아군을 결집하고, 적의 앞잡이를 작살내는 것부터 시작하잖습니까.”
아군은 대현과 LK이며, 앞잡이는 종금사다. 종금사야 앞잡이가 아니라고 항변하겠지만, 멍청할 정도로 단기 외채를 끌어 썼다는 것만으로도 앞잡이라 칭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다음은?”
“적의 적을 이용하고, 적의 아군을 잘라 내고,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거죠.”
“적은 일본이가?”
“아뇨, 미국의 투기 세력이 진정한 적입니다. 일본은 적의 아군입니다.”
“니 돈 부족하면 말해라. 내 이제 꿍쳐 둔 돈은 없다만 대현중공업 정도는 팔라면 팔아 주꾸마.”
“독립 자금이라도 대 주시는 겁니까? 하하하!”
“당연하지! 내 이런 일을 평생 언제 겪겠누! 외세에서 우리나라 경제를 지킨다는데, 독립운동 비슷한 거 아이가.”
- *
부우웅.
대현전자를 방문한 것은 내게 꽤나 뜻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정헌몽 회장도 나름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 한편으론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으며, 왕회장의 말 한마디에 조금은 감동을 받았다. 왕회장과는 분명 세대 차이가 있지만, 뭔지 모를 동질감이 있다고나 할까.
“사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수정각으로 가 줘요.”
“예.”
“수한 씨, 식사하기에 이른 시간이잖아요.”
“아군이 남았잖아. 만나는 김에 다 만나야지.”
“누굴 만나려고요?”
“박준태 의원.”
“음, 아군이라기보단 메신저에 가깝겠네요.”
“그렇군. 대한미국인다운 말이야. 하하.”
나는 가는 길에 수정각 최 마담에게 전화를 했다. 박 의원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금방 약속이 잡혔다.
박준태 의원 또한 나와 만나는 일은 열일을 제쳐 두고 달려온다. 원래 친기업인 성향이기도 하지만 나와 같이 일을 할 때마다 정치적 위치가 좋아졌으니 이번에도 무슨 일거리가 있나 싶었을 것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박준태 의원은 지금쯤 당권 경쟁을 한다고 YS에게 밀려서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있어야겠지만 아직도 여권의 실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 정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한 시점에서 매우 적당한 인물이라 하겠다.
부르릉. 스르륵.
“호호, 어서 오세요, 유 사장님.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군인이 이런 호사스러운 데를 올 순 없잖습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날씨가 춥습니다.”
최 마담이 언제나처럼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고, 수정각의 정원은 겨울 특유의 정취가 느껴진다. 나무는 메마르고 연못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만 묘하게 봄을 기다리는 생명력이 살아 숨 쉰다.
방 안에는 이미 적당한 주전부리와 차가 놓여 있고, 잠시 하릴없이 보내다 보면 박 의원이 도착할 것이다.
쪼르륵.
“어째, 그동안 정재계에 재미있는 일이라도 좀 있었나요?”
“재미랄 게 있나요. 혼란 그 자체죠. 우루과이 라운드며 WTO며 OECD 가입이며 매번 큰일이 있을 때마다 장관들이 바뀌니 저희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내 이 짓거리 하면서 장관들 이름 헷갈리긴 처음이었어요.”
하긴 문민정부 시절에는 미국에서 전후 세대가 처음으로 집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세계화, 자유무역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국제 협약과 기구들이 우수수 생겨났고, 그러면서도 미국의 슈퍼 301조로 필요하면 보호무역의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문민정부의 패착은 그런 굵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경제부총리를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아마 1년마다 바뀌었지 싶다. 경제정책에 무슨 일관성이 있었겠으며, 외환위기에 대처할 기본적인 데이터가 쌓였을 것인가.
“이번 경제부총리는 괜찮으신 분인가요?”
“한수승 부총리라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던 양반이에요. 경제학 박사라고 하던데, 글쎄요… 제가 여태 봐 왔던 분들 중 한쪽으로 가장 치우친 양반 같던데요.”
최 마담이 손바닥을 우측으로 까딱까딱했다. 그다지 틀린 판단은 아니다. 워낙 영어도 잘하고 강원도 출신이라 지역색도 없어서 매 정권 때마다 중히 쓰였던 양반이다. 정치권에서 떨어져 있을 때는 언제나 장앤김이라고 법률회사 고문으로 있으면서 호시탐탐 정권의 부름에 응할 준비를 했던 양반이다.
“그 양반은 안 잘리나요? 하하.”
“오~ 알고 계셨어요? 4월쯤 잘릴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더라고요.”
최 마담이 농담 삼아 정보를 알려 준다. 내가 VIP라는 의미일 것이다. 한 단계 생각해 보면 현재 YS가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곧 통과된다는 말이고, 정부는 그로 인한 노조 연합의 총 파업 사태가 4월쯤 마무리될 거라고 여긴다는 의미다. 경제부총리가 일종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 아니겠나.
경제부총리든 YS든 경제 위기를 예측해 허리띠 졸라매기 정책을 폈다기보단, 경제 실적이 지속적으로 안 좋아지고 있으니 근로자파견제도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여 기업의 인건비 상승을 막으려는 의도가 컸다. 금융시장을 개혁하는 것이 급했는데, 전혀 딴 곳에 경기 둔화의 책임을 돌린 격이라고 하겠다.
결과론적인지는 모르겠지만 1990년대 대한민국 경제 각료들의 시각은 매우 근시안적이었다. 7%대의 경제 성장률을 지키는 것에 급급해 노사관계, 기업 부채율, 외환 관리, 가계 대출 등등 나라의 기초 체력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개선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모든 것을 희생해 ‘수출! 수출!’을 외칠 뿐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최 마담 정보대로 4월에 개각을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원하는 시점에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박준태 의원을 탈당시키는 시점도 4월이면 딱 적당해 보인다.
부르릉.
“호호호. 의원님, 어서 오세요.”
“어서 오십시오.”
최 마담이 조르륵 대문으로 나갈 때 나도 같이 마당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권력자들은 돈도 좋아하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인사치레도 무척 좋아한다.
“어이구, 유수한 사장이 전역했다고 들었는데 언제 찾아오나 싶었어.”
“찾아뵈면 정경 유착이죠. 이렇게 식사 자리에 초대를 드려야죠.”
“하하, 올라가세.”
“들어가시죠.”
방 안에 케이가 앉아 있었음에도 박준태 의원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 정도의 정치인이 내 주변의 사람들도 파악 못 하겠나.
“오! 숙녀분이 먼저 와 계셨구만.”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케이라고 합니다. 기공식 때도 그렇고, 몇 번 뵙기는 했습니다만.”
“기억하다마다요. 이리 미인이신데. 미국 분들에게 우리 유 사장님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박준태 의원은 대외 세력에 아주 관심이 큰 인물이다. 케이를 기억하는 것도 용인밸리에 10억 불을 투자한 대형 물주들이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 양반을 끌어들인 첫 번째 이유다.
“호호, 신년 덕담 감사히 받겠습니다.”
케이는 유들유들하게 잘도 받는다. 박준태의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 주고 방석을 챙겨 주기까지 한다.
쪼르륵.
술상을 차린 것이 아니기에 우리 세 사람은 적당한 크기의 소반에 둘러앉아 차를 나누는 모습이 되었다. 달콤한 다과상에 구수한 듯 깔끔한 우롱차를 두고 얘기를 나누니 최 마담이 문가에 화로를 가져다 놓는다. 온돌 바닥 못지않게 방 안의 공기도 따뜻해진다.
“그래, 유 사장. 어쩐 일로 나를 불렀는가?”
“요즘 바깥 상황이 떠들썩하던데 괜찮으십니까?”
“으음, 노사 분쟁 때문에 그러는 거구만. 총파업 때문에 대통령께서도 아주 심려가 깊으시네.”
하긴 이례적으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연합해서 파업을 진행 중이다.
하나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벌써부터 중소기업에서는 체불임금이 쌓여 가고, 대기업에서는 인건비 부담으로 월급을 더 올려 줄 수 없다고 하니 노사 갈등이 커지고 있을 뿐이다. 병든 몸부터 치유해야 하는데,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 몰라 싸우는 꼴이나 다름없다.
“저는 그런 데는 관심 없습니다. 용인밸리의 직장인들은 대접이 마음에 안 들면 회사를 옮기면 그뿐이니까요. 노사 분규가 있을 이유가 없죠.”
용인밸리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은 제각기 능력에 따라 연봉이 달라진다. 스마트 클라우드를 중심으로 동일한 납품 업체라고 해도 서로 품질로 경쟁하며 매년 1차 벤더, 2차 벤더로 납품가와 물량이 달라지니까. 당연히 중소기업이라고 해도 핵심 인력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직장인들에게 ‘내 기술이면 오라는 데 많아!’처럼 강력한 무기가 어디 있나? 어설픈 평등은 외려 직장인들이 회사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떨어뜨리게 한다. 내가 그런 생태계 유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같은 업종의 협력 업체 두세 개를 유지하며 끌고 나가는 일이다.
“하하, 유 사장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구만. 하긴, 용인밸리는 그럴 만도 해. 대부분 상장사가 아니던가. 주식으로 부자가 된 직원들도 많을 거야.”
“그 주식시장이 조만간 박살 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원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박준태 의원의 표정이 묘하다. 정헌몽 회장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짐작은 하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어하는 느낌.
“박 의원님, 수한 씨 말은 사실입니다. 미국 투자사 입장에서도 한국의 금융시장은 위험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아직 국가 신용도는 멀쩡한데….”
“곧 추락하겠지요. 월가에 이미 소문이 퍼졌으니까요. 물주들이 준비할 시간을 주는 셈이죠.”
“정말인가….”
케이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박 의원을 압박했다. 내가 설명할 시간이 아깝다고 여겼지 싶다.
“조만간 미국 투기 세력들이 환율 공격을 해 올 겁니다. 경제 침공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채 비율이 200%가 넘는 회사는 단박에 쓰러지고, 100%쯤 되는 회사들도 자본 잠식이 일어날 겁니다. 은행들은 그런 부실기업들을 안고, 같이 쓰러지겠지요.”
탁!
“…….”
박준태 의원은 찻잔을 내려놓고 한동안 굳은 표정으로 나와 케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가 입을 열기를 잠시 기다려 주었다.
“내가 할 일이 뭔가?”
내가 원하는 말이 단박에 튀어나온다. 친일파라는 멍에를 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경제에 한해서는 나름 책임감이 있는 양반이다. 정보를 알려 줘도 자기 이득만 챙길 사람은 아니다.
“한부철강이 흔들거리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그것부터 처리했으면 합니다.”
“으음! 그걸 어찌 알았나?”
박 의원이 신음성을 토해 낸다. 아마 지금도 공적 자금을 때려 붓고 있을 거다.
“제가 어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한부에 은행 돈을 빌려 주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며 그렇게 풀어서도 안 됩니다. 과감히 치부를 노출시켜서 한부그룹을 통째로 날려 버리십시오. 정치권에 들어간 로비 자금도 강제 회수하시고요.”
“통째로 날려? 로비 자금까지?”
“경제 침공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긴급 상황이니 그리하셔야 합니다.”
“얼마나 급한가?”
“올해 10월이면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거고, 외국 은행들이 채무 만기 연장을 거부할 겁니다. 지금 1,000억 달러가 넘는 외채 중….”
“알고 있네. 단기 외채 비중이 50%를 넘었다는 것을 말일세. 종금사 녀석들이 지금도 단타를 치고 있겠지. 솔직히 나도 답답하네. 정치 각료들 중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없네.”
박준태 의원은 포철 사장일 때 부채 비율을 50% 밑으로 관리했던 양반이다. 누구보다도 이 사태에 대한 우려가 클 거다.
“국회 연설 한번 하십시오. 이대로 한부를 내버려 두면 경제가 무너진다고 말입니다.”
“덩치를 보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부도를 맞게 하면 한부의 순환 출자 고리를 타고 4조 원이 넘는 초대형 금융 사고가 나는 걸세.”
“4조든 5조든 별거 아닙니다. 연말엔 대한민국 전체가 부도를 맞을 테니까요. 외채가 이대로 가면 대략 1,500억 불짜리, 환율은 2천 원까지 치솟을 테니 300조짜리 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헉!”
내가 숫자를 들이미니 박 의원은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옆에서 케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니 더욱 믿음이 가나 보다.
“어허, 이거… 무시무시한 말이군. 내가… 내가 어쩌면 되나? 내 정치 생명을 걸고 한부를 날리라면 날리겠네. 미국 분들에게 싼값에 넘기면 되겠나? 대략 2조 정도에 매입하고, 정부가 1조 정도를 향후 5년간….”
박 의원은 내가 미국 물주들을 끌어들인다는 말로 들었나 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파라곤은 지금 중국에 투자를 집중하면 수익률이 보장되는데 한국의 부실기업을 인수할 리 없으며, 미국 투기 자본들은 환란 이후에 헐값에 양질의 회사를 취사선택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솔직히 파라곤도 나와 케이가 아니었으면 환율 공격에 같이 동참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미국 물주들이 그런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경제 침공입니다. 단순히 기업 몇 개 쓰러지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탁!
“알았네, 알았어! 그럼 그다음을 말해 주게. 한부 부도내는 것으로 끝난다면 정말이지 난 자네에게 실망할 걸세.”
“하하, 제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쓰고 말겠습니까.”
“휴우, 다행이군. 뭔가 방법이 있는 거구만.”
“먼저 여쭙지요. 박 의원님은 친일파입니까, 아닙니까?”
“그게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뜬금없는 소리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양반이 이 질문에 얼버무리며 답을 못 하면 작전을 노출하면 안 된다.
“말씀하세요. 중요한 사항입니다.”
“아, 일본이 외채를 먼저 빼는군. 만기 연장도 안 해 주고…. 그런 건가?”
“말씀해 보세요. 친일파인가요, 아닌가요?”
“당연히 아니네. 나는 조상의 피 값으로 제철소를 세운 사람이네. 조상의 피 값으로 8억 불밖에 못 받은 것은 비통하고 비통하나… 철은 국가 재건에 정말 필요했어.”
뭐, 이 정도면… 판단은 후세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일단 이 양반에게는 기본적인 정보를 노출해도 될 것 같다. 현재로선 일본 물주들을 유인하기에 박 의원만 한 사람이 없으니 대놓고 친일만 하지 않는다면 장기짝으로 써야 한다.
“좋습니다. 믿어 드리죠.”
“…….”
“민영화를 과감하게 처리해 주세요. 포철, KT처럼 민영화 진행 중인 곳은 외국인 지분 한도를 40%까지 늘려 주시고요. 담배인삼공사는 10월 이전에 민영화해 주세요. 일본 자금들이 그쪽으로 몰리게 해야 합니다.”
“어쩌자고… 일본 자금이 대규모로 빠져나가면 주가 폭락일세.”
“빠져나가도 무너질 회사가 아니니 모아야죠. 그리고 우리가 작전을 잘만 짜면 빠져나가는 돈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1~2조만 덜 빠져나가도 환란 극복에 엄청 도움이 되죠.”
“말도 안 돼. 일본인들은 매뉴얼대로 하는 이들일세. 환란이 우려되면 단번에 빠질 거야.”
“아뇨. 손해가 커지면 주식 투자금의 일부는 남을 겁니다. 일례로 포철에 일본 자금을 끌어당기고, 그 뒤에 한부철강을 무너뜨린 뒤 인수자가 나타날 때까지 인수 보증을 한다고 발표하면 어떨까요? 환란 이전에 포철 주가는 이미 10%는 빠졌을 테고, 환란이 닥쳐도 몇몇 물주는 돈을 빼는 데 주저할 겁니다.”
“그런 일을 KT와 담배인삼공사에서도 해 보자 그 말인가? 나보고 사기를 치라는 말과 다를 게 무언가? 나는 정부 고위 인사일세.”
정확한 말이다. 한국에 직접 투자한 일본 물주들에게 접근해 민영화 정보를 뿌리며 종금사에 이리저리 흩뿌려진 일본 자금을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 그래야 일이 쉬워진다. 종금사들도 한 방에 보낼 수 있고.
“그게 핵심이죠. 4월이면 YS에게 정치 보복을 좀 당하셔야 합니다. 의심하지 못하게 진짜로!”
“…….”
“살신성인 한번 하시죠. 나라 살리는 길인데.”
“자네는….”
“저도 사기 치러 다닐 테니 걱정 마십시오.”
- *
딩. 동. 댕.
-9시 뉴스입니다. 여야 합의로 열렸던 임시 국회는 연초부터 파행을 거듭했습니다. 급기야 여당은 직권상정이란 비상수단을 통해 안기부법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포함한 29개 법률을 가결하였습니다. 속칭 날치기 통과입니다. 오늘 새벽 국회의 모습입니다.
-날치기 원천 무효! 원천 무효!
-이런 법이 있습니까! 야당은 결코 개악에 합의한 바 없습니다. 날치기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요. 독재입니다.
국회를 비추고 있는 TV 카메라는 초점을 맞추지도 못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서로 엉켜 난리 법석이었다. 그 한가운데 박준태 여당 최고의원은 야당 의원에게 멱살이 잡히고 여당 의원이 그 야당 의원에게 주먹을 날리기까지 한다.
원래 역사에서도 벌어졌던 국회 막장 드라마다. YS는 가뜩이나 어려운 대내외 경제 상황에 국내 상황까지 악화시켰다. 안기부법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노동관계법으로 노조를 통제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닌데 말이다. 레임덕에 빠져 눈과 귀가 어두워졌기 때문이리라.
삐리릭. 삐리릭.
딸칵.
휴대폰이 울리기에 나는 바로 TV를 껐다.
“여보세요.”
-날세. TV 잘 봤나?
역시 박준태 의원. 왜 전화가 안 오나 싶었는데, 9시 뉴스에 자기 얼굴 나온 걸 확인하라는 의미였나 보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중요한 민영화 촉진법은 언급이 없어서요.”
-날치기 통과에 끼워 넣었네. 굳이 언론에 알릴 필요는 없잖나.
“그러셨군요. 한데 정국을 너무 흔들어 놓으신 건 아닙니까?”
-후후, 패착이라고 봐야지. 결국 YS가 안기부법과 노동법 재개정을 두고 여야 영수 회담을 개최할 거네. 여야 합의 없이 날치기한 책임은 내가 질 테고.
“아, 적당한 시점에 잘리시겠네요. 민영화 기업에 일본 자금 유인하시고, 한부그룹은 터뜨리고 가셔야 합니다.”
-알고 있네. 민영화 기업의 정부 지분은 2월이면 다 처분할 테니 3월 초에 바로 터뜨릴 걸세.
벌써부터 날짜까지 확답하는 걸 보니 발목 잡는 사람은 없나 보다. 야당과도 물밑에서 합의를 했다는 의미다.
“DJ께는 적당히 알리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자네 의중이 그렇지 않았나? 이 연극은 나 혼자서 하기는 힘드네.
박준태 의원답게 훅 하고 치고 나온다. 그가 법안 날치기를 책임지며 여당에서 축출되면 어디로 가겠나? 당연히 DJ와 연합하는 것은 수순이라고 할 것이다. 박준태 의원이 합류하면 DJ는 대구 경북에서도 표를 얻을 터, DJ는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내 의중이 아니라, 원래 역사에서도 둘은 연합한다.
“4월까지 일 처리 다 하시고, 7월쯤 환란 가능성을 언급하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내가 아니라 DJ께서 직접 하겠다고 하셨네.
“으음, 그럼 9월 정기 국회에서 하시겠군요. 알겠습니다.”
국회 연설에서 환란을 언급하면 타격감은 더 있을 수 있겠다. 정치인답게 올해 말 대선을 염두에 둔 담화 발표라고 할 것이다.
그럼 7월 기하자동차 부도는 대현 단독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겠군.
-자네 일은 잘되어 가고 있는가?
“주식시장의 일본 자금은 박 의원님께서 잘 유인하실 테니, 저는 용인밸리를 살펴야죠.”
-고생하시게.
“박 의원님도 고생하십시오.”
나는 다시 한 번 업무를 짚어 주었고,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
「여당 단독 법안 날치기 통과, 전 국민적 반발 불러일으켜. 정부는 안기부법과 노동법 재개정을 두고 여야 영수 회담 제의.」
「포항제철, KT 민영화 100% 완료. 정부 지분 처분하여 경기 활성화 목표. 담배인삼공사 민영화 급물살. 민영화 촉진법 독인가 약인가?」
「한부철강 위기설 솔솔, 검찰 수사 임박.」
연일 신문은 큼지막한 뉴스거리를 토해 놓고 있고, 나는 이 비서와 나 부장을 대동해 용인밸리 외곽의 땅을 살펴보았다. 대략 열흘 지속적으로 살피니 용인밸리에서는 스마트 클라우드가 드디어 제4공장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내가 사 놓은 땅과 가까운 곳은 가격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 비서, 연락은 했나요?”
“예, 염려 마십시오. 아마 지금쯤 막 오고… 아, 저기 오네요.”
“나 부장님, 적당히 장단 맞춰 줘요.”
“아유, 걱정 마십시오. 거짓말도 아닌데요, 뭘.”
부우우웅, 퍼퍼벅.
비포장길을 열심히 달려와 내 앞에 서는 승용차. 차 문을 열고 양복을 잘 차려입은 사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일전에 회식 때 만났던 동양종금의 안시환 이사다. 떼로 몰려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유 사장님, 고생 많으십니다.”
“어서 오세요, 안 이사님. 한데 혼자 오셨습니까? 산와, 경일종금도 같이 불렀는데 말입니다.”
“하하, 그들이야 동양종금에서 알아서 하면 됩니다. 여기 용인밸리는 워낙 노다지라 저희가 투자 건을 물고 오면 5 대 3 대 2로 나누는 게 룰이지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용인밸리가 핫하기는 핫한가 보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아니고 종금사끼리 투자 건을 나누다니 말이다.
“으흠, 종금사끼리 그런다면야 나야 일은 편하겠군요.”
“스마트 클라우드가 일을 하시는 데 저희가 일조할 수 있다면 큰 영광이지요. 여태 무차입 경영을 하셨는데 돈을 빌리겠다고 하시니 솔직히 놀랐습니다.”
“요즘 경제 사정이 좀 그래서 나도 투자금이 부족하군요. 그렇다고 투자 시기를 놓칠 수는 없고, 돈을 빌려 봐야죠.”
“그러셔야죠. 빌린 돈도 자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차입 경영은 안전한 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안전한 겁니다. 얼마나 빌릴 생각이십니까?”
“그걸 논의하기 위해 여기까지 모신 거죠. 단계적으로 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는 그리 말하며 보고 있던 지도를 안 이사에게 건넸다. 나름 개략적인 개발 계획을 그려 넣은 것이지만 안 이사의 눈이 반짝반짝한다. 눈으로 사진이라도 찍는지 연신 뚫어져라 쳐다본다.
“오호! 공장을 지으시는군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여기 언덕 서너 개만 지워 내면 저기 하천까지 대략 7만 평, 1차 공사에 12만 평이 필요한데 5만 평 정도가 부족하군요. 돈이 부족할 만하죠?”
“어이고, 대체 얼마나 공장을 크게 지으시려고.”
“하하. 안 이사, 우리 사장님께서 매년 5만 평 규모의 공장을 지으시잖나. 그래도 매번 물량이 달리니 이번엔 공장 두 개를 한꺼번에 지으시려는 거지.”
옆에서 나 부장이 손뼉을 맞춰 준다.
“음, 5만 평이면 대략 천억. 그리 크지 않군요. 이 지도엔 12만 평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는데… 저기 하천 너머로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안 이사는 생각보다 큰 건이 아니라 여겼는지 지도의 다른 쪽을 가리키며 묻는다. 큰 거 한 방이 있는지 연신 두드려 보는 식이다.
“글쎄요. 원래는 제 차기 공장까지 감안해 하천 너머 40만 평도 구매하고 싶었는데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더군요. 돈이 생기면 차후에 땅 주인과 거래를 제안해 볼 생각입니다.”
“40만 평이면… 땅값만 8천억.”
“하하, 지금 당장은 못 사죠. 여기 12만 평을 개발하는 비용만 해도 5조 정도는 들어갈 텐데 말입니다.”
“5조!”
“뭐 그리 놀라십니까, 안 이사님. 지금 짓고 있는 3공장도 2조나 들어갔는데. 이제 우리 사장님도 5조를 지르실 때가 되었죠.”
이 비서가 돈을 언급하고 나선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3공장부터는 플래시와 차세대 통신칩까지 생산할 수 있는 라인이라 21세기 FAB에 근접한 공장이다. 짓는 데만 2년 가까이 시간이 들었고 셋업 중인 설비와 주변 인프라까지 감안하면 2조가 훌쩍 넘어갔다.
만약 이곳에 4공장, 5공장을 연이어 지으면 5조는 충분히 넘어간다.
“이 비서, 그리 말하면 내가 너무 강심장 같잖아. 2조까지는 내가 어찌어찌하겠는데, 5조까지는 무리야. 내 돈만으론 못해.”
“으음. 사장님, 저도 좀 우려가 되긴 합니다. 아무리 투자비가 필요해도 설비 투자까지 돈을 빌리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되면 라인 셋업 자체가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건 나 부장 말이 맞아요.”
나는 대본을 멋지게 소화하는 두 사람이 자랑스러웠다. 이 비서와 나 부장이 심각한 표정이 되자 반대로 안 이사는 반색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설비에 2조를 투자하십시오. 나머지 토목 공사와 부동산에 저희가 3조를 투자하면 됩니다. 어떠십니까?”
“종금사에서 3조를 투자하신다고요? 저는 1조 정도를 생각하고 초반 공사부터 차근차근하려고 했는데.”
“물론 요구 사항은 있지요. 스마트 클라우드의 차기 공장에 대한 지분을 할당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만.”
“아니요, 그건 안 됩니다. 이곳에서 나오는 수익을 배당할 수는 있어도 공장에 대한 직접적인 지분은 판매할 수 없습니다.”
지분 판매를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라고. 지금 내가 이 짓을 하는 게 용인밸리 협력 업체들이 담보로 맡긴 지분을 가져오려는 게 목적인데.
“그럼 어떻게 투자자와 거래를 하시려는지요?”
“저희가 3년 만기 회사채를 발행하고 연이율 7%를 약속드립니다. 3년 만기 시 원금은 회수하시고 수익으론 원금의 이자를 택하든, 투자 비율에 따라 이곳에 세워질 공장의 10년 치 수익 배당을 택하든 하시면 됩니다.”
“으음, 주식은 아니지만 일종의 전환 사채라고 할 수 있겠군요. 스마트 클라우드 수익률은 연 10%는 넘으니 7% 이자는 문제없을 것 같고….”
안 이사가 손으로 턱을 짚으며 생각하는 척했다. 전환사채 비슷하게 일 처리 하겠다고 했으니, 더 큰 콩고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내뱉었다.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사장님께서 보유하신 7만 평 이외에 5만 평에 대한 개발 수익을 전환하시는 것은 어떤가요? 상가 지역이라고 적혀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내 예상대로 부동산 수익을 따지고 들어간다. 내가 지도에 비어 있는 5만 평에는 ‘사원 아파트? 상가 지역?’이라고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미 용인밸리에 들어선 상가 지역은 금싸라기 땅이나 다름없다. 수만 명에 달하는 직장인과 거래처 사람들, 심지어 주변 아파트에 있는 그들의 가족까지 이용하는 곳이잖나.
안 이사는 새로 만들어질 상가 지역이 대박 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상가만 세워지면 당연한 일이겠지. 근데 그리 안 될 거다.
“원래 계획은 상가 지역이지만 지금 그리 정해 버리면 땅값이 또 오를 것 같아 어쩌지를 못하겠군요. 아예 공단 지역으로 신청해서 공장을 연이어 짓고, 상가와 아파트는 하천을 건너서 지으면 어떨까 합니다. 하천 너머 땅은 협력 업체들이 이미 땅을 구매한 것이 꽤 된다고 하니, 용도 변경을 하면….”
“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그러지 말고 기존 계획대로 하시죠. 상가 지역을 끼고 양쪽에 공장이 있으면 좋죠. 유동 인구도 많아지고, 훨씬 땅을 올바르게 쓰는 꼴입니다.”
“그렇긴 한데… 그리 공지하면 지금 5만 평이 너무 금싸라기 땅이 될 것 같군요.”
“아우, 걱정 마십시오. 보안만 지켜 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다 매입합니다. 사장님께선 3조 투자받아 착공만 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하천 건너편에 인접한 땅도 저희가 다 매입해도 되겠지요? 상가는 확장되기 마련이니까요. 아, 다리는 놓아주셔야겠네요.”
얘기가 진행되자 안 이사는 당장이라도 나에게 3조를 손에 쥐여 줄 것처럼 달아올랐다. 공장을 지으면서 상가 지역에 걸쳐 다리까지 놓는 그림을 그려 댄다.
“뭐, 그리만 된다면 3조는 우습게 마련하시겠네요. 한데 저 멀리 40만 평에 이미 종금사 돈이 다 들어갔다는 소리가 있던데.”
“염려 마십시오. 대부분 주식 담보로 한 달마다 계약 갱신하는 터라 중도 해지는 문제없습니다.”
역시 1990년대 종금사답게 중도 해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기존 채무자에게 주식 담보는 너무 위험해졌다며 돈을 회수할 것이 뻔하다. 내가 바라는 바이다.
“보안이 문제군요. 토지 용도를 관공서에 신고해야 착공할 수 있으니, 공무원들 입단속까지 책임지기는 어렵습니다.”
“그 또한 염려 마십시오. 한 달만! 한 달만 기다렸다 신고해 주십시오. 제가 사장님 손에 3조를 쥐여 드리겠습니다.”
“너무 큰 돈이라 그 정도 기간이면 굳이 종금사에….”
“절대 문제없습니다. 종금사 세 곳이 뭉치면 그 정도는 껌값입니다. 일본 투자자들이 얼마나 통이 크신데. 땅도 무척 좋아하시고!”
“으흠, 일단 한 달은 기다려 보죠.”
내가 턱을 만지작거리자 안 이사의 입이 귀에 걸렸다.
“당장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지도는 제가 가져가도….”
“뭐, 보안만 지켜 주신다면….”
“안 됩니다. 회사 기밀입니다. 주세요.”
내가 말을 하려는 와중에 이 비서가 훅 하고 지도를 뺏어 왔다.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다. 여기서 했던 말이 사실이 되면 곤란하잖나.
“안 이사, 그냥 나에게 전화를 해. 내가 공사 담당이니까 계획과 진척도를 알려 주면 되잖아.”
“나 부장님께서 그러신다면 뭐, 알겠습니다.”
“바쁜데 어여 가 봐. 담에 술 한잔 거하게 쏘는 거 잊지 말고!”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하하!”
나 부장이 안 이사를 어깨동무하며 데려가 차에 태워 버렸다. 손도 마구 흔들어 주며 강제로 배웅했다.
짝! 짝! 짝!
나 부장은 손뼉을 치는지 손에 묻은 뭔가를 털어 내는지 여하튼 손바닥을 부딪치며 내게 다가왔다.
“사장님, 근데 정말 여기 공장을 지으실 겁니까? 듣다 보니 저놈들에게 돈을 퍼다 주는 꼴인데.”
“상가를 지으면 그리되겠죠.”
“공장을 지으면 상가는 자연스레 짓게 되는데요.”
“공장 나름이죠.”
“…공장 나름이라고요?”
“용인밸리에 폐수 처리하는 인프라가 모자라죠. 반도체 집적도가 높아지면 독성 물질 배출량도 많아질 테고.”
“오!”
“선진화된 폐수 처리장을 만들어 보시죠. 그것도 아주 크게! 40만 평 이상 공장을 확장해도 모두 수용 가능하게 말이죠. 처리장 근처는 생태계 조성 영역으로 조성해 보고요. 정화된 물을 하천으로 내보내도 괜찮다는 것도 증명하고, 계류지도 만들고, 하천 따라 대규모 갈대밭도 조성하고!”
“하하하하! 상가를 짓고 싶어도 못 짓겠네요.”
“우리는 짓고 싶은데 국가가 허가를 안 내 주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하!”
3조를 끌어다 폐수 처리장을 만든다고 하니 나 부장은 좋다고 웃어 댄다. 엄연히 공장은 공장이며 당연히 수익도 나온다. 투자자들에게 원금 대비 수 %의 배당금도 줄 수 있다. 손해는 전혀 아니니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 단지 손을 털고 나가기엔 속이 쓰릴 뿐이다.
“사장님, 외곽 쪽 40만 평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웃고 있는 나 부장 옆에서 이 비서가 거든다.
“차후 협력 업체와 거래해야죠. 부동산 투기한 양반들은 손해 좀 보라고 하고. 일단 종금사들이 협력 업체 지분을 처리할 테니, 버지니아 트레이딩과 연계해서 전부 매집하세요.”
“물론 공식적으로 우리 회사는 관여하지 않는 걸로요?”
“당연하죠. 차후에 케이를 통해 지분을 넘겨받으면 돼요. 이 비서가 직접 챙겨요.”
“예, 사장님.”
그날부터 한 달 동안 스마트 클라우드와 버지니아 트레이딩은 미친 듯이 용인밸리 협력 업체들의 지분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종금사가 주식 담보를 풀고 돈 다발을 들고 내 회사를 방문한 것은 정확히 한 달 뒤였다.
3월, 돈지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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