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금사가 세 곳씩이나 입주했다고요?”
“수한 씨, 히타치 케미컬을 포함해 일본 합작회사가 꽤 있잖아요. 수한 씨 지시대로 일본 합작회사 지분을 매년 수 %씩 매입했더니 그 매입 자금이 재차 종금사로 흘러갔어요.”
케이가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한다. 기분 나쁜 나비효과다.
“허… 일본 애들도 만만찮네. 결국 지분을 잃은 만큼 한국 기업의 지분을 쥐고 있는 셈이 되었잖아.”
“그러네요. 주식 담보 대출에서는 주가의 60%쯤을 반영하니까 싼값에 지분을 확보하는 거네요. 그러고 보니 수한 씨 말처럼 이거 단순한 담보가 아닐 수도 있겠어요.”
“케이라면 어때?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추면 용인밸리의 우량 기업들이 우수수 손아귀로 떨어지는데 그냥 두겠어?”
“정말 일본 물주들이 적대적 M&A를 하려는 걸까요? 정말?”
“용인밸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겠지. 내 눈엔 그런 시그널이 확연히 보이네.”
“헉!”
내가 천기누설을 좀 해 주자 케이와 권 부장의 눈이 동그래진다.
“서, 설마요.”
“현대전은 총 들고 하는 전쟁이 아니야. 전쟁의 목적은 남의 나라를 거지로 만들며 돈을 챙기는 것. 그 방법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라고.”
“사장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 양반들은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사람들이지만, 이번만큼은 믿고 싶지 않은가 보다. 이들은 아무리 크게 생각해도 용인밸리의 국부적인 적대적 M&A 정도였을 것 같다.
“숫자로 판단해 보지. 내일부터 주식시장에 들어간 일본 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종금사에서 집중 매입한 회사들 지분이 어느 정도 되는지 조사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수한 씨, 이거 어쩌려고요.”
“우리에게는 아군이 몇 명 있잖아.”
“아군… 조사하나마나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일본 자금은 100억 달러는 될 거예요. 이거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수한 씨 예상이 사실이라면 정부에 먼저 알려서 국채 발행이라도 해서….”
케이가 당황했는지 대한민국을 우리나라라고 한다. 그리고 정확히는 100억 달러가 아니라 130억 달러 정도 된다. 1990년대에 13조라니, 무척 큰 돈이긴 하지만 해 볼 만은 하다. 너무 큰 돈이니 국채를 매입해 주는 방식은 어떠냐고? 쓸데없는 일이다. 문민정부의 경제 각료에게 그런 돈을 맡기는 것은 참담할 정도로 희망이 없는 일이다.
“우리끼리 해야 해. 원래 대한민국 국란은 국민들이 극복하거든. 그게 우리 문화야. 하하.”
나는 웃고 말았다. 국란이라는 말에 케이와 권 부장이 잔뜩 굳은 표정을 했다.
대화를 마치고 회식 장소로 다시 돌아갔지만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식사를 마쳤을 때는 어느새 케이와 권 부장은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 않았다.
- *
다음 날, 본가에 들러 인사를 하고 조금 늦게 출근을 했다.
“출근하십니까?”
“좋은 아침이에요. 들어갑시다.”
사장실 입구에는 권 부장과 케이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권 부장과는 인사라도 주고받았는데 케이는 내게 문만 열어 줬을 뿐 아무 말도 않았다.
쓰윽.
“어제 급히 조사를 했습니다만, 직접 보고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탁자에 앉으니 권 부장이 두툼한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케이도 비슷한 두께의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흘낏 보기에도 숫자가 아주 방대하다.
“이야, 종금사가 꽤나 열심히 일을 했군요.”
“저도 조사를 하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용인밸리의 127개사의 지분이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42%까지 잠식되어 있습니다. 일부 사장들이 회사 부지를 확보하는 데 종금사의 돈을 빌린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3공장 외곽지역에서 부지 거래가 아주 활발합니다.”
“어떤가요? 종금사 애들이 부동산이 폭락할 것을 알고 있는 듯하지 않나요?”
“솔직히 사장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만, 마치 당장 일본인 소유로 등기할 수는 없으니 잠시 한국인 손에 맡겨 놓겠다는 뜻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여전히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권 부장은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자료를 살펴보면 주가가 폭락할 경우 회사를 삼키든 땅을 삼키든 취사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종금사를 끼고 있는 물주들의 작전은 뻔하다. 보유한 주식을 매개로 해서 일거에 공매도를 때리는 것.
대규모 공매도는 마치 신호탄과 같아서 주가는 일거에 폭락할 테고, 외환 거래가 뚫려 있는 종금사를 통해 엔화가 빠져나가면 달러도 덩달아 빠져나갈 테고, 종금사는 부도가 나고, 용인밸리의 땅과 회사는 차압되고… 한마디로 일본 물주들에겐 꿩 먹고 알 먹기가 되는 것이다.
“수한 씨, 내 자료를 봐요. 용인밸리뿐 아니라 다른 대기업들도 그 못지않아요. 신성, 대현, LK그룹의 알짜배기 기업들이 7%가량 잠식당했고, 서우그룹은 서우물산이 집중 공격을 당해 자그마치 지분을 21%까지 잠식당했어요. 이게 어떻게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는지 의아할 따름이에요.”
“케이, 확실해? 이 정보 어디서 구했어? 전경련?”
“아니에요. 윌슨에게서 구했어요. 미국 월가에서도 어느 정도 조짐이 있어요.”
말하는 모습이 파라곤이나 시타델이 직접 관여된 것은 아닌가 보다.
하긴 파라곤과 시타델 같은 대형 투자사가 화수분이나 다름없는 중국 투자를 꽉 잡고 있으니, 중간쯤 되는 헤지 펀드들은 한국을 노리나 보군. 일본 애들이 시작할 조짐이 보이니, 숟가락 얹을 셈인 거다.
지금 미국은 경기 과열을 우려할 정도로 달러가 넘치거든. 월가에서 돈을 써야 하는 시점이 되긴 됐지.
1997년은 빌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해 재취임한 해다. 재선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물주들에게 보답하는 측면에서라도 월가의 일탈을 눈감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의 집인데 불이 나든 말든 뭔 상관인가. 심지어 돈이 된다는데 말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한국 정부가 외환 위기로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사태가 촉발되기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대응해 주지 않았다. 훗날 외교 전문가들은 북미 회담 때 대한민국이 북한에 경수로 지원을 하기 전에 북한의 핵 개발 폐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들 한다.
빌 클린턴으로선 그게 마음에 안 들었겠지. 북한을 다독거려서 잡음을 제거하고 싶은데, YS가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꼴이잖나.
결국 집권 초기 사이가 좋았던 빌 클린턴 행정부와 문민정부가 조금 멀어진 것이 공격당할 빌미를 준 것이다. 속된 말로 북한이야 ‘이때 경제 지원 안 받으면 언제 받나?’ 하고 연신 도발을 감행하고, YS 입장에서는 그걸 용납하기는 어려웠으니 각을 안 세우면 이상하고, 미국은 ‘제발 당분간 조용히 좀 해 줘. 재원은 마련 중이야.’라고 하는 거니 당연한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미 재선 전후로 휘청휘청했던 이유가 다름 아니다. 올해 1997년은 유독 일본 놈들까지 나서서 문제가 커진 거고.
여하튼 자료를 잠시 살펴봐도 내가 알고 있는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 조사를 바탕으로 용인밸리와 양질의 기업만 살려 내면 내 할 일은 다 하는 거다. 나도 대기업으로 거듭나고, 부족한 인력을 스카우트할 절호의 찬스다. 물론 은행돈을 쌈짓돈처럼 써 대던 놈들도 이참에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말이다.
탁!
“시간 좀 걸릴 줄 알았는데, 하룻밤 새 이런 자료를 구해 오다니. 대단한데요?”
“조사해 놓고 보니, 오히려 여태 조사할 생각을 못 했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최소한 용인밸리 사장들은 모아 놓고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일러요. 작전을 짜고 난 뒤에 알려 줘도 늦지 않아요.”
“수한 씨, 시간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요?”
“진행 상황을 보아하니 1년도 채 남지 않은 것 같아.”
“…생각보다 시간이 없네요.”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필요 없어. 권 부장님은 여기서 자리를 지켜 주시고, 케이는 나와 같이 가지.”
“누구 만날 사람 있어요?”
“원래 큰일이 있을 것 같으면 친정부터 가는 거야. 친정 망하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잖아.”
“대현?”
“응.”
뚜벅뚜벅.
삐리릭. 삐리릭.
-여보세요.
“정헌몽 사장님, 저 유수한입니다.”
-오, 유 사장. 전역했다고 들었네. 시간되면 한번 보고 싶군. 식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 갑니다. 식사보단 차나 한 잔 하시죠.”
-하하! 유 사장답구만. 어서 오시게. 환영하네.
“시간 좀 길게 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논의할 일이 덩치가 커서 말이죠.”
-어… 으흠, 뭔 일이기에?
“가서 말씀드리죠.”
-기다리겠네.
“예.”
툭. 삐이익.
봐라, 친정답게 바로 오라고 하잖나.
- *
경기도 이천, 대현전자 사무동.
「새로운 도약」
사무동 로비에 ‘挑戰(도전)’이라고 한자로 크게 적혀 있던 사훈이 한글로 바뀌어 있다. 정헌몽 회장으로 대현그룹이 재편되면서 분위기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사무동 로비마저 어두운 색감의 바닥재를 모두 흰 대리석으로 바꿨기에 한결 밝아 보인다. 왠지 기분이 좋다.
뚜벅뚜벅.
“아이고! 유 사장님, 전역 축하합니다.”
로비 입구로 최 상무가 마중을 나왔다. 얼굴이 훤해진 것이 회춘한 느낌이 들 정도다.
“최 상무님, 별고 없으셨죠?”
“덕분에 안 잘리고 잘 있습니다. 올라가시죠.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예, 그러죠.”
“버지니아 사장님도 같이 오셨네요.”
“잘 지내셨죠, 최 상무님?”
정헌몽 사장답게 기존의 가신을 그대로 유지했다. 최 상무도 여전히 재무실장과 비서실장을 겸하고 있다. 케이도 최 상무는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지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다. 억센 기운이 넘치는 대현그룹에서 유순한 회장과 그 못지않게 유순한 비서실장이 짝을 이루다니 신기한 일이다.
딸깍.
“어서 오게, 유 사장. 오, 케이도 같이 왔군.”
“오랜만에 봬요, 정 회장님. 어… 정 회장님이 또 계시네.”
“허허, 헷갈리면 왕회장이라고 부르면 된다. 허허.”
어찌 된 영문인지 정영주 명예 회장도 자리를 같이했다. 공식적으론 명예 회장마저 물러났으니 딱히 호칭이 없었는데 자기 입으로 왕회장이라 부르라고 한다.
“왕회장님은 어쩐 일로? 저는 정헌몽 회장님과 약속을 했습니다만.”
“그냥 놀러 왔다. 수한이 니가 군대 마쳤다고 해서 얼굴도 한번 볼 겸.”
“유 사장이 큰일이라고 하기에 내가 아버님을 모셨네.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감사합니다.”
이왕 왔으니 싫다고 할 수는 없다. 내 솔직한 본심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큰일이라고 전화로 알려 줄 필요는 없었잖나.
“유 사장, 무슨 큰일인가? 혹시 중국에서 또 큰 건을 잡은 것인가? 대형 공장이든 항구든 아파트든 상관없네. 우린 다 할 수 있다네.”
정헌몽 회장이 김칫국을 왕창 들이켠다. 하긴 내가 군대에 있을 때도 몇 번이고 권 부장과 케이를 통해 중국 쪽 건설을 맡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긴 했지.
“일단 대현상선으로 만족하십시오. 중국 쪽 건설을 맡았다간 오히려 돈만 묶이게 될 겁니다.”
“으흠….”
“그리고 오늘은 그보다 더 큰 일을 논의하러 온 겁니다.”
“더 큰 일?”
“이것부터 보시죠.”
정헌몽 회장은 내가 건넨 서류를 잠시 읽어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좋은 시그널이다.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대충 상황 파악은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대현의 비서실이 정치 외압에서 벗어나더니 한결 제 역할을 해 주고 있나 보다. 최 상무를 건너뛰고 보고서를 왕회장에게 보여 주는 것을 보면 내 짐작이 틀리지 않을 거다.
“음! 대현도 비슷한 조사를 하고 있네. 최근 석 달 사이에 일본과의 물동량이 20% 가까이 줄었기에 살펴봤는데 확실히 상황이 이상하긴 하군.”
“의도적으로 외환 거래를 줄이고 있다는 말씀이죠?”
“정확하네. 작년 말에는 원부자재, 부품 할 것 없이 강제로 물량을 잔뜩 밀어내더니 올해 들어서는 재고가 부족하다며 차일피일 납품을 미루는 경우가 아주 잦아졌어.”
“재고는 얼마나 있습니까?”
“작년에 하도 물량을 밀어 대서 6개월 치 재고가 있네. 지금 수급 요청을 내면 아무리 못해도 3개월 치는 더 확보할 수 있을 거네. 냉동 보관의 한계까지 정확히 계산하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9개월이라…. 다행이네요. 적이 타이밍을 틀 가능성은 없어 보이네요.”
“수한 씨, 1년 정도…. 아, 그게 그거구나.”
케이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왕회장도 표정을 달리한다.
“케이야, 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기고? 좀 쉽게 설명해 주겠나?”
“수한 씨 말로는 열 달 뒤에 국란이 일어난다고 하던데요.”
“국란?!”
“현대전이라고 하더라고요. 돈으로 하는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