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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돈으로 하는 전쟁 (56/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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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돈으로 하는 전쟁

1997년 1월 2일.

부스럭부스럭. 끼리릭! 철컥!

나는 군대 생활 마지막 날까지 신문을 정리했다. 누가 인수인계를 받는지도 알지 못한다. 신년 연휴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도서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다. 전역 통지서만 떨렁 날아왔을 뿐이다. 크리스마스 휴가 전에 이미 전역 신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오늘은 날이 밝았으니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후임자를 위해 이것저것 업무 매뉴얼을 적어 두고 신문을 깔끔하게 정리해 뒀을 뿐이다.

저벅저벅.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전역 통지서….”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정문을 나서는 나는 이미 민간인. 더 이상 부대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정문을 지키는 군인들이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기에 피식 웃고 말았다.

「경축! 스마트 클라우드 유수한 사장님 전역!」

정문을 돌아 나오자마자 보기에 민망한 현수막이 겨울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내 가족일 리는 없다. 크리스마스 전에 말년 휴가를 본가에서 지냈고, 아버지가 전역 파티는 동네잔치로 아주 거하게 했다. 아들 자랑을 꽤나 하셨는지 마을 회관이 떠들썩했었다.

“우와! 사장님 저기 나오시네요.”

“수한 씨! 여기요, 여기!”

케이, 이 비서, 오 이사, 권 부장, 나 부장, 김 팀장까지 모두 나왔다. 케이도 이제 한국인이 다 됐나 보다. 미국인이 연말 휴가를 이리 짧게 마무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말이다.

“전역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어이구, 뭔 대단한 일이라고 이리 나오셨어요?”

“당연히 와야지요. 군부대 앞만 아니면 내가 폭죽이라도 쏴 줬을 텐데.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나 부장은 정말 오랜만이다. 나를 와락 안더니 고생 많았다고 한다. 나 부장은 군대 생활을 진하게 했나 보다. 고생했다며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괜히 무안해진다. 정말 편했는데. 외려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가져서 도움이 되기도 했다.

휘이이잉.

“이왕 나오셨으니 따뜻한 곳으로 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그래야죠. 원래 군복 입으면 엄청 춥다니깐. 이럴 땐 뜨끈한 삼계탕을 먹어야지 허접하게 짜장면 먹고 싶다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나 부장이 사람들을 우르르 몰아댄다. 짜장면은 생각도 안 나는데 그리 말하니 먹고 싶다고 해 줘야 하나. 이 비서가 옆에서 크득크득 웃음을 참고 있다.

“구름집으로 가시죠. 거기선 삼계탕을 시키든 짜장면을 시키든 다 되니까.”

“좋은 생각이네. 역시 권 부장이야.”

“으흑, 정말 춥네요. 어서 가죠.”

“구름집은 넓으니까 내가 사람들을 더 불러야겠다.”

우르르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모두 럭셔리하다. 업무용 차가 전부 그랜저, 다이너스티인 데다 케이는 포르쉐를, 나는 벤틀리를 타고 있잖나.

따뜻하게 데워 놓은 차에 올라타니 몸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이 비서 특유의 빠르고 부드러운 운전 솜씨에 감탄하고 있자니 어느새 용인밸리의 구름집에 도착했다.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을 떼어 내지 않아 좀 우습지만, 주변 풍경이 꽤나 바뀌었다. 구름집 위쪽으로는 공용 주차장이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고, 상가들 사이로 보행 도로가 바둑판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사이로 눈꽃이 핀 가로수가 촘촘히 늘어서 있는 풍경이 정말로 멋지다. 그러고 보니 2년 전에 이 골목에 들렀을 때보다 가게가 훨씬 많아졌고, 이곳저곳에 ‘신년회 단체 환영’이라는 팻말을 문 앞에 달아 놓은 걸 보니 활기가 느껴진다.

드르륵.

“아이고! 사장님 오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지요.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이소.”

“하하, 그동안 별고 없으셨죠?”

“아유, 별고는 무슨. 사장님 덕분에 부자 됐지요. 서비스 팍팍 드릴 테니, 맘껏 즐기이소.”

차를 대고 걸어가니 대뜸 문을 열고 나오는 구름 삼겹살집 아줌마. 수다는 여전하다. 한마디 말을 건네면 두 마디가 온다. 그래도 서비스를 준다니 고맙다.

우르르.

“유 사장님, 전역하셨다고요?”

“축하드립니데이. 오늘 회식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뭔 소리요, 박 사장. 오늘은 제가 쏴야지요. 나 부장님이 나를 먼저 불렀는데.”

“들어가시죠, 사장님들. 유 사장님 추우시겠어요.”

“아이고, 그라네.”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용인밸리 협력 업체 사장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거리가 북적북적할 정도다.

“하하, 이왕 오셨으니 식사라도 하고 가십시오. 그동안 어찌 지내셨는지도 알려 주시고.”

용인밸리 사장들 중엔 나이 많은 이들도 있지만 20대 사장들도 꽤나 있다. 인터넷 관련 회사는 당연하고, 반도체를 기반으로 하는 제조업체들이 밀집해 있기에 벤처들이 성장하기에는 아주 적당하다. 국책 과제도 분기별로 살펴봤는데 개발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가게 안에 들어가 보니 인테리어가 기가 막히다. 예전에 평상에 앉아 삼겹살을 굽던 정자나무는 통유리를 둘러 정원처럼 꾸며 놨고, 그 주변으로 빙 둘러서 홀을 만들어 놨다. 누가 유리창에 장난스럽게 ‘돈나무’라고 적어 놨다. 낙서를 그대로 둔 걸 보면 주인아주머니 마음에도 싫지 않았나 보다.

“자, 자! 소고기부터 깔아야지요. 여기 사장님 테이블은 오늘 서비스!”

내가 자리를 잡자 주인아주머니는 신이 난 듯 불을 지피고 두툼한 소고기 등심을 얹어 댄다.

“아주머니, 사장님한테 짜장면 한 그릇 시켜 주세요.”

“아, 제대하셨다고 했지요? 내 얼른 시켜 드릴게. 삼선짜장? 아니면 쟁반짜장?”

“아무거나요. 하하.”

이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홀인데 벌써부터 꽉 차기 시작한다. 사방에 상차림을 하고 고기를 굽고 단박에 시끌벅적해진다.

다이내믹 코리아. 이런 풍경이 조만간 사라질 것 같았기에 나는 맥주로 입술을 적시며 사진을 찍듯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장님, 건배하셔야죠.”

불러 모을 사람은 대부분 자리 했는지 나 부장이 맥주잔을 들고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한다. 늦은 점심이라고 해야 할지 이른 저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겨울이니까 먹다 보면 해는 금방 질 거다.

“맘껏 즐기시고! 음주 운전은 하시면 안 됩니다.”

“에이, 수한 씨! 건배 제의~”

케이도 오늘은 취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이제부터 내가 자유롭게 활동할 테니 기쁘긴 할 거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케이도 그렇고 다들 많이 힘들었을 거다.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확인을 받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다들 부자 되십시오!”

“부자 되세요!”

와하하하하!

언제나 반응이 좋은 건배 제의다. 겨울임에도 맥주는 시원해야 제맛이다. 적당히 익은 소고기를 기름장에 찍어 한입 가득 넣으니 맛이 일품이다. 역시 군인보단 민간인이 좋다.

“사장님,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기분 좋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가벼운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불쑥 소주병을 들고 누군가 끼어들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을 것 같은 사람이다.

쪼르륵.

“고맙습니다.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CR테크의 주덕훈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CCTV 국책 과제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감사인사 드리려고 왔습니다.”

“오, 그러시군요. 축하드립니다.”

CCTV 국책 과제면 LK 구 회장에게 감사해야지, 왜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

“호호, 나도 이분 알아요. 작년에 광진구 초등학생 유괴 사건 해결사였잖아요. TV보다 훨씬 잘생기셨네요.”

“응?”

신문에 대서특필한 그 사건이기에 나도 알고 있다. TV를 시청하진 못했지만 우연찮게 광진구에 CCTV를 시범 설치했는데, 유괴 사건에 이용된 트럭의 번호판을 파악해 범인을 잡았다는 기사였다.

아이가 사라진 부근에서, 그리고 몸값을 요구하는 공중전화 박스 근처에서 같은 트럭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채고 주변의 CCTV 데이터를 모두 분석해 번호판을 알아낸 거다. 나는 형사가 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개발자가 직접 그 일을 했다고?

“해결사까진 아니고, 형사들에게 활용법을 알려 줬을 뿐입니다. 아직 형사들이 CCTV에 대한 이해가 좀 떨어져서 말이죠. CCTV를 단순히 야간 순찰을 대신하는 역할로만 보고 있더라고요.”

“LK 구 회장님이 아주 좋아하셨겠군요. 상가 밀집 지역에 CCTV 설치가 의무화되었지 않습니까.”

그 일로 말미암아 올해 국가 예산에 CCTV 설치비용이 반영되었고 우범 지대에 집중 설치된다고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경부고속도로 일부 구간엔 비슷한 개념의 과속 방지 카메라도 개발해서 설치한다고 했는데 CR테크가 그 프로젝트를 받았을 것 같다. 한마디로 대박을 친 사장이라고 보면 되겠네.

“LK야 CCTV 시스템을 파는 회사이니 당연히 좋아하겠지요. 그보다 저는 CCTV용 CIS 모듈 개발에 협업해 준 스마트 클라우드에 더욱 감사하고 싶습니다. 이미지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걸 깔끔하게 해결해 주셨거든요.”

“김근업 팀장이 했겠군요. 원래 그 양반이 엔지니어를 좋아합니다.”

“호호. 김 팀장님! 수한 씨가 불러요. 이리 와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케이가 다른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김근업 팀장을 불렀다. 김 팀장도 용인밸리 사장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는지 그가 잔을 들고 내 탁자에 합류하자 다들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이구! 주 사장님, 언제 오셨어요? 사장님께 말씀드렸어요? 공동 특허 냈다고?”

“지금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동 특허? CCTV용 CIS 모듈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어갔나 보군요.”

“예. 주 사장님 아이디어가 아주 걸작이었습니다. CIS 모듈을 사면에 모두 설치하고 어안렌즈를 극도로 왜곡시켜서 관찰 영역에 사각이 생기지 않게 했거든요. 저희가 기술 지원한 것은 왜곡된 이미지를 복원하는 것 정도였습니다.”

“김 팀장님, 그게 핵심 특허 기술입니다.”

“아니에요. 360도 촬영 아이디어가 획기적인 거죠. 아이를 유괴한 트럭이 어디로 향했는지 끝까지 촬영된 게 그것 때문이잖아요.”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여하튼 공동 특허를 내고선 유수 기업들이 라이선스를 달라고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가 옵니다. 로열티로 수십억 벌게 생겼습니다. 하하.”

참으로 보기 좋다. 공동 특허를 내고서도 스마트 클라우드가 특허를 뺏어 간다고 여기지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스마트 클라우드와 공동 특허를 원하는 느낌마저 든다. 특허 분쟁이 생기면 스마트 클라우드의 자본력으로 특허를 적극적으로 방어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는 듯하다.

하긴 용인밸리의 하청 업체들과 협업하며 비슷한 일례는 수도 없이 많았을 테니 의심할 이유가 없으리라.

디지털 음원 재생 특허를 가진 디지털 캐스트가 대표적이지 않나, 앰팩 출시로 디지털 캐스트는 로열티로만 연 200억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중저가 앰팩의 경우 OEM 생산을 맡고 있으니 건실하게 커 나가고 있다. 겉으로 보면 스마트 클라우드의 자회사라고 해도 될 정도다.

“저도 감사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엑스디자인의 서원배 사장입니다.”

김 팀장을 따라온 양반 중 한 사람이 훅 하고 끼어든다. 명함을 받으니 김 팀장이 자연스레 소개를 했다.

“서 사장님은 우리 디지털카메라의 셀프 촬영 액세서리, 일명 셀카봉을 만드신 분입니다. 국책 과제에서 동상을 타셨죠.”

“오! 대박 나셨겠네요.”

“하하, 저희 회사는 스마트 클라우드 제품의 액세서리 전문 업체입니다. 사실 셀카봉보다 K폰 케이스가 매출이 더 큽니다. 신제품을 마구마구 출시해 주십시오.”

액세서리를 만든다고 회사 이름이 엑스디자인인가 보다. 엔지니어다운 네이밍이다.

“이야, 보안이 철저하다는 그 액세서리 업체가 바로 엑스디자인이었군요.”

“아유, 그럼요. 시제품은 금고에 보관하고 저만 봅니다. 치수 측정도 제가 직접 하지요. 보안은 제 생명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용인밸리의 제조 생태계라 할 수 있는 업무 형태다. 시제품을 몇 개 만들어서 액세서리 업체에 보내고 쇼 케이스를 기점으로 일거에 액세서리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보호 케이스, 충전기, 이어폰, 심지어 포장재까지 스마트 클라우드가 직접 만들기엔 수익성이 나지 않는 것들은 용인밸리에서 모두 만들어 낸다.

여태 디자인 노출 사고가 한 번도 없었으니, 하청 업체 사장들의 보안 관념은 철저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 팀장님, 저도 소개를 좀 해 주십시오. 하하.”

“아, 예. 사장님, 이분은 동양종합금융의 안시환 이사님입니다. 용인밸리에서 돈놀이, 아니 기업 대출을 해 주시는 분이죠. 원래 저기 권 부장님 옆에 계셔야 하는 분인데.”

김 팀장은 성격상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한다. 떨떠름한 소개에도 아랑곳없이 안 이사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소개 감사합니다. 동양종금 안시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지금 명함을 안 가지고 있네요. 오늘이 전역이라.”

“하하, 명함은 다음에 받겠습니다. 이런 자리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아, 예.”

나 또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인밸리에 종금사라니. 중소기업 지원책에 일 순위로 올라가는 회사가 입주해 있고, 스마트 클라우드가 협업해 주는 회사가 대부분이라 돈이 모자랄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1990년대의 종금사는 문민정부가 기업어음 할인 및 외자 대출 등 기업에 단기 자금을 공급하라고 허가해 준 금융사였다. 한데 원래 기대한 역할과 달리 무분별하게 일본 단기 자금을 끌어와 증시에 투자하고 고금리로 가계 대출을 해 주면서 IMF를 터뜨린 주력 세력이다. 외자를 빌려 가계 대출을 하다니, 금융업이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아깝다.

한마디로 돈만 밝히다 빚잔치를 거하게 치른 사채업자들이나 다름없는데, 어째서 용인밸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

퍽!

“아아~ 미안해요. 수한 씨.”

눈치 빠른 케이답게 맥주잔을 거하게 엎질러 줬다.

“으윽, 다 젖었네.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내 차에 드라이어가 있어요. 가서 말려요.”

“드라이어가 있어?”

그녀가 조용히 나와 할 말이 있나 보다.

    • *

드르륵… 휘이이잉!

밖으로 나오니 아주 춥다. 이 비서와 권 부장도 담배를 피우는 척하며 따라 나온다. 스마트 클라우드엔 눈치 빠른 사람들이 많다. 공용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자니 이 비서가 코트를 건네준다.

벌컥.

“들어와요, 다들.”

내가 차 문을 열어 주자 케이와 권 부장이 자리에 척척 앉는다. 이 비서는 추운데도 불구하고 차창에 기대어 정말로 담배를 피운다.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경계를 서는 모습이다. 중국에 한참 머물러서 그런지 담배가 더 늘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용인밸리에 종금사라니요. 협력 업체의 재무 건전성은 스마트 클라우드에 매우 중요한 거 다들 알잖아요.”

“죄송합니다. 케이 사장님도 그렇지만 저도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못 한 면이 큽니다.”

“저도 좀 의외예요. 불과 석 달 정도 자리를 비운 게 전부였는데 용인밸리 외곽에서 부동산을 끼고 종금사들이 잔뜩 몰렸어요. 제3공장을 착공하니 외곽 쪽 땅값이 여기만큼 오를 거라는 기대 심리 때문이겠죠.”

“신입사원들이 기숙사보다 원룸을 선호하는 것도 그렇고, 직원들도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얻고자 하는 수요도 많아서 그렇습니다. 오히려 서울보다 용인의 땅값이 더 오르는 기현상까지 있습니다.”

“사원 임대 아파트를 계속 짓고 있잖습니까. 전세자금도 회사가 대출해 주고.”

나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름 지원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요 대비 공급이 역부족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협력 업체 직원들의 수요도 폭발하고 있고요. 거기에 기존 은행들과 달리 종금사가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해 주니 용인의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는 사내 규정을 들이밀어 자제시켰지만, 남의 회사 직원들보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가 없어서요.”

“아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해 줘? 용인밸리의 입주 기업들은 대부분 상장에 성공했다. 정말이지 땅값이 미친 듯이 올랐겠구만.

다행히 우리 직원들은 자제를 시켰단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우리사주는 내가 25%를 싸게 배분하는 대신 5년 동안 팔지 못하게 해 뒀다. 즉, 1998년에 시장에 팔 수 있도록 함으로써 IMF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도였다.

“직원들 문제가 아니에요. 분당이나 수서 같은 신도시에서 떼돈을 번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부동산 투기를 잡을 생각은 없고, 외려 용인을 중심으로 무차별적으로 택지 개발을 승인하고 있잖아요. 마치 대한민국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장려하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

케이의 말에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문민정부의 저급한 경제 각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 활성화 정책이거든. 무역 수지가 적자라고 해도 부동산 투기를 활성화시키면 GDP가 1% 이상 성장하는 기적이 일어나잖나. 유동 자금을 땅에 묻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지만 소득 1만 불을 달성했다며 국민들을 호도하기엔 그만한 것이 없다.

결국 기업은 물가 연동 때문에 월급을 올려 줄 수밖에 없고 그만큼 투자 여력이 떨어지게 된다. 물가도 덩달아 올라가 직장인의 재산은 제로섬이며, 자영업자는 죽어 나가고, 투기 세력은 돈을 버는 상황이 된다. 한마디로 부동산 투기 대신 열심히 일해서 저축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이따위 정책에는 정말이지 화가 난다.

앞으로도 보수 정권들이 집권할 때마다 이런 저급한 정책으로 국가 잠재력이 훼손될 걸 생각하니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내가 나선다고 단박에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케이의 말에 잠자코 있을 뿐이다.

“그 말도 옳아. 하지만 당장 정치인들을 몰아낼 수도 없잖아. 우리는 용인밸리의 생태계를 해칠 가능성이 있는 적대적 M&A를 방지하는 게 급선무야. 일단 눈앞의 상황부터 보자고. 대체 종금사들이 어디서 돈을 마련한 거지?”

나는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물었다.

“현재 용인밸리엔 동양, 산와, 경일 종금사가 들어와 있습니다. 대부분 일본 자금을 바탕으로 주식 담보 대출을 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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