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로비의 정석 (55/104)

제3장 로비의 정석

한 달 뒤.

뒤적뒤적.

「3분기 수출 300억 달러 돌파. 연간 수출액 1천억 달러 눈앞에 뒀지만 무역 수지는 7분기 연속 적자 행진.」

「IT 관련 산업만 독야청청, 3고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세기의 빅딜, 대현과 LK는 상호 체질 개선에 성공할 것인가? 시장 반응은 일단 긍정적!」

「미국 컨슈머 리포트에서 한국 제품이 IT 부문 석권. 스마트 클라우드 나흘 연속 상한가.」

「코스피 1100선에서 약보합, 코스닥은 250 돌파. 벤처 기업 400개 시대.」

「잠자는 용이 깨어나는가. 열리는 중국시장, 한국 기업 진출 줄이어.」

「일본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주범,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 체포.」

「미국 하원 ‘슈퍼 301조’ 발효 기간을 2000년까지 연장키로 가결.」

신문을 읽고 있으면 1995년의 한국은 정말이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은 느낌이다. 세계정세도 마찬가지. 중국의 산업 굴기로 유가를 비롯한 원부자재 값이 급격히 오르고 있고, 일본 정부는 고베 지진과 테러 사건을 겪으며 엔화가 폭등하고 정권이 급격히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미국 정부는 클린턴의 경제 활성화 정책에 따라 금리를 지속적으로 내리고 있으며, 경제 과열로 수입이 급격히 늘어나는 부작용 때문에 슈퍼 301조로 관세 문턱을 높이고 있다.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무역 흑자를 봐야 하는 우리나라 1990년대 수출 전략에 있어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 와중에 원화 환율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상황이라 무역 적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신경제니 세계화니 하는 구호에 발맞춰 현재 2.25%인 일일 환율 변동폭이라도 늘려 놓으면 은행들이 내성을 좀 기를 텐데 말이다.

따르릉. 따르릉.

철컥.

“통신 보안. 면회실입니다.”

“통신 보안, 면담 왔습니까? 곧 조치하겠습니다.”

이제 나도 짬밥이 생겨서 바로 전화기에 대고 본론을 말할 수 있다. 전화를 끊고 언제나처럼 신문을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왜 전화가 안 오나 했다. 8월 말이니 시제품을 봐야 하는 때이지 않은가? 그리고 3분기 실적도 챙겨야 하고 말이다.

    • *

딸깍.

“어서 오십시오.”

“조너슨까지 오다니요. 면담실이 북적북적하군요.”

케이와 나운영 부장을 제외하고 모두 참석했다. 이 비서도 같이 왔다.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지친 모습이다. 나중에 따로 얘기해야지 싶다.

“하하, 시제품을 선보이는 날이라 모두들 긴장하고 있습니다.”

하긴 시제품이 나오면 모두들 기대 반 걱정 반이 된다. 기안했던 것과 실제 제품은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K폰 시제품을 보기 전에 간단한 것부터 먼저 할까요? 권 부장님, 3분기 매출 실적은 어떤가요?”

“3분기 누적 매출은 2조 7천억에 순익은 3,700억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의 매출 특성상 4분기에 수익이 늘어나는 구조이니, 연매출은 3조 9천억에 순익은 5,400억 수준이 될 것 같습니다.”

“으음, 작년 대비 상승률이 좀 꺾였군요. 작년에는 매출이 20% 이상 늘었는데.”

“덩치가 커져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매출과 순익이 공히 14% 성장했습니다. 공교롭게 순익 비율도 14% 예상되니, 작년 수익률 12%에 비하면 2%나 좋아졌습니다.”

14%라는 숫자가 많이 나온다. 외우기 쉬워 좋네. 여하튼 성장률은 좀 줄었지만, 순익 비율이 높아진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 회사가 IMF 대비를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 회사는 1990년대 한국 기업답지 않게 매출보다 순익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은행 융자에 그다지 목을 매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은행에 매출 실적 따위를 들이미는 경우는 아예 없다. 외려 은행들이 돈을 빌려 가라고 난리니까.

“주가는 연일 상승하고 있던데, 올해 투자자들에게 배당금 생각하고 있는 거죠?”

“예. 작년과 같이 10%를 할당할 계획입니다. 4분기 예상치까지 적립해 뒀으니 문제없습니다.”

“직원들 보너스는요?”

“3분기 인센티브는 총 110억으로 S급 5개 부서, A급 9개 부서, B급 17개 부서, 나머지 4개 부서는 C급입니다. 연말 인센티브도 비슷한 등급이라고 보면 1,100억가량 지출될 것 같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 직원 수가 대략 만 명이니까 연말에 평균적으로 천만 원씩 보너스로 가져가는 꼴이다. 1990년대 중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일반 직장인이 3년 만기 적금을 타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벌써부터 부서별 등급이 어쩌네 저쩌네 하며 말이 많겠다.

하지만 C급 부서가 나타난 것은 좀 의외다. 매출이 하향세인 사업이라고 해도 그마저 감안해서 연간 목표를 잡는데 말이다.

“C급 부서가 생각보다 많군요. 매출 성장세가 떨어진 것과 관계가 있나요?”

“간단하게는 그렇습니다. 에그펫의 매출이 예상외로 많이 떨어졌습니다. 워낙 짝퉁들이 범람해서 휴대폰 로열티로 버티는 수준이라 관련 부서들이 좀…. SRAM 부서도 같이 매출이 떨어졌고요.”

“그렇군요. SRAM은 내년부터 플래시 쪽으로 합치고, 에그펫 업무는 해당 팀원들 의견을 물어서 용인밸리로 업무 이관하죠. 본사에서 애드온 관리와 개발을 했던 인력은 서버 쪽이나 에그박스 쪽으로 재배치하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원래부터 부서 간 이동에 제한이 없고, 간부 직급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부서 통폐합이 자유로운 편이다. 프로젝트 위주로 팀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해 왔기에 팀원 간의 심리적인 거부감도 적은 편이다. 결국 흩어지고 모여 봐야 연구소, 개발팀, 양산팀, 영업팀, 품질팀, 간접 부서 등등 큰 카테고리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좀 있습니다. 부서 재배치를 염두에 뒀는지 에그펫 팀원들 중 일부가 벤처로 독립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용인밸리의 일원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정말요?”

확실히 우리 회사 직원들은 21세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은 용인밸리의 중소기업에 던져 주는 식으로 생태계 조성을 하고 있는데, 스마트 클라우드 직원이 아니라 독립된 중소기업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하긴 코스닥 붐이 불고 있으니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용인밸리의 벤처들이 줄줄이 코스닥에 상장해서 성공하는지라 내심 우리 직원들도 욕심이 나나 봅니다. 결과야 어찌 되든 게임기 사업에 인생을 걸고 싶다면서 말이죠.”

“하하. 꼬리보단, 작아도 머리가 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네요.”

“예, 그렇습니다. 올해 C급을 받아서 그렇지 원래는 최초로 S급 보너스를 받았던 인재들이라, 아주 자신만만하더군요.”

에그펫을 최초로 만든 한덕구도 끼어 있나 보다. 모든 사업을 내가 관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연매출 천억 대의 사업에 내가 아이디어를 쥐어짜 낼 수도 없고 하니 이번 기회에 독립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알짜배기 게임 업체가 될 수도 있겠다.

“당장은 어렵고요, 1년 계약을 통해 사내 벤처로 키우도록 하죠. 사내에서 회사 굴리는 법 좀 연습하라고 하고, 1년 뒤 독립하면 우리 회사와는 3년 계약을 맺어 주세요. 어쨌든 휴대폰에 들어가는 게임을 개발할 것 아닙니까.”

“사내 벤처라….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생각보다 권 부장과 얘기가 길어졌다. 내 동료들이 성장하면 사업부를 아예 분리해 대기업 형태를 갖추겠지만 현재로선 작은 사업체 정도를 분리하는 게 답이다. 1년 정도 연습시키고, 3년 계약이면 자생할 수 있을 거다. IMF에 쏟아져 나올 기업과 인재들이 합류하면 좀 더 작전이 수월해질 것 같은데,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으리라.

“자, 그러면 시제품부터 볼까요?”

“여기 있습니다.”

김 팀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조심스레 풀었다. K폰 신규 모델과 함께 액세서리도 같이 늘어놓았다.

“오!”

K폰을 꺼내 놓자 럭셔리 백화점에 방문한 느낌이 들 정도다. 명함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인데, 이전 모델인 네오 블레이드보다 훨씬 더 얇아졌고 모서리가 좀 더 미려해졌다고나 할까. 더욱이 폴더 표면에 노출된 액정 화면이 아주 근사하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로고가 천천히 색깔이 변하고 그 사이에 시계가 표시되어 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화면일 뿐이지만 1990년대 기술로 폴더 앞뒤로 액정 화면을 배치하다니 대단하다.

“어떠십니까? 디자인의 핵심은 전화기가 닫혀 있으면 앰팩이자 시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조너슨, 설명 드리세요.”

“고맙습니다, 김 팀장님. 사장님, 여기 테두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버튼입니다. 좌우 버튼을 누르면 직감적으로 음원 재생, 시계, 에그펫 화면을 띄울 수도 있지요. 심지어 전화번호를 선택해 통화까지 할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를 눌러 통화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256메가 플래시가 장착되어 있기에 음원과 전화번호를 저장하기엔 충분합니다.”

“256메가!”

내가 저장 용량에 놀라워하자 옆에 있던 김 팀장이 어깨를 으쓱한다. 이리 얇은 공간에 앰팩 기능과 256메가 플래시까지 집어넣었다니 설계 검증과 공정 셋업 한다고 뺑이쳤을 것 같다. 품질 불량의 원흉인 액정 화면을 두 개나 집어넣은 디자인인데, 내부 설계까지 도전적으로 구현하다니 대단하다.

“그리고 여기 이어폰에는 음량 조절 버튼이 따로 달려 있습니다. 음량 조절을 한다고 굳이 휴대폰의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오~ 그 아이디어는 누가 낸 겁니까?”

21세기 기술이 벌써 나왔다. 기술적으론 단순히 저항 수치만 바꿔 주면 되는 거니까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액세서리 연구팀이 제안했습니다. 특허는 출원해 뒀습니다.”

이젠 오 이사가 어깨를 으쓱한다. 역시, 창의적인 경쟁은 해 볼 만하다. 신제품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넣고 S급이 보너스까지 받는데 누가 마다하겠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디자인에 욱여넣고 품질 승인받으려고 개발팀에 합류해 엄청 노력을 했을 것이다.

“휴대폰 표면도 예사롭지 않네요.”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제품이다.

“용인밸리의 CVD 업체가 개발한 패럴린 코팅입니다. 완전 방수가 되면서도 표면 긁힘에 강한 코팅을 찾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현재로선 가장 적합한 솔루션이라 생각됩니다.”

오 이사가 설명을 했는데, 나는 심장 근처가 뜨끔했다. 용인밸리가 정말 성장했구나 싶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의도적으로 문질러 보았다. 워낙 박막이라 매끈한 감촉이 매력적이며 지문이 묻어나지 않는다. 광택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작지만 혁신적이다.

패럴린 코팅은 분말 상태의 폴리머를 가스 형태로 바꿔 차가운 제품 표면에 필름 형태로 내려앉게 만드는 기술이다. 사뿐히 내려앉는 특성 때문에 제품에 스트레스를 발생시키지도 않고, 미세한 틈에도 균일한 코팅이 이루어지고 절연막이며 방수막인 데다 무엇보다 지문이 잘 묻어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학계에서만 일부 쓰고 있던 기술인데 잘도 끄집어냈다.

“멋지네요. 외형도 그렇고 앰팩의 기능적인 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요.”

폴더를 열어 전화를 걸다가도 좌우 버튼을 아무거나 누르면 앰팩 메뉴로 휙 하고 넘어간다. 샾과 별표 버튼에 화살표를 병기해 직관적으로 조작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디자인팀, 개발팀, 연구소가 멋지게 협업을 했다.

“단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배터리 용량이 6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12시간이 되려면 여기 대용량 배터리를 끼워야 합니다.”

“대용량 배터리에 일반 배터리 한 개를 더 끼워 주도록 하죠. 영업팀 생각은 어떤가요?”

“배터리 원가는 대략 8,700원 정도입니다. 순익률이 30%에서 23% 정도로 감소합니다.”

“시장 점유율은 어찌 될까요?”

“그 정도 서비스면 0.5% 정도 상승할 것 같습니다.”

아니다. 실제로 1% 넘게 올라가는 효과다. 배터리를 안 끼워 주면 고객의 충성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고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우리 회사 이미지를 고려하면 그다지 손해는 아니다. 용인밸리에서 부품 수급률이 높아져서 그렇겠지만, 휴대폰 순익률은 자그마치 30%. 그게 23%가 되어도 제조업에선 지극히 큰 수익률이다. 배터리 하나 아끼자고 고객들에게 한 소리 들으면 안 된다.

“고객 친화적인 이미지를 깎아 먹을 순 없지요. 출시 패키지에 하나 더 끼우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좋네요. 그럼 모델명은 어찌 되나요? 투표를 했을 거 아닙니까?”

“수십 개가 올라왔는데 그중 세 개가 경합 중입니다.”

“어떻게 되나요?”

“윈드 블레이드 K, 세일렌 K, 사운드 블레이드 K 입니다.”

블레이드는 K폰 디자인의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앰팩이 들어갔다는 의미로 윈드, 세일렌, 사운드라는 말을 붙였나 보다. 묘하게 모두 마음에 든다.

“바람마저 가른다는 윈드 블레이드는 그렇다손 쳐도 사운드 블레이드는 어떤 의미인가요? 소리를 갈라요?”

“들어 보시면….”

권 부장이 꼼지락거리자 K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생각보다 괜찮은 음질이다. 으흠, 그런데 작지만 쿵쿵대는 느낌이 든다.

“허, 스피커가 몇 개죠?”

“두 개입니다. 액정도 두 개, 스피커도 두 개.”

“오오!”

스테레오 음향이다. 이어폰을 꽂고 들어 보니 훨씬 실감나게 들린다. 내 동료들이 제품 개발에서는 최상급 전문가가 된 것 같다. 역시 한국인은 돈만 있으면 일 잘한다.

“개발팀에선 스테레오 블레이드라고 모델명을 올렸는데 투표에서 탈락했습니다.”

“너무 엔지니어다운 모델명이었네요. 하하.”

“사장님은 어디에 투표하시겠습니까?”

“저는 사운드 블레이드! 그 이름에 투표하죠.”

“하하, 저와 같으시군요. 그리 출시하겠습니다.”

권 부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크게 웃는다. 몇몇이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보니 내기라도 했나 보다.

“이제 장기 신뢰성 검증이랑 양산만 잘하면 되겠어요.”

“문제없을 겁니다. 오히려 올해 11월 쇼 케이스는 어찌….”

“오 이사님이 하십시오. 시카고에 용인밸리 협력 업체도 잔뜩 끌고 가서 화려하게 하세요.”

“용인밸리 업체들까지요?”

“그들도 사업을 확장해야죠. 2년 정도 뒤에는 타사와도 이래저래 거래를 트게 해 줘야 합니다.”

“사장님, 그건 생각을 좀…. 기술 누출이 우려됩니다.”

“아뇨, 생각은 많이 했어요. 경쟁사도 바보가 아니니 결국 기술에선 우회 경로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우린 최소한 2년 터울로 새로운 기술과 첨단 제품을 내놓으며 달아나야 해요. 그게 우리의 전략이지 않습니까. 용인밸리의 중소기업들도 자체적으로 기술 개발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에게만 기대서 성장하는 것은 앞으로 2년 정도가 한계일 겁니다.”

“크게 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들도 우리 식구나 다름없어요. 직접 챙기지 못할 뿐.”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2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당연한 일이다. 나 또한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자, 이제 대충 얘기는 다 끝난 것 같군요. 막판에 품질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검증을 충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군요.”

“이 비서는 중국에서 언제 귀국했어요? 일은 잘되고요?”

“오늘 귀국했습니다. 보고만 드리고 또 나가야죠. 하하.”

“일이 잘 진행되나 보군요.”

“다들 바쁘실 테니, 권 부장님만 남으시면 짧게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이 비서는 마음이 급한지 앞뒤가 안 맞는 말로 사람들을 돌려보내려고 한다. 오 이사, 김 팀장이 조너슨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면회 시간이 얼마 남았네요. 그럼 저희는 다음에 퀄 결과를 들고 보고드리러 오겠습니다.”

“어서 가죠.”

오 이사가 시계를 보면서 재촉하자 세 명은 우르르 빠져나갔고, 그제야 이 비서가 품에서 뭔가를 꺼낸다. 이미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는지 권 부장은 그게 뭔지 아는 눈치다.

“뭡니까?”

“시중쉰 선생이 직접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편지를 뜯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영어로 쓰여 있었다. 글은 쉽게 쓰여 있었지만 속내를 숨긴 내용이었기에 행간을 조심스레 파악해야만 했다.

일단 중요한 사항은 시진핑이 부시장으로 있는 샤먼시 이외에 심천도 중국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외국인도 자유롭게 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해 뒀다는 것이었다. 샤먼과 심천에 공장을 세워야 자신이 뒷배를 서줄 수 있다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 심천이 경제특구가 되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인데 나름 시중쉰의 막후 정치력이 강력하다는 증거다.

여하튼 합작회사를 세워 흑자를 보면 2년간은 기업소득세가 면제되고 이후 3년간은 반감되도록 되어 있으니 이참에 과감하게 투자하라는 조언을 하고 있었다. 만약 IT가 아니라 항구, 공항, 도로, 철도, 발전소 같은 사회 기간망에 투자를 병행하는 경우는 10년간 세금 면제에다 해외 송금 시 발생하는 세금 10%마저 감면해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뉘앙스로 보면 사회 기간망에 투자를 해 주면 해외 송금을 매우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의미다.

심천과 홍콩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해외 송금을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말은 이미 홍콩에 있는 국제 은행들과 끈을 만들어 뒀다는 뜻. 시중쉰은 확실히 나와 협업해 정치 자금을 만들기로 작정을 했나 보다. 하긴 케이의 뒷배를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기도 하고.

“케이는 지금 뭘 하고 있죠?”

“케이 님은 홍콩에 있습니다.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부를 세운다고 하며, 사장님께는 파라곤 아시아 지부도 세우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하시던데요.”

“파라곤까지?”

일본에도 세우지 않았던 파라곤의 지부를 홍콩에다 짓는다라…. 역시 파라곤도 중국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거다. 이리되면 시중쉰과 손발이 척척 맞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행간을 제대로 읽었음이 분명하다.

“권 부장님, 중국에서의 요청은 합작회사를 세워 달라고 하고 있군요.”

나는 편지를 권 부장에게 건네주었다. 내용을 재빨리 읽어 보던 그는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당연하다. 좋으면서도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 우리의 원래 전략은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통해 반도체를 수출하는 것이었으니까.

“반도체 수출 승인에 대한 말은 전혀 없군요. 수입 회사를 자신들이 세우겠다는 말이 나왔어야 하는데.”

역시 권 부장. 행간을 제대로 읽는다. 중국인답게 좋은 얘기를 장황하게 써 놓아 듣기 싫은 말을 유추하도록 해 놓았다.

“합작회사까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중국의 합작회사는 외국인 지분이 49%가 최대이며, 공장 부지에 대한 권리는 전혀 보장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우리 회사가 덩치가 커졌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면 중국 정부에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단기적으로 괜찮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리스크가 지극히 큽니다.”

권 부장의 시각은 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역시 사업부장감이다.

“그대로 세우기는 세워야 할 것 같군요. 시중쉰에게도 일종의 보험 같은 거겠지요. 투자금을 건지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자기편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싶을 겁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허나 합작회사는 그렇다고 해도 기간산업까지 투자하라고 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그 기간산업을 토목에만 한정하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전력 산업도 기간망인데 통신 산업도 기간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법안에서 뭔가를 빼는 건 어렵지만, 끼워 넣는 거야 어찌 되지 않을까요?”

“통신!”

권 부장이 무릎을 탁! 하고 쳤다. 말이 나오면 무척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21세기에서 왔기에 해당 아이디어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중국은 산업화를 진행시키다 유선 전화를 대륙 전역에 까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1990년대 중반부터 무선 통신으로 완전히 전략을 바꾸고, 아마 작년쯤 그 회사, 차이나유니콤(ChinaUnicom)이 탄생했을 거다.

차이나유니콤은 장차 현재 중국의 2인자인 리펑 총리의 최대 실적이자 최대 스캔들이 되고 만다. 기존 중국통신 일명 차이나텔레콤(ChinaTelecom)이 이미 무선 통신에서 GSM 방식을 밀고 있는 상황에서 리펑 총리는 CDMA를 밀다가 중국 정보산업부와 충돌했었다. 중국 정보산업부에 줄을 댄 공산당원들이 대부분 차이나텔레콤에도 줄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펑 총리는 장쩌민 주석의 명령에 따라 미국이 주도하는 WTO에 가입하기 위한 협상 조건으로 CDMA를 도입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고, 결국 차이나유니콤을 만들면서 강제로 CDMA를 시장에 밀어 넣는 강수를 두었다.

내가 이리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은 이 일로 인해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이 반사이익을 꽤나 보았고, 그중 신성이 가장 큰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CDMA의 종주국은 퀄컴을 가진 미국뿐 아니라 CDMA폰을 최초로 만든 한국이기도 하지 않나.

원래 역사에서 차이나유니콤은 1990년대 말에 총 15억 달러에 이르는 대형 거래를 체결했다. 북경, 허베이성, 상하이, 톈진 등등 아홉 개 지역에서 CDMA 시범 사업을 펼치거든. 시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총 500만 회선을 깔아 버리는 대형 사업이었다. 이 정도면 확실히 기간산업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나.

원래는 모토롤라, 노키아, 노텔, 루슨트, 신성이 참여했지만 이번 생에는 스마트 클라우드가 1등 자리를 차지할 거다. 왜냐고? 당연히 내가 퀄컴의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리펑 총리가 CDMA를 밀었던 것은 퀄컴이 일반적인 로열티 요율인 5~8%에서 훌쩍 벗어나 2.5%를 제시했기 때문이고, 미국 정부 또한 WTO 가입 승인과 함께 중국의 일부 통신장비 제조업체에 CDMA 장비를 생산할 수 있도록 인가를 내 주었다. 21세기 미중 통신 전쟁에서 화웨이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도 이때부터라고 보면 된다.

“권 부장님, 일단 이 비서와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 시중쉰을 만나서 의사 타진하세요. 중국 통신 회사에 지분 투자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 지분은 시중쉰 선생에게 맡기는 형태가 되겠군요.”

“정답입니다. 일종의 보험이니까 말이죠. 배당금의 일부는 우리가 수출하는 반도체에 보조금으로 지출해 달라고 하세요. 그럼 윈윈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 예상이긴 하지만 중국도 CDMA를 도입하려고 들 겁니다. 지분 매입을 하는 회사는 CDMA를 미는 회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통신칩도 덩달아 팔려 나갈 테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케이에게도 같은 말을 전해 주시고요. 목표는 파라곤 아시아 지부를 통해 수익금이 제대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전체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 일은 조만간 중국의 국책 사업이 될지도 모르니 정보 보안이 각별히 중요합니다.”

“예.”

짝!

“앗!”

내가 권 부장과 얘기를 하는 와중에 옆에서 이 비서가 손뼉을 치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장난스럽긴 해도 침착한 그가 왜 그러나 싶었는데, 불쑥 말을 꺼낸다.

“이 비서, 왜요?”

“얼마 전에 이구홍 국무총리가 리펑 총리와 회담을 했습니다. 명목상 한반도 정전체제 유지를 확인하는 방문이라고 했죠.”

“그게 왜요? 지금 북한 경수로 건으로 한중미가 긴밀히 협조하고 있잖아요.”

“시중쉰 선생과 바둑을 두다가 그 얘기를 들었는데, 이구홍 국무총리의 방문은 표면적인 핑계였고 실제 목적은 비밀리에 입국한 이에게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리펑 총리와 얘기를 나눴고, 상하이에서 통신 관련 시범 사업을 하기로 했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혹시 신성? 신성 이 회장이 중국을 방문했다는 의미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통신 회사의 지분을 노린다는 사장님 말씀과 시중쉰 선생이 여담 삼아 말한 내용이 상당히 일치합니다. 한국에서 그런 그림을 실행할 사람은 이 회장뿐이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사장님이 아니라면 신성밖에 더 있습니까? LK도 아직은 힘듭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랬나? 음… 그랬을 수 있겠다.

이 회장은 지금 특검으로 칩거하고 있다. 원역사에서는 내년쯤 복귀하지. 그럼 이때쯤 YS의 마음에 드는 일을 했다는 건데, 이게 그 일이었나? 내가 지금 당장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럼 신성과 내가 중국 시장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고? 좀 골치 아프게 생겼다.

아니지, 신성이 지금 통신 회사에 접근하고 있다면 그곳은 당연히 차이나텔레콤일 가능성이 높다. 차이나유니콤을 밀고 싶은 리펑 총리의 의중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말이다. 내 목표는 차이나유니콤이니 공략 대상이 겹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 추측은 그다지 틀리지 않을 거다. 이 회장은 차이나텔레콤을 밀었기에 CDMA 종주국임에도 불구하고 시범 사업에서 모토롤라에 훅 하고 밀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상하이에서 CDMA 시범 사업을 하는 것에 그치니까 괜히 건드리지 말고 원래 역사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겠다. 신성은 상하이방에 줄이 닿게 내버려 두고 나는 시진핑의 태자당에 줄을 대면… 나중에 시진핑이 국가 주석이 될 때 일이 쉬워질 수 있겠다.

“신성이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세요. 같은 한국 기업인데 외국에서 밥그릇 싸움 하면 되겠습니까?”

“…….”

“권 부장님이 통신 회사 물색하시고, 될 수 있으면 신규 회사로 알아봐 주세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 비서는 시중쉰 선생과 만나서 작전 좀 짜세요. 상하이방에서 목표로 삼은 사람이 있죠? 그 양반을 우리가 지분을 매입하는 통신 회사에 끼워 넣는 것도 좋겠다고 하세요.”

“보시라이.”

“아, 이름은 조심해야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잖아요.”

“죄송합니다.”

때를 봐서 보시라이를 날리든 리펑 총리를 날리든 하면 될 거다. 그때 검은 돌 대신 흰 돌로 갈아 끼우면 그뿐이다.

    • *

중국인들이 만만디라고 누가 그랬던가? 생각보다 일은 급진전했다.

「신성전자, S폰으로 중국 시장 공략. 한국 IT 업계는 북미 위주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야.」

신문에서 신성을 띄워 주고 간접적으로 나를 까고 있다. 솔직히 좀 의외이긴 하다. 이 회장도 바보는 아닌데, 어째서 S폰을 직접 들이미는 거지? 중국의 휴대폰은 2,000위안(31만 원) 이하의 가격대를 형성할 수밖에 없으니, 적자를 볼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신성전자가 중국 CDMA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수년간에 걸친 중국 CDMA 시장 진출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라 볼 수 있다. 신성전자는 CDMA 시험 사업자로 선정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알려졌다. 내년 6월까지 상해 지역에서 상해장성 전신과 합작해 교환기 1기, 기지국 67기, 총 6만 3천 회선의 CDMA 시스템을 설치할 예정이며 1997년 6월부터 상용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으로, 북미 위주의 사업에 집중하는 한국 기업에 경종을 울린다고 하겠다. 이에…」

중도일보답게 아주 멋지게 기사를 적어 놨다. 중간중간 스마트 클라우드를 비웃는 뉘앙스까지 풍기면서 말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이 양반들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란 말이야.

따르릉. 따르릉.

‘응?’

울릴 리가 없는 전화기가 울린다. 이 시각에 내게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오늘은 예정된 면회도 없는 날이다.

“통신보안, 도서관 유수한 일병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수한 씨, 됐고요. 저예요.”

“케이?”

“지금 당장 나와 줘야겠어요. 어서요.”

“어디야?”

“어디긴요, 정문이죠. 내가 개리 아저씨에게 요청드렸으니까 바로 나와도 돼요. 휴가 처리는 이미 되었으니까.”

케이가 왜 이러지? 원하면 못할 것은 없겠지만 그녀답지 않다. 케이는 생각보다 굉장히 치밀한 여자다. 이리 막무가내는 아닌데.

나는 도서관의 문을 잠그고는 서둘러 정문으로 달려갔다. 정말로 휴가증이 정문에 떡하니 놓여 있고, 정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이 비서가 나를 맞이했다.

“아고, 이제 나오시네. 어서 타십시오.”

이 비서는 나를 납치하듯 케이의 차에 태웠다.

“어서 와요, 수한 씨. 안전벨트 하시고.”

“무슨 일이야?”

“에고, 일이 좀 꼬였어요. 20억 불짜리 대박 찬스가 생겼는데 놓치게 생겼어요.”

“사장님, 보고를 못 드렸는데… 중국에 회사가 하나 세워지거든요. 차이나유니콤이라고 말입니다. 그 회사에서 시범 사업….”

“신문 기사 읽었어요. 신성도 한 조각 얻어 낼 것 같다던데.”

“신성은 숟가락 얹은 거고요. 모토롤라와 신성이 연합했어요. 독식할 것 같더라고요.”

“그럴 리가? CDMA 사업 아닌가? 우린 퀄컴의 대주주야. 우리를 빼고 시범 사업을 할 리 없잖아.”

“수한 씨, 물주들이 움직였어요. 파라곤 내의 뉴욕 시타델이 독립해서 중국의 기간망에 대규모 투자를 지원하기로 했어요. 모토롤라가 줄을 댄 모양이에요.”

“으응?”

“표면적으론 20억 불짜리 거래지만, 물밑에서 벌어진 판이 엄청 커져 버렸어요.”

“언제 일이 벌어진 거지?”

원래 파라곤이 시타델로 바뀌는 것은 1990년대 말인데. 하긴, 그런 일은 이제 벌어지지 않겠지. 케이가 독보적으로 앞서기 시작했으니까. 이거 나비효과다.

“우리 정보가 좀 늦었어요. 한 달 전에 물밑 작업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신성의 이 회장이 그래서 중국에 갔던 거군. 자신이 직접 말이야.”

“휴우. 그래서 지금 할아버지가 직접 오셨어요. 수한 씨를 보고 싶으시대요. 입찰 시점이 채 일주일도 안 남았어요. 작전이 필요해요.”

케이가 급할 만도 하군.

    • *

인터컨티넨탈호텔, VIP 룸.

지이이잉.

“어서 오게, 미스터 유.”

“오랜만에 뵙습니다, 닥터 케이슨.”

자동문이 열리자 케이슨이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며 가볍게 포옹을 했다. 옆에는 윌슨 또한 자리를 함께했다.

“군 복무 중이라 들었네. 몸이 아주 단단해졌구만.”

“하하, 할 일이 없어서 말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하루 종일 뭘 하겠나? 신문 읽고 심심하면 푸시업밖에 더 하겠나. 본래 몸이 뚱뚱한 편은 아니었지만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이지 몸에 군살이 쑥 하고 빠졌다.

“편안하게 안부를 묻는 자리였으면 좋겠지만, 급히 날아올 수밖에 없었네. 최근 들어 돈이 얽히는 일에 스마트 클라우드가 핵심이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야.”

“IT 기술이 경제의 큰 축이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맞는 말이군. 여하튼 파라곤에서도 중국 시장 진출은 늘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지. 자네가 끈이 닿았다기에 급히 일을 처리했네만, 다른 이들도 기회는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시타델이 파라곤에서 빠져나갔다고 들었습니다.”

“케이가 말해 줬나 보군. 사실일세.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네.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을 뿐이지. 오히려 시카고파가 파라곤을 지켰다는 측면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지.”

“시타델이 모토롤라와 연합해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음! 일단 그것부터 설명을 해 보는 게 좋겠군. 윌슨, 설명 좀 해 주겠나?”

“예.”

윌슨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007가방을 열었고, 그 안에서 큰 두루마리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파라곤의 사람들은 도표를 참 좋아하나 보다. 시타델을 중심으로 각종 기업의 관련도를 표시해 두었다.

“현재 시타델은 뉴욕을 중심으로 대형 물주를 확보한 상태입니다. AOL과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한 것이 매우 성공적이라 현재까지 대략 천억 달러의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파생 금융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모토롤라, 소니, 미쓰비시, 신일본 제철, 도요타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한국의 신성과도 일부 협력하고 있는 듯합니다. 소니를 중간에 끼우는 형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도표를 보면 시타델은 기존 파라곤의 자산 운용 방식과 상당히 달랐다. 제조업 위주의 주식 지분을 유지하며 배당금으로 안정적으로 자산을 늘려 가는 식이 아니라, 일종의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사항은 히타치가 X 표가 되어 있고, 그 자리를 신성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모토롤라를 제외하고 일본 기업 일색인 도표에서 신성이 한자리를 차지하다니, 반도체의 힘이 대단하긴 하다. 미국 기업인 마이크론조차 제쳐 버리다니.

“그 정도는 도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네. 중국과의 연관성이 중요하잖나.”

“그건 다음 도표를 보시죠.”

부스럭부스럭.

첫 장을 돌돌돌 말아 버리자 아래 장에는 또 다른 도표가 그려져 있었다.

“중국의 공식적인 리더는 여기 보시듯이 장쩌민 주석, 리펑 총리, 이붕, 차오스, 리루이환, 주룽지, 류화칭, 후진타오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실질적으론 장쩌민 주석과 리펑 총리를 주축으로 하는 상하이방, 그리고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하는 공청단이 대립하는 형국입니다. 보시라이를 포함한 정치국 위원들이 각 파벌에 주르륵 매달려 있습니다. 미스터 유가 집중 공략하고 있는 시중쉰은 중국 혁명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일명 태자당이라 불리는 혁명 2세대와 헐거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어째서 내가 아는 사항을 이리 자세하게 설명하는 걸까?

“미스터 유, 시타델이 물주들을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상하이방을 밀었기 때문이네. 일단 시카고파는 반대표를 던지고 좀 더 미래를 보자고 물주들을 설득했지만 시중쉰은 아니라는 의견이 대다수였어. 나 또한 내심 그렇다네. 차라리 이번 기회에 후진타오를 미는 것은 어떤가? 그가 차기 주석이 될 것은 기정 사실 아닌가.”

“상하이방과 공청단은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미국과는 겉으론 웃고 있지만 내심 경계하는 이들이지 않습니까?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막고 있는 게 그 증거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중쉰의 위치는 너무 약하네.”

너무 약하기에 그의 아들이 주석이 됩니다.

“할아버지, 수한 씨의 작전은 틀린 적이 없었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리 믿고 싶지만, 미스터 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라졌어. 퀄컴의 CDMA 특허를 미 특허청에서 표준 특허로 지정해 버렸어. 로열티는 받을 수 있어도, 제조업체에 사용권을 선택적으로 제한할 수는 없게 되었단 말이다.”

“아니, 하원들이 제대로 일하는 거 맞아요? 500만 불이나 후원하셨잖아요.”

“그들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야.”

미 하원에 로비하는 것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모양이다.

“WTO에 중국이 가입하기로 했군요. 그 대가로 CDMA 특허권의 제한을 풀라고 했을 거 같고요.”

“그걸 어찌 알았나. 정확하네.”

원래 역사대로다. 이때부터 중국 애들도 GSM을 버리고 CDMA 휴대폰은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원래 역사대로 차이나유니콤이라고 하는 CDMA 기반의 통신 회사가 세워지게 되는 것도 100% 확정이다.

“역시 수한 씨는 이것도 예측하고 있었군요. 그럼 작전도 있는 거죠?”

“작전이랄 것도 없어. 원래대로 밀고 나가면 되니까. 시중쉰을 그대로 밀고, 상하이방을 끼워 넣으면 된다고.”

“에에? 상하이방에는 이미 시타델이 줄을 섰잖아요. 모토롤라와 신성도 함께 말이에요.”

“그들은 장쩌민 주석에게 줄을 댄 거지 그 아랫사람에게까지 줄은 댄 것은 아니야. 다른 곳은 제쳐 두고 상하이에 집중 투자를 하기로 했잖아. 그렇죠, 닥터 케이슨?”

“듣고 보니 그렇군. 오히려 베이징은 노키아를 비롯한 유럽 연합에 넘겨 버렸어. 나는 단지 스마트 클라우드를 배제하는 움직임이라고 봤는데, 상하이에 투자를 집중… 아, 장쩌민 주석이 상하이에 거점이 있나? 그런 건가?”

“퇴임하면 상하이 시장으로 가겠지요. 노후는 아마 거기서 보낼 겁니다.”

“그렇군. 이제 보니 이 사업은 장쩌민 주석의 노후 연금이었군.”

케이슨이 이제야 이 사업의 속성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작전을 바로 설명하는 것보다 속내를 파악하게 만들어 줘야 작전 이행에 실수가 없다.

“정확합니다. 그의 측근이 돈을 남기기는 쉽지 않지요. 리베이트 자금과 차후 운용 수익에서 나오는 비자금의 대부분은 장쩌민 주석의 주머니로 들어갈 테니까요.”

“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측근들의 불만이 대단하겠군.”

“제가 하나 묻죠. 시타델은 아예 통신 회사 자체를 노리고 있지 않나요? 모토롤라가 시범 사업을 한다는 소리는 없는 걸 보니 말입니다.”

“그 또한 정확하네. 차이나유니콤이라는 통신 회사일세. 이제 보니 그건 장쩌민 주석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회사나 다름없겠어.”

“그럼 상하이방의 속내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기존 회사인 차이나텔레콤은 빈껍데기로 만들어서 후진타오 차기 주석에게 주고, 알짜배기 무선 사업은 차이나유니콤에 몰려고 하는 거죠.”

“흐흠, 그림이 그려지는군. 차이나유니콤은 장쩌민 주석의 큰 그림이겠어. 통신 회사라는 마르지 않는 돈줄을 쥐고 측근들을 관리하며, 정계 은퇴 후에도 막후 세력으로 자리 잡으려 하는 게 분명해.”

“제 의견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해지죠. 우리는 베이징, 상하이를 제외하고 추가로 시범 사업을 따내면 됩니다.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는 일이지 않습니까?”

“여태 정황을 듣고도 그런 얘기를 하다니 미스터 유답지 않군. 지금 시타델이 차이나유니콤을 노리고 있잖나. 리베이트건 뇌물이건 모두 장쩌민 주석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꼴이네. 결국 장쩌민 주석의 측근 지배력만 높여 주는 꼴이라고.”

“하하, 교수님답게 너무 정직하게 사업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우린 리펑 총리나, 심지어 보시라이 같은 실무급에게도 뇌물을 줄 수 있습니다.”

“으음?”

내가 뇌물을 줄 수 있다고 말하니 케이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엔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리라. 이럴 땐 직접 시범을 보여 주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윌슨, 로열티 계약서 좀 주세요.”

“아, 예.”

뒤적뒤적.

윌슨의 007가방에는 없는 게 없다. 특허 로열티 계약서가 툭 하고 튀어나온다. 파라곤의 계약서답게 로열티 숫자만 빈칸으로 두고 모든 법적인 사항은 빼곡히 프린트되어 있는 서류다.

“저와 리펑 총리가 앞에 앉았다고 보죠. 케이, 리펑 총리 역할을 해 주겠어?”

“예, 그래요.”

“나는 심천, 샤먼, 그리고 보시라이가 시장으로 있는 다롄까지 시범 사업을 했으면 해. 나는 지금 리펑 총리를 앞에 두고 그런 거래를 제안하고 있어.”

“리펑 총리는 이렇게 눈을 깔면서 시범 사업을 확대할 계획은 없다고 하겠군요. 뇌물이 직접 들어올 것도 아니고, 들어줘 봐야 일만 복잡해질 뿐 좋아할 사람은 장쩌민 주석일 테니까.”

“그럼 나는 특허 로열티 계약서를 내밀 거야. 요율을 2.5%로 극단적으로 낮춰서 말이지. 퀄컴의 어윈도 중국 시장의 크기라면 동의할 테니 어려운 일은 아니야.”

“에이, 그래도 리펑 총리는 ‘그게 뭐?’ 이러면서 인상을 찌푸릴 것 같은데요? 국가 전체로 보면 돈을 아끼는 계약이지만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일은 아니잖아요. 실무진과 상의하라며 돌려보낼 것 같아요.”

“글쎄, 정말 그럴까? 내가 가져가는 계약서에만 2.5%라는 숫자를 적을 거고, 리펑 총리에게 내미는 계약서에는 숫자 칸이 텅 비어 있거든. 이미 계약서에 서명은 모두 끝냈고 말이야.”

“어머, 뇌물을 그런 식으로 주다니! 대박!”

케이는 단번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다. 로열티 계약은 대외비로 묶이는 계약이다. 우리가 로열티 2.5%를 받는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오픈만 하지 않으면 아주 안전하게 로열티 차익을 비자금으로 챙길 수 있다. 당연히 장쩌민 주석에게도 알릴 필요가 없고 말이다.

“뇌물을 직접 줄 필요가 어디 있어? 8%든 5%든 적고 싶은 대로 적으라고 하면 되지. 안 그래?”

“정말 멋진 아이디어군! 역시 로열티는 우리의 무기였어!”

“시범 구역을 늘릴 수밖에 없겠군요. 계약 건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백지수표가 계속 생기니까!”

케이뿐 아니라 케이슨과 윌슨도 반색을 했다.

“그것뿐일까요? 리펑 총리는 뇌물을 받기 위해선 우리와 끈이 닿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차이나유니콤의 지분을 나눠 줘야 할 겁니다. 그래야 로열티 장부 조작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머, 시중쉰을 차이나유니콤에 끼워 넣을 수 있겠어요!”

“하하하! 완벽하군! 완벽해! 미스터 유는 정말 완벽해!”

“시범 구역을 확장하면서 구역별로 로열티를 달리해 보죠. 심천을 포함한 남쪽은 시중쉰에게, 다롄을 포함한 동쪽은 보시라이에게, 베이징과 그 위쪽으론 리펑 총리가 차지하도록 말입니다. 상하이 쪽의 로열티 계약서는 숫자에 차이가 없도록 하죠. 장쩌민 주석이 증거를 입수하면 곤란하니까요.”

“문제없습니다. 각 구역별로 통신 회선이 다르니 로열티 계약을 따로 해야 한다고 하면 의심받지 않을 겁니다.”

윌슨이 내 생각을 지지하고 나선다.

“심천과 샤먼의 무선 통신 인프라는 스마트 클라우드가 합니다. 다른 쪽은 적당히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시고….”

“내버려 두고?”

“파라곤은 시타델과 경쟁해서 차이나유니콤의 지분을 노리시죠. 리펑 총리가 돕지 않겠습니까. 저 또한 투자하죠. 파라곤과 50 대 50!”

“55 대 45는 어떤가? 대신 로열티 장부 처리는 파라곤에서 리스크를 가져갔겠네.”

“그럼 홍콩과 심천을 통하는 반도체 수출입도 뒷배를 봐주시겠습니까?”

“거기까지라면 57 대 43은 어떤가? 석 달 치 선물 거래로 리스크를 덜어 주겠네.”

“55 대 45. 거기까지가 제 한계입니다.”

“음… 좋네. 지분은 최대한 확보해 보겠네. 대충 파라곤 10%, 자네 10%쯤 되지 않겠나. 최소 2천억 정도는 자금이 필요하네.”

올해 수익금의 절반이 훅 날아가는 일이지만 이런 투자는 대박 중의 대박. 더 못 가지는 게 아쉬울 뿐이다.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된다. 파라곤을 끼지 않고선 절대로 이거 현금화 못한다.

“문제없죠. 대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미 증시에 상장하는 것까지 나서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시타델의 목적도 그것일 테니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걸세. 하하하!”

“할아버지, 지분의 소수점은 제 거예요.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유통 담당인 거 잊지 않으셨죠?”

“하하, 녀석. 빠지지를 않는구나.”

케이슨이 내 손을 꽉 잡고는 마구 웃어 댔다. 그 위에 손을 툭 하고 얹는 케이.

옆에 잠자코 앉아 있던 이 비서는 녹음기를 꺼내 윌슨과 회의록을 검토했다. 이런 일을 하도 자주 하다 보니 이제 말로만 회의를 끝내지 않는다. 행동 지침을 따지고, 돈 흐름을 따지고, 그리고 증거까지 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내 동료들이 하나같이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일을 해내고 있다.

“시중쉰에겐 이 일을 바로 알리면 되겠습니까?”

이 비서가 내게 귓속말을 해 왔고,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중국 시장은 장차 억 개 단위로 휴대폰이 팔려 나갈 곳이며, 차이나유니콤은 2000년도부터 자산 가치가 100조가 넘는 대기업이 된다. 지금 정치권에 바짝 다가가며 뇌물을 바치고, 2천억 정도 유동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닥터 케이슨, 대충 일은 끝난 것 같으니 여독을 풀러 가셔야죠. 이런 호텔 말고 케이가 멋진 곳을 만들었는데, 한번 둘러보시죠.”

“오! 케이가?”

“예,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 별장과 비슷한 곳을 만들었어요. 보시면 아주 마음에 드실 거예요. 며칠 쉬다 가세요.”

화제는 단박에 놀러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럼 저는 중국으로 다시 가서 사전 작업을 하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수고 많네요.”

“저도 같이 가죠.”

이 비서와 윌슨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 비서에게 좋은 기회다. 윌슨과 함께 일해 본다면 로비스트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허허, 일할 사람은 저리 나서니 나는 쉬면 되겠구나. 케이, 대체 어디냐, 별장이?”

“절벽을 따라 강이 흐르는 곳이에요. 낚시도 하실 수 있어요.”

“오호.”

“수한 씨, 같이 갈 거죠?”

“나는 용산에 복귀해야 하는데.”

“그럼 저녁만이라도 같이해요.”

“그럴까?”

저녁을 먹으면서 최후에는 리펑 총리와 보시라이까지 날려 버리는 방법을 논의하는 것도 좋겠다. 내가 미 증시에서 떼돈을 벌려면 미리 약도 좀 쳐 놓아야 하고….

    • *

부우웅. 스르릉.

“에고, 많이 늦었네요. 수한 씨, 고마워요. 할아버지와 식사도 같이해 주고.”

“나도 즐거웠어. 조심해서 들어가.”

카투사답게 늦은 밤에 복귀를 해도 별다른 제재가 없다. 면회실 맞은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케이. 그녀도 조금 피곤한지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예, 고마워요. 여하튼 이제 한두 달은 나도 홍콩에 있을 거예요. 군 생활 적당히 해요.”

“걱정 마. 너무 편해서 미안할 정도니까. 케이야말로 건강도 챙기면서 적당히 해. 이 비서랑 권 부장이 왔다 갔다 하니까 업무를 나눠.”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11월엔 쇼 케이스도 있네요. 홍콩에서 미국으로 바로 가야겠네요. 아, 중간에 일본도 들르라고 했죠?”

“쇼 케이스는 이제 오 이사에게 전담시키도록 해. 케이는 소프트뱅크와 AOL 주식을 좀 더 매입해 줘. 각각 500억씩. 이런, 건강 챙기라고 해 놓곤 내가 제일 부려 먹네.”

“우아아! 중국에 로비하랴, 미국과 일본에선 주식 사랴. 벌어먹고 살기 힘들어요. 그쵸?”

케이가 크게 기지개를 켠다. 무척 피곤한가 보다.

“누가 들으면 욕하겠다. 푼돈 버는 게 아니잖아. 하하.”

“해 본 소리예요. 그런데 수한 씨,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돈을 쓰면 유동 자금이 천억 정도밖에 안 남아요. 내년엔 3공장도 건립한다고 했잖아요.”

“3공장은 4분기 수익으로 착공하면 돼. 나 부장이 알아서 잘할 거야. 그리고 자산 걱정은 안 해도 돼. 여태 내가 가진 주식은 모두 알짜배기잖아. 여차하면 은행 돈도 저금리로 빌릴 수 있고.”

“그렇겠네요. 알았으니 어서 들어가요.”

“어두워. 운전 조심하고.”

“바이 바이.”

가볍게 손 인사를 나누고 케이는 휭 하니 차를 몰고 떠났고, 나 또한 복귀를 했다. 이제 나도 당분간 급하게 챙길 일은 없어 보인다. 모든 일이 적당한 사람에게 배분되어 있고, AOL과 소프트뱅크 주식을 매입해 두면 적당한 때 달러를 조달하는 데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다.

제조업체 사장인 내가 앞으로 1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해야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하다. 판은 깔았으니 반도체를 무지막지하게 찍어 내는 것이다. 이제부턴 지켜보면서 뿌린 씨앗을 차근차근 거두기만 하면 된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보고를 받는 수준일 거다.

뚜벅뚜벅.

시간이 무탈하게 흘러간다. 폭풍 전야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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