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윈윈(2) (53/104)

웅성웅성.

“이로써 1995년 1/4분기 국책 과제 발표회를 마치겠습니다. 참석해 주신….”

때마침 1층에서 발표회를 마쳤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다 보니 발표에 집중하지 못한 꼴이다.

기껏해야 몇 개월 수행한 과제에 큰 기대를 할 필요도 없고, 경비 지원을 연구 활동에 쓰는지 살펴보는 용도이니 이리 마쳐도 무방하다.

“어이구, 이거 벌써 시간이 이리됐나? 어떤가? 식사나 같이하지.”

“회장님, 오늘은 제가 모시지요.”

“허허, 몸에도 좋고 맛난 거 먹으러 가자고. 내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니까.”

“아유, 그럼요. 하하하.”

기업 총수들답게 방금 전까지 툭툭 서로를 찔러봤던 것은 아랑곳없이 뭐를 먹을까? 하는 가벼운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뚜벅뚜벅.

2층 관람실을 빠져나가는 회장들. 나와 정헌몽 사장이 그 뒤를 따랐는데, 정 사장이 살짝 내 팔목을 잡는다.

“유 사장, 잠깐.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구 회장이 멀어지자 정 회장은 내 손을 톡톡 두드렸다.

“고맙네. 덕분에 아버님께서 큰 결심을 하셨네. 그리고 LK반도체라니. 역시 유 사장일세.”

“아깐 디스플레이는 절대 못 준다고 하시더니….”

“그 정도는 발끈해 줘야 거래가 될 것이 아닌가.”

국어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이리 말하니 내가 다 당황스럽다. 정헌몽 사장도 역시 사업가다. 어느 정도 미래를 보고 있는 거다.

“그러네요.”

“잠시만, 내 적어 줄 게 있네. 계열 분리할 때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회사가 꽤나 있네. 이번 대현전자 품에 못 들어오면 정말로 매각 절차를 밟겠지.”

쓱. 쓱. 쓱.

정헌몽 사장이 수첩을 꺼내 대현아산, 대현물산을 비롯해 회사 이름을 적어 나갔다. 일종의 기업 비밀이라 할 수 있다. 매물 리스트나 다름없잖나.

“자, 받게나. 신중히 검토하시게.”

정헌몽 사장은 다 적은 페이지를 찢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대현아산 같은 회사는 내가 취할 이유가 없지만… 묘하게 눈에 들어오는 회사가 있었다.

‘아, 이 회사가 있었지.’

    • *

‘문예일보.’

신성이 중도일보를 가졌다면, 대현은 문예일보를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재계 1위를 두고 신성과 대현의 경쟁이 심해지자 언론의 필요성을 느낀 정영주 회장이 진두지휘해서 만든 신문사다.

IMF가 지나면서 독립 신문사가 됨으로써 한때 김옥용 교수가 명예 기자로 활동했을 정도로 밸런스 좋은 신문사였는데 21세기에 들어 다시 대현중공업 산하로 합쳐진 다음부터는 외설 연재소설, 왜곡 보도, 차원을 달리하는 천박한 논설 등으로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진 신문사다.

심지어 도서관에서도 비치하지 않을 정도로 판매부수가 떡락해 문예일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한마디로 21세기부턴 우려스러울 정도로 정치 시각의 밸런스가 망가져,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시민들이 ‘저런 것도 신문인가?’ 하며 이맛살을 찌푸리게 되는 신문사다. 창간 당시 문화 예술 전문지로 출발했던 초심을 지켰다면 좋았을걸… 하는 안타까움이 강하게 드는 신문사다.

한데 지금은 문예일보가 망가지기 전이다. 오히려 현재로서는 타 신문사에 비해 문화 예술에 전문성이 높은 기자들이 많다.

그런 인적 자원은 미래의 내 사업을 감안하면 정말로 아까운 인재들이라 할 수 있다.

언론사는 기본적으로 미디어 사업이며, 차후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 나에게 미디어 사업은 필수적이지 않나.

“정 사장님, 문예일보도 매각 대상입니까?”

“음? 아, 그렇네. 아무래도 현 정권은 대현이 언론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탐탁잖게 여기니까. 계열 분리 때부터 이미 사전 준비는 했고 이제는 완전히 손을 떼야지.”

원래 역사와 달라진 부분이다. 확실히 정헌몽 사장이 적극적으로 YS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 왔던 모양이다. 금융 제재가 일찍 풀린 이유인 듯하다.

“이건 매각 목록에서 제외해 주시지요. 제가 관심이 가는군요.”

“으흠… 유 사장, 언론은 양날의 칼을 넘어서 독배나 다름없네. 웬만한 대기업이 아니면 정치권의 공격을 받아넘길 수가 없다네.”

“알고 있습니다. 단지 ‘문예’라는 말처럼 우리나라에도 문화 예술 전문지는 있어야지요. 아예, 신문에서 정치면을 빼서 정치색 자체를 지워 버리는 것도 방법이고요.”

“그런 전략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군. 하긴, 유 사장이 못하는 게 뭐가 있겠나. 일단 매각 대상에서 제외하지.”

“인수 절차에 대해선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전문가를 보내 상의토록 하겠습니다.”

“최 상무에게 보내게. 문예일보 매각에 관한 한 전권을 맡겨 놓겠네.”

“감사합니다.”

정헌몽 사장은 싱긋이 웃으며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기분 좋게 그와 발을 맞추었다. 언제나 이 양반을 만나면 선물이 생기는 느낌이다. 내 미래의 사업에 지장이 없게끔 대현디스플레이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뿐인데, 우연찮게 미디어 사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 예술 전문가, 그것도 빠릿빠릿하게 몸으로 움직이는 기자들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다. 오히려 내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뚜벅뚜벅.

앰팩폰 출시, 소프트뱅크 주식 매집, 중국 시장 타진, 대현과 LK 빅딜 주선, 문예일보 매입.

이 정도면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그려 놔야 할 그림은 대충 다 그린 것 같다. 1997년 1월 제대, 이제 나의 군 생활은 1년하고 8개월쯤 남았다. 그때까지 열심히 몸이나 만들자.

“젊은 사람들이 뭐 그리 걸음이 굼뜬가? 어서 타시게.”

“아, 예. 죄송합니다.”

LK 구 회장이 건물 입구에서 손짓을 한다. 대기업 회장이 밥을 사 주겠다고 손짓하는 이런 상황. 인생 2회 차에는 심심찮게 생긴다. 오늘 식사는 참으로 맛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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