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윈윈 (52/104)

제1장 윈윈

1995년 3월, 용인밸리 중앙 회관.

군대에서 하루는 참으로 길지만 계절은 휙휙 지나간다. 1월 중순의 회의에서 워낙 큼지막한 숙제를 줘서인지 한동안 면담을 빙자한 회의는 없었고, 도서관에서 신문과 책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봄이 오자 나에게 떡하니 휴가증이 날아왔고, 자그마치 일주일이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동안 이 비서를 대신해 오 이사가 업무 보고를 해 줬는데, 국책 사업 1/4분기 회의를 어찌어찌 내 휴가 일정에 맞춰 버렸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용인밸리 중앙 회관의 2층에서 국책 사업 보고회를 살펴보는 중이다.

웅성웅성.

“TS마이크로텍은 LK와 협업하여 100만 화소 CIS 모듈을 CCTV에 최적화시켰으며 연말까지 제품을 완성하여 20만 대 규모를 납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500만 화소급 CIS모듈은 스마트 클라우드와 협업해 이미지 왜곡 방지 특허 2건을 공동으로 출원하였고….”

“저희 우진하이텍에서는 국책 과제의 하부 과제에 1억을 투자받아 디지털카메라의 액세서리를 개발하였으며, 혼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봉을 만들었습니다. 특허는 출원하였으며, 이 액세서리의 기능은….”

“나비아이에선 정부의 GIS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내비게이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대현전자와 협업하여 시제품은 확보하였고, 운용 시스템의 버그 수정에 비용은 약 3천만 원….”

각 중소기업의 임원들은 각자 수행한 과제의 진행 사항과 효과를 발표했으며, 연구비를 어떻게 지출했는지도 간략하게나마 보고하고 있었다. 상금을 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걸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마트 클라우드, 대현전자, LK전자의 임원들이 심사를 맡아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세 개 분과를 합쳐서 진행하는 것이니만큼 대단히 붐빌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초기 국책 과제에 지원한 회사가 수백 개였음에도 실제로 발표에 참여한 회사는 불과 마흔 곳에 지나지 않았다. 발표 마지막에는 지출 내역을 꼭 밝혀야 하기에 눈먼 돈이라 믿고 달려들던 저급한 기업들은 명함을 내밀지 못했고, 딱 봐도 라인에 틀어박혀 주야장천 일만 할 것 같은 자들이 단상에 올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연말에 1등 상금 30억은 내 것이다.’라는 듯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말이다.

“어이고, 참 보기 좋다. 여기 용인밸리 회사들은 다들 기운이 펄펄 나는구만. 허허….”

“정 회장님, 이게 다 유 사장이 국책 과제에 상금을 내건 덕분입니다. 과제 도중에는 실비 경비만 2억 내외로 지원하니까 돈 먹고 튀는 장사꾼들이 싹 사라졌습니다.”

“수한이… 아니, 유 사장이 일은 참 잘해.”

“아버님, 유 사장이 용인밸리의 시스템을 잘 만들어 놓은 겁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셨던 한국의 실리콘밸리도 꿈은 아닐 겁니다.”

“내 죽기 전에 멋진 거 보고 가겄네. 허허. 고맙다, 수한아.”

“아, 예… 정 회장님.”

2층 관람실에는 나, 정영주 회장, 구무본 회장, 정헌몽 사장까지 자리하고 있다. 덕담이 오가고 있지만 솔직히 앉은 자리가 불편하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나를 앉혀 두고 1층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심사에만 열중하고 있는 오 이사에게 뭐라고 소리치고 싶다. 정 회장이 온다면 온다고 말을 해 줬어야지!

“수한이 니 아직도 내를 마음에 담고 있나?”

정 회장이 내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정정한 양반이 훅 늙어 버렸다. 게다가 말투와 목소리까지 조금 바뀐 듯했다. 어설프지만 표준어를 쓰기 시작했고, 굵직했던 목소리가 좀 가늘어졌다. ‘~누’로 끝났던 말이 그에겐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나 싶다.

“아닙니다. 정정하시니 다행입니다. 금융 제재도 풀려서 다행이고요.”

솔직히 이런 자리가 이리 빨리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어찌 된 영문인지 YS가 대현그룹의 금융 제재를 풀어 버렸다.

“허허, 그것도 다 니 덕분이다. 대현건설 임직원들이 요즘 건설보다 부수고 다니며 돈을 번다 아이가. 당진철교는 뭐 그냥 그랬다만, 삼풍백화점 무너뜨리는 거 봤나? 옥상 물탱크 몇 개 옮기니까 우수수 무너지더라. 완전 박사들 저리 가라다.”

“예, 소식은 들었습니다. 신문에 대서특필로 보도했더군요.”

나는 TV로는 못 봤고 신문으로 봤다. 대형 참사를 막았다고 사방에서 찬사가 쏟아졌고, 그런 도박을 강행한 정헌몽 사장은 내가 원래 역사에서 알고 있던 모습보다 훨씬 간이 커졌다. 건설사가 건물을 파괴하면서 회생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유 사장, 덕분에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건도 대현건설이 맡았다네. YS에게 미운털 박힌 것도 좀 나아진 모양일세. 활로를 알려 줘서 고마우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정헌몽 사장님이 다 결정하고 수행하신 일이 아닙니까.”

정헌몽 사장은 싱긋이 웃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놓았다.

“내 그래서 사과하러 왔다. 솔직히 내 회사 망하는 줄 알았는데… 살려 줘서 고맙데이.”

“…….”

“내 니 말대로 이제 정치는 안 할 기다. 내가 잘하는 일만 할 기다. 미안하고 고맙데이.”

“…….”

정 회장이 정헌몽 사장의 뒤를 이어 내 손을 꼭 쥐더니 연거푸 사과하며 고맙다고 했다. 원래 역사에선 누군가에게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사람인데. 뭔가 바뀌었다. 하긴 대형 참사가 두 번씩이나 비껴갔잖나.

“아이고, 보기 좋습니다. 나도 유 사장에게 마음 가는 일이 없지 않은데.”

“무슨 말씀을…. 슬픔이 크실 텐데, 저까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구 회장까지 내 손을 덮어 왔다. 현정 씨와 헤어진 것 때문에 마음이 쓰이나 보다. 나는 외려 구 회장을 위로했다. 정 회장이 반대쪽 손으로 구 회장이 얹은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 내가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현경 씨를 그룹 승계에서 제외한 것은 LK의 경영 전략이고, 아들을 잃은 슬픔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이제 구 회장은 제3자일 뿐이다.

“아버님, 유 사장 만나면 하실 말씀이 더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지금 해도 되겠나? 구 회장, 함구해 줄 수 있겠나?”

“긴히 하실 말씀이면 자리를 비워 드리지요.”

“아니, 아니야. 들어 주면 더 고맙겠어. 구 회장과도 조금은 관련이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정치 얘기는 절대 아니라는 것밖에.

“내가 집구석에 틀어박혀 한 일이라곤 신문과 책을 보는 것이었지. 수한이 니가 신문과 책을 산을 쌓듯 읽어 보면 미래가 보인다기에 나도 한번 해 봤다 아이가. 하도 안 읽혀서 소리 내서 읽다 보니 목소리도 변하고 말투도 변하고… 결국 머리도 변하더라. 허허.”

“…….”

“제일 먼저 느낀 거는 수한이 네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 내가 알고 있던 천재의 범주마저 뛰어넘었어. 정말 미래를 읽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할까.”

“…….”

“그리고 그 못지않게 신성도 대단해. 우리 수한이가 개인적으로 특출하다면, 그들은 집합적으로 특출해.”

“정 회장님이 신성을 칭찬하시다니요.”

나는 조금 놀랐다. 정 회장은 이희건 회장을 인정했을지언정 그룹 자체를 칭찬한 적은 없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랬다. 선대 이철병 회장과도 사적으로 친했다고 하지만 재계 순위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았던가.

“글쎄… 뭐라고 할까? 신성이 조직 변경을 한 것이 매우 시의 적절하다고 느껴지더라고. 심장이 두근두근 대는 게 뭔가 있는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이 회장을 앞에 데려다 놓고 왜 그랬는지 묻고 싶을 정도야.”

“……!”

“다들 어찌 생각하는가? 요즘 재계 상황을 나보다 더 깊이 알 것 아닌가?”

역시 정 회장. 촉이 발동한 거다. 이미 동남아의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있으니 아시아의 경제 위기는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정 회장은 그걸 콕 짚어 내지는 못했지만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신성의 조직 변경을 두고 뭔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괜찮은 시그널이다. 말하기가 조금 쉬워졌다.

“으흠! 회장님,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재계는 증시도 호황이고 수출도 잘되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면 고베 대지진으로 엔화가 급등세라는 것 정도입니다.”

“구 회장 생각은 그렇고, 수한이 니는 어찌 생각하나?”

정 회장의 눈은 이미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미래에서 왔기에 지금의 상황이 퍼즐이 맞춰지고 있는 형국이다. 단순히 말하면 IMF라는 큰 파도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보는 것이 옳겠다.

파도의 시작은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외환시장에서 달러 강세가 지속될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와중에 중국이 본격적으로 산업화에 성공하며 달러와 전 세계 원부자재를 미친 듯이 끌어당기고 있는 상황. 미국 연준이 금리를 연거푸 내리고 있지만 시장의 달러가 지속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인 인플레가 발생하고 있고, 달러에 기반을 둔 투자회사들은 날마다 재산이 늘어나고 있다. 당연히 헤지펀드가 점점 세력을 확대하고 있기에, 신성은 주식시장에서 경영권 방어를 위해 선제적으로 조직 정비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와중에 고베 대지진은 우리 경제엔 치명타라고 할 수 있었다. 400년간 지진이 없었던 곳이라 지진 대비를 잘했던 일본 정부로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었다.

플라자 협의 때문이라도 일본 정부로선 엔저를 고집하고 싶었을 텐데, 고베 대지진의 복구에 적어도 9조 엔이 넘는 돈이 들어가니 엔화 수요가 폭발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비상사태니 준(準)기축통화라 할 수 있는 엔화를 현물로 쥐고 있으려는 수요마저 합쳐져 조만간 1달러당 85엔까지 떨어질 거다. 자고로 엔고 현상의 끝판왕이다.

1990년대의 대한민국은 해외에서 원부자재를 사고,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미국에 완제품을 파는 형태의 비즈니스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수년간 달러 강세, 원자재값 상승, 엔화 강세라는 가랑비에 젖어 미친 듯이 일하고도 무역 적자가 쌓이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낼 수 있는데, 문제는 일본은행이 고베 대지진으로 엔화 수급을 위해 해외 자산을 매각했다는 것. 그중 경제가 취약한 필리핀이 제일 먼저 타격을 받아, 페소화가 한 달 사이에 20% 넘게 폭락했다.

현재로선 구 회장이나 정헌몽 사장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페소화는 떡락하는데 싱가포르 증시는 폭등하고 있다.

동남아 금융시장의 취약성을 알아챈 헤지 펀드들이 본격적으로 외환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 태국 바트화까지 흔들어 대다 결국 우리나라까지 올 거다. 때마침 한부그룹도 거기다 기름을 부을 거고.

“수출이 잘되는 게 문제죠. 원래라면 좋아해야 하는데 엔화에 원부자재 가격은 폭등하고, 경공업 제품은 중국과 가격 경쟁까지 하니 수익률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마 일부 기업들은 수출을 하면 할수록 적자가 커지는 형국일 겁니다. 대한민국 재계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가랑비에 옷 젖고 있습니다.”

“물론 니 회사는 예외다… 그리 말하고 싶은 거네. 맞제?”

“예, 당연하죠. 제 사업은 첨단 제품입니다. 감히 중국이 경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요.”

“허허, 자신만만허네. 그러면 나는 어찌하면 좋겠나? 말해 줄 수 있겄나?”

정 회장은 현 상황을 핑계로 그룹 전체의 전략을 물은 것이다. 정 회장의 직감이든 아니면 끼워 맞추기든 상관없다. 나는 대현이 IMF라는 파도를 넘기를 원한다. 21세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정헌몽 사장과는 같이 축배를 들고 싶다. 맨땅에 헤딩만 한 대현이지만 지금부터 잘하면 존경받는 재벌이 될 수 있다.

“정헌몽 사장님을 회장으로 승격시키시죠. 이제 대현도 큰 그림을 그릴 때가 되었습니다. 마침 옆에 LK 회장님도 계시니 더욱 좋군요.”

“……?”

정영주 회장은 내심 내 말을 반기면서도 내가 LK 구 회장까지 언급하자 눈에 이채를 띤다. 여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정헌몽 사장도 놀라는 눈치다. 내 의도를 넘겨짚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할 줄은 몰랐나 보다.

“그 그림이 뭔지 들어 볼 수 있겠나?”

“이제 금융 제재가 풀렸으니 크게 뭉쳐야죠.”

“뭉친다고? 계열 분리를 하라고 한 사람은 수한이 바로 니다.”

“이미 계열 분리된 자동차, 중공업은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대신 총알받이로 내밀었던 대현건설, 대현상선, 대현캐피탈, 대현증권을 모두 대현전자로 몰아주시지요.”

“대현그룹의 부활이가? 허허허.”

“아닙니다. 대현전자의 부활이죠. 대현전자에 건설, 금융을 붙여 내구성을 키우는 거죠. 대신 대현아산, 대현오일, 대현물산, 그리고 대현전자의 디스플레이와 위성 사업부까지 대형 부동산을 끼고 있는 사업체는 모두 처분해서 대현전자에 설비 투자도 해야 합니다.”

“뭐이… 그림을 다시 그리는 수준 아이가.”

“유 사장, 그리 외부 사정이 심각한가?”

말을 아끼고 있던 정헌몽 사장까지 가세했다.

“심각하다기보다 지금이 적기라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IT 업계는 엄청난 기회를 맞이할 겁니다. 대현전자의 DRAM은 엔화 상승이든, 중국 가격 경쟁이든 위험 요소를 상당수 헤쳐 갈 수 있는 제품입니다. 거기에 올인해야 합니다.”

심히 진심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윈도우 95가 출시되고 2000년에 IT 버블이 폭발할 때까진 DRAM 시장이 급속도로 커진다.

내가 이미 플래시를 내놓았기에 그 상승폭은 더욱 커질 것이다.

“허면 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째서 디스플레이를 팔라고 하는 건가? 그리고 그 많은 사업체를 어찌 일거에 처분하나?”

“그래서 LK 회장님이 계셔서 더욱 좋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으음?”

“나 말인가? 내가 어째서?”

옆에 있던 구 회장을 지목하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오늘 내가 여럿 놀래고 있다.

“신성은 이미 체질을 개선했고, 대현은 곧 체질 개선을 하실 것 같은데 LK도 함께 하시면 좋죠. 대현디스플레이를 사 가시면 LK도 덩치가 커지지 않습니까. 북미에 IT 시장이 커지는데 한몫 잡으셔야죠. 아, 내친김에 대현오일도 사 가세요. 유가도 점차 오르니 정유 사업은 캐시카우로 키우실 만할 겁니다. 그리고….”

“유 사장, 어찌 그리 말하나? 대현디스플레이는 LCD 기술의 선두 주자네. 그 기술을 고스란히 넘기라는 말인가? 아, 구 회장님을 두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허허… 정 사장, 그리 말 안 해도 오해할 일 없네. 유 사장 의견은 의견일 뿐 실행 가능성이 좀 그렇잖나. 내가 그런 큰돈이 어디 있다고.”

정헌몽 사장이 평소와 달리 발끈했고, 구 회장은 이런 분위기가 탐탁잖은 듯 너스레를 떤다. LCD 기술 개발과 관련해서 1994년부터 대현과 LK 모두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

단지 현재까지 모니터는 CRT가 대세이며, LCD는 내비게이션처럼 작은 제품에 쓰려고 시도하는 것이 전부이기에 돈이 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LK에 LCD 설비를 넘겨주면 대규모 시설 투자에 연구 실적까지 주는 셈이 된다. LK는 단박에 LCD 부문에서 경쟁력이 훅 하고 높아질 것이다.

정 회장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이 거래의 키를 가진 사람은 정 회장이다. 이 양반의 촉을 믿어 보자.

“해결책은 있지요. 구 회장님은 반도체를 내놓고 정 사장님은 디스플레이에 대현오일까지 얹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양쪽 모두 체질 개선에 설비 투자까지 공짜로 하는 격이 되지 않습니까.”

나는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카드를 던졌다. 이름하여 빅딜이다.

“헉!”

“뭐라고?”

“뭐 그리 놀라십니까? 수십조 자산에서 끽해 봐야 1조 남짓 떼어 내는 거래인데요. 하하하.”

두 명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기에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LK반도체는 한국의 반도체 사업체 중에 덩치가 작은 편이다.

돌다리를 건넌다고 두들겨 깨 버리는 그룹의 특성상 보수적인 투자를 했기에 자본금이 1조 3천억 수준이다.

대현오일과 디스플레이를 합치면 대충 맞아떨어지는 수준일 거다.

그리고 대현전자에 건설, 상선, 금융을 모두 몰아주면 외형적으론 약 40조 원의 크기가 될 수 있다. 외풍이 불어도 웬만큼은 견딜 수 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루어졌던 빅딜이 아닌가. 일방적으로 LK에 불리했던 빅딜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대현전자가 LK반도체를 먹다 체해서 대현디스플레이를 중국에 파는 악수를 두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특히나 대현디스플레이의 중국 매각은 한국의 LCD 기술과 특허를 고스란히 중국에 넘겨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향후 내가 시작할 스마트폰 사업을 생각하면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수한아, 진심으로 말하는 기가? 이건 단순한 거래가 아니다. 미래 유망 사업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성공하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으흠….”

정 회장이 입술을 다물고 어금니를 꾹꾹 씹는다. 그가 생각에 잠길 때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다.

“LK에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네. 반도체는 지금도 돈을 벌고 있지만 대현디스플레이의 LCD는 한창 기술개발 중이지 않나.”

“그래서 캐시카우인 대현오일을 얹은 것입니다. 그리고 LCD는 현재 LK에서도 집중 투자하고 있는 사업이잖습니까. 대형 시설 투자를 받은 격이고 미래 사업에 한 계단 위로 올라서시는 겁니다.”

“…….”

구 회장도 내 말에 흔들리는 표정이다. 제조업은 덩치가 커지면 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수익률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구 회장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리고 IMF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빅딜을 할 바엔 지금 빅딜을 하는 게 백배 낫다.

IMF만 견뎌 내면 두 회사는 명실상부하게 DRAM과 디스플레이 사업에서 세계 톱 3 안에 들어갈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러기 위해선 지금 빅딜을 체결해서, 동남아 금융 위기가 번져 오기 전에, 그리고 한부 사태가 터지기 전에 최대한 돈을 벌어 놔야 한다는 거다.

잠시 침음에 잠겼던 정 회장이 구 회장과 눈을 마주쳤다.

“구 회장, 아무래도 수한이가 지금 경제는 겉으로만 호황이고 실상은 위기라고 말하는 것 같으이.”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자고로 대기업이 사업을 접는 경우는….”

“반도체는 주기 싫으면 안 줘도 돼. 대신 우리 거 가져만 가시게. 인수 대금은 1조, 그것도 5년에 걸쳐 상환하는 조건. 어떤가? 5년이 부족하면 10년도 괜찮네.”

“회장님.”

“아버님!”

정 회장은 둘의 목소리에는 아랑곳 않고, 내 눈만 바라봤다.

“수한아, 뭐가 보이누? 내가 이리하믄 미래가 좀 달라졌나?”

정 회장의 말투가 살짝 예전으로 돌아왔다.

“제가 미래를 어떻게 압니까?”

“잘될 것 같나? 이제 나는 니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라 카는데, 허허.”

“반도체는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공정한 거래입니다.”

“안 주는 걸 우예 받겠나? 내가 먼저 주면 절반은 성공하는 거 아니가.”

“…….”

“안 가져가면 같은 조건에 시장에 내놓으면 될 거 아니가. 누가 가져가도 가져가겠지.”

정 회장만 할 수 있는 압박이다. 적정 가격에서 3~4천억을 깎아서 내놓는 조건이면 군침을 흘릴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정 회장은 내 손을 툭툭 두드리며 ‘이 정도면 앞으로 수한이 니 말 믿겠다는 내 진심을 알겠제?’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이 양반, 내가 못 당하는 양반이긴 해.

“회장님, 제가 그룹으로 돌아가서 논의해 보겠습니다. 사업 떼어 낸다는 말씀은 일단 아껴 두십시오.”

구 회장이 시간을 끈다.

“허허, LK가 논의하면 한 3년 걸리겠네. 내 그걸 어찌 기다리겠나? 싫다. 당장 내놓을 기다.”

“아닙니다. 한 달 내로 답을 가져올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싫다. 딱 보름이다, 보름.”

정 회장은 딱 선을 그어 버렸다.

“휴우… 알겠습니다. 보름.”

구 회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한다. 그 옆에서 정헌몽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나는 안다. 결국 LK는 반도체라는 한 가지 사업을 주고 두 가지 사업을 인수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디스플레이는 LK 구씨 일가의 미래 전략 사업이고, 정유 사업은 허씨 일가의 미래 전략 사업이니까. 나누기 좋잖나.

반도체를 주지 않고 사업체만 돈으로 인수하는 것은 절대 보름 만에 결론이 안 난다. 정 회장은 즉흥적으로 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계산을 직감적으로 해내는 사람이다.

“그라믄 대충 다 됐구만. 이제 대현전자에 이리저리 사업체를 붙여 주면 되겠어. 공히 대현전자에 회장이 생기겠구만.”

“아, 굳이 회장 직급은 필요 없습니다. 아버님이 아직 정정하신데.”

“아이다. 이제 확실하게 해야지. 회장 승격 준비해라. 임원진도 정비하고.”

“…….”

정헌몽 사장은 차마 대답을 못 하고 묵례로 대신했다. 잘됐네. 왕자의 난이 2차전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다.

“그라고 내 생각을 해 보니 수한이 니도 가져갈 게 있지 않겠나?”

“예? 제가요?”

“건설, 상선, 금융은 대현전자에 붙이면 문제없지만, 그 외에도 많다. 이참에 다 정리하라는 말 아이가. 선택과 집중, 그게 핵심이제?”

“그렇긴 합니다만….”

“그라니까 골라 보이라. 내 수한이 니한테는 특별히 시간 넉넉히 주마. 두 달이면 되겄제?”

“예.”

나는 더 말을 잇기보단 이쯤에서 끊기를 바랐다. 건설, 상선, 금융을 제외하면 남는 회사는 자본금 수백억, 많아 봐야 천억쯤 되는 회사일 것이다.

그중 알짜배기가 있으면 가져오는 것이야 뭐가 어렵겠나. 현재로선 딱히 욕심나는 회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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