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큰 그림에 붓을 대다
뒤적뒤적.
일단 장교들이 사라지면 신문을 늘어놓고 나만의 의식을 진행한다.
조용히 눈을 감고 전방에서 뺑이치고 있는 진짜 군인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러곤 눈을 떠서 신문을 꼼꼼하게 읽고, 신문사별로 철을 해 두면 나의 오전은 휙 하고 지나간다.
언제나 경제면부터 읽는다. 정치면과 사회면도 의무감으로 읽긴 하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1995년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아직 설날이 남았으니 한 해가 시작된 느낌이 안 들어서 그렇지.
「국내 종합주가지수가 1138.75p로 뛰어올라 사상 최고치 경신」
연일 종합주가지수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신문 기사에서는 미국발 호황으로 반도체 업계가 최대 수혜자며, 조선과 자동차까지 호황이라 그렇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몇 년 내 종합주가지수가 2천까지 갈 거라는 희망찬 예측까지 해 대는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IMF가 오긴 오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가가 이리 오른다는 것은 외국 자본, 특히 일본 자금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의미다. IMF의 신호탄이나 다름없다. 문민정부 들어서 주식 시장을 개방했고, 기업에 외국인 직접 투자도 어느 정도 허용된 상태.
경기 활황세를 틈타 들어온 일본 자금은 지금에야 꿀물 같겠지만, 1997년에는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다. 단박에 외환보유고가 줄어들고, 덩달아 불안감을 느낀 일본 외의 외국 자본도 빠져나가니 대한민국은 단번에 외환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불과 6개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일본 물주들이 한 일은 날씨 좋을 때 비가 올지도 모른다며 빌려 준 우산을 막상 비가 올 때는 뺏어 간 격이었다. 내가 막는다고 막아질 일이 아니다.
다행히 스마트 클라우드는 시장에 풀린 주식 지분이 40%에 불과하며, 그중의 절반은 파라곤 투자자들이니 안전한 편이다.
개미들에게 풀린 지분을 일본인들이 모두 거두기도 힘들 거고, 기껏해야 10% 언저리일 것이다. 비를 피하기에 충분하다.
뒤적뒤적.
미래를 걱정만 해서야 뭔 소용인가. 생각해 둔 대응 방안이 있으니, 쭉쭉 신문 기사를 읽어 나갔다. 주가지수의 견인차인 반도체 산업 쪽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신성 256M DRAM 세계 최초 개발. 대한민국 반도체 기술 강국으로 우뚝 서다」
신성은 꽤나 일을 잘한다. 플래시에서는 죽을 쑤고 있지만 그건 내가 미래를 앞당긴 탓이니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하기는 좀 그렇다. 여하튼, 기술도 기술이지만 플래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광고에 가깝게 대대적으로 기사를 실었다.
「스마트 클라우드 256M Flash 세계 최초 개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다」
우리 회사는 DRAM 대신 플래시로 기사를 실었다. 오 이사가 256M DRAM을 신성보다 먼저 출시해 보겠다고 하더니 체면을 구긴 꼴이다. 같은 메모리 용량이라고 해도 전문가가 본다면 공정 기술에서는 신성의 판정승이라 할 수 있는 기사다. 플래시는 콘셉트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미세 공정만 본다면 DRAM보다는 쉬운 편이니까.
역시 신성의 반도체 인력이 아직은 우리 개발자보다 좀 나은 면이 있다. 투입된 자본과 인력을 비교하면 뭐,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오 이사는 지금도 내 얼굴을 어찌 보겠냐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겠구만.
부스럭.
「신성그룹, 계열사 대폭 정리 확정 발표. 전문 경영인 체제 발족」
어라, 신문을 한 장 넘기니 묘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때 신성이 조직 개편을 했던가?
신성은 전체 계열사를 전자 부문, 기계 부문, 화학 부문, 금융보험 부문 등 4개 중핵 사업군으로 분할, 업종 전문화와 전문 경영인으로 책임 경영을 도모한다고 적혀 있다. 각 사업군에는 부회장이라는 타이틀로 전문 경영인을 임명했다.
‘으흠, 신성이 정말 똑똑하긴 똑똑하단 말이야. 확실히 위기관리는 잘해.’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볼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신성물산과 신성건설을 합병한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순환 출자의 목줄인 신성물산의 덩치를 잔뜩 키워 놨다. IMF 같은 금융 위기가 와도 경영권을 잃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졌다.
물론 내가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렇지만, 신성의 이 회장도 금융 시장에서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설령 IMF까지 생각하진 못했어도 경영권 공격은 어느 정도 예상한 모양이다. 심지어 특검으로 자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각 사업군에 부회장을 두고 그룹의 일을 뒤에서 일일이 챙기겠다는 의도마저 보인다. 일석이조라고나 할까. 가히 여우라 불릴 만한 일 처리다.
신문에 그려 놓은 신성그룹의 조직 개략도를 보니 내 마음에도 약간 급해지는 면이 생긴다. ‘왜 스마트 클라우드는 문어발식 확장을 하지 않는가?’ 했던 손정의 회장의 말도 같이 떠오른다.
나도 신성처럼 대기업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긴 해야 하는데…. 돈은 잔뜩 벌어들이고 있는데, 아직까지 나를 비롯해 내 동료들이 준비가 안 됐다. 지금 인력 구조에서 내가 사업부를 갈라 버리면 각 사업부는 방향성을 잃어버릴 거다. 와중에 사업부장감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권재욱 부장이 유일하다. 인력적인 측면에서는 기존 대기업이 참으로 부럽단 말이야.
띠리리. 띠리리.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면회가 있는 날이다.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나 싶다.
“통신보안, 도서관 이병 유수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딱딱한 어조로 전화를 받으니 면회가 있다는 당연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나는 도서관을 벗어났다.
- *
면회실.
딸칵.
“단결!”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따라 사람들이 잔뜩 왔다. 이 비서는 당연한데, 오 이사, 권 부장, 김 팀장까지. 마치 회사에서 개발 회의를 주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부터 제3면담실에는 화이트보드까지 생겼다. 이 비서가 경계병들에게 뇌물성 담배를 많이 갖다 바친 덕분이라 할 것이다.
“오늘따라 왜 이리 여러분이 오셨나요?”
“연초라 상의드릴 것이 많습니다. 2주 후 주말에는 회사에서 회의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올해 경영 목표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기에 2주 정도는 필요한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권 부장님이 내외 상황을 모두 아시니 미리 의제 취합을 해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참석 전에 생각을 좀 정리하겠습니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먼저 256메가 DRAM 개발이 지연되어서 죄송합니다.”
권 부장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앉아 있던 오 이사가 대뜸 사과부터 한다. 오늘 기사가 났는데, 마침 오늘 면담 회의가 있었으니 스트레스 좀 받았을 것 같다.
“뭐, 아쉽게도 S급 보너스는 못 받으시겠어요, 하하.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송구스럽습니다. 3개월만 더 있으면 굿 다이(Good die: 양품임이 확인된 반도체 칩) 확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반도체에서 굿 다이, 즉 동작 가능한 양품 칩을 얻는다는 말은 기본적인 설계와 공정 레시피가 확보된다는 뜻이다. 그다음부턴 수율을 올리는 단계로 넘어가는데 그 또한 최소 석 달, 길게는 1년 이상 걸린다. 역시 내가 21세기 천기누설을 실시간으로 못 해 주니 개발 기간이 예상보다 석 달 정도는 밀리는 격이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요.”
“솔직히 굿 다이를 얻긴 했습니다만, 쉬링크 다이(Shrink die) 패턴을 전혀 얻지 못해서 발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로 패턴을 수정한 설계로 재진행 중입니다.”
반도체 양산은 크게 두 가지 단계를 거친다. 1배수 패턴 마스크로 설계를 확인하고, 0.9, 0.8 비율로 축소된 마스크로 양산형 반도체 칩을 만드는 것이다. 차세대 칩이 완성되면 기존 칩은 0.5배수 이하의 마스크로 축소되어 버린다. 결국 한 개의 웨이퍼에서 더 많은 칩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축소(Shrink)를 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지금 오 이사의 말은 256M DRAM의 경우 축소형 마스크에서 공정 능력이 설계를 구현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나는 이전 기억을 한참 뒤져 보았다.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무슨 문제가 있었더라?
“제품 개발팀 생각은 좀 다릅니다. 회로 패턴의 문제라기보다는 커패시터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회로 설계나 선폭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단 소자의 성능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 팀장님, 일단 256메가 칩이 패키지에 들어갈 사이즈가 되려면 0.8마스크는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한데 지금 0.8 마스크 패턴에선 회로 선들이 모두 뭉개져 버리는데 양산 시도를 어찌 합니까. 일단 회로선을 서로 띄고 볼 일입니다.”
“그 말씀도 맞습니다만, 그렇게 회로 간격을 띈다고 해도 지금 단위 소자의 커패시터 용량이 따라가질 못합니다.”
“전하 누설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회로 선이 합선된 원인일 겁니다. 지금 흐르는 개선 lot을 보고 판단하시지요.”
오늘따라 김 팀장이 따라온 이유를 알겠다. 사내에서 계속 이견이 있었군. 역시 내가 자리를 비우니 이런 일이 하나둘씩 생기는 거다. 뭐, 서로 실력을 키우는 단계라고도 볼 수 있으니 나쁜 시그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으음, 싸우실 필요 없어 보이는군요. 두 분 말씀이 다 맞는 것 같으니까요.”
“예에?”
“저희 둘 다 맞다고요?”
기억을 뒤지다 보니 256M DRAM은 역대 최고로 어려운 개발이었다. 산학 장학생이던 나조차 회사로 불려 가 뺑이쳤던 기억이 나니까. 내 기억으론 개발 기간이 30개월이 넘는 유일한 제품이었다. 심지어 양산은 초도 개발이 완료되고 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들리네요. 우리가 욕심을 좀 버리면 어떨까요?”
“예, 욕심을….”
“256메가 선폭이 얼마죠? 1.0마스크에서 말입니다.”
“0.25마이크론입니다.”
역시 그랬군. 이미 보고를 받았지만 내가 자세히 읽어 보지 못한 탓이다. 0.25마이크론은 현재 장비에서 분해능의 한계에 봉착하는 선폭이다. 신성은 그걸 깨달아 장비를 개선했을 테고, 우리 엔지니어는 아직 그걸 설계 미스라고 생각하는 거다.
“1마이크론 파장의 딱 4분의 1이군요. 파장 분해능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이하로 줄이려면 라이트 소스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요.”
“위상차.”
“아! 축소 마스크가 그래서… 분해능이 안 나왔군요.”
엔지니어링이라는 게 참 희한하다. 알고 나면 원인은 너무나도 간단하니까. 그리고 현재와 같은 상황은 칩을 축소해야만 패키지에 들어갈 사이즈가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원인 분석 자체를 하지 않은 면도 클 것이다.
“그럼 0.25선폭은 고정, 남은 문제는 칩 사이즈와 커패시터 용량이군요. 그쵸?”
“예.”
“256메가는 포기합시다.”
“예?”
“장비가 안 되는데 어쩝니까? 256메가는 차세대 설비로 공장 새로 지으면 양산하고, 128메가를 먼저 하죠. 256메가 1.0마스크로 생산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뭡니까? 64메가의 다음 세대가 꼭 256메가가 되라는 법이 있나요?”
“없지요.”
“그럼 하면 되죠. 우린 반도체 메이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회사예요. 내가 확신하건대, 신성도 당장 256메가 양산은 못 합니다. 신규 설비 셋업하는 데 한참 걸릴 겁니다. 신성은 그리하라 그러고, 우린 기존 설비를 써서 128메가로 한발 앞서 시장을 선점하면 되죠.”
짝!
오 이사가 손뼉을 치더니 제풀에 놀란다. 128M는 256M 칩 사이즈의 절반. 당연히 1.0마스크를 써도 패키지 안에 들어간다. 당장 양산을 시도해 봐도 될 법하니 그랬을 거다.
“사장님, 커패시터에 대해선 아이디어가 있으신가요?”
“김 팀장, GPU 가속 펌웨어 만들 때 기억납니까?”
“GPU 가속이 DRAM 커패시터와 무슨 관련이….”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나는 그걸 보고 커패시터 표면적을 늘리는 방법으로 언젠가는 써 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대체 뭐를 보시고… 아, 매핑!”
빙고! 역시 김 팀장. 힌트를 주니 바로 떠올린다. 매끈한 커패시터 표면에 홈을 파 주고 거칠거칠한 패턴을 입히면 표면적이 왕창 늘어나잖나. 매끈한 풍선보다 같은 크기의 포도송이가 표면적이 몇 배는 크다.
“어째, 해 볼 만하지 않겠어요?”
짝!
“네! 해 볼 만합니다. 골조부터 만들고 증착을 시키면 단박에 될 것 같은데요.”
김 팀장마저 손뼉을 치며 좋아라 한다. 뭐 잘하겠네. 벌써부터 김 팀장과 오 이사가 눈짓을 하는 것이 돌아가면 당장 실험을 새로 꾸밀 생각부터 하는 것 같다. 연구소와 제품 개발팀은 반목과 협업을 반복하는 조직이다. 그걸 둘은 잘 이해하고 있다.
“돌아가서 협업 잘하시고, 벌써 시간이 훅훅 지나갔네요.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사장님, 기술적 사안에서 조금 벗어난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디자인팀에서 디자인을 안 합니다.”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너슨이 놀고먹는다는 얘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저희 디지털카메라가 아주 잘 팔리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당연하죠.”
“그게 CIS 시장을 폭발시키고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저희 휴대폰 사업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타사에서는 벌써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을 합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디자인팀에 그런 제품을 디자인해 달라고 했더니 거부당했습니다. CIS 모듈이 너무 커서 개구리 눈알처럼 튀어나온다고. 블레이드라는 디자인 콘셉트에 맞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조너슨다운 행동이긴 하다. 나 또한 그 뜻에 동의한다. 지금의 CIS 모듈은 너무 크다. 현 기술로 억지로 작게 한다면 30만 화소 정도가 한계이기에 화질이 개판일 거다. 반도체 기술 첨단에 있는 DRAM조차 0.25회로선 폭이 한계인 시절이다.
“조너슨의 말에 나도 동의합니다. 대현에서 K폰을 어찌 말아먹었는지 아시잖아요. 블레이드 디자인으로 겨우 고객들이 돌아왔는데, 그걸 망치면 어쩝니까?”
원래 역사에서도 일본 휴대폰 메이커가 1990년대 말에 카메라폰을 출시했지만 워낙 못생기고 화질이 개판이어서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했다.
“그래도 타사보다 우리 기술력이 뒤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디자인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야 8월에 시제품을 만들고, 11월에 신제품을 출시할 수 있습니다.”
“8월에 시제품, 11월에 신제품.”
“예. 우리 제품은 언제나 첨단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벤트를 열어 왔습니다. 11월에 스마트 클라우드의 쇼 케이스에 참석하고, 12월 크리스마스에 저희 신제품으로 갈아타는 것은 유행의 리더라면 꼭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집니다. 지금 디자인을 하긴 해야 합니다.”
권 부장이 답답한 듯 말을 늘어놨지만 듣는 나는 기분이 참 좋았다.
수많은 소비자들이 11월에 스마트 클라우드의 신제품을 기다린다. 어우,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다. 케이가 디카의 11월 제품 출시를 기필코 고집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이런 트렌드에 못을 박은 꼴이 되었다. 케이는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내 동료들이 신제품 개발이라는 1년 농사에 대해 시스템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오 이사님, CIS 모듈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작게 할 방법이 있나요?”
“아직은 어렵습니다. 일단 연구소는 800만 화소를 목표로 연구 진행 중입니다. 모듈 사이즈는 아직….”
“개발팀 의견은 어때요?”
“저도 어렵다고 봅니다. 광학 모듈은 물리적 치수에 제한이 많습니다.”
“권 부장님, 들으셨죠? 카메라폰은 포기합시다.”
“예?”
포기하자는 말에 권 부장이 깜짝 놀란다. 조너슨에게 디자인하라는 지시를 원하고 왔을 텐데 영 엉뚱한 방향으로 결론 내리니 그럴 것이다. 괜찮다. 누가 올해 카메라폰을 내놓는다 해도 디자인과 성능이 개판일 거다.
“오늘따라 내가 포기하자는 말을 많이 하는군요. 대신 오 이사님, 연구소에는 2년 과제로 3밀리미터짜리 CSI 모듈을 개발해 주세요.”
“3, 3t CIS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이마를 짚는 오 이사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그래도 우리 고객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겠죠?”
“그렇습니다, 사장님. 올해는 휴대폰의 업그레이드가 꼭 필요합니다. 중국 시장도 조만간 열릴 겁니다.”
역시 권 부장. 중국 시장을 돌아보고 오라고 했더니 눈치를 챘나 보다. 1995년을 기점으로 중국에선 무선 통신을 국가 주요 사업으로 지정하며 대규모 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대륙에선 유선으로 전화를 까는 것보다 무선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 격이다. 여하튼 중국 시장은 나중 일이고, 일단 신제품부터.
“그래요. 휴대폰은 업그레이드를 해야죠. 융합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겠군요.”
“융합이라 하심은?”
“김 팀장이 숙제를 가져가세요. 우리 기존 제품 두개를 융합해 봅시다.”
“무슨 말씀이신지….”
“휴대폰과 앰팩을 합쳐 보죠. 가칭 앰팩폰이라고 불러 보죠. 모델명은 나중에 짓고.”
“휴대폰과 앰팩을… 그러면 팀킬이 아닙니까.”
김 팀장은 팀킬이라는 말을 썼다. 영업팀에서나 쓰는 말인데, 같은 회사의 제품끼리 경쟁하다 제살 깎아 먹는 경우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건 팀킬이 아니다.
“팀킬이 아닙니다. 우린 첨단 제품 출시라는 고객의 요구를 맞추고 있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득이 됩니다.”
“K폰이 앰팩 기능을 대신하면 앰팩의 매출이 줄어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서워서 시장 확대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 그렇죠, 권 부장님?”
“예, 그렇습니다. 기업에서 시장 점유율은 순익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솔직히 앰팩 매출 50%가 줄어도 휴대폰 시장 점유율 5%를 늘릴 수 있다면 그리해야 합니다. 심지어 앰팩을 융합하는 신제품인데 저는 100% 찬성입니다.”
역시 권 부장이 영업팀장답게 좀 더 넓게 보고 있다. 김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다. 가르치려 들면 기분 나쁠 것이고, 그다지 효과적이지도 않다.
“앰팩은 독점이고, K폰은 아직 먹어야 하는 파이가 많다. 이때 앰팩폰을 출시하면 기존 휴대폰 메이커들도 같은 기능을 넣을 수밖에 없고, 결국 경쟁사들은 우리에게 플래시와 오디오 칩을 구매하고 로열티까지 줄 거다. 그 말씀이시군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오 이사가 정답을 말한다. 김 팀장도 눈을 반짝거린다.
“하하, 설명할 것도 없겠네요. 정답입니다. 우리 사업의 핵심 전략은 첨단 모바일 제품을 선도하며 옆 동네에는 부품을 팔아먹는 겁니다. 부품과 제품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우리 회사를 먹여 살리는 거죠. 즉, 시장이 어찌 변해도 우리 회사는 망할 수가 없어요.”
“오! 그럼 제가 철밥통인 겁니까?”
“하하하, 입사 잘했죠?”
“예, 정말 그렇습니다. 하하.”
내 농담에 김 팀장이 고개를 마구 흔들며 웃어 댔다. 원래 역사에서도 MP3 폰은 MP3 플레이어가 나오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실용화되었다.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해 볼 만한 일이다. 어쨌든 카메라폰보다는 쉬우니까.
“조너슨이 하는 차기 디자인에 맞춰요. 공간이 협소하겠지만 256메가 플래시도 나왔으니 해 볼 만 할 겁니다.”
“예, 해 보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김 팀장의 다짐에 권 부장도 신제품 걱정에서 한시름 놓았는지 얼굴이 편안해졌다. 저리 김 팀장이 자신하는 것은 보니 8월에 시제품은 무난하게 나올 것 같다.
“자, 이제 두 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실 테고, 심심하실 것 같은 분이 남으셨네요.”
“예? 저보고 하신 말씀이십니까?”
권 부장이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다.
“권 부장님도 도와주시면 좋겠네요. 이 비서 혼자 보내는 것보단 낫잖아요.”
“저를 어디로 보내신다고요?”
이 비서가 눈이 동그래진다. 자르는 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오사카에 일본 공장을 세웠던 경험도 있으니, 이번에는 다른 데를 노려봅시다.”
“다른 데요?”
“중국 말씀이시군요.”
권 부장이 옆에서 활짝 웃으며 화답한다. 맞다. 중국이다. 앰팩폰을 출시하기로 했으니, 앰팩 자체는 가격을 다운시켜서 시장 규모를 키워야 한다.
“맞아요. 앰팩은 올해 말부터 저가 제품을 내놓을 수밖에 없겠죠? 중국을 끼워 넣을 때가 되었습니다.”
“박리다매를 하시려는 거군요. 가격을 어디까지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격을 우리가 왜 정하죠? 중국 메이커가 정해야죠.”
“……!”
“가격 경쟁이 어려운 시장이니, 반도체 부품만 수출 합시다.”
“안 그래도 시장 조사를 마치고 어떻게 보고를 드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역시 사장님이십니다.”
권 부장이 보고를 주저할 만하다. 섣불리 달려들 시장이 아니니까.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 우후죽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성공한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사업에 실패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일 것이다.
첫째, 1990년대 중국 시장은 특허 보호라는 개념이 없기에 뭔가 시장에서 좀 팔린다 싶으면 순식간에 짝퉁이 범람했다.
둘째, 정부와 끈이 있는 이들이 지원금을 등에 업고 가격 경쟁을 할 경우 답이 없었다.
셋째는 막상 중국에서 돈을 벌어도 한국으로 가져오기가 쉽지 않았다. 즉, 중국 관리들과 끈이 없으면 매우 어려웠다. 심각한 경우는 중국에서 흑자를 내고서도 한국에서 빌린 은행 융자를 갚을 길이 없어 파산한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중국 세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송금이 막혔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세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경우가 많으니까.
결국 한국 대기업조차 중국이 어느 정도 시장을 정비한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국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나라고 별수 있나. 현재로선 제품을 들고 들어가면 적자는 불 보듯 뻔하니, 반도체 수출에 집중하는 게 옳다.
“어때요? 이 비서가 가서 수출길 좀 뚫고 오세요. 권 부장님은 옆에서 도와주시고.”
“공장을 지으라는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유통 회사를 물고 오라는 뜻인가요?”
이 비서가 감을 잡은 듯하다. 정확히 짚어 줘야지 싶다.
“유통 회사는 유통 회사인데, 정치 거물과 연결된 회사였으면 좋겠네요.”
“정치 거물이라면 공산당…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일단 수출이 어떤 경로를 탈지 모르니까, 홍콩에 인접한 심천에 사무실 하나 차리고 지역 유지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는 게 좋겠어요.”
“사무실까지. 그럼 출장 정도를 생각하시는 게 아니군요.”
“그래서 이 비서가 적당하다고 하는 겁니다. 나를 대신한다 생각하고 최소한 올해 8월까지 심천에 머물면서 끈을 만들어 봐요. 심천에 은퇴한 정치 거물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지금 심천에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있다. 시중쉰은 은퇴해서 노후를 보내고 있으며, 시진핑은 홍콩에 인접한 푸젠성 샤먼(복건성 하문)시 부시장으로 있다. 내가 듣기로 시진핑은 꽤나 효자였는지 아버지도 볼 겸 심천에 자주 들렀고, 온 김에 홍콩 관리들과 자주 접촉했다고 했다.
세간의 평가로는 시 주석이 1990년대부터 홍콩의 금융시장에 대해 배우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홍콩에 있는 무역 거점을 심천과 샤먼으로 옮기는 구상을 이때부터 하지 않았을까 싶다. 2000년 중반 주석으로 자리매김했을 때 홍콩과 대만을 하나의 중국에 묶기 위해 무역이라는 돈줄부터 뺏어 온 전략을 펼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가.
여하튼 이 비서가 심천에 머물며 지역 유지와 접촉하다 보면 시중쉰을 만나든 시진핑을 만나든 인연이 이어질 것이다. 대충이나마 이 비서가 안면만 익혀 놓으면, 내가 제대해서 시진핑을 제대로 엮으면 된다.
“8월까지 수출 경로를 뚫어 보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중국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때 뇌물을 잘 써야 한다고 들었어요. 시계 선물은 절대 안 되고, 보석도 좀 그렇고, 현금은 나중에 관계가 확고해지면 써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밥만 주야장천 같이 먹으면 됩니까?”
“밥도 좋은데 보물을 줘야 한답니다, 보물!”
“보물이라고요?”
“인연을 맺을 사람이 보물로 생각할 만한 것 말이죠. 도자기, 그림, 하다못해 오래된 스포츠 용품이라든지… 여하튼 격식을 갖춰서 줄 만한 것을 택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적당한 뇌물을 주는 것은 중국인과 꽌시를 맺기 위해선 필수 코스라고 불리는 일이다. 축구광인 시진핑에겐 축구 스타 사인볼을 주면 좋을 텐데. 당장 이 비서에게 알려 줄 수도 없고….
“상대를 파악해 보는 게 우선이겠군요. 출장, 아니 파견 가기 전에 중국 문화에 대해서 공부 좀 하고 가겠습니다.”
“좋네요. 오늘따라 여담도 없이 줄곧 회의만 한 것 같군요.”
“아고, 벌써 면담 시간이 끝났네요. 군인한테는 코코아 한 잔 뽑아 드렸어야 하는데.”
“뽑아 줘요. 가면서 마실 테니까. 하하!”
DRAM 제품 전략에, 신제품 출시 전략에, 중국 공략까지. 대충이긴 하지만 1년 농사 중에 큼지막한 것을 짚었더니 진이 빠진다.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서 다들 한 잔씩 마시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