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변해 버린 위치(2) (49/104)

세 남자가 동시에 턱을 매만지며 표정 관리를 했지만, 케이는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내가 소중해? 동료 이상의 믿음? 정말?’ 하고 묻는 눈빛이다. 나는 ‘아, 예. 사실은 사실이죠, 케이 양.’ 하고 고개를 끄덕거려 줬다. 며칠 전에는 신파극을 찍더니 오늘은 웬 시트콤인가. 나는 남녀관계를 사업에 엮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식적인 기업가일 뿐이다.

“좋아! 내 도와주지. 어디로 보내 주면 좋겠나?”

“카투사, 그것도 용산에 있는 미군 부대로 보내 주십시오.”

용산 카투사는 꿀보직 중의 꿀보직. 주말에는 휴가를 나올 수 있으며, 상급자가 지시한 업무와 명령만 수행하면 면회도 자유롭다.

“뭐, 부탁이라고 할 만한 일도 아니군.”

루이스 장군은 옆에 앉은 바윗덩이가 이미 발신한 휴대폰을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장군답게 전화번호 버튼을 누르는 행위 따윈 하지 않는다.

-헬로.

“오~ 개리! 개리! 나 루이스야. 정말 오랜만에 전화하는군. 어찌 지냈나?”

-허, 루이스? 이게 얼마 만인가? 무기 장사꾼들이랑 같이 낚시나 하러 다니는 줄 알았더니.

개리? 개리 E. 럭? 헐! 현재 주한 미군 사령관이잖아. 그런 양반에게 직통 전화를 해? 과연 로비의 천국에 사는 미국인답다.

“자네도 언제 시카고 오면 낚시 한번 같이 가야지. 그건 그렇고, 간단한 일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

-천하의 루이스가 부탁을 다 하다니. 무슨 일인가? 도울 일이라면 도와야지.

“자네, 혹시 한국어 통역할 사람 필요하지 않나?”

-통역관? 여기 통역관 많아.

“아냐, 아냐. 잘 생각해 봐. 필요할 거야. 아니, 필요해야 해.”

-으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군. 필요하네!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네. 그래서 내가 사람 하나 뽑아 놨다네. 똑똑하고 입도 무겁고, 심지어 자기 소유의 기업도 있어!”

-그만하면 알아들었네. 내 특별히 곁에 두고 케어하지.

“아냐, 아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면 내가 부담스럽지. 용산 기지에 도서관 있잖나? 평소엔 도서관에 처박아 두고 잊어버리고, 어쩌다 생각나면 장기 휴가나 한 번씩 보내 주면 돼.”

-알았네, 알았어. 내 그리하지. 시카고에 가면 낚시 한번 같이 가는 걸로. 어때?

“그럼, 그럼. 꼭 들르게. 내 공항까지 마중도 나가지. 못다 한 얘기는 시카고에서 하지.”

-하하하하! 루이스가 이리 챙기는 행운아가 대체 누군지 아주 궁금하군. 꼭 내게 직접 보내게. 하하하.

“이만 끊겠네.”

딸깍.

휴대폰을 접어 툭 하고 집어 던졌다. 마치 탄창 주고받듯 휴대폰이 순식간에 안주머니로 사라졌다. 하도 큰 소리로 통화를 했기에 대화를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주한미군 사령관과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케이는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운 듯 눈을 반짝거렸고, 루이스 장군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딸아이 앞에서 자랑스러운 아버님 되시겠다.

“감사합니다, 루이스 장군님.”

“자, 내 명함이네. 자네 인적 서류와 함께 개리에게 보내게. 아, 물론 입대하고자 하는 날짜도 적어서 보내야지. 그럼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내 손바닥에 척 하고 명함을 얹어 준다. 마치 ‘난 확실히 전달해 줬어!’ 하는 다짐 같다.

“용산 미군부대 도서관. 그 정도면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 나는 남이 원하는 걸 잘 읽거든.”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사자가 모르는 진심도 잘 읽지. 하하하.”

“……?”

툭. 툭.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나도 벌떡 일어났다. 그랬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사무실 밖으로 향한다. 양쪽 바윗덩이들도 내 어깨를 툭툭 털어 주며 같이 자리를 뜬다.

“아버지, 제가 모실게요.”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그리 일찍 끊어 놓으면 어째? 아비가 오랜만에 한국에 왔는데 같이 시간은 보내 줘야지.”

“호호, 일단 근사한 한정식부터 드셔야죠. 어서 가요.”

“그거 좋구나.”

루이스와 케이는 회사를 빠져나갈 즈음에는 사이좋은 부녀지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케이가 나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루이스에게 내가 밉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그들이 사라지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손에는 특례나 다름없는 군 생활을 보장할 증표가 남았다.

“이 비서, 긴급회의 소집해 주세요. 연구소장, 팀장들 모두 참석하라고 말이죠.”

“예.”

    • *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모두들 긴장된 표정으로 모였다. 내가 긴급회의를 소집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나는 좌중을 쭉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별일 아니고, 다음 달에 제가 입대를 합니다.”

“허헉! 다음 달에 말입니까?”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카투사로 입대할 테니, 주말에는 업무를 챙길 수 있습니다. 대충 2년간은 주말 오전에 출근하셔야겠습니다.”

“그건 문제없습니다만….”

오 이사를 필두로 모두 우려스러운 표정을 했다. 익숙해지면 문제없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이미 어느 정도 대기업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인트라넷으로 업무를 챙기면 자연스레 업무 시스템이 정비되기 마련이다.

“자, 내가 자리를 비울 때를 대비해 업무 분장을 했으면 합니다.”

“…….”

“사장 대리는 오 이사님이 해 주시고, 10억 이상의 결재가 필요한 사항은 주말을 이용해 내가 직접 처리하죠.”

“긴급 처리 건은 어떻게….”

“오 이사님이 용산 미군기지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카투사라 면회는 자유로울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 비서는 이틀에 한 번 내게 업무 보고를 해 주고요.”

“예.”

오 이사와 이 비서를 끼우면 업무의 공백은 최소화 될 것이다. 10억 미만의 돈 처리는 문제없다. 권 부장이 처리하거나, 다소 복잡한 일이면 케이가 알아서 잘할 거다. 자, 이제 진짜 중요한 문제를 다뤄 보자.

“조직 변경을 좀 했으면 합니다. ISP와 플래시 개발 업무는 김 팀장이 담당하고, 다른 개발 건은 모두 송 과장에게 넘기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하반기 신입사원을 뽑아도 ISP와 플래시에 신규 인력은 배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존 개발자를 이동시키고, 신입은 DRAM과 통신칩에 배정하십시오.”

“굳이 그러시는 이유가….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지원자들이 많은데요.”

김 팀장이 조금 놀란다. 투톱 체제의 개발팀이긴 하지만 송 과장은 소재와 부품 쪽, 제품 쪽은 김 팀장이 모두 맡는 형태였으니 그랬을 거다.

“신성이 산업스파이를 운용할 거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헉! 그놈들이!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상하게 제2공장 셋업 때 설비 업체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니.”

나 부장이 훅 하고 나선다. 내가 좀 더 집중했다면 낌새를 빨리 알아챘을 텐데, 시답잖은 연애질로 촉이 많이 무뎌졌다. 굳이 신성뿐 아니라 일본 메이커들도 욕심을 냈을 텐데 여태 보안 사고가 안 난 게 외려 용하다. 제2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한 이때라도 느껴서 다행이다. 반성하자.

“다들 대충 눈치채셨지요? 플래시 기술을 노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일본 설비 업체도 눈을 부라리고 있을 겁니다. 제2공장 설비의 메이커 라벨은 모두 제거하고, 담당 개발자와 작업자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출입을 제한하세요. 공정 레시피는 함부로 다운로드가 불가능하게 나 부장님이 직접 암호 관리하시고요.”

“예, 사장님. 맡겨 주십시오. 허튼 생각 하는 그 누구도 접근 못 하게 하겠습니다.”

“양산뿐 아니라, 영업팀, 연구소 할 것 없이 플래시 관련자는 모두 독립 조직으로 편성해서 정보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예.”

“예.”

보안은 일차적으로 조직을 분리시키는 것이 답이다. 그래야 누군가 정보에 접근하면 업무인지 끄나풀인지 구별이 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끄나풀조차 조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8월 말에 계획한 시카고 쇼 케이스는 저 말고 오 이사님이 주관하시지요.”

“헉! 제가요?”

“하하, 머리 깎고 쇼 케이스에 나갈 수는 없잖습니까. 저는 9월 1일에 입대할 겁니다.”

“아, 그렇게 일찍….”

오 이사의 표정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개발자에게 신제품을 대중 앞에서 제일 먼저 발표하는 것은 일종의 명예다. 내가 오 이사를 인정한다는 의미기도 하니 속으론 엄청 기쁠 거다.

“권 부장님은 은밀히 알아보실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신지요? 말씀하십시오.”

“일명 신성 장학생 아시죠?”

“예, 대충은.”

“하반기 공채에 지원한 석박사 위주로 조사하세요. 괜찮다 싶은 사람 있으면 신성 장학금 돌려주고 우리 쪽으로 당기세요. 신성의 산업스파이보단 스마트 클라우드의 직원이 낫지 않겠냐고 말이죠. 물론 기술 면접보다 인성 면접이 우선인 것 아시지요? 면접을 통과한다 해도 당분간 핵심 개발직과는 거리를 두시고요.”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사항은 즉각 처리하시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8월 말까지 모두 저와 상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예!”

오케이. 이 정도면 신성은 플래시 정보에는 얼씬도 못 할 거다. 그러게, 처음부터 라이선스가 아니라 LK나 대현처럼 플래시만 사 가겠다고 했으면 이런 일 없잖아. 애플도 비싼 가격에 사 가는데 내가 라이선스를 줄 리가 없잖아.

    • *

「기획기사: IT 강국! 대한민국의 자부심이 되다」

「디지털카메라, 세계가 또 한 번 놀라다. 코닥과 함께하는 스마트 클라우드」

「국책 과제, 가시적인 성과 보이나. 디지털카메라, CCTV, 차량용 내비게이션의 탄생에 기여. IT 관련 주가 급상승」

「대한민국의 반도체 기술, 세계 유수 업체와 어깨 나란히. DRAM부터 Flash까지」

텅!

이 회장은 반도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한 자료를 탁자 위에 집어 던졌다. IT 업계에 경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에 스마트 클라우드라는 이름이 걸쳐져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신문에서는 LK와 대현전자까지 언급했지만 신성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대한민국 1등이라 여긴 이 회장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는데, 눈빛의 끝에 있던 이수학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모래알처럼 들어오던 플래시 정보조차 끊어져 버렸어. 일을 제대로 하긴 한 건가!”

“유수한이 입대를 앞두고 조직 변경을 하는 바람에….”

“뭔가 일을 벌이면 그 결과가 어찌 향할지 예측해야 하는 거 아닌가. 미리미리 사람을 박아 놨어야지. 그러고 난 뒤에 군대를 보내든 영창을 보내든 섬에 보내든 해야 할 것 아닌가!”

“본격적으로 일이 펼쳐지기 전에 그자가 자진해서 카투사로 입대를 한다고…. 어휴, 그자가 영어를 잘한다는 걸로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이수학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군대에서 카투사는 신성의 입김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 회장에게 자세히 보고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몇 명 있지도 않았던 설비 업체 끄나풀들이 모두 스마트 클라우드로의 출입을 통제당했고, 개발자 스파이로 끼워 넣고자 했던 인재들은 어디서 돈이 생겼는지 그동안 지원했던 장학금을 위약금까지 합쳐 되돌려 주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대현전자 아니면 스마트 클라우드, 일부는 LK까지…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다.

“정보가 샌 거 아닌가! 샌 거 아니냐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비서실에서 직접 비밀리에 추진한 일입니다.”

“비서실? 저번 한새미디어 건도 그렇고 비서실도 인사 검증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비서실의 충심을 의심하시다니요.”

“…….”

이 회장도 그 말에는 답하지 못했다. 비서실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다고 생각한다면 신성그룹 전체에 너무나도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결국 유수한 그놈이 또 적당한 타이밍에 알아챘다. 그래서 카투사라는 최선의 선택지로 향했다. 그 말인가?”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놈은 운이 좋은 거야? 아니면 정말 머리가 좋은 거야? 아니, 그걸 머리로 알 수 있을까? 우리 작전을 머리로 알 수 있냐고. 다리 수십 개는 건너야 알 수 있는 일이잖나.”

“송구합니다.”

“특급 임원들에게 이르게. 어찌 되었든 있는 자원으로 플래시 개발을 완료하라고. 어떻게든 스마트 클라우드를 따라잡으라고.”

“예.”

이수학은 플래시 개발과 관련하여 스카우트한 석박사들의 상당수가 이탈했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호암박물관을 빠져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유수한을 군대로 보내긴 했으니 안 잘린 게 다행이었다.

    • *

용산 미군기지.

나는 오늘도 도서관에서 신문과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척. 척.

“Good Morning, Sir.”

“Soldier On.”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다가도 장교가 지나가면 이처럼 경례를 한다. 한미연합사 한국 장교면 ‘단결’이라고 하고, 미군이면 그냥 경례만 하면 된다. 지금처럼 아침인 경우에는 굿모닝을 크게 외쳐 주면 좋아한다. 군인이라고 아침 인사를 싫어하지 않으니까.

용산 미군 부대에선 아침에 도서관에 들러 신문을 챙겨 가는 장교들이 몇 명 된다. 유일하게 내가 바쁜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아침마다 워싱턴포스트 신문이 20부 정도 들어오는데, 한 부는 철을 해 두고, 나머지는 가져가기 쉽게 정리해 두는 것이 전부다. 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 간혹 ‘탄도학’ 같은 전문 서적이나, 역사책을 읽으러 오는 장교가 있을 뿐 하루 종일 사람 한 명 드나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 위로 미군 소위가 한 명 있긴 하지만 하루에 얼굴을 딱 한 번 볼 뿐이다. 언제나 아침 9시에 와서 도서관을 돌아보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게 애로 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고 없다고 하면 곧바로 돌아간다. 그리고 주말이 오면 역시 무심한 표정으로 주말 외박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다. 마치 나를 그리 취급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다.

‘연말이 다가오니 미군도 이제 별로 안 보이네.’

오늘처럼 내 직속상관인 미군 소위마저 휴가로 자리를 비운 경우는 완전 자유다. 1년 단위로 자리를 교체하는 미군 소위의 특성상 지금 같은 연말에는 카투사라는 꿀보직 중에서도 단물을 빠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뒤적뒤적.

하도 심심해서 여러 신문을 반복해서 꼼꼼히 읽는 버릇이 생겼는데, 덕분에 내 영어 실력이 느는 물론 전생의 기억이 또렷해지는 효과도 있다. 나름 육군훈련소에서 기본 훈련 5주에 평택 미군 부대에서 3주 훈련을 받았을 때는 꽤나 힘들었는데, 용산으로 배치 받고선 한 달에 한 번 하는 체력 테스트를 제외하곤 훈련도 없으니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솔직히 전방에서 뺑이치고 있는 진짜 군인들에게 미안할 정도다.

삐리릭. 삐리릭.

시계를 보니 10시가 지나고 있다. 전화 올 때가 됐는데 하고 생각하는 찰나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통신보안, 도서관 이병 유수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통신보안, 여기 정문 면회실입니다. 이병 유수한 면회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미군들이 이곳에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면회를 알리는 전화가 대부분이다. 미군들의 전화라면 그냥 ‘헬로’ 하고 전화를 받으면 되지만, 같은 한국 병사들끼리는 ‘통신보안’을 외친다. 괜히 책잡힐 일 만들면 안 되니까 열심히 외쳐 주는 거다.

평소와 같이 도서관 문을 걸어 잠근 뒤 ‘담당자 면회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두고는 정문 면회실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면회실 구석에 있는 3번 방으로 향했다.

“단결! 유수한 사장님.”

“아, 됐어요, 이 비서. 이제 그 장난 안 할 때도 됐잖아요.”

“하하, 알겠습니다.”

“군인답지 않게 얼굴이 좋으십니다, 사장님. 따뜻한 코코아 한 잔 하세요.”

정문 옆에 딸린 면회실로 들어서니 이 비서가 장난스럽게 나를 반긴다. 함께 온 오 이사도 환하게 웃으며 자판기에서 코코아까지 뽑아 놨다. 신병 훈련으로 두 달이 훌쩍 가 버렸기에 벌써 12월 중순이다. 올해 여름이 워낙 혹독해서인지 12월인데도 벌써 춥다.

따끈한 코코아를 손에 쥐고 물었다.

“미국 쇼 케이스는 어땠습니까?”

오늘 이 비서의 업무 보고에 오 이사가 함께한 이유가 달리 있겠나? 디지털카메라 쇼 케이스의 결과를 보고하러 온 거겠지. 다른 이들도 오고 싶었겠지만, 다음 주면 내가 외출을 나가니 그때 파티를 하면 된다. 아무리 카투사라도 주말마다 외박하는 것은 눈치 보이는 일이기에 2주 또는 3주에 한 번 주말 외박을 하고 있다. 군인으로서 첫 번째 맞는 연말 휴가가 기대된다.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습니다. 기자들이 어찌나 질문을 많이 하던지 대답하느라 진땀을 흘렸습니다.”

“하하, 그걸 내 눈으로 봤어야 하는데 아깝군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분위기라도 느끼시라고 말입니다.”

“오!”

오 이사가 내민 사진을 보니 정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무대 뒤에서 케이가 찍은 것이 분명한 듯 오 이사가 디지털카메라를 높이 쳐들고 있고, 청중들의 대부분이 기립 박수를 치고 있다.

하긴 청중들의 상당수가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주주들이거나, 스마트 스토어의 관계자들일 것이다. 돈이 벌릴 것이 확실해 보이니 환호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 뒤의 사진을 봐도 모두들 입이 귀에 걸린 모습이 대부분이다. 특히 셀카로 찍은 사진이 몇 개 있었는데 ‘대박’이라는 눈빛으로 서로 손을 뻗어 대고 있었다.

“여기 계약서를 보여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초도 계약이 자그마치 120만 대입니다.”

“이야, 한 건 하셨군요. 초도품이 100만 대가 넘다니요.”

“스마트 스토어 지점 오너들이 80만 대. 나머지 40만 대는 각종 백화점, 쇼핑몰에서 들어온 주문입니다. 크리스마스 특수 때문에 그런지 지금도 주문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하긴 지금 미국은 경제 상황이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솔직히 120만 대는 시작일 뿐이고, 아마 내년도를 가늠해 보면 천만 대 판매는 무난할 것이다. 끽해 봐야 350불, 500불짜리 아닌가.

“좋네요. 코닥도 같이했죠? 그쪽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쪽도 대단했습니다. 못해도 30만 대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을 겁니다. 전문가용이라 대당 1,500불이 넘는 고가품인데도 스마트 스토어 지점 오너들이 마구 서명하더군요.”

“우리랑 매출은 비슷하겠어요.”

“예. 서로 상승효과는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소비자들의 반응도 그렇고, 무엇보다 스마트 스토어에 가면 다양한 가격대의 최신 전자 제품을 만날 수 있다는 트렌드가 생기고 있습니다.”

“좋네요.”

오 이사가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고객의 반응을 보고 나니 안심이 되는 것이리라.

“그럼 우리 내부 현황은 어떤가요?”

“권 부장과 나 부장이 참으로 일을 잘했습니다. 미리 400만 대 규모의 선행 양산을 해 뒀기에 물량 대응에는 전혀 문제 없습니다. 외려, 권 부장은 유럽 시장을 뚫겠다며 출장을 신청하기에 제가 서명했습니다.”

“잘했네요. 오는 김에 중국도 들러 보라고 하세요.”

“중국 말씀이십니까?”

“지금이야 구매력이 없겠지만, 그만큼 진출하기는 쉬울 겁니다. 북경, 상하이 정도에 지점 설립을 준비해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1994년부터 중국의 개방이 가속화된다. 중국에서 만든 소비재가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시기니까. 이 모든 게 북미 소비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이 비서가 옆에서 ‘액션 아이템 1번, 중국 지점 검토.’라고 중얼거리며 회의록을 작성 중이다.

“이 비서, 액션 아이템만 적지 말고 결과도 알려 줘야죠. 지난번 업무 회의 때 올해 실적을 대충이나마 알려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다들 바빠서 제가 영업팀과 같이 정리를 하고 있는데, 올해 실적은 누적 매출 3조 4천억에 순익은 대략 4천억일 것 같습니다.”

“오오오, 생각보다….”

“예, 작년 대비 매출은 21% 늘었고, 순익은 76%나 늘었습니다.”

“그보다 순익 비율이?”

“12%입니다. 작년 8% 대비 4%나 올랐습니다.”

짝! 짝! 짝!

나는 손뼉을 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독립한 지 불과 2년 남짓인데 순익 10%벽을 깨 버렸다. 그것도 단박에 4%나 올리다니 아무리 반도체 기반의 제조업이라고 해도 대단하다. 게다가 아직 디지털카메라의 매출은 눈곱만큼 기여한 것일 텐데.

“이 모든 게 플래시가 제품군 전체를 끌고 가는 형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앰팩, 휴대폰, 핸드 터미널, 인터넷 서버는 물론이고, 에그박스가 올해는 더 대박을 치고 있습니다.”

역시 메모리 용량이 커지면 자연스레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는 측면이 있다. 반도체를 가지고 있어야 전자 회사가 전자 회사다워진다.

“에그박스가요?”

“안 그래도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 미국에 디카 쇼 케이스를 하러 갔다가 스티브 잡스에게 잡혀서 아주 혼쭐이 났습니다. 차세대 에그박스에 대해 요청받은 숙제가 산더미입니다.”

“차세대 에그박스? 벌써요?”

기술적으로 에그박스 같은 멀티미디어 제품은 업그레이드하려면 최소 3년 정도는 필요하다. 들어가는 부품 중 CPU와 GPU도 그렇고, 부품에 맞춰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기에 서로 마일스톤을 공유하지 않고선 제품 출시가 어렵다.

“작년 말에 에그박스를 출시하고 나서 콘텐츠 시장이 열렸지 않습니까? 그게 일본 게임메이커를 자극한 모양입니다.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소니, 닌텐도, 남코 등등 일본 메이커들이 차세대 게임기와 대작 콘텐츠를 발표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래서요?”

그러고 보니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며, 닌텐도의 패미콤 어쩌고 하는 것도 1994년에 나타났던 것 같다. 원래라면 MS도 이때쯤 게임기 시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내 회사가 시장을 선점한 효과 때문인지 오 이사 입에서는 일본 메이커 이름들만 흘러나온다.

“일본 메이커들이 우리 쪽 GPU와 플래시메모리를 납품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애플의 잡스는 그걸 아는지 GPU만큼은 독점으로 납품해 달라고 하고 있고요. 차세대 에그박스로 게임만 아니라 멀티미디어 시장을 독점하겠다고 하더군요.”

잡스다운 생각이긴 하다. 그런 양반이 기획하고 있는 차세대 에그박스면 꽤나 멋지긴 할 텐데 독점은 글쎄… 고민이 된다.

솔직히 에그박스는 스티브 잡스의 OS 기술이 탐이 난 데다 애플로 복귀시켜 인연을 이어 가기 위한 목적으로 했던 공동 개발이 아닌가. 픽사에서 애플로 옮겨 갔으면 에그박스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관심이 점차 줄어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의 나비효과가 크다.

결국 OS, 납품 체인, 제조, 판매 등을 모두 엮어 내가 다 먹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독점 납품이면 파이를 나눠야 된다. 뭔가 반대급부가 있어야 할 텐데.

“독점 납품이라….”

“이 비서가 말한 올해 매출 중에 3,500억이 에그박스 매출입니다. 내년이면 더욱 커질 것 같습니다. 독점 납품과 공동 개발을 이어 나가는 것도 좋은 전략 같습니다.”

“하하, 일본 애들을 배제하는 건 뒤통수를 맞기 싫다는 건가요?”

“뭐, 언제나 그랬잖습니까. 대현전자에서도 몇 번이나 당했던 일입니다.”

오 이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몇 번이나 당했지. 초기 부품 개발에는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하고서 결국 양산 터지면 일본 반도체를 메인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개발 리소스만 빨아먹고 최종 양산에서는 ‘일본 반도체가 속도가 빠르네.’, ‘신뢰성이 좋네.’ 이러면서 한국 기업을 2차 벤더로 떨어뜨려서 총 납품 수량의 10% 정도만 할당하는 만행을 일삼았다.

실제 양산에 들어가야 돈도 되고, 양산에서 벌어지는 마이너 불량을 해결해 가며 제품 노하우를 익히게 되는데 2차 벤더로서는 그런 과일을 따 먹기는 불가능하다. 납품가만 계속 후려치고 가격 경쟁만 가속화된다.

“이번에도 그러겠죠?”

“당연합니다. 플래시나 GPU도 결국 일본 반도체 회사에서 기어 나올 겁니다. 그때 되면 우리 회사 제품은 더 이상 일본 시장에서 팔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급 물량이 넘쳐서 가격이 훅 하고 떨어질 겁니다.”

“지금까지는 일본 시장을 배제했지만 돈 많은 일본 애들 주머니를 영원히 무시하기도 아까운데, 방법이 없을까요?”

“오사카에 우리 회사 창고도 있으니 오픈마켓에 푸는 것은 어떻습니까? 여태 우리 회사가 일본 시장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잖습니까.”

오 이사의 말은 대현전자에서 휴대폰 반제품을 팔아먹던 전략이다. 일반적인 대응이라고나 할까. 휴대폰처럼 시스템에 근접한 제품이면 몰라도 반도체 부품을 그리 푸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일례로 도시바가 플래시를 풀 능력이 되면 일본 메이커는 안면을 바꾸고 수요를 도시바로 돌리게 되고 우리의 플래시 가격이 갑자기 곤두박질치게 된다. 반도체 가격이 요동치는 것이 일본 오픈마켓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플래시와 GPU 같은 고급 제품을 그리 둘 수는 없지.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소니, 닌텐도, 남코 등등… 한꺼번에 털어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21세기 역사를 계속 돌려 보았다.

“미국이면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될 텐데. 일본 시장은 참 특이해요.”

“일본 회사는 기본적으로 장기 계약을 맺지 않지요. 언제든지 돌아설 준비를 하는 겁니다. 특이할 것도 없습니다.”

“사업에 신뢰는 기본인데.”

“일본 기업은 신뢰가 아니라 갑을 관계가 우선하죠. 그들의 문화입니다. 존중해 줘야 할지는 모르겠네요.”

“같은 동양인인데 참 다르네요.”

이 비서의 말에 오 이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오 이사같이 반도체 업계에 웬만큼 몸을 담아 본 사람은 모두 그럴 것이다.

‘미국, 일본, 신뢰… 같은 동양인!’

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뭔가가 팍! 하고 떠올랐다.

짝!

“그 사람이 있었네!”

나는 손뼉을 치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네?”

“제대로 일할 사람이 있네요. 일본에서 돈주머니를 털어 줄 사람 말입니다.”

“예? 돈주머니를 털어요?”

“일단 스티브 잡스에게 말은 해 줘야겠네요. 분명히 그 양반이 이때쯤 접근했을 테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잡스에게, 아니 애플보고 에그박스 들고 일본 시장 진출하라고 해야겠네요. 엔비디아에도 똑같이!”

정공법이 아니면 우회 경로를 이용해야지. 내 반도체 부품이 미국 갔다가 다시 일본 간다고 안 될 게 뭐가 있나. 에그박스와 그래픽 카드로 부풀려졌을 뿐인데. 게다가 그걸 아주 잘 팔아 줄 사람이 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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