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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변해 버린 위치 (48/104)

제5장 변해 버린 위치

“여보세요.”

“유 사장님, 최 마담이에요.”

“수정각에서 이 시각에 무슨 일로….”

“아직 모르실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드렸어요. 짧게 말씀드리죠. 지금 당장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가세요.”

“세브란스 병원이라뇨?”

“LK에서 상을 당했어요. 현경 아가씨 남동생분이 오늘 새벽에 일을 당했어요.”

“일이라뇨?”

나는 뜬금없는 소리에 휴대폰을 들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통화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새파란 청년이 어째서 급사를 했는지….”

“급사요?”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현경 아가씨와 서로 참 잘 어울렸는데, 소개시킨 사람으로서 안타깝네요.”

“잘 마무리하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휴우, 유 사장님… 알고서 그러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가요?”

“현경 씨에게서 무슨 얘기 들었나요?”

“그건 아니지만, 가셔서 얼굴 보세요. 저는 이만 빠질게요.”

툭. 삐이익.

최 마담의 통화가 끝나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전생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래, LK 구 회장은 양자를 들여 그룹을 상속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때 아들을 잃었던가?

어디선가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내가 근무했던 회사도 아니고, LK 집안 사정을 일일이 꿰차고 있을 리 만무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 인한 나비효과일 가능성은 없다. 원래 역사에서도 벌어진 일이 분명하다.

“사장님.”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요? 술을 한잔 할 것 같은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접고 이 비서에게 돌려줬다.

“수한 씨, 무슨 일이에요?”

“아니, 개인적인 전화야. 케이는 왜 나왔어? 회의 마저 해야지.”

“쇼 케이스 전략을 논의했으면 해서요. 한데 급한 일이면 우리끼리 먼저 논의하고 보고할게요.”

“아니, 급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늘 새벽에 벌어진 일이라면 지금 가 봤자 민폐일 뿐이다. 가족들도 제정신이 아닐 텐데, 내가 가서 뭘 도와줄 수 있겠나.

나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환호했던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린 뒤 본격적으로 사업을 논의했다. 출시 일정부터 시작해서 출시 모델을 500불, 350불 두 가지로 나누는 것, 그리고 쇼 케이스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지 다각도로 논의했다. 당장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개략적인 골격은 잡아야 했다.

평소 같으면 휙휙 지나갔을 시간이 오늘따라 유독 천천히 흘렀다. 잔뜩 쌓인 메일과 보고서를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때려치우고 의자나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가 해가 떨어지자마자 이 비서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그제야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 *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입구부터 잔뜩 LK 임직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LK에서는 가족장을 치른다며,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들이 조문하러 온 사람들을 정중하게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입니다. 예를 표하게 해 주십시오.”

“아, 유 사장님이시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다행히 나는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가족장답게 매우 조용한 분위기였다.

“어찌 이런 일이….”

단에는 앳된 남학생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 학생증에나 있을 법한 사진인데 어째서 이곳에 놓여 있나 싶었다. 나는 향을 피우고, 이 비서가 채워 주는 술잔을 상에 올리고는 절을 두 번했다.

“흑흑….”

현경 씨가 상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LK 구 회장 내외는 없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 양반들이 제 정신이겠나. 혼절해 있겠지. 서로 맞절을 하고 마주 서 있지만 무슨 말을 하겠나. 퉁퉁 부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게 전부였다.

가족상이라고 하지만 내 뒤에도 조문객이 줄을 잇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옆에서 자리를 안내하는 임직원을 따라 향냄새가 진동하는 곳을 벗어났다.

“식사하시겠습니까?”

“안주면 족합니다.”

나는 억양 없는 물음에 억양 없이 대답해 주었고, 앉을 자리를 찾았는데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정헌몽 사장이다. 최 상무와 마주 앉아 반찬을 안주 삼아 소주를 한잔 하고 있다.

“정 사장님.”

“유 사장도 왔군요. 이리 오세요.”

“언제 오셨습니까?”

“저도 방금 왔어요. 한 잔 받아요.”

내가 앉자마자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준다. 상갓집에 왔으면 소주 한 잔은 해 줘야 예의 아니겠나. 우울한 분위기에 맞춰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어제저녁만 해도 제가 집 앞까지 갔었는데 말입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젊다 못해 어린 양반이 돌연사라니. 아침에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는 거야. 심장마비일 가능성이 높다더군.”

“돌연사요?”

“애지중지하던 외아들이고, 공부도 잘해서 기대가 컸는데 말이야. 안타까운 일일세.”

금수저가 돌연사라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평소 건강 검진을 철저하게 했을 텐데,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사실이긴 한가 보다.

“유 사장님께도 안타까운 일이겠군요. 재계에서도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며 다들 부러워했는데…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옆에 앉은 최 상무도 최 마담과 비슷한 말을 한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비어 버린 내 술잔을 채워 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경 아가씨와 잘 마무리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다들 그러려니 할 터이니, 세간의 눈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현경 씨와 제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말이 그리 나왔다.

“유 사장, 자네는 그리 생각할지 모르나 LK는 안 그럴 걸세. 자네는 너무 강력한 경쟁자야. 게다가 현경 씨는 장녀일세. 양자를 들여온다고 해도 그룹 승계에 잡음이 날 수 있네. LK는 그런 불씨를 가져가고 싶지 않을 걸세.”

“…….”

역시 그 이유구만. 그따위 이유로 나와 맞절을 하고서도 현경 씨는 눈물만 흘리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것인가.

나는 정 사장의 말을 흘려들으며 저 멀리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현경 씨의 모습을 바라봤다. 여태 보지 못했던 재벌가의 여식다운 모습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짜증이 난다. 내가 왜 LK를 탐내나. IMF를 지나 미국의 IT 버블의 파도만 타면 스마트 클라우드는 LK보다 열 배 스무 배로 커질 텐데.

지금 내가 그리 말한다고 누가 믿겠나. 나는 아직 재벌들 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신흥 세력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났다.

전생에 한국 대기업에 실망하고 회귀해서일까? 대기업하고 인연이 닿을 때마다 의도치 않게 파투가 난다. 빌어먹을. 심지어 마음에 드는 여자까지. 이번 생에서 운은 모두 돈에 몰빵되어 버린 건가? 아니다. 주변에 좋은 인연도 수두룩하다.

옆에 앉은 이 비서가 그 증거 아닌가.

“제 진심이 뭐든 아무 상관 없겠군요.”

“…….”

정헌몽 사장은 나를 보며 술잔을 기울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런 침묵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옆에 앉은 최 상무가 화제를 돌린다.

“여하튼, 이런 자리에서라도 유 사장님을 뵙게 되서 다행입니다. 정 회장님도 언제 한번 만나면 고맙다는 말씀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 고맙다고 하십니까.”

왜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나는 소주나 들이켜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대현과 얘기하려고 자리한 게 아니다.

“대현건설이 회생할 아이디어를 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해외 수주는 국가 보증 문제를 아직 못 풀었지만, 국내 건설은 아주 활발합니다. 당진철교에다 삼풍백화점 재건축까지….”

“재건축….”

“예. 서울시에서 대현건설에 대형 용역을 맡겼습니다. 서울 지역 안전 점검을 해 달라고 말이지요. 그중 가장 위험한 것이 당진철교와 삼풍백화점이더군요. 조만간 정부에서 재건축 컨소시움을 만들어 줄 겁니다. 대현건설은 살아날 방도가 생긴 셈이지요.”

원래 역사에서도 당진철교는 성수대교 사건과 맞물려 돌아가긴 했지만, 삼풍백화점은 의외다. 대현건설의 능력이 대단하긴 하네. 붕괴 위험성을 알아챘다는 것 아닌가.

“최 상무님, 그만하시죠. 듣는 귀가 많은데 회사 얘기를 그리 길게 하십니까.”

“감사 인사를 한 것뿐입니다.”

“그 또한 결례입니다. 언젠가는 아버님이 직접 사과하고, 감사도 하셔야죠. 언젠가는….”

“어찌 정 회장님이 직접….”

“왜요? 유 사장이 아버님께 사과받을 격이 안 된다 여기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최 상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정헌몽 사장이 나와 눈을 맞췄다. 정 사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이게 현재 유 사장의 격일세. 현경 씨가 자네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지 않겠나.”

내가 재계의 떠오르는 샛별 정도가 아니라는 뜻. LK가 정식 후계자를 잃었으니 내가 현경과 이어지면 LK그룹에 내 입김이 너무 강력해진다. 장자 승계로 왕자의 난 따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왔던 LK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다.

불과 두 달 전과는 상황이 확연히 달라져 버렸다. 이래서 정략결혼은 해서는 안 되는 거다.

“정 사장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내가 노파심에 괜한 소리를 했군. 미안허이.”

“아닙니다.”

쪼르륵.

나는 정헌몽 사장의 잔을 채웠다. 술잔을 주고받고 반복하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현경 씨는 자리로 와서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기껏해야 LK 임원들이 찾아와 감사 인사를 대신했을 뿐이다. 아쉽다. 이제 끝이라고 해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하는데 말이다.

웅성웅성.

조문객을 가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 사장이 내게 눈짓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그를 따라나섰다. 더 있어 봐야 할 일도 없고, 담소를 나눌 분위기도 아니잖나.

뚜벅뚜벅.

“둘만 얘기하고 싶으니 두 분은 차로 돌아가 계세요.”

“예.”

“네.”

이 비서와 최 상무를 돌려보내는 정 사장. 장례식장을 빠져나가 담배 연기가 자욱한 흡연실을 돌아가자 조금 조용한 장소가 나왔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정헌몽 사장이 찾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떠나기 전에 긴히 할 말이 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혹시 신성 장학생이라는 말 들어 봤나?”

“대충 알고 있습니다. 좋은 의미의 장학생만 있는 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말이 좀 쉽겠군. 그런 인물 중 한 명이 나에게 직접 접촉을 해 왔네. 대현전자의 그늘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이지.”

“무슨 일로…. 그리고 그게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범규현 박사라고, 일명 국비 유학 1세대일세. IBM에서 플래시메모리를 연구하던 양반이지.”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쯤 뒤에 V-Nand(수직 적층형 플래시)를 개발하는 핵심 개발자잖나. 1994년 말에 신성에 합류하는 양반인데….

“대현전자에 도움이 되겠군요.”

“그 말이 아니고, 범 박사는 신성으로부터 올해 귀국해 스마트 클라우드에 위장 취업을 강요받았다고 하더군. 양심에 걸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그간 신성에서 받은 돈 문제가 얽혀 있어 내게 도움을 요청한 거지. 믿어만 준다면 대현전자에서 플래시 양산에 성공하겠다고 하더군.”

“우리 회사에 스파이를 심으려고 했다고요? 그게 통할 것….”

나는 석박사급을 뽑을 때는 내가 직접 면접을 본다고 말하려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신성처럼 리스크 관리에 특화된 집단이 그런 식의 일 처리를 할 리가 없다. 내가 직접 면접을 챙긴다는 것과, 내가 범 박사의 이력을 살피다 신성 장학생인 걸 알아챌 수도 있다는 것을 신성이 모를 리 없다.

“내가 범 박사를 숨기고 이래저래 알아보았네. 그랬더니….”

“군대… 말씀이신가요?”

“알고 있었나?”

“아닙니다. 넘겨짚은 겁니다.”

“신성의 전략은 두 가지. 최선은 자네를 오지로 발령 내 자네 능력 발휘를 막으면서 정보를 빼내는 것. 설사 그게 실패해도 그걸 빌미로 자네 회사의 특례 혜택을 없애 버려 타격을 주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어이가 없군요.”

“자네가 어이없이 특별하기 때문이지. 재계의 누구나 다 알고 있네. 스마트 클라우드의 핵심 기술과 전략은 모두 자네의 머릿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일세. 가장 큰 장점이자 가장 큰 약점이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아는 군 장성이 있네. 내가 군대를 빼….”

“군대는 가야죠.”

“응? 군대를?”

내 말에 흠칫 놀라는 정 사장. 왜 그리 놀라나? 자신도 군대를 다녀왔으면서. 대현그룹의 총수 일가는 모두 군대에 다녀왔다. 합법적 특례가 아니라면 군대는 후딱 갔다 오는 게 답이다. 특히 신성이 약점으로 파고들기로 작정을 했다면 더더욱 미룰 일이 아니다.

“살펴 가십시오. 조만간 답례도 하겠습니다.”

나는 정 사장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이래저래 내 편에 서 주려고 자신의 시간도 써 대는 사람 아닌가. 그래, 이번 생에 내 인복은 그리 나쁘지 않다.

나는 서둘러 정 사장을 돌려보냈다. 저 멀리 누군가 나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 또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정 사장도 그 인기척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수한 씨.”

“현경 씨.”

“죄송해요. 보는 눈이 많아서 오해를 받을까 싶어 말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흑….”

착하지만 나약한 여자. 내가 훅 하고 말을 내뱉어도 화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나는 눈물이라도 닦아 주고 싶었지만 모른 척했다. 이미 너무 늦었다. 아니,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다.

“착한 딸 되시고, 좋은 인연 만나세요.”

“…….”

“현경 씨는 어땠을지 몰라도 제게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

“저도 사업적으로나마 LK를 돕겠습니다.”

1990년대 신파극은 이쯤 하자. 반려를 얻는 데 축복은커녕 견제의 눈길을 받고 싶지는 않다.

나는 현경 씨를 뒤로하고 그곳을 나왔다. 현경 씨를 가까이하고부터 내 감각이 상당히 무뎌졌다. 군대 문제가 신성이 꾸미는 일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회귀 초기였다면 촉이 간질간질했을 텐데 말이다.

띠. 띠. 띠. 띠.

나는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케이, 나야.”

-무슨 일이야? 급히 나가더니.

“방금 일 마쳤어. 그건 그렇고, 부탁이 있는데.”

-으잉? 부탁은 정말 오랜만이네! 무슨 부탁?

“장군님 힘 좀 빌려 줘.”

-장군님? 누구… 아! 내 아버지?

“응. 나 군대 좀 가게.”

-에에에?

    • *

나는 지금 눈앞에 커다란 바윗덩이들이 늘어선 꼴을 보고 있다. 그중 가운데 있는 바위가 입을 열었다. 이 비서가 이들을 영국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 회사 입구에서 드잡이가 일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그래, 군대를 가고 싶다고?”

“장군님,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석 달 만에 사나이로 바꿔 놓겠습니다.”

“장군님, 저라면 한 달이면 족합니다.”

“그만! 이 사내는 정말 군대를 가는 거야. 민간 군사 기업에 지원한 게 아니라고.”

“아니 왜? 남자라면 당연 세계 평화를 위해 싸워야 하는데!”

케이의 아버지 루이스 전(前) 장군이 한마디 하면 양옆의 두 바윗덩어리가 떠들어 댄다.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양반들인지 서로 말은 저리해도 묘하게 돈독해 보이는 사이다. 내가 영어를 알아듣는 게 이리 고역일 줄은 몰랐다.

“수한 씨 이상한 데 보내실 생각이면 꿈도 꾸지 마세요, 아버지! 그냥 편한 부대로 보내 주세요. 주한 미군에 아시는 분 많잖아요.”

“헛! 남자들의 얘기다. 너는 가만있어!”

“칫!”

나름 엄한 아버지인가 보다. 케이가 저 정도의 반항으로 그친다면 매우 양호한 거다.

“다시 묻지. 군대에 가고 싶다고?”

“예.”

굳이 이런 걸 묻기 위해서 한국엘 오다니.

“군대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토를 수호하는 숭고한 사명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순간 ‘대한민국은 모병제가 아니라 징병제입니다.’라고 말하려다가, 불쑥 입영 통지서에 적힌 말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세계 평화 같은 틀에 박힌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드는군.”

세계 평화라니. 자칫 말 잘못하면 카투사가 아니라 정말 미군으로 끌려갈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붙이길 참으로 잘했다. 국적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한 가지만 더 묻지.”

“예.”

“케이를 어찌 생각하나?”

“헉! 아버지!”

“남자들끼리의 얘기라고 말했다! 듣기 싫으면 나가!”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파트너!”

“예. 사업적으로 매우 좋은 파트너입니다. 좋은 동업자죠.”

루이스 장군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기에 나는 재빨리 ‘사업적으로’라는 말에 동업자까지 갖다 붙였다.

“뭔 말이 그런가? 사업적 파트너라니. 케이를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잖나.”

“루이스 장군님, 저에게 사적인 감정을 물으려고 오신 게 아니잖습니까. 파라곤의 이사로 저를 도와주시는 것 아닌가요?”

“으흠….”

“어설픈 단정으로 케이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케이는 저에게 매우 소중하고 동료 이상으로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도 보셨잖습니까.”

진심이다. 내가 뭐하러 케이와 사랑 놀음을 하나. 난 올라가야 할 계단이 수두룩하며, 그때 케이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줄타기를 해서는 안 된다.

“장군님, 바람둥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케이에게 관심은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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