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달아난 새를 처리하는 방법
오랜만에 케이와 둘이 자리를 함께했다. 2주 가까이 전화만 하고 얼굴 한 번 보이지 않더니 불쑥 찾아왔다. 오늘은 김 과장이 귀국하는 날. 스마트 클라우드 디지털카메라의 향방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날이니만큼 케이도 안 오려야 안 올 수 없었나 보다.
“어서 와, 케이.”
“흥! 요즘 기분이 좋은가 봐요.”
“요즘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잖아. 왜, 버지니아 트레이딩은 잘 안돼?”
“잘 안되긴요. 너무~ 잘 나가서 탈이네요.”
내가 피식 웃으며 물으니 케이가 장난스럽게 받아친다. 그녀의 유쾌함은 언제 어느 때나 변함없다. 요즘 내가 현경 씨와 자주 만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케이는 이처럼 말로만 나를 툭툭 쳐 대는 것이 전부다. 다행이다. 동업자로서 선을 지켜 주고 있다.
“여하튼 고마워. 코닥을 물고 들어올 때 파라곤이 나서 줄 줄은 몰랐어.”
파라곤이 중간에 끼어드니 코닥과의 협의는 급진전을 했다. 경영 상태가 내리막이던 코닥으로선 파라곤이 스마트 클라우드와 연합하면 물주로서의 역할을 해 주겠다고 나서 주니 백기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격이나 다름없다. 파라곤의 물주들은 내가 진출하는 사업 영역에 또 한 번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아니라 윌슨이 적극 나섰어요. 벌써부터 투자자들이 스마트 클라우드의 디지털카메라가 언제 출시되냐고 아우성이에요. 잡스도 수한 씨한테 전화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알았어?”
“당연하죠. 애플에 복귀했잖아요. 랩톱 파워북(노트북의 시초) G3에 디지털카메라와 연계되는 앨범 기능을 추가하겠다고 은근슬쩍 투자자들에게 정보를 뿌리고 있다니까요. 스마트 스토어에 디지털카메라가 입점하는 순간 동시 출시하겠다고 말이에요.”
일을 논하다 보니 케이의 표정이 점점 밝아진다. 자신은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케이도 일 중독자가 분명하다.
“하하, 잡스답네. 벌써 디카와 랩톱의 연계를 계획하고 있어?”
“그게 다~ 수한 씨와 재훈 씨를 믿고 그러는 거예요.”
“재훈이까지?”
“그럼요. 전화도 수십 통은 주고받았을걸요. 앨범 기능은 개인 홈페이지를 잘 꾸밀 수 있는 핵심 기능이라며, 파이오니어에서 홈페이지 제작 프로그램을 출시해 달라고 공식 요청하고 있다니까요.”
“오, 천잰데? 그런 생각을 어찌했대?”
역시 잡스답다. 첨단 IT 기술이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짚어 내고 있음이다. 나중에 스마트폰 시대가 오면 이 동맹을 어찌할지 고민이다. 결국 나는 잡스의 패쇄적 iOS냐, 개방적인 안드로이드 OS냐를 두고 선택해야 할 텐데… 경쟁자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멀티미디어 시장을 키우는 것까지는 같이하는 게 맞는데 말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차츰 생각을 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아유,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얘기해 봐요. 디지털카메라 언제 출시할 거예요? 코닥도 합류했으니까 명품이 나올 거 아니에요.”
어느샌가 케이는 동업자로서의 케이로 돌아와 있다. 그녀의 스마트 스토어에 품목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는 사업가 말이다.
“글쎄. 시제품은 8월 말이면 되지 않을까 싶어. 최소 200만 화소는 달성해야 하거든.”
“에헥! 시제품이 8월이면 쇼 케이스는 언제 해요? 11월에 입점하려면 시간이 없다고요!”
“왜 11월에 그리 목을 매? 12월에 해도 되잖아.”
“투자자들은 미신적인 믿음이 강하다고요. 여태 수한 씨의 제품은 모두 11월에 오픈했는데 이번에는 12월? 안 돼요. 무조건 11월에 쇼 케이스 하자마자 입점시켜야 해요.”
“미국 사람들이 무슨 미신을 믿어. 한두 달은 차이 날 수도 있지.”
“굳이 미신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건 내가 투자할 때도 중요하게 보는 점이니까. 건실한 기업의 상징은 언제나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 11월엔 언제나 스마트 클라우드의 한 해의 끝과 시작이 교차해야 한다고요.”
“내가 참 많이 배운다니까. 금융 수학에다 이젠 미신까지!”
“미신이 아니라니까요. 말마따나 200화소가 문제라면 100만 화소로 하면 어때요? 그거 사진 해상도 말하는 거 맞죠?”
“이보세요, 케이 님. 당신이 미신 전문가이듯 난 기술 분야 전문가라고요. 100만 화소는 CCTV에나 쓸 거고 200만 화소쯤은 되어야 디카에 쓸 만하다니까요. 100만 화소 사진은 화질이 꺼칠꺼칠해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더러워진다고요.”
200만 화소는 되어야 육안으로 봤을 때 화질이 매끈하다고 느낀다. 아무리 중저가 디지털카메라를 지향한다고 해도 일본 애들이 올인하고 있는 CCD 기반의 디카와 화질에서 너무 차이가 나면 제품 자체가 경쟁이 안 된다. 원래 역사에서 100만 화소 저가 디카들이 소비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이유다.
“아우, 그러면 150은 안 돼요? 그것도 안 되면 180은? 11월에 맞춰야 한다고요.”
“200ppi(인치당 200개 화소)를 달성하려면 1600 곱하기 1200은 돼야 해. 정확히는 192만 화소지만 공정 중에 죽는 셀 감안하면 200만은 되어야 한다고.”
“CCTV에서는 100만 화소를 쓴다면서요.”
“그건 CCTV의 사용상 한계 때문이야. 어두운 데서 화상을 센싱해야 하는 한계도 있고 동영상을 처리해야 하니 ISP 처리 속도가 못 따라간다고. CIS는 빛을 받아들이는 센서고, 그걸 이미지로 바꾸는 것은 ISP, 즉 이미지 프로세서거든. 디카는 스냅 샷을 찍는 제품이니까 센싱 개수를 많게 해서 선명한 상부터 얻어야 해.”
“몰라요, 몰라. 난 그런 거 모르겠고요, 11월! 11월엔 물건 받아야 한다고요.”
“하하하. 알았어, 알았다고.”
결국 케이는 귀를 막고 고개를 마구 흔들며 11월에 양산해야 한다고 우긴다. 케이가 이리 집착하는 것을 보니 11월이 중요하긴 중요한가 보다.
케이의 요구에 맞춰 주려면 연구소 CIS 개발 파트에 21세기 천기누설을 좀 해 줘야겠다. 사실 CIS 소자는 반도체를 해 본 사람에게 그다지 어려운 공정이 아니다. 물론 1000만 화소를 넘는 CIS 소자는 기술 혁신을 이뤄야 하지만, 초창기 CIS 개발 시절 500만 화소까지는 수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개발을 해 댔다.
디지털카메라의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CIS 기반의 카메라는 더욱 간단해서 어안 렌즈를 통해 빛이 들어오면 단위 셀 영역에서 빛을 전자 신호로 변환한다. 이후 이미지 프로세서가 이 신호를 받아 노이즈를 제거하고 빛의 경계면을 두드러지게 만들면 사진이라는 결과물이 나오는 거다.
문제는 빛은 많이 들어오면 좋은데, 빛을 많이 받자고 CIS 칩을 무한정 크게 만들 수 없다는 거다. 칩 크기는 반도체에서 곧 비용을 의미하니까. 그래서 단위 면적당 센서의 개수, 즉 화소를 늘리는데 그걸 너무 작게 만들면 단위 셀이 받아들이는 광량이 부족해 노이즈가 심해진다.
화소 수와 화소의 물리적 크기 간의 상관관계는 때론 1300만 화소의 카메라보다 800만 화소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이 더 잘 나오는 것으로 대변된다. 특히 광량이 충분하지 않은 실내에서는 오히려 고화소수 카메라가 불리한 측면도 있을 정도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개발자들도 CIS 화소의 사이즈와 노이즈 제거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게 뻔하다.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지. 화소의 최적 사이즈는 1.25마이크론. 화상 노이즈는 일곱 개의 픽셀 데이터를 합쳐 하나의 픽셀 데이터를 추출하는 방식을 쓰면 완벽히 해결된다는 것을 말이다. 거의 20년에 걸쳐 대부분의 업체가 표준으로 선택한 방식이니까 그보다 완벽할 수는 없을 거다. 이걸 어떻게 자연스레 알려 주나 하는 게 문제다.
- *
“벌써 왔어요?”
케이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하고 올라오니 어느새 김 과장이 조너슨, 차효철과 함께 사장실 입구에 도착해 있다.
“복귀했습니다. 예상보다 오래 머물러 죄송합니다.”
“죄송이라뇨. 김 팀장, 정말 수고했어요. 99억에 특허를 20건이나 매입하고, 크로스 라이선스까지 맺었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
“사장님, 지금 저를 과장이 아니라 팀장이라고 부르셨습니까?”
“그게 맞는 호칭입니다.”
99억은 표면적으론 특허 매입비용이었지만 실상은 동맹에 대한 계약금이나 다름없었다. 동맹이라는 정치적 계약보다, 김 과장이 정말이지 귀한 기술 특허 20건을 쟁취해 왔기에 이제부터 팀장이라 부를 거다.
엔지니어의 틀을 벗었다고나 할까. 크로스 라이선스 체결로 특허를 매입할 이유가 사라졌지만, 김 팀장은 양사의 관계를 확고히 한다는 측면을 강조해 특허 20건을 쟁취해 왔다. 은근슬쩍 미리 보기, 영상 편집, 화면 밝기 변경 등등 주옥같은 특허를 가져온 것이다. 코닥엔 실시권을 유지해 줬지만, 차후 이 특허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면 꽤나 후회하게 될 것이다. 김 팀장은 직감적으로 그 특허들의 사업적 가치를 알아봤다.
“보여 드릴 것이 또 있습니다. 조너슨, 열어 보시죠.”
“하하, 이제 제 차례인가요?”
조너슨이 열어젖힌 상자에는 정성스레 깎은 플라스틱 목업이 들어 있었다. 딱 봐도 기존의 목업 카메라에서 몇 단계는 업그레이드되었다.
“코닥 엔지니어와 같이 작업했군요.”
“예, 그렇습니다. 미스터 차도 정말 고생했고요. 자신하건대, 디지털카메라에서 필요 없는 부분은 모두 제거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조너슨 옆에 있던 차효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이지 명품이었다.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았다면 21세기 디지털카메라의 끝판왕이 되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두꺼운 스마트폰의 앞면을 볼록하게 깎았다고나 할까? 미려한 곡선의 물체를 어찌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머나, 이거 신제품이에요?”
옆에 있던 케이가 목업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하하하, 목업이야. 그냥 껍데기에 불과해.”
“아우, 껍데기든 뭐든 정말 예뻐요.”
그녀의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착착 감기는 그립감이 느껴질 정도다.
“자, 자! 회의실로 갑시다. 그동안 연구소에서 고생한 일도 들어 줘야죠.”
나는 사람들을 양 떼 몰듯 몰아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제 사전 준비는 모두 끝난 것이나 다름없고, 연구소의 CIS와 제품 개발팀의 ISP에 대해 21세기 천기누설을 해야 할 시간이다.
CIS 시제품을 두고 칩의 크기, 화소의 크기, 화소의 최적 개수, 회로 배치 등등을 논의하는 데만 2시간. ISP 시제품을 두고 노이즈 제거 알고리즘, 신호 오류 허용 오차, 경계선 처리법 등등을 논의하는 데 2시간. 장장 4시간을 토론했다. 케이는 회의 중에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고, 회의 중간중간 GPU 담당 엔지니어를 비롯해 해당 분야 전문가를 합류시켰다.
“휴, 결국 CIS는 화소의 최적 사이즈부터 지정하고, ISP는 화소 데이터 평균치 추출부터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동의하시나요?”
“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정해야 추가 최적화 작업을 할 수 있어 보입니다.”
“개발팀도 동의합니다.”
겨우겨우 내가 원하는 두 가지 factor에 대해 대규모 실험을 하자는 합의에 다다랐다.
“그럼 화소 사이즈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실험하실 건가요?”
“아까 논의한 대로 1마이크론부터 1.5마이크론까지 0.1마이크론 단위로 하겠습니다.”
“중간 지점인 1.25는 집어넣죠.”
“예, 그리해야겠군요.”
“그럼 개발팀은 ISP의 픽셀 평균치 추출은 어떻게 실험을 할 건가요?”
“3에서 9포인트까지 한 점씩 늘리면서 최적점을 찾겠습니다.”
“그럼 7 곱하기 7 해서… 총 49개의 조합이 나오는군요.”
“…….”
“엔지니어 여럿 갈아 넣게 생겼네요.”
“할 수 없죠.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
내가 최적점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엔지니어들은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미련을 가진다. 이번 실험으로 화소 사이즈는 1.25마이크론, 일곱 개의 픽셀을 합치는 조건이 노이즈 제어에 최적이란 걸 알게 될 것이고, 스마트 클라우드 개발자들은 또 한 가지의 일급비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좋은 데이터 나오길 바랍니다. 파이팅!”
“파이팅!”
“수한 씨, 파이팅!”
파이팅을 외치니 모두들 따라 외쳤다. 졸고 있던 케이가 당황해 조금 딴소리를 했을 뿐이다.
- *
호암 박물관.
이 회장이 그룹 본사 회장실에 출근하지 않은 게 벌써 석 달이 다 돼 가고 있었다. 이틀에 한 번 이수학 비서실장이 와서 업무 보고를 했는데, 이 회장은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국책 과제에서 신성은 관공서 전산 서버 프로젝트를 따냈고 향후 연매출 1천억은 무난히…(중략)… LK는 CCTV를, 대현은 차량용 내비게이션을, 스마트 클라우드는 CIS 모듈에….”
“그만, 그만.”
“예, 회장님.”
“다 됐고, 스마트 클라우드가 뭘 어쨌다고? 플래시를 LK와 대현에 공급한다고 했나?”
“예. 라이선스 계약이 아니고 납품을 받는 거라 기술 이전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줄 물량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휴대폰이며 서버에 플래시가 필요하다고 한 쪽은 우리 신성이 먼저 아닌가!”
“그쪽도 용인의 2공장이 돌아가는 7월쯤에 공급한다고 합니다. 신성도 그때쯤 요청을 하면 들어….”
이 회장은 그룹 비서실장의 입에서 스마트 클라우드로부터 플래시를 공급받자는 뉘앙스의 말이 튀어나오자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자존심 문제를 넘어 분노가 치솟았다. 여태 신성이 반도체에 투자한 돈이 얼마이며, 수재라는 수재는 모두 스카우트하지 않았나.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나! 대체 신성은 뭘 하고 있는 건가? 반도체만큼은 우리가 대한민국 최고라고 하지 않았나!”
“여전히 DRAM은 최고이며 플래시 또한 연내에 개발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텅! 텅! 텅!
“연구! 연구! 연구! 엔지니어들 얘기를 하루 이틀 듣나? 개발하고서 양산하는 데 적어도 석 달은 넘게 걸리는 거 몰라? 연말에 개발 완료하면, 장사는 내년에 한다는 말이잖나! 그동안 스마트 클라우드는 더 먼 곳으로 달아날 거야. 이건 신성의 위기라고, 위기!”
이 회장은 답답했던지 탁자를 있는 힘껏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몇 달 전에 플래시 라이선스를 얻겠다고 유수한을 협박했다가 된통 당했는데, 그 바람에 타사가 플래시를 공급받는 단계까지 왔음에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게 되었다.
이 회장은 일본의 인맥을 통해 도시바에도 손을 내밀어 보았다. 한데 플래시만큼은 도시바도 개발 중이라며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기술료를 높여 불러도 난색을 표할 뿐이었다. 결국 플래시에 관한 한 스마트 클라우드가 2~3년은 앞선 게 분명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LK 구 회장이 딸아이를 내세워 유수한을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우리 쪽도 사적인 관계로 접근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내 딸아이라도 만나게 하자는 건가?”
“헛, 무슨 말씀을…. 절대 그런 말씀이 아니고, 유수한의 측근을 회유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텅!
“닥치게! 아직도 상대를 모르나? 그놈의 측근은 모두 지푸라기야! 하등의 쓸모없는 지푸라기! 모든 것은 그놈의 머릿속에서 나온다고!”
“으흑.”
“그놈을 뛰어넘는 기술자를 데려오든지! 아니면 그놈을 막아야 하네! 한심하구만. 갓 대학 졸업한 애송이 하나 어쩌지 못해서 쩔쩔매는 꼴이라니.”
“죄송합니다.”
“대현의 정 회장만 아니었으면… 어휴, 그 양반… 달아나는 새는 죽여 버렸어야지. 쯔쯧, 이리 키워 버려서 어째.”
이 회장은 답답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박물관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수학의 머릿속에도 뭔가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잡힐 듯 말 듯.
‘갓 대학 졸업한 애송이… 지푸라기… 정 회장… 달아나는 새…!’
어느 순간 팍 하고 기막힌 아이디어가 이수학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회장님!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 없애 버리기라도 하자는 건가?”
“그자를 묶어 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합법적으로 말입니다.”
“합법적? 혹시….”
“예, 군대입니다. 군대로 보내 버리고, 우리 쪽 인원을 스마트 클라우드에 입사시켜 정보를 빼오면 플래시 따위는 금방입니다.”
“군대 빼는 건 돈만 있으면 쉬운 일이네.”
이희건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병역을 회피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으니까.
한데 이수학은 단언하듯 말을 이었다.
“제가 그자와 같이 출국해 봐서 압니다. 공항에서 병무 신고서를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대현전자의 산업기능 특례 대상자로 있다가 그 효력이 상실되었습니다. 특례 대상은 근무지를 이탈하면 바로 입대해야 하는 규정이 있으니 병무청을 잘만 찔러 대면 식은 죽 먹기입니다.”
“잘할 수 있겠나? 우리가 끼어들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돼. 그러면 스파이, 아니 기밀을 빼내려 하는 걸 눈치챌 걸세.”
“염려 마십시오. 하반기 공채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한 방에 터뜨리겠습니다. 놈을 군대로 보내는 즉시, 우리 쪽 기술자를 입사시키면 문제없습니다.”
“타이밍 정확히 맞추게. 그놈이 신입사원 면접도 직접 본다고 하잖나? 만에 하나라도 실수는! 실수는 절대! 안 돼!”
이 회장은 이번에도 일이 틀어지면 곤란하다는 듯 실수라는 단어를 재차 반복했다. 이수학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자 이수학이 고개를 바짝 숙이며 다짐하듯 말했다.
“실수할 일 없습니다. 다각도로 조여서 반드시 군대로 보내겠습니다.”
“진제대 상무를 비롯한 특급 임원들에게 단단히 이르게. 정보를 물어다 줄 테니 플래시 양산을 올해 말에는 시작할 것이며, 2년 내에 세계 1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네. 못하면 짐 싸서 돌아갈 준비 하라고 전하게!”
“예, 회장님.”
이 회장은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왠지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플래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활용도가 지극히 높은 반도체. 그 시장을 떡 주무르듯 할 것을 상상하니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 *
LK 아트센터.
나는 현경 씨와 함께 데이트를 빙자해 호사를 즐기고 있었다. ‘바람개비’라는 현대 무용극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몸동작이 얼마나 강력한 의미 전달을 할 수 있는지 깨닫는 중이다. 무용수들이 놀이터에 있는 정글짐처럼 생긴 구조물 사이로 바람개비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팸플릿에 적힌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 의식보다 재벌들이 이런 럭셔리한 공연을 저들끼리 잘도 즐기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잘 모르는 현대 무용도 이럴진대 클래식 발레는 또 얼마나 멋질까? 일단 눈과 귀가 무척이나 즐겁다.
둥둥두두두, 둥! 촤아앙!
삐이이익!
“브라보! 브라보!”
짝! 짝! 짝! 짝! 짝!
본무대가 끝나고 앙코르 공연까지 마치자 사람들이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휘파람으로 환호를 대신했다.
“어떠셨어요, 수한 씨?”
“아주 좋았어요. 현경 씨 덕분에 호사를 즐겼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하네요. 학생 주제에 이런 비싼 공연을 본다고 하실까 봐 솔직히 걱정했는데.”
“문화란 단기간에 발전하는 것이 아니죠. LK에서 이런 공연을 지원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격을 올리는 일입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수한 씨는 보는 눈이 좀 다르신 것 같아요.”
LK의 문화 지원 사업은 꽤나 마음에 든다. 미술계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소유할 수 없는 공연 예술을 지원하고 있으니 지원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 대기업들의 문화예술 지원은 미술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방식 또한 총수 일가가 직접 미술관을 운영하는 형태이지 않나. 미술품의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올라가니 재산 축적, 돈세탁, 상속, 탈세, 심지어 로비에도 이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반해 음악, 오페라, 뮤지컬, 발레, 연극 같은 공연 예술은 보는 이에게 감동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주기에, 공연을 기획하거나 실행하는 예술가가 한국인이라면 점진적이나마 후원하는 기업과 한국 전체의 이미지를 올려 주는 역할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재의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제품은 럭셔리하고 품위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선정에 각 기업들이 후원하는 이유이며, 2000년대 중국이 국립무용단의 국제 순회공연에 수천억 단위의 돈을 쏟아붓는 이유이기도 하다.
솔직히 1~2년만 더 지나면 스마트 클라우드도 해야 하는 일이다.
“무대 뒤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그래도 될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혹시 바쁘시면….”
“아니에요. 안 바빠요.”
나는 현경 씨 덕분에 무대 뒤쪽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김 선생님, 오늘 공연 정말 멋졌어요.”
“어머! 어서 와요, 현경 씨.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온다 온다 하더니 이제야 보네요.”
“잘 지냈어요. 여하튼 제 옷까지 입어 주시고 감사해요.”
“현경 씨 옷이라서가 아니라 옷 자체가 좋아서 채택된 거니까 저에게 고마워할 것 없어요. 극의 분위기와 완벽히 일치해요.”
현경 씨의 대화법은 상당히 독특하다. 분명히 LK 집안에서 후원하는 공연임을 서로 알고 있음에도 갑과 을이 바뀐 듯한 느낌이다.
미국에서 패션을 전공하고 있다더니 공연복을 직접 디자인해서 지원했나 보다. 현경 씨가 만든 옷은 무용수의 등 뒤가 훤히 드러났는데, 전혀 야하게 보이지 않는다. 주름선이 예술이라 춤 동작에 따라 보일 듯 말 듯 하늘거리는 것이 압권이었다.
“주름선을 조금 좁힐 걸 그랬나요?”
“주름선은 아주 좋아요. 다만 관객들 시선이 너무 등 뒤로만 가서 정면으로 시선을 끌어올 포인트가 있으면 좋겠어요.”
무용수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후끈 달아올랐던 무대 감정을 식히고 있는 무용수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연출가 선생의 말이 내 뒤통수를 콕 하고 찔렀다.
“현경 씨, 그러고 보니 뒤에 계시는 분은?”
“인사하시겠어요?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 사장님이세요. 수한 씨, 이쪽은 LK 창작무용단 김자현 선생님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공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내가 인사를 하니 곱게 늙은 선생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면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현경 씨가 귀국한 이유가 있었구나.”
“…에?”
“느낌이 참 좋네요. 마스크도 좋고 체형도 반듯하시고 무용수를 했어도 괜찮았겠어요.”
공연하는 사람이라서 그럴까?
무용수를 픽업하듯 손가락으로 네모 앵글을 만들어 이리저리 나를 살펴보았다. 현경 씨만 들리게 ‘잘 골랐네.’ 하는 말도 덧붙이는 것 같다.
“선생님….”
“호호, 내가 축가는 못 불러도 축하 공연은 해 줄 테니 꼭 불러요.”
“그리 농담하시면… 만난 지 이제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머, 두 달씩이나? 그럼 집안 어른도 뵈었나요?”
“…….”
“바쁘시죠? 단원들 회식도 있으실 테고…. 저희는 이만.”
“호호, 잘 가요. 좋은 시간 보내요.”
현경 씨는 계속 농담을 해 대는 선생이 부담스러운지 내 팔목을 잡고 휙 하니 무대 뒤를 빠져나왔다. 공연자 전용 홀을 나와서야 내 팔을 잡았다는 걸 느꼈는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슬며시 팔을 놓았다.
“늦었네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뇨, 차가 올 거예요.”
“데려다줄게요. 비도 올 것 같은데.”
“예….”
이 여자나 나나 연애를 글로 배운 것이 분명하다. 뭐랄까? 진도가 안 나간다고 해야 하나? 정말 참하고 괜찮은 여자인데, 뭐부터 시작해야 진도를 나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책이나 드라마에서 봤던 재벌가 여식은 원래 이렇지 않은데 말이다. 그것도 그렇고, 내가 전생에선 여자를 어떻게 꼬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딸깍.
‘다음번 데이트에는 뭘 하자고 할까?’
차에 앉아 운전대를 잡아도 딴생각이 들어서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밤인데 안전 운전해야지. 초여름답게 날씨 또한 변화무쌍해서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수한 씨, 머리 아파요?”
“아뇨, 아뇨.”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어떡해요.”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니 더 힘이 나는데요. 출발할 테니 안전벨트 하세요.”
“예.”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언제나 ‘예’로 끝나 버리기에 화제가 이어지질 않는다.
뭐, 그것도 현경 씨의 매력이고, 실은 그 점이 마음에 든다.
- *
다음 날.
“출근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기분 좋게 출근했는데 책상 앞에 다다라서 바짝 얼어 버렸다. 기분 나쁘게도 병무청이란 글씨가 찍힌 등기 우편이 보이고, 그 안에 있는 연두색 종이를 확인하는 순간 인상을 확 구겼다.
「귀하는 체력과 자질이 남달리 우수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토를 수호하는 숭고한 사명을 받아 현역병으로 입영하게 되었습니다.」
입영부대: 육군훈련소
입영일시: 1994년 9월 XX일 14:00
모이는 장소: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사람을 놀리는 듯한 이 문구는 뭐지? 그래, 왜 안 오나 했다. 이젠 특례 대상도 아니고 휴학한 지도 오래됐잖아. 아무리 그래도 입영 통지서를 불과 한 달 남짓 앞두고 발송하는 게 어디 있어? 후다닥 연기 신청부터 해야겠다.
군대를 빼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결국 갔다 오긴 해야지 싶다. 회사에서 사장이 도덕성 문제로 괜히 꼬투리 잡히면 조직 전체로 퍼질 수 있다. 재무는 물론 다수의 하청 업체와 일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신상필벌이 엄격한데, 내가 예외가 되면 안 된다. 한데 지금 군대를 가면 곤란하고, IMF는 넘기고 가든지 해야 할 것이다.
삑. 삑.
“이 비서, 잠시만요. 나 좀 도와줘요.”
-옙.
내선 전화로 이 비서를 부르자 30초도 지나지 않아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 입영 통지서가 왔는데, 연기 좀 부탁합니다.”
“그것 때문에 부르신 줄 알았습니다. 안 그래도 급히 알아봤습니다만….”
이 비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나요?”
“최근 연예인 중에 누군가 무릎연골 수술로 군대 면제를 받은 사건이 드러나서 병무청이 대대적인 감사를 하고 있답니다. 사회 지도층 자녀들도 상당수 병역 회피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고 언론에서도 떠들고 있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저도 그게 좀 의외였는데, 사장님께서 대현전자의 산업기능 특례로 계셨잖습니까. 그게 대현전자를 떠나면 바로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더라고요. 지금까지 입대가 연기된 것조차 병무청은 특혜 의혹이 있다는 의견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연기를 해 달라는 건데.”
“협의해 보겠습니다. 한데 병무청 담당자들이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외려 입대를 하지 않으면 스마트 클라우드의 특례자 정원을 당장 줄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와 개발팀에 대상자들이 꽤 있는데 걱정입니다.”
이 비서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뭔 문제만 터지면 협박부터 하는 공무원들이라니. 지금 개발자들 특례를 없애 버리면 어쩌나? 대부분 대상자들은 각 프로젝트에서 주축 역할을 하고 있는 석박사들인데. 프로젝트 말아먹는 일이다.
“담당자 누군지 알려 줘요. 내가 직접 전화할 테니까.”
“안 됩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컨택하시면 오히려 담당자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집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쩝.”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오늘따라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다. 문득 전생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연예인 병역 회피 사건이 1994년이었나? 1992, 1993년 아니었나?
하긴, 2000년대 초 가수 유준승 병역 회피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매년 심심찮게 일어났던 일이긴 하다. 그러고 보니 같은 유씨. 기분 나쁘네. 정말 군대는 꼭 다녀와야겠다. 단, IMF 끝나고!
“꼭 전해 줘요. 내 명예를 걸고 군대 꼭 간다고. 1998년쯤 간다고 혈서라도 써 준다고 해요.”
“뭐, 그렇게까지야.”
“에휴. 그럼 그리 처리해 주고요, 난 개발 회의 들어갑니다.”
“예, 이미 회의 셋업은 마쳤습니다. 들어가시면 기분이 확 풀리실 겁니다. 오늘 간사는 차효철 사원입니다.”
“으흠?”
이 비서는 그리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차효철이 벌써 간사를 한다고? 혹시 시제품이 벌써 나왔나? 하긴 이번 주가 8월 첫 주이긴 하다.
뚜벅뚜벅. 자박자박.
딸깍.
나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나에게로 쏠렸다.
“어서 오세요, 수한 씨!”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케이와 오 이사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자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다들 기쁨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차효철은 잔뜩 긴장해 얼어 있고, 와중에 권 부장은 좋아 죽는다.
“오옷! 어디 있어요? 시제품 어디 있습니까?”
넘겨짚는 내 말에 좌중이 떠들썩해졌다.
“어우, 누가 정보를 흘린 거여?”
“나 부장님 아닙니까?”
“에이, 권 부장이었구만!”
“하하하하. 사장님 숨넘어가시겠네요. 꺼내세요, 김 팀장님.”
오 이사가 활짝 웃으며 재촉하자 김 팀장이 U 자형 테이블 아래에 있던 상자를 꺼냈다. 그러곤 나를 향해 플래시를 찰칵! 하고 터뜨렸다.
“오오오옷!”
사람들 손을 거쳐 내게 전해진 디지털카메라. 액정 화면에는 내가 놀라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각형 액정을 감싸고 있는 원형 조그셔틀과 선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화면 밝기, 이미지 확대, 색감 등등이 자유자재로 변한다. 디자인팀의 아이디어를 100% 제품에 담아냈다.
차효철을 간사로 뽑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제품 설명은 필요 없었다. 대박! 대박!
“사장님, 저희가 최적점을 알아냈습니다. 화소 1.25마이크론에, 픽셀 일곱 개 평균치 추출! 그 뒤로 최적화는 술술 풀려 가더군요.”
“시제품이 예상보다 보름은 빨리 나왔습니다. 디자인팀도 만족하시죠?”
“예, 만족합니다. 완벽해 보입니다.”
“수한 씨! 11월 양산 가능한 거죠? 쇼 케이스 얼른 준비하는 게…! 아니다, 언론에 슬쩍 흘리죠. 어때요?”
“에이, 무슨 11월. 이 정도면 당장 내가 하루에 2만개씩 뽑아 줄 것 같구만.”
“품질 검증은 해야 합니다만….”
“이 정도 품질이면 단가 500불은 너무 싼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600불, 700불을 불러도 팔릴 겁니다.”
사방에서 자랑이 터져 나왔고, 우려 섞인 목소리는 품질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김 팀장의 의견이 유일했다. 그조차 확인 차원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방수 기능을 가진 제품은 신뢰성도 아주 높다.
“자! 뭣들 해요? 모여요! 역사적인 날인데 기념 촬영을 해야죠.”
“와아아아!”
“하하하하하!”
“나 부장님, 이쪽으로 오셔야죠.”
직원들이 내 자리 주위로 마구 몰려들었다. 제품 디자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나 부장만 멀뚱히 스크린 쪽에 서 있다가 어리둥절해하며 다가왔다.
이 카메라의 궁극적인 차별성은 제품 앞뒤로 모두 CIS 모듈을 박아 넣었기에 화면을 보면서 셀카까지 가능하다는 것!
“모두 웃어요!”
“김치!”
“치즈!”
찰칵! 찰칵! 찰칵!
20세기에 처음으로 셀카용 카메라가 등장했다. 잘도 찍힌다. 팔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차효철이 유독 환하게 웃는다. 회의 간사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노을 모드로 찍어 봐요, 수한 씨!”
“겨울숲속 모드가 제일입니다, 케이 님.”
“에이. 오 이사님, 그건 로맨틱하지가 않아요.”
찰칵! 찰칵! 찰칵!
내가 모드를 바꿔 가며 사진을 찍는데, 액정 귀퉁이에 이 비서가 보인다. 휴대폰을 들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케이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회의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 표정이 하도 이상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요, 이 비서? 병무청에서 뭐라고 해요?”
“그게… 아니고, 최 마담이 전화를 해 왔는데….”
“최 마담이 왜요? 지금 근무시간인데.”
내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외려 이 비서는 휴대폰을 내밀었다.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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