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K는 선을 지킬 걸세. CIS 모듈을 납품받으며 기술을 빼내 갈 생각은 전혀 없다네. 오히려 나는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라 믿네.”
“윈윈이라 하셨습니까?”
“구 회장님이 대현전자에 디스플레이 패널을 제공하기로 하셨네. LK전자의 미래라고 하시더군.”
“디스플레이.”
원래 역사에서 LK그룹은 미래 전략에 있어 디스플레이와 반도체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는데 말이다. 디스플레이를 그룹의 미래 사업으로 정했다고? LK답지 않게 빠른 결정이다.
“내비게이션이나 CCTV가 대중화가 되면 모니터가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나. 심지어 자네 회사의 디지털카메라도 마찬가지. 디스플레이 패널은 반도체 못지않은 사업 영역이 되지 않겠나. LK 전략실이 결정을 못 하고 있기에 내가 그리 질렀네. 자네는 내 결정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제가 LK그룹의 결정에 어찌 왈가왈부하겠습니까.”
“정 회장님이라면 유 사장에게 이처럼 의견을 물었을 것 같네. 어찌 생각하나?”
“…나쁘진 않습니다.”
“하하하! 그렇군, 그래!”
구 회장은 대단히 기뻐했다. 이 또한 나비효과인가 싶다. 내가 반도체에 발을 걸치니 오너가 직접 결정해 버린 거다. 게다가 디스플레이 패널과 CIS 모듈의 상호 납품 거래를 은근슬쩍 단정 지어 버린다.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원래 역사에서도 LK의 디스플레이 개발 전략은 실수가 없었다. 소형 패널에선 LCD냐 OLED냐를 두고 OLED에 올인했고, 대형 패널에선 PDP냐 LCD냐를 두고 LCD에 올인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소형이건 대형이건 모두 OLED로 통합했는데 그 또한 시의 적절했다. LK가 내 파트너가 된다면 스마트 클라우드는 디스플레이 개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아 보이는 거래다.
“분과 회의도 비슷한 전략으로 끌고 가시겠군요.”
“그렇게 해도 되겠나? 내비게이션, CCTV, 디지털카메라로 국책 과제를 구체화시켰으면 하네. 중소기업들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패널을 제공하고 주변 부품과 조립 위주로 개발을 시켰으면 한다네.”
“그 또한 윈윈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하시지요.”
옆에서 정 사장이 의견을 보탰다.
“내비게이션 소프트웨어도 중소기업과 협업을 했으면 합니다. DB구축에는 인력이 많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정 사장이 운을 떼게나. 내 적극적으로 그리되게 유도함세.”
우리 세 명은 걸어가는 와중에 분과 회의를 어찌 진행해야 할지 후루룩 논의해 버렸다. 구 회장의 강점이라고 할 것이다.
구 회장은 화법이 점잖으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누구나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이견이 생길 만하면 먼저 해결책을 제시해서 서로 각을 세울 필요가 없게 된다. LK그룹의 회의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나 할까.
전생에 LK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던 고등학교 동창의 말을 빌리면, 자신은 회의에서 욕지거리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욕을 하도 안 듣다 보니 ‘자네 정말 그리하려고 했나? 실망이군!’ 하는 정도의 말을 임원에게 들은 날이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그 녀석에게 야유를 보냈지만, 대기업답지 않은 LK의 유순한 회의 문화는 오너 일가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딸깍. 짝! 짝! 짝!
분과 회의실로 들어서자 수많은 중소기업과 벤처 사업가들이 박수로 맞이한다. 대현전자와 LK의 실무진도 잔뜩 앉아 있다. 당연히 내 곁엔 오 이사가 앉았고 말이다.
“국책사업 심사위원분들께서 자리 하셨으니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아젠다는 대현전자의 국책 과제 제의로….”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대형 스크린에 내비게이션 프로젝트 밑으로 수많은 하부 프로젝트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온갖 사람들이 실험 부품 조달, 일정, 협업 프로세스 등에 대해 물었고 토론이 시작되었다. 공단 직원들은 마이크를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속기록을 작성하고, 중간중간 의결 사항을 리뷰하고… 자료까지 마련되어 있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마찬가지인 회의였음에도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이 흘러갔다.
이런 실무적인 회의에 LK 구 회장, 정헌몽 사장, 내가 참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열기는 대단했다. 결국 회의는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넘을 때까지 계속됐고, 서면 질의를 보내면 공단 직원들이 정부 관계자와 협의해 결과를 배포하겠다는 말이 나오고서야 끝을 맺었다.
구 회장이 지친 듯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이제야 끝났군.”
“식사도 못 하시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네. 내가 너무 시간을 끈 게 아닌가 싶네. 내 미안한 마음에 근사한 곳을 예약해 뒀으니 같이 가세나. 유 사장도 말일세.”
“저도 말입니까?”
구 회장은 회의장을 빠져나오며 정헌몽 사장과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혹시 수정각이라고 아는가? 아주 맛집일세.”
“아… 수정각요. 네, 압니다.”
“오호, 아는구만. 앞장서시게. 내 배가 등에 붙게 생겼네.”
어쩌다 보니 구 회장의 손에 이끌려 그의 차에 타게 되었다.
- *
수정각 안쪽.
“호호호, 멋진 청년을 데려오신다기에 누군가 했더니 유 사장님이셨네요.”
“허허, 최 마담도 유 사장을 알고 있었나?”
“그럼요. 저희 집 단골이신데요.”
최 마담은 상차림을 하면서 연신 재미있다는 듯 웃어 댔다. 오늘따라 상차림이 무척 간소하다. 산나물 위주로 상차림을 하더니 화로를 상 옆에 두고 요리사가 직접 한우를 구웠다.
한우가 상에 올라오기 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안주 삼아 홍주를 한잔 하니 긴장이 스르륵 풀려 나간다. 마침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기에 온기를 내뿜는 화로가 그리 좋을 수 없었다.
탁!
“허허, 오늘따라 홍주의 향이 참으로 좋구만.”
“자주 들르셔요. 사모님도 저희 집 구절판을 좋아하시는데, 같이 오시면 더욱 좋죠.”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곳에서 선을 봤지.”
쪼르륵.
“저도 그날이 아직 생생하네요. 제가 그때 저기서 가야금을 켜 드렸는데… 제 어머님이 상차림 하셨고 말이죠.”
오늘따라 최 마담이 자리를 뜨지 않고 술시중을 직접 하고 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옆에서 정헌몽 사장이 싱긋이 웃는다.
“회장님, 그만 뜸들이고 말씀하시지요. 유 사장이 고개를 갸웃하잖습니까.”
“누가 대현 사람 아니랄까 봐 급하구만. 난 아직 고기 한 점 집지도 않았네.”
“제가 술 한 잔 올리지요. 말씀부터 꺼내 주시죠.”
쪼르륵.
구 회장이 연거푸 홍주를 두 잔이나 비우고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유 사장.”
“예.”
“우리에게 플래시 좀 주게. 자네 회사 말고는 구할 데가 없네. 하드디스크니 SRAM을 쓰자니 도통 제품을 만들 수가 없다네.”
“드리긴 해야 할 텐데….”
“기술 유출은 걱정 말게. 솔직히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플래시를 아무리 까 봐도 수율 확보가 어렵더군. 공정 라이선스를 달라는 것도 아니네. 그냥 64메가짜리를 연 수백만 개쯤 할당해 줬으면 하네.”
결국 정헌몽 사장과 구 회장은 서로 플래시가 필요하다는 데서 물밑 협상을 했나 보다. 오해가 생기지 않게 나와 국책 과제를 연계하며 자연스레 가까워지길 바란 것이다.
“호호호, 외람되지만 큰 건을 논하시려면 믿음부터 주셔야죠.”
최 마담이 오늘따라 훅 하고 끼어든다. 으음? 그녀가 이리 행동하는 이유는 분명 구 회장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줄 요량인데, 믿음이라니?
“최 마담, 믿음이라니?”
“에이, 회장님도 다 아시면서. 원래 믿음은 학연, 지연, 혈연이죠. 그중 제일은 혈연이랍니다.”
“…….”
“유 사장님, 혹시 애인 있으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애인이라니….”
“없으시네. 어머, 어쩐데. 한창 연애를 즐기실 나이에 혼자라니. 구 회장님, 따님이 미인이지 않나요?”
“이걸 어쩐다. 우리 현경이 얼굴을 보여 줄 사진이 없구만.”
“호호호호. 저희 집엔 없는 게 없지요.”
딱!
최 마담이 주관하는 연극을 지켜보자니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누군가 큼지막한 메뉴판처럼 생긴 것을 가져온다.
“구 회장님, 먼저 보시겠어요?”
“오오! 우리 현경이가 이리 예쁜 사진을 찍었던가?”
“수정각의 심미안이죠. 유 사장님, 어때요? 미인이시죠?”
“어….”
“얼굴도 미인이고, 학벌도 좋죠. 미국 명문대를 다니고 있는데,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재원이에요.”
“저는 아직 생각이….”
“그래 가지고는 노총각 신세 못 면해요. 혹시 알아요? 쌍둥이 낳아서 군대도 면제될지.”
“…….”
그러고 보니 연애보다 군대가 문제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소리가 사방을 채운다.
“하하하! 그것도 좋구만.”
“하하, 유 사장 옆에 누가 설지 궁금했는데 일이 이리되는군요.”
쨍.
구 회장이 술잔을 들자 정헌몽 사장이 술잔을 부딪쳤다. 나는 술잔을 부딪치기도 뭐하고 안 하기도 뭐했다. 그렇게 난감한 시간이 흘러갔다.
“유 사장님이 얼굴 발개진 건 처음 보네요. 호호호호.”
최 마담의 웃음소리에 봄비 소리가 젖어 들고, 창가 정자에서 연주되는 가야금 소리도 한층 경쾌함을 보탰다.
- *
“살펴 가십시오.”
“가는 길까지 내가 태워 주면 되는데 말일세.”
“아닙니다. 제 비서가 곧 도착할 겁니다.”
“우리 딸아이는 영화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네. 참고하게나.”
“…비가 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호호호, 살펴 가세요. 또 오시고요.”
부우우웅.
결국 구 회장과 정 사장을 보내고 나 혼자 멀뚱히 수정각에 남았다. 구 회장의 차를 얻어 타고 왔기에 이 비서가 도착하려면 1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우산을 받쳐 주고 있는 최 마담에게 얼굴을 돌렸다.
“왜 그러셨어요? 사람 난감하게.”
“호호호, 애인 없으시다면서요. 마담이라면 뚜쟁이 역할은 기본이죠.”
“정략결혼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제 사람은 제가 고릅니다.”
“설마 일반인과 혼담이 오가는 것은 아니죠?”
“일반인이라뇨. 돈이 좀 있으면 사람도 계급을 나눕니까?”
나모 모르게 최 마담에게 말이 험하게 나갔다. 나 또한 일반인이 아닌가. 더구나 일편단심 민들레다.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 일반인이지만 우리나라 방방곡곡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신혼여행은 세계 일주를 할 것이며, 아들내미 돌잔치는 아시아 최고 부자라는 타이틀 아래 치를 거다. 분명히 그리될 것이다.
“어머, 유 사장님처럼 똑똑하신 분이 결혼에 사람이 어쩌고 하시다니.”
“…….”
나의 상념을 툭 하고 깨 버리는 최 마담. 나는 뭐라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그리하지 못했다.
“이제 유 사장님도 재벌에 근접하는 와중인데 혼담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그리 쓰시다니요. 보통 여자를 아내로 들이신다면 그건 서로 못 할 짓이에요. 재벌의 아내들도 그들만의 리그를 펼친다고요. 일반인은 견뎌 내질 못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유 사장님 머릿속에 회사 일이 먼저예요? 집안일이 먼저예요?”
“…….”
여자들만의 리그라. 듣고 보니 새삼 내 입지가 전생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내심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희연이에게 대시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데이트하기 바빴을 시절 아닌가. 나의 대학 생활은 이미 끝나 버렸다.
부우우웅. 끼이익.
생각에 잠긴 사이에 이 비서가 도착했다.
“사장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갑시다.”
때마침 차가 왔기에 여기서 대화가 마무리되나 싶었다. 한데 최 마담이 평소와 달리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무척 답답해 보였나 보다. 아니면 고객에게 꼭 해 줘야 하는 말이었든지.
“회사가 커지면 불법과 합법을 오가는 일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재벌 총수에게 처가는 최후의 보험이자 영원한 동반자예요. 콩고물을 탐내는 친인척들 때문이든, 상속을 두고 벌어지는 왕자의 난이든… 아니, 그건 유 사장님에겐 해당 안 되겠네요. 여하튼 처가의 위세는 아주 중요하다고요. LK가 이리 연을 맺자고 온 것은 유 사장님께 정말 좋은 기회예요.”
최후의 보험이자 영원한 동반자라. 동반자는 몰라도 보험이라는 말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건 돌려 드리죠.”
보고서처럼 꾸며진 구 회장의 장녀에 대한 프로필 서류를 최 마담에게 주었다.
“시도는 해 보셔야죠. 대박이라니까요.”
“제 마음입니다.”
“다음에 또 들르세요. 현경 아가씨랑 같이요~”
“출발합시다, 이 비서.”
“예.”
부우우웅.
괜한 말을 들어서인지 차에 앉았는데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심 어떻게 처리할까 싶었던 군대 문제도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말이다.
‘대현에서 병역특례 기간을 채울 걸 그랬나? 아냐, 그랬다간 일이 더 꼬였을 거야. 인생 2회 차에도 후회를 하냐!’
나는 인생 1회 차에서는 전문연구요원으로 특례를 받았다. 대현에 입사한 이유 중 하나가 군대를 해결할 목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여하튼 인생 2회 차에는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생에 재훈이의 소개팅 주선으로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던 희연이와의 만남마저도 쉽지 않다.
일단 희연이를 만나 봐야겠다.
- *
한 회사의 사장으로서 웃긴 일이지만 며칠간 칼 퇴근을 하며 대학교 앞에서 죽치고 앉아 희연이를 기다렸다. 희연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 91학번, 수업을 빼먹는 일이 없는 데다 올해 졸업생이니 분명히 나타… 어! 저기 있다.
“이봐요! 이봐요, 희연 씨!”
“누구시죠?”
동그란 안경을 쓰고 뚱하게 나를 쳐다보는 내 아내. 라식 수술을 하기 전의 그녀는 꽤나 귀여운 맛이 있었다. 역시 제 눈에 안경이다.
“소개는 벌써 했지만 다시 하죠. 유수한이라고 해요.”
“아, 그… 재벌 사칭하시는 분?”
“사칭요? 재벌은 아니지만 사칭도 아닙니다. 나는 스마트 클라우드의 사장이에요. 여기 명함이 있습니다.”
“그걸 저보고 믿으라고…. 아니, 여하튼 무슨 일이시죠?”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바쁜데요.”
“바빠 보이지 않는데.”
“솔직히 내키지 않아요. 저기 같이 다니는 사람도 왠지 무섭고….”
“제 비서예요. 무술 유단자라 기세가 남다를 뿐입니다. 잠깐 시간을….”
내가 명함을 내밀며 시간을 달라고 하자,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희연이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냅다 소리를 지른다.
“영우 선배! 영우 선배!”
“어, 희연아. 왜 그래?”
다다다다.
“여기, 이 사람이 그때 말한 그 사람이야.”
“뭐, 그 스토커?”
“난 스토커가 아닙니다.”
“저리 비켜요!”
희연이에게 누군가 달려왔고, 그녀는 그의 등 뒤로 휙 하고 숨었다. 딱 봐도 공대생처럼 생긴 사내가 양손으로 내 가슴을 훅 밀어젖혔다. 멀리서 보고 있던 이 비서가 달려왔지만 내가 손을 저어 만류했다.
“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잠시 희연이, 아니 희연 씨와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할 말요? 이 근처에선 본 적 없는데, 혹시 우리 학교 선배예요?”
“아니에요.”
“그럼 내 희연이에게 할 말이 뭔데요? 내게 말해 봐요.”
“당신하고 할 말이 아닌데. 그리고 내 희연이라뇨.”
“왜요? 남자친구가 자기 애인 이름도 못 부릅니까? 어서 말해 봐요. 할 말이 뭡니까?”
“뭐라고요?”
일순 놀랍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사내가 언성을 높였다.
“말해 보라고요. 양복을 입은 걸 보니 혹시 다단계 뭐 그런 겁니까?”
“선배, 저 사람 TV 나온 사람하고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걸로 사기 치고 돌아다니는 게 뻔해요.”
“어쩐지!”
“내가 그리 보이나요. 미치겠군.”
나는 내 옷차림을 살펴보고 어이없어 했다. 언젠가 부터 나는 청바지를 입지 않으며 티셔츠보단 와이셔츠가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뚜벅뚜벅.
“사장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휴우, 돌아가죠.”
나는 희연이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지만 내 눈을 피해 사내의 등 뒤로 숨은 그녀를 보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현전자 주식으로 폭망해 통장에 96만 원밖에 없어도 내 눈앞에선 용기 내라면서 웃어 주었고, 월급쟁이 사장으로 기껏해야 400만 원쯤 들고 들어와도 모양 빠지면 안 된다고 회식비로 수십만 원씩 꼬박꼬박 챙겨 줬고, 그러면서도 애 학원비 벌겠다고 할인마트 알바도 서슴지 않았던 내 마누라.
그 고생을 갚아 줘야 되는데… 이번 생에선 다 해 줄 수 있는데… 그리 노래를 불렀던 유럽 여행도 보내 줘야 하는데….
“사장님,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굴러 온 복을 제 발로 걷어….”
“그만해요, 이 비서.”
“죄송합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녀 옆에는 체크 남방 차림에 두꺼운 공대 수학책을 들고 다니는 애인이 있다. 이미 가는 길이 달라져 버린 느낌. 모든 것이 변했다.
한데 이 기분은 뭘까? 분명 기분이 울적한데, 내심 내가 바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벌어지지도 않았으니 해 줘야 될 일 또한 없잖나 하는 자기 합리화까지.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다.
“이 비서, 시간 되나요? 어디 조용한 데 가서 한잔하죠.”
“늘 가시던 라운지로 모시겠습니다.”
확실히 변했다. 내게서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이 비서의 대꾸도 그 못지않게 자연스럽다. 후회 따윈 없다. 충분히 예측했던 결과니까. 내심 오지 않았으면 했던 시간이 찾아왔을 뿐이다.
- *
며칠 뒤.
벌컥.
“수한 씨! 혼담이 들어왔다고요? 대체 누가 수한 씨를 노려? 아니, 스마트 클라우드를 뭘로 보고!”
“한국 재벌들 사이에 흔한 일이야. 나도 신경 안 쓰는데, 케이가 왜 신경을 써?”
“그렇죠? 신경 안 쓰죠? 정략결혼이라니. 미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며칠 손에서 놓고 있었던 업무를 살펴보고 있는데 케이가 들이닥쳤다. 대체 어디서 그 얘기를 들은 건가? 이 비서? 입이 무거운 이 비서인데, 어째서….
딸깍.
“사장님, 개발 회의 준비되었습니다.”
“이 비서, 잠시 들어와 봐요.”
회의 준비를 알리러 들어온 이 비서에게 팔짱을 끼고 있는 케이를 가리키며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회의 끝나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수정각에서 비서실로 전화가 왔습니다. 만남 주선을 언제 하면 좋을지 물어보더군요.”
“만날 생각 없다고 전하지 그랬어요.”
“제가 드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LK 회장님이 직접 사장님께 청하신 일이라고 하더군요. 재계에 입김이 크신 분인데, 단박에 거절하는 것은…. 한 번은 만나 보시는 게 어떤지요?”
“…….”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거절하더라도 한 번은 만나긴 해야겠다.
“태훈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날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케이 님이 제 전화 통화를 엿들으셨을 뿐이지 않습니까.”
이 비서는 담담하게 말했는데, 케이가 인상을 팍 쓴다. 이윽고 내 표정을 살피더니 더욱 인상을 구긴다. 내 표정에서 ‘왜? 거절하더라도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은데?’라는 뜻을 읽었나 보다.
벌컥!
“쳇! 내가 누구 때문에 한국에 있는데!”
케이는 그리 쏘아붙이고는 사장실을 휙 빠져나가 버린다. 개발 회의에 참석하러 왔을 텐데, 그럴 기분이 전혀 아닌가 보다. 케이의 반응에 골이 지끈해진다. 나는 여자 문제로 복잡해지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는데 말이다.
“케이 님! 케이 님!”
“가게 둬요, 이 비서.”
“그래도 저렇게 가면 오해가….”
“시간 지나면 자연스레 기분 풀릴 겁니다. 늘 그랬잖아요.”
말은 그리했지만 오늘따라 케이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지금 미국은 빌 클린턴 시대. 소련의 붕괴, 일본 경제의 몰락으로 경쟁자가 없는 G1의 시대. 거기다 IT 호황까지 겹쳐 미국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잖나. 주식만 사고팔아도 수천억씩 벌수 있는 시기인데, 파라곤의 후계자가 한국에 있다니.
그런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고 쳐도 케이와 사적으로 너무 가까워지면 안 된다. 동업자이자 투자자의 대표 격인 케이와 사적인 감정이 얽히면 결국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사적인 관계로 넘어가 그녀를 볼 때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싶진 않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좋았을걸. 아니, 그랬다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으려나.
뚜벅뚜벅.
나는 사무실 입구를 힐끗 쳐다봤지만 그녀는 흔적도 없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회의실로 향했다.
- *
“사장님, 축구는 어디에다 배팅하실 겁니까? 올해는 양산팀에 배팅하시는 게 어떤지요?”
“벌써 체육대회인가요? 개발팀은 질 것이 뻔하니 올해는 연구소에 배팅을 해 보죠.”
“하하, 또 양산팀 회식비 듬뿍 보태 주시겠군요.”
“자! 여담은 이쯤 하시고, 오늘 이렇게 자리한 것은 국책 과제에다 개발팀 현황을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집중해 주세요.”
“아, 예.”
이 비서가 자료를 띄우는 와중에 농담을 하는 나 부장이다. 요즘 내가 우울해 보였던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몇 년인데, 우울한 기분은 오늘까지면 족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연이란 느닷없이 들이닥치기 마련이다. 외려 희연이를 쫓아다닌다고 며칠이나마 업무를 소홀히 했던 내가 한심하다.
“오 이사님, 국책 과제부터 시작하죠.”
“예. 국책 과제는 CIS 모듈에 100억이 출자되었습니다. 참여하는 중소기업들에 제공할 CIS 초도품에는 세금이 면제되고, 연구소 명의로 일괄 경비 처리할 예정입니다.”
“참여 회사들의 보안 관리는 어쩌기로 했나요?”
“각 회사마다 샘플 관리자를 두기고 했고, 한 달에 한 번 과제 리뷰를 하면서 샘플 수량은 저희 쪽에서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오 이사답게 일 처리가 매끄럽다.
“권 부장님, 시장 조사는 결과가 어떤가요?”
“디지털카메라는 갓 태어난 시장이라 현재 북미와 일본 시장밖에 없습니다. 출시 가격에 따라 포지션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목표 시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급 카메라 시장은 포기해야죠. 우린 추가 렌즈가 없는 자동카메라 시장을 적극 노려야 합니다.”
“역시 그러실 거라 여겼습니다. 자동카메라 시장은 소니와 올림푸스라고 하는 중견 일본 기업이 들어와 있습니다. 전문가용 고급 제품 위주의 캐논과 니콘은 배제할 수 있으니, 단기적으로 시장 점유율 30%를 목표로 가격과 물량을 결정하며 어떨까 합니다.”
“사장 점유율에서 일본 시장은 아예 배제하세요. 아무리 좋은 걸 내놔 봐야 안 팔릴 거니까, 일단 국내 시장과 북미를 타깃으로 하고 안정권에 들어서면 유럽, 2년 뒤부터는 저가 모델을 중국에 푸는 전략으로 물량 배정을 했으면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투자 계획을 짜겠습니다.”
마니아가 많은 카메라 시장에서 전문가 영역에서 싸우면 필패다. 라이트 유저 위주로 캐주얼한 카메라 시장을 창출해 내야 한다. 원래 역사에선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제품의 저가 모델이 1996년쯤 나오니까 충분히 승산이 있다.
“일단 특허 전략부터 점검하고 연구소 CIS 개발 현황을 짚었으면 하는데, 코닥에 출장 간 개발팀에선 연락받았나요?”
“예. 여기 오늘 아침 도착한 데일리 보고서가 있습니다.”
이 비서가 띄운 화면에 김 과장 특유의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표가 떠올랐다. 검토하고 있는 특허, 자사 디자인과의 연관성, 특허 매입 비용 등등… 벌써 특허 매입 총액이 350억을 넘었다. 예상보다 비싸다. 미래를 보면 싸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다. 생짜로 유동 자금이 빠져나가는 일이니까.
“사장님, 어젯밤 늦게 김 과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자료로 남기기가 그렇다며 사장님께 구두 보고를 부탁하더군요.”
“요즘 내 퇴근이 빨랐나 보군요. 여하튼, 무슨 일입니까?”
“코닥 경영진에서 물밑 접촉이 있다고 합니다. 플래시를 납품해 주면 특허 구매가의 20%를 깎아 주고, 나머지 특허들도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겠다고 말입니다. 코닥도 디지털카메라에 진출하겠다는 뜻입니다.”
“양날의 검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코닥이 디지털카메라에 진출했던가? 했겠지? 근데 이리 빠르진 않았던 것 같다. 일본에 이어 한국 회사까지 시장에 뛰어들겠다고 하니 충격이라도 받았나? 코닥의 특허는 나중에 스마트폰이 활성화되면 원천 특허의 밭이다. 탐이 난다.
미리 보기, 사진과 영상 편집, 화면 젖히기, 심지어 화면 밝기와 색감 조정까지 영상에 관한 거의 모든 특허가 망라되어 있다. 워낙 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에 구글, 애플, 신성, MS, 아마존이 신사협정을 맺고 2억 5천만 불에 파산 절차를 밟고 있던 코닥의 특허를 공동으로 매입했다.
지금 코닥의 핵심 특허를 매입하는 것도 대박이지만, 파산 절차 시 특허 매입을 우선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을 수 있다면 더더욱 대박이다. 솔직히 김 과장에게 요청은 했지만 기대는 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말이다.
하여간 플래시를 사방에서 욕심내고 있는 상황이다. 확실히 쓸모가 많은 메모리이긴 하다. 나 부장에게 확인부터 해 봐야겠다.
“나 부장님, 2단지 공장 언제 셋업 완료되나요?”
“6월 말이면 됩니다. 장마철 오기 전에 장비를 다 들여야 합니다.”
“플래시로 모두 채우면 생산량이 어떻게 되죠?”
“플래시로 다 채우신다고요?”
“그럼요. 지금 1공장은 라인이 네 개잖습니까. 그걸 통신칩, GPU, DRAM으로 배분하고 2공장은 플래시 전용으로 하면 효율이 극대화되지 않겠습니까.”
“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양산 입장에선 엄청 편하죠. 월 8만 장까지 어찌어찌할 수 있을 겁니다.”
1990년대 FAB공장 한 동의 캐퍼는 대충 Wafer 5~6만 장 규모다. 그런데 8만 장까지 해 볼 수 있다고? 21세기에 최적화된 FAB도 최대 생산량이 월 10만 장인데, 대단한 자신감이다.
“오 이사님, 김 과장에게 특허 매입은 일단 가계약을 하라고 하시고, 코닥 경영진과 컨퍼런스 콜을 부탁합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플래시 줍시다.”
“예? 경쟁자를 만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오 이사가 깜짝 놀란다.
“권 부장님, 어찌 생각하시나요?”
“사장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짐작이 갑니다. 나쁘진… 아니, 멋진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오 이사와 달리 권 부장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업맨답게 내 말을 가장 먼저 알아들었다.
“사장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코닥이 지금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진입이 늦었을 뿐, 브랜드 위치도 그렇고 기술적 잠재력이 만만찮습니다.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될 겁니다.”
오 이사는 여전히 기술적인 면만 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경쟁자와 싸우게 만들어 줘야죠. 강력한 브랜드 네임을 앞세워서 우리 부품의 기술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우리 부품 기술 또한 끌어올리게 해 줘야죠.”
“……?”
오 이사는 내 말을 곱씹어 보더니 어느 순간 표정이 확 변한다. 이 비서조차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이 회의실에서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나 부장뿐이다.
“권 부장님, 일본 메이커의 포지션이 어찌 됩니까?”
“캐논과 니콘은 1,200불 이상의 전문가용 카메라에 집중하고 있고, 소니는 600~1,000불 대역, 그리고 올림푸스는 500불 근처의 시장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코닥에 플래시를 주는 대가로 CIS도 같이 가져가라고 합시다. 시장도 나누자고 하죠. 단가 1,000불을 기준으로 그 이상 시장은 코닥에, 그 이하 시장은 우리가 공략해 보죠. 어떻습니까?”
“제 생각입니다만, 코닥은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플래시를 가져가야 하드디스크 기반의 일본 메이커와 제품 차별화가 가능하니까 말입니다.”
탁!
권 부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 부장이 그제야 무릎을 친다.
“오호! 이제 알겠군요. 코닥이 CIS도 가져가서 제품을 꾸미길 바라시는군요. 플래시를 줄 테니 너희가 알고 있는 카메라 기술로 CIS 기술 업그레이드를 같이하자!”
“맞아요, 나 부장님. 코닥이 우리 대신 시장 조사, 부품 마케팅, 기술 경쟁까지 하게 될 겁니다. 우린 강력한 우군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런 생각이시라면 저도 적극 찬성합니다. 코닥이 제대로 낚이면 CIS 업그레이드는 금방 될 겁니다.”
기술 개발에는 자체 개발, 공동 개발, 산학 협동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빠른 방법은 업계의 선두 고객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 조건을 맞추기 위해 기술 개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효과적인 개발이 된다.
코닥은 카메라 기술에 있어 전통적인 강호, 잘만 엮으면 우리의 CIS 기술은 코닥의 등에 올라타 빠른 시간 내 일본의 CCD 기술을 앞질러 갈 수 있을 거다.
“권 부장님이 컨퍼런스 회의 전에 의사 타진을 한번 해 보시죠. 코닥 경영진에 CIS 납품을 기본 전제로 플래시 공급을 하겠다고 하면 응해 올 겁니다.”
“예. 출장자와 협의해 회의 일정을 정하겠습니다.”
“의제와 자료는 오 이사님이 주관해 주세요. 회의 자료는 미국에 보내기 전에 나에게 보여 주시고요.”
“염려 마십시오.”
“나 부장님은 제2공장 셋업 일정 다시 한 번 챙겨 봐 주시고요.”
“문제없습니다.”
내가 봐도 문제없을 것 같다.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가 2년에 걸쳐 만드는 반도체 FAB 공장을 6개월마다 팡팡 건설해 댔다. 제2공장은 자그마치 1년이나 공을 들였으니 대한민국 기준으로 돌다리도 두들겨 가며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
“자, 그럼 더 이상 의제가 없으면 이쯤 할까요?”
“사장님, 업무 보고가 남았습니다만.”
“서면 보고로… 오오오!”
이 비서의 말에 서면 보고로 하자고 말하다가 스크린에 훅 하고 떠오르는 장표의 제목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64M Flash 초도 수율 62% 확보, 4단 적층 패키지로 256M Flash 7월 양산 예정」
기다리고 기다리던 64M 플래시가 나왔다. 4단 적층을 하면 256메가, 1990년대 하드디스크 시장을 잡아먹을 수 있는 용량을 드디어 확보한 것이다. 7월부터는 앰팩이며 에그박스가 한 번 더 대유행을 할 거다. 대용량 콘텐츠의 다운로드와 이동이 훨씬 편해질 테니까.
“하하하! 이 자랑을 언제 할까? 엄청 기다렸습니다.”
“연구소가 드디어 한 건 했군요. 64메가라니!”
“연구소뿐 아니라 제품 개발팀도 한 건 했습니다. 김 과장이 출장 전에 투입하고 간 64메가 DRAM 퀄 랏도 있는데, 드디어 수율 80%를 찍었습니다.”
“양산팀에서 모니터링했는데, 10개 랏이 연속으로 수율 80%를 넘어서 오늘부터 양산 받아 주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다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드디어 DRAM에서도 신성을 따라잡았군요.”
대박이다. 원래 역사에서 64M DRAM은 기술 수준이 갑자기 어려워져 신성의 독주가 한동안 이어졌는데 말이다. 이대로라면 원역사에서 신성이 올해 말 256M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는데, 스마트 클라우드도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 64M와 256M는 생산 설비 구성이 같은 기술 범주에 있으니까.
“따라잡다뿐입니까. 이제 우리 연구원들은 신성의 핵심 인력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256메가 DRAM 개발에서 진짜 승부를 해 볼 참입니다.”
반도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DRAM에 한해서는 신성의 개발자를 높이 쳐준다. 경영진의 도덕성이야 어찌 되었건, 신성이 반도체 우수 인재들을 끌어들인 정책은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혹자는 한국 반도체산업을 후발주자로 시작해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것처럼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자본, 설비 같은 산업 자원이 부족했을 뿐 인적 자원은 꽤나 탄탄했다. 그 일례가 미국 특허청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한 강대원 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대적 반도체 소자의 기초인 모스펫(MOS-FET)을 최초로 개발한 공로로, 접합용 트랜지스터를 최초 발명한 윌리엄 쇼클리, 집적 회로를 최초로 발명한 잭 킬비와 더불어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3인에 꼽힌다. 그는 반도체 소자에서 22개에 달하는 원천 특허를 보유했으며, 1984년 일본 산업청이 미국 내 최초의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했을 때 초대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강대원 박사와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를 다닌 3년 후배 강기동 박사는 신성반도체의 전신인 ‘한국반도체’를 세웠으며, 회사를 신성전자에 매각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크론의 전신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를 세우기까지 했다.
반도체 업계에 이 두 분의 영향력이 상당했기에 신성이 타 업계의 견제를 벗어나 일본의 샤프와 미국의 마이크론으로부터 무사히 기술 이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게 반도체 역사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선배들이 미국에서 한번 뚫어 놓은 길은 후배 한국인 유학생에게도 쭉쭉 이어져서 진제대, 황규창, 권현오, 오용세 등등 국비 유학생 1세대가 Bell LAB, IBM에 안착했고 결국 1990년대 초중반 모두 신성에 합류했다.
그러고 보니 21세기에 대현전자 사장이 되는 오용세 박사나 V-Nand(수직 적층 Nand)를 개발하는 범규현 박사가 올해 입국하는데… 정말이지 미래를 알고 있다 보니 스카우트까지 신경을 쓰게 된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데 그런 양반을 놓치면 되겠나.
“멋지네요. 세계 최초로 256메가 개발에 성공한다면 관련자에겐 S급 인센티브를 보장하겠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문제없습니다. 반드시 해낼 겁니다.”
자신만만한 오성재 이사. 그래, 이 양반도 유학파 못지않다. 토종 엔지니어로서 내가 슬쩍슬쩍 보여 주는 미래 기술을 현실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야, 부럽네요. S급 인센티브라니. 양산은 아무리 잘해 봐야 A급인데.”
“그럼 연구소로 오십시오. 개발팀이나.”
“에이, 안 갑니다. 그런 지옥엘 왜 가나요? 양산은 그에 비하면 천국인데.”
“하하하.”
나 부장의 농담도 괜찮은 시그널이다. 연구소 및 개발팀이 타 부서에 비해 고생이 심하고, 당연히 더 좋은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차별적 고과 체계의 핵심이다. 결국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야망에 찬 엔지니어는 개발팀에 합류하게 되어 있다. 역시 스마트 클라우드는 21세기형 회사다.
- *
“이견이 있는 부분은 수정했으니, 오 이사에게 전달해 주세요.”
“예, 사장님.”
디지털카메라 건은 일급비밀이라 전략 보고서를 내가 직접 수정했다. 한데 보고서를 받아 든 이 비서가 내 앞에 멀뚱히 서 있다.
“이 비서, 더 보고할 게 있나요?”
“지금 가셔야 합니다. 오늘은 제가 모실 일이 아니라서요.”
“아, 벌써 시간이 그리됐나요?”
“워커힐 호텔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내심 최 마담이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가 어디일까 궁금했는데 다름 아닌 워커힐이었다. 누가 요정 주인이 아니랄까 봐 만남을 주선한 자리마저 군부 정권의 유산이다. 뭐, 한강과 아차산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멋지긴 하지. 차 없이는 접근조차 힘든 곳이니 눈을 피하기도 좋고. 그리 생각해 보면 괜찮은 선택 같기도 하다.
“그래야겠군요. 급한 일 처리는 끝났으니까.”
“코닥과 컨퍼런스 회의는 내일모레로 잠정 협의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LK와 대현에 플래시를 제공하겠다는 공문은 지금 즉시 발송하겠습니다.”
“그래 줘요.”
LK 회장의 장녀를 만난 다음에 플래시를 주겠다는 공문을 발송하면 꼭 만남의 대가로 거래에 응하는 것 같잖나. 코닥에 주기로 마음먹고 있으니, 대현과 LK에도 나눠 줘야지. LK의 디스플레이 기술과 대현의 GPS 기술은 나중에 스마트폰에도 꼭 필요하다. 지금부터 협업을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껏 웃으며 배꼽 인사를 해 대는 이 비서를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부우웅.
오랜만에 손수 운전을 해 보니 느낌이 새롭다. 역시 벤틀리! 묵직하게 쑤욱 미끄러져 가는 느낌이 좋다. 한강을 옆에 두고 쭉쭉 달리다 보니 꾸불꾸불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바람은 부드럽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따가워지기 시작하는 햇볕을 가려 준다. 봄이 깊어지고 있다.
뚜벅뚜벅.
장소는 ‘현빈관’이라는 정체 모를 이름이 붙어 있는 워커힐 호텔의 별관이었다. 21세기 고층 빌딩에 익숙한 내게는 무척 단아해 보이기까지 한 건물이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피카디리’라는 이름의 갤러리 숍이 보인다. 약속 장소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을 했습니다. ‘유’라고 되어 있을 겁니다.”
“유수한 사장님이시군요. 일행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로….”
단아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나를 안쪽으로 데려간다. 온갖 그림이 복잡한 동선으로 걸려 있고, 자동문 두어 개를 지나니 한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자리가 나온다. 팔을 뻗어 자리를 안내한 종업원이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안내받은 자리에는 이미 한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목례를 했다. 나는 무심코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목례를 받았기에 상당히 민망했다.
“처음 뵙네요. 구현경입니다.”
“유수한입니다. 일찍 오셨네요.”
“제가 좋아하는 곳이거든요.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으시죠.”
내가 정한 장소가 아닌데. 여하튼, 감사하다니 나쁠 건 없었다. 맞은편에 앉으니 어디선가 종업원이 나타나 주문을 기다렸다. 메뉴판 따위는 없었다.
“제가 먼저 주문할까요? 저는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
“같은 걸로 주세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차분하게 주문하는 구현경. 척 봐도 단아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베이지색 치마에 흰 블라우스, 특이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수수하게 느껴질 만한 옷차림이었다.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는 일절 없고, 화장기마저 옅어 정말 재벌가 여식이 맞나 싶을 정도다. 이리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희연이의 럭셔리 버전? 케이의 단아한 버전? 여하튼 묘하게 매력적이다.
딸그닥. 딸그닥.
커피잔을 두고 사라지는 종업원.
벌써 몇 분은 흘렀을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소개팅에 가면 재훈이가 알아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들어 줬는데, 둘만 있으니 영 어색하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귀국하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예?”
내가 뭘 해 줬다고 감사부터 하나.
“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제가 한 학기만 휴학을 하겠다고 할 때마다 아버님은 늘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이번엔 외려 휴학계 내고 귀국하라고 하시더라고요.”
“…….”
“유 사장님을 만나 보라시기에 그 이유를 알았답니다.”
“이런, 저 때문에 귀국을 하시다니….”
“그러니까 감사드리죠. 정말 쉬고 싶었거든요.”
잠시 한국에 들어온 게 아니라 휴학을 했다고?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만남을 위해 나름 대화거리를 준비했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낮은 첼로 소리만 둘 사이의 침묵을 채운다.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눈앞의 구현경은 편안한 모습이다. 음악을 즐기는 듯하다. 내가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 모습이 그다지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첼로곡을 들으니 좋네요.’ 하는 모습이 절로 느껴진다.
나는 그냥 커피로 입만 적시며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화려한 듯 요상한 색감의 주변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멈췄던 시간이 쭉 하고 늘어나더니 천천히 느릿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소파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한 번 봤다가 그림 한 번 봤다가 다시 그녀를 한 번 봤다가 한강 한 번 봤다가….
“음음… 음….”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듯 말 듯 첼로곡을 느릿하게 따라 하는 그녀. 정말이지 그녀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여자다. 이 여자가 뭘 좋아한다고 했더라? 영화라고 했던가?
“저… 영화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약은 안 했지만… 제가 모실까요?”
“굳이 그러실 것까진 없어요.”
“예?”
“늘 일에 시달리시는데 저까지 일을 만들면 좀 그렇죠. 제가 드릴 건 시간밖에 없네요.”
“예?”
“여긴 선곡도 좋고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네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제게도 좋은 시간이에요.”
“……?”
“불편하세요?”
“아뇨. 전혀요.”
시간이 좀 더 흘러간다. 커피마저 천천히 식어 가는 느낌이다. 여기 커피 맛있네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답잖은 생각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잠을 깨려고 마시는 박카스와는 전혀 다른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