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넝쿨째 굴러 온 보석
쓱. 쓱.
이희건 회장은 골동품을 닦으며 칩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누군가를 기다렸다.
뚜벅뚜벅.
“회장님, 저 이수학입니다.”
“어서 와. 일 처리가 많이 늦었구만. 황금 같은 시간을 잘 쪼개서 썼겠지?”
“예. 시간도 돈도… 말씀하신 대로 바삐 움직였습니다.”
“특검은 누가 하기로 했나?”
“조웅준 검사로 낙점될 겁니다. 50억 결재가 필요합니다.”
“확률은?”
“100%입니다. 대한변협이 추천권을 받아 YS에게 특별 검사 후보를 세 명 올렸습니다. 정원홍, 고주원, 조웅준 이렇게 말입니다.”
“한데 어째서 조 머시기가 된다는 건가? 그걸 어찌 확신하나? 50억이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대한변협에 준다고 가져간 돈도 100억일세.”
이 회장은 닦고 있던 매화병을 내려놓고 이수학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50억을 허공에 날릴 수도 있잖나.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재판도 망치고 돈도 날리는 꼴이다.
“나머지 두 명은 신성 관련 수임 전력이 있기에 YS가 지정하기엔 탐탁잖을 겁니다. 결국 박준태도 조웅준이 좋겠다고 조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으흠… 좋군. 조 검사는 믿을 만한가?”
“예. 서울대학교 재학 때부터 사법연수원까지 신성 장학금을 꾸준히 먹인 사람입니다. 이제 써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최종 장학금으로 50억이면 만족한다고 하더군요.”
‘신성 장학금’은 법조계에 매년 뿌리고 있는 로비 자금을 통칭하는 말이다. 작년 하반기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연이은 YS의 국빈 방문으로 신성 비자금 사건은 쑥 들어간 모양새다.
특검만 신성 장학생으로 선택되게 한다면 조용히 묻어 버릴 수 있는 거다.
“판사는?”
“서원창 부장판사입니다. 그 또한 신성 장학금 출신입니다. 이번 판결을 마지막으로 옷을 벗을 예정입니다. 장학금 50억에 변호사 개업과 수임 건은 따로 챙겨 주기로 했습니다.”
“추징액은?”
“기존 협의된 4,375억에서 3,200억 수준으로 줄일 겁니다. 총장학금 200억을 제외해도 900억은 남는 장사입니다. 일이 잘되면 저도 구속 수감은 면할 것 같습니다.”
“휴우~ 그래, 그 정도면 일 잘했군, 잘했어.”
이번 비자금 사건에 장학생을 두 명이나 쓴다는 게 좀 아깝긴 하지만 어쩌리.
추징액을 왕창 아끼는 일이니 서로 윈윈이다. 이러려고 장학 사업을 한 게 아닌가.
“법원 출두하고 다시 보고드리러 오겠습니다.”
“돈은 원하는 대로 쓰도록 하게.”
“예, 감사합니다.”
방을 나온 이수학은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회장의 말투가 평소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냉철한 이 회장의 모습으로 상당 부분 되돌아온 것이다.
- *
1994년 1월 중순.
“크흠….”
판사는 굳이 판결문을 읽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특검까지 했지만 기자회견도 없이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했고, 재판정에도 검찰과 이수학을 비롯한 피의자만 있잖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한통속이다. 그래도 판결문은 남겨야 하기에 주절주절 읽어 나갔다.
“검찰이 공소 제기한 범죄 사실에 피의자들의 배임 행위로 인한 이득액과 포탈한 세액 모두가 천문학적인 거액으로서 법정형이 무거운 중죄입니다. 그러나… (중략)… 평등한 법적용이 개별적 특수성이나 시대적 상황을 배제한 기계적인 적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본 건 피고인들을 구속하여 재판해야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고로 본 법정은 피고인들을 불구속 상태에서 1심을 종료하며, 상고가 있으면 향후 90일 이후에 심리를 속행토록 하겠습니다.”
땅! 땅! 땅!
판사는 계약서에 도장이라도 찍어 주는 듯 의사봉을 두드렸다. 특검이 제출한 기소장엔 추징액이 3,201억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숫자와 정확히 일치했다. 상고 따윈 없을 것이 분명했다.
서원창 판사는 재판정을 떠나며 판사복을 쓰윽 하고 쓰다듬어 보았다. 오늘 이후론 다신 입어 보지 못할 옷이었으니까.
이수학이 그런 그에게 살짝 목례를 한다.
이로써 거래가 완료되었다.
- *
「신한국건설 발동 거나?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활성화 조짐 관찰」
「무역 흑자 다시 실현되나? 반도체, 휴대폰, 멀티미디어 IT 기기 수출 호황 이어져」
「상반기 대기업 공채 3만 5천 명 예상, 문민정부의 일자리 창출 능력은 합격점」
주요 신문들은 연일 경제 관련 뉴스를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정부가 언론 통제를 하는지 IT 산업을 제외하고는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는데 양극화 현상이라는 단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1994년부터 유로화 통합으로 인한 부작용이 유럽에서 시작되고, 유가가 널을 뛰면서 조선업을 비롯해 중공업이 죽을 쑤기 시작하는데 말이다. 북미는 IT 버블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전문가들조차 경제 상황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기 일쑤다.
펄럭펄럭.
「신성 비자금 특검 종료. 추징금 수천억으로 상고 없이 종료될 듯」
“이야, 잘도 빠져나갔네. 역시 신성이야. 이번에 장학생을 몇 명이나 썼을까?”
잠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신성의 비자금 특검에 대해선 아주 작게 언급되어 있다. 그마저도 한마음신문사가 유일하다. 다른 신문에서는 비슷한 기사조차 찾아볼 수 없다.
내심 이참에 신성을 더 밟아야 하는데 싶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신성의 법조계 로비력은 나와는 차원을 달리하며, 사내 법무팀마저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로펌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이 회장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시점이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박준태 의원이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어떤 식으로 끌려들어 갈지 모른다. 결국 치명타를 가할 시점은 신성랜드의 전환사채를 발행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때는 정말로 이 회장도 무리한 일을 벌이니까 말이다.
“사장님, 뭘 그리 깊이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면접을 하도 많이 했더니 좀 지치네요. 벌써 쉬는 시간 끝났나요?”
나는 지금 스마트 클라우드의 신입사원 공채를 진행하고 있다. 서류 전형과 입사 시험을 모두 끝내고 최종 면접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면접 대상자는 모두 4천 명. 몇 달 뒤 오픈할 제2공장을 돌리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이다. 대외적으론 150%를 뽑았기에 면접에서 3분의 1을 걸러 낸다고는 했지만 특별한 결격 사유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모두 뽑을 예정이다.
“예. 다른 일이 있으시면 오후 면접은 저에게 맡기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디자인팀은 내가 챙겨 줘야죠. 조너슨이 아직 면접 볼 능력이 안 되잖아요.”
면접은 총 네 군데서 진행하고 있다. 나 부장이 아예 전형을 달리해 고졸 사원 위주로 양산 인원을 뽑고 있고, 대졸자 공채 전형은 김 과장과 송 과장이 기술 면접을, 권 부장이 토론 면접을, 나와 오 이사가 최종 임원 면접을 하고 있다.
“들어가시죠. 이제 200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유후, 드디어 끝이 보이네요.”
“제 마음은 벌써 이들과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하하.”
오 이사가 웃는다. 그 웃음을 보니 나도 힘이 난다.
그래, 신성을 밟아 주는 방법은 결국 기술밖에 없다. 꼼수로 이길 생각 말고 정석으로 이기면 되는 거다. 그게 나의 방식이 아니던가.
복도를 걸어가는데 면접 대기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검정 옷을 입은 사람들만 지나가면 인사부터 해 대는 대기자들. 잔뜩 긴장한 느낌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너무 걱정 마시라. 될 수 있으면 모두 뽑아 드릴 테니까. 솔직히 이런 면접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아닌가? 면접에 임하는 자세와 가능성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음 분 입장하세요.”
“예!”
딸깍. 척. 척.
방문을 열리자 경쾌하게 걸어와 의자에 착석하는 사내. 걸음걸이부터가 마음에 든다. 다른 이의 양복을 빌려 입었는지 약간은 헐렁한 옷이 어설프지만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바른 자세로 앉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한영대학교 물리학과 차효철이라고 합니다.”
“…자기소개 끝났나요?”
“예!”
오 이사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살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면접을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데, 재미있는 양반이 왔다.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엄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고 판에 박은 듯 가족 소개부터 주르륵 읊어 대기 마련인데, 딱 한 줄로 자기소개를 끝내 버렸다.
“스마트 클라우드에 지원하게 된 동기가 뭡니까?”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솔직하군요.”
오 이사가 당황할 정도였다.
“진심인가요? 안 그러면 눈에 띄려고 준비한 멘트인가요?”
“진심입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각자 부자가 되는 게 목표라고 들었습니다. 아닙니까?”
“하하, 정말 용감하군요.”
내가 마구 웃어 대자 차효철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자세는 여전히 꼿꼿하니 좋았다. 나는 그제야 컴퓨터에 올라와 있는 그의 서류와 이전 면접 결과를 살펴보았다.
학점 2.85, 기술 면접 다섯 문제에서 한 문제만 A를 받았고 나머지는 C였다. 토론 면접 점수 또한 C. 몇 안 되는 탈락 대상자 중 한 명이다. ‘학점은 서류 전형 커트라인 밖인데 어떻게 합격을 했지?’ 하며 살펴보니 추가 점수를 주는 어학에서 영어와 일본어 모두 2등급을 받았다. 학점은 바닥인데, 어학에서 2등급을 받아? 문과도 아니고 물리학과 학생이?
게다가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는데, 특기를 적는 칸에 ‘사진 찍기’라고 되어 있다. 얼마나 사진을 잘 찍기에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잘하든 잘 못하든 ‘영어회화’라고 적는 칸을 ‘사진 찍기’라고 적어 놨을까?
시험해 볼 이유는 충분했다. 혹시나 하고 상세 화면으로 들어가 봤더니, 그가 유일하게 A를 받은 기술 면접 문제가 내가 직접 낸 광학 관련 문제였다.
“사장님, 다음….”
“잠시만요, 오 이사님.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오 이사도 자신의 컴퓨터로 같은 자료를 보고 있었나 보다. 나를 쳐다보며 다음 지원자로 넘어가자는 신호를 보냈지만, 나는 싱긋 웃어 주고는 차효철과 눈을 맞췄다.
“솔직히 탈락 대상자가 될 것 같군요. 혹시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탈락 대상으로 여기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일단 학점이 문제군요. 기술 면접 점수도 그렇고, 토론 면접은 지금 말투만 봐도 잘했을 것 같진 않네요.”
“학점으로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모든 것을 차별적으로 대우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대학생에게 우선권을 주지 않는 것은 역차별이죠. 사내에서 평등이란 기회의 평등을 의미합니다.”
“저는 능력이 있습니다. 빛에 관한 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반도체 회사 아닙니까? 포토 공정(Photo-lithography: 회로 패턴 새기는 공정)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열심히 그리고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엔 포토 공정을 전공한 석박사도 많습니다. 특기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저, 정말 사진 잘 찍습니다. 프로들 사진전에서 입상한 경력도 세 번이나 있습니다.”
“……!”
왠지 내가 찾던 인물이 드디어 나타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 이사가 ‘내보낼까요?’ 하는 표정을 짓기에 책상 아래로 살짝 ‘아니요!’라고 손바닥을 흔들어 주었다.
“카메라의 구면 수차는 어떻게 극복하죠?”
구면 수차는 렌즈 가운데를 통과하는 빛과 렌즈 외곽을 통과하는 빛의 굴절률 차이로 초점이 맞지 않게 되는 현상이다. 정말 전문가라면 단어의 의미 따위를 내게 물어서는 안 된다.
“카메라 메이커마다 다르지만,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두 장 이상 덧댄 줌렌즈를 장착하고, 될 수 있으면 광각렌즈를 사용하면서 초점 거리를 줄여 주는 게 답입니다.”
“왜곡수차는요?”
“피사체의 직선부가 광축과 비틀어졌을 때 생기는 현상이니, 비싸더라도 비구면렌즈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코마수차는요?”
“플레어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역광을 피하고 반사체를 피해 사진을 찍는 게 답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색수차는 사진기에서 극복 가능합니까?”
“무척 어렵습니다. 아무리 좋은 렌즈라도 인간의 눈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색이 중요한 사진의 경우는 색 필터, 렌즈 코팅, 저분산렌즈 등등을 시의 적절하게 사용해 색수차를 최대한 줄이는 게 최선입니다.”
“합격!”
“예?”
“합격이라고요. 신입사원 교육 마치자마자 디자인팀에 합류하십시오.”
“디자인팀요?”
“디자인팀이 싫으면 불합격입니다.”
벌떡! 우당당탕!
차효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디자인팀! 디자인팀이 제 꿈이었습니다! 확실합니다!”
독특한 성격마저 조너슨과 잘 어울릴 것 같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이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내가 직접 면담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제대로 된 사람을 한 명 찾았으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오 이사님, 남은 면담을 부탁드립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차효철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마지막 질문입니다. 효철 씨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친구가 주변에 있나요?”
“연합동아리 ‘찍새’에 몇 명 있습니다. 아쉽지만 서류 전형에서 모두 탈락했습니다.”
“비슷한 실력에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하세요. 내가 직접 면담을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뚜벅뚜벅.
면접 건물을 빠져나가는데 정말이지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디지털카메라에 아이디어를 보태 줄 카메라 마니아를 얻었으니까.
내 마일스톤은 완벽한 스마트폰을 최종 목표로 두고 차근차근 기술 개발을 해 나가는 것. 휴대폰 기술은 이제 3년 차라 안정권에 들어섰으니 앞으로 몇 년간은 카메라 기술에 매달려야 한다. 당장 초소형 카메라 모듈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해 보고 그걸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잡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는 전 세계 유수 카메라 업체에서 콘셉트가 이미 나와 있는 상황이다. 이미지를 처리할 프로세서가 아직 마땅찮고, 이미지 저장 매체로 카메라에 하드디스크를 달기가 곤란하기에 상용화가 제대로 안 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GPU에서 파생되는 이미지 프로세싱 기술이 있으며, 무엇보다 플래시 메모리라는 강력한 저장 매체를 가지고 있다. 기존 디지털카메라 특허를 가진 업체와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대상 업체가 일본 카메라 메이커가 될 가능성이 높아서 유쾌하지 않을 뿐.
그리고 일본 카메라 업체를 훌쩍 뛰어넘을 또 다른 사업 아이템도 있다.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니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차효철, 차효철… 설마!’
그러고 보니 카메라 메이커 중 올림푸스라는 일본 회사가 있었는데, 디지털카메라 모델 중 CH로 시작되는 것이 꽤나 있었다. 개발의 주역 중 한 사람이 ‘차’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대현전자가 1996년쯤 그걸 수입해서 대박을 터뜨렸다. 원래 내시경을 전문으로 만들던 올림푸스사의 디지털카메라가 한국에서 유독 인기를 끌었던 이유다.
‘설마 그 사람이 차효철, 저 양반? 일본어도 한다고 했는데….’
“에이, 설마. 아무리 인생 2회 차라고 해도 그런 우연이 있으려고.”
- *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창밖에는 딱 봐도 신입사원 티가 나는 이들이 많았다. 알아보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복장과 헤어스타일이 보기에 살짝 불편할 정도로 단정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줄부터 서며, 동기들끼리 있으면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신입사원들이 보이면 봄이 왔구나 하고 깨닫는 회사원은 나 말고도 꽤나 될 것이다.
벌컥!
“헉! 사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어서들 들어오세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오 이사를 비롯한 연구원들, 김 과장을 비롯한 제품 개발자들이 양손 가득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보나마나 타사 제품을 뜯어 조목조목 알아보기 쉽게 분류해 놓은 벤치마킹 상자일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벤치마킹 세팅부터 하겠습니다.”
“나도 돕죠. 부품도 살펴볼 겸.”
“예, 그러시죠.”
우리 회사는 사장인 내가 이리 나서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 이사 같은 임원도, 김 과장 같은 개발팀장도 타사 제품을 뜯어 보면서 실력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한다. 우리 회사는 철저하게 차별하는 곳, 전략을 제대로 이해 못 하거나 타사 기술 분석에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에겐 보너스 따윈 없다.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이며 우리사주로 대박을 친 팀장급들은 그런 나의 차별 전략을 알고 있기에 이런 중요한 일은 직접 행하는 거다. 역시 돈은 최고의 보상이자, 동기 유발 요소다.
“@##$%^&.”
“%^&*[email protected]^$.”
뭔가 재잘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조너슨과 찍새 4인방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대회의실로 들어서고 있다. 그들도 커다란 상자를 잔뜩 들고 있다. 나를 발견하더니 ‘오홋, 벌써 오셨어요?’ 하는 표정으로 종종걸음으로 합류한다.
“신입사원 교육은 어땠나요? 조너슨.”
“아주 좋았습니다. 한국인들의 문화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동료들도 많이 생겼고 말입니다.”
“찍새 여러분도 교육 잘 받았나요?”
“예! 교육 잘 받고 돌아왔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조너슨에게 ‘신제품 디자인 파트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과장 직급을 주었다.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과장이면 대단히 높은 직급이며, 그보다 디자인이라는 업무 영역을 보장해 줬다는 측면에서 특혜에 가깝다. 조직을 키워 나가려면 실력으로 증명해야 함을 신입사원 교육을 통해 알아챘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신입사원 교육에 차효철을 비롯한 세 명, 일명 ‘찍새 4인방’을 붙여 줬더니 아주 죽이 잘 맞았나 보다.
솔직히 찍새라는 연합 동아리 일원들을 소개받았을 때 깜짝 놀랐다. 내가 전생에서 알고 있던 ‘올림푸스 5인방’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중에서 방석일 씨를 탈락시키고 차효철을 비롯한 네 명만 합격시켰다.
훗날 엔지니어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IT 업계 역사를 복기해 보면, 스마트폰을 세상에 처음 내놓을 수 있는 기술적 바탕은 충분했다고 여겨진다. 카메라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도 그중 하나다.
원래 역사에서 방석일, 차효철을 비롯한 찍새들은 디카 시장이 마구잡이로 펼쳐지는 2000년도에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시화공단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방석일이 사장을 맡았고, 차효철이 기술 개발 쪽 책임을 지는 형태였다.
어쨌든 방석일의 사업 능력은 탁월했다. 소니, 캐논, 니콘 등등 일본 브랜드가 판을 치고 있던 디카 시장에서 후발주자였던 올림푸스에 접근해 한국의 판권을 따냈고,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전현지를 광고 모델로 내세워 올림푸스 디카를 단박에 국내 1위에 올려놓았다.
심지어 올림푸스가 강점을 보였던 내시경 시장에서는 대형 병원을 집중 공략해 시장 점유율을 85%까지 끌어올렸다. 그 덕분에 보수적인 일본 회사에서 유일한 외국인 임원이 되었고, 독립적인 사업권까지 보장받는 조건으로 올림푸스 코리아의 사장이 되었다. 몇 년 만에 연매출 1,800억, 영업이익 300억을 이룩할 만큼 다섯 명으로 시작한 회사로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외국계 기업에서 한국인 스타 경영자가 탄생한 첫 번째 사례였다.
방석일이 그런 탁월한 마케팅 능력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IT 업계에서 바라보는 차효철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디지털카메라에서 ‘미리 보기’라는 기술과 ‘방수 디카’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자니까. 물론 물건을 내놓자 미리 보기는 코닥이 원천 특허를 가지고 있었고, 방수 기술은 타사의 무효화 공격으로 특허를 받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제품을 출시했다는 측면에서 실시권을 보장받았다. 즉, 올림푸스라는 디카 후발주자를 소니, 캐논, 니콘과 동격으로 올려놓은 기술자라고 하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그들의 끝이었다. 아마도 2012년쯤이었을 것이다. 일본 올림푸스 본사에서 17억 불 규모의 회계 부정 사건이 터졌고, 방석일 사장이 거기에 연관되었다. 나름 의도야 회사를 키울 목적이었을지 모르나 불법 위에 세운 실적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문제는 한국 지사가 독립 채산제 형태의 기업이었다는 것. 한국 지사의 현금 보유량이 꽤나 컸기에 방 사장은 즉각 해고당하고, 한국 내 기업 자산은 단박에 정리되어 버렸다.
차효철을 비롯한 직원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냥 길바닥에 나앉았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일본 본사에나 해당되는 말이었지, 한국 지사를 왜 신경 쓰겠나? 한국 내 자산은 모두 일본 본사의 분식 회계를 막는 데 쓰였다. 일본이 한국에 직접 투자한 회사가 위험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례였다.
그 뒤로 방석일 사장이야 비자금 횡령이니 뭐니 하며 집행유예를 받는 식으로 몰락했지만, 솔직히 노후 돈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 차효철을 비롯한 남은 올림푸스 4인방이야 그랬겠나. 결국 기술 개발에 청춘을 뺏기고 개털 된 거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혼자 꿀 빨다가 혼자 탈출한 방석일 씨는 처음부터 배제시켜 버렸다. 나는 찍새 4인방이 개발할 ‘미리 보기’라는 기술과 ‘방수 기술’을 아주 잘 써 줄 테고, 보상도 확실하게 해 줄 거다. 솔직히 전생에도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회사에서 그런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면 떵떵거리며 살았을 거다.
나는 이런저런 상념을 지워 버리고 눈앞의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자! 다들 준비가 된 것 같네요. 오 이사님, 디지털카메라 벤치마킹부터 시작할까요?”
“이미 서면 보고를 드렸는데, 개발팀의 이미지 프로세싱에 대한 것부터 듣지 않으시고요.”
“아뇨. BM(벤치마킹)부터요. 조너슨을 비롯한 디자인 파트원들에겐 다소 생소할 겁니다.”
“아, 그렇군요.”
오 이사는 타사 제품을 분류해 놓은 탁자 위에서 각종 부품을 짚어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조목조목 설명하다가 결국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디카는 이처럼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CCD 센서 기반과 CMOS 센서 기반이지요. CCD가 해상도가 좋아서 디카에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CMOS 대비 가격, 전력 소모량, 크기 측면에서 단점이 있지요. 연구소장으로선 CMOS에 한 표를 던지고 싶군요. 아무래도 CMOS 센서가 기존 DRAM 반도체 제조 공정과 동일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개발팀의 의견도 같습니다. 이미지 센서 프로세서(ISP)는 개발하는 입장에서 CCD보다는 CMOS 기반의 센서가 개발에 더 용이합니다.”
“왜죠?”
나는 짐짓 고민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존 반도체 공정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CMOS로 훅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짚어 봐야 한다.
“여기 타사의 CCD 디카를 보시면 이미지를 얻기 위해선 AFE와 V-driver(전압 데이터 분석 부품)를 모두 거쳐야 합니다. 소니, 샤프, 마츠시다 등등 일본 회사들이 해당 부품에 다양한 변형 특허를 가지고 있어 독자적인 개발이 어렵습니다.”
“개발팀 의견은 그렇군요. 그럼 디자인 파트 생각은 어때요? 디카에 대해서는 신입사원 교육 받으며 생각 좀 해 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디지털카메라 워크숍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모두 초대했다.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이들이 직접 전략을 짜게 하는 것이 내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21세기의 최종 결과물. 개발 과정에 어떤 리스크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걸 최대한 짚어 내야 한다.
일단 CMOS 기반으로 가는 것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21세기는 그게 대세거든.
“저희는 기술은 잘 모릅니다. 허나 제품의 기능적인 측면은 파트원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죠. 한국인들이 영어를 이리 잘할 줄은 몰랐습니다.”
“후후, 외국 서적을 읽을 수밖에 없는 마니아들의 특징이죠. 여하튼 말해 봐요. 어떤 기능을 넣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미지 미리 보기와 방수 기능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인 질문을 이어 갔다.
“기능을 넣는 게 아니라 빼야 합니다.”
“빼야 한다고요?”
“예. 쓸데없는 기능과 부품을 모두 빼야 합니다.”
“제품 기획 단계에서는 가격을 후순위로 생각해도 됩니다.”
“가격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만들어 온 목업을 보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목업까지? 좋네요. 어디 한번 볼까요?”
“미스터 차! 우리 아이디어를 보여 드릴까요?”
“좋죠, 파트장님!”
조너슨의 말에 찍새들이 상자를 열었다. 목업이라고 해 봐야 석고를 깎아 만든 모형에 불과했다. 한데 묘하게 21세기 디지털카메라를 닮았다.
“오우!”
“아주 심플한데요. 이게 카메라가 되나요?”
오 이사와 김 과장이 감탄과 동시에 우려를 나타내는 소리를 한다.
보기에는 미려하고 무척 현대적이지만 카메라 렌즈 부위를 싹둑 잘라 낸 꼴이라 이런 걸로 사진을 찍을 수 있나 하는 느낌이 들었을 거다. 나는 내심 좋아라 하며 펄쩍펄쩍 뛰고 싶지만 참았다.
역시 조너슨은 시대를 뛰어넘는 디자이너다.
“신입사원 교육에서 들었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모토는 여러 가지가 있던데, 그중 연구 개발의 모토를 떠올리며 목업을 만들었습니다.”
“외우고 있나요?”
“예. ‘우리가 연구 개발하는 것은 모바일 제품의 미래다.’ 아주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제 마음에 쏙 듭니다.”
“좋네요. 허면, 이게 우리 제품의 미래입니까?”
“그리 생각합니다. 모바일 제품의 성향은 전문성보다는 대중성에 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를 그런 모바일 제품군에 넣는다면, 일단 가벼워야 합니다. 목에 걸어도 무겁지 않고 거치적거리지 않아야죠. 제품의 기본 콘셉트입니다.”
조너슨은 정확히 디카의 미래를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요?”
“기술은 잘 모릅니다만, 조리개를 조작하고 색감을 맞추는 등의 기능은 최대한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즉, 고객이 셔터만 눌러도 초점과 색감이 자동적으로 최적화되어야 합니다. 개발팀에서 해결해 줘야 하는 문제입니다.”
“조너슨 파트장님, 개발팀을 너무 믿으시는군요.”
“미스터 김이라면 잘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보너스 많이 받으십시오.”
“하하하하!”
나름 조너슨은 벌써부터 사내 정치에 꽤나 익숙해진 모습이다.
우리 회사는 신입사원 교육 때부터 선의의 경쟁을 무척 강조한다. 일의 당위성만 보장된다면 일을 주고받는 것은 각자의 인사 고과에 플러스로 작용함을 잘 알고 있음이다.
“디자인팀에서 연구소에 요청할 사항이 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광량에 따라 조리개가 자동으로 조절되었으면 합니다. 렌즈나 필터 없이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이미지 센서에서 피드백 회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가능합니다.”
“그리고 배터리를 최대한 줄여 주세요. 건전지 두 개 정도로 가능할까요? 세 개 이상이면 디자인이 망가집니다.”
“으음… 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전력 CMOS가 되어야 하는데 CCD보다 이미지 해상도가 떨어져도 괜찮습니까?”
“디자인팀은 저전력 구조에 적극 동의합니다. 전문가용 카메라를 만드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사장님?”
“동의해요. 우린 대중적인 모바일 제품을 개발하는 겁니다.”
나는 과할 정도로 조너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너슨이 옆에 앉은 차효철의 어깨를 툭 쳤다.
“미스터 차, 말 좀 해요. 나만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아니잖아요.”
“저 같은 신입사원이 말해도 되는 자리입니까?”
“당연!”
“물론이지!”
“신입사원 교육 때 안 배웠나요?”
이곳저곳에서 말이 툭툭 튀어나오자 차효철이 당황할 정도다.
“죄송합니다. 여하튼, 찍새들 관점에서 보면 사진이 흔들리지만 않으면 일단 합격이죠. 손 떨림 방지 기능을 넣을 수 있나요? 고급 카메라에만 있는 기능인데….”
“으음, 위치 센서를 하나 더 박으면 될 것 같은데 시도해 봅시다.”
“저는요, 망친 사진은 버리고 다시 찍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미지를 미리 보면서 밝기 조절과 색감 조정을 해 볼 수 있나요? 맘에 안 들면 지워 버리게.”
“그러면 리얼 타임 출력이 가능토록 해야겠네요. 색감 조정을 해 본다면 RGB 레이어도 분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고요.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아요.”
찍새 중 한 명의 말에 김 과장이 중얼거렸지만 나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고 싶었다.
여기 있는 기술자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거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대박으로 느끼는 아이디어다. 인생 샷을 얻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찍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미리 보기 기능이라고 해야겠군요. 맞나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일이라 내가 말을 보탰다.
“적당한 명칭인데요, 사장님.”
“김 과장, 개발 순위를 높여 줘요. 괜찮아 보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김 과장 옆에 있던 개발자들이 열심히 메모를 한다. 오케이! 잘 개발해 줘요.
“저도 의견이 있는데요, 현재 디카 프린터가 너무 비싼데. 좀 싸게 만들 수는 없나요?”
“그러게요. 프린터도 만들어야겠네요. 그 생각을 못 했군요. 연구소에서 파생 프로젝트로 가져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제가 늘 생각했던 건데요. 간혹 여행 중에 카메라가 물에 젖으면 완전 헬이잖아요. 방수 기능을 넣으면 안 되나요?”
오오오오옷!
방수 기능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나는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모바일 제품 전부에 확대할 수 있는 아이디어 같은데요?”
“사장님, 무척 좋은 아이디어지만 완전 방수는 기술적으로….”
“오 이사님, 회로 부위를 모두 2중 구조로 만들면 어떨까요? 솔직히 누전만 안 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라면 어찌어찌 될 것도 같네요. 해 보겠습니다.”
“필터도 내장시켜 주시면 안 되나요? 빛 물결만 없애도 화질이 확 살아나는데. 그건 해상도 문제가 아니거든요.”
“일종의 노이즈 필터군요. 아주 간단해요. ISP에서 센서 신호의 앞뒤를 모두 잘라 내면 되니까.”
“김 과장님, 아예 이미지 매핑 방식은 어떤가요? 그럼 색감도 좋아질 것 같은데. GPU에서 이미 썼던 방식 아닙니까.”
“대박!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생각 못 했습니다.”
한번 물살을 타니 기막힌 아이디어가 여기저기서 막막 튀어나온다. BM을 충실히 했던지라 아이디어 못지않게 대안도 즉각 나올 정도다.
“저, 저도 아이디어가… 있는데요. 저장 매체를 플래시로….”
그러던 와중에 찍새 중 여태 가만히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우린 하드디스크 따윈 안 씁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메모리 스틱으로 컴퓨터와 연결해서 홈페이지 업로드할 수 있게 하면….”
“……!”
“대박!”
“대박!”
짝! 짝! 짝!
찍새들의 말에 결국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손쉽고도 기막힌 아이디어가!’라고 생각하면서 대박이라고 외쳤지만, 나는 잊고 있었던 사실 때문에 손뼉을 쳤다.
그래, 맞아! 디카 이미지를 직접 핸들링하면서 인터넷 홈피에 다시 한 번 업그레이드된다. 사람들이 사진을 왜 찍나? ‘내가 정말 멋진 곳에 가서 잘 놀았다!’ 하고 자랑하는 목적도 있잖나. 방법도 무척 간단하다. 그냥 찍어서 올리면 되는 거다.
“이거 빨리 개발해야겠는데요. 카메라 메이커들이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 말입니다.”
“그래야겠네요. 오 이사님이 TF를 구성해 주시겠습니까?”
“영광입니다.”
내 말에 오 이사는 대단히 기뻐했지만, 김 과장의 얼굴에 살짝 실망감이 스쳐 간다.
“김 과장은 ISP 개발자 한 명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가 줘요. 조너슨, 차효철 두 분도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예?”
“미국요?”
“서둘러 줘요. 코닥으로 가세요.”
“코닥요?”
“가서 특허를 구매하든, 우리 부품을 일부 납품해 주는 조건으로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든.”
나는 김 과장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다. 이제 이런 기술적인 일을 살짝 벗어나는 것까지 해 봐야 한다. 잘되면 베스트, 못 돼도 상관없다.
결국 1990년대 말이 되면 코닥은 디카 시장에서 참패를 인정하고 특허팔이에 나서니까.
“크로스 라이선스라면, 일본 회사와….”
“코닥만 끌어당기면 일본 카메라 회사는 우리와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아….”
“미리 보기와 방수 카메라는 코닥이 특허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아요. 잘 살펴보고 이 두 가지 특허를 구매할 수 있다면 베스트! 그게 아니라면 크로스 라이선스!”
“코닥이 눈치채지 못하게. 맞습니까?”
“정확해요!”
“사장님, 방금 그 표정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같아요!”
“첩보 영화! 아니, 기업 영화인가?”
“이럴 때 카메라가 있어야 하는데!”
차효철을 비롯한 찍새들은 손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셔터를 마구 눌렀을 법한 표정을 지었다. 이 워크숍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척 마음에 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