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챕터 4
-긴급 속보를 알려 드립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다리가 무너지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안은주 기자를 연결합니다. 안은주 기자!
-예, KBC 안은주입니다. 지금 이곳은 성수대교 붕괴 현장입니다. 각종 중장비가 이미 도착하여 상황이 정리되고 있는데요. 다행히 대현건설 임직원들이 양쪽 입구를 모두 봉쇄하고 있었기에 인명 피해는 없는 상황입니다.
-멀쩡한 다리가 무너지다니,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멀쩡한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쇳덩이가 다리에 박혀 있던 대형 볼트입니다만, 여자인 제 힘으로도 쉽게 빼내서 들고 왔을 정도입니다. 이미 이 다리에서 안전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는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정말 다행히 아닐 수 없군요. 추석 귀성객이 몰려든 와중에 무너졌다면 대형 참사가….
TV에서는 정규 방송을 중지하고 긴급 뉴스를 편성해 성수대교 사건을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오늘쯤 다리가 무너질 거라는 정 사장의 말에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정말이지 타이밍이 딱 맞았다. 미국 국빈 방문이 성사 직전에 있다는 핑계로 청와대를 방문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는데, 다리가 무너지든 안 무너지든 그건 정헌몽 사장의 운이라 여겼건만… 정 사장의 운은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틱. 딸깍.
“어허, 우째 이런 일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뉴스 앵커 말대로 귀성길에 다리가 무너졌다면 대통령님께 큰 누가 될 뻔했습니다.”
“유 사장의 말대롭니다.”
“으흠, 듣고 보니 그렇군. 한데 대현건설이라는 이름이 방송을 타니 영 껄끄럽구먼.”
같이 자리한 박준태 의원이 추임새를 넣었지만 YS는 탐탁잖게 TV를 보았다.
“부실 공사는 기존 정권들의 대표적인 부정부패가 아닙니까. 굳이 대현건설이 아니라고 해도 실력 있는 건설사에 안전 실사를 맡겨 보시는 것은 신한국건설이라는 국정 목표에 잘 어울리는 일이 아닐는지요.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하하, 예전에 유 사장이 대현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나 봅니다.”
“아, 꼭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유가 아니면? 뭣 때문에 그러나? 대현을 살려 보자 뭐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금융실명제 때문에 경제가 위축된다는 정치 공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건설은 즉각적인 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고, 국민 안전에 관련된 일이니 혈세 낭비라는 소리를 꺼내지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으흠, 결국 제대로 된 건설 회사가 필요하다… 그 말이군.”
“…….”
YS도 대현건설에 대해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나 보다.
“알았네. 안 그래도 대현은 지켜볼 생각이었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미국 국빈 방문에 대해 말해 보게. 원래 면담을 요청한 이유이지 않나.”
대현을 지켜본다고? 원래 역사와 조금은 다른 얘기를 한다. 내심 그 의미가 궁금했지만 대현에 대한 말은 이쯤 해야겠다. 잠깐 팔이 안으로 굽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정치권에 끌려 들어가는 것은 사절이다. 나는 스마트 클라우드 지분 10%를 제대로 쓰기 위해 잠시 정치권에 접근한 것이다. 더 이상 관여했다간 자칫 불타 죽을 수도 있다.
“빌 클린턴 정부는 경제 사절단을 대동하는 조건으로 국빈 방문을 최종적으로 승인할 예정입니다. 국빈 방문이 1년에 두 번으로 제한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동북아에 민주 정권이 들어섰다는 것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마치 외교부 수장처럼 얘기했다. 솔직히 나는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 미 국빈 방문이 성사되어도 빠르다고 여겼는데, 임기 1년 차에 성사되다니 케이슨이 정말로 빌 클린턴 정부에 꽤나 영향력을 가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제 사절단을 대동한다면 외려 우리 정부가 환영하고 또 환영할 일이지. 자네가 안팎으로 힘을 많이 썼다고 하더니, 정말 일 처리를 잘했구만.”
“제 회사의 투자자들이 대부분 미국 사람인 것을 대통령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투자자들이 미 행정부와 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 행정부의 경제 활성화 정책이 대한민국의 IT 기술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그쪽에서 스마트 클라우드, KT, SJ, 대현전자 등을 민간 외교 차원에서 같이 불렀습니다. 신성전자도 부르긴 했는데….”
“크흠! 신성은 아니야. 탈세하는 기업에 무슨 경협을 맡기나. 세금부터 내라고 해야지.”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이희건 회장이 땅을 치고 아까워하겠군. 이번 경협에선 미 관공서 인트라넷 구축에 쓰일 반도체 납품이 논의될 텐데 말이다. 일시적으로 관세 혜택을 줄 테니, 미 관공서 납품엔 가격을 깎으라고 할 것이 뻔하다. 한마디로 초대형 납품 건이다.
미국 회사 보호 차원에서 마이크론의 DRAM 납품 물량에 대해선 기존 출고가를 유지시켜 주고, 우리나라 DRAM 업체의 납품 물량에 대해선 가격을 후려쳐서 예산 절감을 하려는 목적이다. 후려친다 해도 마이크론 납품가의 80% 정도면 스마트 클라우드와 대현전자의 순익률은 20%를 넘을 테니 박리다매라 쓰고 대박 장사라고 읽는 협상을 할 수 있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허면, 경협에서 논의할 의제는 무엇인가? 대북 관련이나 한일 관계는 아닐 테고….”
“의제는 외교부 쪽에서 협의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민간 외교 차원에서 경제 협력에 대한 실무의 일원일 뿐입니다.”
“허허. 유 사장, 겸손해할 필요가 뭔가. 자네가 경협에서도 큰 의제를 하나 따내지 않았나? 미 행정부가 대한민국을 아시아 IT 기술의 허브로 만들고자 하는 것 말일세.”
박준태 의원에게 미리 언질을 해 뒀더니 추임새가 장난 아니다. 시의 적절하게 툭툭 치고 들어온다.
“아시아의 허브?”
“예. 미 행정부의 경제 동력은 닷컴 사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인터넷 사업인데, 고속 광통신 기간망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에, 미국 AT&T사가 주관하는 국제 인터넷 통신망을 한국, 일본을 거쳐 차후엔 중국까지 뻗어 낼 생각으로 보입니다. 현재로선 대만까지만 연결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여하튼 동북아의 인터넷 서버를 대한민국에 설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훈이와 케이슨을 엮어 어렵게 얻어 낸 기회다. 원래 역사에선 중국을 겨냥하고 대만에 설치되는 인터넷 서버를 우리가 가져온다면 수십 년 뒤 클라우딩 서비스가 상용화될 때 대한민국은 엄청난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호!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인터넷을 뻗어 내겠다!”
“문민정부는 동북아시아의 유일무이한 민주 정권 아닙니까. 언론 자유나 정보 관리 측면에서 미국에 가장 근접한 나라라고 로비, 아니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린 결과입니다.”
나는 YS를 훌쩍 띄워 주었다.
“그 말대로라면 내가 합의 못 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일세.”
“좋은 일이긴 합니다만. 미국 애들이 손해 볼 애들이 아니잖습니까. AT&T의 국제 인터넷 사업 중 동북아시아 쪽 인프라 확보에 15%의 자금을 출자하고, 대한민국에 깔리는 광통신 회선의 사용료는 AT&T에 한하여 면제, 그리고 향후 서버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30%는 미국 회사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 미 측 요구의 골자입니다.”
“그 모든 게 세금일 것 같은데, 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가나?”
“국제 인프라엔 이미 KT가 합류했지만 추가 재원이 3천억은 필요해 보이고, 대한민국의 광통신 인프라는 초기 3천억에서 시작해 향후 10년간 조 단위로 돈이 들어갈 겁니다. 서버는 통신사들의 재량에 달린 문제이지만 못해도 연간 천억 정도는 미국 측 반도체를 사 줘야 할 겁니다.”
“오! 이거 생각보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겠군.”
21세기를 살다 온 나로서는 이런 조건이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건데 싶다. 나중엔 엄청 남는 장사가 되니까 말이다. 미국의 광통신 모듈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국산화도 안 된다. 어차피 써야 하는 돈이다.
“일본이 외국산 배제 전략을 쓰다가 지금 미일 반도체 협상에서 대규모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인터넷 서버에서 마이크론, TI 같은 일부 미국산 반도체를 받아 주는 것으로 일본 같은 무역 분쟁이 벌어질 소지를 없앤다면 우리나라엔 장기적으로 이득입니다. 경제 협력안에 서명하셔도 무방하실 겁니다.”
그냥 서명하세요. 이건 대박입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네. 그보다 국내에 광통신 인프라가 꼭 필요한가? 구리선 인프라가 훨씬 예산이 적게 들어간다고 들었네.”
“예산도 중하지만 차후 어떻게 평가될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규모로 보나 기간으로 보나 국책 사업이 될 텐데, 재투자라도 하게 된다면… 장기적으론 광통신이 유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예산이 아니라 훗날의 역사적 평가이다.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내 전문가와 좀 더 상의해 보지.”
YS는 머리는 빌려 오면 된다고 늘 말했던 양반이다. 정권 초기에는 주변에 꽤나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야 비선 실세들 때문에 정치는 물론, 경제까지 말아먹지만 지금이라면 광통신에 손을 번쩍번쩍 들어 줄 거다.
“하하, 유 사장을 보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참 밝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님께서 이런 젊은 기업가를 격려해 주신다면 더 힘을 내겠지요.”
얘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박준태 의원이 나를 위해 멍석을 깔아 준다.
“어허, 미 국빈 방문이 큰일이긴 하지만 문민정부에서 특혜는 없네.”
YS는 특혜는 없다면서 적당히 선을 그었다. 정치하는 양반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 특혜가 아닌 제안을 하면서 내 밥그릇을 챙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당연합니다. 정경 유착은 신한국건설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죠. 그러니, 감히 제가 대통령님께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될는지요?”
“제안? 어디 한번 해 보게.”
YS가 순순히 받아 준다. 특혜가 아니라면 들어는 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 회사가 11월에 상장을 할 예정입니다. 외국 자본으로 시작한 기업이지만, 이제 그 자본조차 토종 자본으로 갈아치울 때가 온 것이죠. 이에 대한민국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바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님께서 취임사 때도 강조하셨던 균형적인 기업 발전에 부응코자, 제 회사의 지분 10%를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위임하면 어떨까 합니다. 상장 초기에는 대략 1천억 수준의 돈이지만 확신하건대 두 배 세 배로 뛰어오를 겁니다.”
“듣기 좋구만. 그런 큰돈을 공단에 맡긴다는 건 뭔가 요구할 것이 있다는 말 같은데?”
“지분 처분을 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맡겼으면 하고, 담보 대출로 중소기업을 지원하시는 것은 국가의 몫이겠지요. 대신, 배당금으로 나오는 돈은 국책 사업을 성공적으로 실행한 중소기업에 상금으로 줬으면 합니다. 외람되지만 그 상금의 대상은 스마트 클라우드가 선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오호, 국책 사업을 수행한 중소기업에 순위를 매기겠다! 순위별로 상금을 주겠다!”
“예. 상위 3개사에만 상금을 주려고 합니다. 배당금은 최소 30억이니 중소기업들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열심히 일한 기업엔 상을, 국책 사업비를 눈먼 돈 취급하는 기업들엔 경고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겁니다.”
내 지분 10%를 이리 쓰는 것은 고민 끝에 나온 해결책이다. 내 회사가 커질수록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세력이 늘어날 테고 내 지분의 법적 한도 30%만으론 위험하다. 자사주 20%가 있지만 IMF가 생기며 흩어질 가능성이 높고, 10%를 공단에 맡겨 두고 처분 못 하게 법적으로 막아 두면 안전한 금고나 마찬가지.
무엇보다 큰 이유는 용인밸리에 입주시킨 중소기업들을 내가 일일이 관리 감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향후 탈일본을 목적으로 하든, 스마트폰 개발을 목표로 하든 기술 개발을 시켜야 하는데, 국책 사업을 이용해 자금 지원과 상금으로 끌어당기면 빠른 시간 내 큰 폭으로 성장할 것이다. 나름 공무원들이 돈 집행은 잘하거든. 먹튀들을 솎아 낼 방법만 있으면 된다. 상금을 핑계로 순위를 매기는 것은 그중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유 사장이 세금을 제대로 쓰는 법을 알아! 나라에 기부하는 방법도 아주 멋지구만.”
“대한민국에 한미합작, 한일합작 회사도 꽤나 있습니다. 중소기업 공단에서 외국 지분을 매입해 온전한 한국 회사로 만드는 것도 신한국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탁!
“바로 그걸세, 그거!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었는데, 자네가 딱 일깨워 주는구만! 하하하하하!”
YS는 무릎을 치며 호쾌하게 웃어 댔다. 이 면담 내용이 장관들과 실무진에 전달되면 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용인밸리에 입주한 일본 회사들의 지분을 잠식하는 일과 엔비디아 지분을 매입하는 일 말이다. 정부가 지분 중 몇 프로만 매입해 줘도 적대적 M&A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통령님 말씀을 들으니 저 또한 속이 후련합니다. 이 면담록이 국무총리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챙기겠습니다. 하하하.”
박준태 의원이 ‘유 사장, 멋진 선물을 받아 가는구만.’ 하는 표정으로 같이 웃어 댄다. 박준태 의원은 이 제안이 내게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 꿰뚫고 있다. 한때 거대 기업의 경영자답다고 해야 할까. 나 또한 배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이제 엔비디아를 포함해 여러 회사를 내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었다.
- *
“엔비디아 지분 25%, 2,500만 불 투자 맞습니까?”
“예, 틀림없습니다.”
“GPU 특허는 공동 특허로, 설계 및 제품 실시권은 양사에 제한 없고 타사의 로열티와 특허 침해에 대해서는 공동 대처한다. 신주(신규로 발행하는 주식)를 공모할 때는 스마트 클라우드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이 조항에도 동의하시는지요?”
“신주 발행의 20%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예, 그렇죠. 그럼 이 모든 것에 동의하신 거죠?”
“그렇습니다. 서명하시죠.”
“좋습니다.”
쓱. 쓱.
나는 최종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사항을 다시 한 번 언급했고 고개를 끄덕이는 젠슨황 엔비디아 사장과 함께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케이가 작성한 계약서이기에 내게 불리한 조항은 없었다.
짝! 짝! 짝!
“호호, 두 분 모두 아주 근사한 계약을 하신 거예요. 이런 빅딜에 공증을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케이는 정말 신이 난 듯 손뼉을 쳐 댔다. 솔직히 케이는 이 투자에서 서너 배는 건질 수 있겠지 하는 예상으로 빅딜이라고 칭했겠지만, 20년쯤 뒤에는 백 배쯤 오르게 될 거다. 물론 현 지분의 25%는 엔비디아가 내년쯤 상장해서 신주를 발행하고 주식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그 비율이 훅훅 떨어지겠지만, GPU 특허와 설계를 200억 남짓 되는 돈으로 영원히 산 것이나 다름없기에 엄청나게 남는 장사다.
“저도 스마트 클라우드 같은 멋진 시스템 메이커와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여기서 근무하고 싶군요. 활기찬 분위기도 그렇고, 주변 환경도 그렇고 미국 못지않습니다.”
“계약 전에 엔지니어도 보내 주시고, 성의를 보여 줘서 고맙습니다.”
“사실 처음엔 실력을 증명하려고 출장을 보낸 것인데, 직원들이 아예 머물겠다고 하더군요. 주가 좀 올려서 딜하려고 했더니 자칫 계약이 깨지면 직원들이 회사 옮길까 봐 냅다 달려왔습니다.”
“하하하하!”
대만 사람답게 농담을 찰지게 잘한다. 여하튼, 엔비디아 개발자들이 수차례에 걸쳐 50명 가까이 몰려왔기에 한 층 사무실의 절반을 할애해 줘야 할 정도였다. 이젠 엔비디아 한국 지사를 세워도 되니 용인밸리에 정식으로 입주시키면 될 것이다.
용인밸리에서는 온갖 외국인을 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IT 산업에 관련된 회사들이 즐비하고 주변 환경도 멋지기에 한번 입주한 사람들이 빠져나가질 않았다. 1990년대 한국 기업의 수준을 훌쩍 넘어 공장 오염원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어디를 봐도 조경이 잘되어 있고, 운동장과 조깅 코스, 심지어 야산을 거쳐 저수지를 끼고 도는 산책 코스까지 있기에 그렇다.
아침마다 용인밸리로 들고나는 통근 버스만 200여 대에, 승용차 주차장은 충분히 만들었다고 여겼는데 언제부턴가 10부제를 실시할 정도다. 용인밸리에 입주한 직장인들이 어림잡아 1만 5천 명은 될 것 같다. 하긴 스마트 클라우드만 해도 직원이 7천 명에 가깝다. 내년에 제2단지가 완성되면 주변 풍경은 또 한 번 달라질 것이다.
“저희 개발자들이 말하길 한국의 돼지고기가 그리 맛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소주라는 술도 아주 맛있고요.”
“삼겹살에 소주 말씀하시는 거군요. 오늘 저녁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일단 개발자들과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고 계시죠.”
“하하, 감사합니다.”
“있다가 뵙죠. 이 비서, 4층 엔비디아 파견자들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세요.”
“예.”
이 비서가 엔비디아 황 사장 일행을 데리고 나가자 그제야 케이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온다.
“호호, 연일 강행군이네요.”
“케이도 마찬가지잖아.”
나도 그렇지만 케이도 강행군이다. 11월 말 상장을 앞두고 내 회사 챙기랴, 용인밸리에 입주한 회사들의 지분 계약까지 챙기랴, 심지어 버지니아 트레이딩도 훅훅 뻗어 나가고 있으니 무척 바쁠 것이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줘. 상장하고 나면 스마트 클라우드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늘어날 텐데. 지분 확보는 미리미리 해 둬야지 않겠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회사들은 미래에 크게 성공하는 곳이잖나. 괜히 정보를 노출시켜 남 좋은 일을 시킬 이유는 없다.
“누가 수한 씨 찜해 둔 회사 날름할까 봐요?”
“그것도 그거지만 12월이면 우리 둘 다 한국에 없을 거잖아. 그 전에 미리 일 처리를 해 둬야지.”
12월이면 중요한 일이 줄줄이 있다. 미 국빈 방문에 쫓아가 경협에 머리를 보태고, 에그박스 쇼 케이스에서 박수도 쳐 주고, 파이오니어 나스닥 상장한 거 축하 파티도 해야 하고 말이다.
“호호호, 그러네요. 여하튼 나도 좀 먹어도 되죠?”
“10% 이상만 욕심내지 않는다면 외려 고맙지. 케이는 우호 세력이잖아.”
“저는 언제나 수한 씨 편!”
이미 퀄컴, ARM사 같은 회사의 지분은 20% 가까이 확보했으니 문제없고, 11월 말까지는 엔비디아를 시작으로 DISCO, 모리타 같은 일본 기업의 지분을 15% 이상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만의 생태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다.
원래 시간대로라면 마지막 학기말고사와 대현그룹 공채 준비로 바빴을 1993년 10월이 기업 사냥을 하면서 지나가고 있다. 똑같이 바쁜 것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간혹 거울을 보면 지금의 나는 앳된 모습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내 이력을 모르는 사람은 나를 30대 초중반으로 생각한다.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싶다.
“있다가 수정각으로 와. 나는 황 사장 데리고 갈게.”
“수정각은 삼겹살 굽기엔 너무 비싼 곳 아니에요?”
“나름 한국에 온 손님인데 대접은 해 줘야지. 우리도 오랜만에 맛난 거 좀 먹고 말이야.”
“하긴 돈 벌어서 뭐하겠어요. 소고기 사 먹어야죠. 아, 황 사장은 중국계라 돼지고기를 더 좋아한다고 했나? 하여간 있다 봐요.”
또각또각.
멀어져 가는 케이의 뒷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저리 능력 있는 여자인데, 게다가 보기 드문 미인인데 왜 나는 전생에서는 이름 한 번 들어 보지 못했을까 하고 말이다. 현 추세라면 힐러리 정도는 아니더라도 유명한 CEO는 되었을 법한데, 원래 역사에선 파라곤에서 시타델이 득세하며 힘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그리 보면 케이의 인생도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이리 부려 먹어도 전혀 양심에 꿀릴 게 없네. 아니, 어차피 윈윈인가.
- *
시간은 흘러 11월 중순, 서울 여의도 증권 거래소.
펑! 펑! 땡땡땡땡!
“보십시오! 스마트 클라우드 주가가 상한가로 직행합니다.”
와아아아!
“스마트 클라우드의 상장을 축하합니다.”
“유 사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대박 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제게 이런 날이 오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장안의 화제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기업공개와 주식 공모를 할 때부터 불이 붙더니 주식 상장도 하기 전에 액면가를 분할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지금 주식을 오픈하고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상한가를 치고 있다. 전광판에는 25,000원이라는 숫자가 번쩍이고 있다.
권 부장, 나 부장을 비롯해 용인밸리에 입주한 온갖 기업인들, 픽사를 비롯한 해외 협력 업체 임원들, 전경련 사람들, 심지어 주한 미국 대사까지 와서 축하를 해 줬고, 나는 악수를 하고 감사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
그중에 가장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 이는 당연 케이다.
“축하해요, 수한 씨! 봐요, 내가 시총 2조는 넘을 거라고 했죠?”
“솔직히 가능할까 싶었는데, 케이 님 말씀이 백번 옳았습니다. 역시 금융 수학을 공부하신 분이라 다르긴 다른가 봅니다.”
“호호호호. 이건 시작이에요. 저거 열 배는 키워야죠. 알죠? 나도 주주라는 거.”
“아유, 그럼요. 주주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죠.”
“호호호.”
“와하하하하!”
나는 케이를 잔뜩 치켜세워 주었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도 맞장구를 쳐 줬다. 권 부장은 특히나 크게 웃었다. 그는 시총 1조 정도로 예상했으며, 나도 동의하지 않았던가. 케이가 그 얘기를 듣고는 피식 웃으며 모든 계산을 다시 했다. 그 결과 지금 스마트 클라우드는 단박에 같은 시각 신성전자의 시총을 뛰어넘고 있었다.
주식 공모 때부터 예견된 일이긴 하다. 미국 물주들이 외국인 주식 보유 한도 10%를 꽉 채워서 가져간 데다 증권사들조차 경쟁적으로 스마트 클라우드를 사대고 있다. 증권 지라시마다 12월에 있을 YS의 미 국빈 방문의 의제 중 하나가 주식 시장 개방 확대이며 그 타깃이 스마트 클라우드라는 정보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워드를 비롯한 미국 물주들이 현금 회수 대신 스마트 클라우드 주식을 지속적으로 원하고 있기에 지라시답지 않게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여하튼 케이가 복잡한 계산 끝에 신주 4,500만 주를 시장에 풀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구주(비상장 주식)를 합치면 시가 총액은 2조가 훌쩍 넘는다. 내 지분은 30%를 유지하며 자사주 할당을 제외하고도 유동 자금을 1조 이상 확보한 것이다.
지금도 대박이지만 주가는 앞으로 더욱 오를 테니 초대박이라고 할 것이다.
“사장님, 이렇게 시작하면 제2단지 투자는 은행에 손 내밀지 않고서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죠? 역대 이런 회사가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단언컨대 없었습니다. 하하하.”
“어허~ 나~는 부잘세~ 나는 부자~ 역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해~ 부자다~ 부자다~”
권 부장은 껄껄 웃어 대고 나 부장은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있었다. 아무나 붙잡고 자신이 부자라며 아리랑 가사를 맘대로 바꿔 가며 노래를 불렀다. 하긴 우리사주를 1만 주나 받은 사람이 아닌가.
우리사주를 주당 2만 원에 직원들에게 풀어 줬는데, 나 부장은 2억이나 되는 돈을 주저 없이 투자했다. 나 부장이나 권 부장이야 버지니아 트레이딩 상장 때 받은 주식이 있었기에 자금 조달에 문제가 없다 쳐도 다른 직원들의 열기 또한 뜨겁기는 매한가지였다. 은행들이 너도 나도 몰려들었기에 우리 직원들은 주택 담보 대출과 거의 차이가 없는 이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은행으로선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셈이다.
“자, 자! 이제 파티는 회사에서 해야죠? 갑시다.”
“갑시다!”
“호호호, 저도 같이 가요!”
나는 이 비서를 앞세우고 거래소를 훅 빠져나왔다. 용인밸리에 접어들자마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인터넷이 점점 대중화되어 가니 굳이 거래소에 오지 않아도 상한가 소식이 퍼지는 것은 삽시간이다.
- *
와아아아!
회사 앞마당에는 벌써부터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여사원들도 나와서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인생 1회 차에 대현전자 사원으로서 우리사주 600주를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나도 이처럼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현전자가 온갖 부침을 당하며 주가가 쭉쭉 떨어질 때는 주식 물 타기라는 용어도 처음 알게 되었고 말이다.
나름 전 재산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밑바닥에서 팔았지. 38,000원까지 올랐던 주식을 1,450원에 팔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뒤로 정헌몽 사장도 유명을 달리했지. 나이 많은 직원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 꽤나 된다. 인생 2회 차의 내 회사에선 절대 그따위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정헌몽 사장도 그렇고….
딸깍!
와아아아아!
휘이이익! 휘이이익!
차에서 내려 앞마당에 들어서니 사방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몰라도 A4용지로 접은 종이비행기가 수도 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장에서도 작업자들이 우르를 몰려나왔고, 10층 사무실 건물에서는 창밖으로 직원들이 얼굴을 내밀고 손뼉을 마구 쳐 댔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대박! 대박! 초~대박!”
“부자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개발팀 만세!”
“사장님 만세!”
“우리사주 만세!”
“사장님 만세! 만세!”
어느새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직원들이 헹가래를 치는 가운데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종이비행기들. 환장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콘서트장에서 팬들에게 둘러싸인 아이돌이 감격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하하하, 그만! 그만요! 하하.”
삐이익!
땅바닥에 내려와 어질어질한 나에게 누군가 확성기를 가져다주었다. 한마디 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 회사 주식 상한가 친 거 아시죠? 다들 기분 좋으신가요?”
“예에에에에!”
“내가 우리사주 포기하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거 잘했죠?”
“예에에에에!”
“한 가지 더 얘기해 줄게요. 주식은 쭉쭉 올라갈 거니까! 시집, 장가갈 때까지, 아니 딸 아들이 시집, 장가갈 때까지 절대 팔지 마세요. 알았죠?”
“예에에에에!”
“우리 회사 모토는 이럴 때 외치라고 있습니다. 다 같이 크게 소리쳐 볼까요! 고객은 고객일 뿐!”
“고객은 고객일 뿐!”
“직원이 왕이다!”
“직원이 왕이다!”
“우린 부자가 될 거다!”
“우린 부자가 될 거다! 될 거다!”
와아아아아!
내 목적은 나를 포함해 날 직접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 행복은 돈과 관련 없다는 정신 승리 따윈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한다. 일만 열심히 하면 스마트 클라우드 직원들만큼은 부자가 될 수 있다. 도전? 혁신? 그따위 거대 담론 따윈 필요도 없다. 부자가 되겠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며 강력한 모토다. 설명도 필요 없거든.
“오늘 같은 날, 당연히 야근 따위는 없어야겠죠? 사장이 직접 명합니다. 지금 즉시 업무 접고 퇴근합니다! 집에 가서 자랑하든, 팀별로 회식하고 회식비 청구하든 자유!”
“자유!”
“뭐해요! 정리하라니까!”
와아아아아아!
나는 회사 정문을 마구 빠져나가며 파티를 외치는 직원들 사이를 뚫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권 부장과 나 부장은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연이어 헹가래질을 당하고 있다. 케이가 내 뒤를 따른다.
“어휴, 이런 분위기에 혼자만 끝까지 일을 해요?”
“날아든 제비는 챙겨 줘야지.”
“아! 박씨라도 물고 왔어요?”
“그걸 모르겠어. 그러니 보러 가는 거잖아.”
위이이잉. 뚜벅뚜벅.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오셨습니다, 사장님.”
“오셨군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 예상대로 김 과장과 조너슨 아이브가 자리하고 있었다. 면담을 요청했지만 주식 거래소에 들렀다 오겠다고 기다리라고 말해 뒀다. 나를 오랫동안 애타게 만든 조너슨이니 나도 조금은 기다리게 해야지 않겠나.
“오! 당신이 수한 씨가 말한 디자이너군요. 반가워요.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케이예요.”
“조너슨 아이브입니다.”
“수한 씨가 엄청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오셨어요? 혹시 스마트 클라우드와 애플을 두고 저울질이라도 한 거예요?”
케이가 눈치 빠르게 조너슨을 갈궈 본다. 상장되기 전에 도착했으면 이직 의도를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돈만 노리는 사람이라면 곤란하다는 것을 케이도 뻔히 안다. 내가 그걸 직접 물을 수 없다는 것도 말이다.
“사표는 한 달 전에 냈습니다.”
“조너슨, 내가 결심이 서면 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나요?”
“디자이너가 맨손으로 올 수는 없지요. 신규 K폰 디자인을 고안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찰칵!
조너슨은 007가방을 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김 과장은 이미 살펴봤는지 조너슨 어깨 너머에게서 나에게 엄지 척을 해 줬다. 기술적으로 아주 근사하다는 뜻일 것이다.
“어머!”
케이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나 또한 깜짝 놀랐다. 훅 하고 넘어오는 감탄사를 케이 때문에 씹어 삼킬 수 있었다.
내가 기억만 할 뿐 실물로 완벽히 만들어 내지 못했던 초슬림 휴대폰 디자인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디자인한 이전의 K폰에서 느껴진 이질감이 싹 사라졌다. 일일이 금속과 플라스틱 벌크를 조각해서 만든 목업에 불과했지만, 미려한 외형 곡선에 액정 모서리와 자판 하나하나에도 군더더기가 없다. 21세기에나 볼 법한 완벽한 예술품.
“네오 블레이드 K! 모델명입니다.”
“네오 블레이드 K!”
“스마트 클라우드라면… 아니, 이 디자인을 현실화시킬 수 있으십니까?”
조너슨의 물음에 나는 열정으로 빛나는 그의 눈을 직시했다.
“할 수 있다면?”
“제가 제대로 찾아온 거죠.”
“연봉 협상은?”
“계약금보단 많이 주시겠죠. 그 정도면 됩니다.”
“하하하하!”
인생 2회 차의 챕터 4가 펼쳐진다.
- *
“픽사 CEO 스티브 잡스를 모시겠습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짝! 짝! 짝! 짝!
특유의 블랙 터틀넥과 청바지를 입은 스티브 잡스가 무대에 오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멀티미디어를 선보인다는 광고가 벌써부터 화제가 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에겐 IT 버블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처럼 보였다.
양팔을 활짝 펼치며 박수에 답하는 스티브 잡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우리 픽사 엔지니어, 그리고 스마트 클라우드를 비롯한 수많은 IT업체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닌가요?”
“하하하하.”
“먼저, 말로 설명드리기 전에 스크린부터 보시는 게 좋겠군요.”
틱!
오오오!
프레젠테이션 고수답게 컨트롤러를 누르는 것도 눈에 잘 띈다. 그의 손동작이 끝나자마자 화면에서 훅 하니 튀어나오는 거대한 공룡 대가리. 티라노사우루스가 건물 안에서 랩터를 찢어발기자 ‘Jurassic Park’이라는 현수막이 나부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비디오는 아주 멋진데, 사운드가 없으니까 심심하군요. 오디오를 켜 볼까요?”
크아아아아아~ 코오오오오!
“사운드가 아주 실감나네요. 한데 배우들 목소리가 없군요. 다른 영화는 없을까요? 5G짜리 하드디스크라 영화는 충분히 들어가 있지요.”
스티브 잡스가 컨트롤러를 만지작거리자 라이브러리 화면에 영화 리스트가 주르륵 펼쳐졌고, 그중 ‘미세스 다웃파이어’라는 영화가 맘에 들었다는 듯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커다란 화면으로 로빈 윌리엄스의 찰진 대사와 표정 연기를 보니 마치 극장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이런, 가족 영화군요. 가족과 함께할 때는 게임이 곁들어지면 아주 좋답니다.”
스티브 잡스가 연이어 컨트롤러를 만지작거리자 미세스 다웃파이어가 빗자루를 들고 벌레들을 쓸어서 집밖으로 내보내는 데모용 게임이 펼쳐진다. 캐릭터화된 벌레들이 빗자루에 얻어맞고 정원 밖으로 쫓겨나는 장면이 코믹하기 그지없다.
“여러분,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이 정도 프레젠테이션을 하려면 비디오 플레이어, 큼지막한 오디오 시스템, 게임기까지, 심지어 각 타이틀을 바꾸려면 비디오테이프나 CD를 갈아 끼워야 하지요. 한데 그 모든 것을 즐기다 보면 뒷정리는 누가 할까요? 미국에 이혼율이 급증하는 주된 원인입니다.”
와하하하하!
“우리 픽사는 세계 평화를 지향하며 가정의 평화까지 책임집니다. 이 모든 것을 단 하나의 기기에 집어넣는 기술력으로 말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멀티미디어 박스! 바로 에그박스입니다.”
화악.
스티브 잡스가 무대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검은 보자기를 벗기자 흰 바탕에 파란 빗살무늬가 인상적인 에그박스가 나타났다. 동시에 화면에서는 크게 확대된 에그박스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자태를 뽐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처럼 강력한 멀티미디어 기기가 단돈 350달러입니다.”
“와우!”
찰칵! 찰칵! 찰칵!
IT 잡지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누군가 손을 번쩍 들어 질문을 하려 했지만 스티브 잡스는 싱긋 웃고 만다.
“주변 기기나 콘텐츠는 어찌하느냐는 질문이겠군요?”
손을 들었던 사람이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린다.
“예상이 맞았나 보네요. 그 질문에 대해선 다른 전문가분이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모셔 볼까요?”
짝! 짝! 짝! 짝!
“안녕하십니까? 파이오니어 이재훈이라고 합니다. 픽사가 멋진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면 저희 파이오니어는 고객에게 싸고 다양한 콘텐츠를 어떻게 전달할지를 고민했습니다. 말보다 직접 보여 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그 이름은 바로 ‘스마트 스토어’입니다.”
쇼 케이스에 참석한 사람들은 화면으로 펼쳐지는 인터넷 화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마트 스토어라는 타이틀 아래 영화, 게임, 오페라, 심지어 오케스트라 실황 녹화 등이 멋진 포스터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각 포스터 옆에는 데모 파일과 가격표가 보기 좋게 딸려 있었기에 정말이지 상점을 방문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새로운 멀티미디어 시대를 보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픽사의 에그박스가 있으며, 우리는 소파에 앉아 이 모든 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지요. 어떻게 보냐고요? 인터넷을 연결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운로드는 컨트롤러로 꾹 하고 눌러 주면 되죠.”
누군가 손을 번쩍 들며 질문을 했다.
“콘텐츠 다운로드는 PC통신에서 실패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제 다운로드 속도는 어찌 됩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기존 모뎀으론 하루 종일 걸릴 일이지요. 허나 AT&T와 베이비 벨이 서비스하고 있는 ADSL 인터넷망으로 접속하신다면 영화 한 편에 10분이면 충분합니다. 파이오니어의 파일 압축 기술로 고해상도 영화도 200M면 충분하거든요.”
“오오오오!”
“불법 다운로드는 어떻게 막을 셈이신가요?”
“그 또한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 에그박스의 액세서리인 메모리 스틱으로 보안 문제는 일거에 클리어 가능합니다. 이 안엔 누구도 풀지 못하는 보안 코드가 새겨져 있죠. 다운로드하는 콘텐츠의 보안 코드와 물리적으로 매치되는 식이라 이 메모리 스틱을 꽂지 않으면 콘텐츠의 실행이 불가능합니다. 즉, 콘텐츠를 카피해 봐야 플레이할 수 없으니 유통 자체가 의미가 없지요. 픽사와 파이오니어는 저작권 보호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오오오!”
“그뿐인가요? 직접 코딩한 게임이든, 독립 영화든 심지어 연주회까지! 모든 콘텐츠 제작자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스마트 스토어에 업로드가 가능합니다. 픽사의 전문가들이 디지털 그래픽과 오디오 기술을 제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콘텐츠를 선보일 수도 있지요. 콘텐츠를 무료로 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픽사에 입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재훈이 녀석 영어가 참 많이 늘었다. 하긴 이제 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나고 있는데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이제 저기 서 있는 아리따운 여성분을 모실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버지니아 트레이딩 CEO 케이 양입니다.”
짝!
재훈이는 말을 마치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케이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무대를 넘겼다.
“스마트 스토어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으신가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픽사와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연합하여 오프라인 스토어도 개장할 예정입니다.”
“오오오오!”
“아내분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시겠다고요? 연인과 함께 슈팅 게임으로 데이트를 즐겨 보시겠다고요? 아니면 가족과 함께 오페라 관람은 어떠신가요? 에그박스 시연 한 번이면 뭐든지 가능합니다.”
따라란.
화면에는 에그박스 수십 대가 커다란 TV와 대형 스피커와 연결되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번쩍거리는 매장에 깔끔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이 고객을 안내하는 광고인데 실제로 방문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은 돈이 넘쳐 나는지 미전역 2백 군데에 오프라인 상점을 동시 오픈한다고 했다.
“에그박스만 있다면 재미없겠죠? 에그박스의 각종 액세서리, 픽사의 그래픽 전문가용 컴퓨터, 앰팩, K폰, 에그펫, 심지어 애플 컴퓨터까지 현존하는 모든 첨단 IT 제품을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브라보!”
스마트 스토어에 입주한 애플의 주주인지 임원인지, 애플 컴퓨터가 마지막 화면을 채우자 기립하여 박수를 쳤다. 이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가 애플과 관계를 개선하는 신호탄이나 다름없다. 복귀는 시간문제다. 애플 주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에그박스에서 픽사 마크를 지우고 하루빨리 애플 마크를 달고 싶을 것이다.
“케이 양, 이제 제가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오! 스티브, 잘 부탁드려요.”
케이는 장난스럽게 손 키스를 하고 내려갔으며, 그 뒤로 스티브 잡스는 농담을 섞어 가며 에그박스가 왜 혁신적인 제품인지 설명해 갔다. 지극히 기술적인 내용임에도 일반인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내는 능력은 실제 들어 보지 않고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잠깐 잡스와의 미래를 생각하는 와중에 정해진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어떻습니까? 이제 에그박스와 새로운 세계를 함께하시죠.”
와아아아아!
짝! 짝! 짝! 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브라보! 브라보!”
찰칵! 찰칵! 찰칵!
환호성과 박수가 끊이질 않았고, 온갖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댔다. 그 모든 사진에는 스티브 잡스와 에그박스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프레젠테이션 한 방으로 IT 버블을 커다랗게 부풀린 스티브 잡스에게 박수를 쳐 줬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 와요. 미스터 유!”
“역시 당신의 프레젠테이션은 최고입니다. 마케팅을 할 필요도 없겠어요.”
“오랜만에 신문의 헤드라인에 내 이름이 오르겠지요?”
“당연하죠.”
“이리 와요. 샴페인은 충분하니까!”
“하하하!”
그 뒤로 남은 일은 무대 뒤쪽으로 들어가 샴페인을 나누고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였다. 계약서 서명은 이미 모두 끝냈으니까. 픽사와 에그박스 부품 납품처를 협의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CPU는 AMD, 하드디스크는 IBM, GPU와 통신칩은 스마트 클라우드, DRAM은 대현전자와 인피니온, 메인보드와 기타 외장재는 모두 용인밸리의 중소기업들이 맡았다. 당연히 조립은 스마트 클라우드. 픽사의 펌웨어를 제외하고 국산화 비율이 70% 가까이 된다. 결국 픽사는 제조 관점에서 스마트 클라우드에 코가 꿰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스티브 잡스가 이면 계약을 통해 CPU와 하드디스크는 원가에 가깝게 수급했고, 파라곤에서 로비에 나서 에그박스를 한미 경협에서 관세 할인 대상으로 지정했기에 판가 350불은 넉넉히 맞출 수 있었다. 내가 한 대당 20달러 정도를 남기고, 스티브 잡스가 20달러, 케이가 5달러쯤 남길 것 같다. 잡스의 성향으로 짐작하건대, 이 기본 모델이 성공하는 즉시 고급 모델이 출시될 것이고 700불, 1,000불짜리가 속출할 것이다. 아이팟이 그랬고, 아이폰도 그랬으니까.
콘텐츠 장사야 재훈이가 알아서 잘할 것이다.
“수한아, 내일 바로 출국하지 말고 좀 있다 가라. 사람이 좀 쉬기도 해야지, 일만 하다 가냐?”
“스마트 클라우드 상장이 잘 끝나긴 했는데 지분 10% 공단 기증 문제도 그렇고 아직 마무리할 일이 좀 남아서. 다음 기회에 놀아 드리죠.”
“뭐야? 내가 나스닥에 상장하면 파티 한번 하기로 했잖아.”
“워싱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정말이지 너무 힘들다. 그리고 솔직히 샴페인은 이제 지겹다. 그래, 네가 한국으로 와라. 난 두부김치에 소주로 파티하고 싶다. 정말로!”
“아, 정말! 마! 두부김치 얘기는 왜 꺼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당장 먹고 싶잖아.”
“호호호, 신사분들. 샌프란시스코에 제가 잘 아는 한식당이 있답니다. 두부김치는 당연하고 낙지볶음에 닭발까지!”
케이가 나와 재훈이 사이에 척 끼어든다.
“정말?”
“그럼요. 날 끼워 주면 알려 주죠.”
“가요! 어서 가요. 거기 있는 안주 다 시킵시다.”
“고고! 고고!”
이미 무대 뒤 피로연장엔 백인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스티브 잡스가 2차전을 뛰고 있으니 이쯤 해서 발을 빼도 무방할 것이다.
“스마트 클라우드를 위하여!”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위하여!”
“파이오니어를 위하여!”
한국과 미국 증시에서 연일 화려한 축포를 터뜨리고 있는 기업의 사장들이 작은 한국 식당에 모여 몇 번이나 건배를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소주가 와인 못지않게 비쌌지만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했다. 멋진 밤이었다.
1993년의 12월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뚜, 뚜, 뚜, 뚜.
-안녕하십니까, 류찬근입니다. 새해 첫 KBC 9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1990년대답게 새해 첫 뉴스는 대통령 신년사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경제라는 말이 여러 번 언급되었습니다.
-작년, 경제 관련 부침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한새미디어 사태에서부터 대현그룹의 계열사 분리, 신성의 비자금 등등 악재가 많았죠. 금융실명제 여파도 만만찮았고 말입니다. 다행히, 지난해 말부터 스마트 클라우드를 비롯한 다수의 벤처 기업들이 주식 상장에 성공했고, 미 국빈 방문의 성공으로 대미 무역 수지가 개선되고 있기에 앞으로의 기대 심리를 반영한 게 아닌가 합니다.
-결국 무역 수지 흑자가 정부의 목표일 텐데, 그 전략은 뭐라고 보십니까?
-반도체와 광통신 인터넷 구축 사업이 정부의 주요 전략입니다. 그간 국책 사업에 만연했던 정경 유착을 확실히 걷어 내기 위해 정부는 중소기업 지원책을 위주로 전략을….
틱!
뉴스에서는 이제 신성, 대현 못지않게 스마트 클라우드라는 이름도 간혹 들리기 시작한다. 내 회사 상장이 영웅담처럼 포장되고 있기에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여하튼 원래 역사대로라면 올해부터 반도체 경기마저 꺾여 무역 적자폭이 커져야 하는데, 오히려 무역 수지가 개선될 조짐이 보인다. 대현전자가 대통령의 정치 보복에서 벗어나 수출을 늘리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신성이 한미 경협에서 빠지고, DRAM 메이커의 대표 격으로 참여한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수한 씨, 조금 우려를 했는데 중소기업 공단에 지분 10%를 맡긴 것은 잘한 일 같아요. 아주 자연스럽게 정부 정책에 호응하는 모양새예요. 그걸 노린 거예요?”
“뭐, 그렇다고 봐야지. 우리가 모든 분야에서 기술 개발을 할 수는 없잖아. 국책 사업은 적당한 방편이 될 수 있어.”
“우호 지분을 안전하게 둔다는 측면도 있고… 여하튼, 돈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치꾼들이 군침을 흘릴 가능성은 높아져요. 알죠?”
“적당한 타이밍에 일부는 시장에 처분해야지. 손 안 대고 증자를 하는 꼴이잖아. 안 그래?”
“증자! 어후, 원래부터 그러려고 작정한 거였군요.”
“자, 자! 여담은 이쯤하고, 아~ 저기 오네. 어서 오세요, 부장님들!”
딸칵!
케이와 얘기를 하고 있자니 나 부장과 권 부장이 사장실로 들어온다.
“다들 앉으세요. 새해 첫날부터 호출해서 미안합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양산에 휴일이 어디 있습니까?”
“영업이야 밤낮이 따로 없습니다. 맘껏 호출하십시오.”
새해 첫날부터 불려 나온 것치고는 다들 표정이 엄청 밝다. 하긴 요즘 살맛 날 거다. 주가 폭등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재산이 훅훅 불어나잖나.
“긴급 소집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솔직히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미국에서 반응이 이토록 폭발적일 줄은 몰랐어요. 물량이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어요.”
케이는 미국인답지 않게 연말 휴가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내가 알려 줄까 하다가 모두 모여서 정보를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리를 마련했다.
“에그박스가 그리 잘 팔립니까? 걱정 마십시오. 양산에서 이미 마구 뽑아 놨지요. 50만 대분은 바로 출고 가능합니다.”
나 부장이 우쭐하며 답했지만 케이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에그박스 현황은 저도 알고 있어요. 문제는 K폰, 앰팩, 에그펫까지 물량이 달리고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스마트 스토어 직원용으로 핸드 터미널 또한 추가로 발주 내야 하는 상황이에요.”
“네에? 전 제품이 다요?”
물량을 조정하고 있던 권 부장이 깜짝 놀란다.
“스마트 스토어에 전시된 제품군이 상호 작용을 하고 있어요. 에그박스를 사러 온 고객들이 네오 블레이드 K를 보곤 눈이 돌아가는 꼴이에요.”
케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러게 네오 블레이드 K는 내년에 발표하자니까.”
“수한 씨, 웃을 일이 아니에요. 미국 TV 채널에서 연일 우리 제품들을 리뷰하는 토크쇼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고요. 각 제품들마다 100만 대는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에요.”
“웃어도 돼. 권 부장님, 대응 가능하죠?”
이제 나도 이 시대의 물동량을 파악해 버렸다. 신규 K폰 물량이 달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디자인부터가 다른데!
“예, 문제없습니다. 용인밸리에 뿌린 조립 하청 물량을 거두기만 하면 됩니다. 사장님, 근데 이런 상황을 정말 예측하신 건가요? 솔직히 저는 재고가 쌓이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했는데.”
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오옷! 벌써 준비하고 있었다고요?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았어요!”
“전화부터 하지 그랬어. 이미 용인밸리는 모든 제품에 대해 월 200만 대 생산 체제가 갖춰져 있어. 올해부턴 북미를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장사할 거야. 준비는 잘하고 계시죠, 부장님들?”
“그럼요. 외주 퀄은 올해부턴 개발팀에서 양산팀으로 업무 이관을 하고 있습니다. 석 달 뒤에는 월 200만 대가 아니라 500만 대까지도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케이 님도 아셔야 할 것 같군요. 올해부터 영업팀은 중국과 유럽 시장을 뚫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북미는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맡아 주세요. 중간 다리 역할은 영업에서 계속하겠습니다.”
“어어, 이러면 내가 날아올 이유가 없었잖아요. 내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