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타이밍
보름 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경제 혁명이라 불릴 소식부터 전해 드립니다. 우리 사회의 온갖 병폐의 온상이었던 검 돈의 고리를 끊는 금융실명제를 정부가 드디어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7시 긴급 국무회의를 거친 후에 발표되었던 대통령의 긴급 담화를 직접 들어 보시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에 의거하여 금융실명제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 명령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과거 금융실명제의 실시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금융시장이 동요하고 경제 안정이 위협받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고심한 끝에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국회에서의 법 개정 절차를 대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의 경제 개혁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비추어….
-재벌들의 반발이 우려되는 와중에 대현그룹에서는 이례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지지하고 나섰으며….
-저희 대현그룹은 정부의 경제 혁명을 적극 지지하며, 계열 분리를 통하여 투명 경영에 영속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뼈를 깎아 내는 고통을 감내하며 임직원들과 함께 국민 여러분의 경제 개혁 열망에 부흥할 것이며….
-신성의 비자금 수사가 본격화되는 와중에 금융실명제까지 실시되자 신성그룹 전체는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는 듯합니다. 국세청장이 직접 나서 특검을 요청하고 있으며, 차명 주식으로 인한 비자금 조성과 탈세 규모는 최소 수천억에서 1조 원까지 육박할 것이라며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신성그룹 총수 일가와 비서실장들을 차례로 소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최근 반도체 호황의 수혜는 고스란히 대현전자를 비롯한 경쟁사들에….
짝짝짝!
“어우, 역시 빨리빨리는 대한민국의 핵심 경쟁력이라니까! 후다닥 잘도 하네.”
밤 9시가 넘었지만 나와 팀장급들은 사장실에 모여 TV를 보고 있었다. 금융실명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결정인 데다 연이어 이어지는 각종 뉴스와 기자회견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긴박감이 넘쳤다. 전생에는 그냥저냥 넘어갔던 뉴스들인데, 인생 2회 차에선 강렬한 희열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절로 손뼉을 쳤다.
“정헌몽 사장님이 의외입니다. 계열 분리는 이미 했는데, 금융실명제 파도에 올려놔 버렸어요. 대현답지 않은 정치인데… 혹시 사장님께서 알려 주신 겁니까?”
“글쎄요.”
오 이사가 내게 물었지만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신성이 엿 먹는 게 고소해 죽겠군요. 하도 저희 발목을 잡기에 한 방 먹이고 싶었는데 정말 제대로 한 방 날린 것 같습니다. 혹시 사장님께서 만드신 그림입니까?”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되겠습니까? 높으신 분들께서 하신 일이죠. 저는 날아가는 화살의 방향을 살짝!”
“아하! 하하하하하!”
권 부장은 좋다고 박수까지 치며 웃어 댄다. 노이즈 칩으로 곤혹스러웠던 때를 기억하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신성 놈들 이 참에 확 꼬꾸라뜨리고, 반도체란 반도체는 우리가 다 먹어 버립시다.”
“나 부장님 말씀 정말 화끈하십니다. 개발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김 과장, GPU인가 뭔가도 내려보내. 내가 마구 찍어 버릴 테니까.”
“하하, 엔비디아 엔지니어와 협의하고요.”
-다음 뉴스입니다. 최근 대현건설의 임직원들이 성수대교의 통행을 막으며 연일 항의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부실 공사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며….
틱!
금융실명제 관련 뉴스가 끝이 나자 TV 카메라는 성수대교로 향했다. 다행히 성수대교 붕괴는 대현건설이 잘 막을 것 같다. 대현건설의 행보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갈 것 같아서 나는 TV를 꺼 버렸다. 난 내 일 챙기기도 바쁜 사람이다.
“자, 자! 우리는 우리 일을 챙겨야죠. 모두들 바쁘겠지만 하나하나씩 챙길 때가 되었습니다. 곧 3분기도 끝나고, 11월 주식 상장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
“예.”
내가 말을 꺼내자 사람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막대한 돈이 걸린 일이지 않나. 또한 상장을 한다는 말은 기업공개를 한다는 뜻이니, 매출 실적과 순익률이 곧 회사 존망과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것을 뜻한다. 현시점이 기업공개에 적합한지 객관적 잣대를 두고 생각해 봐야 한다. 앞으로 펼칠 사업의 성공 여부도 함께 말이다.
“3분기 실적은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권 부장님.”
“예, 사장님. 일단 3분기 매출은 7,630억 이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누적 매출이 2.1조이니 4분기를 보수적으로 산정한다고 해도 올해 총매출 2.8조는 무난히 달성할 겁니다.”
예상 밖의 선전이다. 3분기까지 1조 매출을 예상했는데 두 배수를 넘겼다. K폰을 가져왔기에 가능한 매출일 것이다.
“순익은 어찌 됩니까?”
“순익률은 핸드 터미널 12%, K폰 11%, 에그펫 8%, 앰팩 5% 수준입니다. 3분기 수익은 610억이며, 누적으론 1,620억입니다. 4분기 순익을 예상해 보면, 연 순익은 2,310억 수준입니다.”
“대충 연 수익률은 8% 수준이군요.”
“예. 앰팩이 많이 팔리기는 하는 데 비해 플래시 메모리가 비싸서 수익률이 낮기 때문입니다.”
“개발팀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연구소와 함께 차세대 플래시 구조를 개발 중인데 아직….”
“김 팀장, 죄송할 것 전혀 없습니다. 제조업에서 8% 수익은 나쁜 게 아닙니다. 그리고 권 부장님이 로열티는 매출에서 카운트하지 않았어요. 투자 여력은 충분합니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통신칩 로열티는 퀄컴과 연말에 정산합니다. 못해도 500억가량 될 겁니다.”
“자! 그러면 연 수익은 총 2,800억가량 된다는 말이군요. 우리가 내년도에 오픈할 제2공단에 투자할 규모는 대략 5천억. 순익의 절반은 유동자금으로 두고 나머지 절반을 투자한다고 보면 시중에서 끌어와야 하는 돈은 3,600억 이상입니다. 이걸 토대로 시장에 풀 지분의 규모를 정해 봐야 합니다.”
“버지니아 트레이딩과 협의를 해 봐야겠지만, 주식 배당금 3%가 순익의 10% 정도 되어야 한다는 가정하에 보면 적정 주가 총액은 9,300억가량 되고, 따라서 지분의 40%가량을 시장에 풀어야 합니다.”
“딱 적당한 수준이군요. 주가 총액이 1조가 안 되니 주가가 급등하면 증자를 해도 충분해 보이네요.”
“그만큼 스마트 클라우드가 컸다는 방증입니다. 이리 안정권에서 주식 상장하는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좀체 없을 겁니다.”
“자, 그럼 내 지분 한도 30%, 우리사주를 포함한 자사주 20%를 감안해도 10%가 남네요. 이걸 어쩐다?”
“행복한 고민이신데요?”
“그러게요. 정말 행복한 고민이군요.”
- *
신성그룹 회장실
“회장님, 며칠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기자회견을 하셔야 합니다.”
초췌한 얼굴의 이수학 비서실장이 이 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 회장이 대낮부터 위스키를 마시는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는 마당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래, 특검과 협의는 어찌 됐다고?”
“저를 포함해 임원 몇 명이 들어가기로 협의했습니다. 재판은 대법원까지 가기로 했고, 저는 구속되고, 임원들은 집행유예로 마무리될 겁니다. 1년 뒤에 뵙겠습니다.”
“고생 좀 하겠군.”
“회장님이 하실 고생만 하겠습니까? 1년 정도는 회장님도 뒤로 물러나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결재권은 문제없도록 조치했습니다.”
“그것보다 돈이 문제지. 어찌하기로 했지?”
이미 몇 번이나 보고한 사항을 재차 확인하는 이 회장이었다. 이수학 비서실장은 몇 번이고 확인한 숫자를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비자금은 총 2조 3,400억입니다. 대부분 신성생명과 신성전자의 차명 주식이며, 지분율 29.99%를 제외하면 대략 1조 원 규모의 지분을 범신성 일가에 뿌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신성모직, 신성랜드 등을 계열 분리하면서 지분 교환을 하고자 합니다. 마침 신성랜드가 비상장 회사이니, 그쪽으로 옮겨서 증여세는 최대한 피해 보겠습니다.”
“여태 아껴 왔던 세금을 한꺼번에 토해 내라고 하지 않나. 타격이 클 거야.”
몇 번째 똑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4,375억을 3분기로 나눠서 내기로 했습니다. 특검과 협의했지만 그 이하로는 깎지 못했습니다. 이미 증거들이 언론사까지 빠져나가서….”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지을 돈이 날아가는군. 이 모든 게 유수한 그놈이 만든 그림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국세청 놈들이 비자금의 꼬리를 이리 잘 쫓아오다니, 돈의 흐름을 잘 아는 이가 관여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놈, 처음 봤을 때 싹을 잘라 버렸어야 하는 건데….”
“이미 상당히 커 버렸습니다. 다음 달 스마트 클라우드가 상장된다고 합니다. 시가 총액 1조는 무난할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신성전자가 10년 만에 일군 시총 1조를 단박에 달성해?”
이 회장은 위스키잔을 쥐고 부르르 떨어 댔다. 대현을 밟고 제계 1위로 올라선 것이 엊그제인데, 이대로 가다 스마트 클라우드에 따라잡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엄습했다.
“신성전자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놈의 회사는 끽해야 3조 매출인데, 신성전자는 매출 7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주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건 자랑이 아니야. 대(大)신성이 그놈보다 알짜배기 사업을 못 했다는 의미야.”
이수학 비서실장은 ‘노이즈 칩 사건으로 S폰을 말아먹어서 그런 겁니다. 흑자였던 휴대폰 사업이 단박에 적자 사업이 되어 버렸잖습니까! 유수한을 건드릴 땐 조심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수학은 하고 싶은 말을 참으려 눈부터 질끈 감았다. 스마트 클라우드를 괜히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 찾고 벌집만 쑤신 꼴이 되어 버렸다.
“그놈과 연합하지 못할 것이라면 짓밟을 방법이 필요해.”
“회장님, 기자들이 기다립니다. 물 한 잔 하시고….”
“괜찮아. 안색이야 안 좋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이수학은 그제야 문밖으로 나서는 이 회장의 뒤를 따랐다. 오십 대 중반의 이 회장인데, 오늘따라 유독 머리가 희끗희끗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니 기자회견장에는 기자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펑! 펑!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사방팔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뚜벅뚜벅. 삐이익.
이 회장이 단상 앞에 서자 마이크에 전원이 들어왔다. 그는 이 시간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오늘 저는 참담한 심경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신성이 범죄자 조직으로 호도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재계의 관행에 대한 오해라고 하겠습니다.”
“관행이라니요! 이미 특검이 신성 경영진을 탈세와 배임 혐의로 고발한 상태입니다.”
“질문은 따로 받도록 하지요.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이 회장은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자를 윽박질렀다.
기자는 인상만 잔뜩 구긴 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 회장의 포스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계속하겠습니다. 일부 적법에서 벗어난 행위가 있었던 것은 신성의 회장으로서 심히 유감이며, 이에 대해 국민 여러분이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실수로 누락된 세금은 조속히 국고에 환수되도록 할 것이며, 대가를 치러야 하는 담당자가 있다면 뼈를 깎는 고통으로 과감히 정리하겠습니다.”
“아니, 담당자 잘못이 아니라 회장님이 직접 탈세를 지시하신 것 아닙니까?”
“신성생명 불법 대출과 판박이입니다. 신성이 진정 대한민국 제1기업이 맞습니까? 연극 집단 아닙니까?”
“작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구태가 계속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태에 대한 최종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보십니까?”
“이봐, 회장님께 무슨 소리야? 회장님 책임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중도일보는 빠져! 같은 계열사라고 두둔하고 그러면 안 되지. 우린 언론이고 이건 특검이라고!”
와글와글.
“말 다했어? 신성이 대한민국에 기여하는 바가 얼마나 큰데! 수출 1위야. 애국 기업이라고!”
“얼마 전까지 1위는 대현이었어. 누군 선거 한 번에 그룹이 해체되고 누군 탈세해도 애국 기업이냐! 뭔 잣대가 제각각이야?”
“대현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기자들끼리 서로 헐뜯고 난리도 아니다. 언론사 기자들마저 중립성 따위는 없어 보였다.
이 회장은 한숨부터 나왔다. 문득 어떻게 이런 상황까지 왔나 싶었다.
이런 기자회견은 시작에 불과할 터. 이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병원에 입원하는 쇼를 펼치기 직전까지 검찰 청사를 들락날락해야 할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져 왔고 시계의 초침은 멈춰 버린 듯했다.
귓가에 기자들의 날 선 목소리가 윙윙대며 뭉개졌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턱턱 막히는 목을 억지로 텄다.
“신성은 오해를 떨쳐 내고 일등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기자 여러분께선 중립적 시각으로 기사를 써 주시기 바랍니다.”
“탈세 금액과 국고 환수 조치에 대한 구체적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정확한 액수를 말씀해 주십시오.”
“특검의 조사에 성실히 응하겠습니다. 구체적 사항은 특검이 밝힐 것입니다.”
“벌써 특검과 물밑 협의를 끝내신 것 아닙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여전히 구태의연함을 벗지 못하십니까? 신성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꼬리 자르기 따위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신성은 진정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일류 기업으로! 대한민국 1등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말씀하신 기자분은 어디 신문사 소속입니까?”
“한마음 도한솔 기자입니다. 그 정도 각오도 없다면 젊은 피에게 재계 리더 자리를 넘기십시오!”
이 회장은 젊은 기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멈췄던 시간이 재차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젊은 피라는 단어가 이 회장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빌어먹을. 유수한 그놈만 아니면 이따위 하찮은 기자회견은 할 필요도 없었을 거라는 분노가 치솟았다.
“…신성의 경영진은 뼈를 깎는 각오로 혁신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신성은 일류가 아니라 초일류를 지향합니다.”
“기존 경영진은 동반 퇴진하시는 겁니까? 전문 경영인 체제가 발족됩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검토하겠습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이제 그만….”
웅성웅성.
한마음신문사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회견장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많은 기자들이 휴대전화를 받는 모습이었다.
“뭐? 성수대교가 진짜로 무너질 것 같다고? 투고가 진짜였어?”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뭐야, 대체?”
“어서 가자. 여긴 기사 뽑을 만큼 뽑았잖아.”
“퇴진한다고 적어도 되는 건가?”
“그걸 누가 확답해? 가능성 열어 준다는 말이 최선인 거 몰라? 카메라 접어!”
우르르르.
“으음, 이게….”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기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 버렸다.
이 회장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회견장에 배석했던 이수학 비서실장마저 어이가 없었다.
“회장님, 이거 천운입니다. 마침 큰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시간이… 황금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어.”
“예?”
“뭐하나, 이 시간을 놓칠 셈인가? 특검을 서둘러야 해! 어서!”
“예!”
이 회장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알코올 기운을 날려 버렸다. 세간의 이목이 딴 쪽으로 흘러간 이때를 놓칠 수 없었다.
- *
비슷한 시각.
부릉부릉. 덜덜덜덜.
성수대교 앞에서는 시위대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이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양복 차림의 사람들까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성수대교 입구를 트럭으로 봉쇄하고는 다리 중앙에도 레미콘 몇 대를 놓아둔 채 공회전시키고 있었다.
삐이이익.
“지금 당신들은 불법적으로 다리를 점거하여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당장 해산하십시오. 경고합니다.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경찰은 확성기를 있는 대로 틀어 놓고 수차례 경고를 했지만 대현건설 직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 다리 입구로 진입하지 못하게 몸싸움을 주저하지 않았다.
찰칵! 찰칵! 찰칵!
오히려 몰려든 기자들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누군가 다리 입구의 트럭 짐칸 위로 올라갔다. 정헌몽 사장이었다. 이미 경찰이 물대포를 몇 차례 쏘았기에 미끄러운 터라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정헌몽 사장이다. 찍어! 사진 찍어!”
“경찰 여러분, 더 이상 접근하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이 다리 곧 무너집니다.”
“뭔 소립니까! 불법 점거를 풀고 당장 해산하십시오!”
삐이이익.
“제발 그 입 다무시고! 구청장! 서울시장! 건설교통부장관! 불러오란 말입니다!!! 수십 차례 공문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도 어째서 만나 주지 않는 겁니까! 건설 전문가가 이 다리는 곧 무너진다지 않습니까! 시민의 안전이 걸린 문제인데 정부는 어째서 전문가의 의견을 묵살합니까! 이건 정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물에 젖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정헌몽 사장의 목소리는 굵직하니 잘도 퍼져 나갔다.
“불법 점거를 풀고 당장 해산하십시오. 강제 연행하겠습니다. 최루탄을 쏠 수도….”
쿠쿵! 쿠르르르릉.
“헉!”
경찰청장은 최루탄을 쏘겠다고 말하다 확성기를 놓칠 뻔했다. 다리 중앙에서 들려온 굉음 때문이었다. 순간적이었지만 발아래가 흔들흔들한 것 같았다.
“들리십니까? 다리 붕괴가 시작되는 소리입니다. 상판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겁니다.”
“아니, 당신들이 레미콘을 과하게 밀어 넣어서 저런 소리가 나는 거 아닙니까!”
“헛소리 그만하십시오. 중장비 몇 대 공회전시켰다고 저런 소리가 들리면 그게 다립니까?”
부우웅. 찰칵! 찰칵! 찰칵!
그때였다. 참다못한 기자가 경찰청장 확성기에 대고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연합일보 기자입니다. 당사에 투고한 내용이 사실입니까? 성수대교가 오늘 중으로 무너진다고 말입니다.”
“한마음신문입니다. 공무원들 면담에 실패하면 어쩔 수 없이 다리를 점거하겠다고 하셨는데, 지금 공무원들이 대현과 각을 세우고 있는 건가요? 정치 보복입니까?”
“실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헌몽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팔을 잡아 트럭 위로 올려 세웠다.
“대현건설의 현성호 토목실장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다리의 트러스, 즉 철골 뼈대는 완전히 부식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콘크리트 상판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여태 하루 수십만 대의 차가 지나가는 피로 하중을 견딘 것만도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이 다리를 사람들이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트럭 빼라고! 트럭부터 빼라고! 구청에서 보수한다잖소! 그럼 괜찮아지는 거요!”
“야, 이! 경찰이 괜찮은 걸 어찌 판단해! 우린 기술자야!! 이 다리에 철판 몇 개 갖다 대면 그건 임시방편도 아니야. 살인 방조라고!!!”
“경향일보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 부탁합니다.”
“지금 대현건설은 이 다리가 이미 무너졌음을 보여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저기 다리 상판에 놓아둔 레미콘 두 대는 총 50톤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 무게의 레미콘이 반나절 공회전하는 것만으로도 다리는 무너집니다.”
꽈지직!!!
“헉!”
“여긴 하루에 수십만 대의 승용차, 10톤이 넘는 버스, 대형 트럭이 수백 수천 대씩 지나다니는 다리입니다. 저런 소리가 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미 다리는 부서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기자들 뒤로 빼! 뒤로 빼라고!!!”
토목 전문가가 마이크를 잡고 설명해도 경찰청장에겐 소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대현건설의 임직원들이 기업 합병에 항의해서 다리를 점거하고 있으니 당장 해산시키라는 지시만 생각하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뭐해! 진압대 투입해! 최루탄 발사하고 물대포 발사하라고!”
“해산시켜! 해산!”
펑! 펑! 쏴아아아아아!
“대현건설 임직원분들 물러서지 마십시오. 이 다리는 시민들이! 우리 아이들이! 통학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으샤! 으샤!”
“들어오기만 해 봐!”
“뭐해! 밀어! 밀라고! 해산시켜!”
“물러서지 마! 버텨!”
“으샤! 으샤!”
“물대포 쏴! 쏘라고!”
쿠르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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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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