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카운터펀치 (40/104)

제6장 카운터펀치

“내가 말이야, 샌프란시스코에 갔더니 캬하~ 날씨부터 죽이더라. 시원하다 못해 추웠어!”

“뭐, 추워? 지금 여름인데? 같은 북반구잖아! 말이 돼?”

“송 과장, 샌프란시스코 가봤어? 거긴 한여름에도 저녁이 되면 추워진다고. 자동차 추격 신이 유명한 도로 있잖아. 거기가 특히 춥더라.”

“이야, 나도 가 보고 싶다.”

“샌프란시스코 가려면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가야 해. 그냥 가면 너무 피곤하거든!”

“퍼스트 클래스!”

김 과장의 샌프란시스코 유람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미국에서 낚은 물고기들이 한국으로 날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내 회사를 알아보면 결국 내 제의를 받아들이리라.

미국에서는 알찬 쇼핑을 했다고 한다면, 한국에서는 조금 귀찮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비서가 또 전경련 마크가 선명한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

“사장님, 또 협조 공문이 내려왔는데요.”

“정중히 거절했는데 또 왔습니까?”

“소재와 정밀 기계 국산화를 위한 정부 지원책이 생긴다고, 전경련에 꼭 참석해 달라고 합니다.”

“취지야 어쨌건 전경련에서 논의하면 결국 지원금 나눠 먹자는 식이 될 겁니다. 그거 모두 혈세예요. 차라리 정부 관계자와 직접 얘기하는 것이 옳아요.”

내가 어느새 전경련에 초대받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전경련 회원사는 400개가 넘어가니 스마트 클라우드가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순수 자산만 10억 불이 넘는 회사잖나.

하지만 전경련에 참석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제 부흥책과 세제 개편이 일어나고 그런 와중에 전경련이 로비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니까. 특히 의제가 국산화잖나.

소재나 설비는 대기업이 수요를 이끌고 뒤에서 강소 기업들이 기술 개발에 성공하는 식이 되어야 실질적인 경제 부흥이 되는데, 지원책이 단발성이다 보니 세금만 까먹고 몇 년만 지나면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심지어 어느 중소기업이 고생 끝에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해도, 기존의 외국 기업들 특히 일본 기업이 한시적으로 소재와 설비 가격을 왕창 내려 버리면 중소기업은 출혈 경쟁을 하다가 나자빠져 버린다. 결국 세금과 시간만 까먹고 기존 수입 구조로 회귀하는 꼴이 반복된다.

국가와 대기업 모두가 그런 중소기업을 보호해야 하는데 ‘정권이 바뀌어서 더 이상 지원은….’, ‘기업은 이윤을 따지는 것은 당연하니 값싸고 품질 좋은 일제로….’ 어쩌고 하며 발을 빼 버리는 거다. 30년 뒤에도 반도체 관련 소재와 설비 국산화가 안 되는 근본 원인이라고 하겠다.

지원금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공무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약점 잡히느니, 차라리 지금처럼 소재 업체와 설비 업체를 야금야금 용인밸리에 입주시키고, 유동 자금이 생길 때마다 내가 직접 지분을 취하는 것이 옳다. 현재 히타치 케미컬, DISCO, 모리타 등등 나름 손아귀에 넣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잖은가.

이대로 가면 된다. 그래야 스마트 클라우드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재벌이 될 수 있으며, 결국 기술에서 탈일본이 가능해진다.

‘중요한 일일수록 내가 직접 해야 해, 직접!’

내가 그리 다짐을 하고 있으니 이 비서가 곤혹스러운 듯 말을 잇는다.

“그게, 정부에서 반도체 산업 진흥위원회를 설립한다는데요.”

“반도체 산업 진흥위원회라고요?”

“예. 설계, 소재, 설비 등등 반도체 산업 전반에 대해 국가 차원의 공동 개발을 한답니다.”

“공동 개발? 어휴, 미친….”

공동 개발이라는 말에 갑자기 골이 지끈거렸다. 정부 과제로 공동 개발을 해 본 개발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지원은 코딱지만 한데, 요구하는 자료는 엄청나고 그 기간도 1~2년에 불과하다. 테마가 뭐가 됐든 완성형에 가까운 사업성 검토까지 갖다 바쳐야 하기에,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1~2억짜리 보고서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주관자 타이틀이 반도체 산업 증진위원회다. 21세기 개발자였던 나에게는 결과가 뻔히 보인다.

반도체 메이커끼리 하는 공동 개발이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없다. 반도체 산업은 승자 독식 체제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각 회사마다 소재, 장비, 공정 등등 산업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생태계를 구축하면 할수록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따라서 이번 프로젝트도 빛 좋은 개살구이며 세금 낭비일 뿐이다.

“사장님, 제가 말씀 못 드린 게 하나 있는데….”

오늘따라 유독 이 비서가 쭈뼛쭈뼛한다. 내가 인상을 쓴다고 이리 행동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그는 무서울 것 없는 경호원 출신이지 않나.

“뭔데 그래요?”

“이걸 어찌 말씀드려야 하나…. 사실은요, 전경련에서 스마트 클라우드 비서실장이 누구냐고 해서 저라고 했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사실상 비서실장 맞잖아요.”

“근데 전화한 사람이 신성의 비서실장 이수학이라고 하더군요.”

“아, 이수학 비서실장. 그래서요?”

이 비서는 그리 말하며 내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누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얘기를 들었다는 뜻인지 귓가에 속삭였다.

“청와대에서 조만간 금융실명제를 한다는 정보를 알려 주더군요.”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금융실명제를 한다고 내가 꿀릴 게 뭐가 있나? 차명 계좌 따위는 없는데. 그리고 신성에서 그걸 내게 알려 줄 이유는 또 뭔가?

“글쎄요. 저도 아리송해서 말씀드리기가 좀 그런데… 영국에서의 일을 생각한다면 회의에 나오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꼭 전해 달라고… 그러면 회의에 나오실 수밖에 없지 않겠냐며 웃더군요.”

“그게 전부였어요?”

“사장님이 바쁘셔서 참석 못 하실 거라 했더니, 신성은 외환 거래의 꼬리를 자를 순 있겠지만, 스마트 클라우드는 그게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뜬금없는 소릴 하더라고요. 왠지 화가 나서 헛소리 말라고 하고는 끊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전화를 받아서….”

“죄송할 거 없어요. 나라도 그랬을 거예요. 잘했어요.”

“어쩔까요? 첫 번째 회의는 오찬으로 대신한다는데, 대충 2시간 남았습니다.”

이 비서는 대충 눈치를 챈 것 같다. 계속 내게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일단 참석하자는 조언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빌어먹을, 환투기를 빌미로 나를 끌어내? 하긴 따지고 보면 신성의 유럽 법인을 통해 외화를 세탁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외환 거래법 위반이긴 하다. 국고를 채워 줬지만 범죄는 범죄라는 말이군.

그래, 신성에서야 이 회장 대신 구속될 사람이야 널렸겠지만, 나는 꼼짝없네.

“신성이 급하긴 급했나 보군요. 나를 다 찾고. 하긴, 요즘 되는 일이 없겠지.”

“신성도 메모리 쪽은 사상 최대 호황일 텐데요?”

“못 먹은 내 떡이 엄청 커 보이겠죠. 참나….”

“차로 모실까요?”

“갑시다. 회장님들은 점심으로 뭐 먹나 맛 좀 보게.”

“휭하니 모시겠습니다.”

일단 잽을 맞았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휙휙 사이드 스텝을 밟아야 한다. 적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이다. 그래야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다.

    • *

여의도 전경련회관.

1990년대의 전경련회관은 2000년대의 마천루보다는 초라해 보인다. 구시대적 정경 유착이 횡행했던 이미지 때문에 이리 보이나 싶다.

뚜벅뚜벅.

이 비서가 바삐 연락을 취했던지 전경련 사무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고압적인 회장들을 많이 만나는 게 직업이라서 그런지 나에게도 깍듯하다.

꼭대기 층에 마련된 오찬장에는 이희건 회장, 정헌몽 사장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제일 의외인 사람은 다름 아닌 중앙에 앉아 있는 박준태 의원이다. 위원장이 박준태 의원인가? 인연 한번 끈질기게 이어진다.

“이렇게 미리 자리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좀 서두를 것을 그랬습니다.”

“허허, 아니네. 앉게나. 우리도 지금 막 왔다네.”

박준태 의원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게 자리를 권한다.

나는 박 의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탁에 빈자리가 하나 있는 것으로 보아 LK 반도체 쪽은 참석하지 않나 보다. 이 일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세상 일이 참 묘하다. 호감 가는 사람은 좀처럼 만날 수기 없고 껄끄러운 사람은 싫어도 보게 된다.

“더 오실 분 없으시면 식사 올리겠습니다.”

“그래, 그래요.”

척. 척.

깔끔하게 차려입은 스태프가 오찬을 세팅했고, 곧이어 탁자에 차려진 음식은 칼국수 한 그릇이었다. 깔끔하게 삼색 반찬이 딸려 나오긴 했지만 재벌 회장이 참석한 자리치고는 다소 의외인 음식이다. 그러고 보니 이거 문민정부의 트레이드마크인 ‘YS 칼국수’군.

“허허, 이거 청와대 요리사가 직접 만든 칼국수입니다. 문민정부의 도덕성을 대변하는 상징이지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부패 현상을 치유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신한국을 창조하자는 대통령님의 각오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외우느라 고생 많으셨네. 박준태 의원은 칼국수 한 그릇을 앞에 두고 YS의 대통령 취임사 중 한 구절을 인용했다.

나름 문민정부의 출범은 괜찮은 편이었다. 신한국 창조라는 타이틀을 걸고 ‘재임 중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며 부패 구조의 전형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선언이 나름 의지는 있었던지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공직자 윤리법 등등 개혁적인 정치를 펼치긴 했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는 업적도 있고 말이다.

뭐, 그래 봐야 20년 넘게 야당에서 굴러 온 양반인데 챙겨 줘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나? 대통령은 깨끗할지 몰라도 등 뒤에서 호박씨 까는 양반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결국 자기 아들조차 간수 못 했다. 경제부 장관을 6개월에 한 번씩 갈아 치우며 단물 빨아먹기를 시킨 것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IMF라는 초유의 위기를 감지하는 시기가 너무 늦었거든.

“부정부패 척결은 재계에서도 꾸준히 요청해 온 일입니다. 문민정부는 기존 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허허, 이 회장께서 기존 정부를 언급하시니 내 입장을 재차 말씀드려야겠군요. 내가 위원장을 맡게 된 것은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예전 기업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께서도 저에게 믿음을 보여 주셨다는 의미일 겁니다. 용인밸리 건도 잘했으니 이것도 자아알~하라는 의미겠지요.”

박준태 의원은 원래 역사와 달리 YS와 꽤 사이가 좋은가 보다. YS는 군부 세력이면 치를 떠는 양반이라 군 장성 출신인 박준태 의원을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데, 용인밸리 설립 건이 선거에 꽤나 도움이 되긴 했나 보다.

“청와대 오찬을 칼국수로 한다는 것은 저도 들었습니다. 한데 자칫 엉뚱하게 불똥일 튈까 우려되는군요. 제 아버님도 평소 미역국 한 그릇으로 점심을 대신할 만큼 검소하시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푸짐하게 상차림 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정 사장, 이건 정치적인 쇼가 아니네. 부 자체가 질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정당한 부가 존중받아야만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대통령님의 철학이시네.”

나름 초심도 좋고 철학도 좋은데 말이다. 정책 실행과 아랫사람들이 문제였지. 싱크탱크 자체가 썩어 있었기에 문민정부 시절 ‘한부 사태’라고 일컫는 5조 원짜리 초대형 부도 사태가 일어났다.

게다가 금융실명제 같은 혁신 조치는 재벌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고 실시를 했어야 한다. 단지 유예 기간만 두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기에 재벌들이 그 시기에 미친 듯이 부동산을 사기 시작해서 부동산 버블 사태를 촉발시켰다. 차명 계좌의 돈을 세탁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었거든. 그 바람에 전 국민적으로 부동산 투자 붐이 불어서 은행 대출이 엄청 늘어났지.

경제부 공무원들은 지하 자금을 활성화시켰다고 좋아라 했겠지만, IMF 사태가 닥쳤을 때 시중 은행들의 유동자금이 말라 초동 대응이 엉망이 되어 버린 이유 중 하나라고 하겠다. 여러모로 1990년대 한국 재계는 지극히 후진국스러웠다.

후루룩.

“어우, 청와대 칼국수는 아주 맛있네요. 뭐, 맛있고 싼 점심이라면 대환영이죠. 정치하시는 분들이나 높으신 공직자분들께서 이런 음식을 좋아하셔야 하는데… 저 같은 장사꾼은 언제나 원가 절감을 하니까 말입니다.”

“하하, 유 사장이 정치꾼 싫어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그래서 내가 위원장이 된 걸세. 자네가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대통령님의 의견이 있으셨네.”

“오해요? 제가요?”

내가 YS를 오해할 일이 뭐가 있나?

박준태 의원은 내 말에 당장 답하지 않고 칼국수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하며 말을 가다듬는 듯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성장세는 누가 봐도 기절초풍할 정도이지 않나. 핸드 터미널에, 에그 뭐라는 장난감에, 앰팩까지… 게다가 대현이 포기한 K폰까지 되살렸지. 그 모든 것을 채 몇 년도 안 되는 시기에 해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야.”

“…….”

“그래서 청와대에서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아주 많이 나왔다네. 스마트 클라우드는 분명 반도체 회사인데, 제품이 너무 다양하다고 말일세. 통신칩에 DRAM에 플래시 메모리? 여하튼 그 외에도 GPU인가 뭔가를 또 한다면서? 반도체 산업에선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하더군.”

“위험해요?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요?”

“크흠! 내 눈에도 그리 보였네. 여타 다른 대한민국 반도체 회사가 DRAM 제품군만 하는 데도 허덕이는데, 자네 회사는 아예 제품군이 여러 개이지 않나.”

“아… 알겠네요. 누가 그리 말했는지.”

나는 이 회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칼국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이 회장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룹의 미래가 달렸다고 여기는 일에는 정규전, 게릴라전, 정치 공작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현의 정 회장과는 전혀 다른 인물. 의외의 먹을거리가 생겼다 싶으면 자체 개발보다는 그 회사 제품을 직접 노리는 방법으로 시장 진입 시점을 당겨 버리는 것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박수를 수십 번 쳐 줘도 모자랄 사람이다. 지금 그 타깃이 내 회사이기에 박수를 못 칠 뿐이지.

“내가 정부에 건의한 것이 아니네. 최근 자네 회사와 신성에서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잖나. 그래서 플래시 건을 두고는 고민을 좀 했지. 자네 회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할까? 아니면 일본 도시바에서 라이선스를 받을까? 하고 말일세. 국익 측면에선 당연히 자네 회사에 로열티를 주는 게 맞겠지만, 또 오해를 하면 어쩌나 하고 말일세.”

“하하, 도시바가 플래시를 양산합니까? 그럴 리가요.”

도시바가 플래시 메모리 특허를 낸 시점과 내가 특허를 낸 시점이 거의 동일하다. 그 말인즉슨, 공정까지 알고 있는 나는 양산할 수 있어도 도시바가 양산에 돌입하는 것은 턱도 없다는 소리다. 지금 연구 단계를 벗어나고 있다면 그조차 시점이 빠르다고 할 것이다.

“크흠! 양사의 기본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고 들었네. 조만간 도시바도 양산을 시작하지 않겠나? 신성이 공동 개발에 나서면 라이선스를 주는 것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하더군.”

내가 먼저 치고 나가니 도시바와 신성이 공동 개발을 한다고? 어림없는 소리. 반도체 기업끼리 공동 개발은 공염불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사기다. 서로 레시피를 캐내려는 정보전에 지나지 않아.

“하하, 그쪽이랑 하시죠. 저희는 라이선스를 줄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도 차기 제품을 설계 중이라.”

“지금 양산하는 제품 수준에서 라이선스를 맺어 준다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네. 그럼 앰팩 가격도 좀 더 내려갈 테고, 시장 점유율도….”

어쭈,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심사이시네. 국익이란 말이 참 이럴 땐 쓸모가 있단 말이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아이고, 국익을 생각하신다면 더욱더 도시바랑 라이선스를 맺으셔야죠. 사실 저희 회사 차기 설계에 난관이 한두 개가 아니더군요. 일본 애들 실력도 무시 못 하니 도시바 기술을 누군가는 모니터링 할 필요가 있지요. 저희가 직접 할 수는 없고. 신성이 나선다면 대한민국 반도체 기술이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난 젓가락을 내려놓고 짐짓 딴소리를 해 댔다. 대현의 정 사장이 과하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 회장은 흠칫 당황하는 기색이다. 페인트 모션으로 훅 하니 주먹을 뻗었는데 내가 확 잡아채는 꼴이니까.

“유 사장. 스마트 클라우드의 생산 용량은 한정되어 있지 않나? 이 회장님 말씀도 틀린 건 아니지. 반도체 산업을 증진시키려면 대한민국 기업끼리는 연합할 필요가 있어. 생산도 거국적으로 하고 말일세.”

“당연하죠, 박 의원님. 안 그래도 통신칩과 DRAM 생산은 대현에 더 넘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K폰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말이죠. 저희는 앰팩과 플래시에 좀 더 인력을 쏟아붓고 말입니다.”

“크흠! 통신칩과 DRAM은 대현이 전문이지요. 신성에서 S폰의 통신칩 물량을 나눠 주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통신칩에서 시너지가 대단할 겁니다. 위원장님께서 이참에 반도체 회사끼리 물류 이동에 세금을 좀 깎아 주시는 것을 처리해 주시면 국익에 도움이 될 겁니다. 휴대폰 단가 하락으로 이어져 수출이 훅 늘어날 테니까요.”

내 딴소리에 정 사장이 손뼉을 정확하게 맞춰 온다. S폰을 물고 오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좋다. 통신칩 기술은 이미 스마트 클라우드, 대현, 신성 모두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으며 코어 기술은 내가 대주주로 있는 퀄컴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대현은 휴대폰 사업을 접어서 공히 중립적이니, 통신칩 개발에 전문성을 가져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으흠… 좋아요, 좋아. 일본 애들도 비슷한 움직임이고….”

박준태 의원은 정말로 반도체 3사를 묶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일본통이다 보니 지금 일본에선 NEC를 주축으로 파나소닉, 샤프 등등이 연합해 반도체 카르텔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허허, 이거 참. 박 의원님, 너무 한쪽만 보시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이 회장님?”

“제가 이런 말씀까지 드리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만, 스마트 클라우드는 100% 외자 유치로 만들어진 회사 아닙니까. 용인에 제2단지도 완공되면 상장해야 하는 것은 수순이고… 그 지분은 다 어디로 갈 것이며, 그 돈은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토종 기업을 밀어주셔야 돈이 대한민국에서 돌지요. 솔직히 용인에 땅을 산 돈도 누구 돈인지도 모르겠고. 그조차 미국인들 돈 아닙니까? 아니면 뭐 영국인들 돈이 될 수도 있고.”

“으흠?”

어쭈, 은근슬쩍 환치기 건을 수면 위로 띄운다. 지금은 정권 초기. 도덕성을 강조하는 때다.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아작 난다.

‘빌어먹을 늙은이.’

곱게는 안 넘어가겠다 이거군.

플래시가 그리 탐이 나셨어?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아요.

“이 회장님 말씀이 가슴에 와닿는군요. 저도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기업이 외국 자본에 종속되는 것처럼 마음 아픈 일도 없지요.”

“으응?”

나는 짐짓 목소리를 높여 화답했다. 이 회장은 나를 공격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진심으로 내 생각도 그렇다. 외국 자본에 지분이 잠식당하는 것처럼 기업에서 위험한 것은 없다. 나와 직원들이 열심히 일궈 놓은 현재와 미래를 돈을 쥔 자본가에 바치는 꼴이니까.

“유 사장도 우려하고 있었군.”

“그럼요, 당연합니다. 와중에 저는 양질의 외국 자본을 가지고 있는데, 악성 외국 자본은 이참에 걷어 내셔야 합니다.”

“악성 외국 자본?”

“외국 자본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남기고 있고, 대일 무역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지요. 미국엔 적당히 지분을 떼어 주며 달래기를 해야 하지만, 일본은 전혀 다르죠. 적대적 M&A나 무역 보복 리스크를 생각하신다면 일본의 자본과 기술 종속에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지금도 밥 잘 지어서 밥은 일본이 다 먹고 우리는 겨우 누룽지나 먹는 꼴이잖습니까.”

“크흠! 그런 면이… 그래,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어.”

“이보게, 유 사장. 말이 이상하군. 일본이 무역 보복을 할 이유가 어디 있나? 우리에게 무역 흑자를 남기고 있잖은가? 일본 자금은 그다지 악성 자본이라 할 수 없네.”

박준태 의원은 턱을 쓰다듬었지만, 이희건 회장이 대뜸 내 말을 반박하고 나선다. 1990년대의 신성은 꽤나 일본 자금을 많이 쓰고 있었거든. IMF 때 신성도 흔들흔들했던 것은 일본 자금이 대규모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 뒤로 밀월 관계였던 소니와도 소원해졌지.

여하튼 일본의 무역 보복은 이성적으론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 무역흑자국이 무역적자국에 보복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수십 년간 일본은 그런 뻘짓을 수차례나 한다. 이참에 신성도 건전한 대기업이 되어 보라고. 명목이야 국익을 위해서든, 재벌 길들이기든 좋을 대로 생각하시고.

“박 의원님, 포철은 어땠습니까? 의원님이 주도하신 제철소 건설에 일본이 협조한 것은 설비 납품과 유지 보수비를 탐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면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

“포철이 탈일본을 시도했을 때 일본 쪽 반응은 어땠습니까? 바로 적대적 M&A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박 의원께서 부채 비율을 50% 밑으로 지속적으로 관리하신 이유가 그거 아닙니까?”

“……!”

“제 아버님이 박 의원님을 만날 때마다 하셨던 말씀이죠. 쪽발… 아니, 일본 놈들 믿지 마라. 부채 비율 50% 넘으면 사장 바뀐다고 말입니다.”

“아, 정 회장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정헌몽 사장이 훅 끼어들었다. 나는 짐짓 놀라는 척해 줬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기업 비사다. 정 회장은 포철에 대한 일본 제철 업계의 적대적 M&A를 매우 경계했었다. 그가 박준태 의원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유다. 지금은 깨진 것 같지만 말이다. 여하튼 두 사람 모두 토종 기업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강해서 그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리라.

그런 측면에서 박준태 의원은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숨을 쉬며 기분 나빠 했다. 용인밸리에 일본 기업을 입주시켜 은밀히 지분을 잠식해 보라는 뉘앙스를 풍긴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박준태 의원은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라는 영화 대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내 얘기가 통할 사람이다.

“그래, 일본 자금은 위험하지. 특히 반도체가 이리 커 가면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뻔하군.”

“그렇습니다. 이참에 탈일본을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문민정부의 대일 외교 정책에도 힘이 실릴 겁니다.”

“그렇군!”

역대 정부 중에 문민정부는 대일 외교에서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낸 정부였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로 대표되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추진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서 망언을 해 대자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라고 YS가 TV 인터뷰에서 직설적으로 말할 정도였다.

최근 YS와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박 의원으로선 내 말이 귀에 쏙쏙 박혔을 것이다.

“내가 꺼낸 얘기는 일본 자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네. 스마트 클라우드가 불법적으로 외화 반출입을 하고 영국에서 환투기까지 벌인 정황이 있다고 하더군. 그 돈으로 용인 땅을 매입한 것 아닌가? 엄연한 불법이야!”

얘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이 회장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나를 같이 끌고 들어가는 물귀신 작전이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나?”

박 의원이 나를 쳐다보는 사이에 이 회장이 말을 이었다.

“휴우. 박 의원님, 제가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하도 이상해서 조사를 해 봤더니 해외 법인장들이 털어놓더군요. 나 참,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한 기업의 사장이 기본적인 도덕심은 갖춰야 하는데 말입니다.”

꼬리 자르기의 고수다운 말이다.

“그 일은….”

“그 일은 대현에서 지시한 사항입니다.”

“으음?”

“……!”

정헌몽 사장이 훅 하고 튀어나오자 나를 포함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표정을 달리했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놀란 것은 사실이다. 나는 물을 들이켜며 표정을 숨겼다.

“무슨 말인가, 정 사장?”

“영국의 환투기는 유 사장이 대현에서 맡은 마지막 프로젝트였습니다. 휴우… 그룹 유동자금을 마련하는 목적이었지만, 불법적인 면도 있었기에 유 사장이 괴로워했고 결국 대현을 퇴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잡지 못한 이유기도 하지요.”

“그랬군. 그래서 잡지 못했던 거군.”

정 사장의 블러핑에 박 의원이 훅 넘어간다. 사건 시점을 약간 틀어 댔지만 정확한 내막을 알 리 없는 박 의원의 눈에는 아귀가 척척 맞아 보일 수도 있겠다.

사실 나 같은 인적 자산을 대현에서 풀어 준 것은 재계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어디론가 스카우트되기 전에 망가뜨리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나는 대현물산 주식과 퀄컴 주식을 맞바꾸면서 정헌몽 사장의 묵인하에 퇴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건 유 사장이 직접 한 일입니다.”

“이 회장님, 말씀 조심하시지요. 우리 대현은 선거 전에도 선거 후에도 세무 조사를 받았습니다. 토해 낼 것은 다 토해 냈고, 제 아버님은 명예 회장 자리조차 내놓으셨습니다. 지나간 환투기 사건을 들쑤셔 대현이 다시 감사를 받는 사태가 벌어지면, 저도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정헌몽 사장이 평소답지 않게 으르렁거리자 이 회장은 눈을 부릅뜬다. 재벌 2세끼리 기 싸움을 하는 것이라곤 하지만 이 회장은 잘나가는 신성의 회장이고, 정 사장은 쇠락해 가는 그룹의 일개 계열사 사장이지 않나.

“어허. 그만하게, 정 사장. 이거 싸우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잖나. 이 회장님도 그만하십시오.”

“박 의원님, 이건 명백한 증거가 있는 불법입니다. 용인밸리는 엄연히 부동산 투기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뭔 말을 그리하십니까? 그 또한 대현이 구매해서 정당하게 유 사장에게 넘긴 것입니다. 중소기업 발굴이라는 국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잘못한 점이 있다면 그 돈으로 대현이 선거를 치렀다는 것이지요. 그건 불법이라기보단 바보짓이었고, 대가는 계열사 분리로 엄중히 치렀습니다.”

“저 말이 사실인가, 유 사장?”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제가 그리 말렸습니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외람되지만 박 의원께서도 대현의 몰락에 일조하셨는데, 어찌 모른 척하십니까.”

“그게 안타까워 나도 이 자리에 있는 거 아닌가. 크흠!”

박 의원마저 딸려 온다. 이미 대화의 칼자루는 정 사장과 나에게 넘어왔다. 대현이라는 묶음으로 말이다.

“말씀드린 대로 안타까운 일을 들쑤시는 것보다, 신한국 창조라는 문민정부의 기치하에 건설적인 일을 논의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건설적인 일?”

“그럼요. 공동 개발이니 뭐니 하다 보면 국민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재벌끼리 잘도 해 먹는다고 욕할 뿐입니다. 이전 정부랑 다를 바 없지요. 대통령님과 박 의원님이 제일 경계하는 일 아닙니까?”

“크흠!!”

박준태 의원은 이전 정부의 거물. 이전 정부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치명타다.

“재벌끼리의 놀음은 타격감이 없으니 화끈하게 중소기업 발전책을 논의하시고, 순환출자 같은 문어발식 대기업 확장에도 제동을 좀 걸어야죠. 일본 자금을 걷어 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될 일입니다.”

“아니, 공동 개발에 들어가는 재원도 마련하기 어려웠는데 그런 큰일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네.”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례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결국 대현도 2천억 가까운 돈을 토해 냈지 않습니까? 계열 분리까지 해서 순환 출자의 고리까지 끊었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대현은 두 번이나 당했으니 제외하고, 스마트 클라우드를 비롯해 신성에 세무 조사 한번 띄우시죠. 세금 안 낸 거 있으면 좀 토해 내고, 차명 계좌나 비자금도 줄줄 쏟아 내면 수천억은 금방 모일 텐데 말입니다.”

탁!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회장이 탁자를 내리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차명 계좌와 비자금은 신성의 아킬레스건이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깨끗한 회사거든. 세무 조사 같은 물귀신 작전에 내 회사는 별 탈 없어도, 신성은 안 그렇지. 금융실명제 신고 기간에 자신 신고한 계좌만 300개가 넘어갔던 회사다. 선대 회장의 차명 계좌는 파악조차 힘들어 몇 년에 한 번꼴로 백여 개씩 툭툭 튀어나왔다.

“뭐가 말이 안 됩니까? 도덕성이 출중하시고! 국익을 위해서 뭐든 하시겠다는 분께서! 제 회사도 같이 세무 조사를 받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반도체 찍어 내기도 바쁜 회사를 세무 조사로 스톱을 시켜? 그건 미친 짓이야.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아니, 문민정부를 뭐로 보시는 겁니까? 세무 조사로 회사를 스톱시켜요?”

“이이익!”

“이참에 재벌가들이 다시 태어나야 신한국 창조가 될 거 아닙니까!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고 암적인 지하 자금은 싹 걷어 내야 기업도 나라도 제대로 선진화되는 겁니다.”

“맞아! 그래야지! 암만!”

“박 의원님!”

이 회장이 박준태 의원에게도 눈을 부라렸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니 이 회장은 평소 나긋나긋한 말투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환투기라는 물귀신 작전이 세무 조사라는 물귀신 작전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생겼으니 마음이 급한 것이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세무 조사 결과에 관계없이 1억 불을 미리 내놓겠습니다. 최근 눈먼 돈이 좀 생겼거든요. 이런 돈은 공익에 써야 뒤탈이 없지요. 가능하면 용인밸리에 있는 중소기업 지원책에 써 주십시오. 스마트 클라우드 2단지 공장에 국산 장비가 팍팍 들어갈 수 있게 말입니다.”

“허허허! 좋구만, 좋아.”

나는 노이즈 칩 배상을 두고 이 회장을 놀리기까지 했고, 박 의원이 손뼉을 척척 맞춰 준다. 회의 참석 한 번에 1억 불이라는 재원이 마련된 꼴이지 않나. 세금도 아끼고 YS에게 생색도 내고 얼마나 좋겠나. 사업 결과마저도 장밋빛이다. 내가 중소기업 국산 장비를 팍팍 사 주겠다고 공언해주었다.

“대현은 내놓을 돈이 없으니 정부의 세무 조사에 환영하는 입장을 표명하겠습니다. 박 의원님께서 추진하는 대기업 선진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말입니다.”

“하하하하!”

“이익! 이 작자들이!”

“투명한 신한국 건설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회장님?”

“아아, 싸우지들 마십시오. 나는 이 좋은 소식을 정부 차원에서 논의해 봐야겠군요. 신성과 스마트 클라우드가 자진해서 재무 구조 개선을 하고, 중소기업 지원 재원도 마련한다는데 다른 재벌들도 알아서 따르지 않겠습니까?”

박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그도 능구렁이이니 말이 길어져서 좋을 게 없다는 것쯤은 뻔히 알고 있다. 세무 조사와 재원 출자를 기정사실화하며 자리를 뜨는 것이다.

“박 의원님! 이리 가시면 어쩝니까? 세무 조사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럼 세무 조사 말고 차명 계좌 조사라고 하지요. 자진 신고라고 말씀하셔도 되고.”

“뭔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이건 명백히 신성 죽이기입니다.”

“세세한 것은 차후에 의논하기로 하고 저는 청와대에서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뚜벅뚜벅.

박 의원은 그대로 건물을 떠나 버렸다. 그로선 꽤나 괜찮은 아이디어를 얻어 가는 거다.

국민들의 세금을 쓰는 게 아니니 정권 초기에 펼칠 일로는 매우 적당하며, 정책 결정에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일이잖나. 게다가 개인적으론 이전 정권과 선을 그었음을 증명하는 일이며, 대기업 순환 출자에서 일본 자금을 일부라도 걷어 내게 한다면 친일파라는 멍에도 상당히 희석시킬 수 있다. 박준태 의원은 이 일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유수한, 당신… 선을 넘었어.”

이 회장이 이를 악물고 날 노려봤다.

“말씀을 막하십니다. 내가 당신 아랫사람이라도 됩니까? 호의는 노이즈 칩으로 끝입니다. 그마저도 내 명함을 내밀었기에 1억 불로 퉁쳐 준 겁니다. 한데 또 내 플래시를 탐내다니!”

“감히 신성을 공격해? 대한민국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없는 게 아니라, 없었겠죠.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내 기업을 죽이자고 달려든 걸 돈 몇 푼으로 봐주니까 이젠 내 밥그릇까지 나눠 먹겠다고 달려드는 꼴이잖나. 같은 대한민국의 기업이라고 호의를 베풀었더니 아직도 제가 갑인 줄 알아.

상생 따윈 개나 줘 버려. 이 정도까지 왔다면 응징이 답이다. 내겐 한 달에 유동 자금만 2억 불이 들어오는 회사가 있다. 정권과도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싸워 볼 만하다.

“후회하게 될 거다! 세무 조사 따위는 간단하게 막아 주지. 아니, 역풍도 못 견딜 놈이.”

“누가 이기나 해 봅시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털어도 날 먼지가 없으니까!”

나는 깨끗하다. 탈세 따윈 하지 않았고, 차명 계좌는 만들 생각도 안 했어.

탕!

“미친놈!”

이 회장이 숟가락을 식탁에 내던지고 뒤돌아섰다.

“괜찮겠나?”

이 회장이 사라지자 정 사장이 걱정스레 물어 온다.

“걱정 마세요. 여하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환투기 카드를 잘 넘겼네요.”

“뭐, 여태 자네가 대현에 했던 조언에 대한 작은 성의일세. 신성이 가지고 있는 정계의 줄은 만만찮으니 조심해야 하네. 언론 쪽도 그렇고.”

“괜찮습니다. 여차하면 신성생명 불법 대출 건도 터뜨리면 되니까.”

“그게 사실이었나 보지?”

“제 걱정은 마시고, 불똥이 튈지 모르니 대현도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게. 신성에서 예전 일로 자네를 공격하면 모두 대현으로 밀어 버리게. 아버님 은퇴로 동정 여론도 만만찮아서 당분간 대현은 프리 패스일세. 게다가 계열 분리로 기존 재무 자료는 코걸이나 귀걸이 원하는 대로 껴 줄 수 있으니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정헌몽 사장은 싱긋이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다. 진심 어린 호의가 느껴진다.

내가 그렸던 그림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면 지금 정 회장과 나는 K폰, 앰팩의 성공을 두고 축배를 들고 있을 텐데 말이다. 지나간 일인 데다 지금 그림도 개인적으론 나쁘지 않으니 기분이 묘하다.

“그래도 호의치고는 과하시네요. 제가 모르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글쎄, 후회라고 봐야겠지. 대현이 자네 조언만 들었다면 이리되지 않았을 테니까.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

정 사장은 끈질기게 나와의 끈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나도 모르게 팔이 또 안으로 굽으려 한다.

그러나 대현과 더 가까워져선 안 된다. 이런 호의는 이자가 비싸다.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한다.

“그 정도면 공짜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하, 들켰나? 더 이상 대현과 얽히긴 싫을 테니 조언 정도만 받아도 충분하네.”

정 사장은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필요하신 조언이 뭡니까?”

“대현건설은 아버님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네. 이름이라도 유지가 되었으면 한다네.”

“휴우…. 지금 어디까지 갔습니까?”

“자본 잠식은 56%까지 진행되었네. 은행들이 주인인 것이나 다름없지. 현재 동하건설 쪽으로 합병이 논의되고 있네. 이름만 지켜도 좋으련만. 혹시 용인밸리의 2단지 공사를 대현건설에 맡겨 줄 수 있겠나?”

“…더는 대현과 얽히기 싫군요.”

정 사장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린다.

“그보다 훨씬 알짜배기 공사가 널려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알짜배기 공사? 혹시 중동을 말함인가? 요즘 유가가….”

“아뇨, 국내부터 보셔야죠. 선진국으로 갈 때 꼭 겪는 일이 있잖습니까? 때가 됐죠.”

“선진국으로 갈 때 겪는 일?”

“다른 나라에서 건설업 추진하시면서 많이 보셨을 겁니다. 중진국에서 부실 공사는 비일비재한 일이 아닙니까? 건물이든 다리든 하나둘씩 무너지죠. 딱 유지 보수 기간이 끝날 즈음에 말입니다.”

“중진국 병이라 일컫는 사고들 말이군.”

“그렇습니다. 인재라고는 하지만 안 겪고 지나가는 국가가 거의 없죠. 특히 우리나라처럼 짧은 시간에 압축적인 성장을 한 나라라면 그런 위험은 늘 산재해 있다고 봐야죠.”

“일리가 있는 말이군.”

대한민국에 부실시공에 따른 부작용은 심심찮게 있었다. 게다가 시기도 딱 이맘때다.

문민정부는 사고 공화국이었다. 비행기 추락처럼 우연히 발발하는 사고는 재발을 확신할 수 없겠지만, 성수대교 붕괴나 삼풍백화점 붕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사건은 반드시 일어난다.

“동하건설이 추진했던 공사 위주로 살펴보시는 게 좋겠죠. 합병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대현건설 임직원을 계열사로 옮기기 전에 일거리부터 한번 찾아보시죠. 관공서나 교량, 철도같이 공적인 건물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전 정부 시절의 부실 공사를 고발하는 모양새를 취하면, 국가 프로젝트를 따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부실시공으로 돈을 번 동하건설에 대현건설이 어찌 합병되나? 이런 여론전을 펼치란 말인가?”

“제 조언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IT 기업 사장이지 건설사 사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정도 조언만 해도 충분하다. 대현건설의 임직원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건설사라는 자부심이 있다. 국가 보증이 반드시 필요한 해외 건설이 아니라 국내에서 대형 토목 건설을 따낸다는 전략으로 합병 위기를 넘길 수 있겠다 싶으면 미친 듯이 일을 추진할 것이다.

더욱이 성수대교는 동하건설이 지었고, 유지 보수 보증 기간 이후로 전혀 손보지 않았기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성수대교는 원래 역사에서도 토목 전공의 교수들이 꾸준히 붕괴 위험성을 알렸던 교량이니, 정 사장이 전략을 알리면 대현건설 임직원들이 성수대교가 조만간 무너진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게 될 거다. 될 수 있으면 삼풍백화점 사고도 예견했으면 좋겠는데….

“알겠네. 그 정도까지 알려 줬으니 내 고마울 따름이네. 국내 부실 공사를 뒤져라. 허 참, 기가 막힌 아이디어야.”

“대현건설은 그 정도만 방향을 알려 주시면 자생이 가능할 테고, 사장님은 대현전자를 우선으로 챙기십시오. 신성전자가 조만간 주춤할 테니 그때 DRAM을 북미에 잔뜩 밀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투자 여력을 이어 나가실 것 아닙니까.”

“DRAM 납품 업체라고 걱정해 주는 건가?”

“DRAM뿐입니까? 통신칩도 일부는 납품하시잖아요. 망하면 제가 곤란하죠. 이제 신성은 저만 보면 으르렁댈 텐데.”

“하하하하! 내가 고객님 잘 모셔야겠군.”

정헌몽 사장은 DRAM만 얘기할 뿐, 통신칩이나 플래시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나와 끈만 유지하며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 불도저로 대변되는 대현의 오너 일가에서 이런 성향의 양반이 나왔다는 것이 참 요상하긴 하다.

전경련으로의 첫 번째 나들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재벌들 사이에 끼어들고, 대놓고 적도 만들고, 대놓고 정계 거물에게 줄도 대고… 나도 참 많이 변했다.

    • *

며칠 뒤.

다다다다.

“수한 씨! 아, 이거 뭐예요? 나 휴가 간 사이에 대체 뭔 일을 벌인 거예요?”

“뭐긴, 뭐야. 세무 조사지. 사내 재무는 권 부장이 관리하지만, 투자나 수출입 재무는 버지니아 트레이딩에서 주도적으로 했으니 케이가 적극적으로 나서 줬으면 해.”

“그래서 국세청 감사팀을 통째로 우리 회사로 보낸 거예요?”

“내가 안 보냈어. 권 부장이 보냈어.”

“그게 그거죠.”

내가 발뺌을 하자 케이가 발끈한다. 뭐, 어쩌리.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케이도 내 덕 많이 보잖나. 이참에 전문성을 발휘해서 일 좀 해야지.

“왜, 찔리는 거 있어? 우린 탈세도 안 했고, 비자금도 없잖아?”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요. 하루 이틀 대응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잖아요.”

“하하, 부탁이야. 적극적으로 대응해 줘. 신성 엿 먹이려고 한 일이니까.”

“신성? 아니, 또 걔네들이 수한 씨를 공격한 거예요? 노이즈 칩도 봐줬는데?”

“적당히 때려 줬더니 이번엔 플래시 사업을 찝쩍대더라고. 소니와 합작해서 앰팩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 내려고 했겠지.”

“어림없는 소리!”

“그래, 어림없는 소리라서 내가 물귀신 작전을 펼친 거야. 덕분에 신성도 체질 개선하고 좋지, 뭐. 말하자면 국익에 도움 되는 일이라 정권마저도 아주 협조적이야.”

“에에, 국익까지 끌어들였어요? 여하튼 이왕 신성과 싸울 거면 이번엔 확실하게 밟아야 해요. 신성은 한국 재벌들 중에서는 가장 잠재력이 큰 회사라고요.”

“걱정 마. 세무 조사는 신성의 아킬레스건이니까. 국세청 감사팀에 명의 신탁이니 차명 주식이 뭔지나 잘 알려 주라고.”

“명의 신탁? 차명 주식? 아니, 한국엔 그런 18세기급 유물이 아직 남아 있단 말이에요?”

“오! 케이도 그걸 알아?”

“당연하죠. 시카고 마피아들이 세금 피하려고 한 짓거리인데요. 미 국세청이 그걸 뿌리 뽑느라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몰라요. 엄청난 불법이라고요.”

“우리나라도 불법이야. 그러니까 케이가 국세청 사람들에게 차명 주식임을 증명하는 노하우를 잘 알려 주라고.”

명의 신탁, 차명 계좌, 비자금 등등 구린 돈을 지칭하는 말은 결국 차명 주식이라는 말로 퉁칠 수 있다. 신성이 대표적으로 차명 주식을 잘 이용했던 기업이다. 그룹 지배주를 가신들과 친인척은 물론 가공의 인물까지 내세워 지분을 분산시켜 뒀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기업 오너는 지분 30% 이상을 가질 수 없고, 오너의 주식에 떨어지는 배당금은 세율이 90%이며, 30억을 초과하는 지분을 상속할 경우 세율이 50%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실시한 기업공개촉진법에 근거한 규정이다. 박 대통령은 경제 성장을 위한 대규모 투자 재원을 조달하려면 선진국처럼 자본시장을 육성해야 한다고 여겼고, 재벌 그룹의 경영권 대물림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봤다. 독재 정권이긴 했지만 경영의 투명성이 장기적으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임을 잘 알고 있었다.

21세기 일본의 경우가 대표적인 반면교사라고 할 것이다. 기업의 경영권뿐 아니라, 선거 출마권 같은 정치권력까지 대물림되다 보니 나라가 쇠락해 가잖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경영권조차 선의의 경쟁이 있어야 하는 거다.

여하튼 법은 다수를 위한 거지 신성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 신성은 당연히 머리를 굴렸다. 차명 계좌에 주식을 담아 두는 방식으로 일 처리를 해 보니 경영권 방어, 상속세, 배당금에 부과되는 세금 등등 모든 것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다. 가신들의 배신 가능성도 배제하기 않았기에 실물 주식은 비서실 금고에 모두 보관하는 보완책까지 마련하고 말이다.

“노하우라고요? 주식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요. 미 국세청도 그걸 증명하기 어려워 내부 고발자와 이중 스파이까지 별의별 수단을 다 썼어요. 시간도 엄청 걸리고, 운까지 따라야 하는 일이에요.”

“하하하, 마피아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우리나라는 미국이 아니라고. 재벌가 가신들도 일종의 월급쟁이야. 배당금은 자기 돈이 아닌데 그 돈에 대해 소득세까지 내야 한다면 속 쓰리지 않겠어? 그냥 두면 배신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야.”

“무슨 말이에요?”

“차명 주식에 떨어지는 배당금은 그룹에서 비자금으로 인출해 가고, 세금은 입막음 차원에서 그룹이 대신 내 준다, 이 말이지.”

짝!

“정말이에요? 그러면 배당금이 어디로 갔는지, 세금 정산을 누가 지휘했는지 조사하다 보면 꼬리를 물 수 있다는 말이군요.”

케이는 손뼉까지 치며 좋아라 했다. 마치 마피아 영화에서 정의의 사도 역을 맡은 것처럼 말이다.

“당연! 그 결과도 뻔해. 신성의 비서실이겠지. 아마 실물 주식도 모두 다 가지고 있을 거야. 발뺌할 수 없는 증거지. 명심해서 일러 줘. 슬금슬금 덮치지 말고, 단박에 덮쳐야 한다고. 그래야 한 방 크게 먹일 수 있어.”

“좋은 아이디어이긴 한데 국세청 공무원들이 잘할 수 있을까요? 한통속일 수도 있는데.”

“물론 한통속이긴 한데, 정권 초기잖아. 건드리는 척이라도 할 수밖에 없어. 그다음은 언론을 부추겨야지.”

“……!”

“케이, 당신 실력 좀 발휘해 줘. 내가 나설 수는 없는 일이잖아.”

“수한 씨가 그래서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의도적으로 껴 넣었군요.”

“케이의 등 뒤가 안전하잖아. 안 그래?”

“수한 씨, 내게 한 번 빚진 거예요.”

“뭔 소리야. 버지니아 트레이딩 상장하는 거 허락한 대가지. 내가 예상보다 지분을 적게 가져간 것, 잊지 않았지? 호의는 호의로 갚으라고.”

“에이고, 공짜가 없다니깐!”

“케이, 공짜 거래를 하는 동업자를 가지고 싶어?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죠. 멍청한 동업자는 절대 No예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내가 빚진 거 아니야. 동등 거래라고.”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케이를 설득하는 방법은 참으로 쉽다. 내 행동이 언제나 그녀의 동업자로서 어울린다는 논리만 들이밀면 만사 오케이다. 만약 그게 잘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부탁해. 정말 부탁해.’라고 하면 그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