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휴가요?”
“설마 휴가 안 갈 생각이었나요?”
“가긴 가는데 뭐, 놀이동산 좀 갔다 오고, 해수욕이나….”
“뭡니까? 최소한 동남아 정도는 다녀올 생각을 했어야죠.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텐데.”
“그게 시간이 좀….”
“정말 안 되겠네. 바로 퇴근하고요, 내일모레 김 과장 가족들 모두 데리고 공항으로 나와요. 나랑 같이 미국 갑시다. 개발자 회의에 같이 참석하는 겁니다.”
“헉! 개발자 회의에 가는데 가족들을 데리고 오라고요?”
“휴가 계획 없잖아요. 낮엔 개발자 회의 참석하고 저녁땐 가족들에게 봉사하고! 이번 휴가는 그리 때웁시다.”
“지금 비행기 표도 없을 텐데요.”
“퍼스트 클래스는 언제나 비어 있어요. 언제나! 비행기 표는 내가 끊어 줄 테니, 퇴근부터 해요. 여행 준비에 하루밖에 못 주니까, 어서! 샘플은 이대로 가져가면 되니까 걱정 말고요.”
“어어….”
“내일모레 아침 10시 출발이니까 8시까지 공항에서 봅시다.”
나는 김 과장의 등을 밀어서 강제로 사무실 밖으로 쫓아냈다.
당신은 우리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라고! 자세 잡아도 돼! 세계로 나가서 유수 엔지니어들을 만나서 얘기도 해야 해. 그럼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알게 될 거야.
혼자 끙끙 앓다가 내게 조언을 구하는 이런 패턴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되고, 할 필요도 없어. 필요해 보이는 인재들을 훅훅 잡아당기라고요.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으며 김 과장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 *
이틀 뒤 공항.
이 비서와 함께 기다리고 있자니 공항버스가 도착하는 모습이 보인다. 환하게 웃으며 김 과장 가족들이 내리리라 여겼건만, 어쭈? 김 과장이 커다란 트렁크와 함께 혼자 내린다.
드르륵.
“사장님, 많이 기다리셨나요?”
후다닥 달려온 김 과장에게 나는 팔짱을 끼고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가족들은요?”
“집에 있습니다.”
“집? 같이 미국 간다고 했잖아요. 비행기 표는 걱정 말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아니고, 집사람과 애는 비자가 없더라고요.”
아, 그렇지. 지금은 21세기 한국이 아니지. 미국 비자가 있어야 하는군. 내 회사 직원들이야 과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발급받아 놨지만 말이다.
“그리고 집사람이 저만 미국 가는 게 진정한 휴가라고 하더군요.”
“…….”
“대신 이 트렁크에 선물을 잔뜩 채워 오기로 했습니다. 양가 부모님 선물로 구두 네 켤레, 나이키 신발 네 켤레, 양주 두 병. 가져간 옷은 다 버리고 트렁크에 새 옷으로 빈틈없이 채워 오라고 하더라고요. 사장님과 이 비서님이 좀 나눠서 반입해 주면 세관에 안 걸린다고 하더군요.”
김 과장의 말에 이 비서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멋진 휴가 계획인데요?”
“…갑시다.”
“정말 퍼스트 클래스 타는 겁니까?”
“가자고요.”
김 과장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김 과장의 첫 번째 해외 출장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꽤나 재미날 것 같았다. 차후 가족들 여권이며 비자도 챙겨 두라고 해야겠다. 컨퍼런스 참석할 때 될 수 있으면 같이 가라고 말이다.
가족들에게 자세 나오는 일 아닌가.
- *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여름에도 저녁이 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 픽사 본사가 있는 곳이다.
“개발자 회의에 참석해 주신 여러 개발자분들과 회사 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한국에서 시제품까지 만들어 온 스마트 클라우드의 CEO, 미스터 유에겐 특별히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짝짝짝짝.
“감사합니다.”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박수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고, 스티브 잡스 또한 흐뭇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 줬다.
스티브 잡스가 내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었다. 개발자 회의는 애플 엔지니어를 비롯해 그래픽 관련 엔지니어들이 다수 참석했다. 폐쇄적인 생태계를 추구하던 그가 조금씩 오픈되는 느낌이다. 나를 통해 탈출구가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애플에서 쫓겨난 것에 따른 불쾌한 복수심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빌 클린턴 행정부를 두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하하하!”
“인류의 발전에 있어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기 위해선 일단 운이 좋고 봐야 할 겁니다. 천재적인 개발자나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은 그 뒤에 생각하고 말이죠.”
“하하하.”
유쾌하게 발표를 시작하는 스티브 잡스. 그는 프레젠테이션을 잘하기도 하지만 매우 좋아한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SNS는 개발하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운 좋게도 애플 컴퓨터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시작일 뿐이라 여겨집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는 그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재미있는 것이 있으니까요.”
“오오오!”
“바로 에그박스입니다. 재미를 붙이는 것은 매우 간단하죠. 전원 플러그를 꽂고, 모니터를 연결하고, 메모리 스틱을 꽂고, 그다음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소파에 앉아 즐기면 되는 거죠. 리모컨으로 영화를 보거나, 좀 더 활동적인 분이라면 게임을 하고, 업무에 지친 분들이라면 음악만 들어도 충분하죠.”
스티브 잡스다운 프레젠테이션이다. 아주 간단한 사진 몇 장과 단어 몇 개로 10여 분을 줄곧 얘기해도 지겹지 않다. 효과적으로 일례를 들어 가며, 결국 사업 얘기와 개발 방향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티브, 애플의 제임스라고 합니다. 그래픽 처리 용량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크면 클수록 좋겠지만 돈 문제를 생각 안 할 수는 없겠지요? TV, 기존 게임기, 앰팩, 비디오 플레이어 등등을 감안해 보면 에그박스의 상한선은 350불 정도겠지요. 그럼 핵심 부품인 GPU는 어떨까요? 그 절반인 150불이 넘으면 안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하. 스티브, 계산이 잘못된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내가 이걸 팔면서 50불도 못 남긴다는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이건 지금 당신이 팔고 있는 애플 컴퓨터가 아니라니까요.”
“하하하하!”
개발자들의 질문이 나오면 화이트보드에 숫자만 적어 가며 설명을 이어 간다. 이럴 때는 그의 순발력에 놀라게 된다.
화기애애한 개발자 회의는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단순한 사업성 질문부터 복잡한 기술적 질문까지 쏟아졌지만 스티브 잡스는 아주 매끄럽게 회의를 진행시켰고, 간혹 다른 개발자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긴 했지만 원맨쇼에 가까웠다.
나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어느 회사의 누가 참석을 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말 재수 좋게 애플의 조너슨 아이브가 참석했다. 나중엔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는 양반인데 아직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디자이너다.
애플에선 아직 스티브 잡스의 초대에 고참 엔지니어를 보낼 생각은 없었나 보다. 서로 화해하는 제스처만 보여 줘도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리라.
외려 나에겐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만난 김에 스카우트해야지 싶다.
조너선 아이브 못지않게 꼬실 양반들이 수두룩했다. 아니, 이번에 사람이 아니라 회사다. 그래픽 벤처 회사들이 지금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잖나.
엔비디아, ATI, 3dfx 등등 군침이 고이는 회사들의 설립 멤버들이 모두 참석을 했다. 당연히 스티브 잡스가 새로운 멀티미디어 제품을 만든다고 하니 이 프로젝트에 한발 걸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왔겠지.
와중에 짐 켈러 같은 특급 대어는 보이지 않는다. AMD에는 1998년에 이직을 하니 지금은 DEC라는 설계 회사에 있어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이리라. 근데 정작 나는 DEC 본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21세기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회사거든.
일단 눈앞의 물고기부터 노려봐야겠지.
“사장님, 저 영어듣기 공부 다시 해야겠어요. 도통 뭔 말을 하는지 못 알아먹겠습니다.”
“영어는 일단 알아듣는 척하는 게 먼저죠. 알아들은 척하고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래, 그래픽 가속? 뭐라고 하셨죠? 하면서 말이죠.”
“아….”
“저기 엔비디아, ATI, 3dfx라는 회사 멤버가 있잖아요? 가서 말을 걸어 봐요. 그리고 맘에 드는 회사를 골라 봐요.”
“예에?”
“함께 일하고 싶은 회사를 골라 보라고요.”
“저보고 고르라고요?”
“내가 사 줄게요. 나도 쇼핑을 좀 해야 하니까. 하하.”
회사를 산다는 말에 김 과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국에 왔는데 신발과 양주만 사 가지고 가면 어쩌나? 그건 외화 낭비라고. 제대로 된 쇼핑을 하려면 회사 하나는 사서 가야지. 안 그런가.
셋 중 하나만 데려와도 우린 완벽한 그래픽 카드를 만들 수 있다. 멀티미디어 GPU는 물론 차후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이미지 프로세서는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김 과장, 제대로 된 파트너를 골라 봐요. 30년은 같이 갈 거니까.’
- *
공식적인 개발자 회의는 끝났지만 자연스레 개발자들의 자유 토론으로 이어졌다. 누구는 돌아가고, 누구는 로비에서 대화를 나누고, 또 다른 이들은 어디선가 맥주 캔을 들고 나타나 잔디밭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스티브 잡스는 CPU 납품 건으로 협의를 하겠다며 건물을 떠났다. 보나 마나 AMD로 낙찰 볼 것이 뻔하다.
“김 과장, 어째 얘기는 해 봤나요?”
“예. 해 봤습니다.”
“어땠나요?”
“기술적인 얘기를 나눴습니다만, 그중에 ATI는 아닌 것 같습니다.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제 말이 이해 안 된다며 웃더군요.”
“하하, 우스운 놈들. 이 프로젝트의 실세가 누군지도 모르는군요. 그런 애들은 제칩시다. 사람 차별하는 놈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어요.”
내 말에 김 과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한 무시에 기분이 꽤나 안 좋았나 보다. ATI 놈들, 나중에 엄청난 기회를 놓쳤다고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다.
“다른 두 회사는 솔직히 아리송합니다.”
“아리송하다고요?”
“으음, 뭐랄까요. 장단점이 있다고 해야겠지요. 3dfx는 기술적인 얘기는 참 잘 통하고 호탕하기까지 한데 뭔가 꺼림칙하고요, 엔비디아는 기술 얘기에 투자비 얘기를 자꾸 섞더라고요. 저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정중하긴 한데 솔직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나름 잘 봤네요. 어째, 회사를 방문하겠다고 하니 오케이하던가요?”
“아, 예. 두 회사 모두 실리콘밸리에 있어서 언제든지 방문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샌프란시스코 남쪽은 모두 실리콘밸리라고 보면 된다. 픽사 본사에서 차로 1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
“좋네요. 그럼 나도 슬슬 쇼핑을 해 봐야겠군요. 이 비서는 쇼핑 마쳤다고 하던가요?”
“10분이면 여기 도착한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물건은 모두 샀으니, 준비되시면 전화 달라고 하더군요.”
“역시 빠르군요. 이제 미국에서도 운전 잘해요.”
“정말 그러네요.”
“잠시 회사 가기 전에 만날 사람이 있어요. 내가 운을 떼 줄 테니 말 한번 걸어 봐요. 영어 따위로 쫄지 말고. 저놈들은 한국어 한마디도 못해요. 하하.”
“예.”
나는 김 과장과 함께 픽사 건물 로비로 재차 들어갔다. 다행히 조너슨 아이브는 아직까지 로비에 진열해 놓은 에그박스 시제품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동글동글하게 두상이 아주 잘생긴 사람이다. 스킨헤드를 한 사람이 저리 순하게 생기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에그박스가 재미있나 보군요. 다들 밖으로 나갔는데, 한참을 지켜보시네요.”
“디자인 관점에서 아주 흥미롭군요.”
“아, 당신은 디자이너군요. 난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통성명부터 했다.
“애플의 조너슨 아이브입니다.”
자연스레 명함을 주고받았다. 조너슨의 명함에는 디자인 엔지니어라고만 적혀 있었다. 우수한 디자인 엔지니어지만 그가 디자인한 제품마다 흥행에는 실패를 했기에 애플 경영진은 조너슨에게, 조너슨은 애플 경영진에 실망이 쌓이고 있을 때다.
내가 볼 땐 둘 다 문제가 있었다. 일단 애플 제품이 너무 비싸고, 조너슨의 디자인은 미려하지만 너무 패쇄적이었다. 1990년대 PC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기에 사용자 입맛에 맞게 업그레이드되고 확장이 용이했어야 하는데 매킨토시 컴퓨터에는 확장 슬롯 자체가 없었다.
웃긴 얘기지만 조너슨이 컴맹이었기에 엔지니어링 측면에서 다소 부족했다는 설이 있다. 설이라곤 하지만 그가 애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세면기, 펜, 빗등 생활 용품 디자인이 그의 이력의 전부인 걸 보면 사실 같기도 하다.
원래 역사에서 조너슨은 애플을 퇴직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 잡스가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 수석 디자이너를 맡기게 되면서 그 뒤론 승승장구했다. 따라서 천대받고 있는 지금이 스카우트하기에 딱 적당한 시기라고 할 것이다.
“어떤 면이 흥미로운가요? 나름 저희가 공을 들인 디자인입니다만.”
“뭐랄까요? 잘 만들었지만 왠지 눈에 거슬린다고 할까요? 커터로 깎아 내고 싶습니다.”
미니멀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조너슨다운 말이다.
“깎아 낸다고요? 의외군요. 나름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취지로 디자인을 했는데 말입니다.”
“일단 메모리 스틱을 꽂는 부위부터가 디자인이 에러입니다. 흉하게 튀어나왔지 않습니까?”
“꽂았다 빼는 부품이라 손으로 잡을 수 있어야죠.”
“매일 꽂았다 빼는 부품이 아니니, 토글 키로 숨겨야 합니다. 튀어나온 채로 방치하면 결국 어디에 부딪쳐 깨지기 마련입니다. 고객 입장에선 불쾌한 일이죠. 무엇보다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고요.”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한지 몸서리를 친다.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또 있나요?”
“환풍구가 양옆에 있네요. 왼쪽과 뒤로 뽑아야 합니다.”
“어째서죠? 쿨링 효율을 생각하면 환풍구는 양옆에 두는 것이 베스트입니다. 케이스 뒤쪽으론 케이블 연결 때문에 환풍구를 뚫기가 어렵습니다.”
기술적인 얘기가 나오자 김 과장이 끼어든다. 영어 듣기는 어렵다는 양반이 말하는 것은 곧잘 한다. 역시 책으로 영어를 배운 사람답다. 엔지니어링에 대한 얘기니 어려운 어휘가 술술 나온다.
“심미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사용자는 분명 에그박스를 세로로 세워서 쓰려고 할 겁니다. 그게 더 멋져 보이거든요.”
“뭐, 그럴 수도…. 그럼 하필 왜 왼쪽입니까?”
“컬러가 투톤으로 되어 있어 그렇습니다. 왼쪽이 흰색, 오른쪽이 파란색이니 고객은 자연스레 파란색을 밑으로 하고 싶을 겁니다.”
“……!”
에그박스의 컬러는 스마트 클라우드의 로고에서 디자인을 따왔다. 왼쪽은 구름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오른쪽은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사선으로 배치했는데 그것마저 조너슨은 디자인 개념으로 접근했다.
“이거 외관 디자인을 완전히 새로 해야겠어요. 하하.”
“이왕 고칠 거라면 외관 모서리를 좀 더 깎아 내고 전면을 볼록하게 설계하시죠. 에그라는 애칭이 잘 어울리게 말입니다. 물론 저라면 투톤이 아니라 스테인리스 스틸 질감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매끈한 질감이 아주 현대적으로 느껴질 테니까요.”
“이름과 디자인이 묘하게 매치되겠어요.”
“디자인은 상징이죠. 불리는 이름과 매치되는 것이 최선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조너슨의 디자인 감각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디자인에서 극찬을 받아 미술관에도 전시되었던 ‘파워맥 G4 큐브’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매킨토시 특유의 비싼 가격에다 발열까지 심한 CPU를 탑재한 탓에 예쁜 쓰레기란 오명을 쓰고 시장에서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혹시 스마트 클라우드가 뭘 만드는 회사인지 아십니까?”
“휴대폰 회사 아닌가요? 에그박스 사업은 그래서 조금 의외로 여겨지더군요.”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K폰 디자인은 어떻게 보시나요?”
나는 K폰 얘기를 꺼내며 조너슨의 표정을 살폈다. 그걸 왜 자신에게 묻나 하는 표정이 살짝 스쳐 간다.
“K폰 디자인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죠. 안테나도 없이 날렵하고 나름 현대적인 편이니까요. 적어도 이전 K폰보다는 낫더군요.”
“안테나뿐이겠습니까? 당신이 원한다면 키패드도 없애 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이 원한다면’이라는 심상찮은 말을 하자 조너슨의 표정이 굳었다. 훅 하니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옆에 있던 김 과장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표정이 달라진다.
스카우트 제의는 이렇게 대놓고 찔러봐야 하는 거다. 돌아가면 서로 피곤해진다.
“지금….”
“예, 당신을 스카우트하고 싶군요. 제 회사도 한번 보시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쑥쑥 성장하는 맛도 있고, 사람들도 활기차거든요.”
“저는 미국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군요.”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겼는데, 한국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조너슨은 원래 영국인. 애플의 노트북 디자인 공모전에서 당선되어 애플에 입사한 사람이다. 물론 그 노트북 사업도 말아먹었다. 너무 비쌌거든.
“그걸, 어떻게….”
“영국식 악센트가 들려서 말입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영국식 악센트라니. 당신이 나중에 엄청 유명해져서 고향인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는다는 말이 기억났을 뿐이다.
“세심하시군요. 한국인이 악센트를 알다니.”
“저는 사람도 잘 봅니다. 제 심장이 당신을 스카우트하라고 쿵쾅대는군요.”
“하하… 하하….”
“제 차에 회사 소개를 하는 브로슈어도 있고 아직 공개 전인 신형 K폰도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봐 주셨으면 합니다. 김 과장, 이 비서에게 전화해 주겠어요?”
“예, 사장님.”
“어, 굳이 제가 볼 필요가….”
조너슨이 사양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한 척하며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결벽증 환자답게 내 손을 피해 앞으로 쑥쑥 밀려 나간다. 나름 개발자 회의에서 특별 손님에 가까운 나이기에 잡지 말란 말도 못 하고 말이다.
내가 회사 로비를 빠져나가자마자 이 비서가 스르륵하고 차를 갖다 댄다.
딸깍.
“사장님, 실리콘밸리로 출발하십니까?”
이 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면서 묻는다. 영어로 물어보는 센스.
“아니, 아니. 신형 K폰과 브로슈어부터요. 어디 뒀더라.”
“가방에 있습니다. 잠시만요.”
이 비서가 007가방을 가져오고 나는 그 안을 뒤적거리는 연극을 한다. 자연스레 시간이 걸렸고, 조너슨의 눈길도 자연스레 이 비서가 끌고 온 차로 간다. 솔직히 조너슨이 여기 참석할 줄 알았다면, 렌터카 대신 벤틀리를 타고 왔을 텐데 말이다. 그를 발견하고 부랴부랴 이 비서를 보내 벤틀리를 사 가지고 오라고 했다. 개발자 회의가 일정보다 길어져서 다행이었다.
“벤틀리군요.”
“벤틀리를 좋아하시나요? 정확히는 1992년식 벤틀리 뮬산이죠. 올해부터 단종되었으니 보기 힘든 모델입니다. 후륜 구동이라 승차감도 나쁘지 않죠.”
나는 벤틀리에 대해 아는 대로 답을 해 보았다. 조너슨 아이브는 자동차 덕후이며, 원래 역사에서도 벤틀리 뮬산을 탔다. 수제 스포츠카를 모으는 취미까지 있었으며, 매년 영국의 굿우드에서 열리는 자동차 박람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할 정도다.
“멋지군요.”
“여기 K폰 신형 모델이 있습니다. 디자인이 어떤지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나는 이 비서가 양손으로 받쳐 든 007가방 안에서 K폰을 꺼내 들었지만 조너슨의 손은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외려 실수를 빙자해 벤틀리의 보닛을 쓱쓱 만져 보는 중이다.
“좀 더 얇아졌군요. 모서리의 투톤 컬러는 여전하고요.”
“으음,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하군요.”
솔직히 기대는 안 했다. 사실 그가 스마트폰이 아니라 휴대폰을 디자인하면 어떨까? 궁금했는데, 아직까진 관심 자체가 없다.
“제 영역이 아니라서요.”
“잘 들었습니다. 좋네요. 받아요, 선물입니다.”
휙, 찰랑.
나는 벤틀리 자동차 키를 휙 하고 조너슨에게 던졌다.
“헉! 무슨!”
조너슨은 얼떨결에 자동차 키를 받아 들고 깜짝 놀랐다.
“작은 선물입니다. 시간을 내준 것에 대한.”
그러면서 007가방을 차 뒷좌석에 던져 넣고 탁! 문을 닫아 버렸다.
“아니, 왜?”
“한국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요. 가방 안에 우리 회사 브로슈어가 있습니다. 제품도 다양하고, 당신이 제대로 일을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
“연봉은 애플의 두 배, 팀원까지 끌고 와도 오케이. 최고의 디자인을 위해 작업실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디자인 수정도 없습니다. 세상에 당신 이름을 알려 주겠어요.”
조너슨 아이브는 결벽증. 작업실 얘기가 뇌리에 확 박혀 들었을 거다.
“대체… 저를 어떻게 판단하셨기에.”
“판단이 아니라 팬이 되어 버렸거든요. 우리 제품 디자인은 당신에게 맡겼으면 합니다.”
“…….”
“갑시다. 우리 할 일 많잖아요? 아, 렌터카 아직 반납 안 했죠?”
나는 멍한 표정의 조너슨을 남겨 두고 일행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김 과장이 그런 나를 보며 ‘사장님, 낚시 잘하시는데요.’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자, 이쯤하고 김 과장 당신 돌잡이나 하러 갑시다.
조너슨 아이브, 당신은 분명히 한국으로 온다. 애플보다 스마트 클라우드를 택한다. 나는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벤틀리 먹튀하기만 해 봐.
- *
부우웅.
“역시 렌터카가 좋아 봐야 벤틀리에 비할 바가 아니네요.”
“그것도 투자니까 아까워할 필요 없어요. 자, 어디부터 먼저 가야 하나요? 전화는 해 뒀죠?”
“예. 3dfx부터 들르시죠. 거의 다 왔습니다.”
김 과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지도를 가리킨다. 3dfx의 위치는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실리콘밸리의 초입에 있다.
“미국 애들은 벤처도 참 좋은데 있어요. 그쵸?”
“…그러네요.”
나는 짐짓 차창 밖을 내다보며 농담을 해 봤다. 21세기 테헤란로보다 듬성듬성하고 높은 빌딩도 없지만, 그 자체가 멋지다.
스르릉.
3dfx 회사 앞에 차가 멈춰 선다. 손님 전용 주차장도 널찍하고 앞으로 보이는 회사 전경은 마치 작은 호텔인 듯하다. 정원의 나무들이 건물 외관을 적당히 가리고, 호텔 앞에 세워 두는 표지석처럼 회사 로고를 커다란 돌에 새겨 둔 것도 멋지다. 내 회사도 이리 꾸며야 하는데 말이다.
“들어가시죠. 전화를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아뇨, 전화부터 하면 안 되죠. 살펴보고 가야죠.”
“예?”
“돌잡이의 정석은 간을 보는 데 있습니다. 잡을 듯 말 듯 해야 재미나죠.”
나는 앞장서려는 김 과장을 붙잡고 차에 기대서 멀뚱히 회사 전경을 살폈다.
“예? 돌잡이요?”
“일단 천천히 살펴봐요. 우린 경영진을 스카우트하는 게 아니라 회사를 사러 온 겁니다.”
“이럴 때 박카스나 마시면서 보면 좋은데.”
“하하, 이 비서가 뭘 아네. 주변에 아이스커피 파는 곳 있을까요?”
“제가 사 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이 비서가 휙 하니 사라진다. 이래저래 눈치도 빠르고 행동도 빠른 양반이다.
나는 회사를 오가는 3dfx의 직원들을 살펴봤고, 관광객처럼 건물도 휭하니 돌아보고 정원의 나무도 만져 보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 비서가 아이스커피를 사 가지고 왔을 때는 아예 정원의 나무에 기대 한참을 앉아 있었다. 3dfx 직원들이 휙휙 지나갔지만 힐끗 쳐다볼 뿐 우리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관광객이겠거니 하는 눈치다.
“사장님, 전화부터 하고 이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김 과장이 조금 당황한 듯 물었다.
“글쎄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 비서 생각은 어때요?”
“여기 글렀는데요. 이 회사 오래 못 갑니다.”
눈치 빠른 이 비서는 이미 알아챘다.
“역시, 이 비서. 쇼핑 잘할 것 같아요.”
“제가 사장님 모신 지가 3년짼데 이 정돈 기본이죠.”
김 과장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도통 모르겠다는 눈치다.
“대체, 뭘 보고 만날 필요조차 없다고 하시는지….”
“잘못된 것이 한두 개가 아닌데요. 봐요, 직원들 걷는 모습부터가 글렀잖아요.”
“예? 걷는 모습요? 그게 뭐 어쨌다고….”
나는 회사 정문을 들고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피식 웃어 댔다. 김 과장을 데려오길 잘했다. 제품 개발은 잘하지만 스마트 클라우드의 수석 개발자가 되려면 일단 전체를 보는 눈부터 키워야 할 것 같다.
“김 과장은 어떻게 걷죠? 성큼성큼 자신 있게 걷잖아요. 그런 걸음걸이는 김 과장의 매우 큰 장점이에요.”
“모두 그리 걷지 않나요? 그게 어째서 제 장점이라고 하시는지요.”
“잘 살펴봐요. 저기 사람들이 어떻게 걷는지.”
김 과장은 그제야 3dfx 직원들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본다. 김 과장처럼 성큼성큼 걷는 사람도 있지만 대충 둘에 한 명 정도는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멀리서도 아니고 대현에서 말입니다.”
“유선 전화 사업부… 왠지 그 부서가 생각나네요.”
“그렇죠? 사람들을 모아 놓긴 했는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예,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저 또한 저리 걸어 다녔던 것 같습니다. 한데 그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분명 개발자 회의에서 얘기를 나눈 3dfx 사람들은 전문가였습니다.”
“그건 이 회사에 극소수의 스타플레이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게 걸음걸이로 나타납니다.”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21세기 팀워크 연구 보고서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현상이다. 여러 보고서에서 한결같이 어느 사업부를 구조조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구성원들의 걸음걸이로 판단하라고 조언한다.
“축구도 마찬가지죠. 스타플레이어만 있는 팀은 골을 넣을 순 있어도 우승은 못 하죠.”
“이 비서 말이 맞아요. 우린 개발자를 스카우트하러 온 게 아닙니다. 디자인과 사업 전략은 스타플레이어로 커버 가능한 영역이에요. 허나 기술 개발은 대규모 팀워크예요. 기술개발이 첨단으로 갈수록 그런 양상은 극심해집니다. 나는 지금 김 과장 당신에게 머리를 보태 줄 회사를 찾고 있는 겁니다. 당신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게 아니고.”
“저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시다니….”
“지금 그 말은 내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김 과장이 짐 싸 들고 내게 온 그때부터 내 팔은 이미 한쪽으로 굽어 버렸습니다. 이제 반대로 꺾을 수 없죠. 김 과장이 보여 줄 것은 그런 겸손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앞장서는 모습입니다. 지금 회사를 골라 보는 것부터 제대로 해야 내게 팀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
“나 부장은 양산팀을, 권 부장은 간접 부서를 구축하는 것처럼 말이죠. 오 이사는 연구소라는 개념을 아예 구축하고 우리 회사에 합류했고요. 김 과장은 어떤가요?”
“그럼 저는 비서실장이 될 준비를 해야겠네요.”
훅 하니 이 비서가 끼어든다. 농담으로 포장했지만 야심과 자신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주제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21세기형 직장인다운 모습이다. 맹목적으로 내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정도론 과장급 팀장이 한계다.
김 과장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쭤보죠. 저는 사장님이 직원들 걸음걸이만으로 회사를 판단했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다른 뭔가도 보신 거 아닙니까?”
솔직히 나는 3dfx가 오래가지 못하고 망해 버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훨씬 많은 것이 보인다. 스타플레이어가 있다는 것도 그래서 확신하는 거다.
“정원에 벤치가 없네요. 직원들에 대한 배려가 없어요. 벤처 기업답지 않군요.”
“사장님, 여긴 보안 의식도 없습니다. 모두 우리를 힐끗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슈트를 입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확인 전화도 없네요. 제가 연락처를 줬는데도… 좀 고압적이네요.”
나와 이 비서의 말을 듣더니 김 과장마저 자신의 휴대폰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짚었다.
원래 3dfx는 갑질로 망해 버리는 회사다. ‘부두(Voodoo)’라는 명품 그래픽 카드를 만들었지만 그간 파트너로 같이 일했던 그래픽 카드 제조사들을 배신해 단박에 망해 버렸다.
그래픽 카드가 하도 잘 팔리니까, 직접 그래픽 카드를 만들겠다고 GPU 공급을 끊어 버렸거든.
물론 한두 개 업체를 M&A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칩셋 개발을 주로 하던 회사가 그래픽 카드 양산을 쉽게 할 수 있겠나? 쏟아지는 물량에 대응 못 하고 양산에 신경 쓴다고 개발 속도마저 늦어져, 결국 고객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한마디로 자기 혼자 다 먹으려고 하다가 외려 쪽박을 찼다.
나비효과로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기업 문화가 어디 쉽게 변하겠나?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다.
“어떡하고 싶어요? 들어가서 기술 소개를 받아 보고 싶나요?”
“아뇨. 이런 회사에 제가 숙이고 들어가고 싶진 않습니다.”
“그럼 결정됐네요. 엔비디아로 바로 가 보죠.”
“3dfx엔 전화를….”
“전화가 오면 왔다가 갔다고 해요. 물건 보러 왔다가 입구조차 마음에 안 들면 딴 가게로 가는 건 당연한 겁니다.”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쇼퍼는 김 과장이고, 맘에 안 드는 이유를 가게 주인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엔비디아도 마찬가지. 가 봐서 마음에 안 들면 쇼핑은 그걸로 땡치고 다른 회사를 찾으면 된다. 하다못해 openGL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실리콘 그래픽스(SGI)를 노리든지, 그마저도 안 되면 유명 개발자를 일일이 스카우트해서 팀을 꾸리면 그뿐이다.
“어디 보자… 엔비디아는 산타클라라에 있네요. 여기서 금방입니다. 가시죠.”
이 비서가 성큼성큼 앞장을 선다.
- *
스르릉. 딸깍.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스마트 클라우드 유수한입니다.”
“반갑습니다. 엔비디아 젠슨 황입니다.”
성에서 보듯이 엔비디아의 사장은 중국인이다. 정확히는 대만 출신이며, 두 명의 공동 사업자가 더 있지만 워낙 나서길 좋아하고 경영 능력도 탁월해서 명실상부하게 CEO로 대접받게 되는 사람이다.
“스마트 클라우드 김근업입니다. 개발팀을 맡고 있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 이태훈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름 동양인다운 인사성을 보여 주며 우리를 안으로 데려갔다.
3dfx와 달리 사장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기에 겉에서 살피고 들어갈 겨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과장의 눈은 주변을 바삐 훑어 댔다. 사람들의 걸음걸이, 직원들을 위한 휴게실, 황 사장의 태도 등등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투자자님들에게 뭐부터 보여 드릴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사흘 밤낮을 설명드려도 모자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가 회의실에 자리하자 황 사장은 짐짓 너스레를 떨며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말끝마다 투자자라는 말을 붙이며 돈 얘기를 저어하지 않는다.
“그래픽 가속 방식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군요.”
“아, 그러시군요. 개발팀장님답습니다. 그래픽 가속은 저희 회사의 강점이기도 하지요. 이걸 노리는 투자자들이 꽤나 있죠.”
블러핑이 심하다. 초기 엔비디아 GPU는 그래픽 가속 능력이 3dfx엔 비할 바 아니었고, ATI에 비해서도 우수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기술적인 능력에서는 꼴찌다. 단지 고객에 대한 피드백이 워낙 빨랐고, 엔지니어를 직접 파견하는 적극성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을 뿐이다.
“개발 회의에서 이슈가 된 것처럼, 폴리곤 중첩 문제는 꽤나 골치입니다. 3dfx는 글라이딩 방식으로 GPU성능을 개선한다는데 엔비디아는 특별한 인터페이스가 있는지요?”
“당연히 있지요. 현재 저희는 사물의 뼈대를 먼저 계산하고, 그다음에 텍스처를 맵핑하는 방식을 씁니다. 기존 GPU보다 속도가 20%는 빠르다고 자신합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군요. 저희 GPU에도 바로 적용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김 과장은 황 사장의 말에 훅 하니 넘어간다. 아이디어는 기가 막힌데, 원래 역사에서는 화끈하게 말아먹는다. 폴리곤을 삼각형이 아닌 사각형을 썼거든. 텍스처 맵핑 방식에 적합하다 여기고 적극 밀었는데, 폴리곤마다 꼭짓점 하나를 더 계산해야 하는 방식인 데다 색감을 좋게 한다고 사각형 폴리곤을 4등분해서 계산하는 뻘짓을 했기 때문이다. 속도 증진을 위해 내놓은 텍스처 맵핑 방식을 제 손으로 말아먹은 꼴이었다.
“하하, 설명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좋겠지요?”
“당연하죠. 정말 감사합니다.”
“3D 테스트 패턴을 실행해 보겠습니다. 아마 당장 저희 회사에 투자하고 싶으실 겁니다.”
황 사장은 회의실에 이미 셋업된 컴퓨터를 이용해 테스트 패턴을 수행했다.
얼핏 보면 우리 회사 GPU보다는 성능이 좋지만 사기에 가까운 데모였다. 사각형 폴리곤에 최적화된 사각형 박스가 빙글빙글 돌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수준이다. 김 과장의 눈에 실망감이 떠오른다.
“사각형 폴리곤을 쓰십니까?”
“아, 예. 텍스처 맵핑 방식에 최적화된 폴리곤입니다.”
“이래서는 변곡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4분할해서 폴리곤을 꺾어 텍스처를 달리하면 변곡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그런 방식은 오히려 GPU 부하량을 키우는 꼴입니다.”
김 과장과 황 사장이 그래픽 가속 방식을 두고 왈가왈부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담당 엔지니어를 불러 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맵핑 방식을 좀 더 자세히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황 사장이 내선 전화를 할 때마다 회의실엔 엔지니어들이 늘어갔다. 대화는 좀 더 복잡해졌고, 좀 더 시끄러워졌으며, 시간도 점점 길어져 갔다. 열기가 대단했기에 회의실 문을 열어 두자 지나가던 엔지니어들마저 기웃거리더니 훅 하고 들어와 토론에 참여한다. 기업 문화가 벤처다웠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중첩 부위의 연산을 생략하고자 합니다. 맵핑이 그걸 감출 수 있을 것 같군요.”
“겹쳐진 부위를 에러로 띄울 게 아니라 아예 그림자처럼 시꺼멓게 만들자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거예요. 그리고 맵핑과 물리 연산을 분리하면 어떨까요?”
“이야, 멋진 생각이십니다. GPU 블록을 나눠서 연산을 해 보죠.”
“사장님, 그보다 먼저 폴리곤을 삼각형으로 수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해도 될까요?”
“지금? 무슨 소리야. 아직 이분들하고 계약도 안 했어.”
“뭐, 서로 보여 줘도 손해 볼 것 없잖습니까. 스마트 클라우드가 GPU 로직을 알려 주면 저희 쪽에선 맵핑 로직을 제공하면 되죠.”
“미스터 김, 어떠세요? 지금 당장 이리저리 고쳐 볼까요? 사실 저희도 폴리곤 중첩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라, 이참에 해결책이 나올 것도 같은데… 어후, 결과가 너무 궁금하네요.”
얘기가 진행될수록 황 사장과 그의 엔지니어들은 그들의 로직을 제공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결국 황 사장도 당장 고쳐 보자고 할 정도다. 말끝마다 투자 어쩌고저쩌고는 했지만 천생 엔지니어였다.
“이 비서, 엔비디아 진국인 거 같은데 어때요?”
“확실히 진국이네요. 김 과장님에게 머리도 보태 주고 손발도 되어 줄 것 같습니다. 일단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다행히 다른 집은 안 돌아봐도 되겠어요. 그쵸?”
“이만한 집이 없을 것 같은데요?”
사무실 한편으로 우르르 몰려가 김 과장이 지시를 하고 엔비디아 엔지니어가 코딩을 마구 바꿔 보더니 환호성도 지르고 탄식도 하며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 엔비디아 GPU 설계 도면까지 꺼내서 수정을 해 보자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단숨에 고쳐질 현상이 아닌데,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나는 그 뒤로 1시간을 더 기다려 주었고, 상기된 표정으로 김 과장과 황 사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시도는 실패했겠지만 의기투합은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장님, 이 회사 좀 사 주십시오.”
“그러죠.”
나는 지체 없이 답했다. 김 과장이 만족했다면 나도 만족이다.
“헉! 제 회사를 산다고요? 공동 개발에 투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 개발도, 적대적 M&A도 아닙니다. 회사를 팔지는 않으실 테니, 같은 제품군에선 타사를 배제하고 스마트 클라우드만 고객이 되는 계약을 했으면 하는군요. 그 조건을 보장받을 지분을 가지는 게 현실적이겠죠.”
“어… 그럼 스마트 클라우드의 자회사가 되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계약서에 경영권 보장을 명문화하지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고객은 스마트 클라우드가 우선입니다.”
“만약 계약이 된다면, 고객 선정은 스마트 클라우드와 협의하면 되겠군요. 대주주가 되실 텐데 적자 보실 의도는 없으실 거 아닙니까.”
“CEO답게 이해가 빠르시군요.”
“다음에는 한국에서 뵙겠네요.”
“하하, 그것도 좋네요.”
“친구랑 같이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환영입니다.”
하긴 엔비디아의 창업자는 모두 세 명이지?
황 사장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김 과장의 손까지 잡아끌어 무더기로 악수를 했다.
나의 유동 자금은 현재 2천억이 넘는다. 엔비디아의 지분 수십%는 사고도 남을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시카고의 파라곤에도 들러 봤겠지만, 지금은 케이도 자리에 없고… 말 그대로 자유 시간! 김 과장에게 샌프란시스코 관광을 시켜 주고, 항구에서 게 요리도 먹어 보고, 트렁크에 신발과 옷가지를 잔뜩 채워 주면 그뿐이리라.
그 뒤로 우리 일행은 휴가다운 이틀을 보냈다. 김 과장의 배터리는 훅 하고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