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돌잡이의 정석
시간은 잘도 흘러간다.
“손 대리, 이번 여름휴가는 어디로 가냐?”
“나는 괌으로 갈 거야. 이 대리 너는?”
“나? 푸껫! 나는 하루 종일 수영장 옆에서 담배 피우면서 무협지만 한 트렁크 읽고 올 거다.”
“유후! 뽑기 운이 있어야 하는데.”
휴가비를 빙자한 상반기 보너스도 150%를 지원했기에 사무실에선 휴가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나 또한 기분 좋게 건물 꼭대기 대강당으로 들어갔다.
웅성웅성.
이 비서가 커다란 아크릴 박스 안에 있는 종이를 마구 휘젓고 있다. 각종 회의실에서도 오성재 이사며 나운영 부장이며 권재욱 부장도 자세 잡으며 이 짓을 하고 있을 거다.
나는 개발팀과 함께 휴가 일정 추첨을 하려고 한다.
1990년대 대한민국의 기업 문화가 휴가를 권장하는 문화가 아니라서 휴가철을 앞두곤 눈치를 많이 보잖나. 내가 휴가 가서 방전된 배터리를 채우고 오라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지난해까진 공염불로 끝나 버렸기에 이번엔 강제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그것도 일주일을 통째로 말이다. 아직 일요일만 공휴일이기 때문에 연달아 8일 정도 쉴 수 있다. 나도 반가운 일이다.
“자! 조용, 조용! 사장님께서 먼저 추첨하시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사장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출근해도 휴가. 앞뒤로 당첨되는 사람은 2주간 휴가인 겁니다!”
“하하하!”
이 비서의 유쾌한 말을 시작으로 나는 상자에 손을 집어넣어 종이를 마구 섞었다. 이 비서가 마이크를 톡톡거리며 둥둥둥 북소리를 대신했다.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은 패를 꺼내 들었다. 이 비서가 종이를 건네받더니 활짝 웃어 댔다.
“오홋! 7월 2째 주!”
와아아아!
아주 괜찮은 날짜를 뽑았다.
“자! 이제 개발 1팀장 김 과장님!”
두구. 두구. 두구….
“오홋! 8월 2째 주!”
“허헉! 그땐 안 되는데… 에그박스 초도품 나오는 땐데….”
“거부권 없습니다. 강제 휴가이며 일정을 바꾸려면 일대일로 교환하세요.”
“으으….”
“하하하하!”
“이제 개발 2팀장 송 과장님!”
“송! 송! 송!”
진중한 김 과장보단 송 과장이 팀원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 장난스럽게 팀원들이 송송송! 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손을 흔들며 단상으로 나와 추첨을 하는 송 과장.
“과연 휴가가 어찌 될까요? 오홋! 7월 3째 주!”
“코호, 이를 어째! 사장님을 2주째 못 보겠네.”
“휴대폰 들고 가요. 내가 매일 전화해 줄 테니까!”
“외국 나가 버리면 되지요.”
“하하하!”
송 과장이 내 앞에서 좋아라 한다. 나는 웃어 주고 말았다.
송 과장은 확실히 눈치가 빠르다. 이왕 강제로 할당한 휴가이니 눈치 볼 것 없이 즐겁게 가면 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 직원들은 너무 달리고 있다. 기껏 업무에서 해방된 때가 봄철 체육 대회밖에 없었으니, 가족과 함께 쉴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그렇고.
대강당이 떠들썩해지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김 과장과 송 과장을 데리고 회의실로 나아갔다. 휴가철이 다가오니 제대로 된 선물을 줘야지?
사장실에 딸린 내 전용 회의실로 들어서니 오성재 이사와 부장들이 벌써 자리를 하고 있다.
“벌써 추첨 끝내셨어요?”
“사장님 휴가는 언제 이십니까?”
“7월 2째 주입니다.”
“좋네요. 저는 8월 첫 주입니다. 하하.”
권 부장이 농담을 건넨다. 오랜만에 쉬는 것이라 정말 좋은가 보다.
“자, 휴가비는 다들 아내분들 주머니로 들어갔을 테니 내가 따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오! 역시 사장님은 통이 크셔!”
“나 부장님 먼저 드릴까요?”
나는 들고 있던 서류 봉투 중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연달아 권 부장, 김 과장, 송 과장에게도 건넸다.
“오 이사님은 합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음에 챙겨 드리죠. 섭섭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해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성과 위주로 보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외려 이 자리에 안 부르셨다면 오해를 했겠지요.”
“헉! 사장님, 이게….”
내가 오 이사와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권 부장을 비롯해 모든 이들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당연한 반응이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지분 1%. 며칠 전 상장에 성공에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주가를 반영하면 20억이 훌쩍 넘는 돈이다.
“여러분이 여태 수고한 대가라고 하겠습니다. 나름 직장인들 중에서는 부자라 할 수 있을 테니, 휴가 가셔서 맘껏 즐기다 오십시오.”
“오오오! 사장님께서 지분을 주시다니요. 돈을 주시면 몰라도….”
“제 지분도 5%는 됩니다. 더 가지면 버지니아 트레이딩 경영에 참여해야 하니 오히려 견제를 받게 됩니다. 세금 문제도 있고, 일도 감당 못 하죠. 하하.”
“그렇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아무리 그래도 지분은 많으면 많을수록… 무엇보다 주가가 오를 것이 분명한데… 어우, 이거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그런 거였어? 사장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라인에 뼈를 묻겠습니다.”
“저도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개발 1팀장으로서 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들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나 또한 화답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저 또한 이런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작은 성취일 뿐입니다. 더 달려 나가셔야죠. 그러려면 일단 휴가부터 잘들 다녀오시고요.”
“감사합니다.”
“오 이사님,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거 아시죠? 픽사 건은 이보다 더 클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힘이 불끈 나는군요.”
소리 없는 환호와 각오가 회의장을 가득 채운다.
당근과 채찍은 역시 돈으로 하는 거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확실히 제대로 물살을 타고 있다.
- *
“수한 씨, 핸드 터미널 생산을 50%는 늘려야 할 것 같아요. 다음 달에 월마트도 핸드 터미널을 주문할 것 같거든요.”
“좋은 소식이군. 역시 케이야.”
“진짜 좋은 소식은 따로 있어요. 다음 주에 정식 발표가 날 텐데요, AT&T가 모토롤라 폰을 K폰으로 바꾸는 고객에게 보조금을 지원할 거고요, 스마트 클라우드가 미 관공서 인트라넷의 메인 납품 업체로 지정될 거예요.”
“대박~ 대박! 정말 좋은 소식이야. 수고 많았어. 권 부장에게 한 번 더 말해 줘.”
“그럼 그 통화만 끝내고 여름휴가 떠날 테니까 한동안 찾지 마세요. 알았죠?”
“어딜 가는데 찾지 말라는 거야? 스티브 잡스가 개발자 회의를 개최한다고 했잖아. 그래픽 칩셋 회사들도 대거 참석한다고. 참석 안 할 거야?”
“기술자도 아닌 제가 참석해서 뭐하겠어요. 수한 씨와 재훈 씨만 참석하면 되죠. M&A가 필요하면 한국에서 다시 얘기해요. 일단 저는 캐러비안베이에서 휴가 좀 보내고요.”
“거기 해적들이 우글거리는 곳 아니야? 귀하신 분이 납치당하면 어쩌려고?”
“해적들 보물 찾으면 좀 나눠 줄게요. 호호호.”
“하하, 알았어. 여태 소송이며 영업까지 하느라 고생 많았으니까. 귀국하면 보자고.”
“들어가요!”
툭. 삐이익.
돈 많은 케이는 진짜 캐러비안베이로 휴가를 가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희연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괌이라도 다녀오는 건데.
어째서 이번 생엔 희연이가 나를 볼 때마다 도망치는 거지? 괜히 이 비서 말 듣고 양복을 입었어. 그냥 청바지를 입는 건데 말이야. 벌써 8월이라고. 젊음을 불태워야 하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고.
위이이잉.
의자를 뒤로 젖히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 시카고에 있는 케이와 전화 미팅을 하느라 시간이 이리 흘러 버렸다. 요즘 미국 상황을 모니터링하느라 퇴근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뚜벅뚜벅.
휴가철 막바지이기도 하지만 꽤 늦은 시간이라 야근하는 사람들이 없다. 한데 사무실 귀퉁이에 아직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간이 테스트를 하는 연구실(LAB) 쪽이다. 이 시간에 누구지?
“휴우, 이거 어쩌지….”
“김 팀장, 뭐 해요? 왜 퇴근 안 하고… 내일부터 휴가잖아요.”
연구실 안에선 김 과장이 에그박스 시제품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고 있다.
“사장님, 휴가는 고사하고 회사에서 잘리게 생겼어요.”
사장인 나를 보며 잘리게 생겼다고 말하는 김 과장이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오늘따라 심상찮은 말투다. 뭔 문제이기에 개발자들을 다 퇴근시키고 팀장 혼자 남아서 끙끙 앓는 걸까?
“뭔데 그래요?”
“사장님께서 미국 개발자 회의에 들고 갈 시제품을 완전 말아먹은 것 같습니다. 우리 쪽 테스트 패턴은 문제없었는데… 미국에서 보내 준 폴리곤 테스트 패턴에서 칩셋이 에러를 일으키며 뻗어 버립니다. 연산 에러 허용치를 아무리 높여도 해결이 안 되네요. 휴우….”
“테스트 패턴 좀 보여 줘 봐요.”
폴리곤은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물의 표면을 구성하는 단위 요소다. 작게 쪼갤수록 실물과 비슷해진다. 현재 GPU의 처리 용량은 그리 크지 않아 사물의 표면을 큼지막한 삼각형을 이어 붙여 표현하기에 모든 사물이 종이접기 인형처럼 보인다. 물론 2D에 익숙한 1990년대 유저들은 이 정도에도 환호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 폴리곤이 문제라고?
픽사가 제공한 테스트 패턴은 형형색색의 3D개체가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영상이었다. 김 과장 말대로 3분 정도는 잘 돌아가다가 갑자기 칩셋의 쿨링팬이 위잉거리며 미친 듯이 돌다가 꺼져 버린다. 재부팅해도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21세기 GPU를 봐 온 나에겐 원인이 아주 간단해 보였다. 전형적인 폴리곤 중첩 에러이며, 과도한 위치 정보에 따른 에러다.
그래픽 칩셋, 즉 GPU에선 소수점 이하로 숫자가 잔뜩 늘어지는 실수(實數) 계산을 하는 것이기에, 일정 소수점 이하는 연산에서 무시해 버려야 한다. 쌓이는 오차를 버리지 않고 계속 연산하다 보면 어느 순간 GPU가 ‘나 아무래도 계산 잘못한 것 같은데 다시 계산해 볼게요.’ 하다가 뻗어 버리는 거다.
즉, GPU는 CPU처럼 정확한 계산이 아니라 오차를 무시하며 빠른 계산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걸 우린 그래픽 가속 연산이라고 부른다.
일례로 열차가 살짝 찌그러진 선로 위를 달린다고 하면 멈춰 서서 선로를 고치는 게 아니라, 아예 더 빨리 달려서 덜컹거릴지언정 열차가 탈선하지 않게 해야 하는 거다.
“글라이딩 기법을 쓰면 쉽잖아요. 부동 소수점을 23섹터만 배정하고, 연산 오차가 커진 폴리곤은 무시해 버려요. 후속 연산에서 나온 폴리곤 정보를 덮어 씌워 버리라고요.”
“예? 글라이딩 기법요? 그게 뭐죠? 폴리곤 위치 정보를 덮어씌운다고요?”
“영화 편집할 때 NG난 필름을 잘라 낼 수도 있지만 필름을 빨리 감아 버리면 관람객은 NG난 줄 모르는 거랑 똑같아요.”
“영화에서 필름을 빨리 감는다…. 근데 GPU에선 그걸 어떻게 구현하죠?”
“GPU는 일종의 병렬 회로니까 첫 번째 행한 폴리곤 연산에서 나온 정보를 GPU 전역에 확 뿌려 버리고 각기 다른 섹터에서….”
나는 설명을 하다가 멈춰 버렸다. 김 과장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21세기 그래픽 가속 방식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 방식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그래픽 가속 드라이버도 병행해서 개발해야 한다.
즉, 김 과장 혼자 끙끙대서 해결될 게 아니고 픽사 엔지니어와 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장님, 정보를 뿌린 다음에 뭐라고….”
“아, 잠시만요. 김 팀장님, GPU 개발을 어떻게 시작했죠?”
“예?”
“회로 설계를 어떻게 시작했냐고요?”
“당연히 사장님이 주신 병렬 회로를 기본으로 설계했죠. 코어는 퀄컴이랑 ARM사와 협업해서 만들었고요. 사이드 회로는 기존 CPU에서 벤치마킹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김 과장과 나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GPU를 바라보고 있다. 나야 통신칩을 포함해 GPU 발전사를 알기에 갈 길을 알고 있지만, 김 과장은 깜깜한 동굴 속에서 벽을 짚어 가며 전진하는 것이랑 마찬가지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리딩 엔지니어가 회사에 갇혀서 기술 정보와 아이디어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거다. 그 와중에 배터리도 방전되고 말이다.
나야 21세기에 컨퍼런스며 논문이며 인터넷이며 온갖 군데에서 정보를 얻었던 사람 아닌가.
나는 스마트 클라우드가 지금 기술 개발에 있어 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리저리 공짜로 정보를 주워 먹을 수 있는 후발주자가 아니다.
“안 되겠다. 김 과장, 교육 좀 받아야겠어요.”
“혼내실 땐 혼내시더라도 아까 위치 정보 얘기는 마저 하시고….”
“아뇨, 혼내는 게 아니라 정말로 교육을 받아야겠어요. 내일부터 휴가죠? 어디로 가기로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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