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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태풍을 타고 달리는 배 (37/104)

제4장 태풍을 타고 달리는 배

이틀 뒤 김포공항.

펑! 펑! 펑!

“노이즈 칩 사건은 비단 K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소비자의 통신 보안이 제조사에 의하여 침해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도청 및 변조까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해당 사건에 신성이라는 한국의 대표 기업이 연루된 정황이 발견되었기에 같은 한국 기업으로서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스마트 클라우드의 귀책은 아니나, 위험 요소가 발생된 만큼 배상금 전액은 소비자의 정보 보호를 위하여 쓸 것이며, 보안 프로그램은 일반인에겐 무상으로 배포하고자 합니다. 해당 프로그램은….”

나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기자회견을 빙자해서 신성에 최종 카운터펀치까지 날렸다. 다름 아닌 휴대폰 도청 가능성까지 언급해 버린 거다.

CDMA 휴대폰은 도청이 매우 어렵지만, 그게 뭔 상관인가. ‘초원복집’ 사건으로 도청이라면 이빨부터 갈아 대는 정부인데, 내 말을 듣고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신성만 들들 볶아 댈 것이 분명하며, S폰은 세관에 묶여 한참 동안 조사를 받을 게 뻔하다.

「신성, 노이즈 칩 관련을 공식 부인. 일반적인 GSM 칩일 뿐.」

「모토롤라, 신성과의 관계를 공식 부인. 노이즈 칩의 제조사에 대한 답변은 회피.」

「노이즈 칩 배상금 법정 밖에서 합의될 듯. K폰 반사이익 볼 듯, 한국엔 득인가 실인가?」

「노이즈 칩 1차 판결에 쏠리는 눈길. 배상금 2억 불에 달할 듯.」

나는 등 뒤에 온갖 신문의 헤드라인을 크게 프린트한 입간판을 세워 두었다. TV에 방송될 때 화면이 밋밋하면 타격감이 떨어지지 않나. 길을 지나다 힐끗만 봐도 무슨 일인지 금세 알게끔 해 줘야지.

“어째서 스마트 클라우드는 한국 법정에 신성을 세우지 않는 겁니까?”

“이런 일에 한국 회사끼리 싸우면 국가 이미지가 뭐가 되겠습니까?”

한국에서 신성과 왜 싸우나? 신성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CDMA 폰밖에 없는 한국에선 자칫하면 신성한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미 법원에선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명할 것 같은데, 한국에서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부의 조율에 따르는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뚜벅뚜벅.

나는 기자들 사이를 뚫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기자들을 떨쳐 내는데 기분이 아주 좋다.

이렇게 벌집만 쑤시고 자리를 비우면 기자들이 알아서 신성을 연일 두들겨 줄 것이다.

신성은 내 회사를 완전히 박살내려고 국제적으로 뭉쳤는데, 내가 신성을 봐줄 이유가 뭐가 있나? 이 회장은 내게 전화도 못 하고 끙끙 앓겠지. 전화하는 즉시 공식 부인한 것조차 거짓말이 될 테니까.

기업끼리의 싸움은 돈으로 하는 거다. 모토롤라와 함께 배상금이나 내시라고. 내가 아주 고맙게 써 줄 테니.

‘음, 이 비서가 왜 이리 늦지?’

기자회견을 할 동안 잠시 어딜 다녀오겠다고 하더니 비행기가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보이질 않는다. 게이트를 헷갈릴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타타타타타.

저 멀리서 이 비서가 겨드랑이에 상자 하나를 끼고 달려온다. 어디를 갔다 오는지 땀을 뻘뻘 흘리기까지 한다.

“이 비서, 어디 갔다 이제 와요?”

“죄송합니다. 김 과장이 반드시 사장님께 드려야 하는 게 있다고 해서 용인에 다녀오느라….”

“아니, 회사까지 다녀온 겁니까? 기자회견하는 동안?”

“김 과장이 개발팀장으로서 명예가 걸린 물건이라고. 사장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던 적이 있는 물건이라고…. 아이고, 저도 운전하다 다리가 풀리긴 처음입니다.”

대단하긴 대단하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용인까지 왕복했단 말인가?

여하튼 이 비서가 건네주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대체 뭐지? 미국 통신사들에 줘야 하는 노이즈 필터는 지난주 모두 발송했잖나. 설치까지 끝났….

어라? 상자를 열어 보니 정확히 카드덱 크기의 뭔가가 있었다. 외관도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것이 굉장히 눈에 익었다.

-미국 시카고행 KR702편을 이용하시는 승객께서는 속히 탑승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미국 시카고….

“사장님, 서두르시죠. 저 때문에 늦으셨습니다.”

“그래요. 어서 갑시다.”

나는 좀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일단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이 비서와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 *

시카고 공항.

김 과장이 건네준 물건을 보고는 흥분해서인지 비행 내내 잠도 오지 않았다.

우리 제품의 최종 목표는 음악, 통신, 게임을 통합해 사용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했더니, 게임기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부품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 시제품이고, OS와 게임 프로그래밍 기술이 일천해 큰 컬러 화면에 고해상도 에그펫을 동작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제대로 된 파트너만 구한다면 또 하나의 대박 제품이 될 것이다. 나름 이름도 고민했는지 겉면엔 ‘에그박스’라고 프린트되어 있었다.

원래 역사에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1994년도에 나왔으니, 초보 단계라곤 하지만 1년 남짓 빠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시 연구비가 넘쳐 나니 우리 회사 기술자들도 소니 못지않게 전문가가 되어 가고 있다. 돈을 더 줘야겠다.

스르륵.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시카고 공항의 출국장 자동문 앞이었다.

“헤이, 수한! 여기야, 여기.”

“재훈아. 네가 어쩐 일로 마중을 나왔냐?”

“케이 누님이 부탁하더라. 보는 눈이 많다고 자기 대신 가 달라고 말이다.”

케이를 꼬박꼬박 누님이라고 부르는 재훈이의 말투가 재미있다.

“어이고, 케이가 세심한 면이 있어.”

“하하. 저도 좀 봐주시죠, 미스터 유.”

“윌슨, 잘 지냈죠? TV에서 하도 봐서 어제 만난 사람 같군요.”

재훈이 옆에는 윌슨이 비서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나름 재훈이도 파라곤이 눈여겨보는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가요? 일단 가시죠.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요? 앞장서시죠.”

공항을 빠져나가자 5미터는 족히 될 만한 리무진이 내 앞에 스르륵 멈췄다. 나, 재훈, 윌슨, 이 비서까지 타도 텅텅 비어 보일 정도로 넓다.

윌슨이 샴페인부터 한 잔 권한다.

“클린턴 당선에 K폰에 파이오니어까지 축하할 일이 너무 많군요. 여하튼 환영합니다, 미스터 유.”

“다들 대박 나십시오.”

“대박!”

“대박!”

쨍!

기분 좋게 샴페인을 한 잔 하자니, 윌슨이 싱긋 웃으며 본론을 시작한다.

“시카고 외곽에 버지니아 트레이딩 미국 지사를 세웠습니다. 케이슨 님도 같은 건물에 개인 사무실을 내셨고 말입니다. 파라곤 사외 이사들이 꽤나 몰려들었지요. 미스터 유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말입니다.”

“이야, 파라곤의 물주들이 저를 보러 온단 말입니까? 내가 가는 게 아니고요?”

“물주들이야 돈 냄새가 풍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지요. 기다리면 돈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집니까?”

“돈을 좇으면 돈이 달아난다는 소리도 있잖습니까?”

“그런 헛소리를 퍼뜨려 줘야 돈을 벌지요.”

윌슨이 손에 든 샴페인잔이 출렁거릴 정도로 웃어 댄다.

물주들이 느긋하게 휴양지에 누워 사람을 부리기만 한다고 여기면 오산이다. 누구보다도 바쁘게 움직이며, 어찌 보면 돈 때문이 아니라 일 중독자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수한아, 근데 너는 음원 소송이 걸릴 줄 어찌 알았냐? 백신 오픈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을 땐 솔직히 믿지 않았다만.”

“한국에서도 비슷한 소송이 있었잖아.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 봤냐?”

“이야, 누가 들으면 점쟁이라고 하겠다. 여하튼 여러 포털 업체에서 우리 프로그램 잔뜩 사 갔다. 게이트도 일부이지만 열어 줬고 말이다.”

“검색 엔진과 보안 프로그램. 그게 파이오니어의 상장 전략임을 잊으면 안 돼. 음원 판매는 그냥 통신사들을 끌어들이는 미끼라고만 여겨도 충분해.”

“아이고, 교수님 납셨네. 대체 그 얘기를 몇 번째 하는 줄 아냐?”

“하하. 쏘리. 쏘리.”

“꽃길 걷게 해 주니 봐준다.”

재훈이가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피식 웃어 댄다. 녀석은 아직도 입이 귀에 걸려 있다. 마치 영원토록 요즘만 같아라 싶지? 정말 꽃길만 걷게 해 주마.

시카고 외곽으로 돌아 나가는지 창밖으로 푸른 가로수가 지나간다. 봄이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카고는 한국의 날씨와 꽤나 닮은 면이 있다.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인 것처럼 시카고는 커다란 호수들로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날씨 변화가 아주 극단적이다. 겨울에 왔을 때는 정말 추웠는데 말이다.

샴페인을 홀짝이며 바깥 풍경을 즐기고 있자니 나지막한 언덕 사이로 육중한 빌딩이 보인다. 그 옆에 커다란 성냥갑 같은 창고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집채만 한 트럭들이 바쁘게 들락거린다.

스르릉.

육중한 건물 앞에 리무진이 멈춰 서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운전사가 문을 열어 준다. 내려서 보니 차안에서 봤을 때보다 건물이 더 육중한 느낌이다.

특유의 갈색 유리로 마무리한 것이 파라곤의 건물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꼭대기 중앙에 다이아몬드 마크가 보이고 버지니아 트레이딩이라는 글씨가 빌딩 중간에 새겨져 있다.

“아가씨께서 굳이 저러고 싶다고 하셔 가지고….”

내가 입구로 들어서지 않고 건물을 한참 쳐다보고 있자 윌슨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멋진 선전포고네요.”

“그쵸, 선전포고죠. 시타델파의 피터슨이 아주 싫어하니까요.”

“경쟁자가 피터슨이라는 사람이었군요.”

“어이구, 모르셨구나. 이런, 이런.”

윌슨은 집게손가락을 연신 입술에 갖다 댔다. 투자사의 기본은 정보를 지키는 것이다. 나야 미래에서 왔기에 원래 역사에선 파라곤의 주인이 되어 시타델이라고 이름까지 바꿔 버리는 피터 피터슨을 익히 알고 있지만 윌슨에게 그리 말할 수는 없잖나. 나중에 미국의 IT 버블이 터질 때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지금은 신경 끄자.

위이이잉, 스르륵.

또각또각.

“모든 물류는 시스템을 통해서, 그리고 핸드 터미널을 통해서 하는 게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규칙이에요. 앞으로 조심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침 케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옆에 중년 사내를 두고 업무 지시를 하는 것 같았다.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케이.

“어서 와, 수한.”

“저는 본체만체하깁니까?”

“재훈 씨도 어서 와요. 위아래 사무실 같이 쓰는데 별스럽네요. 호호,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요?”

“아, 괜히 말 꺼냈네. 못 당해.”

“하하하.”

재훈이도 이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나 보네. 버지니아 트레이딩, 파이오니어, 그리고 파라곤. 미국에선 여기만 오면 되는군. 일 처리 잘했네, 케이.

“수한 씨, 이 건물에 들어선 느낌이 어때요? 내가 돈 좀 번 게 확 느껴지지 않아요?”

“차기 파라곤의 후계자답다고 해야지. 난 언제 이런 빌딩 가져 보나?”

“그러게 어서 상장부터 하자니까요.”

“그건 나중에 논의하고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신다며. 올라가지.”

“그래요. 이리로.”

“수한아, 일 잘 보고. 귀국하기 전에 꼭 나랑 같이 밥 한번 먹자. 내가 쏜다.”

“어, 알았어. 나중에 봐.”

재훈이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탔고, 나와 케이 그리고 윌슨은 고층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꼭대기까지 단번에 휙 하니 올라갔더니 넓은 로비가 뻥 뚫려 있고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 바깥 전경이 보였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어질어질하게 느껴졌다.

“소송 건부터 먼저 협의해야 하나?”

“수한 씨, 그건 걱정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돈 뜯어내는 건 파라곤의 전문 분야예요.”

“하하, 알았어. 그럼 논의할… 어우.”

로비를 지나는 중에 소송 건을 물었는데 케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하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문을 열었다. 말을 이으려 했던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역시 천조국. 문 안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닥터 케이슨의 재력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한 나라의 국립 도서관을 통째로 옮겨 온 듯한 느낌이다.

한쪽 벽에 전광판 형태로 미국 전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앞에 파라곤 이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예전에 나의 투자 설명회에 참석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래, 이들을 앞두고 소송 얘기를 꺼낼 이유는 없겠네.

“어서 오시게, 미스터 유.”

“다시 뵙게 되어 기쁘군요. 건강하신 듯해 더욱 보기 좋습니다.”

“허허, 한국식 인사는 듣기가 참 좋군. 인사하게. 다들 보고 싶다고 멀리서들 왔다네.”

“미스터 유! 축하하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진정한 킹메이커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허허, 말조심하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반갑습니다. 다들 도와주신 덕분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덕담을 건네는 물주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고, 포옹까지 했다. 이들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만간 나와 재훈이가 상장하면 자신들의 투자금이 두 배 세 배로 뻥튀기될 테니까.

“자네도 열심히 일했지만 파라곤도 놀지는 않았네. 윌슨, 우리의 성과를 설명해 주겠나?”

케이슨이 손으로 전광판을 툭툭 건드리며 윌슨을 종용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랑할 게 아주 많거든요.”

“어서 자랑해 보게.”

“최근 K폰, 앰팩도 핫하지만 일단 우리의 베이스라인인 핸드 터미널과 인트라넷부터 설명드리지요. 여기 붉은 점이 파이오니어의 인트라넷이 들어간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 파란 점이 핸드 터미널을 기반으로 하는 물류 센터입니다. DHL, Fedex, UPS까지 함께 쓰지요. 우리는 물류 회사의 물류 회사가 되고 있습니다. 하하하.”

“흰색 줄은 뭡니까?”

나는 파이오니어 인트라넷을 연결하고 있는 흰 줄을 가리켜 보였다. 뭔지 대충 감이 왔지만 확인차 물었다.

“아하, 좋은 질문입니다. AT&T와 베이비 벨이 깔아 대는 광통신 회선입니다. 인트라넷과 인트라넷을 연결하죠. 궁극적으로 인터넷 시대가 활짝 열릴 겁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께서 말한 살아 움직이는 미국이 여기서 나왔구만.”

“그렇습니다. 인간의 동맥과 정맥처럼 실시간으로 정보가 오가고 실물도 오가지요. 파이오니어와 핸드 터미널이 있기에 가능한 겁니다.”

역시 미국인.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판을 확장하는 것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한다. 벌써부터 21세기 아마존의 초기 사업 모델이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통해 구현되고 있었다.

핸드 터미널이 한 달에 수십만 대씩 팔리고 서버가 수백 대씩 팔리는 이유가 여기 있었구만.

“판이 잔뜩 커지는군요. 한데 이렇게 우리만 먹으면 배탈이 날 것 같습니다. 미국은 독점을 싫어하잖습니까. 게다가 저라는 한국인이 껴 있고요.”

“하하하… 이거 명치를 세게 맞았는데요?”

미국은 겉으로는 자유 무역주의를 부르짖고 있지만 속내는 미국 만세다. 특히 빌 클린턴 행정부는 그 무서운 슈퍼 301조를 부활시키는 정권이 아니던가. 아무리 파라곤을 끼고 있어도 조심해야 할 것은 조심해야 한다.

결국 이 판에서 알맹이를 빼 먹고 있는 것은 인트라넷 서버와 핸드 터미널을 팔고 있는 스마트 클라우드이니까.

“그래서 자네를 기다린 걸세. 통신사가 인터넷 회선 사용료를 가지는 것만으론 조금 부족해 보인다네. 특히 물류 건은 꽤나 큰 돈이 될 것 같아. 유통 재고가 핸드 터미널 시스템으로 혁신적으로 줄어들어 고객이 말 그대로 폭발하고 있네. 심지어 자동차 회사들도 부품 조달을 맡기겠다고 할 정도야.”

케이슨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누르는 모습이다. 내 입을 통해 듣고 싶겠지. 그럼 해 주지, 뭐.

“버지니아 트레이딩에서 핸드 터미널과 물류 시스템 사업권을 가지세요. 상품 기획부터 판매까지 전권을 드리지요. 스마트 클라우드는 제품 공급만 하겠습니다.”

“오호? 그래도 되겠나?”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수한 씨?”

케이슨에 이어 케이까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당연하지. 핸드 터미널은 스마트폰으로 가는 중간 다리일 뿐이다. 내게는 물류 사업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무엇보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커져서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대신….”

“대신!”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나스닥에 상장하고, 내 지분을 챙겨 줬으면 하는데.”

문제없다는 듯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하죠. 몇 프로를 원해요?”

“9%만 줘. 내가 5%를 가지고 나머지는 우리 팀장들에게 나눠 줄 거야.”

“허! 그거면 되겠어?”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란다. 서버와 핸드 터미널이 없으면 팥 없는 찐빵이 되는데 내가 9%에 만족한다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이 판은 아주 커질 거다. 케이가 주인이 되어야 파라곤을 방패로 쓸 수 있다. 나는 물건만 팔아도 충분하다. 이참에 김 과장, 송 과장, 권 부장, 나 부장에게 1%씩 선물도 주고 말이다. 오성재 이사는 늦게 합류했으니 부자는 다음 기회에 되라고 하자.

“나는 미스터 유가 이리 말할 줄 알았네. 내 투자 금액 2억 불에서 절반은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지분으로 받고 싶네.”

“나는 20%만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분으로 바꾸겠네. 미스터 유의 스마트 클라우드가 상장할 때까지 기다리겠네. 자네 지분 할당할 때 나를 꼭 불러 주게. 기억해 주겠나?”

“나는 25%. 난 파이오니어 지분에도 관심이 있네. 대체 언제 상장하는가?”

“하하, 파이오니어는 9월 회기가 닫히기 전에는 할 겁니다.”

이미 재훈이와 논의가 되었는지 윌슨이 지체 없이 대답을 한다. 이런 자리를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주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지분 장사를 하겠군.

“오오오! 그럼 스마트 클라우드는?”

“11월에 하려고 합니다.”

“11월! 좋군.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겠어.”

“하하하!”

할아버지들이 엄청 좋아한다. 눈을 반짝이며 벌써부터 내 회사의 대주주가 된 듯 웃어 댄다. 그치만 생각보다 그리 많은 지분은 못 가져가실 겁니다. 내 회사가 생각보다 훨씬 커질 테니까요.

나도 호쾌하게 웃어 주었다. 여하튼 올해 11월이면 10억 불 빚은 후루룩 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나처럼 빚을 빨리 갚는 사람은 없을 거다.

    • *

식사라도 같이하자는 물주들을 케이슨이 나서서 모두 돌려보냈다. 케이는 그제야 내게 소송 얘기를 늘어놓았다.

“K폰 소송은 걱정 말아요. 3억 불 정도로 합의하면 어떨까 싶어요. 2억 불은 소비자 재단에 일임해서 피해 보상하고요, 1억 불은 K폰 할인에 쓰면 어떨까요? 시장 점유율 8%는 거뜬히 올라갈 거예요.”

“좋네. 그러게 해 줘, 케이.”

“불법 음원 건은….”

“케이, 그 건은 내게 맡기렴.”

곁에서 커피를 마시며 딴청을 피우던 케이슨이 음원 얘기가 나오자 훅 하니 들어왔다.

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진중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음원뿐 아니라 정보 유통 전반에 대한 얘기일세. 이 또한 독점으로 비치면 곤란하니 협력 업체가 필요할 듯하네.”

“정확히는 미국 회사를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일례를 들자면 AOL이나 애플이나 픽사 같은 회사 말입니다.”

“으흠?”

내 말에 케이슨이 흠칫 놀라며 눈이 동그래진다. AOL이나 애플이야 그렇다손 쳐도 픽사를 언급하니 놀랐을 거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선 당연한 추측이지. 음원 얘기는 곧 앰팩 얘기. MP3에서 대박을 쳤던 스티브 잡스가 눈독들이지 않을 리 없잖나. 케이슨을 통해서 이렇게 접촉이 들어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어디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픽사일세. 그 CEO가….”

“스티브 잡스,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허허, 이거 참 내가 할 말이 없군. 허면 그가 어떤 제안을 해 왔는지도 혹시 알겠나?”

“글쎄요, 고용량 앰팩? 음원 라이브러리? 앰팩을 컴퓨터와 동기화하는 것? 뭐, 스티브의 이력이라면 그 정도를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헉!”

케이슨은 진심으로 놀라는 것 같았다.

“혹시 오늘 스티브와 저녁 식사 약속하셨나요?”

“허헉!”

“뭘 그리 놀라세요? 투자자분들을 돌려보내시기에 넘겨짚은 건데.”

할아버지 심장병 걸리겠다. 나는 케이슨의 어깨를 마사지해 줬다.

오래 사셔야지요. 케이가 완벽히 클 때까진 버텨 주셔야 합니다.

젊은 시절의 IT 천재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군. 이것도 인연인가 싶다.

잘됐다. 나도 얻을 게 있고 대가로 줄 만한 것도 있으니까. 스티브 잡스는 앰팩을 탐내겠지만 그걸 줄 수는 없고, 에그박스를 내놔야겠다. 제대로 된 에그박스를 만들 사람으론 그 양반이 가장 적격이리라.

이참에 신성에 협조한 소니한테도 빅엿을 선사하고, 나는 스티브 잡스 덕분에 플래시를 엄청 팔아먹고 OS 라이선스도 받고, 재훈이는 인터넷 바다에서 확실한 생태계를 갖추게 될 거다. DRAM을 파는 대현에도 적잖이 도움이 될 테고.

나는 탁자 아래 쇼핑백에 들어 있는 상자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에그박스가 OS를 갖추고 픽사에서 만든 게임이 실행되는 모습을 상상하니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 *

시카고 근교 케이슨 별장.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하나 싶었더니 일전에 한 번 와 봤던 별장이다. 봄에 보는 호수의 야경은 더욱 멋지다. 특급 셰프가 차려 주는 만찬 또한 그 못지않게 멋지고 말이다. 나, 케이슨, 스티브 잡스 세 명의 남자가 모여 식사를 하는 게 좀 밋밋하긴 했지만, 케이슨이 화제를 잘 이끌어 꽤나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되었다.

케이슨과 스티브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케이슨의 인맥이 안 닿는 곳이 있을까?

식사를 마치고 와인이 깔리자 슬슬 본론이 오가기 시작했다.

“스티브, 여기 미스터 유가 당신의 제의를 이미 예상하고 있더군. 하드디스크 앰팩, 음원 라이브러리, 컴퓨터와 동기화까지… 내가 정말이지 깜짝 놀랐어.”

“한발 앞선 아이디어라 여겼는데 완전 착각이었군요.”

케이슨이 내 칭찬부터 했고, 스티브 잡스는 감탄을 해 댔다.

“일을 하다 보니 생각이 비슷하게 닿았을 뿐입니다. 만약 OS와 Firewire 구동칩만 있었다면 나 또한 하드디스크로 앰팩을 만들었을 겁니다. 마땅한 방법이 없어 반도체로 하드디스크를 대체했을 뿐입니다.”

“그리 생각했다면 나에게 라이선스를 주십시오. 나는 만들 수 있습니다. 기기당 얼마를 원합니까? 물론 음원 재생칩은 스마트 클라우드 것을 채용하지요.”

“라이선스를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주려고 했다면 스티브 당신이 아니라 애플한테 줬겠지요. OS와 Firewire 기술은 애플의 자산이지 당신의 자산이 아니니까요. 저는 크로스 라이선스가 필요합니다.”

스티브가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은 앰팩의 라이선스를 주면서 OS와 Firewire 기술을 얻고 싶다는 것. 크로스 라이선스의 당사자는 애플이지, 스티브 잡스나 픽사가 아니다.

“으흠, 그럼 왜 나를 만나겠다고 했지요?”

“나는 당신이 다시금 애플의 주인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서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난 사람을 믿지 기업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다시 애플을? 선물이라….”

“수한, 그러지 말고 물건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떤가? 얘기가 쉬워지지 않겠나.”

케이슨이 슬쩍 말을 보탠다. 나 대신 적당한 타이밍에 미끼를 던져 준다.

“뭡니까? 내게 보여 줄 것이.”

“당신을 애플의 왕좌로 다시 올려 보낼 물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나는 식탁 위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에그박스 화면에선 귀여운 강아지가 간식을 달라며 데굴데굴 구르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감탄사가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임기인가요? 으흠, 앰팩보다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스티브는 아직 앰팩에 욕심이 나나보다. 그는 픽사의 CEO.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는 자가 게임 사업에 관심이 없을 리 없다.

원래 역사에서 픽사는 토이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로 연신 대박을 터뜨리는 영화사가 분명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머릿속에서 픽사는 여전히 컴퓨터 그래픽 하드웨어 회사였다.

1995년 영화가 대박을 치자 똑같은 제목의 게임을 출시하며 게임기 시장을 노렸지만 소니나 닌텐도가 스티브 잡스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아 실패했으며, 그 후 애플 CEO로 복귀한 스티브 잡스가 게임기 사업을 재차 시도했지만 MS가 X-box를 출시하며 그의 발목을 잡았기에 시장 진입에 또 한 번 실패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MS의 빌 게이츠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X-box의 탄생을 두고 벌인 싸움은 업계 관련자 사이에서 유명한 뒷얘기라 할 수 있다.

그 싸움은 1990년대 중반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덕분에 고성능 비디오 게임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자 1990년대 말 애플과 MS가 그 시장에 진입하기로 결정한 데서부터 시작했다.

애플과 MS의 전략은 매우 비슷했는데, 시장 진입이 늦은 대신 혁신적인 멀티미디어 하드웨어로 승부를 보기로 한 것이다.

즉, 플레이스테이션은 게임기 아니면 DVD 플레이어로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애플과 MS가 개발에 착수한 멀티미디어 하드웨어는 컴퓨터나 다름없었다. 1080dpi라는 21세기급 해상도를 지원하며, 5.1채널 사운드에 외장 하드디스크까지 붙여 용량 업그레이드까지 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문제는 애플이 MS보다 디자인을 훨씬 잘했다는 것이며, 해당 하드웨어의 CPU를 인텔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윈텔(Window와 Intel의 합성어)연합이라는 말이 있듯 인텔은 MS에 쏠려 있는 기업이었기에 애플로부터 얻은 CPU 및 메인보드 설계 아이디어를 은근슬쩍 MS에 흘리기를 반복했다. 애플에서 디자인한 사운드 스톰이라는 오디오 프로세서가 MS의 X-box에 먼저 적용된 것이 대표적인 일례라 할 수 있다.

분노한 스티브 잡스는 인텔과 MS에 소송을 반복했으나 자본에 밀려 패소하자 해당 사업 자체를 접어 버렸다.

물론 애플도 복수를 하긴 했다. 그동안 인텔과 협업했던 CPU 설계 기술은 AMD에 헐값에 넘겨 버렸으며, 오디오 칩셋 기술은 NVIDIA에 넘겨주면서 인텔과 각을 세우게 했다. 게다가 MS의 X-box가 출시되자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공짜 OS인 리눅스 버전으로 시장에 뿌려서 가뜩이나 게임 타이틀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MS를 곤경에 빠뜨려 버렸다.

말하자면 스티브 잡스는 운이 닿지 않았을 뿐 꾸준히 게임 사업을 노렸었다. 멀티미디어 하드웨어가 애플의 미래라 여겼던 그였기에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흐흠, 의외군요. 이건 단순한 게임기가 아닙니다. OS만 받쳐 준다면 혁신적인 멀티미디어 기기가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기에 내게 선물이 될 수 없는 거지요. 미스터 유의 도움 없이 우리 회사 자체적으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제품입니다.”

살짝 웃음이 나온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인텔한테 당했던 거다. OS 기술만 있어서 어쩌게? 칩셋은 누가 만들어?

당신은 인텔한테 멀티미디어 칩셋 기술을 뺏기고, 차후 스마트폰 사업에서는 같은 실수는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며 퀄컴과 신성을 밀면서 인텔을 배제하려고 엄청 노력을 했다니까. 심지어 이미 내가 대주주가 된 ARM사 같은 모바일 칩셋 회사를 두고는 인텔과 MS 연합에 대항해서 지분 싸움까지 벌였다고.

“스티브, 그에 대해서 좀 설명하자면….”

“수한, 잠시만 실례하겠네. 스티브, 자네는 애플의 명성에 비할 만한 회사가 몇 개쯤 있다고 생각하나?”

케이슨이 내 말을 끊고 스티브 잡스에게 뜬금없는 얘기를 했다. 케이슨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내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잠시 자신에게 대화를 맡겨 달라는 뜻을 전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애플이라는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회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애플의 PC는 인류의 문화 자체를 바꾸고 있으니까요.”

“알아. 그래서 애플의 명성을 뛰어넘는 회사가 아니라 비교할 만한 회사를 묻고 있지 않나. IBM이나 MS를 거론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네.”

“굳이 말씀드린다면 나이키, 디즈니, 코카콜라, 소니 정도가 아닐까요.”

나는 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케이슨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동의합니다. 저는 그 브랜드들 중에 소니를 지우고 싶군요.”

“대신 스마트 클라우드를 올리고 싶다는 말이겠군.”

“하하, 어찌 아셨습니까?”

“그럼 정리해 볼까? 세계 Top 5 브랜드는 애플, 나이키, 디즈니, 코카콜라, 스마트 클라우드. 이렇게 새로 쓰고 싶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애플은 새로 이름을 올릴 제품이 아니라 원래 자리를 찾을 제품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스티브가 원래 자리로 돌아갈 제품은 눈앞에 있고요.”

“……!”

스티브 잡스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다. 결국 케이슨의 도움으로 자연스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나는 앰팩을 독점해야만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거다. 그에 반해 애플은 적당한 히트작 하나만 내도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제품의 발굴자가 스티브 잡스 본인이 되기만 하면 되고 말이다.

케이슨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스티브, 현재의 애플은 예전의 애플이 아니지. 확인해 볼까? 자네의 애플은 뭘 만드는 회사인가? 컴퓨터? OS?”

“애플은 그런 회사가 아니죠. 문화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좀 더 솔직해지면, 자네의 천재성을 증명해 주는 회사겠지. 안 그런가? 하하.”

“…….”

케이슨이 호탕하게 웃었지만 스티브 잡스는 와인잔을 들고 말을 아꼈다.

“수한, 자네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

“애플처럼 거대 담론을 담기엔 제 회사는 아직 너무 작군요. 제 회사는 명백히 하드웨어 제조업체이며, 잘 먹고 잘 살아 보는 게 모토인 회사입니다. 나, 내 가족, 내 동료, 내 직원… 현재까진 그 정도군요. 앰팩은 그걸 가능케 하는 제품이죠.”

“OS와 Firewire 기술이 있으면 앰팩은 진정 그런 제품이 될 것 같군. 허면 이 ‘에그박스’라는 제품은 스티브에게 어떤 제품이 될 것 같은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말일세.”

“게임기 그 이상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픽사의 그래픽 엔진과 애플의 OS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멀티미디어 기기 말입니다. 커다란 TV에 연결해 압도적인 시각 효과를 내고, 사운드도 리얼해야겠지요. 스마트 클라우드라면 애플이 원하는 모든 칩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불법 복제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메모리 스틱도 만들 수 있죠.”

“후후, 멀티미디어라. 영화 같은 게임에, 영화 자체를 볼 수도 있고, 오페라도 즐기고, TV에 라디오까지 합쳐 버릴 수 있겠군.”

그래, 거기에 인터넷과 전화까지 합쳐 버리면 스마트폰이 되는 거지. 같이하지. 같이해서 판을 키워 보자고. 나는 이참에 안드로이드가 나오기 전에 OS 기술과 칩셋 기술을 확실하게 얻고 말이지. 걸려라… 걸려라, 제발.

“그뿐일까요? 온라인에 애플 스토어를 만들어서 하드웨어, 각종 액세서리, 게임 타이틀을 팔 수도 있지요. 단순히 음원을 파는 것보단 훨씬 화제가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애플 스토어!”

내가 미래의 얘기를 살짝 꺼내자 스티브 잡스가 깜짝 놀란다. 최근 그의 머릿속에 떠오를 듯하면서 좀체 잡히자 않는 단어였을 것이다. 애플 스토어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하자마자 제일 처음 했던 일이잖나. 파이오니어에서 음원 판매가 실시되는 와중이니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스티브 잡스.

넘어올 듯 말 듯 한 그를 보고 있자니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컴퓨터부터 스마트폰까지 IT업계 전체를 바꿔 놓은 사람 아닌가. 그와 함께 일한다면 정말 신이 날 것 같은데 말이다.

결국 경쟁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가려면 최소 10년은 걸리지 않겠나. 벌써부터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이 물건을 좀 가져가도 될까요?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군요.”

“(오오오오오오!) 인텔과 MS가 보지 않는다는 약속만 해 주신다면. 아, 물론 소니는 당연하고요.”

훅 하는 느낌과 함께 내 낚싯바늘에 고래가 걸렸다. 나는 순간 팔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숨을 참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보안이 우려된다는 말로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하, 그런 걱정을 왜 하나요? 멀리하고 싶은 회사만 딱딱 짚어 주는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티브 잡스는 에그박스를 상자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케이슨이라는 대형 물주가 증인으로 앉아 있으니 보안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모방해야 하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라이선스만큼은 확실히 챙긴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기술만 꿀꺽하고 특허 무효 소송을 남발했던 여타 다른 기업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돌아가서 에그박스를 세심히 살펴본다면 그 기능 자체보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부품 기술 하나하나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픽사의 그래픽 엔진을 충분히 돌릴 수 있는 하드웨어거든. 각 부품에는 ARM, 퀄컴, 그리고 스마트 클라우드의 기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다음엔 한국에서 뵙죠.”

“가게 된다면 동업자로 가는 것이겠군요.”

“그리될 것 같습니다만.”

“아주 자신감이 넘칩니다.”

“예전의 당신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쨍!

내가 와인잔을 드니 스티브 잡스와 케이슨이 기분 좋게 잔을 부딪쳐 왔다.

그러고 보니 이 별장에 올 때마다 큰 거래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십중팔구 스티브 잡스는 한국으로 날아올 것이다. 특히 플래시 메모리는 하드디스크, CD롬을 훌쩍 뛰어넘는 기물이다. 한번 맛보면 절대 못 빠져나온다. 비싸다는 게 문제지만 뭐 어떤가? 애플 제품은 언제나 비쌌다.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은 말 그대로 천상의 음료 같았다. 애플과 파라곤이라는 돛을 매달고 마구 달려 나갈 모습을 생각하니 미친 듯이 즐거웠다. 배에 스마트 클라우드의 모든 직원을 태워도 전혀 속도가 줄지 않을 거다. 끌어 올리는 그물마다 돈다발이 그득그득할 것이다.

    • *

귀국 하루 전.

요 며칠 동안 케이슨, 윌슨, 케이, 심지어 재훈이가 주관하는 파티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노이즈 칩을 빌미로 K폰 사업을 확대하는 자리이자 미 음반 협회의 리더들과 관계 개선을 하는 자리기도 했다.

파티 뒤에는 지역별 K폰 할당량과 파이오니어 지분에 대해서 온갖 물밑 계약들이 줄을 이었다. 바야흐로 북미에서 스마트 클라우드와 파이오니어의 입지가 단단해지는 순간이었다.

따르… 따르르릉. 따르릉.

호텔로 들어와 오늘은 푹 쉬어야지 싶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국제 전화임을 알리듯 벨소리가 중간에 한 박자를 쉰다.

“Hello.”

-날세, 유 사장.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이희건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이십니까? 그리고 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휴우, 어렵게 알아냈다고 해야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어쩐 일로 전화까지 하셨습니까?”

-이쯤 했으면 하네. 오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대로 소송이 길어지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아니겠나. 미국으로 간 김에 법정 밖에서 합의를 완료해 줬으면 하네.

케이는 배상금 3억 불을 두고 신성과 모토롤라를 오가는 중이다. 지금 전화를 해 왔다는 말은 그걸로 소송을 종료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3주 가까이 이슈가 되고 있으니 신성과 모토롤라는 이미지를 충분히 깎아 먹었다.

“그보다 사과를 먼저 하심이 옳지 않겠습니까?”

-사과보단 해명을 해야 하는데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오해는 명함으로 풀어 줬으면 하네. 신성이 자네를 적대할 이유는 없어. 여태 잘 지내 오지 않았던가.

이 회장이 내게 받아 간 명함까지 들이민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결투도 아니고, 나도 오히려 뜻밖의 이득을 얻었으니 내가 받아 주는 모양새도 괜찮을 것 같다.

“명함까지 쓰시겠다니, 좋습니다. 3억 불 정도로 합의하라고 하겠습니다.”

-좋군. 이왕 하는 김에 합의 당사자는 스마트 클라우드와 모토롤라로 해 주게.

합의문에 신성이라는 이름을 빼 달라는 말이다.

“모토롤라를 주범으로 만들 셈이십니까? 후폭풍은 어쩌시려고요.”

-그건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닐세. 이참에 그룹 로고도 바꾸고 인적 쇄신도 하고자 한다네.

그러고 보니 1993년은 신성의 제2창업 선언이 있었던 때군. 이미지에 타격을 받은 신성의 기존 로고마저 이참에 버린다고 한다. 원래 역사와 맞물려 일이 돌아간다.

“멋진 생각이시네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 발목을 잡자고 발의했던 가신들 싹 정리하시고, 소니와도 거리를 두십시오. 아니, 아예 이참에 탈일본도 고려해 보십시오. 이대로라면 언젠가 크게 뒤통수를 맞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신성. 제가 응원하죠.”

-…….

이 회장은 내가 소니의 존재까지 알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말을 아끼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 회장을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응원하는 거다.

“아, 회장님께서 말씀하시면 좋을 멋진 문구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끊겠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그래야 신성이 다시 태어난다! 어떻습니까?”

-놀리는 건가?

“아뇨. 진심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 신성이 다시 태어나길 바랍니다.”

-이유는?

“그래야 경쟁할 맛이 나죠. 재벌 대 재벌로 말입니다.”

구태의연했던 기존의 신성을 벗어나 새로운 신성으로 태어나시라.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게 해 주시라. 내가 가는 길에 확신을 더해 주시라.

    • *

펑! 펑! 펑!

“다시 한 번 악수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더 웃어 주시겠습니까?”

“하하하!”

스티브 잡스가 한국으로 날아오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IT의 기인답게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은 스티브 잡스와 함께 픽사의 용인밸리 입주 계약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픽사 클라우드」

용인밸리에 입주하는 픽사에 스마트 클라우드 명의로 출자금 50%를 대고 지분을 정확히 반으로 쪼갰다. 드루이드 한덕구를 비롯한 스마트 클라우드 프로그래머들도 10여 명을 이주시켰다.

표면적으론 픽사가 에그박스 사업을 하며, 스마트 클라우드는 픽사의 그래픽 엔진에 대한 라이선스를 받는 조건이었다. 물론 이미 물밑으론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하면 에그박스의 사업에 들어가는 일체의 부품을 스마트 클라우드가 독점하며, 애플의 OS와 Firewire에 대한 라이선스 또한 얻는다는 계약까지 해냈다.

“새로운 제품, 가칭 에그박스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전부를 알려 드릴 수는 없고, 올해 말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제품이 나올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세계 유수의 칩 메이커를 두고 스마트 클라우드를 파트너로 삼은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모바일 구동칩, DRAM, 플래시를 동시에 생산하는 회사이니 에그박스의 OS를 구동시킬 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까, 미스터 유?”

“하하. 과찬이십니다.”

“픽사가 용인밸리의 컴퓨터 게임 업체와 협업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보도된 대로입니다. 픽사의 그래픽 엔진을 탑재한 개발용 컴퓨터를 대당 2천 불에 무제한으로 지원할 예정입니다.”

와아아아!

“아, 그에 대해 저희 스마트 클라우드는 게임 불법 복제를 방지하는 메모리 스틱을 최소 마진으로 지원할 예정입니다. 모쪼록 게임사 관계자분들은 흥미로운 고품격 게임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와아아아!

기자들의 질문에 스티브 잡스가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고 나는 옆에서 추임새만 넣었다.

스포트라이트를 즐기시라. 난 돈만 벌면 충분하니까.

기자회견장에는 기자들뿐 아니라 용인밸리에 입주한 업체 관계자들도 다수 참석했기에 개발용 컴퓨터를 뿌린다는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좋은 기회이니 제발 제대로 된 게임 좀 만들어 주세요. 현질 유도하는 게임으로 빠지지 말고, 명작으로 남을 만한 게임 말입니다.’

나는 태동하고 있는 게임 개발사 담당자들을 보며 기도를 했다. 원래 역사와 달리 PC를 벗어난 플랫폼이 생겼으며, 시간이 지나 스티브 잡스가 에그박스를 들고 애플로 복귀하면 강력한 마케팅을 펼치게 될 거다.

제조업을 택한 내가 진출할 사업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게임 중에 ‘창세기전’ 같은 게임은 정말이지 명품이었다. 1990년대 한국 특유의 개발자 갈아 넣기 신공으로 만들어 낸 미려한 그래픽, 만화가 김진의 손에서 탄생한 중성적인 매력의 캐릭터들, 캐릭터가 보는 방향으로 대미지가 달라지는 시스템, 마법 조합 시스템, 화려한 아이템 등등 그야말로 대작이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온갖 버그와 불법 복제라는 두 가지 악재로 묻혀 버린 비운의 작품이라고 하겠다.

애플 스토어를 통해 실시간으로 버그를 픽스하고 내 메모리 스틱을 통해 불법 복제를 제어한다면 원래 역사와는 좀 다른 양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요즘은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떨쳐 내는 것이 힘든 일 중 하나다. 뭘 좀 안다고 내가 이 일 저 일 모두 뛰어들어 버리면, 스마트 클라우드의 개발자들도 제조업체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회사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아쉽지만 업무에 선을 그어야만 한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물류 사업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

반짝반짝.

위이이이잉, 타타타타타타.

“대단하군요. 생각 이상으로 멋집니다. 월 생산량이 얼마나 되지요?”

스마트 클라우드의 반도체 라인을 돌아보던 스티브 잡스는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생각보다 굉장했을 것이다. 빛에 민감한 반도체 라인의 특성상 후공정 라인에 한정해서 투어를 했지만, 끝없이 늘어서 있는 웨이퍼 소우(saw: 자르기) 설비와 와이어 본더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각 설비마다 램프를 달아 놨기에 랏이 끝날 때마다 반짝반짝하는 모습은 파티장 조명 못지않게 멋지다. 1990년대 10억 불 투자의 위력이라고 할 것이다.

“웨이퍼 기준으로 월 15만 장 정도입니다. 2단지 셋업이 완료되면 조만간 30만 장 이상 넘어가니 올해 말에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봐야죠.”

“하하, 파트너를 제대로 구한 것 같군요.”

스티븐 잡스가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웃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통신칩과 메모리만 생산해서야 소니를 어찌 제치겠습니까? 모쪼록 픽사가 만족하는 칩셋을 만들고 싶군요.”

“게임용 칩셋으로 만족하면 되겠습니까? 결국 CPU도 만들어야죠. 내가 애플에 돌아가기 전까지.”

“당신이 도와만 준다면 CPU가 아니라 우주선도 만들 것 같은데 말이죠.”

부품 업체의 실력은 자체 개발 능력도 중요하지만 고객의 실력도 매우 중요하다. OS와 부품은 서로 궁합을 맞추기 위해 최적화 작업을 무수히 반복하며, 그 최적화 작업이 끝나면 서로 호환성이 있다는 말로 바꿔 말한다.

사실 MS 윈도우에 기반한 PC가 애플의 매킨토시에 비해 성능이 우수했던 것은 인텔 CPU에 기인한 바가 컸다고 하지만, MS가 인텔 위주로 OS 최적화를 했다는 측면에서 두 회사의 선순환이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텔이 MS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까지 하며, 애플과 함께 프로젝트마다 핵심 정보를 빼내 MS에 준 근본 원인이다.

부품 업체의 입장에서 시장의 선두 주자와 협업하는 것은 제품 경쟁력을 유지하는 주요 전략이 될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애플은 제대로 된 CPU 파트너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조금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1994년까지는 애플은 모토롤라 CPU를 쓰고 있었는데, 모토롤라가 휴대폰에 신경을 쓰면서 CPU 개발을 등한시하자 매킨토시 매출이 덩달아 줄어들고 모토롤라는 그걸 빌미로 CPU 개발에 투자비를 더욱 줄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모토롤라가 인텔처럼 CPU에 올인한 회사가 아니었기에 애플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CPU 품질이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그래서 스티브 잡스도 잘린 거고.

스티브 잡스를 버린 뒤로 애플이 잘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1994년도에 애플은 IBM을 모토롤라와 합작시켜 CPU 개발을 시키지만 그것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IBM은 PC 시장을 포기하고 서버 쪽으로 돌아서 버렸다.

결국 애플은 2006년에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텔 CPU로 완전히 갈아탄다.

말은 안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모토롤라 CPU라면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터. 에그박스의 칩셋을 만들겠다고 하는 나에게 굳이 매킨토시의 CPU를 언급한 이유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이 이어진다.

“몇 년만 지나면 모토롤라가 스마트 클라우드라면 이를 갈겠군요. 지금은 휴대폰에서도 한 방 맞고, 결국 CPU에서도 크게 한 방 맞을 테니까요.”

솔직히 나는 데스크톱 CPU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립 서비스는 해 줘야지?

“한 방 맞은 게 아니라 모토롤라는 제 손으로 무덤을 팠다고 봐야죠. 그리고 솔직히 모토롤라 CPU가 어디 CPU입니까? 히터지.”

“하하하하!”

“우리 스마트 클라우드는 퀄컴, ARM사와 협업 체계를 가지고 있죠. 저전력 기술은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에그박스 칩셋으로 연산 속도만 개선한다면 CPU도 해 볼 만하죠. 물론 어느 정도 개발 기간이 필요하겠지만요.”

“그때가 기다려지는군요.”

나는 스티브 잡스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지금에야 데스크톱 시장이 지극히 커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뒤에는 자연스레 스티브 잡스의 생각도 바뀔 것이다. 우리가 손을 잡았으니, 스마트폰과 노트북 시장이 훨씬 빠르게 열릴 테니까.

데스크톱 CPU 따위는 인텔의 손을 들어 줘도 무방하다. 시장 자체가 줄어들 테니까. 나는 저전력 칩셋 시장을 독점할 것이다.

위이이잉. 뚜벅뚜벅.

나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 옥상까지 올라갔다. 정치인들이 오면 용인밸리 전체를 구경시켜 주는 곳인데, 이 양반과 오니 느낌이 새롭다.

“오오!”

“어떠십니까?”

“솔직히 의외군요. 한국은 개발도상국인 줄 알았는데.”

스티브 잡스는 눈앞에 펼쳐진 용인밸리를 보고 꽤나 감탄했다. 당연하다. 이곳의 풍경은 여타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십자로 반듯하게 뻗은 도로 하며, 건물들도 깔끔하고, 주차장까지 넉넉하게 완비되어 있다. 가로수며 조경까지 신경을 쓴 데다 무엇보다 공단 중심에 공원과 체육 시설이 갖춰져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신도시를 빼다 박았으니 지금 미국의 여느 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여전히 개발도상국이긴 하죠. 여기 용인밸리가 좀 특이할 뿐입니다.”

“각 구역마다 특색이 있군요.”

“네. 여기 동쪽에는 스마트 클라우드를 중심으로 반도체 공장이 모여 있고, 북쪽엔 파이오니어를 중심으로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서쪽은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중심으로 판매와 유통 회사들이 모여 있으며, 남쪽에는 소재 업체와 설비 업체들이 밀집해 있죠.”

“으흠, 그래서 픽사가 북쪽에 위치해 있는 거군요.”

“픽사가 들어왔으니 이제 반도체 생태계는 거의 완성을 눈앞에 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호?”

“솔직히 스마트 클라우드를 파트너로 삼은 것은 참으로 잘한 것 같지 않습니까? 하하!”

“여타 미국 회사나 일본 회사보다는 확실히 나아 보이는군요. 당신같이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 가득하니까.”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차가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저 멀리 동쪽 끝에는 용인밸리 2구역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미국은 몰라도 일본은 확실히 제칠 것 같은데요?”

“행운을 빌겠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행운을 빌어 주겠다며 립 서비스처럼 말했지만, 나는 확신한다.

1993년도인 지금에야 한국과 일본은 GDP가 열다섯 배나 차이나지만 원래 역사대로만 가도 2008년도에는 다섯 배, 2018년에는 세 배까지 줄어든다. 인구가 두 배 이상 차이 나는 것을 감안하면, 내가 회귀해서 확인은 못 했지만 2020년 중반부터는 최소한 GNP에서는 동격이 된다고 봐야지.

일본 극우들이 매일같이 한국을 비하하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치고 올라오는 기세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다.

이번 생엔 내 회사 스마트 클라우드를 앞세워 일본 따윈 확실하게 제쳐 주지.

동북아 평화 뭐 이런 거창한 게 아니고, 나를 포함해서 내 가족, 내 직원들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의미다. 나라는 잘사는데 국민이 희망을 잃어 가는 일본은 절대 롤모델이 될 수 없다. 반면교사일 뿐이지. 솔직히 동북아의 민주주의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잖나.

“오신 김에 스마트 클라우드의 구내식당도 경험하시겠습니까?”

“햄버거만 아니라면 뭐든 좋습니다.”

“가시죠. 우리 회사 셰프는 특급이거든요.”

오늘 메뉴는 산채비빔밥이라고 했는데, 이 양반도 좋아하려나.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췌장암은 아직 발병 전이지? 적당한 때를 봐서 검진을 받아 보라고 해야겠다. 그때까지 관계가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윈윈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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