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챕터 3 (36/104)

제3장 챕터 3

1993년 1월, 케이가 연말 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쪼르륵 찾아왔기에 나는 따끈한 차 한 잔과 함께 부탁부터 꺼내 놓았다.

“호호호.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수한 씨.”

“국빈 방문 좀 부탁한다고. 그리고 내 주식 담보로 돈도 좀 빌려 줘. 부탁해.”

“호호호호.”

케이는 내가 부탁한다는 말에 유독 과하게 반응하는 면이 없지 않다. 솔직히 케이가 나서면 모두 되는 일이다.

조만간 파이오니어도 나스닥에 상장될 테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각종 주식을 담보로 하면 휴대폰 사업부를 인수하기 위한 자금 대출은 충분하고, 국빈 방문조차 케이슨 님이 나서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인권 수호라는 타이틀을 좋아하는 미국 민주당이 한때 군부독재에 맞선 YS를 초대하는 것은 그럭저럭 그림이 그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웃지만 말고, 케이슨 님 연락처 좀 알려 줘. 내가 상황 설명을 좀 드리게.”

“아니에요. 내가 일 처리할게요. 수한 씨는 정치 따위엔 신경 쓰지 말아요.”

“하하, 그리 말씀해 주시니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나는 크게 팔을 휘저으며 과장되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케이는 내가 정치라면 넌더리를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수한 씨는 수한 씨가 잘하는 걸 해야죠. 여하튼 K폰 사업권이 수한 씨에게 떨어졌다고요? 이야, 뜻대로 되었네요.”

“뜻대로라….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은연중에 내가 휴대폰 사업을 욕심냈음을 알고 있나 보다. 하긴 내가 목표로 하는 스마트폰을 휴대폰의 꽃이라 명명하고 있으니 케이 입장에서는 당연한 추측이었다.

“그런데 K폰 사정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거 알죠?”

“대충은 알고 있어. 미국에서 많이 밀렸어?”

“모르는군요? 수한 씨가 잠시 빠져 있는 동안 모토롤라가 다시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섰어요. 그 뒤를 신성의 S폰이 바싹 뒤쫓고 있고, K폰은 그 뒤로 처졌어요. 최근엔 어디더라? 노키아? 유럽 쪽 신생 기업이 있는데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장난 아니에요. 이대로라면 K폰은 조만간 4위 밖으로 밀려나고 말 거예요.”

노키아가 1992년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긴 하지. 만만찮은 경쟁 상대다.

“흐흠, 안테나 없는 디자인을 알려 줬는데도 그런가?”

“그 디자인이 있었으니 그나마 버틴 거죠. 언제부턴가 K폰은 디자인이 투박하고, 자잘한 불량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생겨 버렸어요.”

제품에 한번 나쁜 이미지가 생겨 버리면 그걸 바꾸기란 매우 어렵다. 달리 회사들이 모델명을 바꾸겠나?

하지만 K폰은 휴대폰 시작을 알린 이름이니 이대로 버리기는 아깝다.

“쩝, K폰이 그리 망가졌나? 상관없어. K폰은 잘될 수밖에 없어. 내가 그리 만들 거야.”

“호호, 수한 씨는 언제나 자신만만해서 좋아요. 핸드 터미널에 앰팩에 이젠 K폰까지! 스마트 클라우드는 핫한 제품만 만들어 내는 회사가 되겠어요. 휴대폰 시장만 제대로 가져올 수 있으면 월 매출 1억 불 정도는 단박에 높일 수 있어요.”

“월 매출 1억 불이 뭐냐? 2억 불은 되어야지. 지켜봐, 내년 하반기까지 휴대폰만으로 10억 불 매출을 찍을 테니까. 스마트 클라우드도 그때쯤 상장할 예정이고 말이야.”

“10억 불요? 이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네요. 정 회장님한테 K폰 떼어내 줘서 고맙다고 인사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농담 하지 마. 그쪽은 지금 초상집이야. 그리고 정헌몽 사장이면 몰라도 회장님을 찾아뵙는 건 시기상조야. 시간이 필요할 거야.”

조만간 정 회장은 명예 회장직에서도 물러난다고 기자회견을 가질 거고, 그룹은 이리저리 쪼개질 것이며, 정준몽 사장은 불법 도청이라는 타이틀로 실형까지 살게 될 거다. 원래 역사가 그러니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대현전자가 직접적인 화살을 피했고, 정헌몽 사장이 그룹 후계자로 입지를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와중에 다행이다.

“농담이었는데 너무 정색을 하니 민망하네요. 여하튼 K폰 사업부를 용인으로 옮기면 오성재 이사도 오겠네요. 합류하는 것 맞죠?”

“당연하지. 현재 휴대폰 사업부 개발팀장인데. 단, 그 외 임원들은 받지 않을 거야.”

대현전자에서 받아들이는 임원은 오성재 이사만으로 족하다. 앞으로 스마트 클라우드의 임원은 스마트 클라우드 출신이 되어야 하는 거다. 간접 부서도 매한가지. 최대 과장급까지만 직원들을 승계할 것이다.

“내년에 대규모 조직 개편을 하긴 해야겠어요.”

“그래야지.”

“개발팀 김 과장과 송 과장 입지가 좀 그렇겠네요. 바로 위로 오성재 이사가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거잖아요.”

“개발팀은 그대로 둬야지. 오성재 이사는 연구소장을 맡길 참이야.”

“오~ 연구소까지요? 좋은 생각이네요. 역시 수한 씨!”

“용인밸리에 입주한 회사가 한둘이 아니잖아. 그걸 아울러서 제품과 연결하는 사람이 필요해.”

영업, 구매, 재무를 포함한 간접 부서는 권 부장에게, 양산 관련 부서는 나 부장에게, 연구소는 오성재 이사에게, 개발팀은 김 과장과 송 과장 투톱 체제를 유지. 내년도 조직 변경에 대한 그림이라고 하겠다.

“이제 용인밸리까지 신경 쓰고! 조만간 회장님 소리 듣겠어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벌써부터 사방에서 날 뜯어먹으려고 눈이 벌게.”

우리나라에서 섣불리 재벌 행세하다가 기업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순익을 챙기며 조심스레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정치권도 조심해야 하지만 재벌들의 텃세 또한 만만찮다.

“무슨 소리예요? 회장님 소리 들어도 충분하죠. 지금 앰팩 팔리는 거 봐요. 북미에선 역대급 초대박 제품이에요.”

“첫 출시품은 매출에 비해 순익률이 높지 않으니 초대박은 아니지. 내년에 내놓을 후속 앰팩 제품이 진짜 초대박을 칠 거야. 내 장담하지.”

“내년이 더 대박이라고요? K폰도 살리고, 앰팩은 더 대박 치고! 유후!”

“내년 우린 회사의 수익률이 30%까지 올라갈 거야. 비장의 무기가 있거든.”

“난 상장만 해도 대박이라고 여겼는데, 순익 30%요? 그럼 AT&T와 베이비 벨, 게다가 퀄컴까지… 내가 산 주식이 하늘을 뚫겠네요.”

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퀄컴 지분 16.99%, 베이비 벨 2%, 히타치 케미컬 51%, 여기에 ARM사와 Flomerics 지분까지, 돈으로만 따지면 한국에서 나보다 돈 많은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일 거다.

물론 현금화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에 유동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파라곤에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리고 있다.

“케이는 파이오니어나 좀 챙겨 줘. 내가 그쪽까지 살펴볼 겨를은 없잖아. 재훈이는 어쩌고 있어?”

“아주 좋아요. 아티스트들 호응도 좋고, 음원 수익도 짭짤해요. 재훈 씨는 요즘 통신사들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을 거예요. 일례로 베이비 벨 사이트에선 16메가 용량에 딱 맞게 베스트 선곡하는 법까지 해서 앰팩 관련 게시물이 수만 건에 달할 정도예요. 아주 핫하죠.”

“좋네.”

“그런데….”

“그런데?”

“앰팩 용량이 너무 작다는 불만이 끊이질 않아요. 아! 그리고 하드디스크로 용량을 개선한 뮤직 플레이어를 출시하겠다고 라이선스를 요청하는 회사가 한둘이 아니에요.”

당연한 반응이다. 애플도 초창기 아이팟을 하드디스크로 출시했으니까. 솔직히 나도 앰팩을 하드디스크로 출시할 수 있었다면 그리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설계는 SRAM이나 플래시 저장 매체에 기반을 둔 뮤직 플레이어뿐이다. 하드디스크를 이용한 설계는 알지 못한다.

얼핏 생각하면 반도체 저장 매체 대신 하드디스크를 쓰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할 수 있겠지만, 구동 칩 및 보드 설계부터 달라지며 USB가 아닌 Firewire처럼 대용량 데이터 전송이 가능한 잭이 필요하고, Firewire를 구동시킬 칩도 필요하며, 배터리 제어 자체도 완전히 달라진다.

애플이야 컴퓨터를 만들던 회사니까 어렵지 않게 하드디스크 기반의 아이팟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거다.

그에 비해 나는 전생에 반도체 모듈만 십수 년을 만들어 왔기에 어렵지 않게 앰팩을 설계할 수 있었던 거고.

“으흠, 어떤 회사에서 컨택이 오고 있지?”

“RCA 톰슨, 소니 뮤직은 하드디스크형 앰팩을 공동 개발하자고 하고 있고요, 타임워너와 픽사 같은 영화사는 하드디스크로 제품 생산을 해 주면 판매 계약을 맺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어요. 음원 라이선스 시장에 뛰어들 작정인가 봐요. 파이오니어보다 한발 늦었지만.”

케이가 말을 늘어놓았지만 굳이 계약을 맺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RCA 톰슨이나 소니는 원래 역사대로라면 결국 CD 플레이어만 붙잡고 있다가 시장에서 사라질 기업이니 공동 개발을 할 필요도 없고, 타임워너야 나중에 파이오니어의 경쟁 상대가 될 텐데 뭐하러 계약을 하나. 내버려 둬야 한다.

와중에 픽사가 움직인 것은 무척 반가운 소리다. 픽사라면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회장으로 있는 회사잖나.

케이는 영화사라고 알고 있지만 엄연히 디지털 이미지 처리용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다. 아직까진 적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라면 앰팩을 보고 방향전환을 노릴 만하다. 의중을 드러내기 싫어 판매 계약을 빌미로 접근하는 모양이다.

그럼 애플은 뭘 하고 있지? 물어봐야겠다. 그쪽도 연락이 왔을 것 같은데 말이다.

“혹시 애플에서는 연락 없었어?”

“애플? 아, 맞다! 연락이 왔었어요. 수한 씨가 그걸 어찌 알아요?”

“당연하잖아. 컴퓨터에서 음원을 재생하는 건 걔네가 제일 먼저 했잖아.”

“그래요? 그래서 칩 라이선스를 얻고 싶다고 했군요.”

“칩 라이선스만 원한다고?”

“예. 자체 기술이 있다고 말이죠.”

“으흠….”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맞물려 돌아간다. 1990년대에 들어 애플은 데스크톱은 IBM에 밀렸다고 판단하고 노트북과 PDA 같은 모바일 제품에 승부를 걸었다.

그러나 PDA 쪽은 내 핸드 터미널이 선점했으니 앰팩이라는 제품을 보고 눈이 휙 돌아갔겠지.

원래라면 애플의 PDA는 너무 기능에 치우쳐 비싼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사라지고 그 뒤로도 제품을 몇 개 더 말아먹고, 스티브 잡스를 재영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여하튼, 내 마일스톤에 비춰 보면 이번 기회를 틈타 OS에 대한 기술을 확보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음… 어쩔까? OS에 대한 기술은 필요한데, 안드로이드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아니다.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그렇다고 애플의 OS를 탐내다가 내가 잡아먹히는 거 아닌가? 스티브 잡스의 픽사만 끌어들여? 아니면 아예 IBM과 협업을 해? 걔네들도 OS/2라는 희대의 OS 프로그램이 있잖아. 아니야. 그건 결국 MS에 발리잖아. 추가 개발도 힘들 거야. 어찌 되었든 DOS 기반이잖아. 모바일엔 안 어울려.’

생각이 복잡해졌다. 결국 시간을 두고 고민할 일이다. 오성재 이사가 합류하면 용인밸리에 입주한 소프트웨어 벤처도 살펴보고 판단할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1990년대 소프트웨어 실력이 일천하다는 게 문제다. 파이오니어의 에릭이 있긴 하지만 검색 엔진과 보안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만도 벅찰 거다.

‘서두르지 말자. 스마트폰은 아직 한참 남았고, 하드디스크형 앰팩은 내 플래시가 나오면 깨끗하게 제칠 수 있어. OS에 대해서는 차분히 생각하자.’

내 결론은 그랬다.

    • *

비슷한 시각, 호암 박물관.

예술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이 회장은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숙부님, 왜 그러십니까? 제 정보통에 의하면 유수한 그놈 물주가 파라곤이 분명합니다. 거기만 공략하면 신성이 앰팩 사업권을 빼내 올 수 있고, 저도 살 수 있습니다. 구미 공장만 가지시고 창원 공장은 제가 돌려도 회생 가능합니다. 살려 주실 수 있잖습니까.”

“조카, 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어. 신성생명이 대출해 준 거 입막음하느라 내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아나? 대체 정보를 어찌 관리했기에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하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건 저희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게 아니라 신성 비서실….”

쿵!

“말조심해. 내 사람이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했다고? 말이 되나? 말이!”

이희건 회장이 구둣발로 바닥을 찍으며 화를 내니 이관재 사장은 움찔했다. ‘그럼 우리가 스스로 무덤을 팠겠습니까?’ 하는 말은 억지로 참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더 이상 이 회장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 건은 죄송합니다. 여하튼 파라곤은 히타치와 소니도 줄을 대고 있는 곳 아닙니까. 숙부님 인맥으로 다리 하나만 건너면 파라곤에서 유수한 그놈 돈줄을 끊을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히타치는 IT 판에서 빠져나가는 움직임이야. 그리고 소니와의 관계는 조카가 한번 망쳐 놓지 않았나. CD 플레이어같이 경쟁력 없는 제품으로 말이야. 아쉬운 소리는 연속으로 하는 게 아니야. 한 번씩 주고받는 것이지.”

이 회장도 예의 주시했던 일이었다. 히타치그룹의 외동아들이 유수한과 만났다는 정보를 들은 뒤로 히타치는 반도체를 털어 버린 데다 파라곤과의 줄도 희미해지고 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심상찮은 움직임이었다.

“소니와 데면데면한 것도 모두 유수한 그놈 때문이잖습니까. 재벌 흉내나 내고 있는 그놈을 숙부님이 나서서 밟아 줘야죠. 그게 이 판의 룰 아닙니까.”

“생각 없이 입 놀리지 마라. 함부로 볼 녀석이 아니야. 대현 출신인 주제에 선거판에서 잘도 빠져나왔어.”

“그러니까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지요. 대현전자의 K폰 사업권도 가져갔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숙부님의 S폰 사업에도 재를 뿌릴 놈입니다. 그러고도 남지요.”

“허튼소리.”

이 회장은 이관재의 말에 뒤돌아서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문밖에 서 있던 경호원이 들어와 이관재를 끌어내려고 하자 이 회장은 손을 살짝 들었다. 스르륵 뒷걸음질 치며 문밖으로 경호원들이 사라진다.

이관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휴대폰 사업은 이 회장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픈 곳을 더 찔러야 했다.

“여태 놈의 행태를 보십시오. 반도체 사업에는 이미 진출했고, 이제 휴대폰까지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용인밸리에 하청 업체도 잔뜩 입주시키고 있으니 납품 업체로 압박하는 것도 힘들어질 겁니다. 놈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숙부님도 제어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냥 두면 이무기가 될 거 아닙니까. 지렁이로 꿈틀댈 때 밟아 줘야 합니다. 제가 당했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범신성그룹을 위해서라도 위험 요소는 하루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쯧쯧, 근신하겠다는 소리는 끝까지 안 하는구나.”

“숙부님, 제가 어찌 근신합니까. 제게 딸린 식구들이 수천 명입니다.”

“돌아가! 꼴도 보기 싫다.”

이 회장이 손을 휘휘 내젓자 경호원이 휙 하고 들어와 이관재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이관재는 쫓겨나면서도 속으로는 웃음을 삼켰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니 신경 끄고 근신하고 있어라.’라는 말을 들었다면 최악이었겠지만, 기껏해야 돌아가라는 말로 끝났다. 작전을 짠 후에 다시 부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래, 건방진 놈이긴 하지. 감히 휴대폰을…. 재벌 흉내를 내?’

이 회장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했다.

    • *

「용인밸리 춘계 체육 대회」

와아아아아!

“야~ 달려, 달려! 패스해야지! 패스!”

“차, 차! 그대로 차!”

“그렇지! 차라고!”

“슛! 슈유웃!”

뻥! 철렁.

“꼬오오오올! 꼬오오올~!”

와아아아아아!

삐이이익!

“경기 종료, 2 대 1로 스마트 클라우드 양산팀 승리!”

와아아아!

“크하하하, 역시 우리 팀이 최강이야!”

체육 대회라고 쓰고 축구 대회라고 읽는 행사가 방금 끝났다.

평균 연령이 한참 젊은 나운영 부장의 양산팀이 무난히 이기리라 여겼는데, 상대인 삼영정밀공업도 만만찮았다. 1 대 1 박빙으로 게임이 진행되다 우리 양산팀이 연장전에서 골든 골을 넣었고 월드컵 우승팀처럼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

남자들에게 축구란 어떤 존재일까? 헛발질의 달인인 나조차 골이 들어가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는 게임이다.

“축구 우승팀엔 사장님께서 금일봉을 수여하겠습니다. 자그마치 100만 원!”

“애들아, 상금 받으러 가자!”

“와아아아!”

“우승팀! 스마트 클라우드 양산티~임!”

“하하하, 수고들 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와아아아~ 짝짝짝!

뽁! 뽁!

나운영 그룹장이 돈 봉투에 키스를 하고는 환호하는 팀원들 앞에서 마구 흔들어 댄다. 회식비에 보태면 단번에 휙 하고 날아갈 돈이지만, 그래도 안주는 냉동 삼겹살에서 생삼겹살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준우승팀은 삼영정밀공업! 상금 50만 원!”

“하하, 아깝게 지셨네요. 가을에는 꼭 우승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하하하.”

삼영정밀 서석태 사장도 공돈이 생기니 좋은가 보다. 직원을 다 합쳐 봐야 20명도 채 안 되는 회사인데 천 명 중에서 뽑은 나운영 부장팀과 맞붙어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솔직히 교체 선수층만 두터웠어도 우승은 삼영이 했을 것이다.

“사장님들 다들 오시죠. 여기 돼지 통구이 바비큐가 아주 맛납니다. 맥주도 한 잔들 하시고요. 원하시면 막걸리도 있습니다.”

권재욱 부장이 영업팀장답게 용인밸리 사장들을 불러 모은다.

봄이 되니 야외 활동도 할 만하고,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한입 가득 고기를 씹어 대니 꿀맛이다. 공설 운동장을 하나 빌려서 행사를 했는데, 삼삼오오 잔디밭에 모여 앉은 인원이 꽤나 된다. 한쪽 구석에선 아직도 족구를 하느라 정신없다.

용인밸리에 입주한 회사의 직원을 다 모으면 어림잡아도 6천 명은 될 것이다. 각종 경기 상금이며 운동장 대여료, 음식값, 술값을 다 합치면 2억은 훌쩍 넘게 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번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연말 보너스로 지출한 돈만 230억쯤 되니 이제 억 단위의 돈에는 별다른 감흥조차 없다.

“사장님, 한 말씀 하셔야죠.”

“다들 올해도 안전사고 없이 하시는 사업마다 대박 나십시오!”

“대박 나십시오!”

“얼쑤!”

“잘 부탁드립니다.”

건배 제의에 1990년대다운 덕담과 추임새가 이어졌다.

“사장님, 이분이 DISCO 한국 지사장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정기일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적층형 패키지 개발에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여기 이분은 한미정공 사장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테스트 핸들러 개발에 큰 힘이 되셨다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오성재 이사가 사람들을 인사시켜 주면 준비했던 멘트를 날리며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 주기 바빴다. 사장들 이름은 내 머릿속에 몇 초 머물지도 않았다.

한국인 사장들 틈에 일본인들도 꽤나 끼어 있다. 용인밸리엔 히타치 케미컬을 비롯해 일본 기업의 한국지사가 꽤나 있다. 대부분 한국 반도체 회사의 납품 업체인 데다 자본 잠식을 당하고 있는 기업들이라 한국 진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서로 필요에 따라 뭉치고 흩어지는 것이 기업의 생리. 용인밸리에 들어와 살길을 마련해 주는 대신, 지분 확보와 기술 이전 등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국산화를 꾀하고 있다. 국산 금형 기술이 10여 년에 걸쳐 탈일본을 했듯이 이런 관계가 10년 정도 이어지면 정밀 기계와 소재 기술도 탈일본이 가능하리라.

굳이 애국심이나 원가 절감 차원에서 국산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존재가 양날의 검과 같기에 내 회사 방어 차원에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북한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정치에 이용하듯, 일본도 끊임없이 한국을 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에 기업 간의 계약은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번 체육대회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가 납품 업체의 협력에 감사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입주한 업체끼리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스마트 클라우드 직원들의 자부심도 챙겨 주는 자리라고 하겠다.

우리 직원들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정말로 열심히 일했기에 1분기 매출 실적이 5억 불이 넘었고, 플래시 메모리가 드디어 내부 품질 검증을 마치고 양산 라인에 투입되기 시작했으며, 차기 ‘앰팩2’와 함께 ‘K3 블레이드’라 이름 붙인 1993년 메인 모델의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에그펫과 핸드 터미널은 하도 변종이 많아 따로 이름을 붙이지도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개발에 필요한 기술의 70%가량을 용인밸리 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로서도 의외였기에 축제를 벌이자고 한 거다. 용인밸리에 입주한 회사들은 정말이지 진국이었다.

“유 사장님, 제 잔도 받으십시오. 삼영정밀은 정말이지 올해 귀인을 만났습니다.”

“도움받은 사람은 외려 접니다.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같이 건배하시죠.”

“하하하.”

삼영정밀의 서석태 사장이 나에게 다가와 술잔을 나누니 아주 기분이 좋다.

입주한 회사 중에 간간이 대박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삼영정밀공업이다. 내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전국의 공단을 샅샅이 뒤진 끝에 이 양반을 찾아냈다.

원래 역사에서 삼영정밀은 모토롤라에 대박을 선사한 기업이다. 모토롤라 휴대폰이 대박을 터뜨린 경우가 역대 딱 두 번 있었다. 하나가 스타텍이라고 초기 휴대폰 시장을 선점한 모델이고, 다른 하나가 레이저(RAZR)라고 초슬림 휴대폰이다.

특히 레이저 모델은 초기 2년간 5천만 개 이상 팔렸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쳤으며, 10여 년 동안 수없이 리모델링되었기에 폴더폰의 대명사처럼 여겨질 정도다.

삼영정밀은 그런 모토롤라 레이저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영이 만든 것은 휴대폰 키패드. 얇은 금속판에 번호와 문자를 새긴 ‘일체형 금속 키패드’는 기존 키패드에 비해 두께를 무려 3분의 1이나 줄인 터라, 휴대전화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단박에 초슬림 모델로 바꿔 버렸다.

문제는 국내 휴대폰 업체들이 삼영정밀의 아이디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삼영정밀은 직원이 고작 수십 명밖에 되지 않는 영세 업체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모토롤라가 생산 공장도 없는 삼영정밀에 양산을 맡긴 것은 편견이 없었다기보다 일단 시도는 해 보자는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삼영정밀과 모토롤라는 레이저 모델로 수년간 하늘을 훨훨 날았다.

나는 모토롤라에 앞서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삼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란 회사는 모조리 뒤지고 다녔는데, 결국 인천 공단에서 찾아냈다.

당연히 휴대폰 관련 부품 일을 하고 있겠거니 싶었는데, 찾고 보니 시계의 문자판을 만드는 곳이어서 깜짝 놀랐다. 사무실에는 간판도 없고 카드깡으로 월급을 돌려막기 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놀랐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모토롤라를 만나기까지 몇 년은 걸릴 텐데, 어떻게 이런 세월을 견뎠지 싶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원래 역사에선 시계 사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시계의 문자판에 쓰던 가공 기술로 휴대폰 키패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닿았나 보다.

이번에는 내가 그 아이디어를 앞당겨 키패드를 만들어 달라고 했고, 단 이틀 만에 시제품을 만들어 오는 기적을 선보여 줬기에 내가 용인밸리 이전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납품 계약도 3년 장기 계약으로 맺고 말이다.

서 사장은 아마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로 여기고 있을 거다. 사실은 나에게 더 대박인데 말이다.

삐이이익.

어디선가 마이크 찢기는 소리가 들린다. 다름 아닌 권재욱 부장이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다들 즐거우십니까?”

“예에!”

“날씨도 화창하고 바비큐도 맛있고 맥주도 시원하지요?”

“예에!”

무대 앞에 잔뜩 모여 있는 여사원들이 눈을 반짝 반짝하고 있다. 이미 광고한 바대로 경품 추첨을 하려는 게 뻔하니 소리 높여 ‘예!’라는 대답으로 권 부장의 진행을 독려하고 있다.

“하하, 어서 추첨하라는 눈빛을 견딜 수가 없군요. 그래도 상품 소개는 해야죠?”

“어서요, 권 부장님!”

“첫 번째 상품은 여기 보이는 128메가짜리 앰팩2! 2 자를 기념해 22명을 추첨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128메가라래! 128메가!”

“우아! 너무 작고 귀여워!”

최신 버전의 앰팩2는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해 용량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기존에 4메가짜리 SRAM 4개를 평면으로 실장해 16메가가 한계였다면, 이번엔 패키지 하나에 16메가짜리 플래시 4개를 적층하고 그런 패키지 2개를 횡으로 배치했다. 앰팩2는 한껏 슬림해지고 테두리도 곡선으로 뽑아 훨씬 미려해졌다.

“두 장씩 뽑아요. 자, 섞습니다. 첫 번째 번호는!”

두구. 두구. 두구.

어디선가 막걸리 병을 드럼처럼 두드린다.

“1232번! 2072번!”

“와아아아! 나야, 나야!”

“어머! 저요! 저요!”

어디선가 남자 사원 한 명과 여사원이 득달처럼 단상으로 달려가 앰팩2를 받아 들고는 좋아서 팔짝팔짝 뛴다.

종이 포장도 아주 럭셔리하게 파란 바탕에 흰 구름을 표현했다. 앰팩 자체도 흰색을 베이스로 하고 파란색을 모서리에만 살짝 터치해 아주 세련됐다.

추첨이 진행될 때마다 환호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으며, K3 추첨으로 넘어가니 그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자! 이젠 대망의 ‘K3 블레이드’ 휴대폰 추첨이 있겠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역작이지요. 전화 개통도 공짜로 해 드립니다.”

“와아아아!”

“추첨은 단 3명! 기대하시라!”

“와아아아!”

“저거 봐, 휴대폰으로 무도 썰겠다. 정말 블레이드야!”

“진짜 잘빠졌다!”

“327번 누굽니까?”

“으아악! 저예요! 저요!”

우당탕탕.

맥주를 마시고 있던 누군가가 펄쩍 일어서자 주변이 난장판이 된다. 다들 맥주를 뒤집어써도 웃고 난리다.

“하하하,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운데?”

나는 이제 뜨뜻미지근하게 변해 버린 맥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웃어 댔다. 그런 내 눈앞에 오징어 다리 하나가 쑥 하고 들어온다.

“수한 씨, 이런 추첨 시카고에서도 한번 해요.”

“돈 많은 미국인들에게 무슨 경품 추첨이야? 하나라도 더 팔아야지.”

“호호호, 수한 씨답네요. 이번 제품은 정말 외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뽑았어요. 색깔도 아주 세련되고.”

“이제 오더만 오면 팡팡 찍어 낼 수 있으니까, 권 부장과 같이 미국으로 날아가서 쇼 케이스 한번 멋지게 열어. 흰색과 파란색의 조합을 스마트 클라우드의 이미지로 확고하게 심어 줬으면 해.”

“호오? 그런 일은 수한 씨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케이 당신이 해 줬으면 해. 아시안이 그런 짓을 하기엔 아직 한참 멀었어.”

케이는 내 말에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약간은 씁쓸한 얼굴이 된다. 어디서나 인종 차별은 있으며, 그게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 미모하면서 무슨 걱정이야. 대본만 잘 외우면 문제없어. 알지? K3 블레이드는 그 이름처럼 세계 최초의 초슬림 휴대폰인 동시에 대용량 휴대폰이라는 거. 플래시 메모리를 삽입했기에 전화번호, 벨소리, 메시지 저장에서 월등하다는 거 잊지 마.”

“에헤, 내가 한 미모 하긴 하죠.”

딴소리부터 하는 케이다.

“쩝! 쇼 케이스 전에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미리 제품 뿌리는 것도 잊지 마. 파파라치에게 사진 잘 찍히게 늘 손에 들고 다니라고 당부하고.”

“그럼요, 당연하죠. 쥐여 준 돈이 얼만데. 그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21세기엔 당연한 마케팅인데 1990년대엔 신선한 아이디어로 보이나 보다.

“절박하니까 그렇지. 2/4분기에는 휴대폰의 승자가 누가 되는지 가려질 거야. 모토롤라의 스타텍3, 신성의 S3, 우리 K3, 심지어 노키아1103도 한꺼번에 출시하잖아. 우리 제품이 가장 트렌디하고 세련됐다는 이미지가 필요해.”

“호호호! 그리 보면 내가 모델로 나서는 게 당연하겠네요.”

케이의 기승전결은 언제나 그쪽으로 가는군.

여하튼 범용성과 친근함에선 모토롤라가, 가성비 측면에선 신성이, 내구성 측면에선 노키아가 이미지를 굳히고 있으니 K폰은 트렌디한 고급품이라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플래시 메모리와 신기술을 잔뜩 적용했기에 가격대가 높을 수밖에 없으니, 고가 시장을 노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앰팩2 또한 K3와 같은 계열이라는 것도 중요 포인트야. 단순 전자 제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패션이다!’라는 이미지를 심어 줘야 해. 당신이라면 가능할 거야. 예쁘잖아.”

나는 이왕 시작한 농담이니 케이를 하늘 높이 붕붕 띄워 줬다. 쇼 케이스의 호스트는 일단 자신감이 있고 봐야 하거든.

“호호호호! 날 믿어 봐요. 믿어 보라니까요. 우후!”

남자라면 축구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듯, 여자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건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뛰나 보다. 일단 자신감은 충분해 보이네.

    • *

「대한민국의 K3 블레이드폰. 세기의 역작으로 칭송받다.」

「미국 전역에 K3 광풍이 몰아치다. 하이엔드 패션의 대명사로 자리매김」

「앰팩2 음반 시장을 재편하다. 그 끝은 어디까지 인가?」

“나 부장님, 어찌 된 겁니까? 오늘 K3 블레이드는 3만 대, 앰팩2는 5만 대 출고하기로 했잖습니까?”

-뭐가 어찌 되긴 어찌 돼? 뺑이치고 있지! 포장하는 데만도 아주 환장하겠다. 영업팀도 모두 라인으로 보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고.

“개발팀이고 영업팀이고 모두 데려가셨잖아요. 당장 출고해야 비행기 시간에 맞춘단 말입니다.”

-야이, 이렇게 전화할 시간도 없어. 권 부장 당신도 와서 도우라고! 으악!

삐이익!

옆에서 듣고 있자니 정말 바쁘긴 바쁜가 보다.

케이가 쇼 케이스를 한 지 불과 2주 만에 물량이 폭발하고 있다. 신문 기사에선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흰색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머니에 K3 폴더폰을 집게처럼 걸쳐 놓고 다니는 사진들이 수두룩하게 실려 있다.

흰 바탕에 파란색 모서리를 가진 내 제품들은 다가오는 여름엔 첨단 유행이 될 것이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스마트 클라우드… 아, 예. K3요. 앰팩도요. 예.”

몇 남지 않은 영업팀원이 미친 듯이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거의 모든 전화가 K3와 앰팩2 오더일 것이다. 석 달 오더가 모두 찼고, 그 숫자가 자그마치 각각 200만 대를 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초대박이다.

“권 부장님, 가시죠. 포장이라도 도와야겠네요.”

“사장님께서요?”

“고양이 손보단 낫겠죠.”

이때만 해도 순풍이 그렇게 빨리 태풍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

    • *

도쿄 근방 모처 호텔 VIP룸.

“오가 노리오 회장님, 이리 회합을 주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희건 회장님께서 부탁하셨는데 제가 어찌 함부로 하겠습니까? 자, 인사하시죠. 이쪽은 모토롤라의 CEO십니다.”

“반갑습니다. 크리스토퍼 갤빈이라고 합니다.”

“한국 신성전자의 이희건이라고 합니다.”

“S폰 돌풍의 주역이시군요. 이리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모쪼록 경쟁자가 아니라 한배를 타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희건 회장이 오늘처럼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본 것은 평생에 처음이었다. 새삼 이런 위기의식이 들게 만든 유수한이라는 존재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오늘따라 이 회장님께서 마음이 급하시군요.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오가 노리오 회장은 이 회장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며 자리로 안내했다.

연매출이 5조 엔이 넘는 초거대 기업 소니 회장으로선 매우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갑을 관계를 단계별로 세세하게 나누고, 손짓 하나도 그 위계에 맞게 행동하는 일본인이 이 회장을 동격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희건 회장도 그런 일본 문화를 알고 있기에 매우 정중하게 행동했다.

‘으흠, 소니 쪽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안 좋은가 보군.’

이 회장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소니 회장도 이 회장 자신의 제의에 군침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일본 재계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초(超) 엔고 시대. 소니는 다른 일본 기업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서 매출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 컬럼비아 영화사 인수로 시작한 영화 사업도 변변한 히트작 하나 내지 못하고 제작비만 축낼 뿐이었다.

그런 배경에 더해, 소니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워크맨과 MD(미니디스크)의 판매량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그 주요 원인이 앰팩이라는 제품에 있으니 스마트 클라우드를 옭아매는 이 회동은 소니에도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출시된 K폰 때문에 시장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모토롤라가 좀 더 일찍 합류했다면 좋았을 겁니다.”

“아, 양해 바랍니다. K폰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게 이리 큰 변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토롤라가 먼저 말을 꺼냈고, 이 회장은 면박 아닌 면박을 줬다. 각 비서들은 높낮이 없는 말투로 통역을 했지만 크리스토퍼의 억양에선 살짝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이 회장은 모토롤라를 끌어들이는 데 들어간 시간이 꽤나 아까웠다. K폰의 신규 모델이 나오기 전에 공격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라도 모였으니 다행이지요. 이 회장님, 지금부터 스마트 클라우드를 고꾸라뜨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 그렇지요. 그리하면 됩니다.”

“신성의 제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듣고 싶군요.”

크리스토퍼가 논의를 재촉하자 이 회장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한낱 중역 정도로 취급하는 크리스토퍼의 말투가 살짝 거슬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 번 더 면박을 줄 수는 없었다.

“크게 소니는 앰팩을 공격하고, 모토롤라는 K폰을 공격하는 방식입니다. 신성은 두 곳 모두를 지원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시장 점유율을 신성과 반반으로 나누는 조건이지요.”

“저는 구체적인 방법을 여쭤보았습니다만. 모토롤라는 앰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일단 끝까지 들어 보시지요. 신성은 얼마 전까지 K폰과 동일한 통신칩을 사용했습니다. 회로 구성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모토롤라도 비슷하지요. CDMA 통신칩은 퀄컴에 기반을 둔 칩이 아닙니까. 저희가 지불하는 로열티도 만만찮습니다.”

“우리 엔지니어들이 K폰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하더군요.”

“약점이라고요?”

“노이즈를 걸러 내는 회로가 없다고 말입니다.”

“당연하지요. K폰은 CDMA 폰이지 않습니까? CDMA는 GSM TDMA와는 달리 노이즈 자체가 없습니다. 노이즈 필터가 필요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크리스토퍼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CDMA의 가장 큰 장점은 노이즈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회장이 그걸 약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이 어찌 휴대폰 장사를 하고 있나 싶었다. 모토롤라는 처음 휴대폰을 팔 때 GSM 방식이었기에 기존 고객 지원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둘 다 지원하고 있는 건데 말이다. 자신도 기존 고객만 아니라면 하루빨리 GSM을 떨궈 내고 싶다.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하면 어떨까요? 모토롤라는 이미 CDMA와 GSM을 모두 지원하고 있고, 신성의 신규 모델도 그리 만들었습니다. 즉, 우리 제품엔 자연스레 노이즈 필터가 있는 겁니다.”

“……?”

“모토롤라와 신성의 휴대폰 시장 점유율은 이미 70%에 가깝습니다. 새로 출시하는 모델부터 과도한 노이즈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면 어찌 될까요?”

“……!”

“K폰 사용자는 우리 고객들과 통화를 할 때마다 불쾌한 노이즈를 느끼는 거죠. 우리 고객은 여전히 깨끗한 음성을 듣는데 말입니다.”

“하핫!”

“CDMA에만 집중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면 그뿐이죠. 알아챈다고 해도 별수 없고요. 우리 음성 신호가 원래 그렇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GSM 방식이 사라질 때까지 사업하지 말라고 하면 되겠군요. 하하하!”

“K폰이 시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신성에서 모토롤라에 노이즈 생성 칩을 제공하지요. 개당 1달러, 원가로 제공합니다.”

“심지어 칩까지! 좋습니다. K폰을 아웃시키는 데 개당 1달러면 남는 장사지요.”

“칩에 신성 마크는 없습니다. 타이완으로 우회해서 제품 출하를 할 것이며, 오더는 모토롤라에서 내린 걸로 했으면 합니다.”

“하하하! 철저하십니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크리스토퍼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이 회장의 말에 호쾌하게 응했다.

칩 오더를 내린 것이 근거가 되어 차후 모토롤라는 이 일에서 발뺌하기 힘들겠지만, 신성이 그런 보험까지 생각했을 정도라면 이 작전은 정말 세세히 기안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옆에서 통역의 귓속말만 듣고 있던 소니의 오가 노리오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신성의 작전이 매우 치밀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통화 품질은 휴대폰의 핵심 경쟁력. 그걸 손상시키면 일반 고객들은 K폰을 반품하고 다시는 구매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외관이 아무리 멋져도 휴대폰은 휴대폰이지 액세서리가 아니잖나.

“이 회장님의 아이디어는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신성의 싱크탱크가 부럽습니다. 그걸 컨트롤하시는 회장님의 능력은 더욱 부럽고요.”

“앰팩도 비슷합니다. 외려 더 쉽고 전 방위적이지요.”

“오호? 들어 보고 싶습니다만.”

“앰팩은 원래부터 약점이 있지요. 음원을 다운로드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건 장점인데 어찌 약점이 되는지요?”

“소니의 미니 CD를 고객이 직접 구울 수는 없지요. 불법 유통이 되기는 곤란한 매체입니다.”

“불법 유통!”

“후후, 바로 이해하시는군요. 소니는 수많은 음원에 대한 판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판권 재계약이 임박한 앨범 위주로 음원을 온라인에 슬쩍 뿌리시지요.”

“허! 그랬다간 RIAA에서….”

“그렇지요. 미 음반 협회에서 가만있지 않겠지요. 돈에 아주 민감한 곳이니까.”

“그게 어째서 앰팩을 공격하는 겁니까? 미국 온라인 회사가 난감해할 것 같습니다만.”

일본은 미국 회사와 엮이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이 회장은 그의 생각을 살짝 틀어 주었다.

“협회를 움직여야지요. 불법 음원 유통은 앰팩에서 플레이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앰팩 제조사인 스마트 클라우드가 불법 방지 기술 개발을 등한시한 책임이 크다고 말입니다. 협회가 나서서 불법 음원 재생을 막을 프로그램을 만들 테니, 스마트 클라우드는 음원 재생 기술을 공개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겁니다.”

“기술이 공개되면 우리가 그 기술로 앰팩 같은 제품을 새로 만들자, 그 말씀이십니까?”

“그렇지요. 소니가 나서고 신성이 돕는다면 앰팩 그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앰팩 기술이 풀리게 해 주면 미 음반 협회엔 기존 대비 음원 판매 수익 비율을 늘려 주겠다고 설득하시지요. 우린 하드웨어만 팔아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완벽합니다, 완벽해요.”

이 회장은 최근 1년간 떠들었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한 것 같았다. 입술이 바싹 말랐기에 식어 버린 차로 입술을 적셨다.

그 뒤론 K폰 시장 점유율은 어찌 나눌 것인가? 앰팩을 쓰러뜨리고 소니 기반의 뮤직 플레이어 연구는 어찌할 것인가 등등 수많은 논의가 이어졌지만, 고개를 끄덕거리고 단답형으로 대답하길 반복했다.

세부적인 사항이야 이후에 신성의 비서실과 개발팀이 나서서 잘 해결할 것이다. ‘실무는 실무진에 맡겨라’가 그의 철칙이 아니던가. 자신은 방향을 정하고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가 결정한 것은 ‘스마트 클라우드의 싹을 자르자’였고, 그 결정은 방금 CEO들의 합의를 이끌어 냈으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 *

다다다다. 벌컥!

“수한 씨, 수한 씨! 큰일 났어요, 큰일.”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사장님, 보고서 못 보셨습니까? 뭐 이리 평온하십니까?”

케이, 권 부장, 나 부장이 연이어 사장실로 들이닥쳤다. 오성재 이사와 김 과장 또한 메일을 프린트한 종이와 휴대폰 샘플을 들고 달려오다가 잔뜩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나 또한 장문의 메일을 읽고 있었다. 영업팀, 품질팀, 버지니아 트레이딩 할 것 없이 메일을 보냈으니 안 읽어 보려야 안 읽어 볼 수가 없었다.

내용은 앰팩이 음원 불법 유통에 관여했다는 소송이 제기되었다는 것과 K폰의 통화 품질에 심각한 불량이 있다는 것이다. 고개를 꺄우뚱하게 만드는 일이다.

‘음원 불법 유통이야 원래 역사에도 미 음반 협회가 MP3 플레이어를 두고 소송을 걸었던 일이니 예상했던 바고…. 한데 K폰 통화 품질? 이건 조금 의외인걸.’

K폰 일은 둘 중 하나다. 원래 역사에서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단순한 해프닝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나로 인한 나비효과라는 의미다.

후자라면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았다는 얘기인데, 문제 해결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K폰은 21세기에 품질이 증명된 완벽한 제품이다. 게다가 출시 초기도 아니고, 200만 대 가까이 팔아 댄 지금에 와서 통화 품질이 갑자기 나빠지다니 웃긴 일이다.

“자, 자! 다들 서서 그러지 말고요. 일단 앉으세요. 박카스 드려요?”

“이 판국에 무슨 박카스를…. 사장님, 지금 난리 났습니다. 북미 쪽에서 반품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딜러는 반품 받아 주고 거래 끊어 버려요. 사태 파악할 시간을 줘야지, 딜러가 본사한테 그 정도 믿음도 없단 말입니까?”

외려 잘됐다. 기업은 언제든지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며칠 전까지 물건 더 당겨 달라고 아우성이더니 문제가 발생하자 반품부터 해 대는 거래처는 제대로 된 파트너가 아니다. 이참에 못 믿을 대리점들은 깔끔하게 쳐내 버리자.

척. 척. 척.

나는 냉장고에서 박카스를 꺼내서 나눠 주며 사람들에게 한숨 돌리게 했다.

김 과장이 들고 있는 상자를 보니 휴대폰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내 시선을 받은 김 과장이 말을 늘어놓았다. 참으로 억울한 모양이다.

“K폰은 문제가 없습니다. 음성에 노이즈가 생기는 거… 아무래도 타사에서 뭔가 허튼짓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차근차근 설명해 봐요.”

“문제가 발생한 것이 다른 폰과 통화할 때뿐입니다. K폰끼리는 멀쩡합니다!”

“흠! 딴 놈들이 무슨 짓을 했길래?”

“여기 신성과 모토롤라 제품을 뜯은 것이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뜬금없게 디바이스 하나가 신호 송출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으흠…. 급히 설계에 반영된 것 같군요. 풋 프린트(Foot Print: 반도체와 기판의 접합부) 아귀가 잘 안 맞네.”

“정확하십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이걸 떼고 통화를 해 봤더니 음질이 깨끗해집니다. 의도적으로 노이즈를 생성시키려고 아주 작당을 했어요.”

“이야, 아이디어 좋네요. K폰에만 노이즈가 들리겠어요.”

내가 타사의 협잡에 아이디어가 좋다고 하자 김 과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농담하실 때라 아니라 지금 이 노이즈 패턴을 분석해서 노이즈 필터를 K폰에 달아야 합니다. 사흘 정도만 시간을 주시면 칩 설계를 완료….”

“하하. 그만하세요, 오 이사님.”

오성재 이사는 대응책부터 늘어놓았지만 내가 말을 막았다. 노이즈 필터를 언제 만들어서 K폰에 언제 갖다 붙이나? 설계야 빨리한다 해도 신규 칩 생산은 최소 석 달이다. 그것도 첫 런에 성공했을 때 이야기다. 이런 사태를 석 달간 방치하면 K폰은 너덜너덜해진다.

“그보다 이 칩 어디서 만든 거예요? 현미경으로 레이어 패턴 봤을 거잖아요.”

반도체에는 각 회사마다 독특한 패턴이 있기 마련이다. 각 반도체 제조 장비에 맞게 상하 회로 패턴을 매치시키는 얼라인 키(Align Key)라는 패턴이 대표적이다. 오 이사처럼 타사 벤치마킹을 10여 년간 해 온 사람은 감각적으로 안다.

“…아무래도 신성인 것 같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확실합니다.”

“으흠, 신성이? 모토롤라라면 고개를 끄덕거리려고 했는데….”

“모토롤라는 확실히 아닙니다. 모토롤라 반도체는 십자가 패턴을 얼라인 키로 쓰지 기역, 니은 자를 안 씁니다. 그런 패턴은 주로 신성, 그리고… 대현이 씁니다.”

“대현은 아닐 테니까. 그쵸?”

“예.”

한국인이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면 그 안에서도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문화라는 것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다.

“신성 그놈들이! 내 그럴 줄 알았어!”

“수한 씨, 이거 정식으로 고소해야 해요.”

“아아, 흥분하지 말고. 쉬잇. 내가 확인해 볼 테니까요.”

나는 흥분하는 이들을 말리며 전화부터 걸었다.

띠. 띠. 띠. 띠.

누구한테 걸겠나? 당연히 신성반도체 진제대 상무다.

-여보세요.

“진제대 상무님, 저 유수한입니다.”

-어이구, 유 사장님 웬일이십니까?”

“바쁘실 테니, 짧게 물어보겠습니다. 노이즈 생성 칩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 노이즈 생성 칩?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이, 왜 모르는 척하세요? 신성에서 만드는 칩 중에 진 상무님 결재가 안 들어가는 칩이 어디 있다고. 알려 주세요. 누가 만들었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유 사장님.

진 상무는 짐짓 목소리마저 깔고 대답했다.

“이상하네. 회로 귀퉁이에 신성 마크가 있던데. 회로 설계 안 살펴봤습니까?”

-…….

나는 짐짓 거짓말을 해 봤다. 반도체 회로 설계를 할 때 마스크 납품 업체에서 헷갈리지 말라고 회사 마크를 새겨 두는 것은 1990년 초반엔 흔한 일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회로가 급격히 미세해져서 자연스레 사라지지만 말이다.

“왜 한 겁니까? 설마 우리 엿 먹이려고 한 건 아니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휴대폰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어? 난 노이즈 칩이 휴대폰에 실장된다고 말한 적 없는데.”

-…….

신성에서 한 일이 맞네.

“회장님이 시켰군요. 그렇죠?”

-무슨 말인지 도통…. 이만 끊겠습니다.

“회장님께 전해 줘요.”

-…….

“장난이 좀 지나치셨다고요. 대가를 치르셔야 할 거라고 말입니다.”

툭. 삐이이익.

진 상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 버렸다.

확실히 신성에서 한 일이 맞네. 모토롤라까지 합류시키다니, 일을 꽤나 크게 벌였다.

“신성이 꾸민 일이군요! 미친놈들.”

“개 같은 신성 놈들. 같은 한국 회사끼리.”

“빌어먹을 놈들! 공돌이 자존심이 있지, 기술을 이런 곳에 써? 내가 가서 불 질러 버릴 거야.”

“하하, 기업에 국적이 어디 있나요? 원래 같은 영역에 있으면 싸움이 더 치열한 법입니다.”

다들 얼굴을 붉혔지만 나는 웃고 말았다. 그중에 케이만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수한 씨, 이거 웃을 일이 아니잖아요.”

“문제없어. 기술적인 문제는 기술로 풀면 돼. 대신 정치는 케이 당신에게 맡기지.”

“뭔가 방법이 있어요?”

“노이즈 필터를 달면 되지.”

“K폰 출고분이 200만 대가 넘어요. 그걸 언제 수거해서 언제 고쳐요. 이건 자동차가 아니라 전자 제품이라고요. 리콜은 치명타예요.”

다들 케이의 말을 애써 외면하는 눈치다.

“케이, 우리에겐 아군이 있잖아. AT&T와 베이비 벨이라는 아군 말이야.”

“그게 왜요?”

“노이즈 필터를 중계소에 설치하자고. 오 이사님, 김 과장. 노이즈 패턴 분석하고 노이즈 필터 중계기에 삽입할 수 있도록 모듈 형태로 꾸미세요. 용인밸리에서 생산합시다. 칩만 아니면 금방 만들잖아요.”

“아, 그런 방법이! 문제없습니다.”

김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노이즈 필터는 쉽게 말하면 저항과 커패시터를 잔뜩 박아 둔 기판이라고 보면 된다. 그걸 칩으로 만들기 어려워서 그렇지 중계기에 꽂을 수 있는 모듈로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신성에서 작전을 짠 기술자 놈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 게 분명하다.

“케이, 통신사에 범인은 신성이랑 모토롤라임을 알려 주고 응징토록 해 봐.”

“문제없어요. 하나만 알려 줘요. 노이즈 칩 가격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

“3달러라도 해도 되겠죠? 소비자는 휴대폰을 산 거지 쓸데없는 부품까지 산 건 아니잖아요. 그죠?”

“하하하하하! 역시 케이야!”

나는 케이에게 엄지 척을 해 줬다.

미국 변호사들이 아주 좋아하는 소송이 있다. 수백만 명의 소비자를 대표해 대기업에 소송을 거는 거다. 케이가 나선다면 놈들은 돈은 돈대로 물어주고 이미지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앰팩은 어쩌실 거예요? 미 음반 협회가 나섰는데….”

“그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야.”

“대응책이 있군요.”

케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럼! 외려 얻을 게 좀 있어서 에릭에게 백신 풀지 말라고 했을 정도니까.”

“얻을 게 있다고요?”

“우리가 유통시킨 음원 파일은 보안 코드가 내장되어 있어. 에릭의 백신 프로그램은 온라인상에서 불법 유통 파일을 자동으로 검색해서 지우는 형태야. 온라인 업체는 보안 게이트를 파이오니어에 열어 주든지, 그게 싫으면 우리 백신 프로그램을 사야 할 거야.”

“불법에 반대한다면 너희 집 대문을 열어라! 내가 검색해서 청소해 주겠다?!”

“그렇지! 파이오니어는 모든 정보의 허브가 될 수밖에 없어. 하하하!”

내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웃어 대자 케이도 환하게 따라 웃는다. 현 상황이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회가 될 것 같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파이오니어가 상장되면 생각보다 더 대박 칠 것 같지? 파이오니어는 21세기의 구글을 완벽하게 대체하게 될 것이다.

“요우후. 사필귀정(事必歸正)! 아니, 이건 뭐라고 하죠?”

“새옹지마(塞翁之馬).”

“맞아요! 새옹지마, 새옹지마!”

케이는 대한미국인답게 사자성어도 잘 안다.

내가 시점에 맞게 기술개발만 제대로 한다면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이런 위기가 올수록 내 회사는 훌쩍훌쩍 커 나갈 수 있다. 내가 돌파구를 찾으면, 특급 로비스트인 케이가 알아서 응징과 회유를 하고 돌아다닐 것이다.

“일을 나누지. 케이, 미국 가서 모토롤라부터 조져. 미 음반 협회 건은 윌슨하고 논의해서 내가 해결하지. 재훈이에게도 내가 전화할게.”

신이 나서 팔딱팔딱 뛰고 있는 케이에게 마저 얘기를 마쳤다.

“어? 전화한다고요? 미국 같이 안 가요?”

“먼저 가서 신문기사부터 터뜨려 줘. 신성은 한국에서 응징하고 가야지.”

“아, 그래야겠네요.”

“당연하지.”

앞으로 몇 주간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케이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되겠다. 쇼핑부터 해야겠다.”

“……?”

“그 표정은 뭐에요? 이 꼴로 인터뷰를 어찌 해요?”

“아, 그런 의미였어?”

“권 부장님, 오 이사님. 같이 가요. 법정 룩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어야죠.”

“아… 예.”

다다다다.

몰려왔던 그대로 몰려가는 사람들. 나 부장만 홀로 남아 피식피식 웃어 댄다.

“사장님, 저는 K폰 계속 찍어 내면 되는 거죠?”

“그럼요. 계속 찍어 내는 수준이 아니라 더 많이 찍어 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신성에서 내 보너스를 챙겨 주는 겁니까? 하하하하.”

나 부장은 소파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좋아라 했다. 나 부장 같은 공돌이가 보기에도 우린 대박을 맞은 것이 확실해 보였나 보다.

    • *

며칠 뒤, 수정각.

나는 술상을 앞에 두고 TV를 보고 있었다. K폰과 앰팩은 한국에서도 핫이슈라 미국 방송이 그대로 TV를 타고 있다.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오히려 소송을 거셨는데, 배경이 뭡니까?

-이 일은 비단 스마트 클라우드의 K폰에만 한정된 이슈가 아닙니다. 모토롤라와 신성 같은 휴대폰 제조사가 불법적으로 통신의 자유라는 고객의 권리를 침해한 사건입니다. 기자님도 아시지 않나요? 911 신고를 하는데, 잡음 때문에 집 주소를 착각해 귀한 생명을 잃을 뻔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비즈니스맨들이 구두 계약에 실패해 심각한 경영적 손실을 입은 사례도 다수 있고요. 이에 미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스마트 클라우드가 소송을 제기하는 겁니다.

-휴대폰 제조사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는 확실하며, 법정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모토롤라에서는 일반적인 GSM 방식의 휴대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K폰의 기술력이 따라오지 못한 결과라고 했습니다만.

-노이즈 칩을 붙이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불법입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고객의 권익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노이즈 칩이라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휴대폰 고객들은 불법에 농락당해 3달러씩 빼앗긴 꼴입니다.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돈을 빼앗기다니요!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한마디만요! 돈을 빼앗기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케이 옆에서 권 부장과 오 이사가 기자들을 막아서며 천천히 법정으로 걸어갔다. 필요한 말은 다 하고, 민감한 질문이 나오면 법정에서 보자며 언론의 관심을 증폭시킨다. 작전도 잘 짰다. 911을 끌어들일 줄은 몰랐네. 어디 작은 차고라도 하나 불태웠나 싶다.

-흑흑, 나는 모토롤라 때문에 내 사랑스러운 아이를 잃을 뻔했어요. 이 대가는 꼭 치러야 할 겁니다.

-나는 앞으로 K폰만 쓸 겁니다. 휴대폰 제조사가 잡음을 의도적으로 만들다니요, 모토롤라와 신성은 기본적인 도덕심조차 없는 겁니까?

-내 목소리를 누가 마음대로 변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합니다. 이번 일은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뒤이은 시민들의 인터뷰 또한 1분 넘게 이어졌다. 미국 중산층 아줌마가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으니, 이미 게임 셋이다. 미국인은 애들의 안전에 관련된 일에는 광분하는 경향이 있다.

케이는 이번 사태를 삽시간에 이슈화시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을 테고, 휴대폰이 팔린 숫자에 곱하기 3달러에 휴대폰 교체 비용, 교체 기간 중 K폰 렌트비, 정신적 피해 보상 등등을 합쳐 천만 불이 훌쩍 넘는 돈을 신성과 모토롤라에 청구할 것이며, 통신사에 설치한 노이즈 필터 모듈 비용과 유지 보수비까지 청구할 것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변호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려나 보다. 한국에서 음원 소송에서 창피를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눈에서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것 같다.

그게 다가 아니다. TV에는 K폰뿐 아니라 앰팩도 화두였다.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제품인 데다 주요 수출품 아닌가.

이제 나도 언론 플레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신문사를 몇 번 찔렀더니 TV마저 중계방송을 해 준다. K폰과 다른 게 있다면 케이 대신 윌슨이 나와 인터뷰를 했을 뿐이다.

-앰팩 소송에 항소를 하셨습니다. 배경과 앞으로의 상황을 어찌 보십니까?

-항소가 아닙니다. 아티스트의 권익을 보호하는 음반 협회의 의견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우리 파이오니어와 스마트 클라우드는 음원 불법 유통을 막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으며 그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음반 협회에서는 음원 불법 유통은 결국 앰팩이 조장한 것이라며 소송을 걸고 있습니다만.

-백신 프로그램이라는 보완책은 이미 마련되어 있으며, AOL 및 여타 온라인 음원 판매처의 협조가 적극 필요한 상황입니다.

-백신이라니요?

-백신은 온라인에서 불법 음원 근절을 자동으로 스크린하는 프로그램을 말합니다. 파이오니어는 이를 무료로 배포하고자 하며, 음반 협회의 주관하에 모든 온라인 업체에서 불법 음원 근절을 위해 협조를 바라는 바입니다.

-프로그램이 무료라고요?

-예, 무료입니다. 이는 음원 소비자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규정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파이오니어 CEO의 바람이 적극 반영된 결과입니다.

-오오오!

딸깍.

쪼르륵….

“후후. 유 사장님,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신성을 확 밟을 수 있을 것 같군요.”

한마음신문사 도한솔 기자가 웃으며 내 잔을 채워 주고 있다. TV에 미국 뉴스가 송출되도록 도와준 1등 공신이라고 하겠다.

“한마음신문사에 광고를 더 넣어 드려야겠네요. 와중에 깨끗한 신문사라고 자부하는데 날 이리 도와도 되는 겁니까?”

나는 짐짓 농담을 해 봤다.

“같은 대기업이라도 스마트 클라우드는 좀 다르죠. 재무도 깨끗하고,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모습도 그렇고, 기자들 사이에선 이미지가 좋습니다.”

“미국 쪽에서 1차 판결이 나오면 기자회견을 하겠습니다.”

“일단 증빙 자료부터 주시면 하루 전에 특종으로 다뤄 드리죠. 노이즈 칩이라니 아주 참신한 테마입니다.”

“저희 쪽에서 알아보니 대만 쪽 T사에 제작 의뢰를 한 것 같더군요.”

“다른 기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대만으로 출장을 가야겠군요.”

특종 냄새를 맡았는지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두툼한 서류 봉투다.

툭.

“뭡니까?”

“IP를 추적한 자료입니다. 미국에서 유출된 불법 음원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유출된 것이 확실합니다.”

“오호? 그걸 어떻게?”

“KT 쪽을 뒤졌습니다. 불법 음원의 최초 발송 IP가 국제 인터넷 사업에 쓰인 일본 서버 IP더군요. 심지어 불법 음원의 대부분이 소니와 계약이 끝난 음원들입니다. 구린 냄새가 풀풀 나지 않습니까?”

도 기자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가며 설명을 해 줬다.

“이 정도면 소니도 응징할 수 있겠군요. 은근슬쩍 신문에 실어 주시지요.”

“후후, 부탁은 들어 드려야죠. 한데 나름 공이 많이 들어간 일이라….”

“한마음신문사에 광고 세 개는 넣어 드려야겠습니다. 물론 도 기자님을 통해서.”

“광고는 이미 많이 주셨으니, 명함 선물이나 한 장 주십시오.”

으흠, 이 양반도 명함 선물을 아네. 내 명함에 그 정도 가치를 부여해 주니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하나,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TV 노출에 정보까지 물어와 줬으니 거절할 수가 없다. 나는 명함을 꺼내 탁자 위에서 쓱 하고 밀어 주었다.

“이 일의 마무리까지 도와주시는 걸로 믿고 명함 한 장 드리겠습니다.”

“돈으로 바꾸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벌써 쓰실 곳을 염두에 두고 계신 건가요? 지금 알려 주시면 준비라도 해놓지요.”

“그럼 재미없죠. 제가 조만간 귀하게 쓰겠습니다.”

“정치 쪽에는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연하죠. 유 사장님이 정치 싫어한다는 거 세상 사람이 다 아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도 기자의 술잔을 채워 줬고, 그 뒤론 시답잖은 얘기만 주고받았다.

나중 일이야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것이고, 일단 나는 한국에서 신성을 밟아 주고 미국으로 가서 2차전을 뛰어야 하는 사람이다.

K폰이야 태풍을 타고 훅 하니 앞서 나간 꼴이지만, 앰팩은 솔직히 살짝 덮은 수준이지 않은가?

앰팩 라이선스가 이슈가 되었을 때 다른 회사의 제의는 모두 거절했지만 픽사와 애플에 한해서는 ‘충분히 검토해 보겠다’고 회신한 바 있다.

내 촉에 의하면 분명히 스티브 잡스는 이번 앰팩 소송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든 내게 연락을 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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