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또 한 번의 도약
“미스터 유, 잠시 바람 좀 쐬겠나? 나이가 드니 좀 걸어야 소화가 되네.”
“그러시죠. 서울 야경도 볼만합니다.”
케이슨은 재훈이와 에릭 앞에서 정치 얘기를 하고 싶진 않은가 보다. 나는 케이슨과 함께 공중 정원으로 나섰다. 케이가 자연스럽게 와인을 들고 따라나선다.
“으흠, 이견이 있었지만 파라곤에선 결국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현 대통령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네. 전후 처리 중인 대통령이 연임에 실패한 적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네. 자연스레 석유 기업에도 투자를 할 예정이고 말일세.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케이슨이 생각보다 말을 길게 한다. 혹시 이 중에 틀린 판단이 있느냐고 묻는 뉘앙스다. 이 결정에 케이슨이 반대했나 보다. 그 말인즉슨, 파라곤의 시타델 파벌이 조지 부시를 밀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미래를 알지 못한다면 걸프전에서 승리한 현 부시 대통령을 미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다. 나야 빌 클린턴이 당선될 것임을 알지만 말이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시타델 파벌이 조지 부시를 밀었고, 케이슨 님은 빌 클린턴을 밀고 싶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으음… 사실이네. 난 이번엔 민주당이 당선되었으면 하네.”
“보수적인 파라곤 이사님의 말씀치고는 의외네요.”
“그래서 내부에서 지지를 받기 어려웠네. 여하튼, 나는 현 정권의 정책이 파라곤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네. 금리를 올려 무역 적자를 줄인다고 하지만, 미국 내부의 인플레는 어쩌고? 결국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지 못할 걸세. 일단 정권부터 바뀌고 볼 일이네.”
케이슨은 정권 변경을 바라나 보다. 나 또한 당연히 빌 클린턴이 당선되는 것이 좋다. 그 양반이 IT 산업을 엄청나게 지원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쌍둥이 적자의 한 축인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미국 공무원 30만 명을 해고하고, 그 해결 방법으로 국가 기관에 인트라넷 전산망을 대대적으로 깔아 댔다.
해고된 공무원들을 인트라넷 회사들이 흡수해 부작용을 최소화시켰고, 1993년부터 연말 정산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공인 서류들이 자동화되자 국민들이 그 편리함에 환호성을 질렀다.
미국의 온갖 IT 업계들이 그와 비슷한 전산망 확충 사업에 달려들었기에 국가기관, 대학교, 기업들의 인트라넷이 인터넷과 연결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어찌 될까? 당연히 수혜자 중 한 명이 파이오니어가 될 것이고, 서버를 팔아 재끼는 나 또한 돈을 갈퀴로 긁어 담게 될 거다.
난 정말 이번 생에 운이 좋아. 전생에 반도체에 몸담길 정말 잘했어.
“하하, 잘됐네요. 그럼 민주당 빌 클린턴을 미세요. 케이를 내세워 정치 자금도 잔뜩 지원하시고.”
“으음? 빌 클린턴을 지원하라고? 케이를 내세워서?”
옆에 있던 케이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수한 씨, 빌 클린턴이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상대는 전쟁에서 승리한 현 대통령이라고요.”
“선거엔 늘 킹메이커라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야. 그리고 실제로 빌 클린턴이 당선되면 케이 지분도 훅 하고 오르지 않겠어?”
“그리만 된다면야…. 한데 킹메이커라뇨?”
“일전에 래리 킹 라이브에 로스 페로라는 양반이 제3후보로 출마한다고 하지 않았어?”
로스 페로는 미국 재벌로, CNN CEO와 사이가 돈독했기에 독보적인 시청률을 자랑했던 래리 킹 라이브 쇼에 나와서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공약은 균형 재정, 총기규제 반대, 보호 무역 등으로 보수파인 공화당 표를 잠식하기엔 딱이다. 21세기의 트럼프 대통령과 이미지가 매우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물론 대선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전혀 다르지만.
“그가 킹메이커예요?”
“그의 공약은 총기규제 반대, 보호 무역인 데다 미 해군 출신의 백인이잖아. 돈도 많고.”
케이슨이 손으로 턱을 쓸었다.
“으흠, 그를 뒤에서 지원해서 공화당 표를 분산시키라는 말인가?”
“대선을 중도포기하지 않도록 잘 부추겨 주십시오. 그가 10%만 득표해 줘도, 빌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겁니다.”
“하하!”
원래 역사에서 로스 페로는 1992년 대선에서 18%가 넘는 득표율을 보였으며, 선거인단은 한 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오롯이 공화당 표를 분산시켜 빌 클린턴 당선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1997년 대한민국의 대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득표율까지 기억난다.
케이는 여전히 불신 어린 표정이었다.
“수한 씨, 대선은 만만하게 아니에요. 지지했다가 안 되면 말고 이런 게 아니라고요.”
“케이, 이런 기회를 놓칠 셈이야? 시타델과 똑같이 조지 부시를 지원한다면 그가 당선되어도 당신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어. 반대로 빌 클린턴을 지원한다면 적어도 기회는 있잖아. 대가도 훨씬 클 테고. 내가 케이라면 승부를 걸겠어.”
“미스터 유의 생각도 일리가 있어. 해 볼 만해.”
“닥터 케이슨께서 일단 한 발을 담그고 추이를 지켜보면 판단하시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나 혼자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네. 파라곤의 시카고 파벌도 같이 움직여 줘야 해. 그들을 설득할 뭔가가 필요하네.”
“빌 클린턴에게 정치 자금을 대고 그 대가로 국가 기관의 인트라넷 사업권을 얻어 내겠다고 하시면 되죠.”
“…국가 기관의 인트라넷?”
“쌍둥이 적자 중 하나가 재정 적자인 거 잊으셨어요? 국가 전산망을 구축하면 잉여 공무원을 감축할 수 있어요. 해고된 공무원은 인트라넷 운영 회사에서 흡수하면 되고 말입니다. 재정 적자 해소를 공약하는 빌 클린턴이라면, 그런 이면 계약은 흔쾌히 맺을 겁니다.”
나는 원래 역사에서 진행될 것이 뻔한 일을 늘어놓았다.
빌 클린턴은 케이슨의 이면 계약에 무조건 동의한다. 공무원 해고 건이라 대선에선 공론화 못 하고 있을 뿐, 당선되면 첫 번째로 행하는 일이니까.
내 말에 케이슨의 표정이 환하게 변한다.
“허허! 이거 내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가 되레 선물을 받아 가는 꼴이야.”
“뭐, 저도 파이오니어를 통해 인트라넷 서버를 팔면 좋죠.”
“결국 나더러 파이오니어에 좀 더 과감한 투자를 하라는 말이군.”
“재훈이 저놈은 가만히 있어도 투자금이 늘어나는군요. 역시 운 좋은 놈은 못 당합니다.”
“하하하.”
재훈이는 이번 생엔 재운이 있나 보다. 솔직히 케이슨이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논의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냥 원래 역사대로 흘러가게 뒀을 텐데, 지금은 꼭 정치 작전을 짜 주며 투자금을 듬뿍 받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케이슨도 미국으로 돌아가서 내 말을 참고해서 일을 진행하다 보면 깜짝 놀랄 거다. 일이 술술 풀려 나갈 테니까.
케이슨의 말에 확신을 얻은 듯 케이도 눈을 반짝거렸다.
“안 되겠다. 나 미국 갔다 와야겠다.”
“그래. 12월까지는 미국에 있어. 내가 앰팩 물량 잔뜩 보낼 테니 마케팅이나 잘해 줘.”
“만약 대통령이 그가 되면 이 건은 두고두고 갚을게요.”
“하하하, 미리 축하주나 나눠 볼까?”
나는 확신을 더해 주고자 와인잔을 들고 건배 제의를 했다.
“케이, 건배 제의를 하렴.”
“시타델이 무릎 꿇을 그날을 위해.”
“그날을 위해!”
쨍!
근사한 저녁 식사였다.
- *
-위대한 미국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데 한 표를 행사해 주십시오. 다 같이 외쳐 보겠습니다. 우리 슬로건이 뭐죠? 공화당 바보들이 들을 수 있게 크게 말씀해 주십시오.
-경제가 제일이야, 이 바보야!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It’s the economy, stupid!’가 터져 나오자 빌 클린턴은 양팔을 크게 펼치고 환호성에 답했다. 대한민국 9시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방영되는 걸로 봐서 원래 역사대로 순탄하게 가고 있다.
케이슨이 돌아간 지 4주밖에 안 되었는데 내게 고맙다는 전화를 몇 번이고 해 왔다. 빌 클린턴 선거 진영에 무사히 안착한 듯하다. 이면 계약도 잘 진행되고 있으려나?
「미 대선에서 민주당 돌풍. 한국의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12월 대선 준비에 나서는 각 정당들. 미 대선의 경제 활성화 키워드 빌려 와.」
「정영주 회장, 총선에 이어 대선도 노릴 듯. 한국의 로스 페로인가?」
「앰팩, 미 전역을 강타하다. 반도체, 휴대폰에 이어 하반기 수출 효자 종목 될 듯.」
「KT, 세계에서 세 번째로 국제 인터넷 회선 사업에 참여. 대한민국을 아시아 인터넷 허브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 밝혀.」
신문을 읽어 볼 때마다 앰팩 관련 기사는 꼬박꼬박 나오니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케이가 미국에서 직접 딜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휴대폰보다 더 잘 팔리는 것 같다.
재훈이도 파이오니어 한국 지사를 세우느라 바쁘다. 지금도 만날 때마다 입이 귀에 걸려 있는데 나스닥에 상장할 땐 얼마나 좋아할까 싶을 정도다. 나스닥 전광판 앞에서 같이 축배를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똑똑.
“예, 권 부장님. 들어오세요.”
“사장님, 앰팩 기판 P.O(Purchase Order: 구매 주문)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음? 기판 오더는 김 과장이 결재하면 되잖습니까?”
“개발팀장 결제 권한은 한 번에 1억 원까지입니다. 재고가 바닥을 보여서 영업팀에서 20억 치 물량을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20억씩이나요?”
“대량 발주하면 기판 업체들에 가격을 10% 깎을 수 있습니다. 현재 오더 떨어진 것만 해도 충분하니, 한꺼번에 발주해야 합니다.”
구매팀이 따로 없다 보니 권재욱 부장이 구매팀 업무까지 하고 있다.
기판 가격이 매출의 약 4%인 걸 감안하면, 500억 치 매출은 이미 계약 완료되었다는 의미다. 하긴 지금 북미 시장에서만 출시 한 달 만에 초도품 20만 대를 완판해 버렸다. 석 달 정도는 걸리겠거니 했는데, 내 예상을 뛰어넘었으니 수주 또한 그럴 것이다.
“어디서 물량이 그리 들어왔나요?”
“버지니아 트레이딩에서 20만 대, 국내 대리점들에서 12만 대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사실 추가 오더가 10만 대 더 있지만 도저히 부품 공급을 늘릴 수 없어 다음 달로 미뤘습니다.”
국내 반응도 만만찮다. 역시 앰팩은 대박이었어.
딸깍. 딸깍.
나는 구매 시스템으로 들어가 결재를 했다. 도면 표준, 표준 가격, 입고 날짜 등등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기재되어 있으니 살펴보는 데 3분이면 족하다.
“부품 업체 추가로 퀄 내는 거 김 과장이 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한 달 내로 하겠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이 정도 반응이면 음원 수익도 꽤나 되겠어요.”
“안 그래도 PC통신 업체와 용인밸리 인터넷 업체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각 회사들이 모두 스마트 클라우드 서버를 더 구매하겠다고 난리입니다.”
“나운영 부장님도 신나겠네요.”
“연일 제2지구는 언제 완공되느냐고 건설사들을 닦달하기 바쁩니다. 라인에 한번 들어가 봤는데 쉴 틈이 없더군요.”
“핸드 터미널은 여전히 잘 나가죠?”
“잘 나가다뿐입니까? 앰팩으로 자사 이미지가 확고해져서 신모델은 시험 삼아 가격을 올렸더니 더 잘 팔립니다. 이번 달 매출도 핸드 터미널만 200억이 넘습니다.”
짝짝짝!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10월 매출은 600억이 넘을 거고 앰팩의 점유율은 약 50%다. 앰팩은 한 개당 5만 원씩 남는 셈이지만 파라곤에서 빌린 돈을 갚는 데 쓰고 있으니, 유동 자금으로 떨어지는 것은 핸드 터미널, 에그펫, 서버 수익이다. 그 제품군의 매출 300억에 수익률 10%를 감안하면 30억쯤 남는 셈이다. 석 달 정도 적립하면 작은 라인 하나를 꾸밀 정도의 유동 자금이 된다.
이대로 간다면 1년 매출이 가늠되는 내년 하반기엔 상장을 해 볼 수도 있겠다. 그때쯤이면 용인밸리의 2지구도 핑핑 돌아가고 있을 테니, 매출 1조를 기점으로 한국에 또 하나의 대기업이 탄생했음을 알리면 되는 거다.
초반에 YS 문민정부는 IT 쪽에 대규모 투자를 하니, 적당히 지분을 팔아 유동 자금을 좀 더 확보하고 IMF에 대비할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가면 된다.
“아, 그리고 시간 되시면 개발팀장이 따로 보고할 게 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김 과장이요? 바쁜 양반이니 내가 가야죠. 오긴 뭘 옵니까?”
“하하, 바로 가시죠.”
나는 권재욱 부장과 함께 곧장 나아가 김 과장 자리로 가서 칸막이를 똑똑 두드렸다. 그가 뭐를 만들었는지 대충 감이 왔다.
앰팩이 이리 대박을 치고 있으니 당연히 원가 절감 아이디어를 내야지. 그리고 앰팩이 시장에 굳건히 자리를 잡는 내년에는 꼭 적용이 되어야 한다.
똑똑.
“김 과장님! 사장님 오셨어요.”
“아, 제가 간다고 전해 달랬잖습니까.”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선 김 과장에게 물었다.
“시제품 어디 있어요?”
“하하. 그리 급하게 찾으실 줄 알고 웨이퍼 한 장 빼왔습니다.”
김 과장의 표정부터가 느낌이 좋았다.
“이야, 웨이퍼 한 장을 빼낼 정도면 수율이 꽤나 되나 보네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거 최종 수율이….”
“수율이?!”
“65%입니다.”
“으헉!”
“우하하하! 놀라셨죠. 저도 놀랐습니다. 사장님 레시피 정말 대박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웨이퍼 최종 수율이 65%라면 거의 양산 수율이나 다름없다. 반도체는 단위 공정이 대략 300개인 것을 감안하면 각 공정 수율이 99% 이상 된다는 의미다. 그걸 두 달 만에, 그것도 초도 웨이퍼에서 실현했다고?
내가 아무리 21세기 최신 레시피를 알려 줬다고 해도 개발자들이 정말 뺑이쳤나 보다.
“어… 65%로 뭘 그리 놀라십니까? 현 양산 수율은 80% 가까이 되지 않습니까.”
“권 부장님, 이건 기존 제품이 아닙니다. 플래시 메모리라고요.”
“플래시요?”
“우린 지금 세계 최초의 플래시 메모리를 보고 있는 겁니다. 이건 CD롬이고, 하드디스크고 간에 시장에서 싹 제쳐 버릴 수 있는 특급 제품이란 말입니다.”
나는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지금 만든 플래시 메모리는 SLC로 하나의 bit에 하나의 데이터만 넣는 초창기 구조이긴 하지만 실제로 동작하는 칩을 구현했으니 게임 셋이다. MLC나 TLC처럼 비트당 여러 개의 데이터를 넣은 21세기형 플래시를 개발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하드디스크를 제쳐요? 칩으로 말입니까?”
“이거 칩만 있으면 64메가짜리 앰팩을 바로 만들 수 있어요.”
“허억!”
권 부장은 내가 웨이퍼의 칩 하나를 가리키며 그것으로 64Mb를 저장할 수 있는 앰팩을 만든다니 깜짝 놀란다. 현재 DRAM 영역에선 뭇 반도체 회사들이 기껏 4Mb를 양산하고 있는데, 내가 벌써 64Mb를 언급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사실 플래시 메모리는 여타 반도체 대비 집적도가 훨씬 뛰어나다. 칩 자체의 집적도도 뛰어나지만 하나의 패키지 안에 칩을 계단식으로 적층해 회로 연결을 하면 용량 증대는 문제도 아니다.
“사장님, 64메가 패키징은 이제부터 시도해 봐야 합니다. 여하튼 웨이퍼가 나왔으니 가능성은 엄청 높다고 봐야죠.”
“조금만 더 힘을 내 줘요. 계단식 구조보다 더 나은 구조가 나오면 바로 특허 출원하고요.”
“걱정 마십시오. 벌써 플래시 웨이퍼 공정에서만 특허 출원을 스무 개 이상 했습니다.”
패키지 공정 셋업도 잘되면 좋을 텐데…. 사실, 패키지 전문가인 대현의 오성재 이사의 힘을 빌리면 정말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아쉽긴 하다.
그래도 이제 신입 사원들이 손발이 착착 맞아 가고 있는 모양이다. 김 과장이 앓는 소리보다 걱정 말라는 소리를 하잖나.
“이번 프로젝트에서 두각을 보이는 신입 사원은 내년 초에 과감히 특진시켜요. 개발 조직도 변경해야 한다면 송 과장과 협의해서 나에게 보고해 줘요. 전폭적으로 지지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개발팀에서 일부 인원을 품질팀으로 분리하자는 말이 있었거든요.”
이야, 누가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하겠다. 개발팀에서 품질팀을 만들자는 말이 나오다니. 그만큼 회사의 조직이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각 단위 공정 품질을 개발자가 일일이 모니터링하기에는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회사 구성원들이 스스로 대기업 조직 체계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내가 중심을 잡고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 시급한 것은 품질팀과 구매팀 정도다. 내 회사가 점차 반듯반듯해지고 있으며, 내가 겪었던 미래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삐리리릭. 삐리리릭.
“여보세요.”
-마, 너 지금 어디야? 왜 아직도 안 나타나? 지금 출발해야 하는데.
나는 사람들에게 손 인사를 하고는 김 과장 자리를 후다닥 벗어났다. 전화 목소리를 듣자마자 잊었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어쭈, 소개팅 해 달라고 그리 닦달을 하더니 시간을 까먹어? 나 미국 가는 일도 미루고 이러고 있는데!
“미안, 미안! 나 쌩하니 간다.”
-후딱 나 태우러 와라. 지금 출발해도 10분은 늦을 것 같다야.
“안 늦어, 안 늦어. 이 비서는 도시의 레이서거든.”
원래 역사에서도 재훈이의 소개팅으로 난 아내와 연결된다. 재훈이가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친구가 내 아내니까. 조금 늦었지만 오늘에서야 그 인연을 다시 이으리라.
다다다다다.
“이 비서, 운전 좀 해 줘요. 서울 강남까지! 아, 중간에 리베라호텔 들러서요.”
회사도 챙겨야 하지만 내 개인사도 미래에 근접시켜야지. 이번 생엔 내 아내 희연이와 데이트는 럭셔리 버전으로 만들어 볼 거다.
카페에서 잠시 통성명하고, 곧장 통째로 전세 낸 극장에 가서 영화를 즐기고, 호텔 VIP석에서 럭셔리한 저녁을 먹고, 서울 외곽 라이브 카페에서 디저트를 즐긴 뒤에 집 앞까지 안전하게 모신다!
완벽한 데이트 코스다. 희연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끼이익.
재훈이가 머물고 있는 리베라 호텔에 정확히 8분 만에 도착했다.
“얼른 타. 나 정말 빨리 왔지?”
“하하, 급하긴 급한가 보네.”
탁!
“두 분 사장님들 안전벨트 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속도로를 좀 빠르게 달리겠습니다.”
문을 닫자마자 후다닥 출발하는 이 비서다.
나는 차에 올라타는 재훈이에게 손수 안전벨트를 매 주는 서비스까지 해 줬다. 나의 큐피드가 아니던가.
“오늘 나오는 애는 이름이 뭐야?”
“내가 이름을 어떻게 아냐? 그냥 내 여친보고 친구 중에 제일 예쁜 애로 데려오라고 했지.”
“하하, 역시 넌 내 친구야(하긴, 희연이가 엄청 예쁘긴 하지).”
- *
서울 강남 모처 카페.
“재훈, 너 미국에 있다고 외국 여자들에게 넘어가고 그러면 안 된다. 넌 절대 고무신 거꾸로 신는 남자가 아니잖아.”
“당연하옵지요. 저는 일편단심 민들레이옵니다.”
“역시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있단 말이지.”
“이번 겨울방학엔 시카고로 놀러와. 내가 비행기 표 보내 줄게.”
“혼자서 어떻게 가. 친구들이랑 같이 가도 돼?”
“당연하지. 호텔비까지 내가 다 부담한다.”
옆에서 재훈이와 그 여자친구가 찰싹 달라붙어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다. 나는 커피만 홀짝거릴 뿐이었다. 21세기 컬투쇼에서 들었던 재미난 농담을 몇 개나 연습해 왔는데 늘어놓을 기분이 아니었다.
“수한 씨는 원래 그렇게 과묵하세요?”
“아, 예. 제가 좀 촌뜨기라 소개팅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제가 재미있는 얘기 해 드릴까요? 라디오에서 들었는데요….”
“호호호. 해 봐, 해 봐! 재훈 씨 들어 봐. 영인이가 재미난 얘기 정말 잘하거든.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말도 잘하고 센스도 좋아.”
재잘재잘.
시답잖은 무료한 시간이 흘러간다.
내 기억 속의 소개팅에선 내가 공대스러운 농담을 늘어놓았고 내 앞에 앉았던 희연이는 배시시 웃기만 했는데 말이다.
지금 눈앞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영인이라는 여자는 정말 예쁘고, 발랄하고, 유머 감각까지 있지만 어쩐지… 억지로 웃어 주고 있자니 고역이다.
재훈이 여친이 나를 원래 시간대처럼 촌뜨기 공대생이 아닌 재력 있는 기업가로 여겼는지 같은 과 친구가 아니라 학교에서 퀸카로 알려진 여자를 데려온 거다. 희연이와의 인연이 또다시 비껴 나간다.
톡. 톡.
“응?”
“사장님, 죄송한데 회사에서 연락이…. 급히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급한 일 없다고 하지 않았나?”
“고객 일정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접대를 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비서가 내 등 뒤에서 나타나 방금 통화를 끝냈다는 듯, 휴대폰을 두 손으로 쥔 채 파투를 조장해 준다.
“오, 어째? 수한 씨 바쁜가 봐.”
“아,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극장과 호텔 식사를 예약했는데, 좋은 시간 되시고….”
“어떻게 해. 그럼 영인이는 짝이 없잖아.”
“죄송합니다.”
나는 극장표와 호텔 예약이 적힌 메모지를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퀸카 여성이 인상을 구겼지만 어쩌리.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걸.
뚜벅뚜벅.
“고마워요, 이 비서.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딱 알고….”
“그게 제 일인데요. 하하!”
“회사로 가서 일이나… 아니다, 분당 집으로 가죠.”
“예.”
역시 내가 직접 헌팅하는 수밖에 없나?
나는 내 아내의 미소와 내 아이들의 잠투정을 보고 싶다.
오늘따라 내 원래의 시간이 아련할 정도로 그립다. 언제 한 번 날 잡고 희연이를 끝까지 쫓아다녀야겠다.
오늘은 좀 쉬자. 지쳤다.
- *
찰칵! 찰칵!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는데 어쭙잖은 여대생이랑 미팅이네요.”
“쩝! 어쩌겠어. 그래도 파이오니어 사장이랑 친구라는 것과, 4주 전에 양놈 늙은이 만난 것은 돈이 될 거야. 파라곤이라는 대형 투자사 이사잖아.”
“결국 파이오니어, 버지니아 트레이딩, 파라곤 이 정도로 압축이 되네요. 저놈은 완전 미국통이에요. 한데 신성 이희건 회장과는 커넥션을 못 밝혔는데…….”
“야, 그건 사진을 찍었어도 우리 선에서 씹어야지. 돈 몇 푼 받자고 그쪽을 건드려? 신성 건드렸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놈이 어디 한둘이냐?”
“하긴, 이쯤이면 이관재 사장에게 받은 돈 값은 한 거잖아요.”
“그치. 한 달 내내 쫓아다녀도 이게 전부잖아. 이쯤 하자.”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흥신소 직원들이 훅 하고 사라졌다.
- *
부르릉. 끼이익.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정원에서 책이나 좀 보고, 음악도 좀 듣고… 어라?
내 차고지 셔터 앞에 눈에 익은 엑셀 자동차가 서 있다. 낡았지만 묘하게 중후한 느낌이 드는 차. 정 회장의 차다. 오늘따라 의도치 않은 만남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사장님, 누가 차고지를 막고 서 있네요. 한데 저 차는….”
“알아요. 정 회장님 차라는 거. 옆에 세워요.”
“예.”
스르릉. 탁.
내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저쪽에서도 누군가 훅 하고 튀어 나온다. 최 상무다.
“유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이제 뵐 일 없을 텐데요. 어쩐 일로?”
“오늘은 정시에 퇴근하셨군요. 우리가 만날 운이었나 봅니다.”
탁!
“이누마, 날 이리 세워 둘 셈이가? 들어가자. 얼굴 봤으니 얘기도 좀 해야지 않누.”
“…들어가시죠.”
철컹.
나는 문을 열고 정 회장과 최 상무를 안으로 안내했다.
해가 저물 무렵이라 정원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작지만 잘 정돈된 정원. 재벌 회장을 모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곳이다.
“내가 빌려 준 돈으로 산 집이 여기였디가? 잘 꾸미 났네. 밖에서 볼 때보다 더 멋지구마.”
“예. 덕분에 좋은 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정원에 놓인 파라솔 아래에 앉자 이 비서가 박카스와 콜라 캔을 늘어놓는다. 차 안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서 가져왔는지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박 회장이 전화 한 통화 주더라. 니가 미국 물주까지 보내서 YS를 밀고 있다고. 나보고 그만 포기하라 하대.”
정 회장이 ‘박 회장’이라 칭하는 인물은 박준태 의원이다. 케이슨에게 박준태를 만나 국제 인터넷 사업권을 KT에 주라고 했더니, 그게 이런 식으로 말이 새어 나갔나 보다.
“제가 뭐라고 YS를 밀고 자시고 하겠습니까? 국가적으로 놓치면 안 될 사업권이 있어 줄을 놓았을 뿐입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대현부터 챙겼으야 하는 거 아이누? 미운 정이라는 것도 있고.”
“휴우~ 회장님, 사업을 정으로 하셨습니까?”
“그래, 나는 그랬다.”
“…….”
할 말이 없다. 직선적인 대화를 즐겨 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선 절대 밀리지 않는 정 회장다운 대답이었다.
“미 대선을 보니 니가 케이슨이라는 그 양반한테도 뭔가 알리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드라. 뭔가 정국이 바낐으. 공화당이 잘나가다가 삐끗하는 모양새 아이가.”
“절대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미 대선에 로비를 하겠습니까. 그럴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원래 역사에서 벌어질 일을 케이슨에게 알려 줬을 뿐이다.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슬쩍 올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미 대선 정국도 바꿔 놓은다므 한국은 쉽지 않겄나. 말해 봐라. 내가 이길라카므 어쩌므 되누? 내 니 말에 보상은 두둑이 하마.”
“포기하십시오.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YS나 DJ 둘 중 한 명이 되는 선거입니다.”
딸깍. 꿀꺽꿀꺽.
정 회장이 콜라를 마시는 것은 처음 본다. 말문이 막혔다는 뜻이다.
정 회장도 알고 있다. 이대로 가면 패배라는 것을 말이다.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지만 다급함이 느껴진다. 오죽하면 정 회장이 직접 나를 찾아왔겠나.
“아이다. 니 예측이라고 다 맞는 게 아이다. 총선에서는 내가 이깄다 아이누. 내 정당이 자그마치 32석이나 얻었다. YS는 내한테 진기라. YS 텃밭이던 TK(대구, 경북 지역) 의원들도 내 쪽으로 잔뜩 넘어왔다. 해 볼 만하다.”
그게 최악의 시나리오지. 총선에서 대박을 친 게 정 회장을 대선에 나설 자신감을 심어 줬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민심이 대현그룹을 수렁으로 밀어 버린 꼴이다.
“32석은 울산의 대현자동차 덕분입니다. 회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그게 끝입니다. 대선은 포기하시고 정당을 YS에게 통째로 넘기십시오. 그게 유일하게 회사라도 건질 수 있는 길입니다.”
퍽.
콜라 캔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는 정 회장.
“니한테 물은 기는 내가 어찌 이길 수 있냐는 기다. YS에게 당을 넘기는 게 아이고. YS는 내 적이라! 내 회사 돈을 제 돈처럼 마구 뽑아 먹을 생각밖에 음써. 내가 총선에서 이리 발악 안 했으므 1,400억 탈세 건도 무마할 수 없었을기라!”
대선에 나가면 1,400억으로 안 끝난다. 그룹 전체가 개판된다고요, 정 회장님!
나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고 싶어서 발악을 했지만 나는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길 가능성은 없습니다. YS가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 70%, DJ가 30%, 정 회장님은 0%입니다. 한국 기업가에게 정치 보복만큼 무서운 일이 어딨습니까? 제발 YS에게 정당을 걸고 거래하십시오. 정치 보복 없는 조건으로, 대현 전체가 나서서 적극 지원할 테니 연합하자고 말입니다.”
“안 된다. 벌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YS와 나는 적이야.”
정 회장도 재벌 총수. 한번 적이라고 여긴 사람하고는 절대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 신성의 이 회장은 물밑에서 적을 없애 버리지만, 정 회장은 물밑이든 물 위든 가리지 않는 행태가 조금 다를 뿐이다. 다행히 여태 그 대상이 외국 건설사가 대부분이었기에 국민들의 성원을 받은 거다.
“스마트 클라우드가 나서면 미국 분들이 정 회장님을 지원한다는 소문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 대선은 우리 대선보다 한 달 빨리 끝나지 않습니까.”
최 상무가 은근슬쩍 치고 나온다.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겠다. 내가 미국 정계와 끈이 있다고 여기나 보다. 하긴, 케이슨 주변으로 그림을 그려 보면 그런 소설도 나오긴 하겠다.
하지만 내가 왜? 정계에 줄을 대서 위험을 가중시키는 바보짓을 왜 하나?
“말씀드렸지요. 저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연히 미국 투자자 중 한 분이 한국에 방문하셨기에 다리를 놓아 드린 것뿐입니다.”
“미 정계에서 우리 당 얘기 한마디만 나오면 되는기다. ‘남북경협으로 경제 활성화하는 공약을 지지한다!’라는 말 한마디만 나오면 되는기다. 북한 출신인 내가 그 역할에 적격이라는 말까지 나오면 판세를 뒤집을 수 있단 말이다.”
“그럴 리도 없고, 설사 그렇다 해도 판세는 안 뒤집어집니다. 포기하십시오.”
소련이 붕괴된 마당에 미국 애들이 남북 경협에 무슨 관심이 있나? 민주당이 집권하면 외려 주한미군 감축을 적극 논의한다. 북한이 관심 좀 가져 달라고 하도 뻘짓을 해 대니까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말이다.
“니 어찌 이리 매몰찰 수 있누? 내 니를 만나가 섭하게 한 일 있디가.”
“지금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치를 왜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관두십시오. 제가 회장님께 섭섭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회장님, 회사, 직원 그리고 정헌몽 사장님을 살리자고 이러는 겁니다.”
“아이다, 아이야…. 이건 그리 일 처리하는 게 아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 한번 물러서면 죽을 때까지 끌려다닌다.”
“그럼 차라리 혼자 죽으십시오. 대현그룹을 쪼개서 아드님들께 물려주시고, 대현건설 하나 제물로 바친다 생각하고 대선에서 자폭하십시오. 정치 보복으로 대현건설 하나 날리면 우리나라가 흔들흔들할 거 아닙니까. 그럼 YS도 움찔하겠죠. 그게 차선입니다.”
“니 정말로… 우예… 그리 말하누. 자폭하라고….”
“자폭은 벌써 하셨습니다. 왜 제 말씀을 자꾸 곡해하십니까!”
“으윽….”
“유 사장, 말씀이 너무 과하십니다.”
“저 그만할랍니다. 여기 내 집입니다. 초대한 적 없고요, 불쑥 찾아오셔서 음료수 한 캔은 드렸습니다. 가십시오.”
저벅저벅. 쾅!
나는 정원의 댓돌을 소리 나게 밟고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곤 정원의 전등을 모두 꺼 버리고 어두컴컴한 소파에 앉아 정원에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철컹. 부르릉.
정 회장 일행이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
“사장님, 정 회장님 가셨습니다. 최 상무님이 따로 전화하시겠답니다.”
문밖에서 이 비서의 말이 들려온다.
“전화는 왜요?”
“여론조사도 그렇고 상황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유 사장님께 회장님을 설득할 방법을 묻고 싶다고 귓속말로…. 꼭 전화받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최 상무님 설득이 먹히려나?”
“정 회장님도 어느 정도 인정하시는 거 아닐까요. 최 상무님은 회장님 속마음을 읽는 분입니다. 저처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