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도발(2) (33/104)

“누구는 차 사 주고, 누군 양복 한 벌로 퉁치냐?”

“선물을 줘도 뭐라 그러네. 그리고 너 이렇게 나랑 노닥거려도 되냐? 안 바빠?”

“친구가 곤경에 처했다는데 이 형님이 와야지. 수렁에서 건져주려고 온 거 아냐.”

재훈이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서 되도 않는 형님 타령부터 했다.

솔직히 닥터 케이슨을 마중 나갔더니 이놈과 애릭이 같이 와서 깜짝 놀랐다.

듣자 하니 내가 음원 판매 건으로 소송이 걸렸다고 하니, 아예 파이오니어 한국 지사를 차리고 음원 판매 사업에 돈을 쏟아부으려 했단다. 케이슨은 한새미디어를 통째로 삼키고, 음원 이슈는 미국 회사인 파이오니어가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전략을 세우고 한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물론, 생각보다 빨리 일이 내 선에서 끝나 버렸기에 이리 웃고 떠들고 있다.

“감사합니다, 차까지 선물해 주시고….”

여하튼 어쩌다 보니 애릭에겐 소나타 한 대를 사 주고, 재훈이에겐 양복 한 벌을 뽑아 주었다. 케이는 말 그대로 수억 원어치 쇼핑을 했고 말이다.

나는 고급 만년필과 시계 하나를 샀을 뿐이다. 전생에 정말로 탐이 났지만 가격 때문에 엄두도 못 냈던 것인데, 외려 요즘엔 검소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국에서 잘 지내시라고 선물로 드린 겁니다. 용인밸리에 빈 건물이 많으니 사무실 입주도 도와 드리죠. 파이오니어는 특별히 비싸게 입주시켜 드리겠습니다.”

“아는 놈이 더하다고, 비싸게 받아?”

“에릭한테 말하는데 왜 자꾸 껴들어? 그리고 너 미국에서 돈 좀 생겼다고 한국에서 직접 일 벌일 생각 말고, 한국 포털 사업체와 협업해. 한국 지사는 그렇게 포지션을 잡아야 해.”

포털 사업은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북미에 올인하고 다른 나라는 각기 현지 기업에 맡기는 것이 답이다. 각 나라마다 선호하는 포맷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무엇보다 한국은 아직은 돈이 되는 시장이 아니다.

에릭은 내 곁에 두고 검색 엔진과 보안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면 된다.

“둘만 얘기하지 말고 나도 좀 껴 주게. 영어로 말하면 안 되겠나?”

“아! 닥터 케이슨, 죄송하네요.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신데.”

“허허, 내가 주인공이면 안 되지. 미스터 유가 일은 이미 다 해결했던데.”

“하하, 앰팩만 잘 봐주십시오. 아무래도 케이가 한국에 있으니 세심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잖습니까.”

“걱정 말게. 내 손녀가 미국엔 이미 버지니아 트레이딩 지부를 쭉 깔아 놓고 있다네. 휴대폰도 딜링 해 본 이력이 있는데 별다른 실수는 없을 걸세.”

“오신 김에 푹 쉬다 가십시오. 한국에 처음 오셨다면 구경하실 것이 꽤나 많을 겁니다.”

“그보다 한국의 통신 회사를 만나 보고 갈 예정이네. AT&T가 일본까지 해저 광케이블을 연결하는 사업을 벌이는데, 한국 통신 회사도 이에 합류할지 의견을 물을 참이네.”

케이슨과 얘기를 시작하니 훅 하고 빨려 들어간다. 역시 파라곤 이사답게 화제 변화가 자유자재다.

“오! 벌써 광통신 실험이 완료되었나요?”

“알고 있었나?”

“아, 그게… AT&T와 베이비 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언뜻 들었습니다. 1.2Gbps급 광통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군. 최근 각종 연구소에서 대용량 광통신망 실험이 성공적이라 베이비 벨은 ADSL로 통신 사업을 시작하고, AT&T는 양방향 광통신에 과감히 투자할 생각인가 보네. 케이의 투자가 빛을 발할 시기가 왔다고 봐야지.”

“잘됐군요. 잘됐습니다.”

대략 원래 역사 대비 최소 6개월은 빨라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1993년 상반기에 해저 광케이블로 일본이 북미로 연결되고, 그로부터 1년 뒤에 부산으로 연결되는데 말이다. 재훈이가 한국 지사를 세우겠다고 날아올 만했다.

“할아버지, 이번엔 시타델이 한 방 먹은 거죠?”

케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자신의 경쟁자인 시타델 파벌이 AOL에 잔뜩 투자했으니, AT&T가 주관하는 국제 광통신 사업에 끼어들지 못했다면 케이가 온전히 점수를 따는 격이다.

“그런 셈이지. 국내 광통신 인프라는 베이비 벨이, 국제 광통신 인프라는 AT&T가 꽉 잡을 테니, AOL은 모뎀으로 PC 통신이나 해야지. 허허허!”

이 자리에선 자신이 케이 뒷배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파라곤의 이사라곤 하지만 사적으로는 케이의 성과를 높여 주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

“이게 다 수한 씨 덕분이에요. 한국에서 인트라넷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할애비도 선물을 준비했단다.”

“선물요?”

“너 말고 미스터 유한데 말이다.”

“에? 저요?”

“수한이 너 완전 대박이다. 이왕이면 63빌딩 한 채 사 달라고 해 봐.”

재훈이가 옆에서 껴들었지만 케이슨은 웃고 만다.

“돈 쓰는 재미도 있으니 빌딩은 미스터 유가 직접 사게. 나는 이참에 인맥을 선물했으면 하는군.”

“인맥이라고요?”

“혹시 정계에 끈을 대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이번 건은 꽤나 이권이 걸려 있으니 밀어주고 싶은 정치인이 있다면 그 사람 이름을 앞세워 일을 처리하지. 물론 자네의 뒷배가 되어 준다는 조건으로 말일세.”

파라곤답다고 해야 하나? 로비에 익숙한 미국인답다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을 하건 돈과 권력부터 생각한다.

하나 나는 최소한 한국에선 그러고 싶지 않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보복이 이어지는 4류 정치판이 아닌가. 외려 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에 줄을 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파라곤 단독으로 박준태 의원을 통해 YS와 줄을 연결하십시오. 파트너 사업자는 KT로 삼으시고요. 제 이름은 은근슬쩍 흘리는 정도만 해 주십시오.”

원래 역사가 내가 말한 대로 되는 데다 여태 내 사업에서 의도치 않게 SJ 쪽으로 콩고물이 많이 떨어졌으니 이젠 KT도 좀 먹는 것이 좋겠다.

“으흠, 좀 의외로군. 정치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니.”

“제가 좀 정치 알러지가 있어서요(대한민국 정치가 좀 그래요).”

“흠! 정치를 이용할 생각은 없지만 차기 대통령은 YS라고 생각한다?”

“그럼요. 차기 미국 대통령이…. 아, 잠시만. 파라곤은 누구에게 줄을 섰죠?”

그러고 보니 나는 올 11월에 벌어지는 미국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도 알고 있구나.

“으음?”

내 말에 케이슨과 케이가 동시에 눈을 반짝거렸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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