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도발 (32/104)

제5장 도발

비슷한 시각.

서울 모처의 한새미디어 본사 회의실. 임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이관재 사장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 작은 회사 하나 어쩌질 못해서 나까지 참석시킨 겁니까?”

“디지털 캐스트가 돌연 특허 공유를 하지 않겠다고 하기에….”

“눈치챈 겁니까? CD플레이어 사업에 영향이 있는 겁니까?”

“눈치를 챈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체적으로 특허 제품을 출시하겠다며 특허 공유를 하지 않겠답니다.”

“이런. 어떻게 일 처리를 했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잠자코 들어 주고 있었습니까? 기술 말고는 쥐뿔도 없는 회사가 제품을 출시해요? 누구 마음대로? 내가 CD 공장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 돈뿐이에요? 소니와 구동 칩 계약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압니까!”

“으음….”

임원들은 난감한 듯 신음성만 낼 뿐이었다. CD플레이어를 개발하는 와중에 디지털 캐스트라는 회사가 뮤직 플레이어에 강력한 특허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특허 공유를 목적으로 꼬드기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결국 특허를 무시하고 제품 출시를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대뜸 정부 여당에서 선거 공약이라도 되는지 첨단 기업 지원책이니, 중소기업 보호책이니 하며 중소기업의 특허를 보호하겠다고 공문을 잔뜩 보내온 것이다. 자칫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큰일이다.

쾅!

“에이,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다 월급 도둑들인 거 아십니까? 알아요!”

“크흠! 드릴 말씀이….”

“됐고! 그냥 특허 무시하고 CD플레이어 출시합시다. 광고 때리고! 정 문제되면 공무원들한테 돈이나 좀 찔러주고.”

“사장님, 그게… 조금 우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려는 무슨! 그따위 회사 그냥 무시하라고요! 특허 들이밀지 못하게! 돈도 없는 놈들이 뭔 사업을 한다고 특허를 내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게 아니고, CD플레이어보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든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용인밸리 사장 아시죠? 그 스마트 클라우드 어쩌고 하는 사장. 그 양반이 투자를 했다는 소문이….”

“뭐? 더 나은 제품? 지금 CD플레이어보다 더 나은 제품이 어딨다고! 혹시 그놈들이 먼저 CD플레이어 내놓겠다는 거 아닌가? 그놈들이 뭘 내놓든지 간에 최대한 방해하고 우리 거부터 시장에 내놓을 생각을 해야지, 이 양반들아!”

“원래 휴대형 CD플레이어는 디지털 캐스트의 아이디어입니다. 연구 단계였지만 시제품을 만든 이력도 있는지라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라이선스를 맺는 것이 어떻습니까?”

쾅!

“닥쳐요. 한새미디어는 연매출이 6천억 이상인 대기업이에요. 신제품을 내면서 한낱 중소기업에 로열티를 줘요? 매출 2~3프로를 공짜로 떼 줄 생각부터 하다니, 무슨 장사를 그따위로 합니까! 더욱이 이건 대박 제품이 확실하다고!”

이관재 사장은 정말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병석에 누워 오늘내일하는 부친의 뒤를 이어 한새미디어를 맡아 첫 번째로 내는 신제품인데 라이선스를 주고 베낀 제품이라고 광고할 일 있나. 이건 오로지 자신의 지휘하에 자체 개발한 제품이 되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게다가 그놈들 제품 발목 잡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음반사에 압력을 가할 생각은 왜 못합니까? 머리가 그리 안 돌아갑니까?”

“아! 그런 방법이!”

이관재 사장은 남의 발목을 잡는 데는 확실히 능력이 있었다. 한새미디어 임원들도 눈을 번쩍 뜨고 박수까지 치며 화답했다. 아무리 뮤직 플레이어를 내놔 봐야 CD를 찍어내는 자신들의 입김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회의실에 모인 한새미디어 사람들 누구 하나도 뮤직 플레이어 저장 매체가 CD가 아닐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지 못했다. 휴대용으로 개발한 3인치 CD로 200메가를 저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보다 나은 사양의 휴대형 뮤직 플레이어는 없을 거라고 일찌감치 단정해 버린 것이다.

“다음 달 초부터 CD플레이어를 출시할 테니, 단단히 준비하시고 광고부터 시작하세요.”

“옙, 사장님.”

    • *

-한새미디어의 CD맨이 출시되었습니다. 공부하면서도 듣고, 운동하면서도 듣고,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세요. 출시 기념으로 100명을 추첨해서 콘서트 티켓도 보내 드린답니다.

TV에서는 연신 CD플레이어 광고가 방송되고 있었다. 내가 회의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케이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앰팩을 만지작거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비슷한 제품이 먼저 나와 버렸네요.”

“CD플레이어야 예상 가능한 제품이잖아요. 외려 시장 상황이 나쁘지 않으니 우린 앰팩만 잘 출시하면 됩니다.”

“사장님, 앰팩 잡음 문제는 해결되었고, 컴퓨터 전용 잭도 잘 동작합니다. 기술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개발팀, 수고 많았어요. 디지털 캐스트와 협업은 어땠나요?”

“하도 열성적이라…. 밤샘을 저희보다 많이 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습니다.”

김 과장이 혀를 내두를 정도면 정말이지 디지털 캐스트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에 혼을 불태운 것 같다.

“특허와 음원 다운로드 보안은 잘 체크했죠?”

“문제없습니다. 앰팩 관련 특허는 모두 출원했고, 디지털 캐스트 관련 특허는 지분 정리까지 끝났습니다. 다운로드 보안은 앰팩 시리얼 넘버를 집어넣어야 풀리도록 조치했습니다.”

“좋네요. 개발팀은 그렇고… 케이, 음원 계약은 어찌 되었지?”

“문제없어요. 음반사들이 아티스트와 맺는 기존 계약은 카세트테이프, LP 또는 CD같이 앨범 판매와 콘서트에 대한 규정이 전부라, 음원 다운로드 계약을 따로 맺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요. 아티스트의 의견에 따라 개별 계약을 하거나, 음반사를 중간에 끼고 신규 계약을 맺었어요. 법적 문제는 없다고 보시면 돼요. 음원 리스트는 계약서 뒤에 따로 정리해 뒀어요.”

변호사인 케이가 법적 문제가 없다면 없는 거다. 그리고 첨부 자료로 되어 있는 리스트를 보니 서태지와 아이들, 변진섭, 신승훈, 김건모 등등 나 또한 귀가 닳도록 틀었던 가수들의 노래들이 잔뜩 열거되어 있었다.

“출시 직후에 서버가 터질 가능성은 없나요?”

“없습니다. PC 통신 업체와 SJ와 KT까지 모두 서버를 서너 대씩 사 가지고 갔습니다. 그쪽 담당자도 음원 자료는 언제 줄 것이며, 앰팩 출시는 대체 언제 하냐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전화가 옵니다.”

통신 업체도 준비가 다 되었군. 우리 사업 모델이 시중에 알려지면 그쪽 통신사와는 절대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정보는 상당히 잘 지켜지고 있었다.

국내 통신사와도 베이비 벨과의 계약 조건과 똑같이 우리 22%, 통신사 28%, 아티스트 50%로 협의했다.

“케이, 한국 통신 회사에 ADSL기술은 좀 흘렸나요?”

“당연하죠. 베이비 벨도 기술 이전을 허락했으니까요. 앰팩 사업 추이를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할 것 같아요.”

나로 인한 나비효과인지 전화선을 이용한 고속 인터넷 기술인 ISDN 통신이 대한민국에서 벌써 자리를 잡았다. 본격적인 고속 인터넷 기술인 ADSL 통신도 전화선을 이용한 기술이니 돈만 있으면 구현 못 할 리 없다.

기술 자체는 미국에서 1988년에 이미 개발 완료된 데다 전화 회사인 베이비 벨이 기술 이전을 한다면 땅 짚고 헤엄치기다.

“그것도 좋은 소식이군요. 좋습니다. 출시는 차주에 바로 하죠. 우리는 우리답게 TV 광고 말고 요즘 뜨고 있는 인터넷 광고로 해 보죠. 초도 생산은 20만 대. 가격은 23만 원으로 하겠습니다.”

“생산 문제없습니다.”

“헉! 사장님, 원가가 28만 원인데. 어떻게 5만 원이나.”

나운영 부장은 반색한 반면 권재욱 부장이 깜짝 놀랐다. 두툼한 원가 분석 자료를 내놓기도 전에 내가 질러 버리니 그럴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많이 팔릴 테니 원가는 쑥쑥 떨어질 겁니다. 그리고 적자는 안 날 겁니다. 파이오니어한테 개당 5만 원씩 받으면 되지요.”

“아하! 보조금 개념을 말씀하시는군요. 기가 막힌 생각이십니다.”

당연히 받아야지. 앰팩이 없으면 파이오니어가 이 장사를 어찌 하겠나? 일단 판을 키우는 측면에서 재훈이도 당연히 동의할 것이다.

사실 녀석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앰팩이 대박을 쳐야 상장할 때 파이오니어가 더 대박이 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다. 혹시나 모른다면 윌슨이 가르쳐 주겠지.

“실제로 파이오니어와 직접 주고받을 순 없는 돈이니, 파라곤 투자비를 갚는 용도로 적립했으면 합니다. 케이, 가능하죠?”

“호호, 가능하죠. 좋은 아이디어네요.”

이면 계약은 사업에서 언제나 있는 일. 어쨌든 세금은 내는 일이니 불법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내 가슴속의 알량한 도덕심도 고개를 끄덕인다.

“자, 앰팩을 다음 주부터 출시합니다.”

“광고 문구는 어찌할까요? 생각해 두신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건 권 부장님 담당이죠.”

“인생은 제비뽑기! 어떻습니까?”

“인생은 제비뽑기요?”

“예. 앰팩의 기능 중에 영업맨들이 최고로 뽑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랜덤 재생이랑 무한 반복이죠. CD플레이어는 불가능하니까, 우리 제품의 차별화 포인트 입니다. 게다가 광고 문구에 어울리게 광고를 클릭하면 경품에 응모되도록 하면 더욱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21세기 사람인 나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기능이라 개발팀에 주문했던 건데, 듣고 보니 기존 제품에선 구현하기 힘든 기능이다.

그리고 ‘인생은 제비뽑기!’라니 묘하게 클릭하고 싶게끔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다 경품 추첨까지 연계하다니 영업팀장답다. 내가 사람을 잘 뽑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것도 제비뽑기이긴 했네.

“하하! 나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차주 출시 일정도 권 부장님이 정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자! 이젠 각자 행운을 빌어 보죠.”

나는 기분 좋게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이때만 해도 앰팩 플레이어가 큰 사달을 일으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 *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딩딩, 디디딩, 딩딩~

거리에서 연신 스피커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곁에서 미래의 춤꾼들이 회오리춤을 연습하며 즐기고 있다. 스피커 끝에 앰팩 하나를 달아 놓은 것만으로 콜라텍 저리 가라다.

“이야, 사운드 정말 깨끗한데? 이게 앰팩이라는 거냐?”

“씁! 야, 손대지 마라. 때 탄다.”

“얀마, 만져 보는 것도 안 되냐?”

“안 된다니까. 요즘 돈 주고도 못 사.”

“얼마나 비싸길래 손도 못 대게 지랄이야?”

“마, 비싼 게 아니라 정말 못 산다고. 중고도 없어. 몰라? 이거 불법이라고 난리 치고 있잖아.”

“춤추고 노는 게 무슨 불법이야?”

“아이, 말귀를 못 알아듣네. 이 앰팩 판매가 불법이라잖아. 그래서 시장에서 야매가 아니면 구하지도 못해.”

길거리에서 내 제품이 불법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속이 쓰리다. 그래도 내 제품이 인기가 있긴 있나 보다. 구멍가게에서 잠시 음료수나 한 캔 사려고 멈췄더니 이런 장면을 볼 수도 있고 말이다.

나는 한 달 만에 20만 개의 불법 제품을 시장에 뿌린 혐의로 소송을 당해 법원 출두 명령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사장님, 여기 박카스요.”

끼릭!

“이 비서도 한 병 해. 길이 많이 막히네.”

꿀꺽꿀꺽.

“법원 가는 길이 이리 막히다니. 기자들이 엄청 몰려오긴 하나 본데요.”

“참 나, 이거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부르릉.

차에 올라타 법원으로 향했다. 연신 에어컨을 켰지만 늦더위 때문인지 속이 타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넥타이를 맨 목이 갑갑하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랬나 싶다.

한새미디어가 MP3플레이어를 그리 발목 잡았던 건 자사에서 신제품을 출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CD플레이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이래저래 정보를 모아 보니, 구미와 창원에 대규모 CD롬 공장을 세웠고, 생산량이 연간 2억 장 정도란다. 투자비만 따져도 수천억이었을 테니 MP3를 백만 대 단위로 팔 것이 아니었다면 고사시켜 버리는 게 차라리 났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 나를 공격하는 행태로 보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싶다.

솔직히 한새미디어가 CD플레이어의 기술을 도용했다고 나에게 소송을 걸어왔다면 디지털 캐스트의 특허를 들이밀며 외려 역공을 했을 텐데, 예상과는 달랐다. 한새미디어는 내가 기존의 음반 계약을 악의적으로 축소 해석해서 음반사와 불법적으로 제2의 음원 계약을 체결했다며 몰아갔다.

즉, 음반 CD와 CD플레이어의 매출 감소분이 새로운 음원 계약 때문이라며 배상을 요구했다.

한새미디어가 음반사와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적극 이용한 소송이라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론 일본이며 미국에 대규모 CD플레이어 수출 계약을 맺었는데 그게 파투났다며 심각한 국부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언론사 기자들을 동원해서 여론을 부추겨 대니 정말 대기업답다고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수출은 한새미디어만 하나? 앰팩을 팔아도 수출이잖나. 그리고 진정 국익에 도움 되려면 CD라는 사양 산업엔 투자하면 안 되는 거다. 역사상 이처럼 짧은 수명을 가진 저장 매체는 없었다고.

끼이익.

우르르르르.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법원 입구에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기자들이 몰려왔다. 선거 유세장이나 갈 일이지 왜 여기에 이리 많이 몰린 거야. 한새미디어에서 손을 썼나 보다. 방심했다.

“유수한 사장님, 음반사와 불법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상도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불법 계약이 아닙니다. 법정에서 가려질 일이니 그 말씀 취소해 주십시오.”

“앰팩은 적자를 보면서까지 미국 인터넷 회사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백한 국부 유출 아닙니까?”

“말할 가치도 없군요. 그 말씀을 외국 언론이 들으면 앰팩은 덤핑이라고 수출 길이 막힙니다. 그건 국부 손실 아닙니까? 기자님, 지금 말씀 책임질 수 있어요?”

“크음! 유수한 사장님이 파이오니어의 실질적인 오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화 반출 측면에서….”

“비키세요. 지금 사장님 법정에 출두하셔야 합니다.”

이 비서가 앞에서 기자들을 헤치고 나갔다. 이 비서 어깨와 허리를 파고들며 사방에서 마이크가 쇄도했다.

“대현의 가신으로서 의도적으로 신성의 계열사를 공격하는 거 아닙니까? CD 사업은 첨단 산업입니다. 국가에 기여하는 바가 큽니다.”

‘대현의 가신? 언제적 얘기를 여기서 들먹여?’

어이없는 말도 튀어나온다. 대체 이따위 시나리오는 누가 써 준 거야?

“정권의 비호가 없다면 신생 기업이 대기업을 어찌 이렇게 과감히 공격합니까? 누가 배후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내 배후는 회귀한 내 기억이다. 정권 따위가 아니고.’

“한새미디어 CD 공장이 있는 구미와 창원의 표심을 흔들려는 목적 아닙니까? 사업 시점이 절묘합니다.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누구를 지지할 목적입니까?”

‘어이가 없다. 선거 때는 제품 출시도 못 하냐?’

시나리오가 점입가경이다. 어째서 정치를 여기다 엮어 대나.

벌컥!

“밀어! 밀어! 기자들 막으라고! 어이, 어서 들어와요. 어서요!”

법원 경비대가 나와 이 비서를 휙 낚아채 안으로 들이고는 문을 걸어 잠가 버린다.

내 양복은 너덜너덜해지고 머리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놈의 1990년대 한국은 정말이지, 난장판이다.

저 멀리 한새미디어 사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를 비웃어 댄다.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던 케이가 나타난다.

“저놈이 이관재라는 놈인가?”

“예, 맞아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했잖아, 케이.”

“죄송해요. 법적으론 전혀 문제가 없는데 언론 플레이엔 당할 재간이 없네요. 실은 이게 기소가 된 것부터 말이 안 되는 거라서요. 죄송해요.”

케이에게서 죄송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을 줄은 몰랐다.

-○○○건 관련자 분들께서는 법정으로 속히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에서 법원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

“수한 씨, 가셔야 해요.”

“내가 알아야 할 사항은?”

“일단 기소 자체가 무효라고 반격을 할 거예요. 테이프, CD, LP에 대한 계약이 각각 따로 유효한데 음원 다운로드만 CD 권리를 침해한다니 말이 안 되죠.”

“…이거 돌아가는 판을 보니 논리적인 대응으로는 해결이 안 돼. 일단 소송을 교착시키고 있으면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소송을 교착시켜요? 어떻게요?”

“그거야 당신 몫이지. 시간을 벌어 줘. 최소한 일주일.”

“알았어요. 어떻게든 해 볼게요.”

뚜벅뚜벅.

“이 비서, 저 밖에 때 좀 덜 탄 것 같은 기자들 몇 명 골라서 수정각으로 데리고 가 줘요.”

“수, 수정각요?”

“내 이름 대고 술 좀 마시고 있어요. 나는 케이 차로 가죠.”

“옙!”

언론 플레이, 내가 못 해서 안 하나? 할 필요가 없어서 안 했지. 한새미디어, 너 죽었어. 감히 날 건드려?

    • *

“스마트 클라우드는 음반사의 저작권을 악의적으로 해석해 음반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존 카세트테이프, LP, CD 업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는 넓은 의미의 상도의뿐 아니라 실질적인 음반 계약을 위반하므로 엄중히 처리해야 합니다.”

“판사님, 이의 있습니다.”

“피고 측 변호사 발언하십시오.”

“피고라 불리는 것 자체가 법리에 맞지 않습니다. 저작권은 실소유주인 아티스트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고, 저희 스마트 클라우드는 그 법리에 근거해 음원 판매 수익의 50퍼센트를 배정하는 등 기존 계약에 비해 오히려 아티스트의 권익 보호에 힘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새미디어는 음원 판매에 대한 권한 자체가 없으니 소 제기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CD와 CD플레이어 판매는 음반사의 판매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앰팩의 판매권 계약은 동일한 소비자에게 동일한 물건을 팔도록 만든 악질적인 이중 계약입니다. 불법입니다.”

“그럼 영화와 비디오 판매권은 왜 나눕니까? 똑같은 영상을 각기 다른 플랫폼으로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소비자의 자유를 판매자가 제한하는 것은 독점이자 불법입니다.”

“영화사가 비디오사에 권리를 침범당합니까? 우린 당신들 앰팩 때문에 심각한 경영 손실을 입었단 말입니다. 수출까지 막혔으니 수백억은 배상해야 할 겁니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입니까? 외려 스마트 클라우드가 수천억짜리 계약을 놓치게 생겼습니다. 북미 시장에 CD플레이어가 한 개라도 수출되었습니까? 앰펙은 20만 대나 판매되었습니다. 지금 멈추면 엄청난 국부 손실이에요.”

“수천억 손실은 무슨. 되레 CD라는 첨단 사업이 공단을 이루고 있는데 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그게 수천억 손실입니다.”

탕! 탕! 탕!

“조용히 하십시오. 발언권도 없이 서로 싸우다니, 법정을 모독할 셈입니까!”

법정이 양측 변호사로 인해 소란스러워지자 판사가 의사봉을 마구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지금 몇 번째 저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케이가 적극 싸우고 있지만 이거 소용없는 일이다. 민사 소송의 특성상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

현재 소송이 진행되고 있어 앰팩이 수출되지 못하고 세관에 묶여 있는 것이 나에겐 치명타다. 소비자들이 물건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면, 정말 불법 제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한새미디어가 노리는 점이 그것이다.

“본 사안은 피고의 음원 계약이 원고에 대한 경영 손실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그 계약의 고의성 여부에 따라 법적 해석이 달라집니다. 양측은 각 주장에 타당한 증거를 보완하여 4주 내로 법정에 제출하기 바랍니다. 이에 본 법정은 오늘 심리를 종료하며, 10월 ○○일 심리를 속행토록 하겠습니다.”

탕! 탕! 탕!

케이는 판사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뉘앙스가 한새미디어 쪽으로 훅 하고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다. 치고받고 싸운 덕분에 4주라는 시간을 벌었으니 반격을 해 나가면 된다.

“케이, 수고했어.”

“죄송해요. 판사부터 벌써 한새미디어 손을 들어 주는 형국이라니….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네요.”

“4주 정도면 충분해. 이제부턴 내게 맡겨.”

“차가 필요하다고 했죠? 저는 따로 갈게요.”

케이는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내 손에 차 키만 얹어 주고 어딘가로 가 버렸다. 걸어가는 폼이 어디서 소주 한 병 나발 불 것 같은 느낌이다.

내게 법적 문제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어이없는 소송을 당하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모양이다.

나는 기자들을 피해 조심스레 지하 주차장으로 빠져나와 수정각으로 차를 몰았다.

    • *

디디링, 띠딩~

수정각에 들어서니 시원스레 문을 열어 놓고 국악을 빙자한 팝송 연주를 곁들여 술판을 벌이고 있다. 내가 정원으로 들어서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자 최 마담이 조르륵 달려와 내 손목을 잡고 한쪽으로 데려간다.

“유 사장님, 이쪽이에요. 안 그래도 예약도 없이 기자들이 몰려와서 깜짝 놀랐어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저기 기자들 중에 한새미디어를 엮을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역시 한새미디어 건이었군요. 유 사장님과 한판 벌이고 있다면서요.”

“쩝! 꽤나 재미있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불쾌했다면 죄송해요. 여하튼 그런 일이라면 저기 탁자 끝에서 세 번째 앉는 키 작은 사람 보이시죠? 한마음신문사 도한솔 기자라고 하는데, 대기업 비리라면 이를 바락바락 가는 기자예요. 아버지가 한때 신성에 부품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했다는데 폭삭…. 여하튼 사연이 있나 봐요. 호호.”

“쓸 만한 정보네요.”

“아! 잠깐만요. 그리고 저기 식탁 중앙에 있는 기자 있죠? 중도일보의 염중식 기자라고 하는데 조심하셔야 돼요. 한새미디어는 범신성 일가이니 중도일보는 얘기를 들어주러 온 게 아니고 파투 내려고 왔을 가능성이 높아요.”

“고마워요.”

최 마담이 공략 대상과 주의 대상을 동시에 알려 준다. 중도일보는 신성그룹을 대변하는 언론사이니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드르륵.

“아이고! 기자님들, 식사는 어째 괜찮으십니까?”

“유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원한 맥주부터 한 잔 하셔야죠.”

쿨쿨쿨쿨. 쭈르륵, 쭈룩!

내가 의도적으로 식탁 중앙의 상석을 피해 도한솔 기자 맞은편에 털썩 앉으니 중도일보의 염중식 기자가 옆에 앉으며 맥주잔을 가득 채워 준다.

나는 넘쳐흐르는 거품을 쭉 빨아 마시며 너스레부터 피웠다. 이래저래 ‘어느 일보 기자 누구입니다.’라고 하며 통성명이 한참 이어졌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법정에서 하도 시달려서…. 여하튼 언론에서는 이 일을 공정하게 다뤄 주셔야죠. 저 같은 신출내기 사업가는 이러다 말라죽겠습니다.”

“면전에서 말씀드리긴 뭐합니다만, 인지상정이라고 해야겠지요. 새한미디어가 CD 공장에 수천억을 들인데다 몇 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CD플레이어를 출시했는데 앰팩에 훅 밀리게 생겼지 않습니까.”

염중식 기자가 첫마디부터 내 속을 긁어 댄다.

“하하! 앰팩 때문이 아니라 CD라는 저장 매체가 오래갈 제품이 아닙니다. 대형 전자 회사들이 왜 투자를 안 하겠습니까? 반도체 가격이 싸지면 순식간에 사라질 사업이니 투자를 안 한 겁니다. 앰팩이 CD 사업을 방해한 게 아니라 이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이건 미래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꽤나 있었다. 신성의 이 회장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신성은 한새미디어에 대규모 자금을 빌려 주면서까지 사양 산업인 CD에서 손을 떼고 당장 사업 전환을 하라며 강력하게 요청했다. 범신성 일가의 수장이자, 반도체를 잘 아는 IT 전문가로서 조언을 한 것이다.

한데 한새미디어는 미디어 사업은 자신들의 영역이라며 사업 전환은커녕 CD와 비디오테이프 사업에 이 회장의 돈을 투자해 버렸다. 이 회장은 이에 격분해 IMF가 터지자마자 은행보다 먼저 채권을 회수하는 방법으로 한새미디어를 박살 내 버렸다.

이 회장은 한번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은 친인척이고 뭐고 간에 응징하는 양반이다. 그 말인즉슨, 지금은 신성이 한새미디어를 어느 정도 밀어주고 있는 형국이지만, 내가 조금만 반격에 성공하면 내게 줄 설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중도일보도 마찬가지다.

“그런 기술적 이슈로 일이 벌어진 게 아니죠. 언론이 이참에 스마트 클라우드 길들이기를 하려는 거죠.”

“…길들이기라고요?”

“후후, 한국 사회가 그렇잖습니까. 싹수가 보이는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길들이고, 대기업으로 성장할 싹수가 보이는 기업은 정부와 언론이 길들이지 않습니까. 스마트 클라우드가 선거철에 훅 하고 떠오르는 전략으로 정부의 길들이기는 피했다손 쳐도 언론이야 뭐 못 할 거 없잖아요.”

한마음신문사의 도한솔 기자가 느물거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한새미디어는 이미 언론사와 긴밀한 관계라는 거네.

하긴 한국 사회에서 신생 기업이 대기업 그룹에 끼어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지.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한창 커 나가는 기업들이 대기업들 견제에 무너진 경우는 셀 수도 없다.

“호호호! 주관자께서 자리하셨으니 서비스를 준비해야죠. 저희 집의 자랑인 홍주가 어떤가요? 서비스이니 맘껏 드셔도 된답니다.”

최 마담이 살포시 들어와 때깔 좋은 홍주를 쫙 깔아 댄다. 나를 비롯해 기자들의 잔에 홍주를 그득그득 따른다.

서비스라곤 하지만 내게 술값을 청구하겠지. 기자들 성향을 알려 준 대가이기도 하고. 서비스라는 말을 강조하며 기자들에게 뇌물을 먹여 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잊지 않는다. 최 마담이 보기엔 이런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거군.

“하하! 장사꾼이라면 이래저래 길드는 건 당연하죠. 뭐, 적당한 선에서 가능하다면야 신문 광고도 해 보고 싶고, 특종도 간간이 물어다 드리고….”

나를 적당한 선에서 길들여 보라고 툭 하니 말을 던져 보았다. 여기 온 기자들은 내게 호의적인 양반들이 없다. 기껏 해 봐야 중립이 최선일 것이다.

“오오. 특종이라. 이 소송에 이면이라도 있는 겁니까?”

기자들이 귀를 쫑긋거린다. 특히, 중도일보 염중식 기자는 광고라는 말에 눈빛을 달리하더니 입으로 특종이라는 말을 꺼낸다.

이런 자리에 나온 기자들이면, 아무리 때가 덜 탔다고 해도 각 언론사에서 한 끗발 하는 양반들이다. 특종에, 광고에, 공짜 술까지 얹어 가야 알찬 하루를 보내는 거다.

“이면이랄 게 있나요? 중도일보 기자시면 다 알고 계시잖아요. 신성이 한새미디어에 대규모 대출을 해 준 거. 구미나 창원 공장에 얼마나 들어갔나요?”

“으음,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신성이 한새에 대출을 해 줘요?”

“어, 그래요? 그럴 리가. 한새미디어가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해도 수천억이나 되는 돈을 전부 은행에서 빌릴 수는 없었을 텐데. 2천억 정도는 신성에서 제공한 거 아니었어요?”

“…….”

미래에서 온 나는 대충 알고 있지. 2천억이란 숫자는 정확하지 않아도, 신성이 돈을 빌려 준 것은 확실하다. 그것도 신성생명이라는 보험회사를 통해서 말이다. 은행이 아니기에 엄연히 대출 규제가 있는 회사인데 그 정도 돈을 일개 회사에 빌려 줬다면 불법에 가깝다.

“흐흐흐, 불법 대출이 껴 있어요? 한새미디어가 이리 나설 수밖에 없네. 안 그래도 범신성 일가인데 그룹이라는 소리도 못 듣고 있어 속 쓰릴 텐데.”

도한솔 기자는 재미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낄낄거렸다. 염중식 기자는 표정이 굳어 갔고 말이다. 뭇 기자들은 이 판 자체가 재미난지 홍주로 입술을 적셔 가며 지켜보고 있다.

다들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신성에서 대출까지 얻어서 공장에 수천억을 투자했는데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순익은커녕 회사 존립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한새미디어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유 사장님, 그런 확인되지 않은 말씀은 조심하셔야죠. 자칫하면 한 방에 훅 갑니다.”

“에휴! 염 기자님, 왜 그러세요. 앰팩 출시가 타격받아도 한 방에 훅 가긴 매한가지죠.”

사실이다. 앰팩은 일개 뮤직 플레이어가 아니다. 나는 지금 10억 불을 투자받아 반도체 공장까지 세운 놈이다.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고 당장 PC메이커들이 메모리를 공급하라고 오더를 주나? 턱도 없는 소리다. 그런 생각이었다면 파라곤도 투자를 할 리 없다.

앰팩으로 인터넷 사업을 활성화시키고, 인터넷 사업이 확장되면 서버와 핸드 터미널이 더 많이 팔리고, 그 와중에 각 제품에 반도체를 자체 공급해 반도체 사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놔야 하는 거다. 핸드 터미널과 인트라넷은 그 가능성을 보여 준 거고, 가능성을 넘어 꽃을 피우기 위해선 앰팩의 성공이 내게 필수 불가결이다.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이 단숨에 IT 기업 중에 선두로 치고 나간 사업이라고. 그걸 CD 따위에 발목 잡힌다고?

“뭐, 지방 방송은 그쯤 하시고요. 이왕 술까지 얻어먹었으니 말씀드려 보면, 지금 한새미디어에 딸린 식구들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구미에 2천, 창원에 2천입니다. 서울에 본사까지 합치면 6천은 족히 될 겁니다. 거기에 딸린 중소기업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이거 앰팩의 불법 판매 때문에 CD 공장 쓰러지면 길바닥에 나앉을 사람들 수두룩해집니다.”

“으흠, 웃을 일은 아니지만 웃음이 나오네요. 길바닥에 나앉지 말라고 이 짓거리 하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요?”

“우리도 같은 미디어 사업인데 단박에 ‘CD 망해라!’ 할 수도 없어서, 앰팩만 출시한 거 아닙니까. 앰팩을 만들었는데 CD플레이어는 못 만들었을 것 같습니까? 원천 기술은 우리한테 있는데? 허니 한새미디어는 음악 CD로 돈 벌 생각 말고, 컴퓨터 CD나 영화처럼 대용량 저장 매체가 필요한 영역에서 돈을 벌어야죠. 그리고 내가 아니더라도 CD는 곧 사양 산업이 될 테니까 사업 전환을 해야죠. 앰팩을 한 번이라도 보기만 하면, 설령 공짜로 준다고 해도 CD플레이어를 쓰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한새미디어는 운이 좋습니다. 몇 년 뒤에 앰팩이 나왔어 봐요. 사업 전환할 시간도 없이 한 방에 무너졌을 겁니다.”

내 말은 지극히 사실이다. Flash 메모리가 조만간 등장할 테고, USB 포트마저 실용화되면 이동형 저장 매체는 삽시간에 CD에서 반도체로 옮겨 가게 될 테니까. 한시라도 빨리 사업을 전환하는 게 한새가 덜 다치는 방법이다.

“이야, 너무 쉽게 말씀하시네요. 그 말씀 들으면 한새미디어 사장이 펄쩍펄쩍 뛰겠어요.”

“하하! 저도 지금 펄쩍펄쩍 뛰고 있잖습니까. 말씀은 이리 드리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갑니다.”

나는 짐짓 웃어 보였지만 솔직히 짜증을 넘어 속이 탄다. 21세기엔 이슈도 되지 않을 일이 1990년대 한국에선 소송까지 벌어진다. 그만큼 1990년대의 한국 사회는 재계조차 정부에 통제되고, 대기업이 신생 기업을 압박하는 데 언론마저 동조한다.

“불법을 저지르신 마당에 농담도 잘하시네요.”

“염 기자님, 말 좀 가려서… 하시죠. 불법이라니요. 그게 다 한새미디어가 기자분들을 호도한 거죠. 미국에서도 똑같이 앰팩을 풀어도 아무 문제 없는데 한국에서 무슨 불법이라고. 외려 음반사와 노예 계약 중인 가수들이 풀려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되었지.”

“노예 계약이라고요?”

“말이야 바른말이지, 가수들이 음반사와 노예 계약 없이 앨범 내기 어디 쉽습니까? 앰팩이 지원하는 인터넷 기반의 음원 판매는 다르죠. 능력 있는 가수들이 팬들에게 직접 선택받을 수 있단 말입니다.”

기자들에게 앰팩이 이끌어 낼 시장 변화를 깨닫게 해야 한다. 일부 기자들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다. 내친김에 말을 더 이어 보았다.

“그것뿐입니까? 저희 스마트 클라우드는 용인밸리에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을 입주시켜 대기업의 지배 구조에서 벗어날 기회를 적극 제공하고 있지요. 앰팩이 그 첫 번째 시도였는데, 이런 대박 프로젝트마저 날개가 꺾여 버리면 대한민국에서 기술 개발에 인생을 걸어 볼 사람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앰팩이 스마트 클라우드에서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니었나요?”

도한솔 기자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질문을 한다. 중소기업 얘기가 나오니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내 사업 형태가 그의 성향에 잘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이 협업했는지 모르셨습니까? 음원 재생, 액정, 사출 금형, 패시브 소자, 기판업체 등등 무수하죠. 그 양반들이 투자한 개발비도 만만찮죠. 저희 회사 직원과 더불어 수천 명의 밥줄이 걸린 일입니다. 기술 개발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인데요. CD나 마구 찍어내는 공장과는 차원이 다르죠.”

“수천 명. 그렇군요.”

“휴우, 한새미디어가 기술을 베낀 것도 참아 줬더니… 이리될 줄 알았으면 CD플레이어가 출시되었을 때 강력 대처를 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기술을 베껴요? 한새미디어가 말입니까?”

도한솔 기자가 어느새 조금 호의적으로 변했다.

여태 대기업의 형태와는 좀 다르지? 앞으론 더 달라질 거다. 내 목표는 재벌이 아니라 귀족이거든.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지며, 부를 세습해도 사방에서 찬사가 이어지는 귀족 말이야.

“CD플레이어의 원천 기술은 저희가 가지고 있죠. 우리도 앰팩을 출시하는 마당에 굳이 사달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봐줬는데 역공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요.”

“답답하네요. 제대로 말씀을 해 주셔야 저희가 알아듣지요.”

도한솔 기자 말고도 기자 여럿이 순식간에 탁자 끝으로 몰려든다. 눈을 반짝거리며 수첩을 꺼내 드는 자들도 있었다.

불법 대출, CD 산업 전망, 음원 계약의 불합리성에 이어 기술 유출까지 시리즈로 언급하니 꽤나 기삿거리가 나오지?

적당히 나눠 가지면 되는 거다. 그리고 내 앰팩 사업이 국내 중소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수차례 인식시키니, 이 소송은 대기업끼리의 저급한 시장 지배권 싸움이 아니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착한 놈이야. 내가 착한 놈이라고. 너희가 이 정보를 뿌려 주면 결국 한새미디어는 흔들린다. 그다음에 내가 신성의 이 회장을 타고 들어가 치명타를 가하면 된다.

    • *

“제가 인터넷 기술로 투자 유치한 것은 다들 익히 아실 겁니다. 한데 인터넷 자체로는 그다지 돈이 되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이거 웬걸, 한국에 디지털 캐스트라는 중소기업에 음원 재생 기술이 있더군요. 우리 회사 칩과 합치니 단박에 앰팩이라는 제품이 탄생한 거 아닙니까.”

“근데 그게 한새미디어와 무슨….”

“문제는 한새미디어의 CD플레이어가 실제론 디지털 캐스트의 기술을 훔쳐서 만든 제품이라는 거죠. 그걸 숨기려고 이 소송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해외 유수 업체들이 라이선스를 받으려고 원천 기술이 누구 건지 조사할 거 아닙니까. 그럼 CD플레이어가 진짜 불법 제품인 게 자연스레 밝혀질 텐데… 휴우….”

“그럼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요. 사필귀정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세관에서만 풀리면 미국 쪽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질 텐데 한새미디어가 발목을 잡네요. 어이없는 횡포입니다.”

한새미디어는 내 말이 헛소리라고 반박하지 못한다. 그래서 CD플레이어의 기술 유출이 아니라, 음원을 가지고 이슈를 삼은 거다.

“한새미디어답네요. 기술을 훔치고 불법 음원 계약을 핑계로 물타기를 한다?”

도한솔 기자는 비릿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믿든 말든 상관없다. 내 말은 원래 역사에 근거하고 있으니, 실제로 파 보면 비슷한 소설이 몇 권은 나올 거다.

“휴우, 한새미디어 쪽에서 소송을 시작했지만 솔직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기자 여러분께서 적당한 수위로 한새미디어를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그대로 기사가 나가면, 한새미디어가 어찌 되겠습니까? 주식은 곤두박질칠 테고, 그럼 공장에 투자한 거 본전은 어떻게 뽑고, 사업 전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국 대비할 새도 없이 직원들이 길바닥에 나앉을 겁니다.”

난 기자들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나는 한새미디어의 월급쟁이들까지 걱정하는 신출내기 사업가로서의 이미지가 되어야 하는 거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가졌음에도 미국에서 투자받는 데 성공한 운 좋은 벤처 사업가 말이다.

“아니, 유 사장님이 한새미디어 직원들을 왜 걱정하십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씁쓸하네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연착륙하라고 시간을 줬더니 공격이나 당하고…. 어릴 때 제 아버님이 실직을 당해 봐서 압니다. 기업은 망해서는 안 됩니다. 여럿 괴롭거든요.”

쪼르륵. 꿀꺽.

나는 짐짓 괴로운 것처럼 홍주를 자작해 두 번 연거푸 입 안에 들이부었다.

내가 살짝 눈짓을 하자 술잔을 들고 있던 이 비서가 슬쩍 다가온다.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시죠, 사장님.”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기자들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방을 빠져나와 마당 한쪽에서 얘기를 나누는 척했다.

탁!

“이거 우리가 알던 스토리가 아니잖아. 설마 스마트 클라우드가 이기는 거 아냐? 유 사장은 정치 거물과 가깝다는 소문도 있잖아.”

“저 말을 다 믿어? 한새미디어 잘못 건드리면 신성이 나서. 광고 다 잘리고 옷 벗고 싶어?”

“나 여기서 발 빼겠어. 술 잘 마셨다고 전해 줘.”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가 방문을 통해 새어 나온다. 일부 기자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휙휙 사라진다.

담배를 꼬나물고 이 비서와 얘기하는 척하고 있는 나에게 도한솔 기자가 다가왔다.

“이길 수 있어요?”

“사필귀정이라니까요. 세관에서만 풀리면 게임 셋입니다.”

“제가 나서 볼까요? 자칫하면 옷 벗는데….”

“옷 벗으시면 제 회사로 모시면 되죠. 물론 신문사에 계신 동안 사례는 당연하고요.”

“시원시원하시네.”

도한솔 기자는 담배를 슬리퍼로 비벼 끄고는 자연스레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기자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나는 스마트 클라우드에 줄을 서 볼 생각이야. 여태 한새미디어가 기술 개발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잖아.”

“도한솔 기자, 이거 우리 전자신문이랑 기획 기사로 같이하는 거 어때? 기술은 우리 쪽, 불법 대출은 도 기자 전문이잖아.”

“음원 계약 쪽은 우리 신문사가 맡아도 되려나? 노예 계약이란 타이틀이 맘에 들어.”

“어어! 여러분, 이거 중도일보에서 사실 확인부터.”

“됐어. 중도일보는 빠져. 우리끼리 이거 손 좀 볼 거니까.”

“광고주 건드리고 무사한 언론이 어디 있나? 여러분들 실수하는 거야.”

“염 기자님은 빠지시라니까.”

결국 염중식 기자도 자리에서 빠진다. 마당에서 나를 보고도 술 잘 마셨다는 인사도 없이 휘익 빠져나간다. 그래, 한새미디어에 전화하려면 서둘러야겠지.

내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니 기자들이 딱 세 명 남았다. 한마음, 경문, 전자 신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바라는 것도 없고, 사실 그대로만 써 주십시오. 앞으로 저희 지면 광고는 여기 계신 분들을 통해서만 의뢰하죠. 잘 크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며 조심스레 명함을 꺼내니 그쪽에서도 명함이 건너온다. 서로가 건네받은 명함을 계약서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기셔야 하는데.”

“사실만 기재해 주시면 충분합니다.”

“생각해 두신 헤드라인이 있습니까? 경제면 톱으로 다뤄 드리죠.”

“첨단 한국의 첫 번째 제품! 이대로 어이없게 묻히나? 어떻습니까?”

“하하! 좋네요. 사흘 뒤 석간을 기대해 주세요. 불법 대출건은 며칠 더 걸릴 겁니다. 아귀를 맞춰야 해서 말이죠.”

내가 기사 헤드라인 타이틀도 알려 주니 좋단다. 그래, 사흘이면 소설 한 편은 충분히 쓸 수 있지.

이 비서는 방을 떠나는 세 명의 기자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취재비를 주는 것은 당연하잖나. 1990년대인데.

나는 그들을 끝까지 배웅했고, 수정각이 조용해지자 휴대폰부터 들었다. 치명타를 가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이 회장님.”

-오, 유 사장인가? 오랜만에 통화하는군.

“사흘 뒤에 시간 좀 되십니까? 명함을 한 장 쓰려고 합니다.”

나는 인사치레도 생략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명함을 쓰는데 시간은 왜 묻나? 당연히 시간을 내야지.

“초대해 주셨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죠.”

-응?

    • *

사흘 뒤.

쾅!

“아니, 발목을 잡았으면 쓰러뜨려야지! 어째서 아직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겁니까!”

이관재 사장은 왠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법정에 관련 자료를 보내기 전에 상대 변호사 쪽에서 자료 열람을 요청하고, 자료의 신빙성을 따지며 싸우는 것이 소송의 일반적인 행태가 아닌가? 그 와중에 스마트 클라우드와 물밑 접촉을 하며 CD플레이어의 개발비를 보상받고, 앰팩 후속 모델에 숟가락을 올리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한데 스마트 클라우드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소송에서 따박따박 반박하던 그 건방진 년이 이리 호락호락할 리 없다.

“세관에서 물건을 잡고 있는 것이 한계입니다. 폐기 처분까지는 아직….”

“아니, 은행을 압박해서 채무를 회수하게 만들라고 했잖습니까! 그럼 국내에 떨이라고 풀겠지요.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합니까.”

“아, 그게… 스마트 클라우드에 돈을 빌려 준 은행이 없습니다. 최소한 국내는….”

“뭔 소리예요. 그리 큰 공장을 무차입 경영을 한단 말입니까? 그게 가능하기나 해요? 제대로 조사해 본 게 맞습니까?”

“일전에 화제가 된 10억 불 외자 유치 외에는 전혀 없는….”

쾅! 쾅!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이걸 하나 제대로 못 알아내!”

이관재 사장이 책상을 두드리며 호통을 쳐도 관련 임원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사실인데 어쩌리.

“사장님, 은행 건도 그렇지만 이게 상대가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좀 커 보입니다.”

“뭐요, 크다고?”

“핸드 터미널과 에그펫이란 제품만으로 선순환을 하고 있는 데다 디지털 캐스트의 특허 지분을 51프로나 가졌다는 정보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

“젠장, 그래서 며칠 전이 뭐 어쨌다는 겁니까?”

“소송 당일 기자들 모임이 있었는데, 몇몇이 이탈했다는 정보입니다. 특허 침해도 그렇고, 저희가 신성생명에서 대출받은 것도 정황이 알려졌다고….”

쾅!

“뭐라고요? 그런 정보가 어떻게 누가…. 그토록 입조심하라고 했는데!”

이관재 사장은 책상을 내려친 것도 모자라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 두 가지는 한새미디어의 최대 약점이 아니던가. 심지어 신성생명 대출건은 정말 일급비밀인데 말이다.

“대체 누굽니까? 범인이 누구냐고요? 그 정보가 새면 구미, 창원 공장 날아가는 거 모릅니까? 그룹으로 올라가는 발판인데 누가 망쳐요!”

“사장님, 여기에 범인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모두 같이 서명했는데 제 손으로 범법자라고 밝힐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으아악! 그럼 누굽니까? 제 숙부께서 털어놓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런 겁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신성 비서실에서 정보가 샌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빌어먹을. 일단 돈이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언론 통제부터 하세요. 말 안 듣는 놈 있으면 몽둥이 찜질이라도…. 그래, 유수한 그놈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 버려! 그게 좋겠네!”

“아, 그것도 알아봤습니다만 언제나 경호원을 대동하는지라 쉽지 않습니다.”

“대체, 되는 게 뭐예요? 명색이 임원인데 머리는 장식입니까! 일을 해결할 생각이 있기나 합니까!”

“외람되지만 CD플레이어 개발비는 깨끗이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공식 라이선스를 받아서 저희도 앰팩 같은….”

쾅!

“닥쳐요! 4천억이나 CD 공장에 투자하고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일단 CD는 팔아야 살아남을 거 아닙니까!”

“영화나, 컴퓨터 CD로….”

퍽! 퍽! 와장창.

“나가! 나가! 이 쓸모없는 인간들! 나가서 죽어 버려!”

기어이 화가 폭발한 이관재 사장은 명패, 물컵, 서류철 등등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언제는 CD가 회사의 미래라며 불법 대출에도 같이 나섰던 이들이 이제는 CD 사업에서 발을 빼자고 하니 욕을 안 할 수 없었다.

물러서지 말고 설득해 보자고 다짐했던 임원들은 이마에 물건만 얻어맞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씩씩거리는 사장한텐 지금 그 어떤 소리를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이사들은 한 층 아래의 복도에 모여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봐, 손 이사. 유명 가수들이 음원 판매를 지지한다는 말은 왜 안 했나? 그 말은 자네 몫이었잖나.”

“휴우, 그것까지 어찌 말하나. 불난 집에 기름은 충분히 부었네.”

손 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일부 가수들은 불투명한 기존 앨범 판매보다 공개적인 숫자가 딱딱 나오는 음원 판매가 가수와 팬 모두에게 유리하다며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노예 계약 어쩌고 하는 일은 제쳐 두고서도 말이다.

“나도 말 못 한 게 있네. 사실 오늘 아침 신성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네. 이 회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네. 불법 대출이 드러나는 정황을 아시는 눈칠세.”

“어? 자네도 그 전화 받았나?”

“그럼 자네도?”

한새미디어 임원 네 명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 *

그날 저녁.

나는 호암 박물관에서 이 회장을 만나자마자 석간신문 위에 명함을 얹어서 건넸다.

신문 경제 섹션엔 한새미디어의 앰팩 기술 도용이 의심된다, 앰팩 수출 타격으로 국부 손실이 우려된다 등등 순화된 표현을 쓰긴 했지만 내게 유리한 기사들이 실려 있다.

심지어 구미, 차원 CD 공장에 대규모 차입금이 들어가 있어 부실이 우려된다는 기사로 신성의 불법 대출을 은근슬쩍 행간에 숨겨 두었다.

“흠, 나도 기사는 읽어 봤네. 기사 말미에 언급한 차입금은 나를 노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대화 중에 신성생명 불법 대출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어찌 알았나?”

“그게 중요하진 않을 텐데요. 중요한 건 지금 자금을 회수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내 조카 회사가 뿌리째 흔들거리는 일이네. 명함 하나로 가늠할 일이 아니야.”

“실상이 밝혀지면 정치권이 민감하게 반응할 겁니다. 선거철이잖습니까. 발목 잡힌 제가 꿈틀거리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내가 협박을 하자 이 회장이 인상을 찡그린다.

“굳이 그리해야겠나? 내가 조카를 불러 소를 취하하라고 하겠네.”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은 같은 일을 당하면 그리 하고 마실 겁니까?”

“…이건 나와 척을 짓겠다는 행동일세.”

“회장님과 척을 짓다니요? 이건 제 선물입니다. 제 앰팩 보셨죠? CD는 경쟁 상대가 안 됩니다. 지금 관두셔야 와중에 뭐라도 건지죠. 이참에 구미 공장은 휴대폰 조립 라인으로 쓰십시오. 공장 확장한다고 돈 쓰지 마시고, CD 공장을 개조하시면 되죠.”

“…모르는 게 없구만.”

내가 구미에 신성 휴대폰 공장이 세워지는 것을 모를 리 있나? 한때 휴대폰 메카였는데.

“앰팩 물량이 넘치면 신성에도 일부 외주를 맡기죠. 약속드립니다.”

“허허, 못 말리겠군.”

“자금 회수하십시오. 그럼 자연스레 소송도 취하하겠죠.”

“생각해 보지. 그건 그렇고, 한새미디어 임원들은 왜 부르라고 했나? 이리 오라고는 했네만….”

이럴 줄 알았다. 이 회장은 가만 내버려 두면 딴 길을 찾을 거다.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만에 불법 대출에 대한 증거를 없애 버릴 수 있는 양반이다.

“여기 문 많죠? 문 뒤에서 듣겠습니다. 증거를 보여 주시죠.”

“무슨 증거?”

“내부 고발자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지요. 곧 도착할 임원들에게 앰팩 기술을 CD플레이어에 도용했다고 기자회견하라고 종용해 주시죠. 신성 임원으로 채용해 보호해 주겠다고 하시면 믿고 따르겠지요.”

“꼭 그리해야겠나?”

“선택권을 드리는 겁니다. 저를 적으로 두실 거냐, 아니냐.”

내가 굳은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을 하니 이 회장이 눈을 감는다.

“내 조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군.”

“문 뒤에 있겠습니다.”

“아니, 돌아가게. 내 알아서 할 테니 가서 기다리게.”

“그럼 믿겠습니다.”

나는 문을 나섰다. 저 멀리서 검은색 승용차가 줄을 지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한새미디어 임원들일 것이다. 내일 볼만하겠네.

이 회장은 나를 선택할 것이다. 아니, 내 안주머니에 있는 녹음기를 선택하겠지.

    • *

이관재 사장의 출근길이 오늘따라 유독 휑했다. 연일 비상 회의를 하고 있었기에 지하 주차장에서 건물로 연결되는 입구에는 언제나 임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말이다.

“빌어먹을 영감탱이들. 명패 좀 던졌다고 이젠 마중도 안 나와?”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을 때 ‘띠링’ 하면서 사장 전용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임원들인가 싶었는데,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는 손 이사만 혼자 떨렁 서 있었다.

“손 이사, 표정이 왜 그래요?”

이관재 사장은 저도 모르게 말이 그리 나왔다.

“사장님, 올라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TV부터 보시죠.”

손 이사가 유독 정중한 표정으로 이관재 사장에게 청했고, 엘리베이터는 로비로 향했다.

웅성웅성.

“저기 한새미디어 사장이다. 출근했어!”

“밀어! 밀어!”

쾅! 쾅!

“못 들어옵니다. 여긴 보안 지역입니다. 기자분들께선 밖에….”

“어어억! 나 끼었어. 나 끼었다고.”

“사람 죽일 참이냐! 이 새끼들아, 비켜! 비키라고!”

“못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불법 침입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불과 10미터 떨어진 정문 입구에 기자들이 떼거리로 몰려 있었다. 보안 요원들은 회전문 사이로 억지로 몸을 끼워 넣는 기자들을 있는 힘껏 밀어내며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유리문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불룩하게 휘어 있었다.

“이, 이게….”

이관재 사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로비의 대형 TV 화면을 보니 손 이사에게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마중 나왔어야 할 나머지 임원들이 TV에 출연하고 있었다.

    • *

-최근 한새미디어가 불법 대출에 관련되었다는 억측이 퍼지고 있기에 이를 묵과할 수 없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새미디어가 구미, 창원 공장에 투자한 자금 4천억은 공히 산업은행, 제일은행, 외환은행에서 정상적으로 차입한 자금입니다. 이에 무고한 음모를 퍼뜨리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회사 차원에서 엄중히 대처하고자 합니다.

한새미디어의 임원들은 기자들 앞에서 준비된 원고를 줄줄 읽어 내려갔다. 일부러 어그로를 끄는 말이었는지 가만있을 기자들이 아니었다.

-음모라니요? 신성생명이 불법 대출했다는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돈놀이를 하는 것은 엄히 처벌받아야 합니다.

-이 일에 신성생명은 전혀 관련이 없으며, 범신성 계열사 차원에서 사재 출연을 논의한 적이 있지만 실현된 적은 없습니다. 억측은 삼가 주십시오. 일부 대출이 담보를 넘어선 문제가 제기되었기에 이에 대해선 관련 담당 임원이 책임지고….

-그걸 일개 임원이 책임질 일입니까! 이건 사실 은폐이며, 꼬리 자르기입니다.

-이 모든 게 무리하게 CD라는 사양 산업에 투자한 것 때문이 아닙니까?

-사양 산업이라니요. CD 기술은 여전히 첨단 기술이며 전도유망한 산업입니다. 말씀 삼가세요.

-그런 첨단 산업을 하면서 CD플레이어 개발에 앰팩 기술을 무단으로 도용했습니까? 자체 개발도 없이 첨단 산업 합니까?

-오해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 피땀 흘려 개발한 기술을 뺏고, 그걸 물타기하려고 소송까지 벌이다니 대기업의 횡포 아닙니까?

-오해가…. 실무 개발진에서 업무상 과실이 있다면 저희 임원들이 책임을….

-저거 보십시오, 저거 봐. 또 꼬리 자르기 하시네! 지금 한새미디어 임원분들은 희생양으로 나온 거 아닙니까? 몸통은 누굽니까? 이관재 사장입니까? 이희건 회장입니까? 말씀하십시오.

이관재 사장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친 것도 아니고 어째서 임원들이 TV까지 나와 기자회견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미쳐도 한참 미쳤고, 자폭도 이런 자폭이 없었다.

옆에 있는 손 이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멱살을 잡을 기운조차 없었다.

“이 회장님께서 직접 명하셨습니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임원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한 달 정도만 수감 생활을 하고 있으면 항간의 관심이 식는 대로 빼내 주겠다고…. 자금은 이미 회수를 하셨습니다.”

“숙부께서 자금을 회수했다고?”

이관재 사장은 이 회장의 명령이라는 소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이관재 사장이 임원들 구속 수사는 언급조차 없이 자금 회수에만 신경 쓰자, 손 이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당하니 짜증이 났다.

어쩌겠나, 재수 없이 연락책에 당첨된걸. 차라리 회견장에 있는 게 나았을걸 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예. 이 회장님께서 시중 은행장을 급히 불러 4천억 중에 신성생명 돈 2천억은 한새미디어에 출자 전환을 하셨습니다. 지금 장부가 수정되고 있을 겁니다.”

“출자 전환. 아무리 숙부님이라도! 사장인 내가 동의하지도 않은 일을!”

출자 전환은 쉽게 말하면 빚을 돈이 아니라 주식으로 갚는 거다. 2천억을 출자 전환했다 함은 이관재 사장을 포함한 오너 지분 20%가 훅 하고 날아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한새미디어의 주인이 바뀐다는 얘기다.

“저희도 그리 말씀드렸는데, 다행히 구미 공장을 넘기면 지분을 돌려주신다고 합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직접 오셔서 해결하라고 하시더군요.”

“으으으, 어떻게 같은 식구끼리….”

손 이사의 어깨를 짚고 휘청거리는 이관재 사장. 손 이사는 어깨를 빌려 주는 것도 왠지 짜증이 났다. 일이 어쩌다 이리 꼬였지 싶었다.

이 모든 게 스마트 클라우드를 건드린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수한 사장이 이희건 회장과도 커넥션이 있었나 싶었다. 덩치만 믿고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건드린 대가였다.

쾅! 우르르르.

후회도 잠깐, 문이 뜯기고 기자들이 로비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장님, 불법 대출이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뭡니까? 어째서 상세 내역을 밝히지 않는 겁니까?”

“시중 은행장들이 모두 노코멘트 하고 있습니다. 이거 금융 조작을 시도하는 거 아닙니까?”

“비켜! 비키라고!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배후가 누굽니까? 신성그룹 회장이 아닙니까?”

“앰팩 기술 도용은 누가 지시한 겁니까? 이관재 사장님 아닙니까?”

“사장님한테서 떨어지세요. 떨어지라고!”

“밀어! 밀어! 사장님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어서!”

“관세청에서 외려 CD플레이어 수출 적부 심사를 하겠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사방에서 마이크가 쇄도하고, 한 마이크는 이관재 사장의 입을 마구 찔러 대기까지 했다. 정문을 뚫고 밀려든 기자들과 보안팀 직원들이 엉켜 난장판이었다. 자신이 약을 친 언론사들은 대체 어디로 갔나 싶었다. 판세가 기울자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빌어먹을. 판세가… 판세가….’

이관재 사장은 이리저리 떠밀리며 간신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옆에서 같이 떠밀린 손 이사도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사장님, 이거 아무래도 소송부터 취하하는 게….”

퍽!

“닥쳐! 닥치라고!”

이관재 사장은 손 이사의 노구를 엘리베이터 벽면으로 떠밀어 버린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닥치라는 말 외에는 할 말도 없었다.

‘ㅅㅂ… 망했어! 이거 완전히 망했어!’

이관재 사장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망했다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히 있자니 회사 주인이 바뀌고, 그렇다고 구미 공장을 넘기고 지분을 되찾아 온들 공장도 없는 회사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될 것이 뻔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망하는 길이었다.

    • *

용인 스마트 클라우드 본사.

“사장님, 기뻐하십시오. 오늘자로 앰팩이 세관을 통과했습니다. 항공기로 태워 보내면 출시일은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이야! 정말 일을…. 아니, 다행이네요. 좋네요.”

권재욱 부장이 득달같이 달려와 내게 알렸다. 나는 TV를 보고 있다가 ‘이 회장이 정말 무섭게 일을 잘하는구나. 알토란 같은 구미 공장을 거저먹겠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하하하! 그럼 미리 생산해 둔 거 잘못 아니죠?”

“나 부장님 혜안이 탁월한 거죠. 잘하셨습니다.”

나는 즐거워하는 나 부장도 치켜세워 줬다. 한데 같이 TV를 보고 있던 케이가 싱긋 웃기만 할 뿐 평소처럼 팔짝팔짝 뛰지 않았다. 이런 일엔 언제나 과도한 액션을 보여 주는 케이였는데 말이다.

“디지털 캐스트가 유 사장님과 특허를 공유한 것도 정말 잘한 일 같습니다. 이런 일을 제가 당했다면 대항도 못 하고 제품 출시를 포기했을 겁니다.”

“하하! 황 사장님께서는 지금처럼 기술 개발에 전념해 주십시오. 이런 지저분한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요. 이제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디지털 캐스트는 저희와 함께 하늘을 날게 될 겁니다.”

“아, 그럼 저는 이만. 조만간 회식하시면 삼겹살에 소주는 제가 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배가 터지도록 얻어먹겠습니다.”

MP3의 원래 역사가 바뀐 게 확실하다. 나는 미래에 펼쳐질 대박에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올랐다. 매일같이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사무실을 찾아오던 황 사장도 내일부턴 걸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황 사장을 문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황 사장마저 환한 표정으로 돌아갔는데, 여전히 케이의 표정이 어둡다.

“케이, 뭐 문제라도 있어? 하역 타이밍이 좀 빠듯하긴 해도 버지니아 트레이딩이라면 미국 시장에 뿌리는 거 충분히 가능하잖아.”

“아뇨, 아뇨. 문제없죠. 저도 기뻐요.”

자신이 이번 일에 기여를 못 한 것이 무척 속상한가 보다. 케이로선 엉뚱하게 한 방 맞은 셈이다. 저작권과 특허권이 확고한 미국에선 소송 제기 자체가 안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대한미국인이라지만, 외국인이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달리 사업에서 현지화 작업이 중요하다고 하겠나.

“소송은 저쪽에서 취하하겠지만, 마무리 부탁해도 되지?”

“문제 없…. 아니다. 그냥 열심히 할게요.”

“이야~ 케이가 기죽은 모습은 전 세계에서 내가 제일 처음 본 게 아닐까?”

“오! 저도 그중 한 명입니까? 이거 사진 찍어 놔야겠다.”

“나 부장님!”

“돌아왔다. 케이 님께서 돌아오셨어! 우하하하!”

“자, 자! 케이 님, 기분이 축 처질 때는 박카스가 최고입니다. 여기!”

이젠 권 부장까지 나서서 박카스를 쥐여 주며 분위기를 띄운다.

“케이, 우린 한 팀이야.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 없어. 케이 당신이 없었으면 오늘의 우리도 없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안 되겠다. 쇼핑 가야겠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케이였다. 어째서 내 말이 쇼핑과 연계되는지 잘 모르겠다.

“뭐해요, 수한 씨. 같이 가야죠! 잊었어요? LK 백화점 전세 내 준다고 했던 약속?”

“아!”

“자! 부장님들도 같이 가요. 수한 씨가 다 긁을 거예요. 이참에 양복 한두 벌 쫙 빼입으세요. 우린 팀이잖아요.”

“정말입니까?”

“회식보다 훨 낫네요.”

“어후! 이거 예산 오버야.”

“호호, 대신 저녁 식사는 외할아버지가 내신다고 하니까 비싼 거 시켜요.”

“어! 케이슨 님이 오신다고?”

“한발 늦어 버렸지만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이죠. 오신 김에 쇼핑이나 시켜 드리죠, 뭐. 사실 우리가 제대로 대접도 못 했잖아요.”

“어어… 당연하지.”

케이도 작전이 있었구나. 케이슨을 대동해 돈으로 한새미디어를 쓸어버리려 했나 보다.

뭐, 잘됐네. 파라곤이 앰팩 출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여하튼 닥터 케이슨을 만난다는 생각에 케이도 기분이 풀리나 보다. 어느새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이거 거물이 오시는군요. 저희는 빠질 테니 즐겁게 회포 푸십시오.”

“인터콘티넨탈 호텔 만찬이 어떠십니까? 음식이 외국 분들 입맛에 잘 맞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예약하겠습니다.”

“제가 아니고… 케이슨 님이 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권 부장님이 왜 예약을?”

“내시는 것은 케이슨 님이, 계산은 사장님이 하셔야죠.”

“아, 그렇군요.”

나도 권재욱 부장에게 배우는 게 있다. 우리는 팀이다.

    • *

“하하하! 수한아, 너 정말 돈 많구나. 차를 사 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야.”

“에릭이 타고 다닐 공용차는 필요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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