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작고 예쁜 것
“유 사장 연설을 듣다 보니 추운 줄도 몰랐다네.”
“선거 유세장이라 열기가 뜨겁긴 하죠. 하하.”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한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 아버님이 단상에 앉으실 수도 있었는데 말이네.”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어디 조용한 곳이 있나? 얘기를 나누고 싶군.”
“죄송합니다. 그러고 싶은데 제가 선약이 있어서….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대현과 더 이상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용인밸리에 얽힌 대현의 투자건 논의만으로 끝내고 싶다.
“으흠, 안타깝군. 이천으로 가 주겠나?”
“그러겠습니다.”
이미 차는 고속도로로 향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이 비서다.
“용인밸리는 대현에서 먼저 기획했는데, 오늘 기공식도 그렇고 마치 대현이 들러리가 된 듯하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자업자득이겠지. 이 사업을 유지하자니 모양새가 영 아니네. K폰 디자인 회사 두어 군데만 입주시키고 발을 뺐으면 하네. 유 사장이 그것까지 맡아 줄 수 있겠나?”
“네, 그러겠습니다.”
“부지는 구매한 비용 그대로 처분할 예정이네.”
대현이 이리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대현이 용인밸리에 투자하는 것은 벤처들을 이용하여 대현전자의 경쟁 문화를 쇄신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기업 이미지를 얻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정헌몽 사장이 해냈다고 대외적으로 포장해 그룹 승계의 당위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더 이상 그런 그림은 불가능하다.
대현은 굳이 부지까지 지원해 가며 벤처 입주를 도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땅값 상승을 노리고 부동산만 보유하는 것도 대현 스타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선거 때문에 현금이 필요할 것이다.
“제가 매입하지요. 이참에 대현전자 지분 3퍼센트도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지분을 유지하는 것이 이 계약의 조건이네. 그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했네.”
“외람되지만 연이 다한 것 같습니다만.”
“인연이 다한 것은 아버님이지, 내가 아니지 않은가. 걱정 마시게. 내가 먼저 유 사장을 찾지는 않겠네. 혹시나 유 사장이 나를 찾을 일이 생긴다면 지분을 핑계로 걸음 하시게.”
“찾아뵐 일은 없을 겁니다. K폰 디자인 건은 오성재 이사와 마무리할 것이고, 제 핸드 터미널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구매부를 통하면 됩니다.”
“휴우, 굳이 그렇게까지 단언할 필요가 있나. 지분은 유 사장이 보유하는 거로 하시게.”
“그럼 땅 매입 대금은 이 비서 편으로 보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정 사장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선 지 한참이다.
그대로 이 비서는 차를 쭉 내달려서 대현전자 이천 공장 정문까지 다다랐다.
“살펴 가십시오, 정 사장님.”
“유 사장도 살펴 가시게.”
나는 차에서 내려 묵례로 정 사장을 배웅했다.
솔직히 용인밸리 부지 문제가 이리 해결된 건 반가운 일이다.
도로를 포함해서 공단 조성이 한결 편해졌으니 분명 기뻐해야 하는데 내 기분이 왜 이런가 싶다. 좋은 날에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나는 안다. 정헌몽 사장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총선에 대해 언급해 주길 바랐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결과는 최악이니까.
총선에서 대박을 치고 그 때문에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결국 대현은 쪽박을 찬다고 말이다. 더 나아가 정 사장의 미래도….
- *
부르릉. 쿵덕쿵덕. 우르릉.
용인밸리는 온통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사람들도 북적거리니 시끄럽다기보다 활기차게 느껴진다.
“이야! 한국 사람들 정말 일 잘하네요. 듣던 그대롭니다.”
“연신 TV 카메라가 돌아가니 그러겠죠. 정치인들도 사진 찍으러 자주 오고. 하하하.”
내 곁에서 히로아키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불도저와 대형 크레인이 모두 이곳에 모여든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땅이 평평해지고, 도로가 닦이고, 크레인이 조립되고, 물이 고인 곳엔 파이프가 수두룩하게 박혔다.
이 모든 것이 건설사 공개 입찰이 허무할 정도로 일찍 끝나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현건설은 견제를 받을 거라 여겼는지 일찌감치 입찰 자체를 포기해 버렸고, 상위 건설사 아홉 개가 연합해 동시 입찰을 했다.
용인밸리에 히타치 반도체 공장을 그대로 옮겨 온다니, 건설사들로서는 일본 반도체 공장의 설계 도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술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 계산한 듯하다.
“건설사들이 보고 있는 설계도가 히타치 것이 아니라 유 사장님 설계도라고 하면 기절초풍하겠어요.”
“왜요? 내 설계도가 허접했나요?”
“어우, 그럴 리가요. 제가 봐도 이런 설계가 가능한가 싶었는데. 제 말씀은 일개인이 했다고 하면 믿지 않을 거라는 말이죠. 외려, 이 설계도를 제가 가지고 가도 되는지 묻고 싶군요.”
“가져요. 멋진 연기를 펼친 대가입니다.”
“유 사장님 연기도 저 못지않던데. 크크크.”
히로아키는 설계도를 품에 넣으며 웃어 댔다. 어차피 반도체 공장에 특화된 설계이니 히타치 그룹엔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가 히타치 공장 설계도라고 하고 건설사들에 전달해 준 것은 20여 년 뒤 내 공장을 지을 때의 설계도를 확장한 것이다.
라인과 유틸리티 구역을 상하층으로 분리하고 벌집 구조의 기둥을 유틸리티 층에 집중 배치해서 라인엔 기둥을 최소화하는 설계도다.
H빔을 교차해 뼈대를 만들고 건물을 올리기에 공기도 단축될 것이다.
20년은 앞선 기술이니 앞으로 무수한 반도체 공장을 지을 한국 건설사들엔 귀한 경험이 되겠지.
게다가 이번에 짓는 라인은 길이만 해도 120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라인 물류 이동이 혁신적으로 개선될 테니 단위 시간당 생산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될 것이다.
“아, 그리고 이 리스트 좀 검토해 주십시오. 박준태 의원이 보너스로 요청했던 사안입니다.”
히로아키가 피식 웃으며 서류 뭉치를 건네주었다. 내 설계도에 대한 보답인지, 원래 주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장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본 중소기업들의 자본 잠식률이 적혀 있었다. 이래서는 산업 스파이나 다름없다.
“이, 이게….”
“반도체 관련 일본 기업 중 자본금 잠식률이 50프로 이상인 회사들입니다. 이곳에 입주시키고 지분을 매집해 들어가면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정보지에는 디스코(DISCO), 시부야, 모리타, 무사시 등등 2000년대 반도체 업계에서 나름 명성을 얻는 회사가 수두룩했다.
1990년대 초반에 이 회사들이 자본 잠식 상태였다고? 나조차 알지 못한 정보다.
새삼 일본의 버블 붕괴는 일본 회사들에 정말 어려운 시기였구나 싶다.
“이런 정보를 줘도 되는 겁니까?”
“뭐 어때요. 이리 두면 망할 회사인데, 이렇게라도 살아남으면 감지덕지죠.”
내 회사도 아닌데 뭐 어때서? 하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박준태 의원이 선물이라며 슬쩍 운을 뗐던 내용이 이것인 듯하다.
용인밸리 입주를 미끼로 적대적 M&A를 노려 보라는 말인데, 승부사다운 감각이 발동한 것 같다. 솔직히 예상을 뛰어넘는 선물이다.
이런 정보를 건넨 것이 일본 재계에 알려지면 히로아키 이 양반, 제명에 죽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정보지를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특급 기밀이다.
탁! 탁!
“드디어 반도체 깨끗이 손 털었네요. 이제 이면 계약까지 모두 끝난 겁니다.”
히로아키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손을 털어 댔다. 반도체 사업체를 팔아먹고도 속이 시원하다고 한다. 나중에 히타치 그룹 총수가 되긴 하지만 보통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아닌 듯하다.
“그러네요.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그럼 나에게도 보너스 좀 주시지요.”
“보너스? 우리 사이에 계산은 다 끝난 것 아닙니까?”
“한 가지만 묻고 싶어서요. 제가 반도체 포기한 거… 당신이 저라면 어찌했을 겁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까.”
“나라도 같은 선택을 했겠죠. 미국한테 흠씬 두드려 맞고 백기 들 바엔, 맞기 전에 손들어야죠.”
“후후후, 같은 생각이군요. 그럼 앞으로의 선택은 뭐가 좋을까요?”
“중공업, 인프라, 에너지.”
“그런 정보를 줘도 되는 겁니까?”
“뭐 어때요? 내 사업 영역도 아닌데. 서로 경쟁할 것도 아니고.”
히로아키는 신규 사업 전략도 자신의 생각과 동일하니 손뼉을 마구 쳐 댔다.
내 생각이 그런 게 아니고 당신이 그 사업으로 그룹을 재기시킨다니까. 열심히 하쇼.
“나중에 파라곤에 손 내밀 때 좀 거들어 줘요.”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하죠.”
“하하하하! 끝까지 만만치 않으시네.”
히로아키에게 꽤나 큰 선물을 받았으니 별 의미 없는 이 정도 립 서비스는 당연하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2011년엔 지인 이상의 역할도 해 줄까 싶다.
히로아키는 그길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공사판 대신 사무실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싶었다.
3개월 정도면 라인 일부분은 돌릴 수 있을 테니, 그 전에 인터넷 붐부터 일으켜야겠다.
어려울 건 없다.
조만간 4월 초가 되면 윈도우 3.1이 출시되니까.
- *
「수한, 네가 말한 인터넷 브라우저 Pioneer92와 Pioneer 인트라넷92를 동봉한다. 인터넷 브라우저는 익히 알 테니 설명은 생략하고 인트라넷만 설명하면, 메일 수신/발송/발송취소/첨부/검색/보고서 등재/결재… 젠장, 여하튼 살펴봐라. 기능 삽입한다고 에릭이랑 내가 반쯤 죽다 살아났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보안 프로그램도 삽입했으니, 인트라넷 밖으로 자료가 나가면 아예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거다. 클라이언트 프로그램도 보안이 걸려 있으니, 안심하고 CD 카피해서 인스톨하면 된다. 좋은 성과 있길 바란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연락하지 마라. 상장도 하기 전에 돈이 넘쳐서 돈 쓸 시간이 필요하다.」
재훈이가 꽤나 적절한 타이밍에 메모와 함께 프로그램을 보내왔다.
지금 우리 회사는 기존 공장에서 에그펫, 핸드 터미널을 미친 듯이 뽑아내고 있지만 이제 곧 2천 명 이상으로 불어날 인원을 먹여 살리려면 반도체 자체를 팔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한다.
인트라넷을 팔기 시작하면, 메일 서버와 데이터 서버를 만든다고 메모리 반도체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거다. 용인밸리의 반도체 라인을 조기 가동해야겠지.
하드 디스크도 많이 팔리겠지만, 그것까지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싶다.
“나운영 부장님, 신규 인력 교육은 어찌 되고 있죠?”
“정부에서 공무원 연수소를 대여해 줘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국영 연구소 시설도 오픈해 줘서 장비 실무 교육까지는 어느 정도 마쳤습니다. 다음 주면 신입사원 교육이 끝납니다.”
“몇 명이죠?”
“공채 1기는 986명입니다. 필기시험과 면접으로 걸러 냈더니 생각보다 숫자가 적습니다.”
“권 부장님, 영업맨들은 어찌 되나요?”
“일단 대리점은 지원이 쇄도해서 전국에 열두 곳을 지정했습니다. 본사 영업맨은 30명을 신규로 채용했습니다. 모두 베테랑급입니다.”
“좋네요. 그러면 김 과장, 송 과장! 각 개발팀에서 다섯 명 정도 인원을 차출했으면 하는데 괜찮겠어요?”
“다섯 명씩이나요?”
“가능하게 해야죠. 한데 사장님, 무슨 일이기에 다섯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3월 중순부터 승진시켜 개발팀장으로 발령 낸 김 과장과 송 과장은 다섯 명씩 차출하겠다는 말에 흠칫 놀란다.
하긴 개발팀이라곤 하지만 각종 품질 문제와 라인 설비까지 책임지고 있는 상황이니 한 명의 인력이라도 아쉽긴 할 것이다.
“다들 어렵지만 개발팀 한 명, 영업맨 두 명, 그리고 신입사원들 수십 명씩 묶어서 대학교, 국영 기업, 신성을 포함한 대기업으로 파견을 보내고자 합니다. 목적은 인터넷 브라우저와 인트라넷을 공짜로 깔아 주는 겁니다. 이후 피드백까지 챙기고 오라고 해 주세요.”
“고, 공짜라고요?”
다들 이미 프로그램 시연을 해 보고 업무 혁신을 이룰 거라며 환호성을 질렀던 터라 공짜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공짜죠.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우린 핸드 터미널, 그리고 데이터 서버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파는 회사라고. 인트라넷은 추가 애드온 개발비와 유지 보수비를 받겠지만 그건 미국에 있는 파이오니어라는 회사가 대부분 가져갈 겁니다.”
“에… 너무 아까운데요? 반도체는 지금 만들지도 않잖습니까?”
“하하, 길게 보세요. 조만간 탈곡기에서 쌀알 떨어지듯 돈이 쏟아질 테니까. 그리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깔고선 에그펫 애드온 다운로드받는 법을 꼭 알려 줘요. 메일 계정 만들어서 서로 애드온 교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알려 주시고.”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해 보세요. 외려, 권 부장님은 인터넷 브라우저에 광고도 게재할 수 있으니 그거 영업 뛰는 데 집중하시고요.”
“그 또한 어렵진 않습니다만….”
“길게 보자고요. 저 믿으시죠?”
권재욱 부장은 프로그램을 공짜로 깔아 주는 게 정말 아까운지 연신 한숨을 내쉰다.
아직은 인터넷 광고의 파괴력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인터넷 브라우저가 얼마나 빠르게 확산될지 감조차 없으니 당연하다.
아직은 모뎀으로 접속하는 수준이니 내가 봐도 1~2년 정도는 시간이 이르다.
결국 인터넷 브라우저는 장기 플랜이고, 인트라넷이 단기 플랜이다.
구리선이긴 하지만 인터넷 회선이 뻗어 있는 미국에선 한국보다 수익이 더 날 것 같고 말이다.
“그럼 다음 주부터 외근시키면 되는 겁니까? 신입사원들 멋지네요. 입사 첫날에 외근이라니.”
“그것도 두 달 동안 하는 외근이죠. 데려와 봐야 사무실도 없잖습니까.”
“그러네요. 컨테이너 더 갖다 놓으면 헷갈려서 사무실 찾지도 못할 겁니다. 하하하.”
나운영 부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린 반면 권재욱 부장의 얼굴은 펴질 줄 모른다.
“사장님, 다른 건 몰라도 대기업에 인트라넷을 깔면 돈을 받아야 합니다.”
“오! 그 생각도 정답이에요. 대기업은 단순히 프로그램을 깔아서 쓰는 게 아니라 자기 입맛대로 고치려 할 테고, 데이터 서버도 자체 개발하려고 할 테니까.”
“아, 그리 생각하시니 다행입니다.”
“말 나온 김에 대한민국에선 첫 번째로 신성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까요?”
“벌써 약속을 하셨습니까?”
“언제 한번 같이 밥 먹기로 한 사람이 있는데….”
“누구… 혹시 신성의 그?”
“그분은 아니고요, 진제대 상무. 그 양반을 설득하면 반도체 사업부에 인트라넷 까는 건 문제도 아닐 것 같은데요. 아니, 설득할 필요도 없이 보여만 주면 진 상무가 먼저 깔아 달라고 할 겁니다.”
“저도 그 양반 압니다. 이 회장이 그리 아끼는 천재라고 하던데.”
권 부장의 얼굴이 그제야 환하게 바뀐다.
“에이, 천재는 우리 사장님이지. 천재라는 말을 그리 함부로 쓰면 어째?”
“사장님은 최고급 천재지. 진제대 그 양반은 보통 천재고.”
“아! 등급이 있구나.”
“하하하. 듣는 내가 부끄럽군요. 자, 회의는 짧을수록 좋죠. 각자 자리로 돌아갑시다. 권 부장님은 저랑 같이 점심이나 하러 갑시다. 진 상무도 끼워 주죠.”
“옙!”
여기서 신성의 기흥 공장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이동하는 중에 진제대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가 재미난 걸 하나 보여 주고, 그 대가로 점심을 얻어먹겠다고 했더니 곧장 오라며 호쾌하니 화답해 줬다.
내가 진제대 상무를 만나러 가는 목적은 두 가지. 첫 번째는 당연히 인트라넷을 팔아먹는 거고, 두 번째는 용인밸리에 입주시킬 일본 중소기업의 정보를 넌지시 알려 주는 것이다.
나 혼자 먹다간 배탈 난다.
내가 돈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문어발식 확장을 하다 자칫 도로 토해 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곤란하다.
일단 내가 먹을 업체를 고르고 나머지는 신성에 정보만 흘리면 알아서 할 거다.
대현을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 대현은 선거 때문에 유동자금이 바짝 말라 있을 것이다. 용인 땅도 파는 마당이다.
- *
“유 사장님, 이걸 인트라넷이라고 부른다고요?”
“네, 진 상무님. 파이오니어 인트라넷92라는 상품이죠. 1년 단위로 업그레이드를 해 드립니다.”
타닥. 타다닥.
연신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겨 보는 진제대 상무다.
지금이야 모뎀을 개조한 통신 카드로 두 대의 컴퓨터를 연결해 시험해 보고 있지만, 조만간 파라곤이 재훈이의 코딩에 근거해 프로토콜 표준화를 시키면, 내가 저가의 TCP/IP 기반 랜 카드를 마구 찍어 낼 수 있을 거다.
여하튼 그건 내 사업이고, 진제대 상무는 이 프로그램의 활용성을 머릿속으로 다양하게 그려 보고 있을 것이다.
“업무 소통도 원활해질 것 같고, 결재도 손쉽고, 공용 서버에 저장된 보고서는 날짜까지 나오네요. 나중에 타사와 특허 소송이 붙어도 근거가 될 수 있겠어요.”
“정확하시네요. 사내 통신망에 올라온 자료는 공문을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뿐 아니라, 핸드 터미널을 이용하면 납품 정보는 물론 엔지니어 런 시트(Run Sheet)와 라인 설비 관리까지도 가능할 겁니다.”
“런 관리까지. 가능해 보이네요. 생산부서에서 쓰게 만들면….”
진 상무의 생각이 자연스레 생산까지 뻗어 간다.
당연한 전개다.
나는 신성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거든. 나중에 신성 SDS로 이름을 바꾸는 ‘신성 데이터 시스템’이라는 IT 회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1987년부터 한국 IBM과 합작해서 PC 통신 관련 기술을 쌓고 있다가, 1991년 하반기부턴 그룹 관계사들의 전산실 종합 관리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본격적으로 나선다.
1992년 하반기, 즉 올해 말에는 신성생명, 신성신용카드 같은 그룹 내 금융 회사에 성공적으로 네트워크를 깔아 대며 승승장구하고 1996년에는 유니텔(UNITEL)이라는 윈도우 기반의 PC 통신 사업까지 한다.
신성전자의 경우, 1992년 말에 전격적으로 생산 라인에 전산망을 깔고 설비 관리 측면에서 업무 혁신을 이룬다. 대현은 그걸 보고 1994년 초에 전산망을 깔아 댔다.
“한데 이런 좋은 프로그램이라면 유 사장이 먼저 써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 상무는 신성을 통해 필드 테스트를 하려는 거 아니냐고 돌려 물었다.
미국에선 DHL, 한국에선 신성에 제일 먼저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더니 이런 반응을 보인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죠. 그런데 이거 탐나지 않나요? 저야 이미 사장이니 이걸 도입한다고 연봉이 올라가진 않지만, 진 상무님은 다르실 텐데.”
“……?”
“기술력은 이미 충분히 증명하셨을 테고, 더 높은 곳으로 가려면 업무 선진화라는 타이틀이 필요하실 겁니다. 조만간 생산라인에 비슷한 시스템이 깔리면 한발 늦으실 텐데.”
“……!”
신성그룹은 누군가를 사장으로 끌어올릴 때 기술력과 경영 효율성을 동시에 따지는 그룹이다.
신성의 사장들이 대부분 공대 출신이며, 사장 승진을 눈앞에 둔 임원들이 ‘업무 효율화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름으로 TF를 운영하는 이유다.
오너 일가가 아닌 다음에야 능력을 증명해야 승진시켜 줄 거 아닌가.
“뭐, 업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필요 없으시다면 다른 곳에서 납품 이력을 쌓은 다음 다시 오죠.”
“아니, 아니에요. 그러라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아, 품질 사고가 우려되어 그러시나요? 검토할 시간을 드릴 테니 일단 전문가와 같이 살펴보십시오. 버그와 보안 측면에서는 아주 확실하고, DOS 기반의 프로그램보다 훨씬 편할 테니까.”
진제대 상무가 파이오니어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면 당연히 ‘신성 데이터 시스템’이 달라붙을 거다.
거기 전문가들은 진제대 상무보다 훨씬 더 파이오니어 인트라넷에 열광하게 될 거다. 신성에 제일 먼저 인트라넷을 깔아 보겠다고 온 이유다.
신성이 시작하면 국내에선 급속도로 퍼져 나갈 테고, 미국을 포함해 세계 시장에 선을 보일 때도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미국 DHL의 납품 결과를 이용해도 되겠지만, 미국 애들 특성상 피드백은 한참 뒤에나 알 수 있을 거다.
“품질에 자신이 있으신가 보네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친구가 코딩했거든요. 제 입으로 천재라고 하는 놈이니까 믿을 만합니다.”
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품질엔 자신이 있었다. 보안 로직 자체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이용한 것인 데다 에릭 비나가 코딩에 참여한 작품이다.
에릭 비나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원래 역사에서는 그가 ‘넷스케이프’라는 인터넷 브라우저를 상업화하자 일리노이 대학 연구소에서 해당 소프트웨어는 자신들의 자산이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그는 대번에 ‘그럼 연구소에서 썼던 코딩은 단 한 줄도 쓰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는 단 사흘 만에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다시 코딩해서 시장에 뿌렸다.
프로그램을 사흘 만에 새롭게 코딩한 것도 놀라운데, 더욱 놀라운 것은 버그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후자의 이유로 프로그래머들에겐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 친구가 누굽니까? 회사 이름은요? 나도 투자 좀 하게요.”
“하하, 아직 상장도 안 한 벤처예요.”
상장을 한다 해도 지분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내 지분 30%는 절대 시중에 풀지 않을 테고, 나머지 지분에는 파라곤이 달려들 거니까.
“여하튼 그리 자신 있으시니 공짜는 아니겠어요.”
“당연하죠. 중소기업이야 유지 보수비만 받겠지만, 돈 많은 신성한테 그리할 순 없죠. 외려 추가 조건도 있습니다. 초기 데이터 서버는 우리 회사에서 납품하는 조건입니다.”
“데이터 서버까지 시험해 달라?”
“업계 최초 타이틀을 가져가시라니까요. 싫으시면 다른 데 갑니다.”
“하하. 알겠어요, 알겠어.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 이걸 파이오니어라는 이름 말고 다르게 불러도 되겠지요? 예컨대 ‘싱글(Single)’처럼 신성다운 이름 말이죠. S라임이라고나 할까요. 업무를 일괄 처리한다는 개념으로 포장을 했으면 하는데….”
“오, 싱글! 듣기 좋은데요? 그리 부르세요. 저야 납품 실적만 있으면 되니까.”
역시 진제대 상무. 2000년대 신성그룹의 사내 인트라넷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니 놀라울 따름이다.
뭐 하나 일을 시작하면 자신의 퍼포먼스로 포장하는 데 천재적인 수완이 있다.
파이오니어 인트라넷을 자신의 입맛대로 수정했으면 한다는 의미리라. 재훈이 녀석은 돈 쓸 시간이 더 없어지겠다.
“유 사장님이 가져온 통신 카드와 CD는 제가 검토해도 되겠지요?”
“진 상무님, 저희 회사에서 엔지니어를 파견토록 하겠습니다. 100카피 이상 깔리면 그때부턴 정식 계약을 했으면 합니다.”
진 상무가 마구잡이로 프로그램을 깔까 봐 권 부장이 훅 하고 끼어들었다.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나설 줄 아는 영업맨이다.
“100카피…. 으흠… 적당하네요. 그 정도면 충분히 검증이 가능하겠군요.”
“첫 번째 고객님이 되실 것 같으니, 오늘 점심은 저희 쪽에서 사겠습니다.”
진 상무의 표정을 살피며 권 부장이 한 발짝 더 나간다. 능구렁이답다.
“전 입이 고급이라 비싼 것만 먹습니다만.”
“기흥 톨게이트 근처에 갈비탕 어떠십니까? 전복을 통째로 넣어 아주 맛납니다.”
“오호! 권 부장님이 맛나다고 하면 진짜로 맛나죠. 진 상무님, 거기로 갑시다.”
“갈비탕에 전복이라. 좋습니다. 하하하!”
역시 영업에는 인맥이 가장 강력한 무기다.
진제대 상무라면 반도체 사업부에서 입김이 아주 강력하다.
이런 혁신적인 인트라넷이라면 그의 입지를 한층 강화시켜 줄 거다.
신성에서 데이터 서버까지 적당히 필드 테스트가 완료되면 미국으로 날아가 DHL 이외의 고객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일이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다. 용인밸리가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기존 공장 옥상마저 개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버를 조립하고 출하 테스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니까.
- *
「여당, 총선의 여소야대 충격에서 벗어나나? 비상 대책 위원회 구성 중.」
「통민당을 원내 교섭 단체로 격상시킨 정영주 회장, 대선에도 도전할 것인가?」
「반도체 연일 고공행진, 2분기 경상 수지는 흑자로 돌아설 듯.」
「윈도우 3.1 출시에 이어 한국인 개발자가 최초 개발한 프로그램도 전 세계 강타 중.」
「인터넷 시대와 더불어 인트라넷 시대도 활짝 열리다.」
신문의 헤드라인엔 두 달 전 치른 총선 결과 못지않은 비율로 반도체와 인터넷 기사가 실렸다.
정치보다 경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하튼 신성에서 인트라넷으로 업무 혁신을 꾀한다는 소식은 빠르게 재계로 번져 나갔고, 인터넷 브라우저도 사방에서 판촉을 해 댄 신입사원들로 인해 나름 반응이 뜨거웠다.
신입사원들은 두 달간의 판촉 활동을 마치고 우르르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다.
이제 건물다운 건물이 생겼고, 나운영 부장을 필두로 라인 셋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여전히 공사는 진행되고 있지만 신규 라인의 일부는 셋업을 겸해서 웨이퍼를 뽑아내고 있다.
기껏해야 월 200장 수준이지만 통신칩이 한 톨이라도 아쉬운 마당이니 그것마저 감지덕지다. 와중에 상대적으로 손쉬운 후공정 조립 라인이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후! F27번 랏이 멈췄네. 에러 코드 52번이면 몰딩 공정. 몰딩 담당 누구죠?”
“김 팀장님, 접니다.”
“라인 가서 확인해 봐요. F27번요.”
“오전에 잘 돌아가는 거 확인했는데…. 그 랏이 아닐 겁니다.”
“시스템이 틀릴 리 있겠어요? 방금 멈췄으니 들어가 봐요.”
“그거 Fedex 퀄 랏인데. 진짜면 큰일인데….”
사원급 엔지니어가 울상을 지으며 사무실을 떠났다.
담당자에겐 못 할 말이지만, 내가 볼 땐 참 괜찮은 상황이다.
엔지니어들이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적다가도 인트라넷을 통해 라인에서 이슈를 제기하면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21세기에선 흔히 보는 일이지만, 여기선 업무 혁신이며 내가 추구하는 모습이다.
라인의 설비마다 핸드 터미널을 하나씩 배치하고, 런 시트마다 찍힌 바코드를 확인해 메일로 알람을 띄우니 전화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송 팀장님, 아무래도 서버를 한 대 더 만들어야겠는데요?”
“뭔 소리야. 램 보드랑 하드 디스크 바닥났잖아. 입고부터 시켜야지.”
“신성이 오늘 또 발주를 했는데요.”
“신성이? 빌어먹을 XX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뭐 사흘 걸러 한 번씩 발주를 내!”
“헉! 사장님.”
“나 아무 말도 못 들었으니까 박카스나 한 병 해요.”
나는 고객을 욕하는 칸막이 너머로 박카스를 건네주고는 사장실로 걸어갔다.
나 또한 노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특별히 케이 님께서 항의차 방문하셨기에 시원한 박카스를 대접해야만 한다.
딸깍.
“수한 씨, 사장실은 따로 층을 잡아서 꾸며야 하는 거 아니에요?”
“벌써부터 사장실에서 거드름피우고 싶진 않아. 자, 박카스부터 한 병 하시고 진정하라고.”
케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부터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다. 하긴 그동안 많이 참았지.
끼릭! 꿀꺽꿀꺽.
“하아. 수한 씨, 오늘은 꼭 대답을 듣고 가야겠어요. 왜 인터넷 회사들이 용인밸리에 입주하겠다는데 모두 거절했어요? 미국에선 지금 파이오니어 프로토콜이 미국국방정보체계국(DISA)의 승인까지 받아서 대박 치고 있다고요. 한국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죠.”
“누가 안 한데? 3지구 공사 완료되면 입주시킬 거야. 1지구와 2지구는 반도체와 관련 업계들이 먼저 들어와야 한다고. 퀄컴, ARM, Flomerics, 히타치 케미컬, DISCO, 시부야…. 모두 한국 지사를 세우는 일이니 그것부터 해야 해.”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1~2년 뒤면 다음이나 네이버가 알아서 잘 생겨날 테고, 알아서 잘 클 거다.
현재로선 내 관심 밖의 사업이다. 미디어 시대가 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모든 게 반도체 설계나 제조업체잖아요. 인터넷 회사 몇 개는 시작해야죠.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지금 파이오니어 웹 메일 신청자가 몇 명인지 아세요? 파이오니어를 오픈한 지 불과 두 달인데 사용자가 자그마치 187만 명이에요. 하루에 3만 명씩 늘어나고 있다고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미국에선 재훈 씨가 웹 디렉토리 구축과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요. 한국에서도 시작해야죠. 수한 씨는 파이오니어 코리아! 뭐 그렇게라도 이름 붙이고 벤처 하나 잡아서 외주시키고 이래야죠. 이거 조만간 광고비만 긁어모아도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재훈이는 원래 역사에서 야후가 차지했던 길을 잘 찾아가고 있다.
검색 엔진 기반이긴 하지만 포털 사이트의 초기 형태를 갖춰 가고 있다.
야후가 1994년에 시작했으니, 2년은 빠르다. 현재로선 검색 엔진과 보안 측면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췄다고 하겠다.
하나 그건 재훈이의 사업이지 내 사업은 아니다.
검색, 서버, 보안 이 세 가지 기술력 확보가 나의 주목적이다.
“내가 그쪽에 흥미가 있었으면 뭐하러 이렇게 힘든 제조업을 시작했겠어. 현재 우리 회사는 인트라넷 서버만 팔아도 충분해. 심지어 케이처럼 생각하고 나를 찾아온 사람도 많아. 모두 재훈이에게 보냈으니까, 조만간 누가 재훈이한테 라이선스를 받아서 사업을 시작할 거야. 그때 입주시켜도 늦지 않아. 난 서버와 통신칩에 집중할 거야.”
내가 슈퍼맨도 아니고, 인터넷 사업이 아무리 대박이라고 해도 같이할 수는 없다.
내 사업은 반도체를 기반으로 훗날 스마트폰, 클라우드 사업까지 연계되어야 하며 나중에는 순수 인터넷 사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질 거다.
진입 장벽이 높은 사업이니 지금부터 핸드 터미널과 인트라넷 서버를 중심으로 꾸준히 기술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발자들도 슈퍼맨이 아니다.
비슷한 기술 카테고리 내에 있어야 개발에서 첨단을 달릴 수 있다.
“부품으로 쓰는 반도체는 대부분 신성이나 대현 거잖아요. 수한 씨한테 떨어지는 건 별로 없어요. 통신칩 라이선스와 조립 수익이 전부잖아요. 이제 유동 자금도 150억밖에 없어요. 위험하다고요.”
“조만간 내 반도체를 생산할 거야. 걱정 마.”
“그 조만간이 언젠데요? 1년 뒤? 2년 뒤?”
“뭔 소리야? 지금도 웨이퍼 월 200장 규모는 돼. 석 달 뒤면 3만 장 단위로 양산할 수 있을 거야. 문제없어.”
라인이 거의 준공되었으니 이제 곧 웨이퍼 생산량은 3천 장부터 시작해 석 달 뒤엔 3만 장까지 쭉쭉 올라갈 거다.
2지구, 3지구 라인마저 준공이 완료되면 대현은 물론 신성에 근접한 물량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럼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우리나라 회사가 다 해 먹을 수 있다.
“하아, 파라곤 물주들은 재훈 씨가 아니라 수한 씨를 보고 투자한 거예요. 재훈 씨에게 인터넷 사업을 모두 맡기면 안 돼요.”
“파라곤에서 도와주기로 했잖아. 전문가를 붙였다고. 누구였지?”
“윌슨!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사업 전략은 수한 씨가 월등한데. 한국에서 파이오니어를 한층 램프 업 시키고 미국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윌슨이라면 영국에서 본 적이 있다.
케이슨이 케이 구출 작전에 보낸 사람이었던 만큼 능력은 탁월할 거다.
그런 이가 재훈이를 돕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겠네.
“케이, 당신이 불안해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아. 하지만 파라곤 승계까지는 2년 정도 남았잖아. 내 약속하지. 1년 내에 당신의 위치를 경쟁자와 동격! 그리고 5년 뒤에는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높이 올려 주지. 재훈이 사업은 잘되든 안 되든 그냥 보너스로 생각해.”
“내가 아니라 외할아버지와 물주들 모두가 불안해한다고요. 수한 씨가 나서야 해요.”
“하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분들은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투자자들이야. 그분들이 본 것은 인터넷 사업이 아니야. 인터넷 사업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에 투자한 거라고.”
“설마….”
인터넷 사업은 경기 흐름에 매우 민감하다.
수익 모델이 대부분 광고에 의존하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제조업 대비 진입 장벽이 낮다.
오히려 재훈이의 리스크를 나눠 주기 위해서는 내가 서버 시스템을 시장에 안착시키고, 인터넷 관련 전자 기기를 하루빨리 시장에 출시하는 것이 답이다.
물주들은 내 핸드 터미널과 보안 시스템을 보고 투자한 거다.
“내가 대신 전화해 줄까? 그분들이 케이를 터치하지 않는 것은 후계자 시험을 하는 게 아니야. 지금 행동이 정답이니까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거라고. 불안해하지 마.”
“저, 정말?”
“그렇게 불안하면 은근슬쩍 윌슨한테 전화해서 물어봐. 케이슨 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크읍!”
케이답지 않게 사레들린 듯 헛기침을 한다.
명석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불안한 마음에 현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거다. 이제야 조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네.
끼릭.
나는 박카스를 한 병 더 권했다.
커피보다 맛도 좋고 효과는 더 좋지. 목이 타는지 꼴깍꼴깍 잘도 마신다.
탁!
“좋아요. 1년 내에 내 위치를 시타델과 동격으로 만들어 준다니, 수한 씨는 인터넷 서버 말고 다른 것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역시 경쟁자가 시타델. 원래 역사에선 파라곤의 이름이 시타델로 바뀐다.
내가 껴들지 않았다면 후계자 경쟁에서 파라곤 본류가 외부에서 굴러 온 파벌에 졌다는 말이네. 그럼 케이가 파라곤의 이름을 계승하려는 후계자군.
“응, 당연하지. 서버는 먼 훗날 대박을 칠 제품이거든.”
“멋 훗날 제품은 내가 살아남으면 지원할 테니, 1년 안에 승부 낼 제품이 뭔지나 말해 봐요. 핸드 터미널 업그레이드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그것만으론 현상 유지밖에 안 돼요.”
“에그펫처럼 작고 예쁘고….”
“작고 예쁘고.”
“핸드 터미널처럼 구동 칩이 있고….”
“구동 칩이 있고.”
“서버처럼 저장 공간도 있으며….”
“저장 공간?”
“인터넷처럼 재미있고 혁신적이지.”
“재미있고 혁신…. 혹시 ‘휴대폰의 꽃’이라는 제품이에요?”
“글쎄, 그 일부라고 해야겠지.”
“대체 뭐예요!”
“하하하.”
오늘따라 케이를 놀리는 게 재미있었다. 나도 긴장한 걸까? 원래 역사 대비 조금 빨라졌는데… 출시해도 될까?
- *
햇살마저 풍요롭게 느껴지는 6월 말.
뜨거운 여름이 되기 전에 신규 라인의 셋업을 마쳐 참으로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땡볕 아래에서 고사를 지낼 뻔했다.
“자! 이제 팀장님들 덕담 한마디씩 하시고, 돼지 머리가 서운해하지 않게 금일봉 팍팍 꽂아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나운영 부장님.”
이 비서가 마이크를 잡고 고사를 지내고 있다.
“생산 물량 사고 없이 쭉쭉 흐르게 해 주시고, 흐르는 랏마다 수율 100프로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하하!”
나운영 부장이 특유의 넉살을 늘어놓으며 돼지 머리 앞에 막걸리를 올리고 넙죽넙죽 절을 하더니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돼지주둥이에 물린다.
“오더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게 해 주시고, 한번 잡힌 고객은 빠져나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 주십시오.”
“신제품 퀄랏은 단박에 패스되고, 불량은 알아서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
“신제품마다 대박 치게 해 주시고, 변경점마다 사고 없이 품질 확보되게 해 주십시오.”
권 부장을 따라 이제 개발팀장으로 자리를 잡은 김 과장과 송 과장도 절을 한다.
미리 준비했던 돈 봉투를 돼지 코에 꽂고, 귀에도 꽂는다.
“마지막으로 유수한 사장님!”
와아아아!
라인 앞에 잔뜩 모여 있던 직원들이 환호성이 지르니 그 앞에 있던 나운영 부장이 몇몇 직원들과 함께 양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봉투, 봉투 열렸네!’ 하고 운을 뗀다.
하긴 라인 셋업에 밤잠을 잊어 가며 열심히 했으니, 오늘 저녁 회식의 주인공은 나운영 부장과 셋업 멤버들이다.
“이 라인에서 나오는 제품마다 날개 돋친 듯 팔려서 직원들 모두 부자 되게 해 주시고,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게끔 직원들 모두 보살펴 주십시오.”
나는 막걸리 잔을 빙글빙글 돌려 고사상에 올려놓고 절을 했다.
그러곤 007가방을 툭 하니 돼지 머리 앞에 내려놓았다.
숨죽인 좌중을 둘러보며 잠깐 뜸을 들인 후 딸깍하고 007가방 뚜껑을 열었다.
와아아아!
“사장님께서 보너스를 주셨습니다!”
“대박! 모두 수표야!”
10만 원짜리 수표로 가방을 꽉 채웠더니 대충 5억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나눠주면 대략 20만 원씩 돌아갈 것이다.
“회식비는 별도로 영수증 처리해 드릴 테니, 맘껏 즐기세요.”
와아아아아!
“사장님! 대박!”
“멋쟁이!”
“사랑해요!”
나는 환호성을 뒤로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회식비는 내가 대 주기로 했으니, 돼지 머리에 꽂힌 돈은 내기 돈으로 변해 라인 앞마당에서 족구나 축구 시합이 이어질 거다.
고사상을 차리기 전에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직원들이 열심히 줄을 긋고 있었으며, 일명 밥차라고 불리는 이동식 뷔페 차량들과 맥주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서 있다. 혹시나 싶어 구급차까지 불러 두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업무를 제쳐도 무방하리라.
내년부터는 이맘때쯤 직원 가족들도 초청해서 근사한 파티도 해 봐야지 싶다.
지금 심어 놓은 나무들도 1년 정도 지나면 보기에 근사해질 테니까.
나는 사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무실로 걸어갔다.
모두들 라인 앞마당에서 신규 라인 고사를 빙자한 ‘명랑 운동회’를 즐기기 시작했기에 사무실은 텅 비다시피 했다.
“김 팀장님, 핸드 터미널 도요타 전용 랏 좀 급히 뽑아 주셔야겠는데요.”
“고 대리, 공정 스펙 입력하고 있잖아. 며칠 전부터 이거만 집중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어라 그런데 김 과장과 고 대리는 벌써 사무실에 복귀해 있다.
일이 있나 보네. 마침 잘됐다. 두 명 모두에게 볼일이 있는데 말이다.
우리 회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양산에서 제품을 뽑으려면 컴퓨터에 먼저 매달린다.
개발자가 변경되는 공정 스펙을 전산에 올리고, 그걸 설비 엔지니어들이 구현 가능한 스펙인지 검토하고, 검토가 끝나면 양산 사람들이 전산에 등재된 스펙을 설비에 카피하고, 핸드 터미널로 랏 카드와 원부자재 랏의 바코드를 찍어 투입하면 물량이 쭉쭉 흘러간다.
다소 복잡하고 일부러 일을 어렵게 만든 것같이 느껴질 수 있지만, 이게 가장 효율적인 21세기형 랏 관리 방식이다.
품질 불량을 사전에 방지하며, 문제가 발생되면 해당 랏의 이력을 추적할 수 있다.
전산 입력 데이터를 근거로 문제 해결의 단초를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사실, 오늘 아침 수량이 변경됐거든요. 총 1만 8천 대입니다. 8천 대가 늘어났으니 기간을 사흘 더 연장해 준다고 하네요.”
“너무한 거 아냐? 도요타 전용으로 부품 변경해 달라고 해서 지금 이 짓을 하는데, 뭔 퀄 샘플이 그리 많이 필요해.”
“퀄 샘플이 아니고, 그냥 리스크 양산이라던데요.”
“뭐? 리스크 양산?”
“미국 도요타 공장에서도 쓰는데, 퀄은 필요 없대요.”
“아휴, 어쩐지 물량이…. 근데 부품 변경을 왜 해?”
“일본 공장이 본사잖아요. 제품 스펙이 미국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아야 한대요.”
“어이쿠야.”
도요타 자동차에 납품하는 건으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올까 하다가 이왕 봤으니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 사장님.”
“내가 좀 도와줄까요? 나 스펙 입력 잘해요.”
“아무리 그래도 개발팀장이 사장님보다 못하겠습니까. 하하.”
“오늘 하루는 좀 쉬지 그래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고 대리가 저를 안 놔주네요. 이런 날에 애들 시킬 수도 없고요.”
“아! 저도 이런 날엔 쉬고 싶죠. 절 미워 마시고 영업팀장님을 탓해 주세요.”
나는 인사만 하고 운동장으로 휙 사라지려는 고 대리를 붙잡아 김 과장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간혹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팀원들이 힐끗힐끗 보고 지나간다.
얼른 나가서 놀라고 손을 휘휘 저어 주었다. 대부분 신입사원들이다.
개발 1, 2팀에 각기 150명이나 붙여 줬는데, 아직 제대로 굴리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단순 반복 작업이야 시킨다고 하지만 개발 업무가 어디 그런가. 김 과장을 비롯한 기존 개발자 50여 명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셈이다.
우리 회사에서 6개월 경력은 중견 사원, 1년 이상 경력이면 베테랑으로 칭할 정도다. 신생 기업의 한계라고나 할까.
5년만 견디시라. 당신들은 IT 업계의 전설이 될 테니까.
“뭐 어쩌겠어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정 힘들면 내가 도요타 건은 시간 좀 벌어 줄까요? 일주일 정도?”
“아닙니다. 사장님이 직접 고객에게 아쉬운 소리 하시면 좀 그렇죠. 사흘만 뺑이 치면 어찌어찌 됩니다. 여하튼 이것까지만 입력하고 사장님께서 부탁하셨던 거 보여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해요. 기다릴 테니.”
“예, 잠시만요.”
김 과장은 내가 온 이유를 뻔히 알고 있었다.
나는 김 과장에게 MP3 목업 제품을 부탁했었다. 어찌 되었나 묻고 싶었는데, 이미 도착했나 보다. 생각보다 며칠 빨리 만들어졌다.
스륵.
타이핑을 마친 김 대리가 서랍을 마구 뒤지더니 종이 박스를 내밀었다.
MP3 플레이어 시제품은 성냥갑 두 개 정도의 크기였다. 원가만 28만 원 가까이 되는 제품이다.
구동 칩이야 퀄컴 칩에 ARM 코어를 삽입해 최저가로 만들었지만, Flash 메모리는 아직 시기상조라 저장 메모리를 SRAM으로 대체했더니 용량이 32메가밖에 안 되는데 가격은 훅 하고 올라가 버렸다.
재훈이의 파이오니어 플랫폼을 시장에 안착시키려면 이 제품이 필요하기에 다소 비싼 부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동작은 시켜 봤어요? 잘돼요?”
“그럼요. 사장님이 직접 디자인하셨는데요. 퀄컴이나 ARM사 담당자들이 화들짝 놀라던데요. 그렇게 단순한 로직으로 펌웨어가 동작할 줄은 몰랐다고 말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ARM사는 저 전력 CPU를 개발하고 있던 회사, 그리고 퀄컴의 통신칩 개념은 내가 익히 알고 있으니까.
두 회사의 개발자를 불러다 놓고 핸드 터미널 구동칩에 오디오 재생 기능을 더하고, ARM사의 코어 로직으로 그걸 단순화시켰을 뿐이다.
오히려 구동칩을 만드는 것보다 두 회사 모두 20%나 되는 지분을 가진 대주주임에도 한국 지사를 세우게 하는 게 더 힘들었다.
휘리릭, 틱! 틱!
회전형 버튼을 돌리고 4분할된 버튼을 눌러서 아무 곡이나 선택했다.
우연찮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흘러나온다. 기억으로는 엄청 비트가 빠른 노래였는데, 시간을 거슬러 지금 들으니 조금 빠른 발라드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음질이 생각보다 엉망이다. 외형도 만족스럽지 않다.
직관적인 버튼과 펌웨어 UI는 만족스러운데, 컴퓨터와 연결하는 잭이 페러럴 포트라 무척 투박해 보인다.
역시 설계 도면으로 보는 거랑 실제로 만져 보는 것은 전혀 감각이 다르다.
음질은 뭔지 모를 불쾌감이 있다. 들릴 듯 말 듯 표현 못 할 잡음이 끼어든 느낌.
청음 영역을 벗어난 뭔가가 머리를 울린다. 이어폰을 뺐다.
나도 그렇고, 김 과장 역시 슈퍼맨이 아니다. 전문가가 필요하다.
“앰팩(MPEG)을 정말 잘 다루시네요.”
“내가 디자인한 그대로 했잖아요. 당연하죠.”
“아! 그러네요.”
오히려 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앰팩이라는 단어다.
원래 역사 대비 MP3 플레이어를 빨리 시작하다 보니, 오디오 CD에 담겨 있는 WAV 파일을 앰팩 파일로 변환해 추출하게 되었다.
앞으로 1년 뒤, 1993년 중반 MS 윈도우에서 멀티미디어 플레이를 본격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오디오 파일 압축 기술이 발전하다가,
1995년도에 MPEG-2 Part.3라는 오디오 파일의 끝판왕을 탄생시키고 긴 이름 대신 MP3라고 불리게 된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MS가 오디오 파일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기술로 내 회사를 공격하기 전에 제품을 만들고 구동 칩도 만들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미국 애들과 소송이라도 붙으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김 과장, 음질에 잡음이 낀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해요?”
“그것 때문에 보고를 못 드리고 분석부터 해 보려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인을 밝히지 못했나 보죠?”
“분명 잡음이 있는데, 칩에서 생성되는 시그널과 보드에 흐르는 시그널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현상부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으흠, 아날로그도 아니고 디지털 기기인데….”
디지털 기기가 아날로그 제품보다 개발하기 수월한 이유는 시그널 패턴을 측정하면 원인 분석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한데 현상부터 이해하기 어렵다라….
회귀하기 전에 MP3를 한번 뜯어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걸.
여하튼 겸사겸사 MP3의 원래 개발자를 찾기는 찾아야 할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고 대리, IT 기업 중에 황씨와 문씨가 사장인 회사를 찾아봤어요? 이 앰팩 비슷한 걸 개발 중일 텐데. 내가 박람회에서 팸플릿을 본 것 같아요.”
“예. 디지털 캐스트? 이름이 정확하지는 않은데요. 그 회사 사장들이 황하정, 문수광 씨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오디오 회사가 아니던데요.”
“아니라고요?”
“디지털 푸시 기술(Digital Push Technology)? 여하튼 인터넷으로 팩스를 보내는 기술을 연구 중이라고 하던데요.”
“그게 오디오 기술이랑 비슷한 겁니다. 연락처 줘요. 내가 한번 만나서 여기 입주시키게.”
“에, 용인밸리에 입주시키신다고요? 직원이 15명밖에 안 되던데….”
디지털 푸시 기술은 인터넷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을 통칭하는 말이다.
인터넷 팩스를 만들다가 음성을 전달하는 식으로 아이디어가 발전되었나 보네.
“후후, 연락처나 줘요. 수고 많았어요.”
“날짜만 말씀해 주시면 여기로 오라고 하겠습니다. 사장님이 굳이 가실 것까지는 없으세요.”
“좋네요. 시간 되시면 언제든지 오라고 해요. 용인밸리로 정중히 모시겠다고.”
내가 디지털 캐스트에 집착하는 것은 원래 역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봤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 다큐를 보기 전까지 MP3 종주국이 한국인데, 어째서 대박은 애플이 쳤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시작은 신성 계열인 한새미디어가 생산과 마케팅을 도와주겠다고 디지털 캐스트에 접근하면서부터였다.
자금과 인프라가 부족했던 디지털 캐스트는 흔쾌히 한새미디어의 제의를 받아들여 특허 지분의 50%를 넘겼는데, 특허가 공동 소유가 되자마자 한새미디어는 디지털 캐스트의 시제품을 시장에서 고사시켜 버리고 자체 제품을 생산하는 배신을 때린다.
당연히 황하정 사장을 비롯한 디지털 캐스트 사람들은 개발비만 날리고 수익을 내지 못해 길바닥에 나앉는다. 전형적인 대기업의 횡포라고 하겠다.
더 웃긴 건 소송을 제기했는데, 검찰은 한새미디어 눈치를 보느라 기소조차 하지 않았고, 한새미디어는 한발 더 나아가 디지털 캐스트가 원가 이하로 제품을 납품하면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놔주겠다며 횡포를 부렸다.
참다못한 황 사장이 한새미디어와 결별하고 살길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결국 미국 다이어몬드사라는 회사가 MP3 플레이어의 가치를 알아보고 백기사로 나서게 된다.
디지털 캐스트는 기사회생했고, 다이아몬드사는 디지털 캐스트의 기술을 바탕으로 ‘리오PMP300’이라는 MP3 플레이어를 만들어 세계 최초라고 미국 시장에 발표한다.
한새미디어가 출시한 제품은 고작 300대가 팔린 반면 PMP300은 분기에 10만 대가 팔리는 대히트를 친다.
미국인들이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가 미국에서 나왔다고 인식하는 이유라고 할 것이다.
한새미디어의 발목 잡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반격할 돈이 생긴 디지털 캐스트가 다시 소송전에 나서자 한새미디어는 세기의 뻘짓을 한다. MP3 특허 무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디지털 캐스트가 특허 지분 50%를 다이아몬드사에 넘겨 버리자 고소인이 미국 회사인 다이아몬드사로 바뀌게 된다.
이에, 한새미디어는 스스로 특허 권리 범위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소송을 교차시켰고, 그 와중에 경영 상태가 악화된 MP3 사업부를 레인콤에 매각한다.
레인콤은 ‘아이리버’라는 브랜드로 한동안 선전했지만 애플이 아이팟 셔플과 아이팟 나노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시장을 장악하자 결국 축소시킨 MP3 플레이어 특허마저 시그마텔이라는 미국 회사에 팔아 버린다.
그 뻘짓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다이아몬드사의 MP3 특허마저 매입한 시그마텔은 MP3 플레이어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2007년에 애플, 신성, 샌디스크 등 유수 업체들을 상대로 대규모 소송전을 시작한다.
시그마텔은 공장은커녕 사무실도 없이 특허로 돈을 버는 일명 ‘특허괴물(Patent Troll)’ 회사로 제조, 판매 등 사업 활동을 하지 않으니, 소송을 당한 회사들은 반소(反訴) 제기나 크로스 라이선싱 전략도 펼칠 수 없었다.
결국 신성을 포함해 애플, 샌디스크 등은 대규모 로열티를 일시불로 물어주는 식으로 법정 밖에서 합의를 했다.
대략 6년간 MP3 플레이어 관련 기기는 총 13억 7천여만 대가 팔렸다고 소송에서 규정되었으니, 시그마텔은 대당 최소 2불의 로열티만 받았다고 해도 27억 달러가 넘는 돈을 번 것이다.
즉, 한새미디어는 로열티로만 3조에 육박하는 아이템을 허공으로 날려 버린 꼴이다.
최소한의 상도의만 지켰어도 벌어들였을 어마어마한 돈을 날린 것도 화가 나지만, MP3 종주국이라고 대대로 자랑할 수 있었던 기술적 자부심도 함께 날려 버린 것은 정말이지 뼈아프다.
나는 이런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황 사장을 찾아 MP3 플레이어에 대한 사업 아이템으로 협업을 할 생각이었다.
원래 역사에서 음질 문제를 해결했을 기술, 현재 패러렐 포트에서 USB 포트로 변경하는 기술도 그렇고, 최후까지 놓지 않았던 음원 사업조차 파이오니어에 접목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양반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의 기술을 도둑질하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기술의 원래 주인은 사업 실패자가 되고, 그리 만든 놈은 그 일로 처벌도 안 받고, 그 기술로 애플은 대성공을 거두고, 특허로 떡고물 주워 먹은 놈은 조 단위의 돈을 벌고…. 정상이 아니잖나.
‘원래 주인을 찾았으니 파라곤을 불러야겠네. 윌슨이 좋겠어. MP3는 미국에서 승부를 봐야 하고, 결국 파이오니어를 매개로 사업을 해야 하니까.’
- *
딸깍. 뚜벅뚜벅.
“어서 오십시오. 스마트 클라우드 유수한입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지털 캐스트 황하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황 사장님.”
“저희 기술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계실 줄 알았다면 혼자 오지 않았을 텐데. 단순히 용인밸리 입주 면담인 줄 알고….”
“하하,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황 사장의 마음이 급한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다들 그렇다. 처음엔 장밋빛 꿈만 보고 사업을 시작했다가도, 막상 계좌에서 돈이 술술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이렇게 변한다.
적자를 견뎌 내야 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거든. 상황이 안 좋을 땐 그 시간이 영원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내 경우에도 대박 투자를 이끌어 준 케이라는 존재를 만나지 않았다면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저희 회사는 인터넷 푸시 기술이 메인입니다. 여기 설명 자료 읽어 보시면….”
“아, 예. 듣겠습니다.”
“영어로 해야 하나요? 옆에 외국 분이 계신데….”
“편하게 한국말로 하시면 됩니다. 여기 케이 양은 한국말을 잘합니다.”
“안녕하세요.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케이라고 합니다.”
“저는 김근업 과장입니다. 스마트 클라우드 개발 1팀장입니다.”
케이와 김 과장이 탁자를 가로질러 명함을 건네자, 황 사장은 살짝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제야 명함을 건넨다. 명함 교환도 잊을 정도로 긴장했나 보다.
“푸시 기술이라는 개념은 컴퓨터로 출력되는 모든 것을 각종 머신에서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에 팩스를 예로 들자면….”
황 사장이 서둘러 명함을 교환하고는 재차 열심히 설명했지만, 굳이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었다.
팩스 자체가 사라질 것이고, 황 사장도 이런 아이디어는 사업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조만간 깨닫게 되니까.
나는 설명이 잠시 끊어지길 기다렸다가 질문을 빙자해 화제를 돌렸다.
“결국 황 사장님은 음성 파일도 푸시할 생각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한데 그러기 위해선 디지털 음원을 플레이할 머신부터 개발해야 하기에 연구 중입니다. 기존 칩을 조합하면 연구 단계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상품화를 위해서는 디지털 음원 재생에 적합한 전용 칩이 필요합니다. 현재로선 초기 설계안까지만….”
탁!
“칩뿐이겠습니까? 시제품도 있지요.”
나는 MP3 플레이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황 사장은 그게 뭔지 알아본 듯 눈이 동그래진다.
아마도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제품과 흡사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설치되어 있던 스피커에 연결해 음악을 틀어 보았다.
카펜터스의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중간중간 잡음이 낀다.
‘난 알아요’처럼 강한 비트의 음악에 비해 이처럼 조용한 음악은 잡음이 훨씬 정확하게 들렸다.
“헉! 앰팩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가 아니고 MPGE 플레이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제품은 ‘앰팩(M-Pack)’이라고 이름 붙여야겠다.
“이게, 저희가 황 사장님을 모신 이유입니다. 모바일로 뮤직 플레이어를 고안했는데, 음질 문제도 그렇고 들고 다니기에 무척 투박합니다. 같이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합니다만.”
“저희 회사하고 말입니까?”
“예. 용인밸리에 입주하면 세금 감면 혜택도 받을 수 있고, 국영 연구소 활용도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여기 투자사도 있으니 기술력만 증명하신다면 투자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어, 어째서 저희 회사를….”
“뭐, 인연이라고 해야겠지요. 우연찮게 같은 기술을 연구 중인 회사고, 같은 신생 기업이니 서로 도우면 좋죠. 저희도 시제품을 먼저 만들었다뿐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아하, 그러시군요. 여하튼 잡음 문제는 저희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제품 크기를 보아하니 수은 전지를 사용하신 거지요?”
“당연하죠. 일단 모바일로 구현하려면 크기가 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잡음과 관련이 있나요?”
“예. 아마도 수은 전지를 썼다면 보드에 바로 장착하셨을 것 같은데, 그러면 수은 전지 근방에 집중되는 기전력을 접지시키기가 어려워 근처 회로를 지나가는 시그널이 찌그러집니다. 보드와 분리되는 건전지를 사용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전혀 뜻밖의 원인이다.
아, 그래서 한국에서 출시된 MP3가 대부분 건전지를 쓰고 있었구나.
애플이 MP3를 출시했던 시기엔 충전식 배터리로 갈아탔으니 이런 문제가 아예 없었을 수도 있겠다.
“아, 그래서 제가 테스트했을 땐 시그널이 정상이었군요.”
“예. 테스터는 접지가 되어 있으니 테스트 봉을 회로에 갖다 대면 시그널이 단숨에 안정됩니다.”
김 과장도 단번에 이해를 한다.
여하튼 이런 노하우를 정보 보안 동의서도 없이 말하다니, 아직 황 사장은 엔지니어지 사업가가 아니다.
이러니 대기업에 단물을 빨렸지 싶다.
황 사장님, 나를 만난 것을 다행으로 아세요.
“모바일은 외장이 미려해야 합니다. 건전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수은 전지로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으흠… 그럼 수은 전지 주변으로 폐쇄 회로를 만들고, 그 끝단에 적당한 커패시터를 달아야 합니다. 원가가 좀 올라갑니다.”
“전력 회로는 따로 뽑아야 하니 보드 레이어도 늘려야겠군요.”
“예. 김 과장님 말씀도 맞습니다만 그 또한 원가 상승의 원인이 되죠. 그래서 저희 회사는 해당 기술에 대해서는 특허만 출원해 두고, 제품을 만든다면 건전지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엔지니어끼리 모이니 벌써부터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이 나온다.
“하하, 좋네요. 그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 외장 디자인에서 패러럴 포트도 작게 만들고 싶은데, 아이디어가 있으십니까?”
내가 직접 미래의 USB 포트를 언급하기 뭐해서 질문을 대신했다. 개발자들이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사실 데이터 코딩을 할 수 있는 전용 칩이 있다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전원 단자 두 개, 데이터 입출력 단자 두 개만 따로 뽑아서 꾸미면 되는데, 어찌 되었든 컴퓨터와 연결해야 하니 패러럴 포트와 연결할 수 있는 전용 케이블을 끼워서 팔아야죠. 그 또한 원가가 올라가는 일입니다.”
황 사장의 얘기를 들으니 이미 USB 포트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역시 사업가보단 엔지니어에 가깝다.
원가가 올라가면 잘 안 팔릴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솔루션을 자체 검열하고 있다.
아무리 전용 칩을 만들기 어려웠다고 해도 아이디어 대비 개발이 늦어진 이유일 것이다.
하나 황 사장이 우려하는 것과 전혀 달리 MP3는 가격이 판매에 크게 영향을 주는 제품이 아니다.
문화적 충격을 주는 트렌디한 제품이라, 가격이 조금 비싸도 미친 듯이 팔린다.
오히려 고급 사양으로 멋지게 꾸밀 수 있다면 비쌀수록 더 잘 팔리는 경향도 있다.
신혼부부가 결혼 예물로 반지를 산다면 금반지보다는 이왕이면 다이아 반지를 선호하는 심리라고 하겠다.
아이팟도 저렴한 200불짜리부터 700불을 호가하는 모델까지 가격대가 천차만별이었다.
“하하하! 정말이지 타고난 엔지니어시군요. 당장 계약을 맺어야겠습니다. 디지털 캐스트와 이 뮤직 플레이어를 상용화시키고 이윤을 나눴으면 합니다.”
“헉!”
“기술 개발에 같이 참여하시면, 마케팅은 여기 케이 사장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리고 전용 칩을 개선해야 한다면, 퀄컴과 ARM사가 입주해 있으니 같이 협업하세요. 기술 협업에서 나오는 각종 특허는 저희가 51프로 지분을 가졌으면 합니다. 특허 실행권은 디지털 캐스트에도 있으니 원하신다면 자체 제품을 생산하셔도 되는 조건입니다.”
“어, 어….”
“유 사장님,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니신가요? 특허 지분 조정과 마케팅 비용에서 나중에 서로 이견이 있을 수 있어요.”
“압니다, 케이 사장님. 한데 지금 우린 디지털 캐스트의 노하우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들었어요. 우리가 ‘베이비 벨(미국 지방 통신 회사)’들을 이용해 마케팅할 거라는 사실도 알려 줄까 싶었을 정도이니, 지분 배분 정도는 디지털 캐스트에 알려 줘야죠.”
“베이비 벨 얘기는 왜…. 아우, 수한 씨.”
내가 계약상 우위를 점하려는 케이의 의중과는 반대로 중요한 정보 하나를 더 털어놔 버리니 그녀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황 사장의 얼굴에서 놀람이 가시지 않는다.
“지금 하신 말씀을 모두 믿어도 되는 겁니까? 이거… 정말… 믿기지가 않는데요.”
“다시 찾아오실 땐 계약서를 들고 오시죠. 용인밸리 입주 계약서는 이미 용인 시청에 배치되어 있으니 살펴보시고요.”
“계약서를 저희가 작성합니까?”
“특허 지분율만 지켜 주신다면 세부 항목이야 별문제 있겠습니까? 될 수 있으면 수정 없이 계약하겠습니다. 모쪼록 살살 해 주십시오. 하하하!”
“사, 살살 하다니요. 저희와 손만 잡아 주신다면 제가 사장님을 업고 다녀야죠.”
황 사장이 탁자 건너편에서 손을 내밀기에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해 주었다.
“아휴, 두 분 사장님들을 제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진정들 하세요. 바닥부터 시작해 계약서를 몇 번이나 수정하려고 그러시나요. 표준 계약서 포맷이 몇 개 있으니까 일단 이것들부터 살펴보세요.”
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가방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표준 계약서라고 부를 만한 계약서였다.
특허 지분율, 개발 및 마케팅 비용 정산, 수익 배분 등등 빈칸만 채우면 되는 계약서들이 잔뜩 있었다.
그중에 지분 교환 방식으로 계약을 하는 것이다. 서로의 주주가 되는 것이니 신사협정에 가깝다고 하겠다.
유심히 보고 있자니 황 사장도 그 포맷이 구미에 맞았나 보다.
“유 사장님, 저는 이 지분 교환 방식이 마음에 드는군요.”
“으흠! 생각해 볼 만한 계약이군요. 교환비를 정하면 경비 지출과 수익 배분이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사업이 폐지되지 않는 한 3년 뒤 지분 교환비를 재협상하는 조건도 상당히 공정하군요.”
나는 수익 배분을 염두에 두고 3 대 1 정도로 수익 배분을 하려면 내 지분을 얼마나 줘야 하나 계산을 해 보았다. 내 지분을 0.1%만 준다 해도 디지털 캐스트는 단박에 내게 먹히는데.
내가 한새미디어 같은 악덕 기업도 아니고… 0.01%를 줘야 하나? 그럼 비용 정산을 디지털 캐스트가 감당 못 할 텐데? 계산이 복잡해진다.
고민하는 와중에 황 사장이 말을 꺼냈다.
“특허 지분만 51 대 49로 하신다면, 교환비는 10 대 1이든 20 대 1이든 상관없습니다.”
“으음, 20 대 1이라고요?”
“저희 회사 자금 사정이 뻔한데, 경비 지출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솔직히 20 대 1만 되어도 마케팅 비용 정산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일단 저희 회사는 살아남는 게 최우선 과제입니다.”
황 사장은 비용 정산에 주목을 했는지 20 대 1이라는 엉뚱한 얘기를 한다.
수익 배분을 5% 이하로 받겠다는 말인데, 그리 계약하면 이 계약은 결정적인 순간에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무리 욕심 없는 엔지니어라도 MP3 사업이 얼마나 대박인데 5% 정도의 수익에 만족할 수 있겠나. 견물생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에휴! 황 사장님, 지분 교환 계약은 어려우니 다른 포맷을 검토하세요.”
내가 말을 못 하고 있자 케이가 끼어든다.
“쓸 수 없다고요?”
“예, 황 사장님. 디지털 캐스트가 상장 가능성이 있나요? 자본금도 규모가….”
“예. 아직은… 그렇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는 상장만 안 했다뿐 순수 자산 가치가 10억 불 이상이에요. 지분 교환비를 따지기 이전에 지분 0.1프로만 교환하자고 내놓으면 디지털 캐스트는 그 즉시 회사 주인이 바뀐다고요.”
“…아!”
“그러니까 이 A계약서라고 되어 있는 게 기술 협정에 한정된 포맷이에요. 그걸로….”
“아닙니다. 이 지분 교환 방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희 회사의 가능성을 보고 유 사장님께서 회사 대주주가 되어 주십시오. 지분을 취하시고 투자를 해 주십시오. 30프로 정도면 어떠십니까?”
황 사장의 원래 생각이었나 보다. 나를 기술 협업의 대상이 아니라 투자자로 둔갑시킨다.
절박한 마음에 나를 믿고 싶지만 보험은 있어야 하기에 내 회사 주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지분 교환을 하고 싶었던 거군.
“굳이 저를 대주주로….”
“수익 배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습니다. 이 계약은 3년간 유지되니 유 사장님이 대주주가 되면 저희 회사는 최소한 3년간은 아무 걱정 없이 버틸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시간만 주어진다면 우리 회사도 커 나갈 수 있습니다. 당당히 상장해서, 스마트 클라우드와 10 대 1, 3 대 1 지분 교환할 수 있는 회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도와주십시오.”
“3년이라는 시간에 주목하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이거 앰팩 플레이어를 보니 저희 아이디어와 비슷해서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완벽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희는 전문가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네, 믿고 싶네요. (당연히 믿지. 3년이 아니라 1년도 안 걸릴걸.)”
케이가 한숨을 내쉬며 중재에 나섰다.
“휴우, 할 수 없네요. 두 분 사장님들 생각이 그러시니 스마트 클라우드 지분 0.1프로와 디지털 캐스트 지분 30프로를 제 회사 지분 3프로로 중계하는 걸로 하죠. 대신 수익 배분과 비용 정산은 모두 제 회사가 담당하는 걸로. 즉, 두 회사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돈은 제 회사 계좌에 묶여 있는 걸로 하면 되죠. 어떤가요?”
은근슬쩍 케이가 이 일에 발을 담근다. 뭐, 내 지분 0.1%로 이 계약을 할 수 있다면 해야지. 케이의 지분도 3%를 보유하게 되는 괜찮은 거래다.
“좋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 회사는 3년간 철밥통이 되는 건가요?”
황 사장의 눈이 반짝거린다.
“3년뿐이겠습니까? 스마트 클라우드랑 끝까지 함께 가야죠.”
“아, 저희 직원들이 정말 좋아하겠네요.”
“계약서 초안을 드릴 테니 직원들과 충분히 상의하고 다시 보내 주십시오. 수정해야 할 부분이 발견되면 전화 주시고요.”
“예예.”
쓱쓱.
나는 케이가 빈칸을 채운 계약서에 뒤이어 서명을 하고 황 사장에게 전해 주었다. 아마도 직원들에게 보여 주자마자 서명을 하고 내게 가져올 것이다.
그 뒤로 구체적인 기술적 얘기가 이어지다 보니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김 과장에게 황 사장의 배웅을 부탁하고 나는 케이와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 *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아.”
“호호, 처음에 앰팩 플레이어를 봤을 때는 사실 조금 실망했는데, 얘기를 듣다 보니 대박이 확실하겠더라고요. 황 사장님이라면 명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제품만 잘 빠지면 대박 나겠지?”
“물론 우려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에요. 현재 LP에서 CD로 음반 시장이 넘어가고 있잖아요. 그런 다음 다시 앰팩 플레이어로 한 번 더 넘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윌슨을 불렀잖아. 인터넷 음원 시장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기획해 봐야지. 그 양반 언제 온대?”
“그러게요. 금방 온다더니 연락이 없네요. 베이비 벨 이사들 일정 맞추기가 영 까다로운가 봐요.”
“그러게 AT&T만 데려오면 되지.”
“윌슨은 이참에 베이비 벨들까지 데려와서 수한 씨 회사의 인트라넷을 보여 줘야 한대요. 그게 이 일의 핵심이라고 하던데요?”
“쩝! 하긴 말로 듣는 거랑 실제 보는 거랑 차원이 다르긴 하겠지.”
“아뇨, 그게 아니고 AT&T랑 베이비 벨들을 경쟁시켜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응?”
서로 경쟁을 시켜야 한다고?
인터넷에 음원을 배포하는 것은 파라곤이 나서도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한국에선 SJ만 설득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 *
디지털 캐스트와의 계약은 생각보다 쉽게 성사되었고, 반대로 쉬울 거라 여겼던 윌슨의 한국 방문은 꽤 시간이 걸렸다.
윌슨이 온다기에 내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갈까 싶었는데 한사코 직접 회사로 오겠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이유가 있었다.
커다란 리무진이 들어오더니 고객을 네 명이나 데리고 왔다.
“이분이 스마트 클라우드의 CEO 미스터 유입니다.”
“오! 생각보다 젊군요. 역시 혁신 기업은 다르네요.”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나는 사우스이스트 벨(Southeast Bell)의 해리슨이오.”
“나는 AT&T의 매니저 찰스라고 합니다.”
“나는 노스웨스트 벨(Northwest Bell)의 리치몬드요.”
“나는 웨스트노드 벨(Westnode Bell)의 토마스요.”
연신 악수를 하고 명함 교환을 반복하느라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다. 회사 이름도 상당히 헷갈린다.
미국 지역 통신사를 베이비 벨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지역을 분할해 무슨 무슨 벨이라고 이름을 붙여 놨으니 그렇다.
원래 모두 AT&T 소속이었지만, 미국 정부의 독점 규제법으로 지역별로 강제로 찢어진 회사들이다.
“자! 여러분, 이곳이 그토록 고대하던 인트라넷이 확실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입니다. 여길 보시면, 여태 셋업만 하고 있는 DHL 따위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어서 봅시다. 어서요.”
“아니, 인트라넷 회선이 어디 있는 거요? 전봇대며 전선이 안 보이는데!”
“해리슨, 뭔 18세기 얘기를 하나? 당연히 지하에 묻었겠지.”
“허! 그런 건가? 지하로 뻗으면 돈이 좀 들겠는걸. 그래도 서버는 지상에 있겠지?”
할아버지들이 저들끼리 잘도 떠든다.
한때 벨연구소니 AT&T에서 한자리씩 했던 사람들인지라 다들 머리가 허였게 변했어도 기술적인 얘기를 잘도 한다.
“일단 사무실에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미스터 유! 앞장서시오. 따라가리다.”
“아, 예.”
다들 호의적이고 시원시원하다. 윌슨이 그런 양반들만 추려서 왔겠지 싶다.
- *
딸깍딸깍. 타다닥.
“이처럼 ID와 패스워드를 치고 들어가면 인트라넷이 활성화됩니다. 이미 무슨 기능이 있는지는 아실 테니 궁금하신 사항부터 중점적으로….”
“다른 건 됐고, 핸드 터미널과 연결되는 구매 시스템을 보고 싶소.”
“나는 다른데! 라인 설비와도 연결된다고 하지 않았소?”
“에이, 우리가 통신 회사지, 제조업인가? 그거 말고 에그펫인가 뭔가 인터넷 서버 관리 현황을 보고 싶소.”
순식간에 다양한 질문이 쏟아진다.
내가 1층 사무실 일부를 비워 놨기에 망정이니 안 그랬으면 직원들을 한 명씩 붙잡고 마구 질문을 해 댔을 것 같다.
“예, 일단 에그펫부터 보여 드리면 PC 통신의 기능을 일부 채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데이터 서버를 두고 파이오니어를 따로 구동해야 합니다. 여기를 누르면….”
“으흠. 고객들은 결제를 어찌하는 거요?”
“저희는 이렇게 다운로드 숫자를 확인할 수 있고, 고객의 결제 금액은 통신사가 통신료로 부과하고, 저희는 통신사로부터 월별 정산받는 식입니다.”
“이봐, 리치몬드. 음원도 이리 관리하면 되겠어. 통신료에다 건당 몇 센트만 받아도 될 것 같네. 잘나가는 앨범은 백만 장 단위로 팔리잖나.”
“해리슨 님, 그건 AT&T에서 먼저 추진키로 한 사업입니다.”
“그걸 누가 정했어?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지역 통신은 엄연히 베이비 벨 관할이야.”
“누가 음원 배급을 지역별로 할당합니까? 정부에 먼저 사업권을 제출하면 되는 거지요.”
“사업권을 제출한 것은 당신이 아니고 파이오니어지! 윌슨이 했어!”
“아이고, 신사분들께서 왜 이러십니까? 이러시지 않기로 하고 한국 오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아직 뮤직 플레이어도 안 보고 이러시면 어쩝니까?”
“인트라넷을 봐! 뮤직 플레이어도 명품이 분명해!”
어라, 할아버지들끼리 싸운다. 윌슨이 피식피식 웃으며 뜯어말리는 척한다.
윌슨 이 양반, 미국에서 이미 음원 판매권을 두고 약을 엄청 팔고 있었구만.
“그럼 계속 설명을 진행하겠습니다. 핸드 터미널과 연계되는 구매 시스템을 예로 들면….”
나는 기능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할아버지들은 옆에 있는 컴퓨터를 딸각거리며 조작을 따라 해 보고 있었다.
“보안이 우수하다더니, 이것 보게. 내가 숫자를 집어넣었더니 시스템 관리자가 아니면 접근 권한이 없다고 에러 메시지가 떠.”
“회계 시스템으로 아주 적격이구만. 비즈니스 포인트야.”
“보안은 이 시스템의 핵심 기술입니다. 여기 서버에 보안 프로그램이 깔려 있고, 같이 딸려 있는 라우터를 거쳐 신호가 각자 갈 길을 찾지요. 쉽게 말해서 유선 전화 교환기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런 시스템이 확장되면 일반 가정에서도 인트라넷을 접속할 수 있겠군요.”
“그건 인터넷이죠. 인트라넷의 확장판이자 최종 목표입니다.”
“아, 그랬지. 그랬어.”
할아버지들은 육중한 크기의 서버가 강아지인 양 쓰다듬으며 연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 마음에 드나 보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이런 시스템을 각 회사에 깔아 주는 일만 해도 돈 좀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 파이오니어가 프로그램을 제공하니, 여러분은 더 이상 유선 전화 같은 돈 안 되는 사업에 직원들 두지 마시고 이쪽으로 돌리십시오.”
윌슨은 인트라넷 사업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나는 서버와 서버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팔아먹고, 윌슨이 도와주고 있는 재훈이의 파이오니어는 프로그램을 팔아먹고, 시스템 설치와 유지 보수는 통신 회사에 맡기는 것이다.
큰 덩치의 사업을 경쟁력 있는 파트로 분할해 서로 돈을 나누는 것은 미국다운 문화라 할 것이다.
베이비 벨들엔 솔깃한 말이 분명하다.
이들도 알고 있다. 휴대폰이 좀 더 대중화되면 유선 전화는 곧 사양 산업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미국이라고 직원을 해고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직원을 안고 가면서 유선 전화 사업을 다른 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베스트다. 하물며 대박을 칠 것 같은 사업이니 더욱 솔깃할 것이다.
인트라넷 사업은 그렇게 이견 없이 영역을 나눈다곤 하지만 문제는 앰팩(M-Pack)이라 이름 붙인 뮤직 플레이어다.
나야 기기만 팔아먹어도 되지만, 파이오니어와 통신사 간에 음원 판매에 대한 수익 배분을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다.
통신사는 소비자에게 통신료만 받는 걸로 끝내고 싶지 않을 거다.
윌슨이 재훈이와 이미 얘기를 나누고 왔을 터, 나는 판만 깔아 주면 된다.
“윌슨, 왜 말을 돌리나? 여기 인트라넷이 멋지게 동작하는 것을 직접 봤으니, 미국에서 협의한 계약대로 통신 인프라 사업은 우리가 맡을 걸세. 문제는 뮤직 플레이어! 이젠 그걸 보여 줘야지.”
“회의실로 가시죠. 셋업해 두었습니다.”
“어서 가세, 어서.”
내가 끼어들 필요도 없었다. 할아버지들은 계약 성사 여부를 결정해 버리곤, 내가 가리킨 회의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 *
“여기 보이는 이것이 앰팩(M-Pack)이라 이름 붙인 모바일 뮤직 플레이어입니다.”
“오오. 작아! 아주 작아!”
“멋지게 생겼군. 지포 라이터 같구만.”
딸깍! 두구두구, 찌직.
스피커에 연결해 음악을 틀어 주니 할아버지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복잡한 믹싱으로 잡음을 느끼기 힘든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앨범에서 음원을 추출해 연속 재생했다.
LP에 익숙한 세대이니 잡음이 크게 거슬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잡음마저 조만간 해결할 테니, 나중에라도 이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딸깍딸깍.
“사용법도 아주 직관적이군.”
“내 딸도 좋아하겠어. 음악 들으면서 조깅하는 게 걔 취미거든.”
“딸이 아니라 손녀겠지. 여하튼 이거 완전 혁명이야. 소니의 워크맨은 비교도 안 되겠어.”
“AT&T가 휴대폰 배급 경험이 있으니, 앰팩 배급도 우선권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허! 저 욕심쟁이 봐라. 판매망은 우리도 있어.”
AT&T 매니저 찰스의 말에 할아버지들은 마치 세 쌍둥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앰팩은 휴대폰과 다르죠. 스마트 클라우드가 자체 판매할 겁니다.”
휴대폰이야 통신사가 사업에 필수적이지만, 뮤직 플레이어는 다르다. 그리고 앰팩 플레이어는 정말 대박이기에 굳이 수익을 나누고 싶지 않다.
“아쉽군요. AT&T의 배급 능력이면 마케팅이 아주 쉬워질 텐데….”
“우리 베이비 벨도 배급할 능력이 있네. 고려해 주게.”
“하하, 제품 판매는 이쯤 하시죠. 여러분의 본래 목적은 음원 배급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예 선을 그어 버렸다.
대박 아이템에 굳이 딜러를 끼워 넣어 수익을 깎아 먹을 이유는 전혀 없다. 윌슨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음원 배급이 통신사다운 일이긴 하지.”
짝! 짝!
“스마트 클라우드는 기기 판매를 전담하니 제외하고, 음원 수익 배분은 파이오니어 25, 통신사 25, 아티스트와 소속사 50. 이 정도가 어떻겠습니까?”
윌슨이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더 이상 앰팩 자체에 대해서는 얘기가 안 나오게 만들 필요도 있으며, 이제부터 서로 배분율을 가지고 경쟁하게 만들어 은근슬쩍 통신 인프라에 투자하게 만들어야 한다.
“통신사 비율이 25프로 밖에 안 된다고? 이거 통신 인프라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나 큰지 모르나? 윌슨 자네가 먼저 말하지 않았나. 이 사업엔 구리선이 아니라 광케이블을 깔아야 된다고!”
“길게 보셔야죠. 인프라는 한 번 깔아 놓으면 더 이상 들어가는 돈이 없잖습니까?”
“안 들어가긴 뭐가 안 들어가나? 유지 보수비용도 만만찮아.”
“하하! 윌슨, 베이비 벨들이 저리 나오니 곤란하시겠어요. 파이오니어 20, 통신사 50, 아티스트 30으로 하시지요. 저희 AT&T가 지역까지 모두 커버하겠습니다.”
“허! 혼자서 잘도 하겠다. 20, 50, 30 정도면 베이비 벨도 하겠어. 그리합시다, 윌슨.”
통신사들이 마구 얘기를 토하는 가운데 내가 툭 하니 말을 내뱉었다.
“아티스트와 소속사 비율은 최소 50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앰팩은 출시 못 하지요.”
“으음.”
“아티스트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작으면 판 자체가 안 커집니다. CD나 팔고 말겠죠.”
“앰팩이 대세가 되면 누가 CD를 사겠나. 그 크고 불편한 걸. 그럼 우리를 통해 음원 장사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아무도 못 푸는 문제입니다.”
“…….”
“그리고 아티스트와 소속사 몫이 50퍼센트란 것도 협의된 사항이 아닙니다. 소속사가 더 많은 몫을 요청한다면 파이오니어 몫을 떼 줘서 해결하겠습니다. 이 정도가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내 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초기엔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앰팩이 시장에 안착할 수 있다.
인기곡이 계약되지 않아 들을 수 없게 되면 앰팩을 누가 사겠나?
“유 사장님 의견이 타당하니 우리 몫인 50퍼센트에 대해서만 논의하시죠. 음원 시장이 대세가 되면 우리 비율은 자연스레 높아질 테니 인상 펴시고요. 그때 가서 소속사 몫을 줄이도록 하면 되잖습니까.”
윌슨은 재차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올려 간다. 이리 사장급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구 한 사람 파투 놓으면 판 자체가 깨진다.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안 된다.
“AT&T는 40은 되어야 합니다.”
AT&T 매니저 찰스가 먼저 치고 나온다. 일단 음원 시장이 꽤나 돈이 될 테니 포기는 못 하겠다는 의미다.
“베이비 벨은요?”
“으응?”
“베이비 벨은 동의하시나요? AT&T에 우선권을 주면 됩니까?”
“우선권! 아니지. 우린 38이면 돼. 우리에게 맡겨 줘.”
“아니죠, 사업 우선권이라면 AT&T는 36까지 양보 가능합니다. 최소 1년은 독점을 인정하는 조건입니다.”
“허, 1년씩이나? 그럼 베이비 벨은 30!”
“29!”
“28! 더 해 봐. 우린 무조건 AT&T보다 1퍼센트 싸다!”
할아버지들이 연신 질러 댔다.
앰팩에 대한 우선 배급권을 가져가지 못하니 이거라도 우선권을 가지겠다고 하는 것 같다.
결국 AT&T 매니저가 28%에서 더 이상 지르지 못하고 베이비 벨의 사업 우선권을 3개월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더 이상의 제 살 깎아 먹기를 막아 냈다.
AT&T도 베이비 벨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미국 전역에 광통신망을 까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윌슨이 만족하느냐며 내게 눈짓을 했다. 당연히 나는 슬쩍 엄지 척을 해 줬다.
아무리 파라곤이 뒷배를 봐준다고 해도 파이오니어가 미국 전역에 통신 인프라를 어찌 깔 것이며, 그 유지 보수를 어찌 하나? 재훈이도 음원 수익 비율이 22% 정도면 나쁘지 않다.
자연스레 통신 인프라 사업에 대해선 미국 회사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온갖 계약서가 윌슨의 007가방에서 나왔고, 베이비 벨들 할아버지들이 단박에 서명을 해 버리는 바람에 AT&T의 찰스는 본사에서 재검토하겠다는 말도 못 하고 팩스 보내고 국제 전화를 30분 정도 하는 등 난리를 피우더니 결국 서명을 했다.
이런 대형 계약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수 있는 판으로 만들려고 베이비 벨 사장들을 데려오려 그리 노력을 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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