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기름칠(2) (30/104)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IMF가 오기 전까지 경력자는 어디든 들어갈 수 있었다.

굳이 공채에 지원한 사람들은 대부분 올해 졸업생일 터. 면접 위원으로 나섰던 사람이 팀장이 되면 자연스레 따르기 마련이다.

“3월 되면 김 대리와 송 대리는 과장으로 승진시키고, 팀장 감투를 씌워 주죠. 개발 1팀, 2팀으로 나누고 팀장까지 시켰으면 합니다.”

“오! 좋습니다. 충분히 일 잘할 사람들이니까요.”

“난 좀 늦어다 싶기도 합니다. 잘됐네요.”

부장들도 흔쾌히 오케이를 한다.

“유 사장님, 공채까지 하십니까?”

“예, 미야자키 님. 이제 10억 불 투자가 확정되었으니 공장 지어서 돌리면 못해도 2천 명은 필요할 겁니다.”

“10억 불. 국가적으로 큰 경사군요. 기자회견장이 떠들썩하겠습니다.”

미야자키의 말에 난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신문 기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안 했구나.

“아! 다들 집중해 주세요. 10억 불 투자 건은 내가 오픈할 때까지 절대 보안 유지하고, 언론에서 냄새 못 맡게 해야 합니다.”

내가 대뜸 목소리를 높이자 모두들 들고 있던 잔을 놓으며 내게 집중했다.

“사장님,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문제랄 것은 없어요. 단지 히타치 반도체가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합니다. 일단 그 정도만 아시고, 우린 공장 터만 닦고 있으면 되는 겁니다. 일본에서 설비 뜯어서 선적하면 그때서야 기자회견도 하고 시공식 테이프도 끊고 할 겁니다.”

“오오! 히타치 반도체를 저희가 접수하는 겁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권 부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히타치 애들 양산 라인을 통째로…. 대박! 사장님 대박 치셨군요.”

탁자 맞은편에 앉은 나 부장의 눈이 동그래진다.

양산을 해 본 사람이니 양산 라인을 맨땅에서 셋업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히타치 반도체를 정리시켜 라인을 뜯어 온다니 입이 귀에 걸린다.

“자칫하면 히타치가 반도체를 접는 게 아니고, 우리가 적대적 M&A를 시도했다고 모함받을 수 있으니 언론 접촉은 금물입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두 부장과 미야자키가 다짐을 했다. 이 비서는 듣지도 못했다는 듯 딴청이다. 다들 한배를 탔으니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하튼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작은 규모의 공장부터 시작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는 히타치 케미컬 공장 하나 허가받는 데도 힘들었는데, 히타치 반도체 공장을 통째로 뜯어 올 생각을 하시다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히타치 케미컬을 허가받기 힘들었다고요?”

꿀꺽.

히타치 한국 지사 건설은 외자 유치나 다름없는 일인데 누가 딴지를 걸어? 그것도 선거철에?

혼자 생각에 잠기며 소주를 한 잔 들이켜자니 미야자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더니 내 말에 대답이 아니라 외려 질문을 한다.

“유 사장님… 혹시 공장 건립 허가를 득하셨습니까?”

“내일 부터 준비해야죠. 투자가 이제 막 확정되었으니 말입니다.”

대현이 실리콘 밸리를 짓겠다고 했던 땅인 만큼, 이 땅에 공장을 짓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린벨트도 아니고 택지개발지구도 아니다. 공장이 세워지면 법인세로 거둬들이는 돈도 장난 아닌데, 용인 시장이 딴죽 걸 리 만무하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이거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최근 발의된 법령… 경기도 공장 총량제 때문에 저 같은 경우 공장 건립 허가를 받는 데 아주 혼이 났습니다. 다행히 시행령이 내려오지 않은 터라, 담당 공무원 뒷주머니 좀 챙겨 주고 허가를 받았습니다. 사장님도 조금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경우를 언급하며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라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나는 ‘경기도 공장 총량제’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경기도 공장 총량제는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해 수도권에 공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1994년에 시행되었으며, 호사가들이 말하길 신성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할 때 공장을 부산에 세우게 하기 위해서 정권에서 그런 법을 만들어 압박했다고 한다.

음모론이긴 하지만 무른 지반에 공장을 세운다고 기반 조성에만 타 공장 대비 다섯 배 이상의 공사비가 들어간 사실로 미루어 보면 신성이 압박을 받긴 받았을 것이다.

1992년부터 자동차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정계 로비를 해 댄 신성이 그런 부지를 자의적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미래에 결국 일어날 일이긴 하지만 법령 발의 자체가 너무 빠른데? 어찌 된 일이지?’

쪼르륵.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주를 자작하자 옆에 있던 권 부장이 내 소주잔을 대신 들어 준다.

술자리에서 왜 자작을 하냐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서 여태와 달리 착 가라앉은 말투로 대화에 끼어든다.

“사장님, 그 법령은 아무래도 대현을 압박하려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대현에서 총선 공략 중 하나로 용인밸리를 한국의 실리콘 밸리로 만들겠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과 기반 기술에 투자한다는 측면에서 꽤나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여당이 법령으로 견제할 만합니다. 미야자키 말대로 공무원들에게 뒷돈을 좀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행령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전에 말입니다.”

그래, 이 또한 나비효과였군.

원래 역사에서 신성 자동차 공장 부지를 경남으로 옮기게 하는 압박용이었다면, 지금 상황은 대현의 선거 공략을 발목 잡겠다는 소리다.

입맛이 쓰다.

아무리 여당 입장에서 정 회장의 행보가 달갑지 않다 해도,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법령까지 끌어들이다니.

“지금 공장 허가를 받겠다고 뇌물을 쓰면 안 됩니다. 현 정권과는 거리를 둬야 합니다. 결국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이 내 사업을 지원했다는 공로를 가져가야 그림이 좋아집니다.”

“아, 그렇군요.”

순식간에 술자리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한데 대통령이 누가 될지 어찌 알고 줄을 서실 겁니까?”

불편하게 이어지는 침묵을 깨고 권 부장이 자리한 사람들을 대신해 질문을 한다.

그래, 내가 미래를 모른다면 고민했겠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자, 자! 오늘은 우리 회사가 대박 투자를 받은 것과 몬타베의 개업을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게 개업식에 와서 침울하면 되겠나. 나는 업무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싶었다.

미래의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정해져 있고, 내 사업에 딴죽 걸 일이 생기지 않게 미리 선수를 치면 그뿐이다.

“권 부장, 이런 좋은 자리에 그런 소릴 왜 해? 사장님은 천재야. 큰일은 다 알아서 하신다고!”

“업무 얘기는 이제 그만해요. 하하!”

“건배! 몬타베 대박 나라!”

나 부장과 이 비서가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고, 다시금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술잔이 몇 번 돌아가고, 이 비서가 시카고 관광기를 들려주니 사람들은 금세 심각했던 얘기는 잊어버렸다.

    • *

「일본 히타치 그룹,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다. 한국 기업에 반사 이익이 생길 듯.」

「일본 히타치 반도체를 인수하는 한국 기업은 대체 어디인가?」

「숨죽여 지켜보는 반도체 업계들. 대현전자에서는 히타치 반도체 인수 사실 공식 부인.」

생각보다 빠르게 히로아키가 움직였다. 대한민국의 9시 뉴스에선 이례적으로 히로아키의 기자회견을 녹화해서 방영하기까지 했다.

히타치 반도체를 인수하는 한국 기업이 어딘지 세간의 이목을 끄니 그랬을 것이다.

여하튼 히로아키의 연기는 대박이었다.

기자회견장에 나서 반도체 치킨게임은 일본 국민들 세금만 축내는 일이라며, 히타치가 과감히 희생하여 미국의 반도체 통상 압박을 줄이겠다고 대대적으로 언론 몰이를 해 갔다.

직원들의 희생을 두고 볼 수 없어, 물려받을 미래의 유산까지 몽땅 털어 일만 명이나 되는 직원들을 히타치 제작소로 옮길 것이며, 새로운 사업을 찾겠으니 국민 여러분께서 응원해 달라고 읍소하기까지 했다.

그룹 회장이 숨겨 놓은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일이었지만, 이미 미담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고 있었다.

히타치 반도체를 이끌던 전문 경영인들은 속이 타들어 갈 것이고, 나머지 그룹 계열사의 전문 경영인들은 기자회견을 마치면 대부분 히로아키에게 줄을 서려고 할 것이 뻔하다.

확실히 기업가가 아니라 배우를 했어도 대성했을 인간이다.

기자회견에서 일부 기자들은 그룹의 왕자가 나라를 위해 살신성인을 했다는 둥, 사무라이 정신의 화신이라는 둥, 현대판 가미카제이니 하며 일찌감치 정신 승리를 읊어 댔다.

남의 나라 일이긴 해도 히로아키의 이런 선택은 최선책이다. 결국 미국에 대항해서 사업을 이어가 봐야 개털 될 게 뻔하거든.

10억 불로 퉁칠 수 있다면 나라도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일본 반도체 사업이라는 침몰하는 배에서 홀로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한 격이다.

심지어 히로아키의 기자회견은 끝마무리도 멋졌다.

히타치 반도체를 인수하는 한국 기업이 어디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연신 닭똥 같은 눈물을 닦아 내며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그를 다시 자리에 앉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할 바는 다했으니까 이젠 네가 할 일을 해라.’

히로아키가 나에게 공을 넘겼다.

나는 히로아키의 기자회견을 녹화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혹시나 히로아키가 실수한 건 없는지 살펴봤는데 완벽했다.

즉, 내가 그림을 그리면 그게 진실이 되는 거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는 이 비서를 불렀다.

“이 비서, 출발합시다.”

“수정각으로 출발하면 됩니까? 중간에 들를 곳은 없으십니까?”

“없어요. 바로 가요. 박준태 의원이 오기 전에.”

“예.”

내가 그림을 그릴 사람은 박준태 여당 최고 위원이다.

그와 차 한 잔 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이 비서 편으로 10억이라는 돈을 정치헌금으로 갖다 바쳤다.

YS나 DJ를 직접 만나면 안 되냐고?

안 된다.

그들은 딸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솔직히 박준태 의원처럼 10억 정도를 보냈다고 만나 줄 사람도 아니고.

현 정계에서 개밥에 도토리가 된 박준태 의원이야말로 그림 그리기에 딱이다.

수정각은 그 양반을 만나는 장소로도 제격이다. 적당한 수준에서 나와 그의 만남이 정계, 재계로 흘러 들어갈 테니까 말이다.

    • *

“유 사장님, 어서 오세요.”

“매번 마중을 나오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매번 수정각을 이용해 주시니 제가 감사하죠. 어서 안으로 드시죠. 손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써 오셨나요?”

“그분 일이 잘 안 풀리시나 보죠. 손발이 다 떨어져 나가고 있잖아요?”

마담답게 살짝 그쪽 근황을 알려 준다.

“혼자 오셨던가요?”

“예. 운전기사만 데리고 오셨더군요. 호호호.”

믿을 만한 수행원조차 없어진 상황인가?

돌려 말하면, 당 내부에서 YS에게 계속 밀린다는 의미다.

하긴,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고 누가 봐도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정치판에서 굴러 온 시간이 있는데, 박준태 의원이 아무리 이름값이 있다고 해도 YS에 비견될 수가 있겠나. 역시 내가 그림을 그리기에 적당한 상황이다.

“이 비서는 다른 방에서 기다려 줘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이 비서를 다른 방으로 보내고 최 마담을 따라 박준태 의원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유수한 사장, 어서 오시게.”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

“처음 뵙는데 제가 실례를 했군요. 미리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네. 수정각은 오랜만이라 내가 좀 서둘렀을 뿐이네. 예전과 달리 길이 많이 편해졌더군.”

“그러셨군요.”

쪼르륵.

최 마담이 탁자 옆에 다소곳이 앉아 차를 채워 준다. 뭐로 준비를 해 줄까 행동으로 묻고 있다.

“최 마담, 식사 말고 가볍게 상을 차려 주세요.”

“3년 묵은 홍주가 어울릴 것 같네요. 드셔 보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정말이지 가볍게 얘기를 나눌 것이다.

정치하는 양반들과 얘기를 길게 해 봐야 좋은 일은 별로 없으니까.

최 마담이 밖으로 나가고 상차림을 마칠 때까진 관심도 없는 날씨 얘기와 3월 말에 있을 총선에서 크게 승리하길 바란다며 맘에도 없는 얘기만 했다.

쪼르륵.

술잔이 몇 잔 돌아갔을 때, 박준태 의원이 결국 말을 꺼낸다.

“나와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가 뭔가? 총선 얘기를 하려고 10억이나 헌금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네. 정 회장께서 보내셨나?”

역시 어느 정도 내 뒷조사를 한 모양이다.

나와 정 회장을 엮는다. 수행원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일 수도 있겠다.

“그럴 리가요. 제가 정 회장님 사무실 엎은 얘기는 못 들으셨나 봅니다.”

“아! 그 사람이 유 사장인가?”

정말 몰랐던 눈치다. 정치한다는 양반이 이렇게 안테나가 짧다니.

정말 손발이 다 잘린 게 확실하다.

“하하, 저와 정 회장님이 헤어지는 데 한몫하신 분이 그걸 모르십니까? 최 상무에게 듣기론 세무 조사를 막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나도 그 일만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네. 일이 꼬였어. 정 회장님이 화가 날 만해. 그렇다고 당까지 만들다니…. 어이구, 뭐라 할 말이 없어.”

박준태 의원과 정 회장의 일이니 내가 더 깊이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내 쪽으로 화제를 옮겨야 한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번에 의원님께서 나서실 만한 일이 있어 뵙자고 청했습니다. 포항제철을 일으켜 세우실 때 못지않게 짜릿하실 겁니다.”

“으흠… 포항제철?”

“TV에서 보셨을 것 같습니다만, 히타치 반도체를 인수하는 한국 기업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헛! 혹시 그게 자네 회사인가? 못해도 10억 불 이상 투자되는 건이라고 들었네만.”

내가 잔을 채워 줬음에도 술잔을 들지도 못한다.

“예, 제가 인수자입니다. 물론 물주는 미국 분들이긴 합니다만, 결국 저를 보고 돈을 빌려 준 거니까요.”

“허어! 나는 어느 재벌이 하필 이런 선거철에 인수를 하나 싶었네.”

“선거가 있다고 기회를 놓치면 되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공장이 들어설 곳에 대현이 끼어 있어 발목이 잡힐 판입니다. 이번 일에 정계 거물들이 한 목소리로 지원 의사를 밝혀 주는 그림이 되게끔 도와주십시오.”

“히타치 반도체를 이전할 곳이 용인밸리였던가?”

박준태 의원 역시 ‘경기도 공장 총량제’의 목표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내 말에 용인밸리가 툭 하고 튀어나온다.

“용인 땅은 지반이 암반이라 반도체 공장을 세우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이미 제가 땅을 좀 사 놓기도 했고 말입니다. 지금 와서 공장 부지부터 살핀다고 하면 그쪽 땅값이 미친 듯이 오를 테고, 누가 알박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히타치 반도체가 해체되는 시점에 후다닥 공장을 이전해 버려야 한다.

시간을 끌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히로아키의 결단이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을 때 해치워야 한다.

“생각보다 큰 건이군. 그래… 내가 뭘… 도와주면 좋겠나?”

말을 짜증 날 정도로 천천히 한다. 도와주면 뭘 주겠냐는 의미일 것이다.

“이건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부터 그리면 누구나 믿게 만들 수 있지요. 일본으로 가셔서 히타치 그룹 후계자와 사진 한 장 찍고 오시면 이 일의 막후 조율자가 되시는 겁니다.”

“하긴… 내가 일본통이긴 하지.”

박준태 의원을 그림에 끼워 넣으면 신문기자들마저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는 일본 재계의 빅보스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다.

포항제철을 세울 때도 일본의 차관 획득과 기술 이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부 사람들이 그를 친일파라 칭한다 해도 포항제철을 일으킨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뜨뜻미지근한 표정에 한마디를 더했다.

“그 일만 도와주시면 킹메이커가 되실 수 있습니다. 제가 도와 드리죠.”

“킹메이커가 된다고?”

“YS가 박 의원님을 몰아붙이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대현의 정 회장님이 표를 분산시키는 와중에 박 의원님을 따르는 TK(대구, 경북) 표까지도 부동표로 떠돌고 있잖습니까.”

“…아니라곤 못 하겠군.”

“좀 더 무례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 의원께서 직접 대선을 노릴 순 없고, 그렇다고 YS를 지지하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가만있자니 기존 민정계 의원들도 떨어져 나가니 대체 뭘 해야 정치 생명이 유지되나 고민하시는 것 아닙니까?”

말은 곱게 했지만, 박준태 의원은 정말이지 요즘 사는 맛이 안 날 거다.

포항을 떠나온 보람도 없이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킹메이커가 되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 만약 자네가 그 방법을 알려 준다면, 내 일본으로 날아가서 원하는 그림을 그려 주겠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국민들이 차기 정권에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 경제 활성화죠. 민주화야 YS가 되건 DJ가 되건 심지어 정 회장이 되건 일단 군사 정권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제 사업을 시작으로 YS가 경제 활성화의 물꼬를 텄다라고 그림을 그리시면 됩니다.”

“YS….”

“예. 그가 차기 대통령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나 또한 그 확신이 없어 이 지경까지 왔는데….”

“그 정도 확신도 없이 10억 불을 질렀겠습니까? 아니, 확신이 아니라 미래는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뭔가?”

한참을 망설이던 박준태 의원이 드디어 결심한 듯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민다.

“일본으로 가서 YS의 지원하에 히타치 반도체를 접수했다는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시지요. 용인 공장 기공식에 YS도 초대하시고, 그리고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국민연금도 반도체 주식에 투자하도록 밀어붙이세요.”

“허! 결국 자네 사업에 잇속을 챙길 작정인가?”

“10억 불이 걸린 일입니다. 그런 일을 추진하면서 꼬투리 잡힐 짓을 할 정도로 제가 바보로 보이십니까? 외려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겁니다.”

내가 기공식을 시작하고 스마트 클라우드를 상장하면 어찌 될까?

지분 10%만 투자자들에게 팔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다고 가만있을까?

정보는 이미 새어 나갔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면 미국 물주들 사이에서 투자 붐이 일어날 것이고, 덩달아 주변 반도체 기업들 주식도 무차별적으로 매입할 거다.

외국인 투자자가 내 기업을 필두로 반도체 주를 매입하면 증권사들도 따라붙고, 거기에 국민연금까지 갖다 붙이면 올해 말까지는 주식 시장에 불이 붙을 거다.

원래 역사에서도 국민연금을 주식 시장에 밀어 넣는다. 그게 연말에 단물 빠질 때 집어넣어서 문제가 된 것이지, 지금 넣으면 대박이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미국 분들이 5억 불 남짓 돈이 남는다고 하더군요. 제 정보에 의하면 누군가 그걸 모아서 한국 주식 시장에 뿌릴 거라고 합니다. 올해 1월에 외국인 직접 투자가 가능해졌지 않습니까.”

“…….”

“물론 어떤 기업에 투자하면 될지는 제가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나는 주식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1992년에 어떤 기업이 대박을 쳤는지는 안다.

SJ, 신성전자, 대현전자 등등 모두 휴대폰과 반도체 관련 주들이었다.

국민연금과 파라곤 투자금이 그 회사들 쪽으로 들어가야 일부 외국 투자자들이 단물 빼먹고 빠져도 1992년 말 주식 시장이 급락하는 일은 없을 거다.

외려 주식 시장이 흔들리면 ‘박준태 의원이 정말 기가 막힌 혜안을 가졌네! 연초에 국민연금을 올인시키다니!’ 하며 지금 여당의 경제 정책에 환호성을 지를 거다.

“주가 조작은 중범죄네.”

“결과만 좋으면 범죄라 부를 사람은 없습니다. 되레 올해 연말 외국인들이 단물을 빼먹고 빠질 때, 제 물주들의 돈과 국민연금은 백기사 노릇을 톡톡히 할 겁니다.”

“흐음, 자네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하튼 그런 스토리가 성공한다면 DJ가 국민연금을 주식 시장에 넣는 걸 반대하도록 그림을 그려야겠군.”

“아닙니다. 그분은 차차기 대통령이 되실 분이거든요. 적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박 의원님.”

“허….”

내가 차차기 대통령까지 단언해 버리자 박준태 의원은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토해 냈다.

“뭐 그리 놀라십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을. YS, DJ가 대통령 안 해 보고 죽을 사람 같습니까?”

“할 말이 없군.”

“DJ도 이번 일을 도와주는 모양새로 꾸미셔야 합니다. 용인밸리 기공식 때 박 의원님 명의로 그분을 초대하고, 여야를 떠나 도와주셔서 감사했다는 말도 기자들이 듣게 하고, DJ도 사재를 털어 반도체 주식에 투자하는 등 국익에 동참했다는 것도 언론에 흘리는 등 여러모로 움직이게 하셔야 합니다.”

“결국 YS, DJ 모두 선거 전략의 간판으로 경제 활성화라는 키워드를 쓰게 만들어라! 그 말인가?”

“그렇죠. 그 와중에 고급 정보를 박 의원께서 YS에도 줬다가 DJ에게도 줬다가 하시면 됩니다.”

“그 정보는 자네가 주는 거고?”

“최종적으로 국민연금 투입 건은 YS가 주도한 걸로 꾸며 주시고… 제가 그걸 제안한 사람이라고 넌지시 알려 주시는 조건으로….”

나는 조건을 걸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하던 박준태 의원도 어느새 내 제안에 훅 하고 빨려 들고 있었다.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시겠죠. 대신 용인밸리 건설은 문제없게 해 주셔야 합니다.”

“이번 건은 기필코 성공하겠네.”

“일본에 건너가서 연기만 잘하시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나는 계약서를 탁자 위에 놓고 최 마담을 불렀다.

이 비서도 자연스레 따라 들어온다. 007가방을 들고서 말이다.

아깝긴 하지만 턱도 없이 발목 잡히는 꼴을 당하는 것보단 낫다.

일단 공무원들이 발목을 잡으면 푸는 데 몇 배의 돈과 시간이 들어가니 아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업하려면 미리 기름칠부터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 핑계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다.

암반 지반에 공장 좀 짓겠다는 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빌어먹을.

쓱쓱쓱.

박준태 의원이 계약서를 빙자한 영수증에 서명을 한다. 나 또한 서명을 한 뒤 각자 한 부씩 갖고, 최 마담이 이를 지켜본다.

“정보는 대략적으로 알려 줘야 할 것 같군.”

“첫 번째는 히타치 반도체 관련입니다. 용인 땅값이 오를 겁니다. 두 번째는 휴대폰 관련 주식에 관한 겁니다. 미국 물주들의 매입이 한 달 뒤에 있을 겁니다. SJ와 신성이 가장 큰 혜택을 받겠죠. 세 번째는 당연히 제 회사 상장입니다. 네 번째는 차차 알려 드리죠.”

“기름칠하기엔 부족함이 없겠군. 서둘러야겠어.”

“일본엔 내일모레 바로 출국하시는 걸로…. 가방에 비행기 표와 일정표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동의할지 어찌 알고… 허!”

수정각에서의 만남은 그게 다였다. 식사를 같이할 사이는 아니었기에, 각자 계약서를 품에 넣고 갈 길을 갔다.

    • *

며칠간 TV를 보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연기파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을 정말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10억 불이라는 외자 유치는 1970년대 포항제철 설립에 버금가는 대형 호재였기에 TV에서는 연일 다큐멘터리처럼 특별 대담을 방영하고 있었다.

당연히 박준태 의원이 언론에 시나리오를 은근슬쩍 알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10억 불 외자 유치는 매우 드라마틱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미, 일, 삼자를 거친 독특한 형태인데, 교수님께서는 이를 어찌 보시는지요?

박준태 의원을 직접 인터뷰할 수는 없었던지, 9시 뉴스 앵커가 서울대 정치학 교수를 데려다 놓고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박준태 의원은 포항제철을 세웠을 때도 협상의 전문가였습니다. 이번 건도 모름지기 1년 이상의 물밑 접촉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거래는 하루 이틀 협상한다고 성사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견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정치권에서 이런 초대형 호재를 여태 숨겨 온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국민 여론을 우려한 탓이겠지요. 히타치가 전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있기에 외자 유치의 중간 다리로 삼았어야 했냐? 하는 논란이 여권 내부에서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오히려 히타치 그룹의 간판 기업을 한국이 인수한다는 것은 경제적 승리인 동시에 역사적인 의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옳다 그르다 말씀드릴 사항은 아니군요. 아무튼 히타치 그룹으로선 결코 한국에 회사를 팔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작은 승리는 아니라는 것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하하하!

-화제를 좀 돌려 보죠. 시청자들은 막후 조율에 현 정치의 거물들이 대거 나섰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박준태 의원이 대선을 위해 남겨 둔 히든카드가 아니었나 하는 말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박준태 의원은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지 않겠다고 수차례 공언했으니까요. 외려 총선을 보름 이상 앞둔 시점에 서둘러 발표한 것은, 이 같은 국가적 경사를 정치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박준태 의원의 결심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YS도 정정당당히 선거에 임하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고 하더군요. 예전 같으면 총선이 임박해서 발표했을 일인데… 우리나라 정치의 격이 한 단계 올라갔다고 봐야죠.

짝짝짝!

“이야! 시나리오 잘 썼네. 대사도 정말 완벽하게 외웠구만!”

나는 TV 뉴스를 보다 말고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이렇게 대화가 매끄러울 수는 없을 거다.

여당의 지휘부가 이 일을 국민 정서에 비춰 눈치까지 봤고, 선거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총선 시기에 앞서 발표했다는 시나리오다.

박준태 의원의 보좌관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이지 영화 시나리오를 써도 대성할 사람들이다.

딸깍.

다른 채널로 돌려 봐도 비슷한 대담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외자 유치는 단연 핫이슈가 되었다.

이번 채널은 인터뷰 상대로 경제학 교수를 데려다 놓았다.

-외자 유치에 성공한 기업은 스마트 클라우드라는 신생 기업인데, 박준태 의원과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박준태 의원은 정치가 이전에 기업가였지요. 그리고 포항공대를 설립할 정도로 인재 육성에 깊은 관심이 있으셨던 분이 아닙니까. 신생 기업이긴 하지만 에그펫과 핸드 터미널을 개발한 스마트 클라우드의 가능성을 미리 알아본 게 아닌가 합니다. 역시나 미국 투자자들에게 적격 판정을 받았고요.

-아! 스마트 클라우드가 에그펫을 개발한 회사군요.

이어진 인터뷰에서 내 회사 얘기는 몇 마디 거론되지도 않고 휙휙 지나가고, 곧이어 박준태 의원의 영웅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히로아키와 밀담하는 장면, 계약서에 서명하는 스냅 사진들을 마구 보여 준다.

여러모로 포항제철을 세웠을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수십 년 전의 흑백 사진까지 오버랩시키며 인터뷰를 마무리 짓는다.

틱!

“이야, 이 채널은 마무리가 멋지네. 하하하!”

나는 TV를 꺼 버리고, 소파에 쑥 기대서는 맥주 캔을 따며 흐뭇하게 웃었다.

용인밸리 기공식은 앞으로 사흘 뒤다.

회사에 출근하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테니, 분당 집에서 가만히 신문이나 읽고 있다가 기공식 날 아침에 옷 잘 차려입고 나서면 그뿐이다.

정치인들이 뭔 굿판을 벌이든 내 목적은 공장을 안전하게 건립하는 것이다.

    • *

스르릉, 끼이익.

“온다. 스마트 클라우드 사람들이야!”

“대체 사장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야.”

이 비서가 차를 몰고 용인밸리의 기공식장에 다다르자 기자들이 마구 몰려왔다. 먼저 와 있던 권 부장과 나 부장은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는지 얼굴이 새까매져 있다.

철컥.

이 비서가 차 문을 열자 다가온 두 부장들을 양옆에 세우고 기공식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VIP들이 걸어가는 카펫 옆으로 경호원들이 늘어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몸을 날려 내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대체 신생 기업이 어떻게 미국 투자사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까? 일개 회사원에서 초대형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이 모든 게 국가의 큰어르신들이 물심양면으로 밀어주신 덕분이지요.”

나는 전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서 척척 앞으로 걸어갔다.

“원래 용인밸리는 대현이 먼저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외자 유치가 대현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정 회장이 정계 투신을 밝히자 서로 갈라섰다고도 하던데, 그 배경은 무엇입니까?”

“굳이 히타치 반도체를 인수하고자 했던 이유는 뭡니까? 국산화 계획은 어찌 됩니까?”

“YS가 특별히 유수한 사장님을 불러 미국에 투자 유치를 지원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디까지 사실입니까?”

“박준태 의원께서 여야 모두의 협조를 얻어 일본을 누비셨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기술적인 투자 설명회를 했을 뿐입니다.”

나는 하고 싶은 말만 하며 레드 카펫을 밟고 지나쳐 갔다. 조금 있으면 단상이다.

한마디만 더 물어! 한마디만 더! DJ가 나와야지, 기자 아저씨들!

“DJ 또한 이 일에 일조하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아! 미국 투자자 중 몇 분이 DJ와 친분이 있으십니다. 투자 설명회 전에 전화 통화까지 해 주며 지원하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우며 DJ에 대한 시나리오를 언급했다.

질문한 기자는 내 답변에 정말 감동한 듯했다. 하긴 정쟁만 한다고 여겼던 정치인들이 최소한 국가적 일에는 합심을 했다고 하니 그럴 것이다.

“이 건은 여야가 합심해서 이뤄 낸 결과군요. 선봉에 나선 유 사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추가적으로 질문 하나만 더….”

“아, 잠시 후면 기공식이니 이쯤 하시죠. 공식 기자회견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때 뵙죠.”

DJ가 언급되었으니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

이 비서가 주차를 마치고 훅 하니 내 앞에 끼어들었기에 자연스레 빠져나왔다.

역시 이 비서는 내가 원하는 타이밍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찰칵! 촤르륵, 찰칵! 촤르륵, 찰칵! 찰칵! 찰칵!

“여기 좀 봐 주십시오. 여기요!”

“유 사장님이 강조되게 두 분께선 조금만 천천히 걸어 주세요!”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 대는 기자들. 훤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모름지기 우리 세 명은 오늘 석간의 경제면을 장식하리라.

반짝이는 스마트 클라우드의 배지를 양복 가슴 포켓에 달고, 파란 바탕에 흰 뭉게구름을 그려 넣은 자사 로고를 그대로 프린팅한 넥타이까지 매고 나섰으니 사진은 꽤나 잘 나올 것이다.

「경 스마트 클라우드 용인밸리 기공식 축」

1990년대답게 단상에는 형형색색의 휘장을 치렁치렁 감아 놓은 초대형 현판이 걸려 있고, 단 아래에는 발파 버튼이 누르기 쉽게 탁자 높이로 설치되어 있었다.

객석에는 대형 천막과 의자들이 딱딱 줄 맞춰서 놓여 있다.

단상에는 유독 럭셔리해 보이는 의자가 딱 4개 놓여 있다.

박준태, YS, DJ, 그리고 내가 앉을 자리다. YS와 DJ 중 누가 중앙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없게 4개를 놓았다.

사방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객석의 뒤쪽에는 발파 때 안전을 위하여 덤프트럭들이 벽을 만들고 늘어서 있다.

나는 단상에 오르기 전에 객석을 돌며 인사를 나눴다.

경기도지사, 용인시장, 각국 대사관 사람들…. 신성에서는 진제대 상무를 보내왔고, 그 너머에는 케이도 자리하고 있었다.

“진제대 상무님, 바쁘신데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영광이죠. 회장님도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기흥 쪽 반도체 공장 기공식보다 더 화려하군요. 축하합니다.”

“조만간 회장님과 함께 식사라도 같이하시죠.”

“하하, 좋지요.”

나는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객석을 지나쳐 갔다.

‘축하해요, 수한 씨! 정말 멋져요!’

케이는 지나가는 내게 슬쩍 엄지 척만 해 주고는 말을 섞지 않는 신중함을 보여 주었다.

“음?”

케이가 마지막이려니 했는데 의외의 손님이 있었다. 객석 어디선가 정헌몽 사장이 척 하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헌몽 사장이 중앙에 자리 잡지 못하다니 아이러니하다.

“유수한 사장.”

“아! 정 사장님, 어쩐 일로….”

“하하,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 아니잖나. 축하하네. 큰일을 해냈군.”

“감사합니다.”

“…원래였다면 저기 현판에는 대현그룹이 적혀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일세. 안타깝군.”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랬겠지.

원래라면 정헌몽 사장과 내가 함께 저기 단상에 섰겠지. 그게 내 본래 그림이었다.

“기공식이 끝나면 시간을 좀 내줄 수 있나? 용인밸리에 대현에서 지원하는 회사도 입주할 것 아닌가. 논의가 필요하네.”

“네, 그러시죠. 이 비서가 따로 모실 겁니다.”

“그리 알고 있겠네.”

나는 곁에 있던 이 비서에게 눈치를 보내고는 곧바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와아아아!

단상에 올라가자 레드 카펫 끝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YS와 DJ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드 카펫에서 서로 등을 돌리곤 각자 왼쪽과 오른쪽을 맡아 기자들과 악수를 하며 걸어온다.

그 뒤쪽에서 박준태 의원이 환호성에 답하듯 살짝 살짝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따른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민국은 이 외자 유치를 시작으로 1992년부터 다시금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거라는 인터뷰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기공식을 빙자한 완벽한 선거운동이다.

펑! 펑!

VVIP인 그들이 단상에 오르자 축포가 터졌다.

발파식에 쓸 폭죽만 남겨 두곤 모두 터뜨려 버린 듯하다.

유치하기까지 한 1990년대의 선거운동에 나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 수한, 고생 많았네.”

“고생 많았어.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만. 허허허!”

“모든 게 두 분 덕분입니다.”

나를 처음 본 주제에 정말이지 연기 한번 기가 막히게 잘하는 양반들이다.

YS와 DJ는 내 어깨를 상대보다 한 번이라도 더 두드리겠다고 신경전이 대단했다.

당연히 YS 옆엔 박준태 의원이 앉으니 내 자리는 DJ 옆이다.

DJ는 나름 이미지 메이킹에 좀 더 유리하다고 여겼는지 연신 나를 쳐다보며 활짝 웃고 있다.

촤르륵, 찰칵! 촤르륵, 찰칵!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DJ가 내 어깨를 툭 하고 쳐 주는 것을 신호로 난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펑!

폭죽이 한 번 더 터진다.

마이크 테스트 따위는 필요 없다.

십여 개의 마이크가 단상을 빼곡히 채우고 있으니까 말이다.

“역사적인 용인밸리의 기공식에 앞서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 발전을 위해 피땀 흘리고 있는 국민 여러분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자리는 비단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국민 여러분의 성원과 정재계 인사분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내 말 중간에 또다시 셔터 소리가 줄을 잇는다.

아마도 내 말에 반응하는 뒷좌석 거물들의 표정을 사진에 담고 있겠지.

“이에, 10억 불이라는 외자 유치는 위대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첫걸음이며, 용인밸리라는 씨앗은 인재 육성과 첨단 기술 개발을 통해 선진국이라는 꽃으로 피어날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가히 5천 년 역사를 거쳐 온 대한민국의 저력이….”

나는 온갖 미사여구를 버무린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앞으로 이 사업에 딴죽을 거는 놈은 대한민국의 배신자라는 타이틀을 안겨 줄 만큼 용인밸리에 금칠을 해 댔다. 중간중간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다.

“국민 모두가 아시다시피 저는 야당 생활 내내 신생 기업에 대한 정책 지원에 앞장섰으며, 이처럼 순수 외자 유치로 이뤄지는 사업에 대해서는 세금 우대 혜택을 줘야 한다고 역설해 왔습니다. 특히 최근 여당이 발의한 경기도 공장 총량제에서 용인밸리는 제외되어야 하며….”

내 뒤를 이어 단상에 올라선 DJ는 용인밸리를 핑계 삼아 슬쩍 YS의 정책을 꼬집고.

“정부 여당에서는 누차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우수한 신생 기업에 대해서는 채용되는 인력에 병역 특례와 부담금 지원을 해 왔음을 국민들 여러분께서 익히 알고 계실 겁니다. 이에, 국가 연구소와의 협업을 통하여 우수 인력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부동산 개발에 대한 규제도 과감히 풀어….”

YS도 기존의 법을 들이밀어 선물 보따리를 풀어냈다.

객석에서는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웃는 표정을 감추느라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세제 혜택에 인적 지원이라. 게다가 병력 특례라.

“여야 모두의 아낌없는 지원에 힘입어, 일본 정부와 전략적 협조를 긴밀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외자 유치가 전부가 아니라 조만간 국민 여러분께 더욱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바입니다. 오늘, 그 첫 삽을 여러분과 함께하고자 하며….”

어라, 박준태 의원마저 선물이 있다고 한다.

뭐야? 일본에서 뭔가 새로운 걸 물어 오기라도 한 거야? 나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굿판을 벌여 보라고 했더니, 제물을 마구 물어 오는 정치꾼들이다. 내가 취사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박준태 의원은 최종적으로 YS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발파식 선언을 권했다. YS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친다.

“역사적인 용인밸리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발파!”

와아아아아!

“귀빈 여러분,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발파!”

“발파!”

“발파!”

퍼엉! 퍼엉! 콰앙! 쾅!

빠아아아앙!

흙먼지가 10미터 이상 하늘로 치솟으며 발파식이 완료되자 벽을 만들었던 덤프트럭들이 일제히 클랙슨을 울려 댄다.

와아아아아!

“대한민국 만세! 용인밸리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다운 만세 삼창이 이어졌고, 객석의 외국인들은 그런 한국인들이 신기한 듯 박수로 화답했다.

객석에 끼어 있던 케이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이윽고 단상 뒤의 가건물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으로 몰려가는 기자들.

YS와 DJ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있다가 기자들이 들이닥치니 환한 웃음으로 제각기 인터뷰를 하고는 차에 올라타 스르륵 빠져나간다.

기자회견은 박준태 의원에게 맡기면 그뿐이다. 시나리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지 않나.

스마트 클라우드의 대표 격으론 권 부장과 나 부장을 남겨 두었다.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예’라고만 하라고 했다. 기술적 사항이 나오면 적당히 잘 둘러댈 것이다.

나는 어느새 내 곁에 차를 갖다 대는 이 비서 덕분에 겨우 기자들의 틈바구니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비서가 시야를 가리는 사이 등 뒤로 돌아 후다닥 차에 올랐다.

스르릉.

경호원들이 진입을 막고 있는 레드 카펫 위로 차를 몰아 휙 하니 자리를 벗어났다.

“휴우, 난리도 아니구만. 수고하셨네, 유 사장.”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따뜻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객석에서 안 추우셨습니까, 정 사장님?”

정헌몽 사장이 이미 내 차에 올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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