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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기름칠 (29/104)

제3장 기름칠

와글와글.

입국장은 언제나 붐빈다.

사방에서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여기저기서 포옹이 넘쳐 난다.

이런 정겨우면서도 복잡한 분위기도 좁은 김포공항이니 가능하지, 인천공항이 오픈하면 풍경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사장님! 여깁니다, 여기요.”

“바쁘신 분들이 어째 마중을 나오셨습니까?”

“하하, 퇴근하는 길에 들렀습니다.”

“두 분이 동시에 퇴근하시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사장님이 자리를 비워서 나도 목욕도 좀 하고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권재욱 부장도, 나운영 부장도 혈색이 좋아졌다. 간혹 자리를 비워 줘야겠네.

“어째 결과는 좋으셨습니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아주 잘됐습니다. 나 혼자 즐기기 뭐해서 부장님들 선물까지 멋진 거 사 가지고 왔습니다.”

내 말에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던 두 부장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내 말에 이 비서가 쇼핑백을 하나씩 건네준다.

양주 한 병씩, 그리고 조금은 과하다 싶은 명품백을 하나씩 포장해 두었다.집에 가지고 가서 식구들에게 회사에서 인정받는 존재임을 자랑 좀 하라고 말이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하하.”

나운영 부장은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등 뒤로 쇼핑백을 챙긴다. 행동 하나하나가 재미난 사람이다.

“정말 잘됐습니다. 사장님께서 반도체 전 공정까지 하겠다고 하셔서 정말이지 불안했는데 말입니다.”

그에 반해 권 부장은 좀 더 일에 집중하는 양반이다. 투자받는 데 실패했다면 대현도 떨어져 나간 마당이니 용인 땅도 팔아야 한다고 했을 사람이다.

“다들 마음고생이 심하셨죠? 들려줄 무용담이 넘치니 어디 좋은 데로 갑시다. 오늘 저녁은 제가 멋지게 쏘겠습니다.”

“양주 두 병 까려면 웬만한 곳은 안 되겠는데요?”

나 부장이 쇼핑백을 흔들어 댄다.

“그건 집에 가져가시고요.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풀코스로 쏠게요. 가시지요.”

“수정각 어떠십니까? 거기 육전 정말 맛나지 않습니까.”

“제가 이럴 줄 알고 근사한 곳을 예약해 뒀습니다.”

“오! 권 부장이?”

“사장님이 오신다고 개업식도 미루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가시지요. 제가 길 안내를 하겠습니다. 뒤차로 따라오시지요.”

“누가 나 때문에 개업식을 미뤄요?”

“하하! 가 보시면 압니다.”

“아! 그곳?”

권 부장이 기분 좋게 앞장서고 나 부장이 바로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주억이며 따라붙는다.

    • *

스르륵, 끼이익.

도착하고 보니 회사에서 차로 10분밖에 안 걸리는 곳이다. 허름한 기와집이 있었던 곳으로 기억하는데 웬걸, 고풍스러운 식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몬타베」

이름이 멋들어진 붓글씨로 적혀 있다.

등과 노포가 일식집임을 알리고 있었지만 기와집 대문을 그대로 살려 가게를 꾸몄기에 묘하게 한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미야자키의 부인이 한국에 분점이라도 낸 건가?

삐걱. 딸랑딸랑.

안으로 들어가니 초인종 대신 청아한 풍경 소리가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하루코 님 계십니까?”

“예,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나를 맞이한다. 어라, 미야자키의 부인이 직접? 그녀의 이름이 하루코다.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나이기에 이름까지 들으니 깜짝 놀랐다.

“유 사장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어서요.”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스므니다.”

“오, 미야자키 씨!”

나는 두 팔을 벌려 포옹부터 했다. 용인밸리에 히타치 케미컬 지사가 들어서면 사장 자격으로 내게 한 번 들를 것은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 볼 줄은 몰랐다. 못 본 사이 한국어도 꽤나 늘었다.

“놀라셨지요. 사실 여기 몬타베 주인이 제 집사람입니다.”

“아! 그렇군요. 하하, 이런 우연이….”

“몬타베에서 집사람을 통역으로 쓸 때 말씀을 드릴까 말까 엄청 고민했었지요. 늦게라도 사과드립니다.”

사과받을 일이 아니다. 내가 의도한 일인데, 뭘. 와중에 가게를 꾸미고 날 초대하려 했나 보군. 일본인답게 직접 초대하기보다는 영업팀장인 권 부장에게 말을 넣었나 보다.

“사과하실 일이 뭐가 있다고요. 들어가시죠.”

“추운데 밖에 오래 계시게 했군요. 사과드립니다.”

“아이고, 그만하시고 앞장서세요. 하하.”

미야자키의 뒤를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룸으로 들어섰다.

사랑방인지 느낌이 아늑하고 좋다.

한옥에 일식집을 차리니 묘하게 운치가 있다.

방석을 깔고 자리에 앉자마자 따끈한 기운이 올라온다. 미국에 며칠 있었다고 이마저도 기분이 좋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일본에서 주주총회를 마치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이리되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인답게 간접적으로 말을 잘한다. 사장으로 승진이 되었나 보다.

“사장님이 되셨다는 말이군요. 한데 사장님이 이리 자리를 뜨시면 되겠습니까? 일본 본사는 누가 지킵니까. 하하하.”

“우메모토를 이사로 특진시켰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일본 본사는 알아서 굴러갈 겁니다.”

“두 분 위치가 바뀌신 게 아닙니까?”

이상하잖나. 미야자키가 본사로 돌아가고 한국 지사장은 우메모토를 시키든가 해야지. 아무리 소재 업체가 물 붓고 막대기로 휘휘 저어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해도 본사에 사장이 없으면 되나?

“아닙니다. 한국에는 사장인 제가 있어야죠. 실질적인 오너도 한국에 계시고, 제 처도 이곳으로 옮겼으니 제가 있을 곳은 한국입니다.”

“으음?”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따로 뒷조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사장으로서 대주주가 누구인지 살피는 것은 기본 업무이지 않습니까. 이참에 회사 이름을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더 이상 히타치 그룹의 소자회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뜻을 헤아리니 결국 회사 운영에 내 의사를 실시간으로 반영하겠다는 의미다.

하긴 내가 히타치 케미컬의 지분을 51%나 가지고 있으니 내 회사이긴 하다.

히타치 오너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은 채 3%도 안 되니 히타치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나 또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고객들이 히타치 케미컬이라는 이름에 익숙하니 회사명 변경은 신중해야 한다.

자세 좀 잡자고 회사 매출을 떨어뜨리면 되겠나.

“회사 이름을 바꾸자고요? 그 얘기는 천천히 하시고, 식사부터 하시죠.”

“아아, 그렇군요.”

미야자키가 하루코를 쳐다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지금 몇 분째 탁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개업식이니 맘껏 즐겨 주십시오. 술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하루코가 기다렸다는 듯 주문을 받았다. 일식집에서 메뉴가 아니라 술부터 주문을 받으면 VIP 대접을 하겠다는 말이다.

술에 어울리는 안주 위주로 상차림을 알아서 한다는 뜻이다. 오늘은 정말이지 몬타베의 최고급 요리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뭘로 할까요? 권 부장님? 나 부장님?”

“오늘 주인공은 저희가 아니라 사장님이시니 사장님이 정하셔야죠.”

“어이, 권 부장! 말이 청산유수야.”

“하하, 그럼 이 비서가 정해 봐요. 수행한다고 고생 많았잖아요. 오늘은 차 버리고 갑시다.”

“제가요? 그럼 저는 소주로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밍밍한 와인만 마셨더니 소주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네요. 소주 한 박스!”

“하하하! 소주로 할게요.”

“예,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 *

참치 대뱃살과 메로구이 등 고소하고 기름진 안주들이 잔뜩 깔렸다.

기껏해야 2주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서로 떠들어 댈 무용담이 넘친다.

이야기 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이 섞이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래서요, 에그펫 납품을 어찌하셨다고요?”

“일본 고객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제가 물량 배정을 추첨하는 게 어떠냐고 했죠. 배를 확 짼다고 한 소리였는데, 일본 TV 쇼에서 재미나다고 아예 판을 깔아 주더라고요. 지역별로 연예인들이 나와서 백 개씩 할당량을 걸고 게임까지 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우하하하! 광고 효과가 엄청났겠네요.”

“반다이 사람들이 미친 듯이 로비한 결과입니다. 이제 일본 딜러는 반다이로 올인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런 아이디어까지 내며 선전해 줬는데 보상은 당연하죠.”

권 부장의 무용담은 꽤나 재미있었다. 물량이 달린 것이 외려 호재가 되어 버렸다.

“저도 자랑할 게 있습니다. 회사로 돌아가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3층까지 깡그리 라인으로 바꿔 버렸거든요.”

“오오오.”

“나 부장님, 그거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그 바람에 사무실을 컨테이너 박스로 모두 옮겨 버렸잖습니까.”

“왜, 낭만적이잖아. 짜장면 시켜 먹기도 편하고, 족구할 때 편 나누기도 좋고.”

“하하하!”

내 회사가 미친 듯이 달려 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사무실 짓는 시간이 아까워 컨테이너 박스를 가져다 놨어?

“아! 그러고 보니 사장님, 공채 공고에 지원자가 꽤나 몰려왔습니다. 면접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제가 안 봅니다. 실제로 일할 사람들이 봐야죠. 면접 위원은 김 대리, 송 대리와 함께 나 부장님이 하십시오. 영업맨만큼은 권 부장님이 경력자로 따로 뽑으시고요. 영업은 면접으로 고르기 애매하니까.”

“아, 그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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