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투자 설명회 (28/104)

제2장 투자 설명회

사흘이라는 시간이 후루룩 흘러가 버렸고 지금 내 일행은 모두 올림피아 센터라는 마천루 앞에 서 있다.

전면 유리창이 적갈색이며 최고층에 파라곤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로고가 선명한 것이, 정말이지 21세기에서 온 내가 봐도 그리스의 신들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굉장히 위압적이면서도 멋진 건물이다.

“후욱! 수한아, 여기서 발표하는 거냐?”

“쫄리냐?”

“쫄리기는 네가 쫄리겠지. 나는 하나도 안 쫄린다.”

“발표는 내가 할 테니까 그만 떨어라. 보기 민망하다.”

“짜샤, 나 안 떨었거든!”

재훈이는 건물이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당했는지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꿀꺽.

“들어가시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들어갑시다.”

30대인 이 비서마저 옆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농담을 못 하는데, 20대인 재훈이가 어련하겠나.

컴퓨터가 실린 캐리어를 끌고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고층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층까지 다이렉트로 올라갔다.

케이가 우리를 반겨 줬다.

“어서 와요. 생각보다 좀 늦었네요. 발표 때 시연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렵지 않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참석자도 여섯밖에 안 된다면서?”

“휴우, 미안해요. 한 명이 또 줄어서 다섯이에요. 하지만 투자액은 그리 차이 나지 않을 거예요. 발표 잘할 거라 믿어요. 회의 막판에 지지 발표가 필요하면 나도 나설게요.”

8% 남짓한 케이의 지지율이 또 떨어졌나 보다. 걱정 마, 오늘 참석한 물주들은 대박을 치게 될 거니까. 1년 내 케이 당신의 입지는 차원을 달리하게 될 거야.

나는 애써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하하, 걱정 마. CRT 프로젝터가 있다면서? 그거 동작만 되면 문제없어.”

“제가 미리 확인했어요. 동작엔 문제없어요.”

천조국답게 회의실에는 초기 빔 프로젝터가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만들어 온 OHP 필름을 쓸 필요도 없이 컴퓨터에서 직접 쏘면 되니 훨씬 편할 것이다.

“발표 장소는 어디지?”

“저기 다이아몬드 홀이에요.”

“이름 좋네. 나름 최상급 대접을 해 준 것 같은데?”

“파라곤 시카고 지부에서는 최상급 회의실이에요. 뉴욕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운 좋은 계약이 많이 이루어졌던 곳이죠.”

케이가 농담처럼 운 좋은 계약이 많이 일어난 곳이라며 둘러댔지만, 나름 나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 준 거다.

투자 회사는 투자 설명회를 개최하는 회의실 선택부터 고객에게 정보를 주기 시작한다. 방마다 이름을 붙이고, 수익률과 성공 가능성, 그리고 투자 금액을 모두 점수화해서 레벨을 매기고 그에 맞는 회의실을 예약하는 거다.

즉, ‘파라곤 지부의 어느 회의실을 예약했으니 참석하시라!’고 하면 고객들은 대충이나마 그 계약에 투자 검토자가 얼마나 확신하는지 알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파라곤의 로고이니 최고 등급일 것은 당연하며, 케이와 케이슨이 공히 나를 최고 투자처라며 물주들에게 선전하고 있음이다. 자신들의 명성을 내 어깨에 얹어 놓았다.

“고마워. 배려해 줘서.”

“나름 기름칠에는 최선을 다했어요. 투자 적격 자료는 이미 배포했고, 최소 10억 불은 투자해야 한다고 의견을 기재했어요.”

“정말 고생 많았어. 뒷일은 내게 맡겨.”

듣보잡 한국 벤처에 투자 적격 판정을 내리고 10억 가치를 매기다니, 파라곤 내에서도 꽤나 왈가왈부했겠다 싶다. 케이가 케이슨을 뒷배로 두고 힘으로 눌렀다는 의미다.

여하튼 다섯 명이 10억 불이라. 한 명당 2억 불. 거물급 물주이긴 하네. 오히려 설득이 쉬울 수도 있겠어.

끼이익. 촤르륵.

두꺼운 문을 열고 안에 있는 방음용 커튼까지 열어젖히니 화려한 회의실이 드러난다.

물주들은 단상보다 살짝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반을 잘라 낸 도넛 모양의 책상이 놓여 있고 그곳에 앉아 정중앙에 위치한 발표 단상을 내려다보는 형태다. 발표자가 눈을 둬야 할 곳이 마땅치 않으며, 머리 위에서 질문이 쏟아지면 당황하기 십상인 배치다. 뭐, 산전수전 다 겪은 나에겐 별스럽지 않다.

“자, 이동용 책상이 있으니까 내가 중앙에 서고 양쪽으로 컴퓨터를 셋업하자고. 좌측엔 이 비서가, 우측엔 재훈이가 앉아 줘. 투자자들이 나와서 봐도 쫄지 말고 내가 시연을 부탁하면 그대로 따라서 하면 돼.”

“예.”

“알았어. 문제없어.”

드르륵. 덜컥덜컥.

나는 구석에 여분으로 있던 책상을 가져왔고, 나머지 둘은 컴퓨터를 셋업했다. 바닥에 전원 아웃렛이 여러 개 있었기에 줄을 길게 늘일 필요도 없었다.

역시 천조국답게 작은 것조차 세련됐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이것저것 살펴봐도 시연에 에러 날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발표 자료 유인물을 투자자들 책상 위에 한 부씩 올려놓았다. 물주들이 귀찮게 뒤적거리진 않겠지만 중요 계약서를 끼워 두었다는 측면에서 꼭 필요했다.

저벅저벅.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처드.”

“별말씀을. 다이아몬드급은 오랜만이군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케이슨 교수가 입구에 자리를 잡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물주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자들이다.

“어서 오세요, 리처드.”

“오! 케이, 오랜만에 보는구나.”

“저도 오랜만이라 반갑네요. 참석해 주셔서 감사해요.”

케이도 케이슨의 맞은편에서 인사를 나눈다. 케이는 리처드라는 물주와 포옹하고 번갈아 뺨을 맞대며 환대했다. 시카고답게 마피아들이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투자 회사가 원래 그렇지. 돈으로 이어진 냉정한 관계지만, 그 속에서 이처럼 지지율 반등을 꾀하는 투자 설명회에 참석해 주는 성의를 가진 물주라면 케이 입장에서는 정말로 고마운 사람일 거다.

저벅저벅. 털썩.

단상 옆에 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라는 백인은 나를 본 척도 않고 계단을 올라 도넛 책상에 앉는다. 솔직히 기대는 안 한다는 의미겠지.

저벅저벅.

비슷한 위압감을 풍기는 자들이 네 명이나 더 들어왔다. 인사말이 오갔지만 그들의 이름 따윈 나도 관심 없다. 나는 그들의 돈이 필요하고, 그들은 내가 자신들 대신 돈을 벌어 주길 바라는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다.

케이슨이 정중앙에 앉고, 케이가 도넛 책상의 끝에 앉는다. 입장은 끝났다는 의미다.

찰칵!

나는 지체 없이 빔 프로젝트의 전원을 켰다. 내 정면에서 빨강, 초록, 파랑 렌즈가 밝게 빛난다. 물주들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파라곤 투자자를 대표해 투자 설명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저 또한 스마트 클라우드 임직원을 대표해, 파라곤에서 투자 설명회를 하게 된 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회사 소개부터 해 주면 좋겠군요.”

“주요 숫자는 유인물에 있으니 참고하시고, 사업 모델과 현재 매출 상황, 차후 예상 수익 위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기본 기술은 반도체와 무선 통신 관련 기술입니다. 일단 에그펫부터 살펴보면, 휴대폰에서 동작하는 간단한 게임이며 미국, 일본을 비롯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지이잉.

CRT 빔 프로젝트답게 발표 자료는 영화처럼 화려했고, 에그펫에 열광하는 각종 언론 기사를 필두로 매출 실적, 순익 예상치를 보여 주었다.

연 매출 1.6억 불 수준, 수익은 1,700만 불 정도이며 해당 인기는 10년 정도 갈 것이라고 정리했다.

“후후, 장난스럽군. 그렇잖나, 리처드?”

“하워드, 이제 시작인데 뭘 그래? 잠자코 들어 보지그래.”

“10억 달러를 회수하려면 저런 사업을 동시에 열 개쯤 하면서, 7년은 족히 기다려야 줘야 하는데 다 듣고 있을 셈인가?”

나보고 들으라는 식으로 책상에 설치된 마이크를 끄지도 않고 농담을 한다. 케이슨이 외려 모른 척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런 건 우습게 보이실 겁니다. 허나 이런 게 있으니 스마트 클라우드는 뭇 일반 고객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심을 수 있지요. 그런 가치는 측정 불가지요.”

“으흠.”

“하하! 이건 시작이고요, 다음은 좀 더 전문적인 제품입니다. 핸드 터미널이라고, 휴대할 수 있는 소형 컴퓨터라고 하겠습니다. 기능은 유통업 종사자에게 최적화되어 있으며….”

핸드 터미널 설명을 시작하자 뭇 투자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초기 예상 매출액이 연 4억 불, 수익은 5천만 불 정도로 해당 사업은 2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기대했다. 에그펫과 달리 매출액과 수익 그래프가 연간 20% 이상 고속 성장할 것으로 그려 놓았다.

솔직히 성장률은 훨씬 클 것 같지만,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지우려 10% 정도를 깎았다.

“오오! 군납도 하고 있는가?”

“주한 미군에 납품하고 있으며, 조만간 미군의 공식 조달 품목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혹시 납품 시스템은 어찌 동작하는지 보여 줄 수 있나?”

“물론이죠. 회의 말미에 시연을 하겠습니다.”

“그게 망가지거나 고장이 나면 납품 실적은 어찌 되나?”

“설사 영수증이 출력되지 않았어도 데이터만 송출되었다면 상관없지요. 또한 납품 중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경우, 하드 디스크가 손상되지 않았다면 신규 핸드 터미널에 연결하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복구됩니다.”

나는 각종 질문에 즉각즉각 답을 하며 발표를 진행했고, 내구성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핸드 터미널을 바닥에 툭툭 던져 가며 눈앞에서 내구성을 증명해 주었다. 투자자들은 꽤나 구미가 당길 것이다.

“한데 여전히 휴대폰에 투자하는 것보단 덜 매력적이야. 그렇지 않아, 리처드?”

“글쎄. 하워드, 자네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보군. 저 정도면 훌륭한 제품이잖아. 자동차 부품 재고 정리할 때도 쓴다잖나.”

“너무 튼튼해. 한 번 쓰고 안 살 거야. 적당히 튼튼해야지. 비즈니스를 몰라.”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만, 몇 푼 더 벌자고 제품의 내구성을 떨어뜨리는 짓은 안 합니다. 저희 회사 이미지는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훗! 말은 잘하는군.”

드디어 내가 어디에 눈을 맞춰야 할지 알겠다. 발표를 할 때는 호의적인 사람과 눈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박을 노리려면 적대적인 사람과 눈을 맞춰야 한다.

나는 하워드라는 물주와 눈을 맞췄다. 휴대폰과 자동차 품목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이들은 제조업 기반에 투자하는 양반들이다. 투자에 매우 보수적이라는 의미다.

MS나 AOL처럼 최근 대박을 치고 있는 투자에는 끼지 못한 양반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심 그 기회를 잡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파라곤의 다른 투자자들은 대박을 쳤는데 말이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사업 아이템이 남았습니다.”

“핸드 터미널 시연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케이슨은 핸드 터미널을 메인으로 밀고 싶은 거다. 또 다른 사업 아이템으로 투자자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조언 같기도 하다.

하나 내 목적은 그게 아니지. 나는 대박을 치러 이 자리에 온 것이거든. 재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물주들을 앞에 두고 뭐하러 사업을 숨기나.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케이슨 님, 발표 순서를 즉흥적으로 바꾸기가 어렵군요. 유인물부터 살펴봐 주시지요. 마지막 사업 아이템은 보안이 매우 중요해서 말입니다. 일단 서명부터 받고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으흠, 서명이라고?”

내 말에 케이슨이 유인물을 뒤적거리다 중간쯤에 껴 놓은 ‘보안 유지 계약서’를 발견하고는 살짝 당황하는 눈치다.

미국인들은 계약에 매우 민감한 이들이다. 예상치 못하게 일방적으로 불쑥 계약서를 들이미는 것은 비즈니스에서 금기시되는 일이다.

특히나 투자 설명회에서 ‘보안 유지 계약서’라니. ‘서명하지 않으면 발표 안 할래. 듣고 싶으면 서명해.’라는 의미다. 일개 벤처가 물주를 윽박지르는 꼴이다.

“이게 뭐야? 해당 기술이 밖으로 알려지면 소송을 불사하겠다?”

“네, 하워드 님. 이 사업 아이템은 아이디어가 핵심입니다. 소송을 해서라도 지켜야죠. 지적재산권은 소중하니까요.”

“아이디어라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우리가 정보를 누설 안 했다는 걸 어찌 증명할 수 있나? 외려 모함을 당할 수 있어.”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불편하시면 서명하지 말고 나가시면 됩니다.”

“뭐야!”

하워드가 꽥 소리를 질렀다. 리처드는 ‘고놈 당돌하네?’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으며, 케이슨을 비롯해 다른 이들도 표정이 굳어졌다.

“웬만하면 저도 이러고 싶진 않습니다만, 이 기술은 개념은 무척 간단해도 전 세계 비즈니스의 판도를 바꿀 아이디어입니다. 함부로 공개하면 안 되지요. ‘보안 유지 계약서’는 꼭 필요합니다.”

“난 서명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야. 1년에 열 번도 채 하지 않을 거야.”

“그러실 것 같네요. 무척 보수적으로 투자하시는 분이니까. 지금 자리를 떠나셔도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비즈니스 판도를 바꿀 기술입니다.”

“…….”

“하워드 님, 경쟁자가 MS나 AOL에 투자했겠지요? 그 때문에 짜증이 나신 거 아닙니까? 제가 약속드리죠. ‘보안 유지 계약서’에 서명하시는 즉시, 그 양반들보다 훨씬 대단한 투자처를 찾게 될 겁니다. 제 발표를 통해서 말입니다.”

“호오? 내가 최근에 들은 말 중에서 제일 솔깃한걸. 후후후.”

리처드가 옆에서 거든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비단 동양에서만 통용되는 속담이 아니다. 미국 사람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그 정도 자신이 없다면 하워드 님 같은 제조업계의 큰손에게 서명을 요구하진 못했을 겁니다.”

“크흠.”

“자! 시간이 아깝습니다만.”

쓱쓱.

하워드의 옆에 앉아 있던 리처드가 만년필을 꺼내 서명을 하더니 케이슨의 자리로 쑥 하고 밀어낸다. 여전히 하워드는 서명하길 꺼려 한다.

“난 했으니까 5분의 1만 먼저 말해 보시게.”

“감사합니다. 제 아이디어는 반도체, 에그펫, 핸드 터미널을 여기 컴퓨터라는 존재와 연결하는 겁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연결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일종의 비즈니스 모델을 연결한다고나 할까요.”

쓱쓱.

케이슨의 우측에 앉은 이름 모를 이가 눈을 반짝거리더니 서명을 한다.

“나도 서명했네.”

“아, 좋네요. 이들을 연결해 줄 인터넷이라는 좋은 툴이 있습니다. 재훈, 인터넷을 한번 띄워 주겠어?”

철컥. 딸칵.

CRT 빔 프로젝터에 잭을 연결하고 능숙하게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재훈이다. 미리 짜 둔 작전대로 이곳저곳을 클릭하며 각종 연구소나 대학 도서관에 연결해서 논문들을 살펴본다. 그러곤 재차 원래 초기 화면으로 돌아오는데, 초기 화면에 ‘Download Egg-Pet! Just 5$!’라는 광고가 반짝거린다. 귀여운 에그펫 아이콘이 깜찍하다.

“인터넷이 좀 더 대중화되면 이런 광고는 돈이 좀 되지 않을까요? 첫 번째 수익 모델입니다.”

“오호?”

쓱쓱. 쓱쓱.

“나도 서명했네. 더 말해 줄 수 있나?”

“나도 마찬가지네.”

“감사합니다. 이 비서, 준비됐나요?”

딸깍. 화아악.

“예. 스캔하시지요.”

이번에는 CRT 잭을 이 비서가 연결한다. 화면엔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핸드 터미널 시스템이 반짝거리며 데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좋아요. 스캔합니다.”

찌링, 찌링, 찌링.

테스트용 바코드를 핸드 터미널로 스캔하니 자동적으로 숫자들이 쌓여 간다. 카테고리별로 쭉쭉 숫자들이 정리되며 일목요연하게 재고들이 정리되는 모습니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을 거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지부들이 본사로 이런 데이터를 송부한다면 어떨까요? 이 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비단 납품 업무뿐일까요? 책상에 앉아서 경영 정보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각종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큰돈이 될 수 있습니다. 장외 증권이나 선물 정보를 블랙 페이퍼(지라시)로 받아 보던 시대는 지났죠.”

“더 말해 보게. 그 방법이 궁금하군. 이메일 시스템을 말하는 것 같은데, 보안 유지를 어떻게 할 셈인가?”

케이슨이 내 말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역시 첨단 기술까지 살피는 케이슨답게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는다.

“아직, 하워드 님께서 사인하지 않으셨습니만.”

쓱쓱.

결국 하워드마저 서명을 한다.

“했네. 말해 봐. 정보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지? 해킹 천국인 PC 통신 따위를 거론한다면 난 실망할 거야. 내가 AOL에 투자하지 않은 이유가 그거거든.”

“이름부터 알려 드리죠.”

“뭐라고 부르는 기술인가?”

“인트라넷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인트라넷?”

어디선가 들어 봄 직한 이름일 것이다. 인터넷과 비슷하니까. 하워드는 살짝 이맛살을 구겼지만 케이슨과 리처드는 이름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인상이 환하게 펴진다.

“오호, 인터넷을 B2B에 한정하려고 하는군. 괜찮은 아이디어야! AOL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었군!”

“케이슨도 그리 느꼈군요. 우리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다운로드가 빨라지겠군요.”

케이슨과 리처드가 동시에 반색하며 맞장구를 친다. AOL은 대한민국으로 치면 하이텔, 천리안처럼 PC 통신을 사업 모델로 한다. 이 시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다. PC 통신이라는 새로운 정보 전달 시스템이 대박 기술이라는 것 말이다.

하나 현재의 기술적인 한계를 고려한다면 전혀 대박이 아니다. 모뎀을 통한 다운로드 속도는 정말이지 짜증이 아니라 화가 날 정도니까.

나중 일이지만 2000년에 AOL이 미디어 콘텐츠 업계의 거물인 타임워너를 인수하고 폭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3,500억 달러, 한화로 300조가 넘는 초대형 합병이었지만 역사적인 삽질이었다. 영화, 뮤지컬 한 편 다운로드 받는 데 몇 시간이 소요되는데 누가 그 짓을 하고 앉았겠나? 하물며 요금은 장난 아니게 비싼데 말이다.

콘텐츠 매출은 당연히 형편없었고, 주가는 곤두박질을 거듭했다. 이 합병은 미국의 닷컴 버블을 터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운로드 속도를 무시하다니, 나는 그런 실수는 안 한다. 닷컴 버블이 끝나고 고속 광통신이 대중화될 때까지 콘텐츠 사업은 시기상조다.

현 상황에서는 회사 내에 서버를 만들고 직원들이 자신의 PC로 직접 서버에 접속해 정보를 공유하고 활용하며, 지부 간에는 인터넷으로 하루 종일 데이터를 주고받는 방식이 유일한 대안이다. 이때 각 사용자는 보안이 설정된 메일 시스템으로 접속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조만간 유수 업체에서 실행되는 업무 개선 시스템이며, 선점하는 자가 승자가 될 것이다. 이런 인트라넷이 점점 퍼져 나가면 광통신 인프라는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자리 잡을 것이다.

“잘 보셨습니다. 인트라넷이란 회사별로 단거리 정보 공유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각자 메일 주소를 가지고 이메일로 업무를 공유하며 업무 지시를 받지요. 스마트 클라우드의 인터넷 브라우저, 핸드 터미널의 통신 기술을 블랙박스 형태로 오픈하면 아까 발표 자료에 있었던 에그펫 애드온처럼 각 회사마다 다양한 인트라넷이 구성될 겁니다.”

클라우드 시스템의 초기 버전이라고 하겠다. 이런 새로운 개념은 물주들에게도 미래를 보여 줄 수 있다. 물주들 각자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사업 모델이 떠오를 거다.

“개념은 이해가 되네. 한데 블랙박스라곤 하지만 인터넷 브라우저와 통신 기술을 공짜로 푼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군. 그게 다 돈이지 않나.”

“공짜가 아니면 경쟁자가 마구 생기겠지요. 솔직히 MS나 AOL도 프로그램을 팔기 시작하면 금방 레드 오션이 됩니다.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지요. 저희는 실물을 파는 제조업체입니다.”

소프트웨어는 다양한 변종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다품종 체제는 현재 내 입장에서 추구하는 전략이 아니다.

닷컴 버블이 붕괴되고 고속 인터넷 인프라가 생성되면 그때서야 클라우드 운영 체제를 기반으로 다품종 프로그램을 팔아야 한다. 그때도 클라우드 운영체제 자체는 공짜로 풀 거다.

클라우드 데이터 센터에 내 회사가 만든 반도체를 써서 매출을 키우고, 유저 회사들에겐 데이터 센터 유지 보수비와 애드온 프로그램 사용비만 받아도 천문학적인 돈을 벌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다른 이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

“그럼 뭘 팔겠다는 건가?”

“당연히 데이터 시스템을 팔아야죠. 데이터 서버에 들어갈 반도체를 팔고, 그걸 이용할 핸드 터미널을 팔고, 그 모든 걸 외부 공격에서 막아 낼 보안 프로그램을 팔아야죠.”

“하하! 기반은 공짜로 주고, 실제로 활용하려면 돈이 필요하게 만든다! 반도체와 핸드 터미널 수요를 감당하려면 10억 불 투자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하하하!”

케이슨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다른 회사는 뭐 바보인가? 그들도 시스템을 팔겠다며 소프트웨어를 공짜로 뿌릴 거야.”

하워드가 또다시 딴죽을 걸고 나선다. 맞는 말이다. AOL도 공짜 클라이언트 CD를 스팸 메일 뿌리듯 뿌려 댔다.

“정확하십니다. 결국 그리되겠지요. 허나 그 또한 예상한 바입니다.”

“그래서 대안이 뭔가? 고객별로 최적화된 클라이언트를 제공한다는 되도 않는 말은 아니길 바라네.”

“제 대안은 통신 프로토콜 표준입니다.”

“통신 프로토콜?”

“유인물 맨 뒷장에 설명해 뒀습니다만, 프로토콜은 통신이라는 금고를 열기 위한 열쇠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께서 도와주신다면 저희 회사 통신 체계를 국제 표준으로 만들 수 있지요.”

“표준?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러나. 통일된 잣대를 만들면 프로그램 제작이 더 쉬워질 것 같은데.”

“표준에서 벗어나면 기존에 만든 프로그램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누구 걸 표준으로 삼을지 싸우는 시간에 저는 시장을 선점할 겁니다. 필히 제 것이 표준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허어!”

“게다가 제 회사 통신 특허가 표준이 되면 로열티는 못 받아도 경쟁사 프로그램을 출시 전에 공식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이 생깁니다. 살펴봐야 라이선스를 줄 거 아닙니까.”

“허가받은 산업 스파이가 되겠다는 건가?”

케이슨이 훅 하고 치고 나온다.

“굳이 그렇게 표현하실 필요는… 하하. 여하튼 자연스레 자사 프로그램은 첨단을 달리게 될 것 같은데요.”

“우리가 나서서 당신 특허를 업계 표준으로 밀어라? 정계 로비를 하라는 말인가?”

“미국만 맡아 주시면 다른 나라는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하하!”

“허허허허!”

하워드만 빼고 모두가 웃는다. 나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는 하워드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시큰둥하게 말을 내뱉는다.

“다 헛소리 같군. 그 모든 게 보안 프로그램이 없으면 말짱 거짓말이야. 내가 말했지. PC 통신의 아류 따위는 사업 아이템이 못 된다고.”

역시 보수적인 물주의 끝판왕다운 모습이다.

“혜안이 대단하시군요. 이쪽으로 잠시 나오시죠. 직접 시연해 보는 것보다 확실한 건 없으니까요.”

나는 CRT 프로젝터의 잭을 재차 재훈이의 컴퓨터에 끼웠다. 준비됐냐고 하니 재훈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초기 코딩이긴 하지만 인류가 300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수학적 난제를 암호 추출기로 바꾼 코딩이다.

화아악.

“이게 뭔가?”

“타이핑을 할 줄 아십니까? 굳이 해킹 원리를 아시는지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날 무시하나? 내 눈앞에 그 어떤 신기술이 나타나도 투자에 판단 미스를 한 적이 없어! 그런 나에게 타이핑 따위를 묻는 건가?”

“하하,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손녀에게 편지 한 통 써 보시죠. 그럼 극한의 보안 프로그램이 뭔지 아시게 될 겁니다.”

“으응?”

나는 재훈이가 앉았던 의자를 가리켜 보았다. 다른 투자자들도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들 계단을 내려와 컴퓨터 옆에 선다.

타타타타타.

하워드는 6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데, 깜빡거리는 커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타이핑을 했다. 역시 수십 년간 타자기를 써 온 천조국 국민답다.

아무렇지도 않게 타이핑하던 하워드의 눈빛이 달라진다. 나름 보안이 뭔지 아는 사람인 듯 똑같은 단어를 연거푸 세 번이나 쳐 본다.

촤르르르륵.

2분할되어 있는 화면 왼쪽에 편지를 써 내려갈 때마다 오른쪽 화면에는 숫자와 특수 기호들이 주르륵 스크롤 된다. 일반인이 봐도 암호 패턴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하나마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암호화시켜 전송합니다. 16자리 이상의 소수를 입력해 수학 방정식을 풀어 나가면서 암호를 만드니, 서버에서 실시간으로 바꾸는 소수가 뭔지 알지 못한다면 프로그램 원작자도 암호 해독이 불가능하죠. 난수표를 무한히 입력하는 전통적인 해킹 방식으로는 100년을 지속해도 해독 불가능합니다. 이게 그런 수학적 난제에 기반을 두고 있거든요. 한마디로 서버에는 타이핑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숫자만 잔뜩 채워져 있는 꼴입니다. 해킹해 봐야 외계인과 교신한 거랑 다를 바 없습니다.”

“어어어….”

현재 프로그램이 완벽하진 않지만 개념만 알려 줘도 무방하다.

“케이슨, 나 3억 달러 투자하겠어.”

“난 2억 5천.”

“나 2억 8천.”

“뭐야, 합계 10억 달러인데 그러면 어쩌나. 내 몫은?”

서로 돈을 내놓겠다고 한마디씩 한다. 하워드는 타이핑을 하다 말고 멀뚱히 화면만 쳐다보고 있다. 머릿속으로 뭔가 딴죽 걸 것이 남았는지 열심히 체크하나 보다.

탕! 탕!

하워드가 갑자기 책상을 쳐 대며 소리를 쳤다. 결론을 내셨습니까? 의심 끝판왕님!

“이 판에 투자금 한계가 어디 있어? 난 5억 달러! 계약서 내놔, 애송이!”

“하하하하!”

나를 애송이라고 지칭하면서 5억 불을 내놓겠다고 한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하워드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 타이핑하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하하하! 여러분 일단 와인부터 한잔 하면서 정식 계약을 하죠. 드릴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케이슨이 물주들을 몰아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내가 지분율 10% 이상은 절대 팔지 않겠다고 했으니 딜을 할 것이 많을 것이다. 내 통신 규격을 표준으로 등재할 로비도 어찌할지 논의해야 할 테고 말이다. 이래저래 마라톤 회의를 할 게 뻔하니, 나는 이쯤에서 빠져야겠다.

“이거 한 부씩 가져가세요! 계약서입니다.”

케이는 환하게 웃으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물주들에게 투자 계약서를 나눠 준다. 그녀가 지지 발표를 할 필요도 없었다. 섹시하게 회의실 문에 기대서더니 내게 엄지 척을 해 준다.

“수한 씨, 한국에서 제일 큰 백화점을 예약하셔야겠어요.”

“어련하겠어? 뒷일 부탁해도 되지?”

“염려 마세요. 금액만 알려 줘요. 10억 불이에요, 아니에요?”

“다다익선! 돈은 언제나 다다익선이지.”

“다다익선. 다다익선!”

케이는 다다익선을 반복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여태 바짝 얼어 있는 이 비서와 재훈이의 등을 두드리며 컴퓨터를 챙겼다. 빌딩에 들어섰을 때보다 다리가 더욱 후들거리나 보다. 하늘에서 돈벼락이 쏟아지면 누구나 그렇다.

“역시 미국은 천조국이야! 돈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잖아!”

“너 진짜 사장 맞나 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대한민국 최고의 벤처 사업가라고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깨동무를 한 채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춤을 췄다.

“10억 불이다, 10억 불! 믿기냐, 친구야?”

“나 그거 0.1퍼센트 만 줘라, 친구야!”

“그게 뭐야! 네 회사 차리려면 1퍼센트는 줘야지! 하하하!”

“코오옥! 너 정말 내 절친 맞구나!”

“하하하하!”

    • *

투자 설명회를 한 당일은 긴장이 풀어져 죽은 듯이 잠을 잤고, 이래저래 파라곤에 불려 가기를 반복했더니 벌써 귀국할 시간이 내일로 다가왔다. 파티도 없이 그냥 갈 수는 없었기에, 미뤄 뒀던 럭셔리 회식을 오늘에서야 하게 되었다.

멋지게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손님으로 초대한 에릭 비나가 점심만 가능하다고 해서 이렇게 대낮에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흐흐. 흐흐흐.”

눈앞에 있는 재훈이는 아직까지 입이 귀에 걸려 있다. 하긴 천만 불이면 한화로 80억이 넘는 돈이다. 벤처 회사를 차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케이는 조만간 물주들이 계좌를 오픈하기로 했으니, 집행하는 데 보름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케이, 재훈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허튼 데 돈 못 쓰게 파라곤에서 사람 몇 명 붙여 줘.”

“제정신이 아니긴 해요. 기껏 요청한 게 사무실이랑 컴퓨터가 전부예요. 직원도 딱 두 명.”

“재훈아, 엔지니어 더 뽑아라. 그리고 재무 담당은 파라곤에서 지원받아. 알았지.”

“흐흐흐. 알았다.”

“제가 좀 옆에 있다가 한국 들어갈게요. 백화점 예약 일정은 따로 알려 드리죠.”

“그러라고.”

원탁에는 나, 케이, 이 비서, 재훈이 그리고 에릭 비나가 앉아 있다. 여태 기쁨에 겨워 정신을 못 차리는 재훈이는 냅두기로 하고 에릭에게 눈을 돌렸다.

쪼로록.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인 드시면서 식사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이라면 더 좋았을 텐데. 여기 석양이 멋진 자리라고 하더라고요.”

“나, 나는 낮이 좋아요. 밤에는 밖에 나서기가….”

왠지 방구석 폐인을 연상케 하는 에릭 비나. 척 봐도 유약하게 생긴 사람이다. 그래도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밤에 외출하는 게 싫다니.

“흐흐흐. 네가 이해해라. 에릭은 트라우마가 좀 있어. 헤이, 얘기해도 돼?”

“으응, 그래….”

“이 친구가 어릴 때 집 주변에서 밤에 총격전이 있었대. 그래서 밤에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안심이 된대.”

“어… 그렇구나.”

시카고답네. 에릭 비나는 백인이지만 히스패닉 느낌이 난다.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35번가 너머에 살았다면 충분히 있음 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원래 역사에서도 ‘넷스케이프’ 지분 매각에 분쟁이 있었음에도 법정에 출두하지 않았다고 들은 것 같다. 기본적으로 총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거네. 아는 사람이 다치기라도 했나?

“에릭, 이 자리는 계약하는 자리이기도 해.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내 친구가 다 들어줄 거야.”

정신을 차렸는지 재훈이가 한마디 거든다.

“들으신 대롭니다. 최고의 대접을 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연봉은 얼마나 받고 계신가요?”

“돈은… 주급 600달러만 넘으면 상관없습니다. 대신 연구소가 24시간 오픈되고, 그 곁에 숙소가 있으면 좋겠어요.”

주급 600불이면 우리 돈으로 따지면 연봉 3천도 안 되는데. 숙소 제공이 아니라 아예 집을 한 채 사 줘도 되겠다.

“음… 주급과 숙소 제공은 문제없습니다. 단지 24시간 오픈은 왜? 미국인에게 오버 타임 근무는 일반적이지 않지 않나요?”

“컴퓨터는 내가… 세상을 보는 창문입니다. 논문도 읽고… 사람들과 채팅을 하기도 하고….”

“채팅까지 해요? 아, PC 통신에서요?”

“제 친구끼리는… 내 채팅 프로그램으로 가능합니다.”

벌써부터 메신저 기능까지 있어? 천조국답다. 덕후 중에 최고 덕후는 양덕이라고 하더니, 능력 한번 대단하다.

“좋네요. 모두 지원할 테니까 에릭 비나 씨의 프로그램에 쓰인 개념은 모두 특허로 등재해 주세요. 회사 지분은 51프로로 하지요. 어떤가요?”

“…그 정도면 문제없겠네요.”

“그리고 재훈이가 대학 졸업하면 같이 한국에 오는 거 생각해 보세요.”

“한국이라고요? 거기 위험한 곳 아닌가요?”

“위험하지 않아요. 오히려 매우 안전하죠. 총기 소유가 불법이거든요. 주변에 총이 없어요.”

“…에?”

에릭은 그럴 리가? 하는 표정을 짓기까지 한다. 북한과 대치 중이라고 어디서 들었나 보다.

“에릭, 미국인인 내가 보장할게요. 한국은 지극히 안전해요. 밤거리에 사람들이 넘쳐요. 에릭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에요.”

“밤에… 사람들이….”

“예. 여자인 내가 돌아다녀도 전혀 문제없어요. 사방이 여자들인데.”

뽕!

“원하신다면 제 동료를 경호원으로 붙여 드리죠. 한국에 오신다면.”

“에헥!”

이 비서가 능숙한 영어를 내뱉으며 콜라병 뚜껑을 맨손으로 따는 차력 쇼를 보여 주었다. 에릭이 깜짝 놀란다.

나는 이 비서가 손에 쥔 냅킨 뭉치 안에 병따개가 있다는 걸 뻔히 알지만 굳이 말해 주진 않았다.

“태훈 씨, 포크 던지기도 해 봐요. 군대에서 많이 해 봤다면서요.”

“저기 기둥에 박히게 던지면 되나요?”

넉살 좋은 이 비서의 차력쇼가 몇 번 펼쳐지자, 점심시간이 왁자지껄해졌다. 불평할 사람은 없었다. 내가 4층 VIP층을 통째로 빌렸으니까. 내 친구를 대접하는 자리이지 않나. 2년 동안 뺑이 쳐 주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 저… 한국 가면 저런 경호원 붙여 주시나요?”

“원하신다면 몇 명이라도.”

“오!”

에릭 비나가 선물처럼 내 품에 날아들었다. 하하, 종신 계약을 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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