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새로운 대항해 시대 (27/104)

제1장 새로운 대항해 시대

수서 본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회사는 이틀 정도 더 출근을 했다.

파라곤 물주에게 보여 줄 에그펫 최신 버전과 프로그램, 핸드 터미널 샘플까지 챙기고 몇 가지 수출 업무 지시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 버렸다.

이 비서와 함께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와인 한 잔을 주문해서 마시고는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몇 번 자다 깨다 반복했더니 기내 방송에서 시카고에 도착했다고 알려 주었다.

휘이잉!

“사장님, 우리가 진정 사랑과 낭만이 넘친다는 시카고에 온 겁니까? 오홋!”

“어후. 안 추워요, 이 비서?”

“후웁. 전~혀 안 춥습니다. 청량하니 아주 좋은데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이런 날씨 아니었습니까?”

이 비서가 로맨티시스트였네. 2월의 시카고 날씨마저 영화를 떠올리며 춥지 않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1989년 그 영화는 정말 멋졌지. 시간 봐서 시카고 대학을 구경시켜 줘야겠다.

공항 입국장 너머의 자동문이 한 번씩 열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밀어닥친다. 청량하긴 하지만 정말이지 춥다.

재훈이 이 녀석 연락했을 땐 분명 마중을 나온다고 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인다.

“마중 나온다고 했는데 내 친구가 일이 생겼나 보네요. 차나 빌려서 출발합시다.”

“옙!”

드르륵.

카트를 밀며 입국장을 벗어나는데 어디선가 다다다다 하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느낌이 이상해서 몸을 돌렸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휙 하고 날아들었다.

다다다다다!

“야, 이 새꺄!”

퍽!

“커억!”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재훈이 녀석이 내 배를 향해 날라차기를 시전했다. 이 비서가 깜짝 놀라 녀석의 어깨를 파고들어 제압했지만 그렇게 버둥거리면서도 녀석은 발끝으로 내 명치를 몇 번이나 걷어찼다.

눈치가 빠른 이 비서가 내 친구라 판단하고 적당히 했기에 망정이지, 딴 놈이었음 단박에 바닥에 짓눌려 어깨뼈가 탈골되었을 거다.

“놔! 놓으라고!”

“얀마, 2년 만에 본 친구한테… 날라차기부터 하냐.”

“날 이런 곳에 처박아 둔 쉐리가 뭐래? 뭐, 럭셔리한 유학 생활? 이게 럭셔리냐! 죽을래?”

“사투리 없어졌다. 진주 촌놈이 출세했네.”

재훈이에게 럭셔리한 유학파의 향기 따위는 없었다. 꾀죄죄한 모습을 보아하니 도서관 구석에 틀어박혀 열심히 공부만 했나 보다.

하긴, 나중에야 한국에서도 유명해져서 한국인이 많이 오지만, 1990년 초반에야 누가 일리노이 공대를 오겠나. 돈 있는 집에서 학벌 세탁시키는 애들은 당연히 못 오고, 공부 잘해서 국비로 유학 오는 한국인이야 스탠퍼드, MIT, 하버드를 선호하니까.

“그래, 하도 외로워서 한글 사전을 달달 외웠더니 사투리가 없어지더라. 고맙다, 새꺄!”

퍽!

“아후, 그만해. 내 밥 사 줄게. 같이 놀아도 주고. 자꾸 이러면 나 그냥 한국 간다?”

“그랬다간 넌 진짜 죽는다.”

재훈이는 혹시라도 내가 정말 돌아갈까 봐 무서웠는지 헤드록을 걸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주차장엔 허름한 베이지 색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슬어 있다. 누가 똥차 아니랄까 봐 색깔도 똥색이다.

부르릉.

“트렁크에 짐 싣고 타!”

“마, 내가 보내 주는 돈 다 어디다 썼어? 이 똥차는 뭐야?”

“잘 굴러가는 차를 똥차라고 그러냐? 내가 드라이빙이 뭔지 보여 줄 테니까 타.”

내가 보내 주는 돈이면 럭셔리까진 아니지만 꽤나 풍족하게 쓸 수 있었을 텐데. 꾀죄죄한 꼴이 내 돈을 유흥비로 쓰지는 않았을 것 같고, 고개부터 갸웃하게 만든다.

이 비서가 피식거리며 짐을 트렁크에 싣고는 차 문을 열어 준다. 궁금증은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어디론가 가긴 가야겠다. 너무 춥다.

부아아아! 틱! 틱! 틱!

하이웨이를 달리는데 어디선가 틱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봤더니 와이퍼가 헐거워 창문을 두들겨 대고 있다. 차부터 사 줘야겠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밥 먼저 먹자. 내가 크게 쏠게.”

“여기 한식당 없다. 엉아가 잘 차려 놨으니까 집에 가서 먹으면 돼.”

“…….”

한식이야 네가 고프겠지. 나는 지금 왔는데.

뭐, 어쩌겠나. 재훈이가 하고 싶은 대로 냅두자.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

한데 가는 길이 심상찮다. 주택가로 가는 게 아니고 일리노이 공대인 듯한 학교를 빙그르르 돌아가더니 딱 봐도 연구소가 밀집해 있는 단지로 들어간다.

출입구에 서 있는 경비원에겐 ‘내 친구, 걱정 마!’ 하며 주먹 인사를 툭툭 해 댄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앞을 가로막았던 차량 바리케이드가 쑥 올라갔다.

덜컹덜컹.

연구 단지 중에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더니 옥상으로 향하는 쇠창살문을 열고 나선다. 뭔가 싶었더니 옥상에 그럴듯한 집이 있다. 미국에도 옥탑방이 있나 싶을 정도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주방, 침실이 분리되어 있는 꼴이 나름 사람이 살 만한 집이다. 펜트하우스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옥탑방보다는 럭셔리한 편이다.

“여기가 내 집이다. 삼겹살 구워 먹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

“이 날씨에 삼겹살?”

“아따, 말 많네. 미국에선 다 이런다고. 촌뜨기!”

지글지글.

재훈이 녀석은 잔말 말라면서 주방의 창문을 휙 열어젖히고는 어디서 구했는지 열선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버너를 가져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정말 작정하고 준비를 했는지 김치 비슷한 것과 소주까지 있다. 먹어 보니 양배추 김치다. 알싸한 게 묘하게 맛이 좋다.

삼겹살이 익어 가자 이 비서가 맥주에 소주를 섞어 첫 잔을 마련했다.

“자! 화려한 시카고에서의 파티입니다. 짜잔. 한 잔 하시죠!”

“건배! 웰컴 투 시카고오.”

“건배!”

단숨에 원샷을 하고 미국 삼겹살을 한 입 먹어 봤는데 꽤나 맛이 좋았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 위를 슁슁 지나가는 가운데 뜨거운 삼겹살을 양배추 김치에 싸서 먹으니 나름 운치도 있다.

“케이가 아파트 알아봐 주지 않았냐?”

“케이 누나? 아! 처음엔 그랬지. 근데 내가 여기로 옮겼어. 연구원들에겐 숙소를 제공하거든. 괜히 돈 낭비할 필요 없잖아. 공부하기도 훨 낫고.”

소주를 쫄쫄 빨며 재훈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알바를 해 보라고 했는데, 연구원으로 인정을 받고 있어?

휙 하니 둘러보니 뭐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다. 15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데다 학교도 가까우니 통학하기도 좋다. 연구소에서 주는 혜택이 분명해 보인다.

“역시 여기가 연구소 건물이 맞구나.”

“응. 정확히는 일리노이 대학교 부설 NCSA 연구소 E동이야. 네가 말한 대로 알바 열심히 하고 있다. 덕분에 학점은 A와 C를 넘나들고 있고 말이야.”

“후후, 낙제만 하지 않으면 돼.”

“낙제는 무슨. 여기 교수들이 나보고 석박사까지 같이하자고 그러는데.”

“이야, 천재 납셨네. 벌써 교수들 눈에 들었어?”

“솔직히 교수들 전부는 아니고, 컴퓨터 공학과 몇몇 교수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지. 인터넷 정보 검색이 조만간 정식 교과목이 될 것 같거든. 내 천재성 덕분에, 우하하하하!”

“대체 뭘 만들었기에 자기 입으로 천재라고 하냐?”

“쩝쩝. 궁금하냐? 보여 줄까?”

“보여줘. 궁금해 죽겠다.”

녀석도 솔직히 보여 주고 싶으니까 밥도 집에서 먹자고 하며 날 데려왔겠지.

보나 마나 인터넷 브라우저다. 내가 유학 가기 전에 인터넷 브라우저에 대한 아이디어를 넌지시 던졌고, NCSA 연구소가 있는 곳이니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누차 얘기했으니까.

NCSA 연구소는 원래 역사에서 세계 최초로 인터넷 브라우저가 탄생한 곳이다. 재훈이라면 무조건 그 프로젝트를 꿰찼을 거다.

벌컥!

녀석은 거실 건너편에 있는 방 문을 힘차게 열었다. 그냥 침실인 줄 알았는데 어우야~ 완전히 개인 연구실을 꾸며 놓았다. 케이스가 없다뿐 컴퓨터를 몇 대나 가져다 놨는지 헤아리지도 못하겠다.

한쪽 벽면에는 소형이긴 하지만 온갖 회선이 박혀 붉은빛 LED가 연신 반짝거리는 인터넷 라우터까지 있다. 이걸 꾸미느라 똥차를 타고 다녀도 감수한 거구만.

“라우터까지 갖다 놨어?”

“어? 이게 라우터인 줄 어찌 알았어? 아는 사람 몇 없는데.”

“내가 그래도 전자 업계 사장이다. 웬만큼 알아.”

“오우, 물로 보면 안 되겠는데? 하지만 이걸 보면 좀 놀랄 거다. 흐흐흐.”

재훈이 녀석은 방정맞게 손을 비벼 대더니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이미 시연 준비를 끝내 놨다는 얘기다.

어디 한번 자랑해 봐. 너의 인터넷 브라우저를.

딸깍! 딸깍! 화악.

윈도우 3.0 기반이라 폰트가 어수룩하지만 클릭 한 번에 인터넷 화면으로 쑥 들어간다. 이렇다 할 바탕 화면도 없이 하이퍼링크만 줄줄이 떠 있는 화면이다.

“이게 뭐냐면, 인터넷 브라우저. 그리고 퍼렇게 줄그어져 있는 건 하이퍼링크라고 하는 거다. 도스만 다뤄 본 촌놈은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크크크.”

“어서 눌러 봐라. 뭐가 나오나 보게.”

“어쭈, 잘 넘겨짚는다. 오키. 이게 MIT 쪽 도서관이랑 연결되는 하이퍼링크인데, 눌러 본다.”

화악, 촤르르륵.

나름 재훈이는 하이퍼링크에 연결되는 소리까지 코딩해 뒀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컴퓨터에서 들리니 무척 새롭다.

“이게 다 논문 리스트야.”

딸깍딸깍.

“이렇게 클릭해서 들어가면 논문을 읽어 볼 수 있지. 방 안에서 도서관에 가는 거랑 똑같아. 어때, 대단하지? 이런 인터넷 브라우저 기술은 공학 발전을 10년은 앞당길 거다.”

앞당기는 게 아니라, 공학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지.

역시 재훈이 녀석이 해낼 줄 알았다. 이 녀석은 원래 역사에선 전산 전공이며, 20년 뒤에는 KAIST 전산학과 교수가 되는 놈이니까. 수학을 사랑했던 녀석이라 논리적인 코딩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키워드 검색은 되냐?”

“어찌 알았냐? 그게 바로 논문 검색 프로그램의 핵심인데.”

다행이다. 논문 검색을 목적으로 연구를 했던지라 인터넷 브라우저의 검색 엔진에 대한 개념을 탑재했다.

“연관 검색도 되고?”

“그게 뭐냐? 연관 검색이라니?”

“검색 우선순위별로 등급화하는 것은 코딩할 수 있냐?”

“그건 나랑 에릭이랑 최근 들어서야 생각해 낸 건데?”

오호, 에릭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분명히 ‘에릭 비나’라는 연구원일 것이다. 사업엔 별다른 수완이 없지만 프로그래머로서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이 일에 합류시키고 싶었는데, 이미 인맥이 있나 보다. 일이 술술 풀릴 것 같다.

“메일 기능은 넣었어?”

“아! 이메일? 그걸 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뭐, 지금이야 그렇지. 여하튼 허당이지만 예상한 범주이긴 하다.”

인터넷 브라우저에 메일 송수신 기능을 넣는 것은 꼭 필요하다. 몇 년 뒤 MS가 인터넷 브라우저를 윈도우에 끼워 팔기를 하면 인터넷 브라우저만으로는 승산이 없다. 메일 기능을 넣어 놔야 사용자들이 한 번 쓰기 시작한 재훈이의 인터넷 브라우저를 버리지 못한다.

게다가 메일 서버 시스템은 결국 내 핸드 터미널의 데이터 센터로 이용되다가 스마트폰의 SNS 데이터 센터와 클라우드 데이터 센터까지 발전하게 될 거다. 내게 마르지 않는 돈을 챙겨 줄 화수분 같은 존재다.

“뭐가 허당이야! 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데.”

“너, 내가 말했던 보안 프로그래밍은 손도 못 댔지? 이거 해킹당하면 말짱 꽝이야. 바이너리 실행 파일만 인터넷 접속 컴퓨터에 놓고, 코딩은 아예 다른 컴퓨터에서 따로 해. 알았지?”

“아쒸! 그 정도 보안은 당연하지. 근데 너 정말 많이 안다.”

“인터넷 브라우저 얘기 내가 제일 먼저 해 준 거 잊었냐?”

“…하긴 이상하긴 했다. 여태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고.”

“그게 다 내가 너보다 천재라는 증거지.”

“그래,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어우, 재수 없어.”

이 비서는 옆에서 우리 얘기를 듣고도 삼겹살 조각만 씹고 있을 뿐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21세기 사람에겐 익숙한 내용이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개념조차 잡히지 않는 대화일 것이다.

이해했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도서관에 가서 종이책으로 보면 될 것을 컴퓨터 화면에서 볼 수 있다고 하면 말만으로는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심지어 재훈이조차 편지는 손으로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되지, 뭐하러 컴퓨터로 편지를 쓰냐고 묻잖나.

여하튼 기분은 아주 좋았다. 파라곤 물주들 앞에서 인터넷 브라우저를 시연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모뎀으로 연결해야 하니 속도가 답답하긴 하겠지만, 이 기술의 파급력을 알아볼 사람은 분명히 있을 거다.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그들이 아니던가.

“하하! 재수 없어도 내가 다시 한 번 약속하지. 넌 내 덕분에 꽃길만 걷게 될 거다.”

“그 얘기 좀 그만해, 새꺄! 남자가 무슨 꽃길 운운해. 내가 네놈 팔짱 끼고 결혼식 하는 게 상상되잖아. 우엑!”

“뭘 그런 상상을 해? 미쳤어!”

“소주로 귀 좀 씻어야겠다.”

재훈이는 귀를 씻는다더니 주방으로 나가 소주를 콸콸 따라서 단숨에 두어 잔을 삼킨다. 캬아! 하며 삼겹살 삼매경에 재차 접어들었다.

이 비서가 퍼뜩 생각난 듯 짜잔 하고 트렁크에서 양주를 꺼내 든다.

“박사님, 양주도 드시지요.”

“밸런타인! 음, 저는 박사 아닌데요.”

“박사 하세요. 사장님이 밀어주실 거잖아요.”

“저놈 돈 좀 벌었어요? 여기 학비 장난 아닌데.”

“엄청 벌었죠. 대한민국에서는 또래 중에서 최고 부자일걸요.”

“헤헤헤, 벌써 취하셨네.”

재훈이는 내가 돈을 크게 벌었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재훈이와 이 비서가 쿵짝쿵짝 수다를 떨며 술잔을 이어 갔다.

“혹시 시카고 대학 가 봤습니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영화 보셨죠?”

“이 비서님이 뭘 좀 아시네요. 제가요, 시카고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말입니다. 그 영화에서 나온 장면처럼….”

결국 재훈이 녀석의 시카고 정착기까지 얘기가 발전하며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나는 옆에서 ‘고생 많았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술잔을 채워 주고, 간혹 탄식에다 손뼉까지 쳐 주었다.

미래 인터넷 재벌의 자서전을 미리 보는 느낌이었다. 손뼉은 그래서 쳐 준 거다.

‘파이오니어(Pioneer).’

재훈이 녀석이 만든 프로그램의 초기 화면에 뜬 로고. 그 한 단어로 나는 그런 미래를 확신했다.

개척자라는 뜻이 참 마음에 든다. 녀석은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개척자라도 되는 것처럼 방향타 모양의 아이콘을 만들어 놨다.

재훈이는 직감했나 보다. 새로운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친김에 녀석과 같이 다닐까? 이게 얼마나 큰돈이 될 일인지 직접 느낄 수 있게 말이다. 파라곤 물주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히로아키와도….

아니다. 굳이 히로아키와 만나는 데까지 동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 작자가 내밀 카드는 대충 짐작이 가니, 굳이 내 히든카드까지 보여 주지 않아도 딜(deal)이 가능하리라.

    • *

“아앗! 케이 님, 좀 더 청순한 표정 안 됩니까? 거기 재훈 님은 약간 당황한 표정.”

“이렇게요?”

“아! 좋아요. 찍습니다.”

찰칵찰칵.

이 비서는 정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재훈이의 똥차를 앞에 두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영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여주는 케이, 남주는 재훈 되시겠다.

“어머머. 다시 다시! 눈 감았어.”

“아, 그래요? 오케이! 다시 갑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케이가 몇 번 장소를 옮겨 가며 사진을 찍더니 이젠 자기가 나서서 사진 촬영에 적극 임했다. 비싼 폴라로이드 필름을 아낌없이 쓰고 있다. 하긴, 여기까지 와서 시카고 대학을 보지 않고 가면 되겠나?

물론 히로아키가 케이슨 교수가 참석하는 사전 미팅을 제안했기에 이쪽으로 온 이유도 있지만 말이다.

“자, 여기 말고 저기 첨탑 배경으로 한 방 찍어 줘. 수한 씨도 와요. 어서.”

“자, 자! 찍을 테니까 서 봐요. 사장님 중앙에, 케이 님과 재훈 님 양옆에.”

“태훈 씨도 이리 와서 같이 찍어요. 저기 학생 지나가잖아요. 찍어 달라고 하면 되죠.”

“어, 저도요?”

“얼른 와요. Hey Guy!”

케이가 손을 흔들자 지나가던 학생이 싱긋 웃으며 다가온다. 우리 네 명이 나란히 자리를 잡자 ‘치즈!’라고 크게 소리치며 사진을 연신 몇 장 찍어 준다.

찰칵찰칵.

“Thank you. thank you so much!”

사진 촬영을 마치자 냉큼 뛰어가 학생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사진기를 돌려받는다.

“사진 잘 나왔네요. 학교 마크도 잘 나왔고.”

언제 샀는지 독수리가 그려진 학교 휘장을 들고 내 뒤에서 배경을 서 준 이 비서다. 뭐 하나 빠뜨리는 법이 없다.

적갈색 학교 휘장에는 독수리 머리 위에 멋진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Crescat scientia; vita excolatur」

‘지식이 불고 또 불어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지리라’라는 독특한 구문이다. 석유 독점 재벌인 록펠러가 지은 학교치고는 꽤나 학구적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졸업할 때도 여기서 사진을 찍었어요. 똑같은 포즈로 말이죠.”

“케이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했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고요.”

“이야! 공부는 정말 잘하는 집안이네.”

“호호호,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케이가 시카고 대학을 나온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 시카고 대학은 경제학, 법학, 사회과학 분야가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다.

그중에 경제학은 독보적인 1위로 ‘시카고학파’라고 불릴 정도로 노벨 경제학 수상자를 수두룩하게 배출했으며,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의 국가 정책에 반영할 정도로 학문적 깊이가 대단하다.

시카고 대학의 케이스 교수가 영국 파운드화의 위기를 언급했을 때 언론이 주목했던 이유라고 할 것이다.

“오홋. 이제 사진도 다 찍었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재훈이 너는 이 비서랑 같이 먹어. 난 케이와 갈 데가 있어.”

“어? 따로 먹냐?”

“오늘 점심만 따로. 귀국할 때까지 계속 같이 먹어 줄 테니 섭섭해 마라.”

“섭섭할 것까지야. 집에는 오냐?”

“재워만 준다면야. 호텔비 아끼고 좋지.”

“그래, 내 봐줬다. 점심 먹고 봐. 저녁엔 피자에 맥주 한 잔!”

“오키.”

관광하고 노는 데는 이 비서가 훨씬 나을 거다. 외려 이 비서가 자리를 떠도 되냐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케이를 가리켰다. 여긴 미국. 케이가 전화 한 통 때리면 군대가 몰려올 텐데 뭐가 걱정인가.

재훈이는 이 비서와 함께 똥차를 타고 훌쩍 떠났다.

“피자에 맥주 가지고 되겠어요?”

“재훈이가 원하니까 뭘 먹든 상관없어. 대신 내일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예약 좀 해 주겠어? 재훈이 저놈은 럭셔리 좋아하니까 랍스터 주고, 나는 그냥 스테이크로. 와인은 캔달잭슨 화이트 와인으로.”

“수한 씨는 누가 보면 미국인인 줄 알겠어요. 그 와인을 알아요?”

캔달잭슨 와인은 1980년대부터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4만 원대로 저렴하면서도 청량감과 풍미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솔직히 럭셔리와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케이가 좋아할 와인이기에 선택했을 뿐이다.

“유일하게 아는 와인일 뿐이야. 맛이 좋더라고.”

“호호호, 유일하게 아는 게 제대로네요.”

“가지, 교수님이 기다리시겠네.”

“히로아키는 안중에도 없나 봐요?”

“그야 가져올 게 뻔하잖아. 내 핸드 터미널에 자기 회사 반도체를 납품하고 싶겠지.”

“하긴. 누가 봐도 핸드 터미널은 대박 확정이니까.”

나는 케이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 *

차가 멈춘 곳은 미시간 호수를 끼고 있는 시카고답게 호숫가에 세워진 멋진 집이었다. 3층으로 올라가니 이중 창문으로 호수 건너 시내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지나온 1, 2층에 손님이 없는 것이 솔직히 레스토랑인지 누구의 별장인지 헷갈린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여기가 명당입니다.”

창문 쪽으로 걸어가자 한국말로 인사말이 들려온다. 명당이라는 말까지 쓰는 일본인. 다름 아닌 히로아키다.

예의 바른 일본인답게 일찍 도착해 있었다. 수행원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혼자 왔다.

“다들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왔군.”

“할아버지!”

“허허, 케이구나. 우선 앉으려무나.”

어디선가 와인 병을 들고 걸어오는 케이의 할아버지다. 편안한 옷차림인 걸 보니 이곳은 케이슨 교수의 별장인가 보다. 하긴 파라곤의 이사 중 한 명인데, 이 정도 별장이야 껌값이겠지.

“디켄딩은 필요 없는 와인이니 편하게 마십시다.”

“할아버지, 주세요. 제가 따를게요. 그게 이들 극동 아시아인의 문화라고요.”

“오, 그러냐?”

쫄쫄쫄.

나와 히로아키를 배려해서 그런지 쉬운 영어를 써 주는 케이슨 교수다. 백발에 흰 수염,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기보다는 유태인처럼 느껴진다. TV 인터뷰에서 봤던 날카로운 학자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편안한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

케이는 자신을 교육시킨다고 엄포를 놨던 외할아버지임에도 엄청 좋아하는 느낌이 든다.

하긴 윌슨이 알아서 케이의 환투기를 잘 해결할 것이니, 표면적으로만 케이를 몰아붙인 거겠지.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스마트 클라우드를 맡고 있습니다.”

“저도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히타치 제작소를 맡고 있는 히로아키라고 합니다.”

“나는 파라곤의 아닐 케이슨이네. 편하게 케이슨이라고 하게.”

케이슨 교수가 나름 정중하게 잔을 들며 소개를 했다.

“닥터 케이슨, 불쑥 만나 뵙자고 청했는데 이리 초대까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히로아키의 제안은 아주 매력적이라 초대를 안 할 수 없더군. 수한도 보고 싶었고.”

나름 히로아키와 수한이라는 발음을 정확히 한다. 이미 어느 정도의 사전 조사를 마친 상태라는 뜻이다.

“저도 히로아키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닥터 케이슨 님이 모임을 주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주관이라기보다는 증인으로 앉았다고 봐야지 않겠나. 나름 흥미도 있고.”

“하하, 흥미가 동하셨습니까?”

“누구라도 그대들의 면면을 보면 흥미가 생기겠지. 내 손녀는 파라곤 승계를 노리고, 히로아키는 히타치 그룹의 승계를 노리지. 당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현전자를 승계할 테고.”

“정보가 잘못되었군요. 저는 대현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제 나름의 회사를 키우고 있습니다.”

“글쎄. 다들 정식 후계자라고 하기엔 약점이 있으니 그 또한 흥미가 당기더군. 참 이리 모이기도 힘들 거야.”

“할아버지, 저는 다르죠! 저는 얼마 전만 해도 승계 1순위였다고요.”

“그래, 승계 1순위였지. 지지율을 단박에 바닥 치게 만든 걸 지금이라도 축하해 주련?”

“아하, 나 망했어….”

케이슨 교수는 와인 잔을 흔들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케이를 놀렸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나와 대현전자의 관계를 알고 있다니 대단한 정보력이다. 아무리 케이가 내 옆에 있었다 해도, 그녀가 직접 알려 줬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조만간 케이슨과 파라곤 물주를 앞에 두고 투자를 따내야 하는 입장이다. 그 판에 히로아키가 반도체를 내 회사에 납품하겠다고 나설 것 같으니, 분위기를 잘 다독여서 케이슨을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집중하자.

“저도 그 말씀엔 동의할 수 없군요. 저는 명실상부한 히타치 그룹의 후계자입니다. 경쟁자가 없지요.”

“서자이긴 하지만 아들이다 이거군. 히타치 그룹 회장이 여태 잘 감싸 주고 있다는 건 나도 알지. 허나 본가 딸들이 전문 경영인을 내세워 그룹 혁신을 부르짖고 있지 않나? 또다시 올해 히타치 그룹의 경영지표가 바닥을 치면 자네 입지도 곤란해질 텐데. 그래서 이 자리에 온 거 아닌가?”

케이슨은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대화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 자리는 그저 그런 사교 모임이 아니다. 나 또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론 그 또한 사실이지요. 허나 저는 그 사태를 이겨 낼 솔루션이 있습니다. 파라곤, 그리고 유수한 사장님이 함께하신다면 모두 윈윈할 수 있습니다.”

“으흠.”

히로아키의 말에 케이슨 교수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탁자 중앙에 놓인 비스킷에 치즈를 얹어 우물우물 씹는다. 일단 들어 보겠다는 듯 말이다.

“미일 반도체 협정이 조만간 폐기되지는 않겠지요?”

“당연하죠. 일본이 미국을 앞설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해소되기 전까진 비슷한 일이 반복될 거예요.”

히로아키의 질문에 케이슨 교수 대신 케이가 답을 한다. 파라곤의 이사가 답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케이가 눈치 빠르게 잘라 낸 것이다. 정계에 줄을 대고 있는 파라곤이 아닌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럼 히타치는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는 게 옳지요.”

“흐흠,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사업에서 손절은 어떤 경우에서 최선의 선택일 수 있으니까요.”

“만약 제가 히타치 반도체를 NEC에 넘겨 버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미국도 움찔할 것 같은데요. 파라곤에서 미국 반도체 회사에 투자한 물주들도 꽤나 타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히로아키의 말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훗날이긴 하지만 원래 역사와 비슷한 흐름이다.

NEC는 일본 회사인 데다 아직까진 반도체 1위 업체다. 원래 역사에서도 NEC는 히타치를 합병해서 반도체 대미 수출 관세 100%에 대항해 물량 떼기로 밀어붙이며 치킨게임을 펼쳤다.

결국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마이크론과 TI 같은 미국 반도체 회사는 만만찮은 타격을 입었다. 치킨게임으로 주가가 떨어져 바닥을 파고들었으니까. 치킨게임은 배당금을 받아야 하는 주주에겐 전혀 도움 되는 일이 아니다.

외려 신성이 그 틈바구니에서 가격 경쟁력을 이어 나가며 승승장구했었다. 대현도 올라탈 수 있었지만 정치권 견제로 인해 대박을 치지 못했다.

“그래서 솔루션이 뭐죠?”

케이의 물음에 히로아키가 씩 웃었다.

“미일 반도체 협정에서 덕 보는 곳이 한 군데 있지요.”

“한국?”

“빙고! 정답입니다.”

“정확히는 신성을 말하는 건가요?”

“원래는 그래야겠지만, 저는 그리 만들고 싶지 않군요. 더 좋은 솔루션이 눈앞에 있거든요.”

히로아키가 케이에게서 눈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느물거리며 웃는 게 ‘넌 이 제의를 뿌리치지 못해!’라는 확신이 서려 있다.

“유 사장, 어때요?”

히로아키가 내 눈을 직시하며 묻는다.

“왜 날 지목하죠?”

“히타치 반도체를 통째로 가져가요. 반도체 전(前) 공정을 셋업하고자 파라곤에 손을 내미는 것 같은데 맨땅에 헤딩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 인간이 뭐라는 거야? 말투가 심상찮더니 내 예상을 살짝 넘어서는 제안을 한다. 내 제품에 반도체를 납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히타치 반도체를 통째로 가져라?

그룹 총수도 그런 결정을 함부로 내릴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한가? 만약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면 나는 극단적으로 짧은 기간에 온전한 반도체 생산 라인을 갖출 수 있다. 내가 하려는 일의 성공 가능성이 훅 올라가는 것이다.

성사만 된다면 대박이긴 한데 이 녀석 믿어도 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요? 히타치 반도체를 통째로 넘긴다고요? 당신이 그럴 권한이 있는지도, 그 이유도 모르겠군요.”

나는 일단 짐짓 딴소리부터 해 보았다. 대박이라고 덥석 물기는 뭔가 꺼림칙하다.

“에이, 로열패밀리를 뭘로 보시나요. 다 남는 장사니까 하는 거죠. 회사는 가지시고, 당신이 뭘 하든지 간에 유통과 인프라는 내게 맡겨 줬으면 좋겠어요. 일본은 물론 유럽까지. 북미는 제외하죠. 미국과 얽히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거든요.”

유통과 인프라? 그 한마디로 히로아키가 조금 달라 보였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겹쳐 보인다고나 할까? 유통과 IT 벤처 투자로 대박을 터뜨리는 사업가 이미지 말이다.

인프라라는 말도 심상찮다. 20여 년 뒤 2010년쯤 히타치 그룹은 발전소, 플랜트, 철도 같은 기술 집약적인 대형 인프라 사업으로 그룹 전략을 완전히 수정하잖나. 그 전략은 히로아키가 지금 토해 내는 말과 거의 유사하다.

역시 미래의 히타치 그룹 총수답다고 해야겠다. 이때부터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하! 내가 뭘 할 줄 알고 유통과 인프라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겁니까?”

“미스터 유가 그리 말을 돌리면 준비한 내가 섭섭하죠. 닥터 케이슨, 한 말씀 해 주시죠. 미스터 유의 핸드 터미널과 다음 제품에 대한 대형 투자는 이미 결심하셨다고 말입니다.”

“나는 왜 끌고 들어가나? 아직 결정된 바 없네.”

드디어 케이슨이 입을 열었다.

“에이, 왜 모른 척하십니까? 환투기로 벌어들인 20억 불이 투자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거 뻔히 아는데요. 10억 불만 주시면 히타치 반도체를 통째로 한국으로 이전하지요. 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특허까지 깡그리 갖다 바치고 깨끗이 손 털겠습니다.”

“무슨 확신이 있기에 그리 말하나? 10억 불이 내 말 한마디로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아니잖나.”

케이슨의 말투에 묘한 반어법이 묻어난다. ‘나를 잘 설득해 봐. 그럼 10억 불을 투자하마.’라는 느낌이 든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라 그런가? 어떻게 이렇게 말투만으로 확실한 의중을 전달하지?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히로아키가 대신 해 주니 솔직히 반갑다. 여기서 히로아키의 논리가 어설프게 끊어지면 안 된다. 나는 케이슨의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거릴 논리가 나오도록 히로아키를 찔러줘야 한다. 케이슨을 살짝 도발하는 것 또한 잊으면 안 된다.

“히로아키, 10억 불은 파라곤에서도 쉽지 않은 돈이지요. 내가 직접 투자 설명회를 준비 중인데, 당신이 갑자기 끼어들면 케이슨 님이 당황하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10억 불에 당황할 거라는 내 말에 케이슨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분위기 좋다. 그래, 1조 정도는 파라곤에선 껌값이라고 여겨 주십시오.

“미스터 유, 머리 좋은 사람이 왜 그래요? 케이슨 님이 이 정도에 당황하시다니요, 절대 아니죠! 케이슨 님이 영국까지 사람을 보내 환투기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반대파가 미국에 알짜배기는 이미 다 먹어 버렸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치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미국 말고 외부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미스터 유가 그 외부 투자처 중 0순위입니다. 하하하! 이때 저는 히타치를 쓰면 그림이 더 좋아진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일본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서 한국에선 크게 한 방 노리시라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닥터 케이슨?”

“크흠….”

나와 케이슨을 번갈아 보며 히죽거리는 히로아키다.

“그럼 내가 투자처 0순위가 되는 이유를 들어 봐도 될까요?”

나는 재빨리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다. 더 이상 케이슨을 도발하면 안 된다.

히로아키, 케이슨 교수의 약점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건드리면 안 돼. 내 판을 망치면 너 혼난다.

“하하, 닥터 케이슨도 이미 아실 것 같은데. 미스터 유의 제품을 보면 콕 짚어 낼 수는 없지만 획기적인 뭔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걸 휴대폰의 꽃이라고 명명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케이슨이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자 옆에 있던 케이가 인상을 찌푸린다. ‘휴대폰의 꽃’이란 말을 어떻게 히로아키가 알고 있지? 하는 눈치다.

내가 휴대폰으로 음성 통신, 핸드 터미널로 데이터 통신의 기반을 닦고, 그 두 개를 합치겠다는 미래는 케이밖에 모른다. 그녀도 대략적인 마일스톤만 알 뿐, 내가 그 방법으로 인터넷을 끼워 넣을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반도체 사업체를 통째로 팔려는 것도 놀라운데, 유통과 인프라까지 노리는 것도 그렇고… 어설프게나마 스마트폰까지 추론해? 대단한 놈이군.’

히로아키는 만만히 볼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이런 인물이 어째서 원래 역사에선 쉰이 다 돼서 수면 위로 떠오른 거지? 그렇다면 히타치 반도체를 제대로 손절하지 못해 같이 가라앉았다는 얘기네.

원역사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물에 빠져 가라앉고 있는 중에 나라는 존재가 눈에 띄었다? 지푸라기일지 구명정일지 모르지만 일단 잡아 보겠다는 건가?

단지 그렇다고 여기기엔 행보가 너무 공격적이다. 아무리 뒷배인 히타치 그룹 회장이 죽음이 코앞이라고 하지만 수행원도 없이 이리 딜을 하고 들어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결국 이건 다른 이면이 있다는 뜻이다. 짐작건대 히로아키가 던진 딜도 일본에서 메이드 된 카드가 아니다. 파라곤이 적대적 M&A를 빙자해 히타치를 공격해 주길 원하는 거다. 수행원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일 가능성이 높다.

대화의 대상을 히로아키로 돌려야 한다. 히로아키는 자신의 정보력과 추론에 취해 투자자를 과도하게 몰아붙이고 있다.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며 대화하길 즐겨 했나 보다.

히로아키! 이 판의 최종 승자는 표면적이나마 케이슨이 되도록 만들어 줘야 하는 거야.

쩝. 허리를 굽혀야 할 때와 펴야 할 때를 모르니 내가 좀 눌러 줘야겠다.

“이봐요, 히로아키 씨. 나와 케이슨 님이 당신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뭔지 여전히 모르겠네요.”

“에? 도와주는 이유라니….”

“10억 불에 히타치 반도체를 파는 게 뭐 대단한 호의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데, 나는 파라곤에서 직접 투자를 받아 최신식으로 공장을 꾸미면 되고, 케이슨 님은 반대파가 NEC 때문에 손해 보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인데 그래요.”

“아니, 10억 불에 히타치 반도체를 가져가는데? 특허까지 가져가고, 셋업된 공장을 옮겨 가는데….”

“글쎄, 내가 그걸 탐낼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고, 케이슨 님이 투자하라는 법이 어디 있죠? 그냥 당신이 히타치 반도체라는 반대파 모임을 숙청하려는 게 주목적 아닌가요? 그걸 예쁘게 포장했을 뿐이지.”

“허허, 미스터 유가 내 말을 대신해 주는군.”

어후, 줄타기 어렵다. 히타치 반도체는 탐이 나고, 케이슨이 호의를 베푼다는 느낌으로 돈을 내놓을 결심을 해야 하는데. 케이슨을 설득하면 물주들이 따라올 가능성이 왕창 올라가니 말이다. 히로아키가 이때 제대로 받아 쳐 줘야 한다. 인정해라, 짜샤. 그냥! 어서!

“물론 반대파 숙청이 목적이긴 하죠. 그래요, 솔직히 이번 건을 좀 도와주시면 히타치 그룹 총수를 친구로 두시게 될 겁니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케이슨이 와인 잔을 들면서 느물거린다. 히로아키가 얼마나 다급한지 떠보는 것이다.

“도와주십시오, 닥터 케이슨. 히타치 반도체를 공격해 주십시오. 유 사장님도 옆에서….”

“아! 적대적 M&A를 해 달라? 하하! 원하는 게 그거였군. 나는 그냥 공짜로 10억 불을 내놓으라고 하는 줄 알았네.”

“설마하니 히로아키 씨가 그리 단순한 생각으로 여기 자리했겠습니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숨기며 맞장구를 쳐 줬다. 다행히 히로아키가 케이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흘러간다. 슬슬 그림이 맞춰진다.

“미스터 유 생각은 어떤가? 말한 대로 구닥다리 공장을 너무 비싼 가격에 옮겨 가는 건 아닌가?”

설비는 좀 낡았다고 해도 완벽히 셋업된 공장을 가져가는 것은 가격을 측정하기조차 어렵다. 나로선 남는 장사 이상이다.

“물론 그렇죠. 이런 조건을 걸면 괜찮지 않을까요? 3년 이상 된 설비는 히타치 제작소에서 책임지고 업그레이드 한다. 그리고 공장을 그대로 카피하는 일이니, 용인에 짓는 공장도 10억 불 내에서 책임지고 건설한다. 어떻습니까?”

“으흠, 괜찮은 조건이군. 파라곤 투자자들도 고개를 끄덕거릴 일이야.”

원래 반도체 라인을 새로 짓는 데는 한화로 1조 정도 든다. 2000년대 들어서면 2~3조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지금 기존의 공장을 옮겨 오는 데 10억 불 정도로 퉁칠 수 있다면 나 말고도 나설 사람은 꽤나 있을 거다.

“히로아키 씨는 어떤가요? 10억 불에 회사 이전에 신규 공장 건설까지.”

“나쁘진 않군요. 대신 히타치 반도체 부지는 히타치 제작소에 남겨 주셔야 합니다.”

“저는 괜찮게 보이네요. 케이슨 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지금 일본 부동산은 양날의 검이야. 그리해야지.”

말이 자연스레 세부 조건들로 채워진다. 은연중에 케이슨은 자신이 투자자를 설득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대박! 대박이다. 이대로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업체 중 5위에 해당되는 히타치 반도체의 메인 공장을 먹어 치울 수 있다.

“직원들의 반발은?”

나는 무심코 히로아키에게 반말 투로 말했다. 그도 공격적으로 말투가 바뀐다.

“당연히 방법을 생각해 뒀지! 쓸 만한 직원들은 모두 히타치 제작소로 발령 낼 거거든.”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고, 부실 회사를 처분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겠다는 의미리라. 히타치 반도체를 해체하면서 우수 인력들은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는 히타치 제작소로 헤쳐모여를 시킬 참이다.

“일본 내 여론을 무마할 방법도 있어야 할 텐데.”

“여론 따윈 걱정 마. 정치꾼들 구워삶는 건 내 아버님 전문이야. 일본 정치도 한국 못지않거든.”

그래, 일본 정치인들이든 한국 정치인들이든 뇌물과 여론 조작에는 전문가들이지. 4류답다.

“1년 내에 장비를 모두 뜯어서 한국으로 이전할 수 있나?”

“공장까지 지으라고 하지 않았나?”

“자재와 인부는 모두 한국인.”

“허…. 뭐, 그 정도는 콜.”

히로아키가 거부하지 못할 제안이다. 전부 경비 처리해서 히타치 제작소의 매출로 잡힐 테니까.

“하하! 둘만 남는 장사 하는 거 아닌가? 투자를 끌어낼 사람은 난데 말일세.”

“닥터 케이슨, 손녀에게 적대적 M&A를 교육시킬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참에 하시죠. 손녀께선 승계 1순위를 되찾고, 저는 생산라인을 갖춰서 파라곤에 순익을 배당하고, 히로아키는 그룹 구조조정 화끈하게 하는 거고. 모두가 윈윈인 것 같습니다만.”

“자네 사업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빠졌네만.”

“시카고학파의 빅 보스께서 밀어주시면 안 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케이슨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어 댔다.

    • *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물밑 접촉은 그 정도면 성공적이었다. 케이도 별장을 빠져나와선 내게 환하게 웃으며 축하한다고 했다. 히로아키의 제안을 이면 계약으로 챙기며 케이슨이 10억 불을 당겨 줄 생각을 한 것 같으니까 말이다.

“호호, 이런 날에는 파티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축하 파티는 한국에 가서 근사하게 하지. 이번엔 내가 백화점 전체를 예약할 테니까.”

“내가 뭘 살 줄 알고요?”

“쇼핑 한도는 여전히 10억이야.”

“유후. 기대할게요. 내일 봐요.”

나를 연구소 앞에 떨어뜨려 주고 기쁜 표정으로 차를 몰고 가는 케이다.

연구소 경비원에겐 ‘나 알죠? JH(재훈) 친구!’라고 하며 주먹 인사를 했더니 바리케이드를 올려 준다. 걸어가다 보니 재훈이 옥탑방이 있는 건물에서 피자 배달부가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벌써 시켰어? 생각보다 관광을 빨리 마쳤나 보다.

덜컹덜컹.

“어! 일찍 왔네. 어서 와. 아직 피자 따뜻하다.”

“아니,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식은 피자를 주려고 했냐!”

초인종 따위는 없었기에 철문을 흔들었더니 재훈이가 문을 열어 준다.

“원래 미국에선 식은 피자가 유행이야. 촌뜨기!”

“그러고 보니 나 점심 걸렀다. 마구 흡입해 주마.”

미국에선 눈물 젖은 빵 대신 식은 피자를 먹어 봐야 하니?

이 비서가 피자를 나누고 있었기에 다 같이 즐겁게 먹었다.

“쩝쩝. 재훈아, 컴퓨터 좀 뜯자.”

“쩝쩝. 왜?”

“너 투자 설명회에서 시연 좀 해야겠다. 파라곤이라고 들어 봤냐?”

“파라곤? 국방성이냐? 너 혼자 가라. 난 관심 없다.”

“국방성 아니다. 재단이다. 즉, 너에게 장학금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오오. 정말이냐?”

피자를 먹다 말고 녀석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한테 유학비를 보조받는 게 좀 그랬을 거다. 그러니 이곳 공짜 옥탑방에 오려고 열심히 노력을 했을 거고.

장학금은 녀석에겐 꽤나 매력적인 유혹이다. 럭셔리 유학이라고 등 떠민 것과 비슷한 정도의 거짓말이지만 복잡하게 내 사업까지 들먹일 필요가 뭐가 있나. 결과적으로 녀석은 장학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게 될 텐데.

“라우터까지는 안 뜯어도 되고 컴 두 대 뜯어서 하나는 인터넷, 다른 하나는 이메일 송신을 받을 수 있게 하자. 그리고 내가 핸드 터미널이라는 걸 가져왔는데, 그거 시스템 프로그램도 깔아야 돼.”

“뭐, 어렵진 않겠네. 장학금은 누가 주냐?”

“파라곤.”

“국방성?”

“펜타곤 아니고, 파라곤 재단이라고.”

“조~크. 크크크. 재미있지 않냐?”

20대 주제에 벌써 아재 농담을 좋아하는 재훈이 녀석이다.

나는 피자를 씹으며 컴퓨터가 가득한 침실로 들어갔고, 이 비서는 단독 시연이 가능하게 수정된 핸드 터미널 시스템 프로그램이 담긴 플로피 디스크를 꺼내서 뒤따랐다.

“쩝쩝. 내가 핸드 터미널을 시연할 때는 이 비서가 컴퓨터를 맡아 줘요. 여기선 무선이 안 되니 유선으로 데이터를 보낼 테니까, 데이터 쌓이면 척척 계산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돼요. 투자자들이 보면… 화려하게 꾸며 놓은 납품 증명서 있죠? 그걸 은근슬쩍 화면에 띄우면 돼요.”

“걱정 마세요. 회사에서 이미 몇 번 시연했잖습니까.”

“재훈아, 너는 내가 인터넷으로 수다를 떨면 투자자 앞에서 척척 하이퍼링크로 들어가서 논문도 띄우고, 내가 이메일을 언급하면 이 비서 컴퓨터로 이메일을 보내라. 일단 회의장에 모뎀 연결이 가능할지 아닐지 모르니까.”

“쩝쩝. 알았어.”

“피자 그만 먹고, 지금 그렇게 꾸며 보자는 얘기다.”

“아, 그래? 쉬운 일인데. 케이블로 컴끼리 하드 카피하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

“그냥, 그리 보이게 해 달라는 거야. 지금 시연해 보자. 실수하면 안 돼.”

“근데 이거 맨입으로 하는 거냐?”

“…장학금 준다니까?”

“나 내년이면 연구소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

“그거 받지 마! 코 꿴다. 내가 너 앞길에 꽃 깔아 준다니까.”

“어이구. 내 미래까지 걱정해 주는 거냐?”

“됐고, 앞으로 모든 일은 네 능력으로만 해야 해. 이 일이 잘되면 벤처 하나 차려 줄게. 직원까지 채용해서 일 제대로 벌여 보자.”

“어우야, 너 정말 돈 좀 벌었구나. 사장 된 거 맞나 보네. 말투가 엄청 재수 없어!”

재훈이가 피자 조각을 접시에 내려놓고 나름 진중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도리어 어이가 없었다. 여태 구라치고 있다고 여긴 거냐.

“재훈 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사장님, 저 나이 대에서는 손에 꼽히는 부자라니까요. 옆에서 대박 치세요!”

“오홋. 그 말에 왠지 심장이 뛰는데요?”

“내가 대신 확신해 줄게. 네가 이걸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곱하기 100 해라.”

“곱하기 100?”

재훈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훈이 녀석이 제아무리 곱하기 100을 해도 실상 내가 생각하는 돈에 근접하지도 못할 거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3년쯤 뒤에는 IT 버블을 타고 대기업으로 성장한 AOL이 이런 초기 인터넷 브라우저를 5억 불을 주고 사 간다. 난 절대 팔지 않을 거지만, 초기작만으로도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이야.

“자, 그러니까 시연 준비 철저히 해 보자. 사흘 뒤에 투자 설명회가 있어. 잘해야 해.”

“오키! 오키! 이 정도 시연을 해서 그 정도 대박을 친다면 해야지.”

“그리고 내친김에 이메일과 핸드 터미널 시스템을 해킹으로부터 지킬 보안 프로그램도 코딩해 봐. 시간은 충분히 줄게. 두 달 정도.”

“에에, 두 달? 야, 보안 프로그램이 무슨 장난인 줄 알아? 제일 어려운 게 그거야.”

넌 할 수 있다. 네가 KAIST 전산학과 교수가 된 이유가 바로 그 프로그램을 만들었기 때문이거든.

재훈이가 언제부터 그걸 생각했는지도 뻔하다. 대학생 때부터 아이디어는 벌써 있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달리 수학 경시대회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문제로 나왔던 걸 기억하고 있었겠나?

1994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참이라고 발표 나자마자 재훈이는 석사 논문으로 그걸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재훈이는 극단적으로 큰 소수(素數)를 컴퓨터가 자동 출력해서 문자열 자체를 암호화시키는 기술로 석사 논문을 완성하고 그걸 더 발전시켜서 박사 논문까지 통과한다.

암호화된 문자열은 컴퓨터가 자동 변환하기 전까진 프로그래밍한 사람도 원본을 알 수 없다고 내게 엄청 자랑을 했었다. 이론에 치중해서 원론적인 프로그래밍만 했기에 떼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각종 IT 기업에서 적잖은 로열티를 줄 만큼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겠지? 하루에 2시간씩 그거 생각하는 게 네 취미잖아. 그게 참이라면, 뭘 뜻하겠냐?”

“어… 당연히 정수만으론 타원 방정식을 만족하는 해(解)가 없다는 말이지. 그걸 보안 코드로 쓰겠다는 말이냐?”

“그래. 소수를 자동 출력시켜서 나머지로 떨어지는 숫자를 각 문자열에 대입시키면 너도 해킹 못할 문자열이 만들어지잖아.”

“너 천재 맞나 보다.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하잖아.”

“넌 언제쯤 내가 형이란 걸 인정할 거냐? 이 정도까지 알려 주면 두 달 내로 가능하겠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참이긴 하냐?”

“참이다. 형인 내가 확신한다.”

“증명했냐?”

“아니. 그냥 직감이다. 증명할 시간 따윈 없거든. 하하하!”

“어이구, 천재 납셨네.”

“여하튼 해 볼 만하지?”

“해 볼 만은 하겠네. 여태 증명이 안 됐지만, 참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이 비서가 부르르 떨며 머리를 흔들어 댄다. 그가 알아듣기엔 어려운 말이다. 사실 나도 미래의 재훈이가 늘어놨던 이야기를 최대한 기억해서 읊었을 뿐이다.

“말 나온 김에 해 보긴 하겠는데… 혹시 너 알바비 내줄 수 있냐?”

“돈? 왜? 뭐가 부족해?”

“나 혼자 하기는 벅차고, 같이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중에 벤처 차리면 영입 1순위다.”

“누군데?”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에릭 비나! 걔 천재야. 손에서 코딩이 마구 쏟아져.”

“에릭 비나? (예스! 예스!! 예스!!!) 친한 사이야?”

“당연히 친하지. 같은 알바생인데. 같이하면 정말 도움이 될 거야. 코딩에 에러가 없어.”

“좋아. 월급은 네가 원하는 대로 줄게.”

“너 정말 돈 많이 벌었구나!”

“언제 식사 같이해. 계약서 도장 찍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돈이 오가는 계약인데.”

“문제없지. 걔도 좋아할 거야. 유후!”

재훈이가 좋아라 했지만, 내가 더 좋아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에릭 비나’면 인터넷 브라우저 ‘넷스케이프’를 만든 핵심 엔지니어이다. 그다지 이재에 밝지 않은지 동료였던 앤드리슨에게 거의 모든 이득을 빼앗겨 버린 인물이다.

약삭빠른 앤드리슨의 이름은 없고 에릭 비나의 이름만 나오니 더욱 좋다. 재훈이가 연구소로 들어오면서 원래 역사에서 연구소 알바를 했던 앤드리슨은 알바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나 보다.

예스! 예스!! 예스!!! 내 친구가 잘되고, 원래 잘돼야 하는 사람도 같이 꽃길을 걸을 테니 더욱 좋다. 이참에 종신 계약서에 도장 쾅! 찍으면 되는 거다.

미국에 오니 계속 좋은 일만 생긴다. 이제 투자 설명회만 잘하면 정말 끝내줄 것 같은데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