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 터미널의 성공을 위하여.”
“성공을 위하여~!”
권 부장과 나 부장이 손뼉을 맞춰 주었다. 어쨌든 1차 목표는 핸드 터미널이니 마침표를 찍어야지.
“함께하겠습니다.”
“좋네, 함께 가라!”
“위하여!”
맞은편에서는 적당한 화답으로 건배 제의를 대신한다. 이 자리의 논의 대상을 핸드 터미널로 한정 짓지는 않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쨍! 꿀꺽꿀꺽. 탁!
‘첫 단추 끼우는 건 이쯤 해야겠네.’
난 표정을 바꿔 음악 즐기기 모드로 들어갔다.
“아! 깜빡한 게 있군. 내 개인 명의로 히타치 케미컬 지분 3%를 인수했다네. 용인에 한국 지사를 세우는 걸 적극 어필했지. 유 사장 곁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일세. 실리콘밸리의 첫 번째 입주 업체가 아닐까 싶네.”
“나쁠 건 없죠. 소재업체야 만능이니까.”
짐짓 태연한 척 말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에 K폰 반제품을 오픈마켓에 뿌리는 업무는 이제 부담스럽지 않겠나? 지금은 에그펫 장사로, 조만간 핸드 터미널로 바빠질 테니 부품 업체에 직접 뿌리라고 하겠네. 대충 6개월이면 업무 정리가 될 것이네.”
“그렇군요.”
정 사장이 준비한 당근과 채찍이었나 보다. 히타치 케미컬의 대주주가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다. 그건 좀 놀랍지만 일본 오픈마켓 건은 예상한 범주의 얘기니 놀라울 것도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정 사장도 음악과 술을 즐기기 시작했다. 식사 자리는 그 뒤로 1시간이나 이어졌고, 매운탕과 알밥이 깔리고, 후식으로 달큰한 수정과를 마실 때까지 이런저런 잡담만 이어졌다.
잡담마저 시들해질 즈음 수정각을 나섰다.
“핸드 터미널 판매 추이를 보고 추후에 오늘 건에 대해서 문서화하시죠.”
“그래야겠지. 살펴 가시게.”
정헌몽 사장은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내가 대현전자에서 인력을 빼 간 것에 대해서는 농담으로라도 입 밖에 올리지 않았다. 인력까지 나눠 주는 배포 큰 파트너임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말이다.
- *
삑! 삑!
“재고 리스트를 어떻게 송출한다고요?”
“여기 리스트는 입력된 업체 이름순으로 되어 있어요. 버튼을 누르면 선택이 되고 카테고리 통째로 데이터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인하죠?”
“여기, 모뎀이 연결된 서버가 있죠. 대략 5분 이내에 데이터를 받으니까 그다음부턴 알아서 편집하시면 됩니다.”
“편집할 필요도 없네요. 재고 합계가 다 나오네요.”
수정각에서 딜을 한 지 불과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대현자동차에서 끊임없이 교육 출장자를 보내왔다. 대부분 구매팀 인원이지만 납품 업체 사람들도 몇몇이 끼어 있었다.
각종 바코드 스티커를 부품에 붙여 보고 핸드 터미널로 찍어 보고, 데이터를 정리해 보고, 영수증도 끊어 보고 등등 자신의 업무에 맞게 시연을 몇 번이나 반복해 본다.
일단 한번 걷기 시작하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버리는 공룡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 대리를 비롯한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제품을 신기해하는 고객들을 두고 엄청 흥분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 기능을 설명하기에 바빴다.
고객들은 지금은 신기해하는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핸드 터미널 없이는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수작업으로 재고 정리를 해 본 사람은 그게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걸 안다. 모델, 수량, 입고일, 출하 예정일 등등을 일일이 파악해 정리하는 것도 힘들지만, 숫자가 맞지 않아 재차 확인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머리털이 한 움큼씩 빠진다. 짜증이 나서 머리털을 쥐어뜯지 않곤 못 배기니까.
“이거 생산 라인을 견학할 수 있나요?”
“당연하죠. 말 나온 김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김 대리는 실무 고객들을 이끌고 라인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라인 안을 볼 수 있게 유리창으로 마감을 해 둔 곳이 있어 굳이 에어 사워까지 하면서 라인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공정을 직접 보여 줄 필요도 없이 바삐 움직이는 설비들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따르릉, 따르릉.
“조립 3라인요? 100대 추가 주문하신다고요? PR(Purchase request, 구매 요청서)을 보내 주시면 바로 출하 가능합니다.”
“영진 엔지니어링, 30대! 알겠습니다. 네, 현장 직거래 가능합니다.”
“제일상사, 25대. 알겠습니다. 회사 위치가 어떻게 되죠? 인천요? 아뇨, 아뇨. 문제없습니다.”
“헉, 200대요? 실례지만 어디신데요. 지금 재고 물량이 달려서 100대 이상은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그게 좀 힘듭니다. 예, 보름 뒤에나 납품 가능합니다.”
제일 바쁜 곳은 영업팀이다. 대부분의 고객이 유통 및 부품 납품 업체이다 보니 개별 주문량은 수십 대 수준이지만 끊임없이 주문이 들어왔다.
대현자동차의 납품 업체가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조만간 지역별로 대리점을 하나씩 세워야 할 정도다.
“나 부장님, 에그펫 말고 핸드 터미널 2천 대부터 먼저 뽑아야 한다니까요.”
“안 돼. 에그펫 1만 대 흘려 달라고 한 사람은 권 부장이야. 벌써 시작해서 중간에 라인을 못 세워. 핸드 터미널은 내일 아침 A조 때 갈아 끼워 줄게.”
“어휴, 상황이 바뀌었단 말입니다. 오늘 C조부터 갈아 끼워야 합니다.”
“불가능해. 액정 부품도 오늘 밤 12시에나 입고된다고. 생산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물량이 터지자 나운영 부장은 라인을 빡빡하게 돌려 가며 파이팅을 하고 있지만, 권 부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와중에 핸드 터미널 시제품이라고 3천 대 정도 뽑아 놓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할 정도다. 당장 라인을 하나 더 세울 수도 없고.
“난들 이리 물량이 폭발할 줄 알았나요.”
“라인 바로 늘리셔야 합니다. 자동차도 아니고 예약 판매를 하다니요. 지금 재고가 불과 500대밖에 없습니다.”
“현재로선 이게 최선입니다. 견뎌 봐야죠. 보세요. 이제 사장실도 없잖아요.”
“아이고.”
3층짜리 건물인데 2층에 사장실 하나만 두고 널찍하게 쓰던 것도 이제 옛말이다. 1층 사무실은 싹 밀어 조립 라인으로 개조해 버렸으며, 2층은 지금 한창 공사 중이다. 주차장과 창고로 쓰고 있던 3층에 사무실을 통째로 옮겨 왔더니 사장실을 제대로 꾸미지도 못했다.
사장실이라고 해 봐야 창가 쪽 자리에 두꺼운 유리로 양옆에 벽을 세우고 앞쪽에 문을 달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조만간 사무동을 따로 만들면 이 건물의 각층은 1, 2 ,3라인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사무동 건설이 완료되면 1층은 에그펫, 2층은 핸드 터미널 전용 라인으로 만들고요. 3층은 물량 보면서 유동적으로 하죠. 나 부장님, 생산 인력은 면접 보셨어요?”
“이제 졸업 시즌이잖습니까. 주변 고등학교에 쫙 뿌렸다니까요. 학교장 추천 위주로 싹쓸이할 예정입니다. 200명! 그 인력만 들어오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겁니다.”
“잘하셨네요. 영업팀은요?”
“인력보다는 대리점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영업 실적 좋은 곳으로 현재 다섯 군데를 검토 중입니다.”
“좋네요. 그래도 우리 쪽 인원도 좀 늘리죠. 해외 영업은 본사에서 처리해야 하니까.”
“서류는 받아 놨는데 사장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권 부장님 안목이면 믿을 만하죠. 맡길 테니 열 명 정도 뽑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인원이 늘면 통근 버스부터 늘리고 구내식당도 만들어야겠어요.”
창문 너머 앞마당을 보니 근무 교대하는 인원들이 우수수 빠져나가고 있다. 봉고차 몇 대를 통근 버스 대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이젠 턱도 없겠다.
삼겹살집을 구내식당처럼 사용했는데 조만간 수용 불가일 것 같다. 조금 걸어 나가면 허름한 밥집이 몇 개 생기긴 했지만 매번 밥 먹으러 걸어 나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다.
대현과 더불어 나 또한 이 주변의 땅을 매입해 둔 것은 천만다행이다.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부동산 업자들이 어떻게 이리 빨리 눈치를 챘는지 신기할 정도다.
“유 사장님, 장비는 언제 들어온답니까? 조립 라인은 바로 셋업 가능한데 말이죠.”
“이 비서를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일본에 공장을 알아보고 중고 설비로 라인을 꾸미게 한 것은 의도치 않게 무척 잘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제조업이 우수수 도산하고 덩달아 쓸 만한 장비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공장에서 시험 삼아 셋업해 보고 문제없는 장비를 한국으로 실어 오면 된다. 1억짜리 설비가 천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시장에 나오고 있는지라 나에겐 이만한 호재가 없다.
“아이고, 기존 장비와 호환되는 놈으로 골라서 와야 하는데….”
“고참 설비 엔지니어 보내셨잖아요. 믿어야죠.”
“아무래도 내가 갈 걸 그랬나. 불안해서, 원.”
“나 부장님이 일본 가면 이 비서랑 술이나 마실 것 같은데. 내가 불안해서 그건 안 됩니다. 하하!”
“하하하! 들켜 버렸네요.”
나와 나 부장이 농담을 하며 상황을 웃어넘기자 권 부장은 이마를 짚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한숨부터 쉬더니 전화기를 붙잡기 시작하는 권 부장이다.
또 에그펫 납품 일정을 협의하면서 고객들에게 혼쭐이 나겠지. 어쩔 수 있나. 담당 부장이 혼쭐이 나면 고객들이 좀 봐주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사장인 내가 혼날 수는 없잖나.
부르릉.
권 부장의 눈길을 피해 창밖을 쳐다보고 있자니 회사 앞마당으로 매우 럭셔리한 리무진이 쑥 들어온다.
누구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이 비서가 운전석에서 빠져나오고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케이가 내린다.
어라! 감히 이 비서를 운전기사로 써? 그러고 보니 어떻게 같이 오는 거지? 일본에 들렀다 오는 건가?
- *
다다다다다.
“수한 씨.”
퍽!
“스톱! 보는 눈이 많아. 이건 한국 문화가 아니야.”
나는 문을 열자마자 훅 하고 뛰어드는 케이의 어깨를 떡 하고 잡아 세웠다.
“어우, 그럼 반가운 척이라도 하든가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당연히 보고 싶었지. 내 돈 갚아야 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어째!”
“호호호! 보고 싶었다니 됐어요. 이유는 마음에 안 들지만.”
“연인 코스프레는 그쯤 하시지요, 동업자 여사님.”
나는 일편단심 민들레다. 파릇파릇하게 대학 생활 잘하고 있을 내 미래의 마누라와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여자에게만큼은 돈지랄 엄청 해 대며 잔뜩 폼 잡고 싶단 말이다.
타고난 금수저인 케이는 내 연애 대상이 아니다. 나는 옷 한 벌 사 줄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고, 유럽 여행 한 번 시켜 주면 좋아서 팔짝 팔짝뛰는 내 여자를 보고 싶다.
“영국에서의 일은 너무 고마웠어요. 내가 그래서 기가 막힌 선물을 들고 왔지요.”
“하하! 사장님, 케이 님이 가져온 걸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케이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휙휙 휘저어 대는 사이 옆에서 이 비서도 말을 보탠다.
살짝 불안해지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첫 문장만 봐도 납품 계약서다.
“핸드 터미널인가 뭔가 때문에 고민이 많다면서요? 내가 주한미군 군납이랑, 그걸 빌미로 DHL에 선발주 계약서를 체결하고 왔지요. 어때요? 제가 한 영업 하죠?”
케이답게 발걸음이 정치적이다. 주한미군 군납을 끼고 그걸 보증 삼아 국제적인 택배 회사 DHL을 꼬드겼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미군에 납품하는 제품인데 DHL이 어떻게 의심을 품을 수가 있겠나?
결국 케이의 부친이 입김 한번 강하게 불었다는 의미다. 나름 자기 딸 안전을 챙겨 준 것에 대한 답례일 것이다.
“대체… 이게 몇 대분이죠?”
“주한미군은 5천 대, DHL은 3만 대. 시제품을 보여 줬더니 대번에 물더라고요. 물론 우리 버지니아 트레이딩에서 납품 보증을 섰고요. 제 아버지도 이번엔 특별히 주한미군에 줄 대는 거 눈감아 주셨어요.”
“시제품을 보여 줬어요?”
“권 부장님이 일본 고객 라운딩 뛸 때 가져오신 시제품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케이 님이 DHL 아시아 지부장에게 들이밀며 딜을 했어요. 정말 계약을 척척 하시더라고요. 상대가 단박에 넘어오던데요.”
아~ 그래서 일본에서부터 줄곧 케이의 운전기사 노릇을 해 준 건가?
“히타치 케미컬 임시 주총에 제가 참석했거든요. 수한 씨 의도대로 미야자키가 조만간 사장 자리에 오를 거예요. 일본에 들른 김에 이 비서와 식사나 할까 하다가 수한 씨의 절박한! 상황을 알게 된 거죠. 이제 내가 좀 나서 줘야겠다고 여기게 된 거죠. 어때요, 박씨 물고 온 제비 같지 않나요?”
“…….”
역시 대한미국인, 박씨 물고 온 제비까지 아는 여자다.
여하튼 놀랍긴 하다. 권 부장이 그리 절박하게 매달리고도 실패한 일이 케이가 나서니 단박에 해결됐다고? 역시 금수저는 다르다.
이래서 내가 웬만하면 케이에게 신세를 안 지려고 했는데 말이야. 한번 신세 지기 시작하면 질질 끌려다닐 게 뻔하다.
제조업에서 영업은 핵심 역량 중에 하나다. 케이가 아니라 내 사람이 그걸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장님, 권 팀장이 이거 알면 비명 한 번 더 지르겠습니다. 하하하!”
옆에 있던 나 부장은 크게 웃으며 사장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권 부장 자리를 지나가며 칸막이를 툭툭 치더니 엄지 척까지 해 주곤 1층 라인으로 내려가 버렸다.
권 부장이 불안한 눈초리로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권 부장 쪽으로 나 있는 유리벽의 블라인드를 쳐 버렸다.
주한미군 군납이야 일회성이라고 해도 DHL은 대박을 넘어서 이거 큰일이다. 3만 대는 선발주 물량일 뿐 미국 애들이 한번 맛을 보면 무지막지하게 물량이 쏟아져 들어올 거다. 1990년대 DHL 직원만 십만이 넘는다.
케이의 계약서를 뒷장까지 넘겨 날짜를 살폈다. 1992년 1월 말까지 1만 대, 2월까지 2만 대라고 적혀 있다. 미국 애들이 좋아하는 일정이다. 크리스마스 휴가와 연말 휴가까지 쭉 몰아서 쉬다 오면 할 일이 척 하고 도착해 있는 것 말이다.
“1월 말? 그리고 2월 말까지 3만 대, 아니 주한미군까지 3만 5천 대?”
“너무 작아요? 에이, 그래도 100억 가까이 되는 매출인데 욕심은. 좀만 기다려요. DHL이 나섰으니까 페덱스니 뭐니 하는 애들도 조만간 시작할 테니까요.”
벌컥!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혹시!”
“이거 좀 보셔야겠는데.”
“헉! 이렇게 큰 물량을!”
내가 계약서를 건네주자 권 부장은 물량과 일정을 살피더니 몸까지 휘청거렸다. 그 꼴을 보고 케이가 환하게 웃는다.
“역시 저 정도는 놀라 줘야 일한 나도 기쁘죠. 수한 씨는 좀 배워야 해요.”
권 부장은 기뻐서 놀란 게 아니라 감당 못 해서 놀란 건데. 대안을 마련해 주기 전에 일단 자리부터 피해야겠다.
“이 비서, 장비는 어떻게 됐죠?”
“아, 예. 문제없습니다. 나 부장님이 보내 준 설비 엔지니어들이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어제 선적했으니까 세관 거쳐서 다음 주면 여기 도착할 겁니다.”
“좀 서둘러야겠는걸. 급행료를 주더라도 말이에요.”
“예, 사장님.”
“나머지는 밖에서 얘기해야겠네. 케이는 좀 따라와.”
“그래요?”
나는 대화를 빌미로 케이의 어깨를 잡고 사장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정신이 혼미해진 권 부장을 혼자 남겨 놓을 필요가 있다.
내가 대안을 마련한다고 해도 일단 권 부장이 최대한 시간을 벌어 줘야 한다. 교대 근무까지 감안해서 세운 물량 계획을 재차 수정하고, 고객에게 또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일주일 정도는 벌어 줘야 한다.
이 비서가 지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지만, 곧이어 상황 파악을 하게 되면 권 부장에게 알아서 위로 잘할 거다.
털썩.
“어이구.”
권 부장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즐거운 비명도 한두 번이지 그것도 지나치면 골치가 아프다. 사실 나도 이렇게 핸드 터미널 물량이 단기간에 폭발할 줄은 몰랐다.
결국 정헌몽 사장에게 휴대폰 라인을 하나만 빌려 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예상보다 상황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지만 예감은 좋다. 내가 빚져야 하는 상황이 생겼으니 대현과의 협력 관계는 동등해지고 서로 간에 믿음이 생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 관계를 굳건히 하는 데 서로의 이득이 얽히는 것보다 나은 방법도 없다. 사실 제일 강력한 방법은 서로의 약점을 틀어쥐는 것이지만.
정헌몽 사장은 그제야 조건을 내걸겠지. K폰이 S폰을 다시 앞설 수 있는 방법을 물어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대현전자의 지분을 요구하면 된다. 그게 내가 계약 문서화를 미룬 이유다.
터벅. 터벅. 쒸이잉.
“수한 씨, 어디까지 걸어가는 거예요? 으으, 엄청 추운데.”
“조금만 가면 돼.”
- *
쿵덕! 쿵덕!
나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케이를 이끌며 공사 현장으로 나갔다. 중장비가 동원되어 언덕을 깎고, 다른 한쪽에서는 땅에 파일을 박고 있었다.
겨울에도 건물을 지을 수 있냐고 현장 감독에게 물어봤더니 동결심도가 어쩌고, 온도가 4도 이하가 되면 콘크리트 준설이 안 되고 어쩌고 하면서 결국 겨울에는 땅만 평평하게 고르고 파일만 박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터를 닦고 있네요. 이거 뭐 하는 거예요, 수한 씨?”
“당신이 외국에 있을 때 꽤나 많은 일이 있었어. 정 회장님이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지어 보겠다고 하네.”
“그게 가능하겠어요?”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홍, 수한 씨가 하면 혹시 될지도. 후후, 큰 도전이 될 것 같네요.”
내게 호의적인 케이조차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다. 케이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역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다.
“여하튼 골라 봐. 일단 한 곳은 내 사무동, 한 곳은 히타치 케미컬 한국 지사가 들어설 거야. 버지니아 트레이딩을 어디로 옮길지 선택권을 주지.”
“제 회사를 옮기라고요? 이런 촌구석으로?”
“와서 내 회사도 그렇고 회계 담당 좀 해. 수수료는 분기별로 500만 원씩 줄 테니까.”
어떤 회사가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기술력 하나만 믿고 있는 벤처들이 대부분일 터.
회계를 담당해 줄 전문 회사가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세금 구조가 여간 복잡하지 않다. 잘못하면 쓸데없는 돈이 훅훅 빠지고, 더 잘못하면 탈세 혐의로 작은 회사는 한 방에 박살 난다.
내 회사도 마찬가지다. 케이에게 회사 재무를 통째로 맡기면 곤란하니 3개월에 한 번씩 회계를 맡기는 게 좋겠다.
독립 업체를 만들고 경영한다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이 없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인생 1회 차 때 해 본 일이 제조업이니, 2회 차가 되어도 이 짓을 해야만 살아 있다는 희열이 느껴진다.
“에계, 꼴랑 연 2천에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쓰겠다고요?”
“당신이 내 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 아냐? 회사 계좌는 공적 자금이니 투명하게 다뤄 줘. 이 비서에게 재무 업무를 가르쳐 주고.”
“뭐, 사실은 사실이니까. 오케이!”
“내 유동자금은 어찌 되지?”
“일단 확인부터! 윌슨이 그러던데 수한 씨가 영국 벤처 회사에도 투자를 요청했다면서요?”
“그랬지.”
“그래서 생각보다 유동자금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퀄컴, 베이비 벨, 히타치 케미컬, ARM과 Flomerics? 여하튼 주식으로 묶인 게 3,400억쯤 되고요, 유동 자금은 1,452억 남았어요. 여기 용인 공장에 투자한 것은 계산에서 제외예요.”
암산을 해 보면 ARM과 Flomerics에 1,200억쯤 투자를 했다는 말이다. 지분율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궁금한데 말로 묻기가 뭐하다. 나중에 자료로 받아 봐야지 싶다.
여하튼 1,500억 정도 현금이 있다면 정헌몽 사장에게 전화를 해도 될 것 같다.
“잠깐만, 나 통화 좀 하고.”
“누구랑 통화하려는 거예요? 대현?”
따르릉, 따르릉.
내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자 케이는 내 휴대폰에 귀를 바짝 들이민다. 언제나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여자다. 귀가 시렸는데 잘됐다.
-여보세요.
“사장님, 저 유수한입니다.”
-오! 유 사장, 무슨 일인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려는 건가?
“하하! 일단 SOS부터 쳤으면 합니다. 핸드 터미널 물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말이죠. 휴대폰 라인 일부분을 좀 빌려 주십시오. 대신 반도체 부품은 대현 제품만 쓰겠습니다.”
-그래 주면 내가 고맙지. 여하튼 라인을 빌려 달라는 말은 협업 계약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정헌몽 사장이 마음이 급한가 보다. 나도 덩달아 급해지면 안 된다.
“해야죠. 그 전에 요구 조건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 그리 말해 주니 더욱 고맙군. 사실 라인을 빌려 주는 상황이 나로선 그리 달갑지 않다네. 신성의 S폰이 결국 K폰을 앞질렀네. 더 있으면 모토롤라보다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게 생겼네.
“디자인 때문이겠죠. 대현답게 너무 투박하거든요.”
내가 차기 제품은 내부만 원가 절감 형태로 고치고 외형은 개발 도중에 멈춰 버렸다. 기존의 디자인을 그대로 쓰지도 못하고 대현 스타일로 만들더니 결국 성냥갑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건 당연하다.
-용인 밸리에 설계 업체를 입주시켰으면 하네. 자네 말대로 대현의 디자인팀과 경쟁시키고, 디자인이 채택되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네.
“물론 첫 번째 외주 디자인은 제가 하길 원하시겠지요?”
-당연하네. 분명히 말하지만 자네가 설계 업체를 지원한다고 해도 그 회사 지분을 인수하거나 하지는 않겠네. 내 약속하지. 순수한 경쟁 체제. 그 전략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그럼 저도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뭘 원하나?
정헌몽 사장의 말이 한참 뒤에 들려온다. 내가 지금 말할 것이 협력 체계의 핵심 요구 조건임을 눈치채고 있다.
“대현전자 지분의 3프로를 원합니다.”
-역시… 그랬군.
대기업의 지분율은 대략 30%가 크리티컬 지점이다. 50% 중 20% 정도는 우호 지분인 자사주 형태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지배권의 상징인 30%의 10분의 1을 요청한 셈이다. 아직 상장하지 않은 회사라곤 하지만 대주주로서의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지분율이다.
-아버님, 아니 그룹 차원에서 상의해 보겠네. 일단 이리로 오시게.
“대현전자 사장님은 누구십니까? 대현전자를 체질 개선하실 분은 또 누구시고요?”
난 도발을 한 것이 아니다. 협업의 전제조건이나 다름없다. 정헌몽 사장이 정 회장의 허락을 받는 형태를 벗어나지 않고선 체질 개선 따윈 불가능하니까. 수정각 회식 때 정 회장 앞에서 지분율을 요구하지 않았던 이유다.
-흐흠, 역시 자네가 우려했던 바가 그거였군. 이 바닥이 참 냉정하군.
“제 기술과 디자인이면 K폰 시장 점유율은 단박에 회복될 겁니다. 그 정도 가치는 있습니다. 앞으로도 말입니다.”
-내 지분에서 할애하겠네. 그룹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게 방패 역할도 해 줌세.
“감사합니다.”
-이리로 오시게. 오성재 이사를 배석시키겠네.
“예. 가는 데 2시간쯤 걸릴 것 같습니다. 디자인은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바로 보여 준다고?
“이천에서 뵙죠.”
-기대, 아니 기다리겠네.
툭. 삐이익.
짝짝짝!
“수한 씨, 대박! 이야, 대현전자를 접수하려는 거군요!”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케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M&A는 펀드 후계자로서 꼭 수행해 봐야 하는 과제인지 호들갑을 떨어 댄다.
“3프로 가지고 무슨 접수를 한다고 그래?”
“일단 시작했으니 늘릴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래. 말은 그리할 수 있지. 여하튼 대비는 좀 해 줘. 웬만해선 대현전자 지분이 장외 거래에 나오지 않겠지만 나온다면 무조건 거둬 줘.”
“오케이! 캐치했어요.”
케이는 주먹을 와락 쥐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현재 대현그룹은 순항 중이지만, 원래 역사대로라면 정 회장이 정부와 맞서는 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이없게 대현전자의 지분이 은행으로 흘러가면 난감해진다.
“근데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물어봐.”
“대현전자에 뭔 디자인을 주기에 그리 자신 있어 해요? 지분 3%면 자세 잘 나와야 할 텐데. 자칫하면 꼴사나울 수 있어요.”
“염려 마.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나는 휴대폰의 안테나를 손날로 톡톡 썰어 대는 흉내를 냈다. 케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안테나가 없어도 통화가 터져요?”
“왜? 안 믿겨?”
“대박! 대~박! 완전 멋져! 안테나 휘어지면 정말 짜증 나는데.”
21세기 사람에겐 안테나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1990년대야 생각하기 힘들다. 개발자들도 ‘그게 가능한가? 내장형 안테나는 시기상조야.’라며 디자인에 반영할 생각도 안 했을 거다.
항간의 루머인지 모르지만 휴대폰에 안테나를 제거한 디자인은 신성의 이 회장이 가장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안테나 좀 잘라 버리면 안 되나? 왠지 위협적이야.’라고 한마디 하자 임원들이 개발자들을 미친 듯이 닦달해서 실제 제품에 반영했다고 한다.
뭐,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장형 안테나는 1990년대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휴대폰 폴더의 경첩 안에 코일형 안테나를 집어넣을 수 있다.
물론 안테나를 내장한 경첩 표면에는 금속 코팅을 하면 안 된다는 제한이 있긴 하지만 플라스틱 광택을 높여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분명히 대히트를 칠 디자인이다. 원래 역사에서 초박형 키패드 기술과 더불어 ‘모토롤라 레이저(RAZR)’라고, 전 세계적으로 초대박을 쳤던 휴대폰의 핵심 기술이니까.
원역사에서도 두 가지 모두 모토롤라가 아니라 한국 기업이 먼저 기술 개발에 성공한 것도 웃기다. 생각난 김에 특허도 좀 출원해 둬야겠다. 초박형 키패드 기술은 원래 주인을 찾아 이곳에 입주시켜도 되고 말이다.
“땅 안 고를 거야?”
“나 왼쪽 저기요! 시내에서 제일 가까운 곳요.”
“허! 제일 비싼 땅이네. 다행히 내 땅이군. 싸게 줄게.”
“에에, 공짜로 주는 게 아니고요? 수한 씨 땅이라면서요.”
“미국 실리콘밸리는 땅을 공짜로 줘? 그게 사실이면 나 미국으로 이사 가야겠다.”
“칫. 좋다 말았네.”
“평당 10만 원에 샀는데, 50에 주지. 대신 건물은 직접 올려.”
“아이고, 땅 장사 하려고 날 부르셨어!”
“땅값 오르면 한턱내.”
건물을 올리면 땅값은 더욱 오를 테니 케이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왼쪽 땅이 천 평 정도 되니 나는 말 한마디로 4억이라는 차익을 얻은 거다.
4억이라는 돈에 별다른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부동산에 관심이 없는 이유다. 아무런 희열도 없으며, 같이 기뻐할 사람도 없다. 땅을 판 전 주인만 땅을 치고 후회할 뿐이다. 땅값이 오른 이유는 일할 땅이 필요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때문인데 말이다. 이상한 거래다.
“밖으로 나온 김에 따끈한 거라도 먹으러 가요.”
“저기 삼겹살집 어묵이 뜨끈하니 맛있어.”
“으응?”
전혀 가게 호칭과 메뉴가 어울리지 않지만 사실이다. 어묵에다 떡볶이, 심지어 순대까지 파는 삼겹살집이다. 여사원들이 강력하게 요청한 메뉴들이지.
심지어 삼겹살집 후문 쪽으로 가면 예전의 구멍가게 형태의 온갖 잡화들을 팔고 있다. 21세기 편의점 못지않다.
드르륵.
“아이고! 사장님, 어서 오세요.”
내가 케이를 이끌고 가게로 향하니 드르륵하며 가게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 준다. 후끈한 공기가 밖으로 새어 나온다. 맛있는 냄새와 함께 말이다.
“오오오! 수한 씨, 이 어묵탕! 맛이 환상이에요.”
“어머! 외국 분이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아, 감사해요.”
재잘재잘.
케이가 가게 아주머니와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나는 후문 잡화점에 들러 비누 몇 개와 커터 칼을 사 왔다. 휴대폰 디자인을 떠 주려면 그림보단 조각이 훨씬 편하니까. 아, 은행도 들러야겠네. 지분 계약에 돈이 빠지면 되나.
- *
경기도 이천.
대현전자 정문에 우뚝 서 있는 아치 형태의 조형물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운전대를 잡은 이 비서도 감회가 새로운지 잠시 멈췄다 걸음을 옮겼다.
아치 구조는 대현의 자존심 같은 것이다. 건축물 골조에 아치 형태의 디자인을 채용해 건축비를 아끼는 기술은 대현건설이 독보적이다. 대현그룹 본사 사옥은 여타 다른 재벌 그룹의 사옥보다 크지만 건축비는 30% 이상 싸다.
튼튼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대현의 문화는 정 회장이 좋아하는 아치 구조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 사장님.”
사무동에 들어서니 오성재 이사가 직접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그동안 연락도 안 받으시고….”
“불필요한 오해는 없어야죠.”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임원 승진 턱도 못 냈는데 훌쩍 떠나 버리셔서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하, 이제라도 내시면 되죠.”
“아~ 그렇습니까?”
내가 대현전자와 협업하게 될 것임을 넌지시 내비치자 무척 좋아한다. 마치 비서실 직원처럼 나를 사장실로 안내한다. 확실하게 정헌몽 사장의 측근으로 자리매김 했나 보다.
“어서 오시게. 이리로.”
“감사합니다.”
사장실엔 큰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엔 K폰과 S폰이 부품 형태로 분리되어 있었다.
차기 K폰 제품으로 추정되는 완제품도 있었는데, 외관 디자인이 끔찍하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담배를 한 대 꺼내려다 말고 휙 하니 던져 놓은 담뱃갑이다. 성냥갑 디자인으로 한 번 말아먹고 이젠 담뱃갑을 차기 제품으로 밀고 있다니 처참하기까지 하다.
“어떤가?”
“…처참하네요. 디자인을 대체 어찌했기에….”
“면목 없습니다. 품질 기준과 가격을 맞추려다 보니, 이렇게밖에 설계가 되지 않습니다.”
“관련 부서들이 각을 많이 세웠나 보군요.”
내가 있을 땐 타 부서와 이견이 생기면 ‘네가 휴대폰을 알아? 이거 내가 시작했어!’라며 밟아 버렸는데 말이다. 오 이사가 개발팀을 맡고는 그게 쉽지 않았나 보네.
하긴 내가 빠진 판에서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정헌몽 사장도 관련 부서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부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나름 이유는 있다. 부품 불량률을 줄이려고 두껍고 튼튼하게 보강되어 있고, 액정도 큼지막하다. 금형은 기존의 것을 수정해서 썼는지 이음새가 어설프다. 이해는 되지만 어이가 없다.
“어째 방법이 있겠나? 지금 디자인은 자네 말처럼 처참하고, 수정을 하면 품질 문제가 발생하고… 내가 출시 일정을 정할 수가 없네.”
“디자인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오!”
나는 흔들림 없는 이 비서의 운전 덕분에 오는 도중에 비누를 정성스레 깎을 수 있었다. 원래 역사의 모토롤라 레이저 휴대폰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탁!
“이 조각대로 디자인하시죠. 불량은 최종 검사단에서 걸러 내기로 하고, 무조건 이 디자인에 맞춰 부품을 욱여넣으세요.”
“어, 정말 얇군요. 헌데 안테나가… 아, 조각하기가 어려워서 생략하신 건가요?”
탁자 위로 비누 조각을 올려놓자 오성재 이사와 정헌몽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내 조각 솜씨가 꽤 괜찮은가 보다. 하긴 옆에 있는 담뱃갑보다야 백배 낫겠지.
“이대로 하시라니까요. 안테나는 여기 경첩에 내장하시고.”
“어헉! 그게 가능한가요?”
“오 이사님, 나선형 안테나는 내장시킬 수 있습니다. 업체 뒤져 보세요.”
“아! 그런 아이디어가….”
“그리고 부품은 모두 1세대 K폰에서 썼던 부품 업체로 돌리세요. 좀 비싸도 기존 대비 얇은 부품을 개발해 뒀을 겁니다.”
“이미 시도는 했습니다만, 불량률이 너무 과다합니다.”
“불량은 퀄하면서 해결해야죠. 그게 개발팀이 있는 이유죠. 0.5프로 이하의 불량 정도는 품질팀 무시하고 밀어붙이세요.”
신제품에서 품질 문제부터 따지면 결국 시장 출시도 못 한다. 21세기 신성은 물론이고 애플마저 어떤 신제품은 품질 결함 때문에 사업을 말아먹는 경우가 있잖나. 품질 이슈를 모르고 출시했겠나? 품질 이슈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내놓은 거다.
혁신 제품은 품질 결함이라는 리스크를 늘 품고 사는 존재이며, 개발팀을 실시간으로 갈아 넣어야 겨우겨우 제어가 된다. 초반부터 완벽한 품질을 추구하면 혁신적인 디자인은 환상일 뿐이다.
“일단 액정은 모서리부터 보강해야겠네요. 여기….”
“훌륭하십니다. 그러면 칩핑(Chipping, 조각 깨짐) 불량이….”
나와 오성재 이사가 기술적인 얘기로 빠져들자 정헌몽 사장은 자리로 돌아가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지분율 계약서임에 분명하다.
나 또한 100억짜리 수표 세 장이 안주머니에 잘 있는지 만지작거려 보았다. 케이는 대현전자 지분 3%면 330억쯤 될 거라고 하면서도, 30억은 수수료로 퉁쳐 버리라고 조언했다.
“기술 논의가 끝나면 나와 따로 보세.”
“네, 그러시죠.”
잠시 대화를 끊고 들어온 정헌몽 사장의 말이었다. 내 대화를 듣고 있자니 3% 지분이 아깝지 않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내 기술과 디자인은 21세기 버전이니까.
이리 넘기는 게 조금 안타깝지만 스마트폰 부품 업계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대기업의 휴대폰 시장을 키워 줘야 한다. 내 길이 빙 돌아서 다시 원래의 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느낌이다.
제6장 공성(攻城)과 수성(守城)
“고 대리, 1차 물량은 선적했나?”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왔습니다, 권 부장님.”
“휴우, 드디어 떠나보내는군.”
“저도 못 타 본 비행기를 핸드 터미널이 타고 가다니… 저도 미국 출장 가고 싶습니다.”
“고 대리, 비행기 몇 번 타 보면 그 말 후회하게 될 거다.”
“절대! 절대 후회 안 합니다. 마구 보내 주세요.”
“후회 안 한다고? 내기할까?”
권 부장이 의자 받침에 머리를 기대며 농담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저렇게 편하게 농담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다.
“아! 아! 여러분! 라인 안에서는 떠들면 안 됩니다. 알았죠?”
“네에!”
“이제 라인으로 들어갈 건데, 방진복은 교육받은 대로 한 번 쓰고 세탁조에 넣어야 합니다. 다시 쓰면 안 돼요, 알겠습니까? 라텍스 장갑은 재활용 안 하니까 폐기물 통에 넣고요! 알았죠?”
“네에!”
1층에서는 나 부장이 확성기를 들고 웅웅대는 소리가 들린다. 병아리 같은 신입사원들이 교육을 마치고 라인에 처음 들어가는 날이다.
나 부장은 자신이 직접 면접을 본 신입사원들이라 그런지 나름 챙기는 모습이다. 작업복을 사이즈별로 나눠 주고, 사원증을 채워 주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나조차 벌써 1월 중순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미친 듯이 흐르고 있다.
연말 보너스로 직원들에게 금테 은테 봉투도 마구 뿌렸다. 에그펫을 개발했던 한덕구와 몇 명은 S급으로 지정해 500% 보너스를 줬다. 원래 석 달 치 흑자를 계산해 250%를 줘야 하지만 회사의 유동성을 확보했다는 측면에서 그 정도 보상은 당연하다.
물론 1992년의 S급 보너스는 핸드 터미널의 주역인 김 대리가 챙기게 될 것이 거의 확정적이다.
“정말 바쁘게 돌아가네요.”
“케이도 바쁘지 않아? 부탁한 일은 어찌 됐어?”
“계산해 보니 대단하던데요? 누가 보면 10년쯤 된 기업으로 알겠어요. 수익률이 자그마치 14프로가 넘어요.”
“케이도 한몫했잖아. 여하튼 특허도 출원 부탁했는데.”
“영어로 좀 써 주지 그랬어요. 번역하는 데 한참 걸렸잖아요. 각종 내장형 안테나 건으로 5건 모두 출원했어요. 한국, 미국, 일본, 영국까지. 경비는 총 7,800만 원! 청구할게요.”
“비싸기도 하네.”
내장형 안테나 특허는 꽤나 짭짤하게 돈이 될 것이다. 몇 년 뒤 내가 출시할 스마트폰에 꼭 필요한 특허이기도 하고. 돈이 들어도 해외 출원은 반드시 해 둬야 한다.
“칫! 특허 등록까지 다 커버치는 경비예요. 내가 나섰으니까 그 정도라고요.”
“하하! 미안, 미안. 고마워. 감사한다고.”
하긴 케이가 변호사라 변리사 업무까지 대신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은 정말이지 나에게 만능키트나 다름없다. 회계부터 특허 업무까지 해결해 주고 있다.
“그것 때문에 날 부른 건 아닐 테고,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요?”
“아! 이것 때문에 불렀어.”
나는 서류 봉투를 열어 각종 서류를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정도다.
DHL에서 추가 주문이 들어올 것은 예상했지만, Fedex와 UPS에서도 이렇게 빠르게 합류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도요타 자동차 미국 공장도 핸드 터미널을 시험해 보겠다며 1,000대를 발주했다. 시험 물량일 리가 없다. 어째서 이렇게 확신하는 거지 싶을 정도다. 게다가 도요타는 일본 본사가 아니라 미국 공장에서 발주를 했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우와! 제대로 된 회사들이 대거 합류했네요.”
“어찌 된 영문이지?”
“어찌 된 영문이긴요. 수한 씨 제품이 대박 제품이니까 그렇죠.”
“농담 말고, 어찌 된 거냐니까. 주한미군이며 DHL 납품 보증을 선 회사가 버지니아 트레이딩이 아닌 거 아냐?”
“호호호호!”
“웃지 말고!”
내 추측은 그리 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형 미국 물주가 나서지 않고서야 갓 출시한 내 제품이 이리 대박을 칠 이유가 없다. B2B 영업의 특성이라고 할 것이다.
각 회사의 대주주인 물주들이 ‘내가 요즘 이런 회사를 눈여겨보고 있는데….’라는 소리를 파티에서 슬쩍 흘리기만 해도 업체들이 ‘오! 저도 그 회사 주식 좀 사야겠는데요?’ 하며 하나둘씩 들러붙는다.
이렇게 물주들이 판을 키우는 상황은 커 나가는 회사 사장 입장에서 마냥 즐거워할 일이 아니다. 물량을 감당 못 해서가 아니라 지분 매입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상장을 안 한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회사 덩치가 충분히 커진 후에는 차기 납품 계약을 빌미로 지분 투자를 하겠다고 나설 것이 뻔하고, 자칫하면 회사 주인이 바뀌어 버린다.
이런 상황을 두고 업계에선 ‘감투 씌운다’는 은어를 쓸 정도로 흔한 일이다.
“파라곤이 돈이 좀 남아도나 봐요. 영국에서 한탕 크게 하고선 돈 굴릴 데가 마땅찮다나 뭐라나. 호호호!”
“웃을 일이 아니야. 미국에서 빌딩이나 사면 될 일이지 왜 내 제품을 띄워?”
“내가 말렸는데 윌슨이 말을 안 듣더라고요. 핸드 터미널은 대박이 확실하다며 관련 특허와 비슷한 제품을 개발 중인 회사를 쓸어 담고 있어요.”
“허, 그러다 결국 내 회사까지 쓸어 담겠네.”
“에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있는데! 그 반대죠! 누가 스마트 클라우드 찍으러 들어올까 봐 미리 백기사 노릇 하고 있는 거죠.”
“그 말을 믿으라고?”
“제가 약속해 드려요?”
“…….”
“에헤? 혈서라도 써요?”
흔들어 대는 케이의 새끼손가락을 튕겨 내니 이젠 송곳니로 깨무는 흉내까지 낸다.
“어이가 없군. 파라곤이 왜 내 회사를 밀어? 미국에 MS, 애플, AOL 등 같이 투자할 회사는 잔뜩 있잖아.”
“호호, 수한은 정말 모르는 게 없네요. 맞아요, 그 세 회사를 포함해 몇 개 회사가 파라곤 이사회에서 투자 물망에 올랐죠. 하지만 애플은 IBM이라는 강력한 경쟁 업체가 있고, AOL은 매출에 실체가 없다며 최종적으론 투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어요. 결국 MS와 수한의 스마트 클라우드가 파라곤의 투자 적격 판정을 받게 되었답니다. 축하해요.”
짝짝짝!
손뼉까지 치는 케이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운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내 회사가 미국 대형 투자사의 눈에 띄어 버렸다? 내가 세운 그 어떤 시나리오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내 예측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만으로도 양날의 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MS와 동격이야? 솔직히 믿을 수 없는데?”
나는 파라곤이 그런 판단을 내린 배경을 알아야만 했다. 파라곤의 후계자인 케이가 합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론 쉽게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
“솔직히 동격은 아니고요, 제 외할아버지 지분에 줄 선 물주들이 투자를 결정했어요. 그래도 꽤나 커요. 지분율이 8.25프로나 되거든요.”
파라곤 펀드의 투자 금액에서 8%면 얼마나 될까? 천문학적인 유동자금일 가능성이 크다.
“케이슨 교수가 왜 나를 밀었지?”
“독점적 지위가 가능한 회사라고 하시던데요?”
“독점이라….”
“예. MS도 똑같은 이유로 같이 미셨어요. MS가 컴퓨터의 독점적인 꽃이라면, 수한의 핸드 터미널은 휴대폰의 독점적인 꽃이 될 거라고 말이죠. 절대 망할 리 없대요.”
“휴대폰의 꽃?”
“으음, 핸드 터미널과 휴대폰은 다른데 저도 할아버지가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그러시더라고요. 착각하실 분은 아닌데. 물주들이야 뭐 자세히 알려고 들지는 않았고 그냥 줄 섰어요.”
“…….”
아닐 케이슨. 이 양반은 내가 인생 1회 차 때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인데, 미래 예측이 장난 아니다. 내 핸드 터미널을 휴대폰의 확장 버전으로 인식했다. 통화 기능을 끌어와 갖다 붙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아챈 거다.
“실무자로 윌슨이 알아서 준비하고 있어요. 아마… 곧 한국에 올 텐데.”
“지분 할당은 없어. 아직 상장도 하지 않았고, 조만간 할 생각도 없어.”
“그럴 거라고 나도 말했는데, 나중엔 도움을 요청하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혼자 할 수 있는 장사가 아니라고 말이죠.”
미국 애들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내가 슬쩍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 냄새를 맡았다. 돈놀이하는 양반들이니 구체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스마트폰을 꼬집어 낼 수는 없었겠지만, 머지않아 내가 휴대폰의 최종 버전을 만들어 낼 거라는 데 돈을 쓰겠다는 말이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난 혼자 할 수 있어.”
내가 미국 애들과 연합해서 일 처리를 하려고 했으면 처음부터 미국으로 갔다. 결과가 너무 뻔해 안 갔을 뿐이다.
내 벤처가 궤도에 올라서면 일거에 잡아먹힌다. 거금을 벌겠지만, 나의 꿈과 미래도 통째로 가져가 버린다.
“저도 동의해요. 헌데 파라곤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모토롤라와 IBM이 가지고 있는 특허와 작은 회사들을 마구 수집하고 있거든요. 차후 수한 씨가 뭘 하든 아주 강력한 방패가 되어 줄 거예요.”
“…방패가 검으로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어?”
“원한다면 혈서 써 준다니까요, 호호.”
“…….”
내가 표정을 굳히며 말없이 쳐다보자 케이의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그녀의 표정도 굳어 갔다.
“파라곤, 아니 제가 원하는 것은 스마트 클라우드의 지분 10프로! 약속드리죠. 절대 그 이상의 지분을 탐하지 않겠어요. 외려 적대적 M&A가 벌어진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백기사 역할을 할 거예요.”
결국 케이가 이 일을 주도했음을 털어놓는다. 지분 10%로 한정하고 미래의 백기사 노릇도 하겠다고 한다.
“왜? 객관적으로 내 회사는 파라곤이 나설 정도의 회사가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수한 씨가 유일한 희망이에요.”
“희망?”
“휴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해 봐.”
“제 외할아버지의 임기가 3년밖에 남지 않았어요. 아쉽게도 내 경쟁자가 MS, 애플, AOL, 마이크론 등등을 모두 꿰차 버렸어요. 뭐, 애플과 AOL은 탈락시켜 버려 나름 방어는 했지만, 이대로 가면 물주들이 그쪽에 몰표를 던질 게 뻔해요.”
“케이가 후계자 경쟁에 밀렸어? 천하의 케이가?”
“영국에서 좀 확실히 말려 주지 그랬어요. 여태 벌었던 점수 완전히 다 까먹어 버렸어요. 나 망했다니까요.”
케이는 곤혹스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다. 케이가 곤란해하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간다. 케이가 생각보다 늦게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도 자신의 뒷배를 다독거리느라 그랬구만.
결국 케이가 점수를 얻고 있는 것은 AT&T, 베이비 벨, 히타치 케미컬에 투자한 것뿐이네. 모두 내 판단에 근거해서 투자에 성공한 사례들이다.
하나 그걸 모두 더해도 상대가 MS 하나만 챙겨도 경쟁이 힘들겠어.
“그래서 이젠 내 회사가 수십 배 뻥튀기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거야?”
“네, 맞아요. 나 좀 살려 줘요. 얼른 회사를 키워야 해요. 3년 내 매출 1조는 돼야 한다니까요.”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이야? 1조 매출이란 말을 어떻게 그리 쉽게 해?”
“수한 씨라면 할 것 같다니까요. 여기를 실리콘밸리처럼 만든다면서요? 이왕 하는 거 대현전자도 먹어 버려요. 내가 도와줄게요.”
“어휴!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
“이 판국에 무슨 밥이에요. 이왕 내 목적이 드러난 김에… 돈 필요한 곳 없어요? 내가 확실하게 투자해 줄게요. 난 퍼포먼스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나는 솔직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케이가 내 회사 지분을 탐내고 있다면 다른 놈이 숟가락 올리는 걸 무슨 수로든 막으려고 할 것이다. 케이를 밀고 있는 파라곤의 지분이 8.25프로라면 투자비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다 필요 없고, 밥 사 줄 테니까 다시 올 땐 제대로 된 계약서를 가져와. 절대 내가 투자하는 회사 지분 10프로는 넘지 않겠다고 말이야. 파라곤의 우호 지분까지 다 합쳐서.”
“오홋! 투자할 회사가 있군요. 그쵸?”
“있는 게 아니라 생기겠지.”
“호호호호, 내 이럴 줄 알았어! 수한 씨는 역시 내 희망!”
내가 밖으로 나서자 케이는 폴짝 뛰어와 팔짱을 꼈다. 정중히 팔을 꺾어 뒷짐을 지게 만들고는 옆에서 걸어갔다.
동업자는 동격이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서열이 필요하다면 내가 위여야 한다.
파라곤이고 나발이고 꿀릴 필요 전혀 없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라면 파라곤을 이길 수 없을지라도 치명타를 가할 수는 있다.
운 좋게도 케이의 경쟁자가 애플과 AOL에 투자했다고 하지 않았나. IT 버블 때 바닥으로 추락하는 업체다. 케이의 퍼포먼스를 챙겨 줄 수도 있고 여차하면 파라곤에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 무기가 될 수 있다.
내 회사가 떠오르는 샛별이 되어 가고 있자니 벌써부터 이런 일이 생긴다. 원래 전쟁에서도 공격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하잖나.
- *
‘호사다마(好事多魔).’
정 회장은 멋진 일식 요리를 앞에 두고 사자성어부터 떠올렸다. 한국에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연락해 왔기에 자리했는데 불쾌한 얘기만 오가고 있었다.
“…많이 변했네. 내가 알던 멋진 사내는 어디 가고 늙다리 정치꾼이 앉아 있누.”
“영감님, 제가 포항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내가 아는 박 씨는 정치꾼들한테서 포항을 지킬라고 정계에 뛰어들었지, 정치할라꼬 똥통에 몸 담근 사람이 아닌데. 변했네. 허 참, 세월 야속타….”
“영감님, 똥통에서 제 사람을 지키려니 돈이 필요합니다. 좀 도와주신다면 대현으로 향한 세무 조사를 제 명예를 걸고 취소시키겠습니다.”
“이번 선거가 박빙이긴 한가 보이. 사방에서 돈 달라고 난리야. 허허허, 내도 이번 돈은 꼭 써 주고 싶은 녀석이 있는데 말이누.”
박준태 여당 최고위원은 ‘녀석’이라는 단어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대선 주자를 녀석이라 칭하다니 싶었다. 정 회장은 순전히 유수한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는데 말이다.
한때 서로를 인정했던 두 사람이지만 자잘한 대화 중에도 오해가 쌓여 갔다.
“영감님, 누굴 미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게 투자하면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세무 조사로 협박하면서 뭐 그리 정중한 척하누? 어디 맘대로 해 봐라. 이번 정권은 참 더러버. 대통령은 적금 타듯 다달이 가져가고, 야당은 시도 때도 없이 가져가고… 여당은 말해 뭐해. 뭔 대가리가 여럿이라 보내오는 놈들마다 돈을 달라케.”
“그러니 더더욱 제게 투자하시면 후회 없으실 거라 말씀드립니다.”
1992년, 총선과 대선이 함께하는 해. 정치권과 경제권을 하나로 묶는 정경 유착의 고리가 한층 단단해지고 있었다. 정 회장이라고 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박 회장, 아니 이제 박 의원이라고 해야겠네. 포철을 경영할 때 기억 안 나나? 철강 회사의 부채 비율이 50프로를 넘으면 안 된다고 난리 법석을 피워 대가 내가 돈 안 빌려 줬나.”
“그건 회장님 의견이라기보단 각하의 의견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가 안 도와줬나? 그리 재무 구조를 따지던 양반이 지금 나한테는 생돈을 내놓으라 하나. 한두 푼도 아이고 300억이 애들 장난이가.”
“이번 총선은 대선의 전초전입니다. 마중물을 충분히 뿌려서 압승을 해야 합니다. 대현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탁!
“그래서 내가 안 줬나! 여태 여당에 들어간 돈도 천억은 족히 될기다.”
정 회장은 술잔을 마시다 말고 탁자에 내리꽂았다. 붉게 달아오른 안색이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불쾌했다.
“흐흠, 그건 누군가의 노후 자금이겠지요. 제 파벌엔 돈줄이 말라 버렸습니다. 이대로 정치 생명을 끝낼 수는 없으니 모쪼록 회장님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박준태 최고 의원은 나름 절박했다. 3당 합당에 따라 여당 내에서 파벌이 나뉘고 있는데, 정치계의 거두인 YS에게 모두 줄을 서고 있는 상황이다.
총선에서 자신의 파벌이 국회의원을 한 석이라도 더 자치하기 위해서는 당내 경선에서 승리해 공천부터 확보해야 했다. 전당 대회 경선은 누가 돈을 많이 뿌리느냐가 승부와 직결되니 돈줄 확보가 무엇보다 급했다.
“야당하고 싸우는 것도 모자라 당내에서도 파벌 싸움이가. 그건 정치도 아이다. 그냥 돈 뿌리기 시합일 뿐이다. 다 집어치우고 다시 포항 가라. 당신도 가고 싶다 안 했나.”
“그 얘긴 오래전에 끝났지 않습니까. 내가 있을 곳은 서울 한복판입니다.”
“박 의원, 내 할 말이 없다.”
정 회장과 박준태 의원은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끝자리에 앉아 좌불안석이던 최 상무가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텄다.
“박 의원님, 회장님께서 의원님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그룹에 유동자금이 말랐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자동차고 반도체고 간에 끊임없이 투자를 해야 하는 사업이란 걸.”
“한소 경협에 묻어 놓은 돈을 회수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카자흐스탄 광산권이 꽤나 비싸게 팔릴 거라는 풍문이 돌던데 말입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그쪽엔 아직 정치가 혼란합니다. 원래 단기간에 회수할 돈이 아닌 데다 지금 당장 현금화가 되는 물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무슨 돈으로… 용인에 실리콘밸리? 그런 대규모 투자는 어찌합니까?”
박준태 의원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대현의 자금 사정을 알고 있었고, 재무 담당인 최 상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 회장, 용인 얘기는 어디서 들었누?”
“세상에 소문은 많지요. 대현이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짓는다는 소문도 있고, 그 덕분에 회장님이 숨겨 놓은 막내아들이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다는 소문도 있고 말입니다.”
“다 헛소문이야. 부동산 투기는 무슨! 용인 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기다. 건드리지 마라.”
정 회장은 목소리를 잔뜩 깔고 답했다. 순간 최 상무는 정 회장이 으르렁거렸다고 여길 정도였다. 여간 화가 나지 않으면 저런 목소리를 내지 않는데 하면서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돈이 생기면 세금부터 내야죠. 당국이 세무 조사를 하겠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협박하지 마라. 내 여태 충분히 정치 자금을 냈고, 그 돈으로도 여당이 이기지 못하면 그건 국민들 선택인기라.”
“압승이 먼저이고 국민들에게 베푸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용인 밸리 투자는 내년으로 미루시지요. 그림도 좋지 않습니까. 일자리 창출에다 대기업도 아니고 벤처 기업 지원이니, 신 정권의 첫 번째 사업으로 딱이지요. 회장님께서 주신 정치 자금은 결국 용인 밸리에 투자되는 격입니다.”
정치 자금을 주면 여당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할 테니, 용인 밸리에 공적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말이다.
정 회장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검은돈은 사사로이 챙기고 국민들 세금 가지고 생색낼 생각부터 허나. 박 회장 진짜 많이 변했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다. 서로 윈윈이니 손해 보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박준태 의원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정 회장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아이고, 어째 벌써 가십니까. 아직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으셨잖습니까?”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영감님이나 옆에서 좀 보필하십시오.”
“아이고, 이리 가시면….”
성큼성큼 VIP 룸을 빠져나가 버리는 박준태 의원을 최 상무가 쫓아가 배웅했지만 본체만체하며 차에 올라타서 가 버렸다.
“회장님, 저분을 이리 보내시면 어쩝니까? 일단 수십억이라도 지원하겠다고 하셔야지요.”
배웅을 마치고 온 최 상무는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정 회장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정 회장은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이번 선거는 두 정치 거두들이 사생결단하는 기야. 한 번으로 안 끝난다.”
“그렇겠지요. 하나 신성도 여야 모두에게 최종적으로 500억씩 주겠다며 넌지시 알려 왔습니다. 저희도 그 정도 금액으로 두세 번만 하면 물 붓기 끝낼 수 있습니다.”
“임자, 여야 합쳐서 천억이다. 대현그룹의 비상금을 톡톡 털어서 주는 꼴이야. 한소 경협에, 이라크 건설 미수금에, 반도체 덤핑에… 이젠 용인 밸리까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 아이가. 유동 자금은 기업에 피와 같은 기다. 피 마르면 죽는다.”
재무 담당인 최 상무가 대현의 현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투자 지출의 우선순위를 달리하면 방법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아이고, 그러니까 용인 밸리를 1년 뒤에 시작하시면 되지요. 새로운 대통령 모시고 기공식 테이프도 끊고 축포도 쏘아 올리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임자, 우예 그리 쉽게 말하누. 용인 밸리는 수한이 그누마가 협력하는 대가다. 1년 뒤에 상황이 어찌 변할 줄 알고? 여당이 승리한다는 보장은 있나? 결국 그 돈을 정치 자금으로 쓰면 나는 그 녀석을 충성 시험한 것도 모자라 호의를 이용한 셈이 되는 기다.”
“어째서 회장님은 유 사장부터 생각하십니까? 그룹이 우선 아닙니까. 정치권에서 세무 조사로 협박하고 있잖습니까. 세무 조사를 받으면 돈줄 마르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제가 유수한 사장에겐 상황을 잘 설명하겠습니다. 아이고!”
최 상무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 손으로 바닥을 툭툭 치기까지 했다. 정 회장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 자금을 주면 목적한 그림이 망가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임자! 수한이는 헌몽이의 날개란 말이다. 용인 밸리는 헌몽이가 대현의 체질을 바꾸는 무기다. 용인 밸리와 수한이를 묶어 가… 헌몽이는 높이 올라가야 하는 기다. 그룹의 꾀주머니란 놈이 그것도 모르나!”
“그 모든 게 그룹이 온전해야 가능한 그림 아닙니까.”
“그림이 달라지는데 무슨 소리고! 내 돈은 정권이 가져가고, 용인 밸리에는 공적 자금이 들어가므… 기존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어용 공단이 되는 기라고. 정권에서 사장이랍시고 낙하산 툭툭 떨어뜨리는 그런 공단 말이다. 그따위 걸로 헌몽이가 대현을 어찌 바꿀 수 있겄누!”
“불이 나면 일단 피하고 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우선은 수십억이라도 챙겨 줘야 합니다. 박 최고의원이 직접 자리했는데 선물도 없이 헤어지면 안 됩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다른 방법이 없냔 말이다!”
정 회장도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술잔이 콸콸 넘치도록 소주를 부어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정 회장은 그런 식의 공단은 절대 세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정치권에 당한 것만 해도 차고 넘친다.
“회장님, 자칫하면 유 사장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습니다. 그이를 진정 도련님의 날개라 여기시면 정치권에 돈부터 챙기는 게 상책입니다.”
탁!
“수한이가 와? 그누마가 탈세를 하기라도 했디가? 그누마는 그리 멍청하지 않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게다가 대현과 가깝다는 것만으로도 타깃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대현물산 지분과 퀄컴 지분을 교환한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백억짜리 거래에 세금 따위는 없었단 말입니다. 심지어 유 사장에게 제일 처음 건넨 10억에 증여세를 내셨습니까? 그 돈으로 유 사장이 집을 샀으면 부동산 투기입니다. 납세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으익.”
“유 사장에게 세무 조사 불똥이 튀면 새로운 그림도 그릴 수 없습니다. 대현에 검찰이 들이닥치면 십중팔구 유 사장도 같이 끌려 들어갑니다, 회장님!”
정 회장은 울분이 훅 올라왔다. 수한과의 거래는 뭔가를 주고받는 것이고, 정치 자금은 탈세를 넘어 그 자체가 검은돈이잖나.
하나 그리 항변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리. 최 상무의 말이 틀렸다고 하기엔 사안이 너무 무거웠다.
“휴우.”
“회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박 의원 쫓아가야 됩니다. 돈도 이미 제 차에 실어 뒀습니다.”
“…휴우.”
정 회장은 한숨에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갈등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신성처럼 정치인들이 달라는 족족 정치 헌금을 안길 수만 있다면 늪을 빠져나오겠는데 말이다.
최근 벌어진 일은 모든 것이 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외려 신성은 이 와중에 반도체에 4천억 가까이 투자한다는데 정치 헌금까지 줘 가면서 어찌 그런 돈이 있는지 일견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회장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 임자 말도 틀린 건 아이지. 여당, 야당 모두 일단 100억씩 주자. 박준태 그 양반 차 쫓아가라.”
“예, 당장 가겠습니다. 그럼 여당엔 YS와 박 최고의원에게 공히 50억씩 주겠습니다. 차후 상황 봐 가며 더 챙겨 주겠다고 언질을 주고요.”
“수한이한테는 직접 전화해라. 이래저래 행동 조심하라고.”
“염려 마십시오.”
정 회장의 의중은 박준태를 밀어준다기보단 유수한을 보호하는 측면이 컸다. 정헌몽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때 유수한이라는 존재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최 상무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최 상무는 부리나케 일식집 VIP룸을 빠져나갔다.
정 회장은 우두커니 혼자 앉아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한 잔 털어 넣으니 무심결에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우째 내가 어찌 이리 되삣누. 이빨 빠진 호랑이는커녕 겁먹고 부들부들 떠는 늙은이 아이가….”
파삭!
정 회장이 무심결에 내려놓은 술잔이 데굴데굴 굴러 바닥에서 박살이 나 버렸다. 그마저도 재수가 없어 보였다. 오늘따라 목구멍으로 삼킨 소주가 가슴의 뭔가를 쓸어내리기는커녕 비릿할 정도로 쓰기만 할 뿐이었다.
- *
1992년 1월 말.
「대현그룹 탈세 혐의로 세무 조사 착수. 2천억대의 과징금 부과될 듯.」
「대현전자, 반도체 및 휴대폰 덤핑 시도로 매출액을 의도적으로 줄였을 가능성이 농후.」
「대현그룹 총수 일가 부동산 투기에 거액의 공금을 유용한 정황.」
「대기업 탈세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계도가 필요할 때.」
최 상무가 직접 전화를 준 것이 불과 나흘 전이었는데 신문에 특종이 실렸다. 50억으로 급한 불은 껐다고 했는데 뭐가 잘못됐지?
“어찌 된 일이지? 분명 최 상무가 정치자금을 줬다고 했는데 왜 원래 역사처럼 전격적인 세무 조사가 벌어지지?”
시간이 아침 9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회사 출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오랜만에 분당 집에 왔는데 이런 신문 기사를 읽게 되다니.
원래대로라면 정 회장은 YS와 정치 헌금 때문에 각을 세우다가 1991년 말에 세무 조사를 받는다. 대현그룹의 직원이라면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 같은 일이다. 검찰 및 세무 공무원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3시간 이내에 찾아서 가져다주지 않으면 증거 조작으로 불려 갔으니까. 그룹 전체에 난리가 났다.
이미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져 있었으니, 여당 최고 위원이었던 YS는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정 회장을 본보기 삼아 재벌 총수들의 교육에 나섰던 거다. 세무 조사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를 만큼 1992년 대선은 YS와 DJ가 공히 사생결단을 다짐했던 해였다.
YS는 3당 합당이라는 초유의 선택으로 20년 야당 총수로서의 이미지마저 버리고 승부수를 던졌고, DJ는 이번 대선에 승리 못 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며 표 결집에 나섰다. 이 와중에 상대에게 정치 자금이 흘러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선거 전략이었다.
그 일이 벌어진 게 1991년 말임을 내가 헷갈렸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1,400억이나 되는 과징금을 부과한 세무 조사에 반발해서 1992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정 회장이 선전포고를 했으니까.
기자 회견을 통해 여태 정권에 바친 정치 헌금 장부를 공개하고, 자신이 직접 정당을 만들어서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 선언 자체가 정경 유착이며, 재벌 총수가 직접 당을 만들다니 어이없는 행보였다.
물론 이해되는 면도 있다. 수천억에 달하는 정치자금을 꾸준히 지원해 온 나름의 기여는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여야 모두에게 뒷돈을 대는 것은 일종의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여당의 선거 전략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1,400억을 추징당했으니 완전히 빡쳐 버렸던 거다.
“이 일에 나비효과가 끼어들었다는 건데… 어째서지? 이렇게 시일이 밀릴 바엔 아예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인데.”
내가 당황한 이유가 이것이다. 정 회장의 현재 금전적 상황은 원래 역사 대비 괜찮은 편이다. 휴대폰이 대박을 쳤잖나. 최소한 지난해 말까지는 무난하게 정치 자금을 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나’라는 변수가, 아니 용인 밸리가 이 사태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에 기분이 영 찜찜했다. 세무 조사라는 타이틀로 얽힌 것은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고 말이다.
용인 밸리에 생각보다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고 있나? K폰의 매출이 급격히 떨어진 것도 원인의 한 축일 수 있겠다.
드르륵.
나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 비서가 차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신문을 읽었는지 그 또한 표정이 좋지 않다.
“이 비서!”
“어서 가시죠. 벌써 지각이십니다.”
“먼저 회장님한테 가야겠어. 이 비서도 옷 좀 갈아입어. 나 샤워하고 나갈게.”
“어… 정 회장님께 가신다고요?”
“대현전자 비서실에도 넌지시 알려 줘. 정헌몽 사장님도 내키면 오시게.”
“알겠습니다.”
나는 샤워를 빙자해 내 기억 노트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정 회장의 행보가 어땠는지 말이다.
추징금 1,400억은 부당하다며 소송으로 가고, 결국 재무 임원을 감방에 넣으면서까지 결사 항전했고, 그 돈으로 정당을 세웠다. 3월 말에 몇 명이더라… 아, 여깄네. 그래, 30석이 넘는 돌풍을 일으키지.
‘그래, 시작하지 않았으면 최선, 여기서 관뒀으면 차선, 총선까지 달리면 차악, 거기서도 안 멈추고 대선까지 달리면 최악.’
사실 기억 노트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선거구에 누가 당선되었는지 혹시 기억해 뒀던가? 하며 살펴봤을 뿐이다. 그걸 어찌 기억하겠나. 와중에 ‘국회의원 30여 석 배출, 이변!’이라고 적어 둔 게 용하다.
부르릉.
“출발하지.”
“예. 정헌몽 사장님은 그룹 본사로 출근하셨답니다.”
“그렇군.”
이 비서는 총알처럼 차를 몰아갔다.
‘정 회장이 정치에 발 담그기 전에 이번 사태를 연착륙시켜야 해! 이 늪에 더 이상 빠지면 아무리 대현이라도 못 빠져나와. 자칫하면 나도 같이 빠진다. 일단 일이 틀어진 이유부터 알아내야 해!’
제7장 각자의 길
“유 사장님, 오실 줄 알았습니다.”
“최 상무님, 어찌 된 일입니까? 급한 불은 끄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대현그룹 본사 사옥에 들어서자 최 상무가 마중을 나왔다. 내 차가 도착하는 것을 본 보안팀이 연락을 했겠지 싶다.
“아무래도 YS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제 실수이기도 하고 말이죠.”
“오해라고요?”
최 상무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읊어 댔다. 곤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말이다.
“여당 및 야당에 공히 100억씩을 줬는데 그걸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왕 주실 거면 여당엔 최소 두 배는 주든지 YS에 올인하셨어야죠.”
“그러게 말입니다. 자금이 부족해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에휴, 그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일이 틀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똑같은 금액을 주면 3당 합당한 여당에선 야당 대비 돈이 파벌로 갈린다. YS가 보기에는 대현이 공평하게 정치 헌금을 한 게 아니고 DJ를 밀어줬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원래 역사에서도 일이 이렇게 돌아갔던 것일까?
게다가 상황을 봐서 대현이 돈을 더 풀겠다고 했으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YS는 야당과 정치 헌금 차이가 더욱 벌어진다 여기고 허튼짓 말라고 압박을 해 온 거다.
“올라가시죠. 회장님 계시죠?”
“도련님들도 같이 와 계십니다. 같이 뵙죠.”
“도련님들이라고요?”
“정헌몽 사장님과 정준몽 사장님이 달려오셨더라고요. 유 사장님이면 같이 배석해도 될 겁니다.”
정구몽 사장이야 대현물산 건 여파로 최근 자숙하고 있다고 했으니 안 올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정준몽 사장이라니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삐리릭. 삐리릭.
“최 상무와 유수한 사장이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비서실이 내선 전화를 걸자 회장실에서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현의 오너 일가 중 그나마 발음이 정확한 정준몽 사장의 목소리였다.
“신문 읽고 불쑥 찾아왔습니다.”
“올 줄 알았다. 앉으라.”
정 회장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나는 정헌몽 사장 옆에 자리했다. 자연스레 최 상무는 정준몽 사장 옆에 앉았다.
“세무 조사로 떠들썩할 줄 알았습니다만, 생각보다 조용하군요.”
“검찰이 한번 쓸고 갔다. 서류를 트럭에 꽉꽉 채아 가드라. 다 돈뭉치로 보였을기라. 허허.”
정 회장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허허 웃기까지 한다. 외려 그의 아들들이 표정이 굳어졌을 뿐이다.
“신문에선 2천억대의 과징금을 물릴 거라고 보도를 하던데요.”
“진짜로 웃긴데이. 조사도 하기 전에 과징금 액수까지 알고 있다 아이가. 천억 정도 주면 좋겠다는 말이겄지. 영수증을 끊어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쌈짓돈이 얼마인지 뻔히 알고 있구마는. 허허.”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러게 말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 억울하고 분했는데, 준몽이가 기가 막힌 방법을 들고 왔다. 내가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했을 정도라니까.”
어후,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내가 한발 늦었던가? 빌어먹을.
“설마… 정치하시려고요?”
“어이구, 니도 그 생각을 했디가? 역시 준몽이가 제대로 짚었네. 하하하하!”
농담일까, 진담일까? 정 회장은 정말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아니다. 미친 거다. 이참에 정계로 나서면 한 방 먹일 수 있다고 작전을 가져오니 분한 마음에 머리가 훅 돌아 버린 거다. 빡치면 나중 일이 어찌 되든 간에 일단 치고받고 싸우는 게 대현 오너들의 특성이다.
유일하게 그런 길을 택하지 않는 사람이 정헌몽 사장이다. 달리 가신들이 정헌몽 사장에게 줄 서는 게 아니다.
웃기지만 이런 대현의 문화가 간혹 빛을 발할 때도 있다. 외국에서 특허 소송을 걸어오면 신성과 달리 대현은 절대 합의하지 않고 끝까지 소송전으로 맞붙는다.
어찌나 저돌적인지 사원급 연구 노트까지 카피하고 관련 개발 자료를 공론화하며 물러서지 않았기에 NEC, 마이크론, 인피니온 할 것 없이 결국 크로스라이선스를 맺었다. 특허 승소로 검색하면 대현밖에 안 나오는 이유라고 할 것이다.
하나 정치는 다르다. 누가 옳고 그른지 판사 앞에 설 수가 없다. 판사가 누구 눈치를 보겠나.
“정말 정계에 발을 들이시게요?”
“그라무. 이번 기회에 정면 돌파해 볼기다. 정계에 파벌이 잔뜩 나뉘어 있는 상황 아이가. YS도 야당 이미지를 버리뿟으니 국민들도 실망했을기라. 그 틈을 파고들므 충분히 가능성 있다. 대현의 직원들만 뭉쳐 줘도 승산은 충분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왜 여태….”
“어휴, 혹시 노망이라도 드신 겁니까?”
“뭐이라?”
내가 훅 하니 끼어들자 정 회장은 말문이 막히나 보다. 내가 그렇게 정치하지 마시라고 한 걸 귓등으로도 안 들은 모양이다. 정계 입문을 대단한 작전처럼 내게 말하고 있잖나.
쾅!
“너 뭐야! 감히 아버님께 그게 무슨 소리야!”
“정치에 발을 들이는 게 노망든 게 아니면 뭐가 노망든 겁니까?”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몰라? 대현그룹 회장님 앞이야! 감히 노망이라니!”
“허 참, 이따위 파벌 지도 한 장 가지고 와서 뭔 구라를 늘어놨기에 회장님이 이리 미쳐 버리셨나요? 박준태 의원을 이용해 반YS 정서를 조장해서는 TK(대구, 경상북도)를 먹고, 충청도와 강원도를 먹고, 내친 김에 여당에서 소당파 영입하면 총선은 물론 대선까지 바라볼 수 있다? 뭐 그런 전략입니까?”
쿵쿵!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계파 분석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찍어 대며 으르렁거렸다.
선거꾼들이 민정계, 민주계 인사들의 관계도를 빼곡히 그려 놓고는 한 장에 수천만 원씩 받고 팔아먹는 지라시다. 동네 아줌마, 백수들의 친목 모임이나 다름없는 당원 숫자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의원 이름 옆에 막대그래프로 그려 놨다.
저대로 표가 나올 거라면 투표는 왜 하겠나? 그냥 밥 같이 먹고 수건 한 장 얻은 대가로 단체 사진 한 방 찍어 준 거에 불과한 거다.
“뭐? 그걸 어떻게….”
“미련하기는 시벌. 누가 재벌집 도련님 아니랄까 봐. 세상이 그리 쉬워 보이십니까?”
“너 이 자식 감히 누구한테 욕이야! 내가 누군지 몰라? 당장 꺼져!”
“좀 닥쳐 주겠어요? 내가 이런 덜떨어진 소리나 듣자고 온 게 아니니까.”
“뭐야? 말 다했어! 정치는 만사의 최고봉인 걸 모르나!”
원래 역사에서도 이때부터 이 양반 정치 인생이 시작됐구만. 인생 2회 차엔 별걸 다 본다. 이래서 대현에서 전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거네. 아들 중에 최고의 브레인이 작전을 짜 왔으니 말이다. 승부사 집안답다고 해야 하나. 미치겠다.
“고마해라.”
“아버님, 이 녀석 말하는 꼴 보십시오! 노망들었다고? 아니, 뭐 말 같잖은 소리를!”
“그마하라캤다.”
“으….”
정준몽 사장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소파에 등을 기대자 정 회장이 나와 눈을 맞춘다. 오늘따라 유독 정 회장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보인다. 뜬구름 잡는 애국심 어쩌고 할 때는 눈이 빛나기라도 했는데 말이다.
“정치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러 온기가?”
“아뇨. 맘대로 하세요. 이제 대현의 직원도 아닌데 그룹이 망하든 말든 뭔 상관입니까?”
“그라무 뭐 할라고 왔누?”
“세무 조사라는 큰 파도를 어찌 넘을까 논의하려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낐나?”
“당연하죠. 노망든 분이랑 뭔 논의를 하겠습니까? 제가 의사도 아닌데. 실리콘밸리 계약은 파기할 거고요, 회계 장부는 복사해 가겠습니다. 제 세금은 제가 계산해서 완납하고, 이쯤에서 손절하죠.”
“그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니 우얄라꼬?”
“대현전자 OEM 때문에 그러십니까? 까짓것 손 털고 말죠, 뭐. 신성도 생산라인 있는데 그쪽에 줄 대면 됩니다.”
“내가 죽을 때가 다 됐나. 보는 사람들마다 협박을 하네.”
정 회장은 회장 전용 소파로 푹 파고들어 갔다. 내 눈길을 피하진 않았지만 약간의 갈등을 하는 정도다. 결론이 정해진 갈등이다.
정권이 들이미는 어이없는 세법에 탈세 과징금을 왕창 뜯겨도 정계에 발을 들이는 것보다는 낫다. 외려 이참에 훌훌 털고 정경 유착을 벗어나겠다고 했다면, 내가 케이를 물주로 끌어들이는 한이 있어도 대현과 같이 갔을 것이다. 저 정도 갈등에 그치는 정 회장이라면 내가 손절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포기하세요, 제발. 이건 승부가 아니에요. 필패라고요.
“유 사장, 말이 지나치네. 아버님은 자네를 보호하려고 정면 돌파를 결심하신 것이네.”
여태 조용하던 정헌몽 사장이 끼어든다.
“그래서요? 나까지 껴안고 불난 집에 뛰어드는데 고맙다고 할까요? 그건 고마운 게 아니라 환장할 일입니다.”
“유 사장이 정치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거,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가능성은 있네. 나도 찬찬히 쳐다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
“생각 많이 하신 결과가 그겁니까? 어이가 없네요. YS와 DJ가 상대를 죽이고 기필코 대통령이 되겠다고 수십 년간 갈아 온 칼을 휘두르는 게임이에요. 어디다 목을 들이밉니까?”
“…….”
“정헌몽 사장님, 어째서 정 회장님을 안 말리십니까? 이 정도면 시작부터 글러 버린 그림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무조건 따르는 게 효도인 줄 아십니까!”
“아니. 가능성은 있다고 여겨지네.”
정헌몽 사장도 결국 선을 넘는다. 내 뒷골이 띵해졌다. 빌어먹을. 어후.
“내 사전에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총선 결과가 그걸 증명해 줄 거다.”
“총선에서 여론몰이하고 대선까지 노리시겠다? 계획 좋네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죠. 얻어 처맞기 전에는.”
명언에는 명언으로 대답해 줘야 하지 않겠나? 마이클 타이슨 같은 저돌적인 사내의 명언이라 정 회장의 명언에 더욱 잘 어울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 외려 정 회장의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야 하는데 싶을 정도다.
“총선은 가능성 있다는 말이가? 어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서 왜 묻습니까? 정치하지 마시라고 했잖습니까.”
뚜벅뚜벅.
시벌, 오늘따라 문까지의 거리가 무척 길다.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울 줄이야.
“총선은 승리하냔 말이다! 이누마!”
“마음대로 하세요! 회사 말아먹고 싶으면 그리하시라고요! 시퍼런 파도에 불같은 모래 바람에 사람들 묻어 가며 일으킨 대현을 그렇게 말아먹으시라고요! 빌어먹을 영감탱이!”
꾹 참았던 욕이 튀어나왔다. 대현의 직원들이 한낱 월급 때문에 자기를 갈아 넣은 줄 아나? 꿈, 청춘, 자부심, 동료, 미래… 온갖 것이 녹아 있는 직장이었기에 그리했던 거다. 당신 인생조차 담았던 회사를 불 속에 처넣고 있는 거라고!
“야이, 빌어먹을 대현!”
퍽!
내 앞을 뭔가 가로막기에 냅다 걷어차 버렸다. 정 회장 사무실의 유일한 장식품인 수양목 화분이었다.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리 안 돌아오나! 다시 앉아라!”
“닥쳐! 미친 영감탱이! 아니, 내가 미쳤네. 조금이라도 당신을 존경했던 내가 미친놈이었어!”
굿바이, 대현! 잘 가라, 대현!! 내 다시는 여기 안 온다. 내 친정이라고 나름 애착을 가졌건만 빌어먹을. 트러블 메이커도 이런 트러블 메이커가 없다.
- *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스마트 클라우드…….”
-유 사장님, 나….
툭!
최 상무와 정헌몽 사장이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해 왔지만 얘기할 생각도, 만날 생각도 없다. 원래 역사대로 대현에서 당도 세우고 총선 출마도 공식화하고 있는 마당이니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이런 시나리오가 펼쳐지면 대현과의 손절은 당연하다. 안타까워할 이유조차 없다.
“왜요? 정헌몽 사장 같은데, 이참에 대현전자 지분이나 더 팔라고 해요. 정치하면 돈 많이 필요할 텐데.”
“뭐, 좀 있으면 휴지 조각될 텐데. 그때 쓸어 담으면 그뿐이야.”
케이는 대현전자를 언제 집어삼키느냐며 은근슬쩍 나를 떠본다.
나는 이미 정헌몽 사장에게 협업 계약은 파기되었으니 대현전자 지분 3%를 돌려주겠다고 이 비서를 몇 번이나 보냈는데, 정헌몽 사장이 그때마다 되돌려 보냈다. 대현전자 지분 3%가 마지막 남은 연결고리라고 여기나 보다.
상관없다. 조금 일찍 비싸게 샀다고 여기면 그뿐이다.
“오, 그래요? 언제쯤 그리될 것 같아요?”
“그만하고, 회계 장부나 다시 살펴봐. 세무 조사 덮치기 전에 미리 토해 낼 건 토해 내자고.”
“에이, 날 뭐로 보고 그래요. 수한 씨 금융 거래는 완벽해요.”
“영국에서도 그런 자신감이 있지 않았나? 실수하면 안 돼. 다시 살펴보자고.”
“오키! 오키! 인정!”
케이는 컴퓨터를 통째로 옮겨 와서 내 옆에 앉아 회계 장부를 검토했다. 이제 세 번째로 다시 보고 있지만 정말이지 현재까지 완벽했다.
내 계좌는 퀄컴 리베이트 건 이후로 전부 미국의 시티은행 계좌로 통합되어 있었다. 모두 외환 거래다 보니 수수료와 주식 거래에 따른 세금도 미국과 한국 양쪽에 고스란히 납부되고 있었다.
지분율 소수점 이하의 돈에서 수수료와 세금이 처리되고 있었기에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세금을 어찌 아끼느냐에 따라 케이의 수익률이 달라지니 최선을 다했을 것은 당연한 일. 파라곤 펀드에서 수수료를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이유가 그러했다. 고객과 불필요한 언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최초로 정 회장에게 받은 10억에 한해서만 돌려주면 되는 거네. 맞나?”
“정 회장에게 돌려주면 증여세를 또 내야 해요. 세금 정산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증여세에 가산세까지 합쳐서 말이에요.”
“잘할 수 있지? 믿고 맡길게.”
“파라곤 펀드에 투자 유치하겠다는 분이 간이 그리 작아서 어째요.”
요즘 들어 케이가 유독 친절한 이유다. 내가 대현과 손절하고 독자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겠다고 하니 케이는 좋아서 펄쩍펄쩍 뛸 지경이었다. 당장 어떤 회사를 쓸어 담으면 되는지 리스트를 만들어 달라고 하기에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다.
“파라곤 이사회에 의사 타진은 해 봤어? 나 같은 흙수저 아시안을 믿어는 준대?”
“흙수저? 농담치곤 괜찮은 단어인데요. 여하튼 투자는 당연하고 분위기도 좋아요. 수한 씨가 핸드 터미널의 북미 시장 공략으로 마이크론사(Micron社)에 OEM을 주겠다고 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예요.”
국내 시장과 일본 진출은 내 공장을 최대한 돌리고 여차하면 신성에 줄을 댈 생각이다. 하나 북미 시장은 물량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이니 마이크론 정도는 되어야 한다. 물류 이동 차원에서도 좋고, 미국 물주들을 안심시켜 주는 역할도 할 거다.
“OEM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투자를 받으면 여기 용인에 생산 라인을 세울 거니까. 길어 봐야 2년 정도.”
“당연하죠. 헌데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10억 불이라는 대형 투자 건인데 이런 호재를 썩히는 건 좀 아깝지 않아요? 정치꾼 하나 찍어서 투자 유치했다는 감투 하나만 씌워 줘도 킹메이커 노릇 톡톡히 할 텐데 말이에요.”
“대한민국 정치는 3류도 못 되는 4류야. 트러블만 생길 뿐이야.”
“에이, 그렇다고 피하기만 하면 어째요. 이용할 건 이용해야죠.”
“이용한답시고 가까이 갔다간 불타 죽어. 신경 끄고, 미국엔 언제 날아가면 되는지 말해 줘.”
신성처럼 전 방위 공작을 펼치지 못할 바에는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게 낫다. 동명목재 재산 헌납 사건이나, 국제 그룹 공중분해 사건을 미국인인 케이에게 말하긴 싫었다.
“호호, 돈이 급하긴 한가 봐요. 수한 씨가 안달복달하는 건 첨 보네요.”
“꼭 돈 때문만은 아니야. 간 김에 재훈이도 봐야지 싶어서 그래.”
“아~ 친구 말이군요. 일리노이 대학도 구경하고 좋겠네요.”
케이는 꼭 내가 놀러 가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파라곤의 미팅 못지않게 재훈이를 만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두 가지 일은 모두 1992년 4월에 윈도우 3.1이 출시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윈도우 3.1은 출시되자마자 전 세계를 강타하며 불과 1~2년 만에 컴퓨터 OS의 90%를 점하게 된다. 덩달아 반도체 메모리 사업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건 윈도우를 돌리기 위해서는 기존 메모리 용량으론 턱도 없기 때문이다.
UI가 편리하고 MS-Office로 작업을 하는 게 너무나도 근사하지만, 기존 메모리 사양에서는 울화통이 터질 정도로 버벅거렸으니까.
1992년 최고 용량인 4M DRAM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고, 대한민국 반도체는 하늘을 날았다. 신성과 대현은 1992년에 4M DRAM을 양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회사였으며, 윈도우 사용자들은 무려 300불 가까이 되는 4M DRAM 모듈을 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4M DRAM 한 개 가격이 한화로 2만 5천 원까지 올라갔다.
원래 역사에서 신성은 초대박을 쳤지만 대현은 중박 정도에 그쳤다. 대현은 생산 라인 확충에 늦은 데다 정치권의 견제로 자금이 말라 반도체 사업 확대를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게 된다. 신성이 초대박을 친 것은 대현이 팔아먹을 몫까지 고스란히 가져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대현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헛돈만 날리는 히타치와의 공동 개발을 취소시키고, 통신칩을 빌미로 라인을 확충하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선거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올해부터는 정말이지 꽃길만 걸을 수 있었는데… 이젠 다 헛된 꿈이 되어 버렸다.
내게 남은 옵션은, 미친 짓일지 모르지만 나 혼자 힘으로 윈도우 대박에 합류하는 일이다. 대현의 인프라, 자금, 인력 어느 것 하나도 기대할 수 없게 된 마당이니 내가 직접 파라곤의 자금으로 반도체 생산 라인까지 갖춰야 한다.
무지막지한 돈이 들어가는 일이니, 케이의 지원을 등에 업는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문제다. 아무리 그래도 ‘차기 윈도우 버전이 대박을 친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게 돈을 주세요. 반도체 라인 세우게요!’라고 떠들어 댈 수는 없는 일이다.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재훈이가 어디까지 개발했는지 모르겠지만 인터넷 브라우저 초기 버전이라도 들고 가야 내가 원하는 정도의 돈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정 회장의 선택이 뼈아프다. 내가 욕까지 날리는 충격 요법을 썼음에도 결국 정계에 발을 들이다니.
새 대통령은 대현에 정치 보복을 할 게 뻔하다. 정계 보스야말로 자신에게 도전했던 사람은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방법도 우스울 정도로 간단해서 은행 대출을 막고, 수출 신용장 발급을 질질 끌기만 하면 된다.
반도체 산업은 장치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대현전자의 생산라인은 금세 구식이 되어 경쟁력을 잃어버릴 거고, 사람들은 줄줄이 잘려 나가겠지.
결국 내가 챙겨야 할 것은 대현전자의 사람들이다. 그런 고급 인력들을 천덕꾸러기로 만들 수는 없다. 소 팔고 논 팔아 대학 공부시킨 사람들, 굳이 대학을 안 나왔다 해도 대학의 낭만 대신 라인에 청춘을 바쳐 가며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다.
내가 반도체 전(前)공정을 1년 만에 셋업하는 미친 짓에 도전해야 하는 이유이며, 일말의 가능성이 보이는 이유기도 하다.
“대학 구경해서 뭐하게? 재훈이만 만나고 미팅에 참석할 거야.”
“수한 씨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미팅은 대략 2주 뒤에나 있을 거예요. 물주들 일정 조율하는 게 그리 쉽겠어요? 저도 투자 요청 자료도 만들어야 하고.”
“흐흠, 2주나 걸리나?”
“이참에 머리 좀 식히세요. 여태 너무 달리기만 했어요. 다들 쉬고 싶은데 수한 씨 눈치 보느라 못 쉬고 있잖아요. 다음 주에 바로 시카고로 가요. 그럼 직원들도 좀 쉴 수 있을 거예요.”
“…….”
하긴 당장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은 신성의 라인을 빌리는 것 정도다. 핸드 터미널이 뭔지 궁금해서라도 덥석 물 것이 당연하니, 권 부장이 협의해도 충분할 거다.
“아! 그리고 미팅 전에 하루 정도는 비워 두세요.”
“으응? 왜?”
“미국에 불청객이 한 명 날아들 것 같으니 미팅 전에 미리 만나 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불청객? 누구?”
“미우라!”
“미우라… 히타치의 히로아키 말인가?”
“네. 어찌 냄새를 맡았는지 투자 미팅에 참석하겠다고 하네요. 수한 씨가 솔깃해할 뭔가를 준비했다면서 말이죠. 일부 물주와 끈이 닿아 있었나 봐요.”
우리 회사 장비만 셋업하고 잠잠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더니, 내가 솔깃할 뭔가를 준비했다고?
“파라곤이 아니고 내가 솔깃해? 뭘 준비했는데?”
“저도 모르죠. 나도 그냥 몇 다리 건너 전해 들었으니까. 수한 씨가 미리 만나 보는 게 좋지 싶네요. 변수가 될 것 같으면 보이콧을 해야죠.”
“자리 주선해 줘. 만나 볼게.”
“좋아요. 미국에 먼저 가서 놀고 있어요. 저도 후딱 갈 테니 시카고에서 봐요.”
케이도 마음이 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케이! 잠깐….”
“에? 왜요?”
“재훈이 주소부터 좀 알려 줘.”
“에? 주소도 몰라요?”
“그러게. 그러고 보니 영 신경을 못 썼네.”
“절친이라면서 연락도 한 번 안 했어요?”
할 말이 없었다. 친구를 꼬드겨 외국까지 보내 놓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전혀 챙기질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식구들도 못 챙겼구나. 생활비 보내 드리는 게 전부가 아닌데 말이다.
‘오늘 저녁엔 부모님 댁에 들러 봐야겠네. 소고기나 사 갈까? 아니면 노량진에 들러서 회나 좀 사 갈까?’
끄적끄적.
내가 머릿속으로 야식 메뉴를 정하고 있자니, 케이가 시카고 35번가로 시작하는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쑥 내민다.
“35번가 화이트삭스 야구장 너머로는 될 수 있으면 가지 말아요. 그쪽 동네는 치안이 좀 불안하니까. 알았죠?”
“알았어. 이 비서도 대동할 거니까 걱정 마.”
“너무 비싼 차도 빌리지 말고요.”
“알아, 난 아시안인 거.”
“꼭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그런 뜻 아닌 것도 알아.”
“…….”
21세기 사람이 그런 치졸한 인종차별에 심정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21세기엔 한국인이 나름 대접받는다고 하면 케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여하튼 낑낑대며 컴퓨터를 옮겨 가는 케이를 도와주고, 이 비서를 불러 미국 출장도 준비시키고, 부장들을 불러 OEM 계약도 논의하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다음 주부터 2주간 풀로 출장을 간다고 했더니, 부장들의 얼굴에서부터 시작해 사무실 전역으로 훈훈한 기운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하긴 회사 생활에 성과가 전부일 수 있겠나.
나도 내친김에 칼퇴근하고 노량진에 들러 모둠회를 몇 접시 사서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 *
-3월 24일로 예정된 총선에 여야 모두… 대현그룹이라는 재벌이 정당을 꾸미는 것이 과연 법적으로 허용이 될 수 있냐 여부는… TK가 이번 총선에 핵심 쟁점 지역으로 부상하는 와중에 여당에서는….
TV에서는 연신 선거 때문에 난리 법석이었다. 정 회장과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피난처 삼아 본가로 왔더니 뉴스마저 온통 그 얘기다.
먹고살기 바쁜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어째서 정치가 이렇게 혼란한가 싶을 정도다.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은 정치가가 아니라 나라를 망치는 선동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꼴도 보기 싫다.
“왕회장님이 선거 나온다카대. 당도 하나 만들어가꼬.”
“예, 그런다카대예. 아버지는 통민당 찍으실 겁니꺼?”
“뭐, 그래야 안 되겠나. 니도 한때 대현에서 월급 받아 묵기도 했고, 재벌 중에 자수성가한 분 아니가. 고향이 북한이니까 지역감정도 줄일 수 있으무 더 좋고.”
“왕회장님이 대선까지 나오면 그때도 찍으실 겁니꺼?”
“뭐, 설마 대선 출마까지 하겠나, 그 양반 나이도 있는데. 벌어질 일도 아닌데 고만하고 술이나 묵자.”
“예, 아버지.”
휙 하니 말을 돌려 버리는 아버지. 이게 일반적인 국민들의 정서다. 총선까지는 표를 주지만 대선에는 돌아선다.
재벌에게 정부를 견제하는 권력 정도는 줘도 괜찮지만, 절대적인 권력까지 몰아주는 것은 너무나 큰 도박이라 생각한다. 신성이 언론사 하나를 가지고 있는 정도가 국민들이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인 거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기업은 은행도 가지지 못한다. 하물며 대통령이야.
“쩝쩝, 역시 행님 오니까 푸짐하네! 다음에 오므 아나구 회 좀 사 온나. 서울에선 못 무 봤다.”
“알았다. 오늘은 광어나 무라. 그래야 키가 쑥쑥 크지. 이거 자연산이데이.”
“내 다 컸다. 행님보다 키도 큰데. 쩝쩝.”
“하하. 다음에 올 때는 전복도 사 오꾸마. 키 한번 왕창 커 봐라.”
재미없는 정치 얘기 대신 잡담이 오가기 시작한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동생인데, 벌써 나보다 키가 크다. 한창 클 때 팍팍 먹어 줘야 한다.
“키만 커가 뭐하노. 남자는 돈을 벌어야 어른이 되는기라. 니는 졸업부터 생각해야제.”
“동생 걱정하지 말고 니나 많이 무라. 빼짝 곯아가 뼈밖에 안 남았네.”
“무슨 내가 뼈밖에 안 남았습니꺼. 다 이거 근육이라예.”
아버지는 소주잔을 기울이고, 어머니는 연신 내 팔뚝을 안쓰러워하며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 준다. 내 팔뚝 굵은데.
이상하게 집에만 오면 사투리가 나오고, 의도치 않게 밖에서 생고생하는 큰아들 취급을 받는다.
다들 모여 앉아 횟감을 늘어놓고 매운탕까지 먹으니 참으로 맛나다. 근사한 식탁이 아니라 밥상에 둘러앉아 먹는 게 역시 제맛이다.
한데 잡담하느라 식사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누나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눈은 TV로 향하고 손은 연신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그러고 보니 벌써 8시가 넘었다.
“아 맞다. 누나! TV 안 돌리고 뭐하노. ‘사랑이 뭐길래’ 하는 시간 아니가?”
“맞다. 수한이 니도 그거 보나?”
“당연하지. 얼른 채널 돌리봐라. 내 숨넘어가겠다.”
피빅. 피빅.
누나가 배시시 웃으며 채널을 돌렸고, 소파 위로 휙 하니 올라가더니 금세 열혈 시청자 모드로 들어간다. 동생은 여주인공이 등장하자 눈빛이 달라진다.
“하희라 진짜 이쁘데이. 그자, 행님아.”
“응, 글치. 이쁘지. 신붓감으로 최고지.”
하희라를 보고 있자면 내 미래의 마누라 희연이 얼굴이 그려진다.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나도 모르게 신붓감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다. 너무 대차다. 여자는 자고로 다소곳해야지. 대발이가 잘 교육시키고 있다 아이가.”
“엄마, 요즘 그런 소리 하면 며느리 시집살이시킨다는 소리 듣는다. 그라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되노, 니는 시집가가 사돈댁에 저리 감 놔라 배 놔라 하믄 안 돼. 알았제?”
“아고, 마 됐다.”
21세기 인간인 내 눈에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는 코믹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진다. 고지식한 1970~1980년대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1990년대 신식 문화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지만, 그 신식 문화조차 내 눈에는 무척 어설퍼 보였기 때문이다.
남동생은 소파에 기대앉았고, 집안의 여자들은 모두 소파 위에 포개졌으며, 아버지와 나는 횟감만 작은 상에 얹어 TV 화면 밖으로 나왔다. 자연스레 둘만 거실의 창가 쪽으로 치우쳐 소주잔을 나누게 되었다. 창가에서 새어 들어오는 외풍이 외려 청량하게 느껴진다.
“수한아, 새로 하는 일은 괜찮나?”
“잘됩니더. 걱정 마이소.”
“잘나가는 대현에서 왜 나와 가지고 고생이고. 집에도 잘 못 들어오고.”
아버지 입장에선 대기업에서 월급 따박따박 받는 게 더 낫다고 여기나 보다. 하긴 내가 크게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 믿지 않으실 거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걱정만 많아질 거다. 줄곧 망하는 회사만 봐 온 데다 사업하는 친구에게 사기까지 당하셨으니.
“고생이랄 게 뭐 있습니꺼? 젊을 때 돈 벌어야지예.”
“돈 더 안 보내도 된다. 가게도 잘되고, 알라들 봐 주는 것도 솔솔찮이 돈 된다 아이가.”
내가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 주는 걸 엄청 무리하고 있다고 여기시나 보다. 내가 끌고 온 차가 얼마나 비싼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신다. 그냥 때깔 좋은 검은색 승용차라 여길 뿐이다.
공장에 취직하시겠다는 아버지를 극구 만류하고 구멍가게를 하나 차려 드렸더니 텃밭에서 키운 채소까지 팔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지금 맛보고 있는 깻잎도 직접 텃밭 하우스에서 키웠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럭저럭 수서에 터를 잡은 것도 가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유치원에 다니는 큰누나의 수완이 괜찮아서 어린 애들을 저녁까지 봐 주며 용돈을 벌고 있다는 거다. 물론 어머니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1990년대 맞벌이가 늘어난 세태가 내 집안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근데 여기 괜찮습니꺼? 저 앞에 벌써 포크레인 왔다 갔다 하던데예.”
“사실은 이 집 팔맀따. 쪼매 아쉽기는 하다마는 눌러앉으므 아파트를 못 짓는다카이 별수 있나.”
“아이고, 가게 아까버서 우얍니꺼.”
“뭐, 우얄기고. 대신 텃밭 넓은 데로 옮겨 가가 다시 차리면 되지. 니는 걱정할 거 없다.”
“어디 가실라꼬예?”
“여보, 그 어디라캤노?”
“판교! 말 시키지 마소. 지금 중요한 순간이다.”
대뜸 소파에서 날아오는 어머니의 말이 따갑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인가 보다. 여주가 울고 있잖나.
아버지가 찔끔하며 소주잔을 들었지만 나는 깜짝 놀랐다.
“들었제. 판교란다.”
“판교예?”
나는 솔직히 아버지에게 드디어 재운이 따르나 싶을 정도였다. 수서로 이사를 시켰더니 이젠 판교로 간단다.
“걱정 마라. 내 같이 둘러봤는데 텃밭도 넓고 좋더라. 사람들은 좀 있는데 구멍가게도 없으스 장사해 볼 만하겠드라. 봐 줄 얼라들이 별로 없긴 하던데 뭐, 우얄기고. 내 기술은 이제 쓸모없어졌으이 농사나 지어야지.”
내가 살짝 놀라자 아버지는 걱정 말라는 듯 말을 길게 늘어놨다. 농사를 언급하는 걸 보니 텃밭이라고 하기엔 무척 넓은 땅을 산 게 분명하다.
“농지를 샀습니꺼? 얼마나 큰데예?”
“얼마 안 크다. 텃밭이다. 우리 식구 채소 걱정은 안 해도 될기다.”
“잘하셨습니더. 아, 근데 혹시 그린벨트 묶인 거 아입니꺼?”
“아이다, 내가 바보가? 다 알아봤다. 텃밭 다음부터가 그린벨트라! 집 앞에 조르륵 나가므 톨게이트도 있다 아이가. 니도 차 몰고 오기 괜찮을기라.”
‘대박! 대박! 대박!’
아버지 재운 미쳤다. 완전히 알짜배기 땅을 샀어!
애기 봐 주는 알바를 못 하는 걸 벌충한다고 농사꾼으로 전업하셨네. 내가 한 번이라도 더 집에 들르게끔 톨게이트 근처에서 적당한 땅을 골라낸 거다.
내 알량한 도덕심과 돈이 묶인다는 이유로 부동산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알아서 대박 부동산을 선점했다. 10년만, 넉넉잡아 15년만 지나면 그 땅은 지금 가격 대비 수십 배는 뛰어오를 거다.
“잘하셨네예. 배추랑 무도 키아 보이소. 김장값도 아끼고 좋겠십니더.”
“허허허, 니가 그리 말해 주니 내도 좋네!”
나는 애써 숨을 고르고 말을 뱉었다. 내가 부동산 투기를 조장한 것도 아니니 마음에 걸리는 일도 없고, 공기 좋은 판교에서 강아지 키우고 농사짓다 보면 노년엔 편안하고 럭셔리한 아파트에 사시겠지 싶다.
2월인데 새어 들어오는 외풍이 벌써부터 훈훈하게 느껴진다. 광어회에 한잔하는 소주가 이리 맛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축하해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 몰래 소주잔을 살짝 들어 혼잣말로 대박 난 걸 축하해 주었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