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전자가 아니면 내 회사라도 이용해 히타치 반도체의 껍질을 한국산으로 바꾸고 싶은 거다. 웨이퍼를 팔아서 껍데기만 조립하게 하고 일본으로 수입해 전자 제품을 만들고 싶은 거다. 관세의 대상은 반도체를 최종적으로 누가 만들었느냐에 있으니까.
그럼 히타치는 웨이퍼에 후공정 장비까지 팔게 되니, 한마디로 ‘꿩 먹고 알 먹기’다.
문제는 비싼 일제 웨이퍼를 군말 없이 사다 쓰는 한국 기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회사로 쓰고 일본 회사라고 읽는 그런 회사 말이다.
‘꿈 깨시라, 히로아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한테만큼은 이용당하지 않아. 아마 영원히 그럴 거야. 나도 그래.’
외국물 좀 먹은 히로아키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동남아시아 우회 전략이 유독 한국에선 잘 안 통하는 걸까? 하면서 말이다.
히로아키 정도의 세대만 되어도 한일 관계에 대한 역사 인식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1980년대 일본은 교육 과정에서 철저하다시피 근대사를 외면했다.
“설마요. 제가 그런 계산을 가지고 접근했겠습니까? 순수하게 반도체 사업을 줄이고 장비 산업으로 넘어가는 수순이죠.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절반만 사실이다. 원래 역사에서 히로아키는 반도체를 접고 건설과 에너지 사업에 올인한다.
물론 그건 10년 뒤에나 그렇고, 지금의 히로아키로선 히타치 반도체를 연착륙시킬 방법이 있어야 한다.
솔직히 한국에 진출하는 이유는 뻔한데, 그 타깃을 대현전자에서 나로 바꾼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난 객관적으로 이 바닥에서 애송이나 다름없잖나.
“상황은 그렇죠. 일본이나 한국이나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미일 반도체 협정 때문에 무슨 수를 내긴 해야 하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나죠? 난 아직 일을 시작도 안 했는데? 유령 회사 따위는 히타치라면 수십 개를 만들고도 남을 텐데.”
“에이, 유령 회사는 요즘 미국 애들도 잘 안 속아요. 퀄컴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이런 연극은 안 해도 되는데…. 아이참, 창피하네요.”
재벌 총수 아들답게 무척 솔직한 답변이다. 곧이곧대로 믿기는 그렇지만 논리에 허점이 없다. 퀄컴은 미국 회사니까, 퀄컴 지분을 가진 회사면 미국 애들도 딴죽 걸기가 좀 어렵다.
미국 애들이 벤처 회사를 압박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벤처 기업은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미국 정신을 대변하는 데다 작은 벤처 회사가 정부의 압박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고 주장하면서 배심원한테 읍소하면 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이라 해도 승률이 8할 이상이다.
“그런 식으로 가신들을 설득했나 보군요. 하하! 믿긴 하던가요?”
장비를 헐값에 파는 대가로 히타치에 찰싹 달라붙을 회사를 가져오겠다, 라고 했겠지.
하나 나를 조사해 봤다면 내가 그런 계약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히타치 케미컬의 실질적인 주인이며, 퀄컴의 대주주다. 푼돈 좀 벌겠다고 남 좋은 일에 끼어들 이유는 전혀 없다.
“대부분 좋아하죠. 내가 뻘짓하는 거니까. 올해는 이왕 적자니까 물건 더 풀라고 하는 놈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리 살아요. 후후후.”
“……!”
반대파에서 히로아키가 적자 내는 걸 즐기는 거다. 사내 정치의 폐단이다. 로열패밀리끼리 싸움이 붙으면 회삿돈을 까먹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적을 쳐 내려고 하거든.
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싸우든지 말든지. 아니, 오히려 대환영이다.
“대규모 적자는 내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니 바보짓을 조금만 더 해 보려고요.”
“으음.”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다. 대규모 적자를 의도하고 있다고?
“일본은 너무 늙어 버렸어요. 전문 경영인이라는 작자들이 미래는커녕 눈앞의 것도 못 본다니까요. 미국하고 싸워 봐야 이길 것 같나요? 결국 밥줄 끊는 일에 직원들을 내몰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밤샘해서 일한다고 나에게 자랑을 해요. 하하!”
다시 말이 좀 많아졌다. 이게 연기가 아니라 원래 성격인가도 싶다.
“적자 보는 사업은 내 관심 밖인데 말입니다.”
“에이, 왜 이러십니까? 손뼉 딱딱 마주치면 고의 부도로 크게 한탕 당길 수 있으실 텐데. 뒤에 계시는 미국 분들도 좋아라 하실걸요.”
흐흠! 이 양반, 내 뒷배에 더 큰 물주들이 있다고 여기고 있네.
옆에 있던 케이가 살짝 웃음을 머금다가 금세 표정을 달리한다. 고의 부도라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직원들에게 부도는 아주 큰 일이지만 사장에겐 고의 부도가 양날의 검이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의 경우 질질 끌며 말라죽을 바에는 한 큐에 부도를 내는 것이 낫다. 그래야 연쇄 부도를 막을 수 있다.
“고의 부도라. 그룹 회장도 아닌데 너무 나가는 거 아닙니까?”
“유 사장님도 아시면서 그래요. 히타치 반도체는 가능성이 없어요. 이참에 껍데기는 그냥 벗어 버리고 제대로 된 것들만 챙겨서 따로 가야죠. 그러고 보니 히타치 케미컬이 너무 아깝네. 아이, 그건 건져 올렸어야 했는데. 아깝다!”
“그 정도 일이라면 임원들을 모아 놓고 대계를 논하셔야지, 나 같은 외국인을 앞에 두고 할 얘기는 아닌데 말입니다.”
“쩝! 그러고 싶은데, 내가 아직 애송이라 힘이 없어요. 아버님은 저승사자를 앞에 두고 오늘내일하시고. 밖에서 손뼉을 쳐 주는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죠. 뭘 살려서 나가면 될지 알려 줄 미국 분들도 필요하고. 후후후.”
히로아키 이 양반, 묘하게 이희건 신성 회장의 젊은 시절과 닮았다.
이희건 회장도 1993년에 이와 비슷한 결단을 내렸다. 그룹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위기를 탈출하고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하는데, 각 사업체들의 수장급 임원들은 문어발처럼 확장이 답이라 여기고 힘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장과 임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업무를 아예 전폐시킨 다음, 경쟁력 없는 사업은 접거나 계열 분리를 시켜 버렸다.
‘신성은 이제 양 위주의 사업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은 무척이나 유명하다.
문제는 신성의 이희건 회장은 그룹의 나아갈 바가 신성전자에 있다고 확신했지만, 히로아키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버릴 것은 히타치 반도체인데, 가지고 나갈 게 뭔지 모른다는 거네.
일본의 대재벌은 한국의 재벌보다 몇 배는 큰 문어다. 수십 년 뒤 건설과 에너지 사업으로 올인하는 히로아키의 결정은 이때부터 시작된 거로군.
“호호호! 적대적 M&A로 크게 한 방 먹고, 그 돈으로 그룹의 알짜배기에 올인해서 왕좌를 차지하시겠다? 그 와중에 반대파도 쓸어 내고자 하는데 좀 도와주겠나? 그거예요?”
케이가 옆에서 거들고 나선다. 정리 잘하네. 역시 똑똑한 여자다.
“예, 그렇죠. 소리 소문 없이 스미토모를 엿 먹인 거나, 히타치 케미컬을 단박에 꿀꺽하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주분들도 충분해 보이시던데.”
“정당한 주식 거래였을 뿐이에요. 깊게 들어오지 마요. 꼬리는 언제든지 잘라 낼 수 있으니까.”
“오! 노, 노! 깊게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아주 우연찮게 알았을 뿐입니다.”
주식 거래까지 언급하는 걸 보니 꺼낼 만한 카드는 모두 꺼냈나 보다.
결국 시점은 조금 빨라졌지만 내가 알고 있는 원래 역사와 무척 비슷하다.
히타치 반도체는 1999년 일본 1위의 전자 회사인 NEC를 끌어들여 적대적 M&A에 가까운 합병을 단행하면서 엘피다라는 회사명으로 히타치의 이름을 지워 버린다. 실상 고의 부도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분 6%에 불과했던 NEC에 회사를 통째로 넘긴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뒤로 엘피다는 중국 기업을 포함해 온갖 군데에서 자금을 끌어대서 덩치만 잔뜩 키우다가 법정 관리까지 간다. 최종적으론 2012년에 세계 3위 반도체 회사인 미국 마이크론에 25억 달러를 받고 팔아 치운다.
10년 넘도록 껍데기만 있는 회사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돈을 쪽쪽 빨아먹었는데, 결국 그 판에서 가장 큰 돈을 챙긴 이는 다름 아닌 히타치 그룹이었다.
그 시작을 나와 함께하시겠다? 내 뒤에 있는 물주가 든든해 보인다? 뭐, 그런 건가.
우습다. 케이가 끌어온 자금은 투기 자본에 가까운 돈인데 말이다. 솔직히 내가 낚시를 하고 있는지 히로아키가 낚시를 하고 있는지 구별이 어렵다.
이 복마전에서 잘만 하면 내가 반도체 후(後)공정 뿐 아니라, 전(前)공정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욕심이 난다.
“하하! 오늘만 날이 아니죠. 얘기는 이쯤 하죠.”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해야 제맛인데. 큭!”
“일단 장비 입고나 챙겨 주시죠. 오늘 들은 얘기는 심사숙고해 보죠. 미국 분들에게 관심 있는지 물어볼 시간도 필요하고.”
나는 짐짓 블러핑을 쳐 봤다. 내가 미쳤다고 미국 애들을 끌어들이나. 먹으려면 내가 먹든가, 아니면 10년 동안 부평초처럼 떠돌다 망하게 내버려 둬야 한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나비효과가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반도체 사업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나의 가장 큰 무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으으윽! 저도 어깨가 다 뻐근하네요. 이만 퇴근해야겠네요. 커피 잘 마셨습니다. 내일 뵙죠. 히로아키가 아니라 미우라로 다시 오겠습니다. 후후.”
히로아키는 기지개를 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연기자로 되돌아간 듯 1층에 다다라서는 김 대리에게 악수까지 하고 사라졌다.
“수한 씨, 조심하셔야 해요. 지금 우리 자본으로는 너무 큰 건이에요.”
“맞는 말이야. 그런데 조금 아깝긴 해.”
“아까워도 어쩔 수 없죠. 썩어도 준치라고, 히타치 반도체는 한 해 매출만 20억 불이 넘어요.”
“그건 작년 기준이지. 2년만 지나 봐, 매출이 반 토막 난다고.”
“그럼 그때 노리든지요.”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긴 한데 말이야….”
2년 후부터는 일본 반도체 업계가 엘피다로 통칭되는 회사로 본격적인 합종연횡을 시작한다. 역시 돈이 문제야. 돈만 더 있으면 이거 기회인데 말이다.
히로아키가 유령 회사를 만들면 조금씩 파고들어 갈 요량이었는데, 고의 부도를 노린다면 너무 덩치가 크다. 한 방에 부도를 막으며 집어삼킬 것이 아니라면.
에이, 퇴근이나 하자.
- *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건배!”
“건배!”
쨍!
꿀꺽꿀꺽, 캬아아아!
다들 노가다를 마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니 꽤나 상쾌한 모양이다.
제대로 된 음식점이 없는 촌구석이라 구멍가게 앞에 평상을 펴 놓고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가게 아주머니는 연신 연탄불을 붙이면서도 싱글벙글한다. 오늘 삼겹살 파티로 매출이 수십만 원은 나올 테니 말이다.
“송 대리, 텔레비전 채널 좀 돌려 봐. 다른 데 뭐 하나.”
“에이, 지금 시간에 다 뉴스지, 뭐. 기다려. 좀 있으면 스포츠 뉴스 한다.”
평상에 걸터앉아 연신 술잔을 비워 대는 이들. 한쪽 구석에는 연탄불에 삼겹살을 구워 가며 떠들어 대는 사람들. 평상 위로 가지를 늘어뜨린 정자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백열전구. 한껏 떠들어도 항의할 이웃 따윈 없다. 기껏해야 구멍가게 주인집밖에 없는데, 뭘.
‘이번 기회에 대현과 신성을 연합해서 히타치 반도체를 합병… 아니야, 그게 가능하겠냐? 재벌들은 절대 밥그릇을 나누지 않아. 다른 건 몰라도 전 공정 1개 라인만 가져올 수 있으면 Flash 메모리를 단박에 뽑아낼 수 있는데. 그럼 내 목표를 3년은 앞당길 수 있고. 3억 불만 있으면 알짜배기만 쏙 뽑아서 가져올 텐데. 정말 아깝단 말이야.’
나는 맥주잔을 연신 비워 댔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케이에게 부탁해 볼 수도 있지만 단기 투기 자금은 결국 독배다.
이번엔 다행히도 물주들이 지분을 가지겠다고 했기에 부작용 없이 잘 넘어갔지만, 한번 삐끗해서 물주들이 ‘이자는 포기할 테니 원금을 빼겠소!’라고 하는 순간 유동자금이 단박에 말라 버린다.
맥주잔을 내려놓으니 구멍가게 입구에 내다 놓은 TV에서 뉴스가 들려온다. 스포츠 뉴스를 기다리며 누군가 볼륨을 크게 키웠나 보다.
-이번엔 국제 뉴스입니다. 최근 독일 정부가 나토(NATO, 북대서양 군사 동맹)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를 모시고 국제 정세와 함께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지 말씀을 듣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고독경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고독경입니다.
-독일이 군사 동맹까지 언급하며 미국을 압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후 사정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표면적으론 독일이 소련의 붕괴로 군사 동맹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속내는 경제적 제재를 피하기 위한 제스처라고 하겠습니다.
-군사 문제가 아니라 경제 문제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현재 독일은 이제 서독이 아니라 통독이지 않습니까? 통일 비용이 천문학적인 수준이죠. 독일은 통화 가치 하락을 우려해 고금리 정책을 고집하고 있는데, 미국은 환율 조작이라며 독일 정부를 압박해 왔지요. 이에 독일이 나토까지 언급하며 미국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라고 보시면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 문제가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독일의 마르크화는 기축 통화에 가깝기 때문에 결국 달러가….
툭.
나는 마시고 있던 맥주잔을 평상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회사 설립, 핸드 터미널 개발, 히타치… 이따위 것만 생각하다가 곧이어 벌어질 대박 찬스를 까먹고 있었다.
지금은 1990년대 초반. 전 세계 경제가 이리저리 요동치던 때다. 널린 게 돈이며,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투기판이 등장하는 때가 아니던가. 반도체 라인 하나 당겨 올 돈이 왜 없겠나?
바로 눈앞에 있다.
- *
“아주머니, 이거 회식비입니다. 사람들이 이보다 더 먹으면 외상 달아놔 주세요. 내일 갚아 드릴게요.”
“이거면 모자라진 않을 것 같은데. 여하튼 조개 넣고 라면 끓일 건데 해장하고 가지 그래요?”
“하하! 저는 활명수 한 병이면 족합니다.”
나는 은근슬쩍 가게 주인에게 회식비를 찔러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활명수 하나로 술기운을 날리고 기억을 적어 뒀던 노트를 뒤적거려 보았다.
아쉽게도 회귀 직후의 기억에도 영국발 유럽 환투기 사태에 대한 정확한 날짜는 없었다. 분명 이쯤이긴 한데 말이다.
신문을 뒤적거려 보았는데, 독일이 금리를 올린 횟수가 대략 여섯 번인 것 같다. 좀 이른가?
아니다. 시간이 원래 역사보다 조금 빨라도 상관없다. 어찌 되었든 외환 거래의 리스크는 미국 투기꾼 연합이 가져갈 테니까, 나는 그 등에 올라타 한발 빠르게 조금 덜 먹고 안전하게 튀면 된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노트를 최대한 채워 보았다.
유럽 환투기 사태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면서 쓰레기나 다름없는 동독 화폐를 마르크화로 1:1 교환을 해 준 것부터 시작되었다. 20년 뒤에나 2,000조 이상의 통일 비용이 쓰였다고 계산되었을 만큼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내한 것이다.
문제는 독일 정부가 독일스럽게 마르크화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과도할 정도로 우려했다는 것이다.
독일 중앙은행은 인플레를 막기 위해 통일 후 연거푸 금리를 수차례 인상하는 초고금리 정책을 취했다.
초고금리 정책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독일의 소비자물가는 연간 3%도 채 오르지 않았고, 금리가 좋은 독일 은행에 유럽 전역에서 돈이 몰려들기까지 했다. 유럽의 물주들은 서독의 경제 기반이 튼튼하다고 확신한 거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투기 세력이 있었다. 다름 아닌 미국 소로스 형님이었다.
독일이 자국의 마르크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확고한 데다 유럽 연합이 1999년까지 유로화로 단일 통화권을 구축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투기장이 오픈되었음을 깨달았던 거다.
투기꾼 끝판왕답게 유로화에 동의한 유럽 회원국들이 맺은 준(準)고정환율제, 즉 ERM이 위기에 봉착할 것을 알아챘다.
예컨대 독일 마르크화와 영국 파운드화는 상하 6%라는 변동 폭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만약 이 변동 폭을 벗어날 정도로 환율이 요동치면 유럽 회원국들은 외환 시장에 개입해 인위적으로 변동 폭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ERM의 맹주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이 마르크화의 고공 행진을 부추기고 있잖은가?
그럼 다른 나라는 어찌해야 하겠나? 당연히 같이 금리를 올려야 한다.
금리를 올리면 어찌 되나? 독일처럼 구(舊) 동독인들이 소비재를 폭발적으로 소비하고 값싼 노동력까지 제공하는 것도 아니기에, 기업 사장들은 폭등하는 이자를 견딜 수가 없다. 당연히 구조조정을 하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쌓이기 시작하는 거다.
원래 역사에선 재정이 건실했던 북유럽 국가가 먼저 ERM에서 탈퇴하며 단기 금리를 수백 %까지 올려 가며 외환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데 안간힘을 썼고, 어리바리한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화폐 가치가 대폭락을 하며 그냥 나자빠져 버렸다.
영국은 끝까지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영국이 왜 ERM 탈퇴를 선언하지 않고, 끝까지 마르크화와 연동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국은 1999년에 실행하기로 한 유로화 화폐 통합에서 한탕 크게 먹을 생각으로 베팅을 했다.
유로화 통합은 말 그대로 다양한 유럽 화폐들이 일시에 평균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다.
즉, 의도적으로 환투기를 할 필요도 없이 높은 가치의 돈을 가진 국가는 많은 유로화를, 낮은 가치의 화폐를 가진 국가는 적은 유로화를 가지게 되는 거다.
일견 당연한 듯한 유로화 배분이지만, 평준화된 화폐 가치 때문에 국가 수출 경쟁력은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생각해 보라. 강력한 마르크화를 들고 있던 독일은 유로화의 최대 지분을 가짐과 동시에 독일 물건을 수입하는 나라가 봤을 때는 물건 값이 하루아침에 수십 % 하락한 거다.
유로존 형성 직후부터 독일이 연 5% 이상의 경제 성장을 했고,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남부 유럽 국가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하겠다.
십수 년 뒤 2008년에 그리스가 경제 위기에 처했을 때 독일에게 당당하게 돈 좀 보태 달라고 생떼를 부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하튼 이런 배경 때문에 영국 정부는 1990년대 초기의 고금리 전쟁을 견뎌 내기만 하면 유로화 통합 때 국가 경쟁력이 급속도로 개선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ERM을 유지하겠다며 당당히 선언했다.
미국의 투기 세력들은 ‘아닌데! 영국 파운드화는 언젠간 폭락할 텐데 너희는 독일처럼 경제 기반이 튼튼하지 않잖아!’라고 히죽이며 영국 중앙은행에 대대적인 외환 공격을 퍼붓는다.
달러를 담보로 걸고 마르크화를 사고 파운드화를 팔고. 그 증서를 이용해 또 달러를 빌리고, 마르크화를 사고 파운드화를 팔고. 그 물레방아 돌리기를 몇 번이고 해 댔다.
전 세계 환투기꾼이 모두 참여했고 결국 영국이 견디다 못해 ERM에서 탈퇴하며 항복 선언을 했다.
공격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안 했는데, 외환 시장에 퍼부은 돈이 천억 달러에 육박했다. 공매도가 대부분이었다곤 하지만 영국 정부가 막아 낼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결국 하루아침에 파운드화는 30% 이상 대폭락을 했고, 외환 시장에 개입했던 영국 중앙은행은 우리나라 돈으로 수조 원에 가까운 순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세간에 알려지기로 소로스는 그 한 방으로 2조를 벌었다고 했으니 역대 가장 성공한 환투기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 뒤다. 해 본 놈이 잘한다고 그 뒤로 아시아에서도 비슷하게 한탕 치는데, 그 불똥이 역대급으로 커져서 우리나라는 IMF 사태라는 초유의 금융 위기를 겪는다. 내가 해당 사건을 이리도 잘 기억하는 이유기도 하다.
문제는 이 한탕을 하기 위해선 물주가 필요하다는 거다. 케이를 통해 미국 물주를 끌어당기기에는 위험하다. 결국 일이 벌어지면 내게 빌려 준 돈을 빼서 소로스에게 넘길 가능성이 높다. 투기꾼 자본은 거기서 거기니까 나보단 소로스를 택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일본 돈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자칫해서 일본 반도체 업계의 생명이 조금 길어져 버리면 중국발 경제 성장 시기에 기사회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큰 그림이 망가질 가능성이 크다.
대현도 아니다. 지금 유동 자금은 소련 차관 쪽으로 쪼옥 빨려 나갔고 반도체 덤핑 치느라 바쁘잖나. 정 회장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고.
역시 신성밖에 없나? 원래 역사에선 올해 말에 공장 증설에 4,500억을 쏟아붓는다. 그중 3,000억 정도 빌리고, 내 현금 400억에 주식 담보로 2,000억 정도 당기고… 도합 5,400억 정도면 환율을 800원만 잡아도 수익률 50%면 대략 3억 불은 건질 수 있다.
털컥.
나는 서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이희건 회장의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중 한 장을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 *
분당 서현동.
「버지니아 트레이딩」
평소에는 잘도 놀러 오더니 찾을 때는 꼭 안 나타난다.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하는 일이기에 직접 찾아왔다.
삐익, 삐익.
언제나 그렇듯 초인종을 열 번 정도 눌러 줘야 나타… 어라?
“어서 오십시오. 버니지아 트레이딩입니다.”
“에? 아, 네. 사장님 계십니까?”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예약 테이블을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여직원이 예약을 확인해 주겠다며 프런트로 향한다. 예약 안 했는데. 그리고 이런 페이퍼컴퍼니에 가까운 회사에 손님이 있긴 하나?
다행히 케이가 어디선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아! 지윤 씨, 됐어요. 유 사장님이세요. 인사드려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지윤이라고 합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으로 와요, 수한 씨. 미리 연락하고 오지 그랬어요.”
나는 분위기가 확 바뀐 사무실을 지나 케이를 따라 사장실이라고 적힌 곳으로 들어갔다.
큐브 형태로 칸막이가 되어 있어 직원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스무 명은 될 것 같았다.
“커피?”
“좋지. 그런데 직원은 언제 뽑았어?”
“수한 씨가 뽑으라고 했을 때부터요. 돈이 좀 들긴 했는데, 역시 혼자 하는 것보단 훨씬 낫더라고요.”
그래? 어쩐지 내게 좀 호의적으로 변했더라. 직원들 밥그릇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나처럼 일을 주는 사람이 더 고맙게 느껴지지.
“대충 스무 명은 될 것 같은데, 많이도 뽑았네.”
“아휴, 수한 씨가 시킨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대현 쪽에서 베이비 벨 쪽으로 휴대폰 수출이 시작되어서 그것만 처리하는 사람이 셋이에요. 그것뿐이에요? 퀄컴 쪽으로 들어오는 로열티 챙겨야 하고, 히타치 케미컬 주총도 준비해야 한다고요. 미야자키를 사장으로 만들라면서요? 아! 한국 지사를 세우는 것도 여론몰이부터 하려면 장난 아니라고요. 또 뭐 있었지? 맞다! 스미토모 주식도 최장 6개월이라고 했으니 두 달 내에 정리해야 하고. 모든 게 외환 거래가 끼어 있고, 타이밍 싸움이라 혼자서는 못 해 먹겠더라고요.”
“이 비서가 일본 쪽 셋업하면 휴대폰 반제품 장사도 좀 챙겨 줘.”
“에휴, 말만 하면 일이군요. 알았어요.”
“수수료는 매출의 0.3프로가 넘으면 안 돼. 알지?”
“…한 번만 더 들으면 스무 번째예요. 그만 말해도 돼요.”
수수료 퍼센티지가 마음에 안 드는지 말할 때마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내가 뿌리는 정보로 따로 떨어지는 콩고물이 엄청나니 안 하겠다고는 안 한다.
쪼로록.
“고마워. 이야, 커피도 맛있어졌네.”
“직원들도 대부분 카페인 중독자라 사원 복지 차원에서 바꿨어요. 여하튼 무슨 일이에요? 내일이면 내가 용인에 놀러 갔을 텐데. 급한 일이면 전화를 해도 되고요.”
“전화로 얘기할 게 아니라서 말이야.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
“으흠, 동업자끼리 전화로 못 할 말이 뭐가 있어요.”
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주에 대해 물으려고. 미국에 있는 물주가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
“에에? 그건 안 돼요. 로비스트가 절대 함구해야 하는 일이라고요.”
이처럼 거절할 것이 뻔해서 직접 찾아온 거다.
케이가 제 입으로 로비스트라고 말할 정도의 일이다. 엄밀히 따져서 세상에 유동자금이라는 게 어디 있겠나?
돈은 언제나 정당한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고, 큰돈일수록 채권처럼 안전한 곳에 머무는 법이다. 주식 공매도나 투기판 같은 단타 싸움에 올라오는 돈은 그 쓰임새에서 잠시 벗어났다는 의미다.
즉, 그걸 용인한 물주도 누군가의 돈을 대신 굴려 주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 물주가 위험한 도박에 돈을 걸었다는 정보가 새어 나가면 로비스트는 다신 그 물주로부터 돈을 빌리지 못한다.
“그래서 직접 온 거야. 큰 판을 논의하기 전에 이 판에 낄 수 있는 양반인지 알아야 해.”
“오오, 큰 판?”
“물주가 월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양반이라면 이번 정보는 알려 줄 수 없어. 케이 당신도 빠져야 해. 내가 직접 핸들링할 거야.”
내가 짐짓 표정을 다잡자 케이가 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직접 일 처리를 하겠다고 하니 더욱 군침이 도나 보다.
“으음, 안 되는데….”
“구체적인 인적 사항까진 필요 없어. 영향력이 있는지 여부만 알려 줘. 내가 판단하지.”
“얼마나 큰 건이기에 그래요?”
“언론 플레이가 필요해.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문을 실을 정도는 되어야 해.”
“어렵네.”
“물주들 리스트에 그런 사람은 없나?”
내 질문에 케이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역시 소로스가 이슈화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6개월은 걸릴 텐데. 쩝, 히타치 반도체는 내 것이 아닌가 보군.’
일이 성공하려면 일정 부분 운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마땅한 사람이 내 편이 아니라면 원래 역사대로 일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내가 소파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케이가 내 팔을 살짝 잡아당긴다.
“그런 사람이라면 한 분 계세요.”
“누구?”
“휴우, 말하면 안 되는데…. 아닐 케이슨. 시카고대 교수님이세요.”
“시카고대? 케이슨? 혹시 가족인가?”
이상하잖나. 시카고는 케이의 고향인데, 이름까지 비슷하다.
솔직히 케이의 미들 네임이 코리아의 케이(K)라고 하는 건 농담일 가능성이 높다. 자고로 미들 네임은 잘나가는 집안에서 서로 간의 유대를 확인하는 이니셜이다.
“한국 표현을 빌리면 제 외할아버지예요. 경제학 교수이시자, 파라곤 펀드의 이사님이시죠. 투자 전략은 그분의 머리를 빌린다고 보시면 돼요. 물주들도 할아버지 의견에 반하는 투자 건엔 돈을 안 풀어요.”
파라곤이라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는 투자 회사다. 2000년대 들어 대형 투자사로 성장하는 시타델 홀딩스의 전신이다.
투자 회사치고는 안전 위주로 투자하는 곳. 2000년대 후반 경제학계에서 화두가 되다시피 한 ‘Long-Short 전략(장기, 단기 투자를 병행해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을 선도한 투자 회사 중 하나다.
그 회사의 브레인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몰랐다뿐 꽤나 유명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 안전 지향적인 분이 스미토모 공매도를 지원하셨어? 케이를 정말 아끼시나 보네.”
“안전하다고 여기셨겠죠. 이제 수한 씨가 말해 봐요. 대체 큰 건이 뭐예요?”
아니다. 케이를 정말 아끼는 거다. 스미토모 공매도는 절대 안전한 투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외할아버지와 이름까지 비슷한 거 봐라.
케이 집안은 생각보다 거물인 듯하다. 아버지가 주한미군이라고 했는데, 친가 쪽은 군인 집안인가?
그러고 보니 케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이 여기까지 같이 왔다. 퀄컴 사장 어윈이 소개해 준 것밖에 아는 게 없다.
“돈놀이 좀 하려고. 수익률 50프로 장사는 할 수 있을 거야.”
“돈놀이? 환율? 어디서 할지 물어봐도 돼요?”
“유럽. 정확히는 영국.”
“…얼마 빌려 오면 돼요?”
“미국 물주들은 필요 없어. 아니, 미국 물주를 끌어당기면 안 돼. 내 돈만 챙겨 줘.”
“……!”
대충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눈치챈 듯했다.
미국 물주를 내버려 두라는 말은 미국 물주들이 자의적으로 움직인다는 뜻. 달러로 환율 시장을 휘젓는 일이다.
“내 돈도 걸어도 돼요?”
“언제는 내 결재 맡고 결정했나? 대신 이번엔 수수료 없어. 내가 직접 치고 빠질 거니까.”
이 작전의 핵심은 소리 소문 없이 투기 세력 위에 올라탔다가 내려오는 데 있다. 자칫 환투기를 했다는 것이 들키면 나 같은 개인 투자자는 돈도 못 빼고 쇠고랑 찬다. 미국 투기 세력들의 최종 수익률은 68% 수준이었다. 나는 50%만 먹고 빠져야 한다.
“껴 주기만 하면 돼요. 그럼 작전에 적극 동참할게요. 뭐부터 하면 되죠?”
“사람들이 투기판이 벌어졌음을 깨닫게 해 줘야지. 케이슨 님께 부탁해 줘. 이슈 좀 시켜 달라고 말이야. 미국, 유럽 언론사들이 그 내용을 싣지 않을 수 없게.”
“어디다가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영국 ‘런던 타임스’, 프랑스 ‘르 피가로’에는 꼭 기고해야 해.”
“제목은요?”
“파운드화는 독일에서 불어온 말라리아에 걸려 있다.”
짝!
“오오! 느낌이 팍! 수한은 천재예요.”
그제야 케이는 작전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내용은 안 알려 줘도 되겠지?”
“당연하죠. 내가 설을 풀어도 열 장은 단박에 채우겠어요.”
“연락되는 대로 알려 줘.”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수한, 돈을 얼마나 부을 거예요?”
“당연히 올인이지. 주식 담보까지 잡아서 달러 확보해 줘.”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선 일을 마쳤으니 딴 데 일 보러 가야지.
탁!
“안 되겠다. 나도 바로 미국으로 가야겠어요. 같이 가요!”
케이는 핸드백만 챙기고 내 팔짱을 끼더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케이는 확신하는 듯했다.
이건 파운드화가 급락한다는 가정하에 먼저 시장에 들어가는 사람이 대박으로 먹는 거다. 이번 역사에선 대박 환투기꾼으로 이름을 날릴 가능성이 높다.
주차장에 도착해서는 뺨에 뽀뽀를 남기고 휙 사라지는 케이였다. 나 또한 케이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전화부터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저 유수한입니다.”
-오! 유 팀장. 아니, 이젠 유 사장이라고 해야 하나? 웬일인가, 내게 전화를 다 하고.
“시간 좀 내 주십시오. 명함 한 장을 썼으면 합니다.”
-좋군. 나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참일세. 이왕 이리된 거 신성 쪽으로 건너오게. 내가 자네 앞길 터 주지.
“그것 때문에 뵙자고 전화드린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드렸으니 받고자 할 따름입니다.”
대뜸 나보고 신성에 합류하라고 한다. 싫다. 나는 독립한 거지 이직하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난 이희건 회장에게 사례를 받아야 되는 위치다. 내가 출시한 통신칩 덕분에 신성의 휴대폰 사업은 날개를 달았잖나. 원래 역사보다 3~4년은 당겨 준 셈이다.
-하하! 패기 넘치는군. 그래, 역시 젊다는 건 좋은 거지. 어딘가?
“분당입니다.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분당? 가깝군. 마침 조용한 곳으로 가고 있으니 그쪽으로 오게. 호암박물관이 어디 있는지 아나?
“네, 물론이죠. 호암박물관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20분쯤 걸릴 것 같군.
“많이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네.
툭.
부우우웅.
전화를 끊고 차에 올라타서 액셀을 밟았다. 호암박물관은 내 공장이 있는 용인 근처다.
내 첫 번째 보물 벤틀리가 고속도로를 유리판처럼 부드럽게 굴러갔다.
부우우웅.
손에 착착 달라붙는 핸들. 용인 톨게이트를 지나 꾸불꾸불한 이면 도로를 올라가는데 속도를 줄이지 않아도 된다. 정말이지 정확히 20분 만에 호암박물관에 도착했다.
수십 년 뒤에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만 이때만 해도 재벌들이 골프 회동을 마치고 회포를 풀었던 곳이다. 푸른 잔디밭, 늙은 느티나무, 고즈넉한 풍경의 호수 정원까지. 1990년대 한국에서 이보다 럭셔리한 곳을 찾기는 힘들다.
네모반듯한 2층 건물에 잔디밭 사이로 아스팔트길을 만들어 버린 정 회장의 저택과는 사뭇 분위기부터 다르다.
“어서 오시게.”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이 회장님.”
“정확한 시간에 와 놓곤 왜 그러나? 이리 오시게. 얘기 나누기 전에 박물관이나 한번 둘러보자고. 복잡한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될 걸세.”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산뜻한 바람이 훅 하고 밀어닥친다. 세심하게 믹싱한 향수들이 공기 중으로 향기를 뿜어 대고, 은은한 조명들 아래 국보급 골동품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다.
“난 이 달항아리가 맘에 든다네. 순백도 아닌 것이 정감이 넘치거든.”
“저는 저기 매화병이 더 좋아 보입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은 데다 완벽한 대칭은 품격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대화에 가식을 섞지 않았다. 소박하고 서민적인 멋? 그건 실용적인 거지 예술적인 게 아니다. 명품을 빚어내려 혼을 갈아 넣은 장인의 노력을 왜 폄하하나? 철가루를 걸러 내지 않은 흙으로 빚어 티끌이 덕지덕지 묻은 달항아리와 수십 수백 개의 실패작을 깨 가며 완벽을 추구했던 청자가 어찌 비견되나? 청자가 백배는 더 멋지다.
누군가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만큼 짜증 나는 게 없다. 흙수저는 서민적인 달항아리 정도만 즐기라는 편견도 사양이다. 멋진 건 누가 봐도 멋진 거다. 나 또한 멋진 청자를 보며 즐기고 싶다고.
“으흠, 말이 아주 직설적이군. 대현스럽다고 해야 하나?”
“대현은 이미 떠나왔습니다. 대변할 이유 따윈 없습니다.”
“그래, 시답잖게 떠보는 것은 그만두지. 차나 한 잔 하겠나?”
“감사합니다.”
이 회장은 청자든 백자든 신성의 박물관에 들어올 정도의 명품이면 다 수용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내가 파투 놓은 거다. 신성에 들어갈 거였으면 대현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신성은 사람 욕심이 대단한 집단이다. 대현이 공장과 설비에 먼저 돈을 썼다면, 신성은 미국에서 우수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데 돈을 썼다. 심지어 공장 터를 닦아 놓고도 반도체 공장을 지어 본 사람을 찾는다고 한 달 동안이나 공사를 멈춘 적도 있다.
미래에 잘나갈 집단이라고 발을 들여놓았다간 돈 많은 직장인이 될지 몰라도 결코 귀족은 못 된다. 새장에 갇힌다. 꼼짝없이.
쫄쫄쫄쫄.
누가 차려 놨는지 탁자 위의 다기마저 명품이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나? 명함까지 쓰면서.”
“돈 좀 빌려 주십시오. 석 달만 쓰겠습니다. 최소 3천억은 빌렸으면 합니다. 이자는 10%로 했으면 합니다.”
“3천억? 그렇다면 석 달에 300억이겠군.”
“더 빌려 주시면 좋습니다.”
나는 탁자 위에 이희건 회장의 명함 한 장을 올려놓고 살짝 밀었다.
“허허, 명함값 한번 비싸군.”
재벌들이 주고받는 명함은 지극히 사적인 일에 쓰인다. 혼사라든가 정치적인 단합이라든가. 그게 호의에 답하는 불문율이다.
그런데 나는 재벌이 아니잖나. 돈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왕 하는 거 화끈하게 질러야지.
“차세대 먹을거리에 안착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름 정당한 대가라고 보입니다만.”
솔직히 휴대폰 사업은 3천억을 빌리는 걸 대가로 퉁치기엔 아까울 정도다. 이번 일의 대가로 명함 세 장을 다 내밀지 않은 이유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
“자세히 답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외국 물주를 끌어올 수 없는 일이라는 것밖에는요. 최소 석 달 이상 제가 안심하고 굴릴 수 있는 돈이어야 합니다.”
“으흠. 굴리는 판이 외국인가 보군.”
“…….”
역시 이 회장. 머리가 비상하다. 짧은 말에서 핵심만 쏙쏙 뽑아낸다.
“나를 찾아온 이유도 알겠군. 해외 지사를 통해 돈을 안전하게 회수해야 하는 일이구만. 외환 관리법에도 저촉받지 않아야 하고 말일세.”
“이왕 콩고물이 떨어진다면 대한민국에 떨어지면 좋잖습니까.”
“하하하! 콩고물이라.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
“거절하겠네.”
쩝.
“알겠습니다. 모쪼록 사업 번창하십시오.”
나는 쓴 입맛을 씻어 내려 차를 한 번에 들이켜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3천억은 대기업 회장도 껌값으로 취급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게다가 내게 빌려 줄 돈은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비용이 아니던가. 언제 어디에 써야 할지 수많은 사람들이 골머리를 싸매고 몇 개월 동안 노력한 결과를 실현시킬 자금이다. 확률 높은 게임에 쓸 자금을 내 입에 덥석 물려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앉으시게. 내 말 다 끝나지 않았네.”
“명함은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충고는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쪼르륵.
“아하. 앉으시라고, 유 사장.”
이희건 회장은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찻잔만 채웠다. 웃기시네. 저 양반이랑 얘기가 길어져 봐야 내 정보만 빠져나간다. 휴대폰 사업이 얼마나 대단한 먹을거리였는지 알아? 호의를 몰라보다니.
내 돈만 굴려도 천억 정도는 벌 수 있다. 아쉬워도 미련 따위 가질 필요가 없다.
뚜벅뚜벅.
철커덕.
들은 체도 않고 박물관 입구로 향했는데, 바깥에서 문이 잠겨 버린다. 경호원이 있었어? 제법이다. 기척도 느끼질 못했는데.
“이렇게 큰 건은 명함 한 장을 더 얹어 주는 게 불문율이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한 장밖에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보물처럼 아껴 뒀는데 별거 아니네요. 집에 가면 나머지도 찢어 버리죠.”
철컥. 철컥.
빌어먹을, 문고리를 잡고 돌려도 안 열린다. 뭐야, 이거? 슬슬 짜증이 난다.
뚜벅뚜벅.
“내 거 말고 자네 명함 말이야. 회사 이름은 정했나?”
이 회장이 내게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대재벌의 손금을 살필 기회였기에 일단 웃어 주었다. 한 번 죽었다 깨어난 내 손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역시 손금 따위와 재물운은 별개야. 그치.
“스마트 클라우드(Smart Cloud)입니다.”
나는 명함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명함을 새로 만들고 남에게 처음 줘 본다. 대현의 마지막 명함은 히로아키에게 줬었는데 말이다. 내 앞날을 예견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회사 이름이 특이하군.”
“뜬구름 잡는 벤처 기업이라 이름도 그리 지었습니다.”
스마트폰, 클라우드 서비스에서 단어를 따왔다. 내 제품은 고유명사가 될 것이며, 내 회사명도 그러할 것이다. 컴퓨터 OS라는 말 대신에 윈도우라는 말을 쓰듯이 말이다.
“으흠, 명함을 한 장 받았으니 3천억에 부탁을 하나 얹어 보겠네.”
부탁을 하겠다면서 내 명함은 안주머니에 넣어 버린다.
“거절합니다.”
“이수학이라는 사람이 있네. 나름 돈 흐름을 아는 사람이지. 이번 건에 끼워 주게. 물론 발목 잡을 생각은 전혀 없네. 옆에서 보기만 할 거야. 쓸 만한 사람인지 시험해 주면 좋겠어. 자네 느낌을 알려 주면 더욱 좋고.”
분명히 거절한다고 했는데 자기 말만 하고 이 회장은 은근슬쩍 등을 돌려 버린다.
결국 내가 뭔 짓을 하는지 알고 싶다 그거네. 그리고 상황 봐서 같이 투기판에 뛰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째 이 동네는 대현의 오너 일가만 빼고 모두 여우들만 있는 느낌이다.
이수학… 그래, 이때쯤 재계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람이지. 신성그룹의 후계자 계승은 마무리되었으니, 가신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때인가 보다.
재무 쪽으로 빠삭한 사람이고, 얼마 전 일본 엔화 환치기에서도 능력을 발휘했으니 내가 영국 정부의 눈을 피해 자금 세탁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케이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다. 이번엔 정말이지 칼 같은 타이밍에 빠져야 하거든.
“분명히 거절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직접 연락하라고 하겠네. 콩고물이 정녕 10프로뿐이라면 나도 거절이니까.”
철컥철컥.
문이 여러 개였던 모양이다. 이 회장이 반대편으로 사라져 버리자 내 앞에 있던 문이 그제야 열린다. 문을 잠갔던 경호원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했다. 따져 봐야 뭐하나? 매뉴얼대로 잘했으니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들 아닌가.
‘쳇! 이자 따위론 만족 못 하시겠다? 쩝.’
나는 그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명함 한 장을 뺏기긴 했지만 돈을 빌렸으니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신성을 끼우면 일이 쉬워질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조심을 좀 해야겠지만.
- *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준비는 끝났으니 언제 어디로 가면 되냐고 이수학 비서실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일주일 뒤 영국행 비행기 안에서 보자고 했고, 추가적인 설명 따윈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 비서나 불러야겠다. 케이도.’
일본에서 이 비서를 불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만 어쩌랴. 안심하고 나와 손뼉을 맞출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이 비서는 사흘째 되는 날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고, 미국으로 간 케이에게도 연락이 닿았다. 케이에겐 쇼핑 좀 하고 영국에서 보자고 했다.
제2장 금의환향
한 달 뒤.
와글와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Royal International Humanitarian Child Fund Alliance」
제목부터 약간의 특권의식이 느껴지는 파티장이다. 한국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왕실 주관 국제 어린이 돕기 연합’ 정도가 될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런 파티가 시시때때로 열린다.
초대받은 이들은 최소 만 불 이상을 기부해야 하는 자리이니 어중이떠중이를 자연스레 걸러 내는 파티이며, 초대장이 없는 이들은 기존 회원들을 직접 동반해야 참석 가능하니, 이곳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신분은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대형 물주들이 이런 파티장을 찾는 이유다.
영국에 도착할 때부터 신성이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은 나조차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여타 다른 파티장에서 뿌린 돈만 20만 불이 훌쩍 넘어간다. 돈이 좀 아깝지만 대형 선물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코스다.
딸깍.
“호호, 한국에서 쇼핑했던 옷을 여기서 잘도 써먹는군요.”
“차를 못 가져와서 아깝네.”
“아휴, 돈 많은 사장님께서 왜 그러세요.”
“정말 많으면 내가 이 짓거리를 왜 하겠어?”
하루 렌트비가 100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롤스로이스에서 내리며 케이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는 흑백 투톤 정장에 오렌지빛 넥타이와 은색 시계로 악센트를 줬으며, 케이는 녹색 실크 드레스를 갖춰 입었다. 이 비서와 이수학 비서실장은 무난한 블랙 정장에 보타이를 했다.
이런 파티에 참석할 때 차와 옷의 컬러 코드는 매우 중요하다. 영국에서 벌어지는 고급 파티에선 빨간색, 보라색 옷은 피하는 게 좋다.
승용차는 옷과 전혀 다르게 흑백 투톤이면 다소 곤란하다. 그건 영국 왕실과 귀족 가문들이 주로 이용하는 컬러 코드이기 때문이다.
이런 컬러 코드는 나라마다 달라서, 예를 들어 프랑스에선 로열 블루라고 불리는 채도 높은 파란색 옷만 피하면 승용차 색은 아무것이나 상관없다.
이처럼 컬러 코드를 기억하는 이유는 옷에 보랏빛 장식을 했거나 흑백 투톤 승용차를 타고 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형 물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돈은 돈을 벌기 마련이니 대형 물주는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인 경우가 많다.
물론 유럽에 한해서 그런 경향이 짙다는 거다. 미국이야 뭐, 컬러 코드 따윈 아무 상관 없다.
뚜벅뚜벅.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여기. 아, 그리고 일행이 세 명 더 있습니다.”
“방명록에 서명하시면 문제없습니다.”
초대장을 보여 줬으니 나를 위시해 케이, 이 비서, 그리고 이수학 비서실장까지 차분히 방명록에 이름을 기입하면 입장할 수 있다.
나는 내 이름 옆에 스마트 클라우드 $10,000을 적었고, 케이는 버니지아 트레이딩 이름으로 $10,000을 적어 놓는다. 이 비서와 이수학 비서실장은 500달러 정도를 적어 넣어 내 수행원임을 밝혔다.
우웅. 빠아아~ 딩딩.
흥겨우면서도 대화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 곳곳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중앙 무대에선 호스트가 어린이 자선 모금에 참여해 준 것에 감사하다며 행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실상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실내에선 와인을 한잔 하며 얘기를 나누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정원 쪽으로 나가며 좀 더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역시 정원이 상쾌하고 좋아요. 그쵸?”
“좋지. 그렇지만 춤은 안 출 거야. 정말이지 창피해.”
“아우, 파티를 즐길 줄 몰라요.”
“케이 양. 우린 일하러 온 거지, 즐기러 온 게 아니라고.”
“호호호, 연기가 어색하니까 그렇죠.”
정원으로 나서자마자 케이는 내 팔짱을 풀고 어디선가 와인 두 잔을 들고 온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파티를 주관하는 스태프가 다가온다.
“어떻게, 파티는 즐거우십니까?”
“당연하죠. 와인도 좋고, 음악은 더욱 좋고.”
“인사하시죠. 이쪽은 밥콕 인터내셔널 독일 지부장이십니다. 이쪽은 유클리스 캐피털 디렉터이시고요.”
“밥콕의 제이콥입니다.”
“유클리스의 스탠리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동료인 버지니아 트레이딩 오너 케이고요.”
파티 스태프는 인사만 시켜 주고는 자리를 훌쩍 떠 버린다. 이 파티의 주된 목적이다.
공식적인 주식 시장, 선물 시장이 있지만 그것만으론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한다.
나처럼 영국과 독일 간 실물 무역이 벌어지는 곳에 달러를 박아 넣고자 하는 경우엔 직접 만나는 것만큼 확실한 계약은 없다.
“수출입 신용장을 구매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유럽 사업 진출을 위해서 영국에 투자처를 찾고 있는데, 부동산이며 미래 가치를 검토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리는군요. 최근 환율 시장이 불안하다는 소문이 있어, 파운드화 지불 계약인 신용장을 찾고 있습니다. 독일 마르크화로 계약된 신용장이면 최고로 좋죠. 금리 이득이 좀 되니까.”
“그러시군요. 저희 쪽에서 최근 독일 브라운사(社)와 철도 부품 수입 건이 체결되었는데 믿을 만하실 겁니다. 결제일은 석 달 뒤이며, 체결가도 천만 달러 수준이니 꽤 짭짤하실 겁니다.”
“오! 밥콕이며 브라운사 모두 신용도가 특급이 아닙니까. 게다가 유클리드 캐피털이 끼어 있으니, 여태 신용장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하하! 계약 체결이 일주일 전에 끝났으니 무척 따끈따끈하답니다. 미스터 유가 운이 좋으신 게지요.”
“하하하! 여기 계신 분이 신성물산의 대표입니다. 저 대신 계약을 도와주실 겁니다.”
“이수학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수학 비서실장을 신성물산 대표로 둔갑시켰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려 이수학은 두 영국인을 부드럽게 리드해 한쪽 구석으로 데려간다.
이리저리 알아볼 필요도 없이 계약은 단번에 체결될 것이다.
“이야! 수한 씨, 오늘 첫 손님부터 재수가 좋은데요?”
“분위기가 슬슬 달아오르는 거지. 이제 미국 형님들께서 환투기 하겠다고 깃발 들고 앞장서면 이런 신용장은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지겠지.”
환투기는 절대 쉽지 않다. 이렇게 나처럼 수출 신용장 같은 실물을 기반으로 한 선물을 구입하고, 그걸 다시 독일 은행에 담보로 맡겨 대출받고, 그 돈으로 신용장을 사거나 본격적으로 환율 시장에 뛰어드는 거다.
일명 물레방아 돌리기라고 해서 이 짓을 할 때마다 굴리는 돈이 몇 배씩 커진다. 중간에 캐피털 회사 여럿이 끼어 있기에 수수료만 합쳐도 10% 가까이 선이자를 떼는 것이나 다름없다.
리스크가 커지지만 원래 투기가 단타로 치고 빠지는 것이기에 돈의 뭉치가 커야만 한다. 웬만큼 간 큰 놈이 아니면 2배수 불리기도 벅차다.
하나 나는 여태 한 달 사이에 4배수로 금액을 불렸다.
“얼마 안 남았어요. 전 세계 투기꾼들이 영국으로 몰려오기 직전이라고요. 제 외할아버지께서 런던 타임즈와 인터뷰도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오호, 벌써 거기까지 가셨어? 대단하신데?”
“교수님답게 인터뷰하실 거래요. 아주 논, 리, 적, 으, 로. 호호호!”
“영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ERM 탈퇴해라. 거대 자본이 베팅하기 시작하면 누가 질지는 뻔하다. 고집부리면 나 또한 전 재산을 올인할 거다. 뭐, 그런 식인가?”
“오, 정확한데요? 언제 통화라도 한 거예요?”
“하하, 그럴 리가.”
난 신문에서 읽었을 뿐이다. 소로스 형님이 선전포고를 했던 인터뷰가 그랬으니까.
- *
케이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자니 금발이 멋진 사내가 저벅저벅 우리 쪽으로 걸어온다. 한국말을 하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왠지 인상이 공격적인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브린스톤 마인즈 CEO 앤드류 헉슬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유라고 부르십시오, 헉슬리 경.”
솔직히 나는 심장 근처가 뜨끔했다. 브린스톤 마인즈라고 해서 한 번 뜨끔했고, 이름이 헉슬리로 끝나서 한 번 더 뜨끔했다. 다산의 물주 브린스톤 마인즈가 헉슬리 가문 소속이었던가?
“오호, 제 가문을 아십니까?”
“하하! 이 파티에 온 사람 중에 헉슬리 가문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경(Sir)이란 단어를 붙여 주니 기분이 좋은가 보다. 나도 아는데 영국물 먹는 이들이 모를 리 없다.
헉슬리는 정통 과학자 가문인 데다 2차세계대전 직후 기술력 높은 회사를 잘 골라내서 회생시킨 덕분에 영국에서 손꼽히는 갑부가 되었다.
그런 가문이 대현전자를 노리는 작전에 참여했어? 내 휴대폰이 기술자들 사이에서 예상보다 더 독보적으로 보이긴 했나 보네.
“하하하! 제 소개를 따로 안 드려도 되겠군요. 허면 아리따운 숙녀분께서는 이름이 어찌 되시나요?”
“호호호.”
오글거리는 동작으로 케이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는 헉슬리였다. 케이는 예쁘다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미국 투자 회사인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케이라고 합니다.”
내가 대신 소개를 해 주었다. 나는 주변을 슬쩍 휘둘러봤지만 다행히 한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동양인은 연보라색 와이셔츠로 멋을 낸 중국계 젊은이가 유일하다. 컬러 코드도 모르는 애송이가 분명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최근 미스터 유께서 영국에 투자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국 분이신데, 혹시 대현물산의 주식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지분 계약이 파운드화로 되어 있어서, 달러로 사 가시면 서로 윈윈일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대현물산이라니. 나는 유럽 진출을 준비 중인 사람입니다.”
헉슬리는 내 환율 전략과 반대 방향의 딜을 하면서 싱긋 웃어 댔다. 간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히니 살짝 눈썹을 올리며 ‘그럴 리가?’ 하는 표정까지 짓는다.
내가 대현물산의 지분을 탐낼 이유는 전혀 없다. 대현의 오너들에게 들이밀어도 마찬가지다. 5% 지분 따위로는 경영권을 공격할 수 없다.
“으흠, 의외군요. 한국 분이면 충분히 판세를 읽으실 줄 알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생각 바뀌시면 여기로 연락하세요.”
헉슬리는 명함 한 장을 꺼내서 내 재킷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는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일방적인 행동에다 내 명함을 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뭐지? 다산연합은 이미 해체가 되었을 텐데. 헉슬리 가문 정도면 작전이 꼬였다며 대현물산 지분을 손절하고도 남을 시점인데.
“수한 씨, 일본에서 깔끔하게 발자국 지운 거 맞죠?”
“그래, 지웠지. 대현 쪽 왕자들도 내 존재를 확신하진 못할 거야.”
“저 사내… 수한 씨가 판 뒤집은 거 넘겨짚는 분위기인데요.”
“그러게 말이야. 일본이면 몰라도 영국에서 날 알 수는 없을 텐데. 그냥 넘겨짚은 건가?”
넘겨짚더라도 누가, 무슨 근거로 날 범인으로 지목하지?
다산의 관련자들은 모두 한국에 있다. 다산 건은 이런저런 특혜와 재벌 비리로 확대되어 관련자 모두가 출국 금지 조치 중이다. 정 회장조차 사태 확산을 우려해 퇴직한 나를 불러다 이래라저래라 못 하는 이유다.
‘그래, 한 명은 이미 빠져나가 있지. 백수길 상무. 그 양반이 영국에 있나?’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백수길 그 양반이 날 공격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외려 영국에 있다면, 인질로 잡혀 있을 확률이 높다.
만약 백 상무가 내가 영국에 있는 걸 알았다면, 물주에게 한번 찔러보라고 했을 수는 있겠다. 아직 내가 대현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케이도 저 남자 몰라? 브린스톤 마인즈 CEO라잖아?”
“모르겠어요. 브린스톤 마인즈에 헉슬리 가문이 끼어 있었다면 내가 기억 못 할 리 없어요. 그리고 헉슬리 가문은 저런 분위기가 아니에요.”
“맞아. 아주 고상한 양반 집안이지. 최소한 겉으로는 말이야.”
-귀빈 여러분, 방금 전 모금액이 50만 파운드를 돌파하였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현악 4중주 공연을 시작하니 모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오오오.
삐이익.
파티 호스트의 안내 방송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고, 멀리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의 하이라이트다. 경쾌한 행진곡풍의 음악부터 시작해 끈적거리는 재즈까지 현악 4중주를 거치면 아주 훌륭한 춤곡이 된다.
“아앗! 어서 가요. 수한, 어서 가자고요!”
케이가 내 팔목을 잡고 마구 달려갔기에 나는 어어 하면서 끌려갔다.
나는 아직 춤추는 것이 여전히 창피하지만, 서양인들은 정말이지 춤을 엄청 좋아한다. 특히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은 서로 무대 중앙에 서려고 눈치 싸움이 장난 아니다. 아마도 1시간 동안 또다시 케이의 리딩에 따라 흐느적거리지 않을까 싶다.
영국에서 처음 파티에 참석했을 땐 눈길을 끌기 위해서 춤을 췄는데, 솔직히 나도 이젠 좀 즐기고 있는 편이다. 객관적으로 미인이라 할 만한 케이와 밀착해 몸으로 음악을 즐기는 행동은 꽤나 자극적이다.
뭐든 일단 처음이 힘들지 웬만큼 하면 즐기게 되나 보다. 춤이 그렇고, 부자 행세 또한 그러하다.
- *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더 이상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말 그대로 완판. 내가 싸 짊어지고 온 돈은 모두 파운드화 폭락에 베팅되어 있었다. 그것도 4배수로 부풀려져서 말이다.
「영국 총리가 직접 나서 투기꾼들에게 선전포고하다.」
「환율 조작국은 독일이지 영국이 아니다. 유럽의 대통합을 논하다.」
「기축 통화에 대한 전 세계적 합의를 도출할 때가 왔다.」
「불침 전함이라 부르짖는 영국, 독일발 환율 폭탄을 견뎌 낼 것인가?」
온갖 신문들이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실어 대기 시작했다. 선전포고를 한 것은 미국 투자 회사들인데, 묘하게 신문들은 이 사태를 영국과 독일 간의 환율 싸움으로 포장하고 있다.
유럽 각국의 신문사들도 알고 있는 거다. 미국이 이 판에 끼어들면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이다. 외려 이런 기사들은 미국 투기꾼들에게 확신을 줄 뿐이다.
TV에서는 케이의 외할아버지 아닐 케이슨이 특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근 환율 사태의 위험성을 처음 공론화한 인물이기에 런던 타임즈가 시카고까지 날아갔나 보다.
-교수님께서는 이 환율 사태가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것으로 예견하시는군요. 학자로서 그에 대한 근거가 있습니까?
-자본 쏠림 현상은 처음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독일에 돈이 몰리는 걸 단기 금리 인상에 따른 차익 실현으로 폄하할 수도 있겠지요. 하나 경제 주체인 사람들의 심리가 독일 마르크화를 안전 자산으로, 영국 파운드화를 위험 자산으로 여기기 시작하는 순간 인위적인 환율 조정 댐은 무너집니다.
-댐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런던 타임즈 기자는 케이슨 교수의 단언을 추측으로 변환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수문을 열어야 합니다. 영국 정부는 인위적인 환율 조정을 멈추고 시장에 맡겨야 합니다. 이 사태가 길어진다면 저 또한 전 재산을 파운드화 폭락에 집어넣어….
케이슨 교수의 단정하게 다듬은 흰 수염 사이로 연신 경고의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고상하게 생긴 교수가 그리 말하니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 같다.
하나 영국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부들부들 떨겠지. 이 고비만 견디면 영국의 경제는 다시 한 번 고공 행진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말이 쉽지, 유로화로 화폐를 통합하는 초대형 호재가 언제 다시 오겠나? 영국 정부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틱!
나는 호텔 방의 TV를 꺼 버렸다.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 비슷한 인터뷰가 방송을 타고 난 다음 날부터 영국 정부와 투기꾼들이 정면으로 부딪쳤고, 일주일 뒤에 영국 정부가 항복했다.
“슬슬 빼야겠네요. 이제 며칠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이수학 비서실장이 대꾸했다.
“유 사장님,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이제 막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벌써부터 발을 빼다니요. 제가 생각할 땐 수익률 100프로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실장님, 지금부터 빼면 중간 투자사들에 가는 수수료를 제하고도 50프로는 남길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만족하시지요.”
이수학 비서실장은 50%만 먹겠다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돈놀이의 황제인 이수학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황이면 족하다.
나라고 한탕 크게 당기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나? 하지만 내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 나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날 테고, 그 여파로 발생할 나비효과는 내 제어를 벗어날 것이 뻔하다.
영원히 해지펀드 매니저가 될 것도 아닌데 투기꾼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득보다 실이 크다.
50% 정도만 먹고 빠짐으로써 나는 환율 차익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재수 좋게 돈을 번 인물이 되어야 한다. 의심은 가지만 확신을 할 수 없도록 말이다. 이번 건을 케이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핸들링하는 이유다.
“그러게, 신성물산이 떡하고 버티고 있잖아요. 파운드화 폭락이 완료되면 그때 차근차근 정리해도 문제 될 것이 없어요. 표면적으론 신용장 할인 거래를 하고 있는 거니까 정상적인 무역 거래의 일환이라고요.”
봐라. 케이는 이런 기회를 왜 놓치냐며 안타까워하는 표정까지 짓잖나. 아마도 이 여자는 이 투기판을 끝까지 쫓아갈 것이다. 이미 파라곤 펀드에 자신의 돈을 끼워 넣어 몇 배로 불려 놨겠지.
투기꾼 블랙리스트에 등재될 리스크는 분명히 있겠지만, 미국인이니 잘 빠져나갈 것이다.
“이 비서는 영국에 있고, 이수학 실장님은 나와 함께 독일로 가시죠. 독일 은행에서 일괄 처리한 다음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될 겁니다.”
“사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은요?”
곁에서 잠자코 있던 이 비서가 작전 지시를 바랐다.
“독일 은행에서 신용장 처분해서 파운드화를 영국 계좌로 송출할 거야. 그때 이 비서는 파운드화가 이체되는 대로 무조건 달러로 전환시키고, 신성물산 영국 지사에 계좌 이체시켜 줘. 그럼 한국에서 느긋하게 인출하면 돼.”
“쉽네요. 제가 해야 할 일이 계좌 이체라니.”
“쉽지. 대신 케이가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절대 흔들리지 말고 즉시즉시 계좌 이체해. 알았지?”
케이에게 달러를 건네는 순간 그녀는 무조건 물레방아를 더 돌리려고 할 거다. 이 비서라면 양쪽 귀 꾹 막고 계좌 이체할 거다.
내가 독일로 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신성은 내게 빌려 준 3천억 말고 이수학의 손을 빌려 1천5백억을 추가로 이 투기판에 베팅했다.
이수학 비서실장이 뭐라고 해도 내가 독일 은행에서 강제로 빼 버릴 거다. 당장은 얼굴을 붉히겠지만 나중엔 나에게 고맙다고 절을 몇 번이고 하게 될 거다.
“에헷, 내 말을 듣지 말라뇨? 내가 위험 요소라는 거예요? 내가 파티에 같이 쫓아다녀 주고, 신용장 물고 와 준 게 몇 번인데요. TV에 가족까지 등장시키고!”
“알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 돈으로는 뭔 짓을 하든 상관 안 하잖아. 적당히 하고 빠지라는 조언도 안 하잖아.”
“칫!”
“계좌 이체는 늦어도 닷새면 모두 끝날 거야. 그럼 이 비서는 즉시 한국으로 출국해. 지체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케이도.”
“예, 알겠습니다.”
“쳇, 간이 어쩜 저리 작을까. 내 돈은 합법적인 범주에 있다고요.”
“우리의 무대는 여전히 한국이야. 영국이 아니라고. 파티도 한 달 반이나 즐겼으면 충분하잖아. 돌아가야지.”
나는 은연중에 말을 돌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이지 내 동료가 환투기꾼으로 체포되면 큰일이잖나.
이 비서가 큰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드디어 한국에 가는군요. 아, 저는 일본으로 가야 하나요?”
“일이 우선이잖아. 일본 공장 셋업 완료되면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 축배는 그때 같이하자고.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시고. 하하!”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일행에게 한 캔씩 휙휙 던져 주었다. 캔을 뜯어 가볍게 건배를 하고는 다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창밖을 내다보며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겼다.
‘맥주에는 노가리가 딱인데. 고추장을 푹 찍어 가지고….’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노가리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저렴하긴 하다.
- *
일주일 뒤.
-…고로, 영국 정부는 이 시각부터 ERM에서 탈퇴할 것입니다. 파운드화는 유로화 통합 프로젝트에서도 빠져나와 독립 화폐로서 존속할 예정입니다. 비정상적인 현재 환율은 시장에서 가치 재조정이 될 것으로….
-질문 있습니다, 총리님! 어째서 지금에야 항복하시는 거죠? 경고는 한 달 전부터 있어 왔는데 누가 이 사태를 책임… 웁.
-가치 재조정이 될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며, 이번 기회로 국제적인 환투기 세력을….
-영국은 불침 전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유로화 통합에서도 빠진다니요! 영국 국민의 혈세를 또다시 투기판에 올려놓을 작정입니까! 총리로서 어떻게 그런… 웁.
-환투기 세력을 블랙리스트로 작성하여 철저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유럽 각국과 협력할 것이며, 미국 정부와도 긴밀히….
-국민들은 정확히 알 권리가 있습니다. 파운드화는 앞으로도 30프로 이상 폭락할 것이고, 이 사태는 모두 국민들의 세금으로 벌충할 거라는 말씀을 왜 빼십니까! 사과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사태를 질질 끌고 온 자는 반드시 처벌…. 이거 놔! 마이크 내놓으라고!
기자 회견장이 난리 법석이다. 영국 총리가 직접 발표하는 자리인데 기자들이 중간에 말을 끊을 정도로 흥분했다.
총리 비서실 직원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기자들이 들고 있는 마이크를 강제로 뺏어 댔고, 기자들은 각자 마이크 전원을 번갈아 올려 가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삑!
“어찌 생각하나, 백?”
앤드류 헉슬리는 신경질적으로 TV 화면을 꺼 버렸다.
“앤드류, 내가 이미….”
찌릿!
헉슬리가 소파에 앉아 있는 백수길 상무를 쏘아보았다. 백수길은 움찔하며 호칭을 변경해야만 했다.
이미 백수길 자신을 하인처럼 대하고 있는 헉슬리였다. 그가 자신의 여권까지 압수했으니 아니꼬워도 어쩔 수 없었다.
“헉슬리 경, 이미 말씀드린 사안이지 않습니까. 제가 유수한 그 새끼부터 잡아 놔야 한다고.”
“노! 노! 이건 유수한 그놈을 잡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내 돈 어쩔 거냐고! 다산 네놈들이 끼어들고 나선 되는 일이 없어. 대현물산 지분은 손실 정도를 벗어나 이젠 휴지가 된 거나 다름없다고! 30프로를 허공에 날려 버렸단 말이다!”
맞는 말이다. 헉슬리가 다산에 위임한 500억 원은 대현물산 주식에 묶여 버렸고, 주가 조작으로 의심받아 손절도 못 했다. 주가는 20%가 하락한 채 올라갈 기미도 없고, 여기에 환율 변동으로 30%를 추가로 날려 버렸다.
그 돈 500억은 앤드류 헉슬리가 가문에서 할당받은 종잣돈이다. 그걸 이 짧은 시간 동안 반 토막을 낸 것은 노벨 화학상까지 배출한 헉슬리 가문에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머리가 그것밖에 안 되냐며 그의 콤플렉스인 외가 핏줄까지 들먹여 댈 것이 뻔했다.
“유수한 그놈이 이 모든 일의 원흉입니다. 잡아서 당국에 환율 조작범으로 몰아넣으면 돈을 토해 낼 겁니다. 그걸 헉슬리 경이 챙겨야 합니다.”
“후우, 대체 정보는 귓등으로 듣나? 그놈은 이미 영국 땅에서 사라졌어. 거래에도 불법적인 구석이 없이 영국 투자사와 수수료 계약까지 되어 있다고! 놈을 집어넣으려다간 외려 내가 공격받아!”
“……!”
백 상무는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걸 누가 모르나?
‘야, 이 새끼야! 그러니까 네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놈 약점이든 뭐든 찾아내서 목줄을 죄어야 돈을 토해 낼 거 아니야. 방법이 그것밖엔 없잖아! 돈 내놓을 놈은 그놈뿐이야! 약점을 찾아내라고! 이 멍청한 양놈의 새끼야!’
백 상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말을 억지로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밑에 있는 부하 직원이었으면 재떨이를 몇 번이고 던져 댔을 것이다.
“Shit! 누군 미국년 끼고 춤만 추고 가도 백만장자가 되고, 나는 그놈 뒷주머니에 돈을 꽂아 준 형국이잖아. 어이가 없어서, 원.”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던 백 상무는 헉슬리가 중얼거리는 미국년(American Bxxxx)이라는 단어에 뭔가가 번쩍 떠올랐다.
“혹시 그 여자 이름이 케이였습니까?”
“응? 당신 그 여자 알아? 버지니아 트레이딩. 딱 봐도 돈놀이 잘하게 생긴 년이었어.”
“그년입니다. 그년을 잡아야 합니다. 그년이 유수한 그놈의 약점입니다.”
“뭐?”
“대현전자 사내에서도 본 적이 있어요. 퀄컴 건도 그렇고, 미국 물주를 뒷배로 둔 여자가 분명합니다. 불법적인 거래는 그 여자가 따로 처리했을 겁니다. 잡아넣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환투기꾼 블랙리스트를 만든다고 하잖습니까.”
“으응?”
“아! 바로 잡는 게 좋겠군요. 인터폴에 연결해 공항에서 체포하면!”
“공항이면 미국행, 한국행?”
“당연히 그 여자는 한국행이죠. 승객 명단 확인하는 것쯤은 앤드류, 아니 헉슬리 경이라면 식은 죽 먹기 아닌가요?”
“하하하! 그러네! 얼굴도 알겠다,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겠군.”
오늘따라 머리가 잘 돌아가는 백 상무였다. 어쭙잖게 화살을 돌렸는데, 뭔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기분이다. 이 건만 잘 해결하면 한국으로 금의환향할 수도 있다.
헉슬리 가문이라는 거물이 나서면 환투기꾼이 벌어들인 돈을 압수해서 빼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영국 정부 쪽도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적극 협력할 것이 분명했다.
- *
“케이 님, 이제 곧 비행기 뜹니다. 가셔야죠.”
“그럼 한국에서 봐요. 수한 씨에게 보너스 좀 달라고 해요. 사람을 그리 부려 먹고.”
“잘 챙겨 주십니다. 걱정 마세요.”
“아, 이 비서님도 퍼스트 클래스로 끊었죠? 그런 돈은 아끼면 안 돼요. 몸 상한다고요.”
“하하, 어서 출발하세요.”
이 비서는 겨우겨우 케이를 출국장으로 밀어냈다. 드디어 헛웃음과 인사를 빙자해 끝없이 이어지던 수다를 끊는 데 성공했다.
‘휴우, 내 비행기는 3시간 정도 남았나? 아침밥이나 먹고….’
이 비서가 ‘케이를 떠나보내며 뭘 먹을까?’ 하고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출국장 앞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 여권 본인 겁니까?”
“당연하죠. 설마 여권이 위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버지니아 케이 로메티, 당신을 영연방 질서 위반법 제 152조 4항 경영체 및 기업 관리자의 감독 의무 조항에 의거해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뭐예요, 이 팔 놔요! 내가 무슨 법을 어겼다는 거예요. 나는 미국인이고 당신들이 나를 체포할 권리는 없다고요. 당장 미국 대사관에 연락하기 전에… 아악! 이 손 못 놔요!”
케이는 변호사답게 매섭게 쏘아붙였다. 하나 출국 심사관으로 보이는 사내는 외려 케이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등 뒤로 꺾으며 할 말만 늘어놓았다.
“이 여자 확실합니까? 헉슬리 경.”
“예, 확실합니다.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사장, 케이 본인이 확실합니다.”
출국 심사관 옆에는 어느새 금발을 멋지게 빗어 넘긴 헉슬리가 서 있었다.
“버지니아 케이 로메티! 주식, 문서, 공증 인장, 환율 조작은 중범죄로 구금 대상입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아아악! 헬프! 헬프! 헬프 미! 난 미국인이라고! 미국 시민이란 말이야.”
이 비서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인파 사이로 빠져나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누르며 입국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슬그머니 주차장으로 향했다. 평생 처음으로 퍼스트 클래스를 탄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던 심장 박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부리나케 공항을 빠져나와 공중전화 부스부터 찾았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에? 이 비서, 무슨 일인데 그래요?
“케이 양이… 케이 양이 체포되었습니다.”
-뭐? 체포되다니, 왜?
“케이 양이 체포되었다고요.”
이 비서는 워낙 당황해 체포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읊어 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그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아서였다.
- *
독일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케이가 체포되었다는 전화에 어이가 없었다.
“이 비서, 일단 진정부터 하고 천천히 말해 봐요. 지금 어디에 있지?”
-공항 근처 공중전화 부스입니다.
“잘했어요. 기존 호텔로 돌아갈 생각은 말고, 서로의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다른 곳에 머물도록 합시다. 이 전화번호는 계속 유지할 테니까 걱정 말고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말해 봐요. 드라마 재방송하듯 최대한 자세히.”
-네. 제가 케이 님과 함께 공항에 도착해서 티켓팅 완료할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출국 심사관이 신원 확인을 하면서 케이 님을 제압했고… 아, 금발 백인에게 재차 신원 확인을 했고, 버지니아 트레이딩의 사장이 맞다고 하니까 미란다 원칙을 읊고….
“출국 심사관이? 잠깐, 금발 백인?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죠? 최대한 자세히.”
금발 백인이라는 말에, 머릿속에 누군가 휙 하고 지나갔다. 미국 시민권자인 케이를 강제로 제압해? 유죄 확정은커녕 아직 환투기꾼 블랙리스트에도 오르지 않았을 텐데. 뭔가 이상하다.
-짧은 금발에 올백을 한 남자였는데, 허슬리… 여하튼 무슨 경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헉슬리!”
-아, 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요? 경찰차로 끌려가던가요?”
-그것까지는 못 봤습니다. 저도 몸을 피하느라….
이야, 이거 영국도 치안이 개판이네. 물증도 없이 공무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곳이야? 아니, 헉슬리라는 그 녀석… 띨하게 생긴 것도 모자라 완전히 개망나니인가 보다. 앞뒤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성격인 게 분명하다.
“알겠어요. 그 정도 들었으면 충분해요. 내가 영국으로 들어가면 이 실장님에게 연락처를 남겨 둘 테니, 곧바로 나에게 합류해요.”
-네? 사장님이 영국에 들어오신다고요? 안 됩니다.
“하하, 걱정 마요. 날 체포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 비서는 영국 정부가 직접 나섰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이 일은 그것과는 상관없다. 케이는 절대 바보가 아니다. 그레이존일지언정 아슬아슬하게나마 합법적인 선 안에서 환치기를 했을 거다. 외려 헉슬리라는 놈이 어떻게 이리 막나갈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사장님마저 체포, 아니… 여하튼 안 됩니다.
“됐어. 한배를 탄 사람끼리 외면하면 섭섭하잖아.”
내 입에서 툭 하고 반말이 나왔다. 순간 인생 1회 차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는 돈을 엄청 벌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사람을 두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거… 난 그런 짓 안 해. 그래도 명색이 동료인데.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걱정할 일 아니에요. 호텔이나 옮겨요, 얼른!”
-예.
딸깍, 삐이익.
나는 전화를 끊고 이수학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신성물산 독일 지부의 VIP 전용 회의실을 사무실로 쓰고 있기에 그와 같이 있는 것이다. 통화 내용을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욕심냈으면 당신도 이 꼴 날 뻔했다니까요.
“혹시 아세요? 케이가 어디까지 물레방아를 돌렸는지?”
“크흠! 저는 잘….”
“말해 주세요. 일을 어디까지 막아야 하는지 내가 알아야죠. 케이가 이 실장님을 끌어당기려고 했을 텐데요.”
뻔하지 않나. 케이는 태생이 로비스트. 옆에 물주가 있는데 가만둘 리 있겠나? 이수학 실장은 내 눈이 있으니 섣불리 오케이를 못 했을 뿐이다.
“아, 케이 양은 A급 신용장으로 환치기하고 그 돈으로 다시 B급 신용장으로 갈아타고선 환치기를 또 했습니다.”
“과하게 질렀네요.”
“예. 이럴 줄 알았으면 저라도 말렸어야 하는 건데….”
신용도 B급의 신용장은 될 수 있으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
신용장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채무 보증을 선다는 증서다. 채무 변제의 1차적 책임이 회사에 있는 A급 신용장과 달리 B급 신용장은 1차 책임부터 국가가 보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B급 신용장은 거대 자본이 없는 중소 업체 또는 벤처 사업체의 신용장이니까.
즉, 국가가 중소기업들이 쓰러지지 않고 잘 커 주기를 바라며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들 세금을 담보로 맡겨 준 거다.
따라서 B급 신용장을 위험도 높은 금융 파생 상품으로 사고파는 것은 나라에 따라 불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일개 회사채가 아니라 그 나라 국민 세금을 이용해 돈놀이를 했다는 논리를 들이밀 수 있는 거다.
헉슬리가 막나가는 이유를 대충 알겠다.
“혹시 케이의 B급 신용장 리스트 가지고 계십니까?”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어쩌시려고….”
“케이를 고소한 놈이 생각할 건 뻔하잖습니까. 연쇄 부도를 무기로 먹은 돈 토해 내라는 거 아니겠어요?”
“……!”
이수학 비서실장은 내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007가방을 마구 뒤적거리더니 내게 서류를 몇 장 건네주었다.
어후! B급 신용장 리스트가 A4 용지로 두 장이나 된다. 이 여자 정말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 대체 어떤 뒷배를 두고 있기에….
금융 파생 상품이라는 게 별거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라미드 판매와 매우 비슷하다. 육중한 피라미드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밑바닥에 취약한 돌 몇 개만 빼내면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B급 신용장 리스트에는 돈을 지불해야 할 날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날짜가 빠른 것은 불과 이틀 뒤에 수입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계약 건도 있었다.
테트리스 게임하듯 이 계좌 저 계좌 뛰어다니며 대금을 지불해야 하고, 그런 일련의 작업이 완료되면 ‘Clear! You Win.’이라고 하면서 게임이 클리어되고 돈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다.
문제는 이걸 어디를 먼저 메우고 어디를 잠시 비워 둬도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메우면 안 되냐고? 안 되는 게 아니라 못 한다. 이건 피라미드 형태라 순서대로 설계된 작전대로 자금 회전을 시키지 않으면 천문학적인 유동 자금이 필요하다. 달리 금융 수학이라는 말이 생겼겠나.
헉슬리가 케이를 압박하는 수단이 바로 시간이다. 케이의 행동을 며칠만 묶어 둬도 충분하다. 몇 개의 기업이 현재 환율로는 대금 지불을 못 하겠다고 배 째라고 해 버리면 해당 신용장에서 파생시킨 케이의 환치기는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케이는 그 전에 발을 빼야 하는 거다.
나는 비슷한 작업을 이수학 비서실장이 거느린 신성물산 직원들의 협력을 받아서 처리했기에 10%나 되는 이자를 줬으며, 1500억이 추가로 기어들어 온 것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케이의 버지니아 트레이딩 직원들도 이 피라미드 전체를 파악하진 못할 것 같은데…. 케이는 영국에서 판을 펼쳐 놓고, 판을 접는 것은 한국으로 들어가서 진두지휘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햄리스, 버킹검 캐티털, 스윙스, 더치 쉘, 박스 시스템 등등 듣도 보도 못한 회사 이름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적게는 수십만 파운드에서 많게는 천만 파운드까지 합계 금액을 달러로 환산하면 6억 불이 훌쩍 넘어간다.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리스트를 살펴보니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기업이 두 개가 있었다.
‘ARM, Flomerics. 이게 영국 태생 기업이었나?’
언젠가 유동 자금이 생기면 지분을 확보해야지 싶었던 기업이다.
ARM사는 2000년대 후반으로 가면 세계 최대의 반도체 설계 회사로 성장하는 기업이고, Flomerics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클라우딩 데이터 센터의 냉각 설계 분야에서 이름값 좀 하는 기업이다. 둘 다 알짜배기 중에 알짜배기다.
특히나 ARM사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스마트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AP(Application Processor, 스마트폰의 CPU)의 핵심적인 설계 특허가 있다. 작은 소비 전력과 발열량 제어 측면에서 해당 설계 기술을 안 쓸 수가 없다.
수십 년 뒤 스마트폰 사양을 통칭할 때 듀얼 코어, 쿼드 코어 폰이라고 선전할 때 그 코어가 ARM사의 설계 로직이 AP에 몇 개나 박혀 있느냐를 의미할 정도다. AP의 선두 주자인 퀄컴조차 ARM사의 로직 없이는 칩을 만들지 못한다.
‘인텔과 MS가 지분을 가지고 있어 미국 회사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영국 벤처 기업이었어. 역시 기억은 한계가 있어. 어찌 되었든 대박이네. 케이가 운이 좋은 건지, 내가 운이 좋은 건지.’
톡. 톡.
“누가 운이 좋은지 모르겠군.”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네?”
“아뇨, 아뇨. 비서실장님, 저는 바로 영국으로 들어갈 테니까 미국 시카고대 아닐 케이슨 교수님에게 연락을 좀 해 주시겠어요? 케이 외할아버지라고 하니까 미국 대사관에 연락을 하시든, 변호사를 선임해서 보내든 해 달라고 말이죠. 제가 호텔 잡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수고롭지만, 이 비서도 그렇고 미국 분들도 연락되면 그쪽으로 오라고 해 주십시오.”
“연락이야 어렵지 않지만 유 사장님… 정말 영국 가십니까? 어쩌시려고요.”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죠. 내일모레 터질 계좌부터 막고요. 케이도 고생했는데 조금은 챙겨야죠.”
“이미 환투기꾼으로 몰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직은 아니죠. 그리고 아니게 될 것 같네요.”
“네?”
“며칠만 연락책 역할을 부탁드립니다.”
“문제없습니다.”
“나중에 한국에서 뵙죠. 한턱 크게 쏘겠습니다.”
“하아, 모쪼록 별일 없기를 바라야겠군요.”
“일단 저와 꼬리를 끊어 주세요. 이제부터 제 계좌는 제가 알아서 하죠.”
“…….”
내가 주식 담보로 빌린 돈마저 모두 처리가 끝난 상태다. 내 계좌에는 유동 자금으로 대략 2.8억 달러, 한화로 2,300억 좀 넘게 있다. 기존 현금 400억을 빼면 수익률은 36% 정도 된다. 50%를 기대했는데 이래저래 수수료 떼인 게 크긴 컸다.
여하튼 이 돈은 히타치 반도체의 일부분을 옮겨 오는 데 쓰려고 했는데 상황이 그리되지 않을 것 같다. 더 좋은 먹거리가 있는데, 뭐하러.
히타치 반도체는 결국 내 운에 없나 보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별로 없다.
- *
휘이잉, 콰콰콰콰카카아.
다시 한 번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소리를 즐기며 영국에 도착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기다리자니 밤늦은 시간에 이 비서가 합류했고, 다시 한 번 케이의 체포 당시 상황을 들었다.
이 비서답게 추가적으로 조사를 했는지 백인 남자가 헉슬리라는 사내가 맞으며, 케이는 경찰서가 아닌 외환 관리국이라는 정부 기관에 끌려간 것 같다고 말해 줬다. 미 대사관에도 신고했는데, 어떤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뻔하다. 피의자 신분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고 대사관 직원도 만나게 해 줄 것이다. 그래 봐야 뭐하나, 불법 환치기 조사 대상이라며 금융 활동만 막으면 되는데.
결국 사나흘 뒤 혐의 없음으로 계좌도 풀리겠지만, 그때는 이미 케이의 환치기 설계가 밑바닥부터 우수수 무너져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 비서, 수고했어요. 내가 옆방도 잡아 놨으니까 일단 샤워하고 쉬어요. 내일부터 좀 바쁠 것 같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 *
다음 날 아침.
아니나 다를까. 호텔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한 잔 하고 있자니 헉슬리가 어찌 알고 사람을 보내왔다.
뭐, 거기까진 당연하다 싶었는데 뒤이어 들이닥친 이들을 보고는 솔직히 나도 놀랐다. 경호원 출신인 이 비서마저 그들을 보고 살짝 표정이 굳어졌으니까.
“이봐, 수한.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네 여자가 거지 되기 전에 너라도 돈을 토해 내는 게 어때? 대현물산 주식부터 처리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대현물산? 지겹다. 백수길 당신도 지겹고.”
헉슬리가 보낸 인물이 누군가 했더니 기껏 백 상무였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영국에 있었구만.
떡대들을 대동하고 와서 말 같지도 않은 얘기를 엄청난 협박인 양 떠들어 대고 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대현전자 상무까지 올라갔지 싶을 정도다.
“후후, 꼴에 느긋한 척하는군. 상황을 몰라? 내 물주가 네 여자의 계좌를 꽁꽁 묶고 있다고. 고의 부도 한두 번이면 여태 환투기한 게 삽시간에 아작 난다고.”
“하든지 말든지. 내 돈 아니니까 맘대로 해.”
“허허허! 판세도 못 읽는 놈이 간땡이만 커 가지고. 이거 처리 안 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그 여자가 결국 너를 물고 들어갈 텐데?”
“어이구, 추측한 그림이 겨우 그거였어? 케이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어이없는 놈을 물주라고 두고 있는 당신도 인생이 참 가련하다.”
쾅!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누구 인생을 입에 올려! 하찮은 버러지 주제에!”
백 상무는 탁자를 내려치며 당장이라도 날 끌고 갈 것처럼 행동했지만, 이 비서가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감히 그러지 못했다. 경호원 특유의 기세라는 게 있잖나. 순간 목줄을 팍 움켜쥘 것 같은 위압감 말이다.
“등 뒤나 살펴봐, 멍청아.”
나는 그런 백수길에게 한마디 쏘아 줬을 뿐이다.
백수길은 이 비서 못지않은 기세가 등 뒤에서도 다가온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나 보다.
내가 헉슬리와 만나 직접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저벅저벅.
커다란 바위 위에 작은 바위를 올려놓은 것 같은 인물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양복을 입었지만 어깨선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이 비서가 움찔할 정도의 기세가 카페 전체를 채운다.
묘하게 케이와 닮은 사나이다. 그의 뒤를 따르는 몇 명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일단 덩치부터 말이다.
“한국인이 두 명이군. 늙다리 따위에게 내 딸이 관심을 보일 리 없고. 자네가 유수한인가?”
“예, 그렇습니다. 케이 부친 되십니까? 주한미군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래전 일이네. 그건 그렇고, 내 딸 어디 있나? 대사관에 들렀더니 이미 풀려났다고 하던데.”
“보나 마나 어느 호텔방에 감금되었거나, 좀 더 정중했다면 헉슬리 녀석이 집으로 초대했을 겁니다.”
“아, 그럼 이놈들이 감히 내 귀염둥이를 초대한 녀석들인가?”
“네, 그렇습니다.”
“내 딸을 파티에 초대할 거면 내 허락부터 받아야지, 이것들아.”
케이의 아버지는 백 상무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백 상무도 작은 덩치가 아닌데 팔뚝 힘만으로 끌려 나온다. 노익장이 대단하다.
“으윽! 놔. 이거 놓으라고!”
“헤이, 그만! 그 손 놓지 못해!”
백 상무의 덩치들이 달려들며 팔을 낚아채려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샌가 시커먼 그림자들이 덩치들 앞을 막아서서 한 손으로 쑥 밀어낸다.
“[email protected]#, 가만있는 게 좋을 텐데. 우리 보스께선 가족 일엔 앞뒤 안 가리시는 분이거든.”
“헤이, 하마터면 탱크까지 가져올 뻔했잖아. @#$%!”
말 앞뒤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섞어 대는 흑형들이다. 키가 190센티가 훌쩍 넘고 어깨 근육은 옷을 찢어 버릴 듯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자들이다. 진지하게 말하건대 주먹이 내 얼굴만 하다. 드잡이가 장난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케이의 친가 쪽도 꽤나 잘나가는 군인 집안인가 보다. 별 하나쯤 달지 않고선 이런 기세를 내뿜을 수 없을 것 같다. 케이 부친은 드잡이하고 있는 쪽으론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내 딸 어디 있어?”
“놔! 이 손 놓으… 케엑! 크으윽.”
“어딨어?”
“케엑. 헉슬리… 헉슬리 저택에서 거래를….”
“아, 집에서 딜을 하고 있다고? 내 딸답네.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해야지.”
“앤드류 헉슬리가 보유한 저택은 총 세 곳입니다. 모두 런던 근교에 있습니다.”
일행 중에 덩치가 제일 작은 사내가 007가방을 열고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헉슬리의 주소를 찾는 것 같았다. 양복이 잘 어울리는 것이 군인보다는 직장인 느낌이다. 케이의 외가 쪽 인물인가?
007가방에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로고가 박혀 있다. 파라곤 펀드의 로고다.
솔직히 파라곤 펀드가 먼저 판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원래 역사에서 대활약을 펼쳤던 소로스가 이 환투기를 거드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은 꽤나 의외다.
물론 파라곤 펀드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 시타델 캐피털이라는 대형 투자 회사로 거듭나긴 하지만, 소로스 형님이 인정할 정도의 세력일 줄은 몰랐다.
이래저래 케이는 금수저가 확실하네. 그것도 천조국 금수저.
퍽!
“크윽.”
케이 부친이 백 상무를 탁자에 던져 버리고는 덩치 작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자, 출발하지. 윌슨, 어디 어디 있어?”
“예, 장군님. 제일 가까운 곳은 브라이튼 쪽입니다. 별장인 것 같으니 보는 사람도 없겠다… 바로 덮치면 될 것 같습니다만.”
“뭐야! 그냥 세 곳 모두 한꺼번에 덮치면 될 거 아냐!”
금방이라도 달려가 할리우드 액션 영화 한 편 찍을 것 같은 분위기다. 이 양반들 겉으론 침착한 척하고 있지만 케이가 무척 걱정스러운 거다.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하고 있다.
조금 어이없었지만 나는 바짝 얼어 있는 백 상무를 가리키며 말 한마디를 보탰다.
“굳이 그러실 이유가 있습니까? 이 떨거지를 길잡이로 데려가면 확실하잖습니까.”
“으음….”
“@#$%! Go, Go!”
살짝 분위기가 머쓱해지려고 하자 군인들이 백 상무를 포함해 덩치들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카페 밖으로 향했다. 케이의 부친도 곧바로 등을 돌렸다. 솔직히 이 정도면 내가 영국으로 날아올 필요도 없었겠다 싶다.
“가지! 뭐하나? 자넨 안 따라오나?”
내가 가서 뭐하나. 백마 탄 기사 노릇은 아버지가 하면 되지. 나는 영국 온 김에 돈이나 챙기면 그뿐이다.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그래야 케이 양이 고마워할 테니까요.”
“내 딸이 고마워한다고? 걔가? 설마.”
아버지조차 별로 감사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없나 보다.
“케이의 돈 문제부터 처리해 줘야죠. 파라곤 쪽 분도 남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그거였나? 그래, 맞아.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돈 문제에는 좀 민감하지. 윌슨! 여기 남아서 미스터 유를 좀 도와줘.”
“예, 장군님.”
내 어깨를 툭툭 털어 주고는 휙 하니 빠져나가는 케이 아버지다.
부우웅, 부우웅, 부우우우웅.
카페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대체 차가 몇 대나 출발하는 건지 모르겠다. 못해도 다섯 대는 되는 것 같다. 군대라도 끌고 온 건가 싶을 정도다.
- *
“잠시만요. 저도 커피 한 잔 하고요. 장군님 등쌀에 커피도 한 잔 못 했네요.”
윌슨이라는 사내는 긴장이 풀린 듯 카운터로 가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돌아왔다.
열린 007가방 안에는 이 시대에선 보기 힘든 초창기 위성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진짜 갑부 집안인가 보다.
“아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자, 그럼 해야 할 일이 뭐죠?”
뜨거운 커피를 훅훅 입에 털어 넣는 것을 보니 카페인 중독자다. 외국인 고객도 많이 만나 봤는지 명함부터 내밀고 쉬운 영어 단어로 얘기를 시작한다. 명함에는 파라곤 캐피털 매니저 윌슨이라고 적혀 있다. 나 또한 명함을 건네주었다.
“케이를 발 빼게 해 줘야죠. 일단 대금 결제하고 나와야 고객들끼리 치고받으며 협의하겠죠. 이대로 케이 돈이 중간에 끼어 있으면 배 째라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호오, 아가씨는 아직도 일부 판돈이 남아 있나 보죠?”
윌슨은 케이가 발을 빼는 도중에 걸려 넘어졌다고 여기나 보다. 일부를 못 뺀 것이 아니라 전혀 빼지 않았다니까.
“일부가 아니라 전부겠죠. 케이가 레버리지 순환을 B급 신용장까지 확대해서… 여기 리스트가 있어요.”
“뭐, 그래도 그 정도는 문제 없…. 어후, 이건….”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서류를 건네받은 윌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표정 관리는 하지만 대형 캐피털 매니저가 봐도 ‘No problem’이라는 말이 안 나오나 보다.
“좀 많죠?”
“이 정도는 제 선에서 커버해야…. 그러기엔 덩치가 좀 크네요.”
“일단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하는 항목은 체크를 해 두었습니다. 케이의 계좌는 일시 정지되었을 테니 대리 변제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겁니다.”
“이거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데…. 장군님을 따라갈 걸 그랬네.”
“피라미드 설계도가 있어도 헉슬리가 어느 기업을 배 째라고 할지 모르면 완전 꽝입니다. 파라곤이라면 그냥 융단 폭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 일이 아니니 무심코 얘기를 했다. 전달할 사항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카페가 있는 곳은 은행 밀집 구역이니 일 처리하기도 좋을 거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커피만 들이켜는 윌슨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ARM사와 Flomerics사의 지분이나 매입하러 가야겠다.
“잠깐만요. 파라곤이 나서면 나흘 정도면 아가씨 계좌는 풀 수 있을 거고, 리스크는 있으니까 상위 50프로는 대리 변제를 해 둬야 문제가 없을 텐데 그렇다고 아가씨와 파라곤의 커넥션을 밝히기도 애매하고… 결국 제3자의 돈이 2.8억 불 정도 필요하다는 결론인데… 미스터 유, 돈 좀 있으십니까?”
주절주절 늘어놓는 윌슨의 말에 나는 웃음부터 나온다. 정확히 2.8억 불을 언급하다니 결국 내 유동 자금이 얼마인지 뻔히 알고 있다는 말이잖나.
그 돈으로 파라곤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케이의 피라미드를 최대한 건져 내겠다는 말이다. 케이가 처리해야 하는 총액수가 6억 불 정도 되니 2.8억 불이면 절반은 건질 수 있다.
한데 왜 굳이 파라곤이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6억 불 정도면 융단 폭격하듯 대리 변제를 해 버리면 깔끔하잖나.
“돈 많은 미국 분들께서 왜 그러십니까. 가난뱅이 한국인에게 돈을 빌리다니요.”
“상황이 그러네요. 파라곤은 더 이상 이 판에 끼면 안 되거든요. 영국이 항복했으니 발을 빼는 타이밍인데, 또다시 폭격하겠다고 하면 물주들이 불안해한다고요.”
“저는 불안해해도 괜찮고요?”
“6개월에 수수료 10프로, 6개월 뒤에도 돈이 묶여 있으면 파라곤에서 지급보증하죠. 대신 계약 당사자는 파라곤이 아니라 케이 아가씨로 했으면 합니다. 우리 계약은 이면 계약으로. 후후후.”
파라곤 매니저답게 통이 크긴 크네. 자그마치 2.8억 불 지급보증에 이자 10%를 단박에 결정한다. 물론 케이가 환투기한 자금의 절반 이상이 살아 나올 거라고 믿는 이유겠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점점 더 이상해지네요. 지급보증까지 할 바엔 파라곤이 직접 나서면 될 일인데.”
“쩝! 당연히 그리 생각하시겠죠. 하나 닥터 케이슨께서 이참에 케이 아가씨를 교육시키겠다고 하셔서요. 그렇다고 저까지 손 놓으면 아가씨 이력에 큰 흠이 될 일이라….”
“교육을 시켜요? 닥터 케이슨이시면 케이 외할아버지 말씀이신가요?”
“예. 파라곤 펀드는 미 재향군인회의 돈을 운용하는 곳이거든요. 피 흘려 나라를 지킨 이들이 맡긴 돈이니 위험한 곳에 굴려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있습니다. 이번 영국 환율 폭격 건도 총리가 ERM 탈퇴를 선언한 그 시간부로 파라곤의 작전은 종료되었습니다. 수익률 68.95프로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요. 재폭격은 없어요. 루이스 장군님도 동의 못 할 일이에요.”
“루이스 장군님?”
“네, 루이스 C 로메티 장군님! 방금 보셨잖아요. 군인 노조 설립을 주창하다가 30년 군 생활이 단박에 날아갔지만, 여전히 군인들에겐 인기가 좋죠. 아가씨의 외가 쪽과 함께 파라곤 펀드의 VIP 고객이죠. 어떻습니까. 우리 펀드는 아주 안전해요. 믿으셔도 됩니다.”
어째서 파라곤이 안전을 우선하는 펀드 회사라고 소문이 자자한지 이제야 알겠다. 군인들이 노후 자금을 맡겨 두는 곳이네. 그래서 2000년대까지 쭉쭉 컸구나.
케이가 빌려 왔던 돈도 치고 빠지는 단타 위주가 아니라 왜 베이비 벨이나 히타치 케미컬 같은 우량 주식을 보유하는 걸 선택했는지 이해가 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추구하는 케이의 성향을 이번 기회에 바로잡겠다는 것은, 결국 케이가 파라곤의 후계자 중 한 명이라는 말이다. 나중에 파라곤에 합류하려면 수익률보다 안전을 우선하라는 뜻이다.
“으흠, 상황은 이해되네요. 좋아요. 케이도 명색이 내 동료인데 협력하죠. 대신 저도 위험을 최대한 줄여야 하니 대리 변제할 기업을 같이 정해 보죠. 그리고 덩치가 큰 사업체는 출자 전환으로 지분 매입을 하고 싶군요.”
“이야, 출자 전환까지? 정말 영국에 투자하시려나 보네요.”
“파라곤이 원금 보증을 하는데, 돈이 묶여도 부도는 확실히 피하고 봐야죠.”
“하! 알겠습니다. 한번 골라 보시죠.”
윌슨은 파란색 잉크가 채워진 만년필을 내게 권했다.
나는 B급 신용장 리스트에서 대충 고르는 듯 기업들 이름에 쓱쓱 동그라미를 쳤다. 그중에 ARM과 Floemrics가 포함된 것은 당연하다.
“일단 제 돈으로 이곳을 대리 변제하시면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정말 그러네요. 여기서 출자 전환을 꾀할 회사가 어디 어디죠?”
윌슨은 내가 동그라미를 친 기업들을 훑어보더니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름 케이의 피라미드에서 위험해 보이는 기업들 위주로 선택해 줬으니까.
“전자 관련 업체가 있던 것 같던데… 설계 회사 말입니다.”
나는 짐짓 확실치 않다는 듯 대답했다. 파라곤이 먼저 눈치채고 지분을 매입하면 곤란하다.
“두 곳이 있네요. ARM사와 Flomerics.”
“두 곳뿐인가요? 할 수 없죠. 여하튼 제 돈이 풀려나오면 그 회사 지분을 매입해 주세요. 같은 전자 업체이니 내가 나중에 공개적으로 처분해도 의심받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 처리하기는 무슨. 여윳돈이 생기는 족족 지분을 매입할 거다. 10년만 지나면 돈을 펑펑 쏟아 낼 화수분이 아닌가. 나로 인해 기술 개발에 나비효과가 나지 않게 멀찍이서 지분만 매입하고 있으면 된다.
“오호, 좋은 작전이네요. 실무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지분 매입에 따른 수수료는….”
“소수점 이하 자리. 그게 파라곤의 룰 아닌가요?”
“그것까지 아십니까? 계약서를 바로 작성하죠.”
역시 케이가 지분의 소수점 이하를 꿀꺽한 것은 파라곤에서 배운 짓이었어.
쓱쓱쓱.
윌슨은 이런 계약은 수없이 많이 해 봤는지 기본 계약서를 꺼내서 빈칸을 쓱쓱 채워 가기 시작했다.
부르르, 부르르. 깜빡! 깜빡!
그 와중에 007가방에서 전화가 울어 댄다.
“헬로우.”
-흑흑흑, 흑흑.
“케이 아가씨? 미스터 유, 아무래도 당신 전화 같네요.”
윌슨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화기를 내게 건넸다.
수화기 너머로 초상집에서나 들릴 법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수한! 내 돈, 내 돈…. 이 빌어먹을 헉슬리 놈이 내 계좌를….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피 땀 흘려 번 돈인데….
이야, 빠르기도 하다. 이 짧은 시간에 벌써 저택을 덮쳤어? 미군이 다르긴 다르네.
“몸은 어때? 괜찮아? 장군님 가셨는데 만난 거지?”
피땀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말을 굳이 하지는 않았다.
한국 드라마를 하도 많이 봤는지 케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상투적인 대사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구출됐으면 안전에 대한 말을 먼저 해야 하는데 제일 첫마디가 ‘내 돈….’이라니.
-그게 뭔 상관이야! 내 돈… 흑흑흑, 나 망했어. 망했다고.
“완전히 망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최대한 돈 빌려 줄 테니까 한국 가서 갚아. 그리고 미스터 윌슨에게 고맙다고 해.”
-위, 윌슨? 거기 있어?
“그래. 케이슨 님이 당신 교육 좀 시키라고 보내셨다는군. 파라곤에선 돈 안 빌려 주신대.
-흑흑흑, 이번 한 번이라고 말해. 딱 한 번이라고, 흑흑흑.
내가 윌슨에게 수화기를 건네려고 하니 윌슨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한다. 이 양반은 내 돈을 빌리고 보증을 서 주는 것이 본인 레벨에서 처리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던 거다.
“나중에 윌슨에게 따로 부탁을 해 보든지. 어쨌든 영국 밖에서 보자고.”
-흑흑, 아버지에게 연락해 줘서 고마워.
“이 비서가 알려 줘서 미국에 연락할 수 있었어.”
-이 비서에게 고맙다고 전해 줘. 은혜 꼭 갚겠다고.
“그래, 그럼 이만.”
-그리고 수한, 돈 빌려 준다고 하지 않았어? 어, 얼마나?”
“2.8억 불.”
-흑흑, 정말 고마워요. 헉슬리 이 새끼랑 백 상무까지 박살 내고 갈게요. 한국 가서 만나요. 이자까지 꼭 갚아 드릴게요.
훌쩍거리는 케이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 2.8억 불 얘기를 듣고 겨우 정신이 돌아왔는지 울음이 그치고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뀌었다.
아무리 대찬 성격이지만 덩치들에게 둘러싸여 저택에 감금되어 있는데 아버지를 만나니 안도감에 눈물이 나왔겠지.
돈이 걸려 있으니 안 따라가기도 뭐했을 테고, 내게 전화할 기회 따윈 주어지지 않았을 거다. 분하고 무섭고 억울하기까지 했을 거다. 멋모르고 날뛰는 헉슬리가의 애송이 한 놈 때문에 환투기를 말아먹을 뻔했으니.
툭.
이래저래 나에겐 기분 좋은 영국 여행이었다. 막판까지 선물을 쥐고 떠나지 않나. 파라곤이라는 대형 물주와의 연결고리도 얻고, 케이의 신원도 확인하고, ARM과 Flomerics도 건지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다.
쓱쓱쓱.
“다 됐습니다. 확인하고 서명하시면, 파라곤의 신규 고객이 되시는 겁니다. 돈은 계약서에 적힌 영국 계좌로 이체하시면 됩니다.”
“계좌 이체는 바로 하죠.”
쓱쓱쓱.
“잘 부탁드립니다. 파라곤의 매니저 윌슨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입니다.”
계약서를 서로 교환하고 정식으로 악수를 했다.
미국의 대형 투자 회사의 고객이 된다는 것은 물주와 연결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짐짓 표정 관리를 했지만 기뻐 날뛰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3장 텔레토비와 드루이드
용인 스마트 클라우드.
두 달 만에 돌아와 보니 회사에 어설픈 맛이 훅 하고 사라져서 조금 섭섭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비 셋업하고 저녁때 맥주 한잔 하는 맛이 꽤나 좋았는데 말이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핸드 터미널, PDA라 통칭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합니다만, 여하튼 상당히 어렵습니다. 로직이야 통신칩에 내장된 펌웨어를 조금 수정하는 정도인데, 바코드 인식하는 센서의 정확도가 오락가락하고, 결제 영수증 출력할 때 종이 걸림 문제도 있고, 데이터를 본사로 송신할 때 문자가 길어지면 글자가 깨집니다. 버튼 입력 값이 얽히는 일도 잦고요. 어휴, 이거 인원을 충원해 주셔야 합니다.”
탁자에 영업용 PDA를 분해해서 늘어놓은 채 설명을 해 나가는 김 대리다. 내가 영국에서 선물로 사다 준 금색 만년필을 지시봉 삼아 부품을 가리키는 폼이 탁자에 앉은 엔지니어들의 리더답게 느껴진다.
안 그래도 비쩍 마른 양반인데, 두 달 사이에 더 말라 버린 것 같다. 인력 충원을 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력은 공채 공고를 내놓고 있어요. 헤드 헌터들에게도 뿌렸으니까 조금만 기다립시다. 여하튼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 보죠. 일단 입력 신호부터. 내 생각엔 신호 딜레이를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은데, 이 회로 누가 설계했죠?”
“송 대리가 했습니다.”
“송 대리, 이거 데이터 저장과 출력 신호는 어떻게 구성했어요?”
“회로 구성이랄 게 뭐 있습니까. 여기 하드디스크와 입력 버튼을 액정에 연결했습니다. 중간에 통신칩에 펌웨어가 있으니 제어는 기존 휴대폰과 동일하게 했습니다. 물론 DRAM에 영수증 입력 데이터가 있으니 끌어다 붙였고요.”
역시 PDA를 휴대폰의 변형판으로 보는 게 문제다. 변형된 것이 아니라 확장판이라고. 인터넷 스마트폰까지 가면 끝판왕입니다요.
“음성과 문자는 다르잖아요. 문자 송출 데이터를 어떻게 끊고 있죠?”
“24바이트씩 끊었는데요.”
기계 번호, 날짜, 시간, 담당자, 거래 내역, 영수증 출력 여부 등등 필수적인 요소를 뽑아 본사에 데이터를 송출하는데 그렇게 작게 끊어 대면 당연히 데이터가 엉키지. 여러 대의 기기가 한꺼번에 데이터를 서버로 날리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데이터 헤드라인에 기계 번호를 찍고 데이터를 날리는데 웬걸, 다른 기계에서 데이터가 동시에 날아와 봐라. 서버는 ‘어? 왜 데이터 두 개가 오지? 어느 데이터가 어느 기계 쪽 데이터야?’라고 하다가 ‘잘 모르겠는데, 그럼 에러를 띄우자.’라고 하면서 데이터 서버가 오류를 일으키는 거다.
김 대리 입장에서는 불량이 간혹 일어나니 더욱 오리무중이겠지. 시험할 때야 한 대만 동작시키니 문제가 없었을 테고, 같이 일하는 엔지니어가 동시에 다른 기기로 시험할 때에 한해서 그런 에러가 발생할 테니까.
이래서 QA 엔지니어들이 시험 절차를 어기는 개발 엔지니어를 미친 듯이 갈구는 거다. 개발 엔지니어들이 볼 때는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인데, 품질 검증 엔지니어들에겐 누군가 절차를 어기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거든.
신규 인원을 뽑을 때는 품질 엔지니어도 뽑으라고 해야겠다. QA 따위는 필요 없다고 엄청 싫어하겠지만, 개발 엔지니어들만 모아 놨더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꼴이다.
각설하고, 답이나 알려 주자.
차근차근 한 대의 기기에서 데이터를 송출하는 경우에 한해서 먼저.
“이건 휴대폰의 아류작이 아니라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컴퓨터라고 봐야 합니다. 데이터를 그리 처리하면 안 된다고요. DRAM에 있는 입력 데이터와 하드디스크의 펌웨어 저장 데이터를 단순히 붙여서 보내면 안 돼요. PLL, 즉 Phase Lock Loop를 돌려야죠. PLL 디바이스를 여기 보드 중앙에 박아 넣어서 회로를 다시 꾸며야 합니다.”
“예? PLL요?”
“왜 그래요? 한때 반도체 회사 직원이었잖아요. 반도체 모듈 중앙에 하나씩 박혀 있는 게 PLL이라고요.”
“아, DRAM끼리 데이터 딜레이 일치시키는 버퍼 말씀이군요.”
“그래요. 데이터 버퍼라고도 하죠. DARM과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끌어올 때 PLL에 모아서 한꺼번에 보내는 겁니다.”
각기 다운로드 속도가 다른 컴퓨터에서 실시간 동영상을 받아서 스크린에 영화를 띄운다고 생각해 봐라. 앞뒤 장면이 마구 엉킬 것 아닌가. 버퍼 컴퓨터를 한 대 두고 컷 순서에 맞춰 영화를 짜깁기해서 순서대로 쏴 줘야 하는 거다.
“오홋! 역시 사장님은 천재십니다.”
“천재가 아니고, 당연한 거예요.”
“으흐흐.”
송 대리는 민망함을 웃음으로 때운다. 그럼 이번엔 김 대리 차례.
“김 대리, 메인 서버 시스템을 맡았죠?”
“네.”
“혹시 PDA를 여러 대 실험했을 때 데이터 수신 에러가 나지 않았어요?”
“…어?”
“그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러네요!”
“여러 대일 때만 데이터가 엉키는 이유가 뭔 것 같아요? 송 대리 건이랑 똑같은 이유입니다.”
“아앗!”
엔지니어링이라는 게 이런 면이 있다. 원인을 알고 나면 너무나도 당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정도 힌트만 주면 엔지니어들이 알아서 해결책을 찾는다.
“24바이트마다 기기 번호를 삽입하든지 그 방식이 시원찮으면 데이터 버퍼를 만들어 놓고 순차 회로로 데이터를 찾아가든지요.”
“알겠습니다. 어휴, 이러면 종이 걸림 문제만 해결하면 대충 시제품이 나올 것 같은데요.”
“PDA에도 서버에도 SRAM을 충분히 삽입합시다. 최종 데이터는 하드디스크에 저장한다고 해도 리얼타임으로 데이터 송수신엔 SRAM을 쓰자고요.”
“예, 그래야겠습니다.”
“오! 그럼 회로를 완전히 뜯어고쳐야겠는데요.”
김 대리와 송 대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옆에서 딴 소리가 들려온다.
“SRAM은 너무 비쌉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영업용이라 가격에 민감할 텐데요.”
“권 부장, 제품 퀄도 안 났는데 무슨 가격을 따져? 외려 양산에 좀 문제가 있겠던데. 부품 마운터라고 가져다 놓은 게 4헤드짜리더라. 부품이 이리 많은데, 뺑뺑이 돌리면 불량률 감당 못 해. 유 팀장, 아니, 유 사장님. 당장 16헤드짜리로 바꿔야 합니다.”
“액정 사이즈도 키워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결제 내역을 한눈에 볼 수가 없습니다. 아! 결제 취소 기능도 없더군요.”
“액정을 더 키우면 어쩌자는 거야? 액정이 크면 클수록 리플로우(기판과 부품에 열을 가해 붙이는 공정) 때 불량률이 엄청나다고. 지금도 액정 화면은 충분히 커!”
내 양쪽 어깨에서 훈수가 대단하다. 나운영 부장과 권재욱 부장이다. 나도 왜 이들이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놀러 왔다고 하더니 회의실까지 들어와 내 옆에 자리 잡았다.
“여러분은 대체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저흰 지금 기술 회의 중인데 말입니다?”
“나? 나는 월차지. 유 사장이 오셨다고 해서 회식 있나 싶어 가지고 헐레벌떡 온 거 아니겠습니까? 온 김에 라인도 둘러보고. 물론 돌아보니까 아이고, 고칠게 한두 곳이 아녀.”
나운영 그룹장 특유의 반말과 존댓말이 섞인 말투. 둘러대는 꼴도 엉망이다.
“저는 대현의 영업부장. 협력 업체를 돌아보는 것은 외근 업무의 일부입니다. 물론 기술 회의 참석은 좀 그렇지만, 유 사장님께서 일본 휴대폰 중간 다리 역할이기에 물량전망치나 물어볼까 해서 부득이 이리 자리했네요.”
권재욱 부장의 변명도 엉망이긴 매한가지다. 그런 일은 전화로 해도 충분하잖나. 회의에 참석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나중에 사석에서 얘기를 나누면 털어놓겠지만 속내는 뻔하다.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니 줄을 세운 선두 주자가 퇴직을 하면 남는 사람들이 어찌 되는지는 무수히 많이 봤을 것이다.
그때 선택지는 딱 두 가지다. 퇴직한 사람을 따라서 나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줄을 찾느냐인데, 그걸 이리저리 재고 있는 거다.
“여하튼 제품 개발에 있어 어떤 고객에게 어떤 식으로 팔지 영업 전략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권 부장,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라인에서 개발 엔지니어들이 직접 일을 하고 있다니까. 공정 표준도 없이 각자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어 보고 있더라고.”
“그거야 나중에 정하면 되죠. 고객 니즈(Needs, 요구 조건)와 원가 분석도 없이 제품부터 만들면 결국 토이 프로젝트(Toy Project, 쓸데없는 개발)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에구, 마음 같아선 우리 애들이라도 빌려 주고 싶다마는….”
두 부장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 양반들이 내 첫 번째 작품이 걱정되긴 걱정되나 보다. 내게 넘어올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겠지.
내게 합류해서 내 회사가 상장되면 대현전자에 있는 것보다 훨씬 부자가 되겠지만, 자칫 나자빠져 버리면 대기업 부장 월급을 발로 차 버리고 제 손으로 개털 되는 멍청이를 선택한 꼴이 되니 고민이 클 것이다.
토이 프로젝트라는 단어는 그 모든 상황을 대변한다. 개발자들만 모아 제품을 기획하면 대부분 로봇 태권V를 만드는 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농담 삼아 부르는 말이다.
신규 아이디어와 신기술을 구현한다고 개발비만 잔뜩 쓰고 정작 사 갈 고객은 전혀 없는 프로젝트 말이다. 가격은 비싸고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도 토이 프로젝트를 몇 개 하다 보면 사세(社勢)가 기운다. 소니가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것이다.
“으흠,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대현전자처럼 척척 돌아가겠습니까. 인력 충원은 차근차근 할 거니까 일단은 우리가 1인 다역을 해야죠.”
솔직히 두 부장들의 말은 내가 우려했던 사항이기도 하다. 대기업 안에서 일개 직원으로 일할 때는 ‘뭐가 이리 절차가 복잡해? 잡무는 왜 이리 많아. 딴죽 거는 놈들은 또 왜 그리 많고.’라고 투덜대지만 나와서 보면 그게 다 필요한 일이거든.
나는 인생 1회 차에서 중소기업 사장을 해 본 경험이 있기에, 몇 안 되는 인력으로 아등바등해야 하는 독립 사업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대현전자 내에서 PDA를 출시했다면 초반에 인력을 때려 부어서 기획안부터 만들고, B2B 고객 잡아서 정식 프로젝트를 만들며, 개발자들을 갈아 넣어서 완성도를 높였을 거다.
그래 봐야 뭐하나, 결국 그걸 내 것으로 하려면 최후에 회사 사업부를 통째로 먹을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 그 또한 리스크가 크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내가 회귀한 직후 세웠던 1차적인 방법이었고, 결국 그게 쉽지 않다고 판단하지 않았나.
어쨌든 쉬운 길 따윈 없다. 이거나 저거나 양날의 검이긴 매한가지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냥 제조업 말고 특허 회사나 하지? 주식을 하든가!’라는 생각이 머릿속 한편에서 떠오르지만, 그 정도에 머물 바엔 지금이라도 강남의 아파트나 신성전자 주식이나 왕창 사 놓고 평생 골프나 치며 사는 게 낫다.
‘회귀까지 했는데 이번 생도 허접하게 살 순 없어!’
나는 순간 혼잣말을 할 것 같아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올라갈 목표를 생각하면 ‘한번 해 보자’라는 생각이 모든 불안감을 씻어 낸다. 이왕 귀족이 되겠다고 했으니, 최소한 케이의 외할아버지 수준은 되어 봐야 하지 않겠나.
손녀딸이 2천억 가까운 돈을 날리는 걸 교육비로 생각하며, 밑에 있는 사람은 아가씨를 그리 혼내시면 안 된다고 내게 수백억짜리 이자까지 주며 자기 선에서 일을 처리하는 집안이다.
아무리 내가 21세기 인간이라고 하지만 상상하기 쉽지 않은 재력과 권력까지 갖춘 집안. 심지어 겉으로는 시카고 대학 교수로 지내며 사회적으로 존경까지 누리지 않나.
“일단은 지금 이 시제품이라도 들고 다니며 고객부터 만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현자동차 부품 납품에 이걸 쓰면 정말 딱인데. 솔직히는 정 회장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그냥….”
“권 부장님, 그쯤 하죠.”
권 부장은 이 프로젝트를 실제로 구현할 곳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3만 개 넘는 부품을 매일 공급받아야 하는 대현자동차라면 핸드 터미널의 고객으로 딱이긴 하다. 구매 및 재고 파악 인력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를 테니까.
사실 대현전자에서 PDA를 출시하는 것은 처음 시나리오를 짰을 때 내 계획의 일부이기도 했다. 역시 권 부장은 영업맨이다. 어영부영 술상무나 하며 부장 직에 오른 인물이 아니다.
그런 인물이 정 회장을 만나서 도움을 받으라는 말을 하다니.
지금 가면 안 된다. 지금 도움을 요청하면 큰 빚을 지는 형국이다. 그래서 정헌몽 사장이 당신들이 여기 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거라고.
“여하튼 여기까지 오셨는데 커피라도 한 잔 하고 돌아가세요. 정 사장님께도 양주 한 병 사 온 게 있으니 전달해 주시고요.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도 해 주시고.”
“…….”
“어, 유 사장. 알고 있었어?”
“에휴! 나 부장님, 누군 눈치가 없답니까?”
“하하. 미안, 미안. 그럼 이왕 말 나온 김에 내가 라인 확실하게 돌고 갈게. 정 사장님이 도와줄 게 있으면 도와주라고 하셨거든. 라인 레이아웃(장비 배치) 바꾸고 싶어서 환장하겠더라고. 해도 되지?”
“도와주면 고맙죠. 하하!”
“하하하. 이제 내 빚 좀 갚겠네.”
나운영 부장은 빚을 갚는다며 회의실을 훌쩍 벗어나 1층으로 다다다다 내려갔다.
“저는 부품 공급 업체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원가를 좀 낮출 수 있을 겁니다.”
“출장비 챙겨 드려야겠네.”
“한 말씀만 더 드리면 이렇게 지출만 하시면 안 됩니다. 회사는 일정 수입부터 있어야 합니다. 일본 열린 장터를 믿으시면 안 됩니다. 결국 몇 개월만 지나면 부품 업체들이 직수출을 하게 될 겁니다.”
“알아요.”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계속 충고하듯 말을 하게 되네요.”
“오해 안 합니다. 외려 고마워요.”
권재욱 부장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 또한 내게 빚이 있다고 여기나 보다. 사내에 견제 세력이 없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정헌몽 사장의 측근으로 자리매김했을 테니까.
- *
‘그렇지. 핸드 터미널을 론칭시키려면 최소한 4개월은 걸릴 테고, 고객 잡고 퀄 받고 하면 실제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기는 6개월은 지나야겠지. 돈이 있긴 하지만 회사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면 안 돼. 설비 투자라면 몰라도 이건 자선 사업이 아닌데.’
나는 회의를 파하고 1층 사무실로 내려왔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 잠시 주변을 살피면 정신이 맑아진다. 직원들에게 선물을 나눠 준다는 핑계도 있고 하니 좋다. 출장을 다녀왔으면 볼펜이라도 한 자루 줘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1990년대다.
“자, 내가 선물 사 왔어요. 마음에 드는 색깔로 고르면 돼요.”
“우와! 사장님 센스 짱!”
사무실 입구부터 출장 갔다 온 영업 사원처럼 선물을 늘어놓고 나눠 주기 시작했다. 김 대리에게 줬던 비싼 몽블랑 만년필은 아니지만, 깔끔한 명함 지갑을 하나씩 주니 좋다고 한다.
“한덕구 씨, 여기 선물이에요. 이제 갈색밖에 안 남았네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어느새 사무실 귀퉁이까지 도착했다. 덩치가 우람한 사원이었는데, 아마도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 송 대리 파트원인 듯하다. 책상도 아주 크다. 누가 보면 부장급인 줄 알겠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띠옹, 띠옹, 띠옹.
책상 위에서 K폰이 펄쩍 뛰어다닌다.
“어! 전화 왔네. 받아요. 급한 전화인가 본데.”
진동과 소리까지 요란하기에 얼른 집어다 한덕구 씨에게 건네주었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데 덕구 씨는 살짝 민망하게 웃더니 폴더를 툭 하고 열었다 닫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K폰 시제품이다.
“전화 온 거 아니었어요?”
“아, 그냥… 알람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알람용?”
“예. 제가 화초 키우는 걸 워낙 좋아해서요. 물 주는 시간과 햇빛이 드는 쪽으로 화분을 옮기는 시간을 알람으로… 헤헤, 업무에 방해는 안 되고요. 사무실 공기도 좋아지고….”
“으음?”
그러고 보니 사무실에 화초가 정말 많다. 하나같이 파릇파릇하니 전문가다운 솜씨가 느껴진다. 자연스레 이 사내가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물도 주고 화분 위치를 바꿔 대는 모습이 상상된다. 화초가 쑥쑥 자라는 걸 보면 재미있기도 하겠네. 재미있기도… 재미… 어라?
내 머리에 뭔가 훅 하고 스쳐 지나갔다. 핸드 터미널을 출시하기 전에 회사의 수익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 말이다.
“이봐요, 드루이드. 아니, 한덕구 씨. 혹시 프로그래머예요?”
“예.”
“휴대폰에 알람 설정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서 집어넣었다는 말이네요. 맞나요?”
“예….”
한덕구는 내 말에 주눅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다른 사장이었으면 업무 시간에 뭔 짓을 한 거냐고 호통부터 쳤겠지만 내가 그럴 리가 없잖나.
“오우, 보너스 줘야겠네. 내게 좀 보여 줄 수 있어요?”
“예에?”
“칭찬하는 거니까 안심해요. 알람 프로그램 같이 좀 봐요. 좋으면 나도 쓰게.”
“아, 예.”
한덕구 사원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휴대폰을 툭툭 뜯어서 메인 보드를 컴퓨터 하드디스크 케이블과 연결한다. USB 포트가 없는 때라 이렇게 과분할 정도로 연결을 해야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
펌웨어 코딩 화면으로 들어가니 시간 단위로 타임 테이블을 짤 수 있게 되어 있다.
“원래는요, 스케줄표를 휴대폰에 삽입하려고 만들었는데 액정 화면이 너무 작고 입력하기가 귀찮아서 중간에 드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진동과 벨소리를 이용해서 규칙적으로 알람 설정만 했습니다. 여기에 원하는 시간 간격으로 온 오프 모드만 집어넣으면 됩니다.”
한덕구 사원은 일주일 간격으로 되어 있는 날짜 판에 들어가 다시 24시간 단위로 쪼개져 있는 칸에 온오프를 선택하고 진동과 벨소리를 선택할 수 있게 해 놨다. 일견 간단한 프로그래밍이지만 여태 에러를 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식물을 키우는 데도 유용하지만 강아지 밥 줄 때도 유용하겠네요. 목욕시키고 털 깎아 줄 타이밍도 정할 수 있겠네요.”
“아, 그렇습니다. 유용할 겁니다.”
“해당 시간에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점수를 줘도 되겠네요.”
“미션 성공이라고요? 혹시 게임 프로그래밍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한덕구 사원의 눈빛이 반짝반짝한다.
“맞아요. 식물보단 귀여운 강아지가 커 나가는… 아니다, 아예 펫들이 미션 점수에 따라 진화하는 게 좋겠네요. 그 정도 게임성이면 사람들이 재미있어하지 않을까요? 비싼 휴대폰 샀는데 그런 게임 하나 정도는 보너스로 껴 줘야죠.”
“허헉! 정말 재미있겠는데요?”
내가 한덕구 사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자 칸막이 너머에 있던 프로그래머들이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프로그래머들은 기본적으로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다들 뭐해요. 이리 와 봐요. 재미난 게 있으니까.”
“오오오! 사장님, 저희 게임 만들어도 됩니까?”
한덕구의 책상 곁으로 프로그래머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우리가 게임사는 아니지만 PDA를 만드는 회사니 그 정도 서비스는 가능하죠.”
“저 슈팅 게임 정말 잘 만들 자신 있는데요.”
“노, 노! 안 돼요. 말했잖아요. 우린 게임사가 아니라고. 일본 휴대폰 반제품 팔 때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넣을 정도면 족합니다.”
“아, 그렇군요.”
한덕구를 비롯해 프로그래머들이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없다. 이 양반들이 이 게임이 얼마나 대단한 반향을 일으킬지 몰라서 그렇다.
이 게임은 그 유명한 다마고치라고요.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게임이 선을 벗어나 로봇 태권V가 안 되게 제어하는 거다.
다마고치는 출시 직후 귀여운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여학생부터, 유저의 행동에 따라 진화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RPG적 요소로 인해 남학생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여태까지는 단순한 슈팅 게임이거나 액션, 퍼즐 등등 유저는 매번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이처럼 성장시키는 과정 자체가 게임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90년대에 처음 등장하는 신문물인 것이다. 대박 제품은 언제나 기존 개념을 뛰어넘는 컬처 쇼크를 동반하는 법이다.
“슈팅 게임이 아니라고 실망하긴 이를 것 같은데요. 밥 주고, 물 주고, 똥 치워 주고, 쓰다듬어 주고, 운동시키고, 이걸 어떻게 최적으로 조합하면 어떤 펫으로 진화할지를 만들어 보면 아주 재미날 텐데요.”
“진화라… 오홋! 그럼 용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죠. 이왕 용으로 진화했다면 불을 뿜는 모션도 넣으면 어떨까요? 앙증맞게 춤을 추거나, 통화할 때마다 매번 하트를 날리는 펫도 있으면 좋겠는데. 물론 도트로 예쁜 캐릭을 만들기는 쉽지 않겠지만.”
“귀여운 거라면 저에게 맡기세요. 자신 있습니다.”
프로그래머 사이에서 한덕구가 유독 손을 번쩍 들며 좋아라 한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타입인가 보다. 다마고치 개발자로 딱이네 싶다.
“대충 개념이 잡혔으니 조작법을 어찌할지 생각해 볼까요?”
“버튼 입력을 최소화해야 할 것 같은데요. 게임 조작은 단순! 진화 결과는 매우 다양하게. 그렇지만 도전 의식도 생기게 25% 수준으로 평범한 동물로 진화하게 말입니다. 아니면 키우는 도중에 죽거나.”
이야, 게임 좀 해 본 사원이다. 이 양반도 개발자로 적격이네.
“죽는 건 좀 그렇고, 병들거나 평범한 동물이 되면 숲으로 방생하는 기능을 넣었으면 하네요. 실제 생명처럼 다뤄 주자고요.”
“오, 아주 세련된 방식인데요.”
나는 알고 있다. 다마고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다가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맘에 안 드는 캐릭으로 성장하면 게이머들이 리셋시켜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한데 그걸 두고 생명 경시 풍조를 부추긴다고 TV에서 엄청 떠들어 댔거든.
그 뒤로 다마고치 열풍이 많이 시들어 버렸다. 1990년대가 원래 좀 고리타분한 시대였잖나.
여하튼 이런 기능을 넣어 주면 그런 어이없는 경우는 없으리라.
“아! 그리고 화면에는 시계가 같이 출력되는 걸로 해 줘요.”
“시계를 출력하라고요?”
“네, 당연하죠. 고객은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시계를 보는 겁니다. 표면적으론.”
“게임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씀이시군요.”
“펫을 잘 키워서 숲에 놔주면 등급별로 무료 통화를 몇 분씩 보상해 줘도 좋겠네요. 그건 내가 통신사와 협의해 볼게요. 그 정도면 확실한 프로모션이 되겠죠?”
이 또한 다마고치 열풍을 이어 나갈 무기다. 다마고치는 생명 경시 이슈 말고도 시장에 짝퉁들이 범람해서 빠른 시간 내에 레드 오션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통신 회사와 계약해서 출시하면, 통신사들이 알아서 온갖 특허를 들이밀며 짝퉁들을 단속해 줄 거다. 휴대폰에서 벗어나 독립된 다마고치를 만들어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와우! 게임하면 돈을 버는 거네요. 아! 그런 보상이라면 저희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레어 캐릭으로 진화하면 수신음을 달리할 수 있는 기능 같은 거요.”
이야, 몇 분 만에 온갖 아이디어가 튀어나온다. 수신음을 바꿔 주는 보상이라니 죽여주는데? 그것도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사업이었잖아.
이 정도면 엔지니어들이 알아서 할 것 같다.
“자, 자! 그렇다고 핸드 터미널을 소홀히 하면 안 되니까 송 대리 오면 인력 세 명에 한해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켜 봐요.”
“제가 할게요. 사장님, 저에게 시켜 주세요.”
“저도요!”
“노, 노.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했죠. 기존 업무까지 포함해 송 대리와 협의해요. 난 딱 세 명이라고 말했어요. 담당자 외에 아이디어를 보태 주는 것까진 뭐라고 하지 않겠어요.”
“제가 해야 하는데… 저 정말 게임 잘하는데….”
“하하하!”
나는 우글우글 몰려든 프로그래머들에게 한껏 웃어 주고 자리를 벗어났다.
마침 2층에서 시제품을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온 송 대리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달려든 프로그래머들이 ‘뭐지?’ 하며 어리둥절해하는 송 대리를 회의실로 질질 끌고 갔다.
회의실로 몰려가 자신이 담당자가 되어야 한다고 떠들어 댈 것이 뻔하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밤샘을 마다 않는 개발팀다운 분위기다.
저런 열정이면 시제품은 단언컨대 2주 안에 튀어나올 거다.
역시 우리 회사는 개발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영업과 양산이 문제다.
- *
쏴아아아아.
방진복으로 갈아입고 에어샤워를 거친 뒤 라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지지직.
벌써 김 대리가 핸드 터미널 시제품을 다시 만들어 보려는지 바삐 움직이고 있다. 회로 자체를 통째로 고쳐야 하는 일이기에 테스트용 기판에 각종 부품을 수작업으로 갖다 붙이고, 납땜을 통해 전선을 이어 붙여 회로도를 구현하고 있다.
내가 회의를 파했음에도 송 대리와 함께 회로를 어찌 바꿀지 논의한다고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맸을 것이다.
“이 장비는 이대로 쓰면 말짱….”
다른 한쪽에서는 나운영 부장이 설비 엔지니어들과 같이 뭔가를 열심히 논의하고 있다. 설비 개조에 대해 이견이 있나 보네.
양산 공정에 관한 한 나보다 훨씬 전문가이니 괜히 내가 나설 이유는 없다. 나는 김 대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 대리, 벌써 시제품을 만들어 보는 건가요?”
“아, 예. 오셨어요?”
쉬이이익.
납땜기 위로 연신 후드가 세차게 돌아간다.
전자 제품 후공정은 반도체 전공정에 비해 오염 관리에 조금 관대하지만 그래도 납땜 플럭스 흄(기체)이 돌아다니면 안 된다. 몸에도 해롭고 기판을 오염시키면 전류가 찔끔찔끔 새서 얼마 지나지 않아 회로 전체가 망가진다.
“이야! 회로도를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하하, 그럼요. 두 달 동안 이 짓만 했는데요. 기판 중앙부만 회로를 수정하면 될 것 같네요. 다행히 PLL과 SRAM도 있어서 당장 해 볼 수 있습니다.”
빠지직, 쉬이이익.
“힘들었죠?”
“…네?”
“일본 애들도 장비 셋업하고 빠진 것 같은데, 고생 많았어요.”
내가 라인에 들어와 제일 먼저 놀란 점이 우리 사람들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미우라(히로아키)가 장비당 두 명씩 셋업 엔지니어를 붙인다고 했는데 말이다.
“저보다 애들이 고생했죠. 일본 애들이 우리 라인에 계속 죽치고 있으려고 하기에 교육 스케줄 짜서 한 달 만에 돌려보냈습니다. 장비당 제 파트원들 두 명씩 붙였으니까 걱정 마세요.”
라인 보안까지 신경 쓰다니 김 대리는 확실히 리더의 자격이 있다. 내가 송 대리보단 김 대리와 좀 더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이 그런 이유다. 생각도 깊고 언제나 진중하다.
개발 선봉장으로 배치했는데도 이처럼 실무를 등한시하지도 않는다. 내가 밖으로 나다닐 수 있는 건 순전히 김 대리가 집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후회 안 해요?”
“네?”
“후회 안 하냐고요?”
“후회라뇨?”
“날 따라 나온 이유를 지금 물어보는 겁니다.”
나는 확인을 해 주려는 거다.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걸 대화를 통해 확신을 주어야 한다.
우린 비즈니스맨이다. 정으로 묶인 사이가 아니지 않나. 내가 대가를 주기 전에 확신을 공유해야 뒤탈이 없다.
“…회사 상장하면 지분 나눠 주신다면서요. 부자 되려고 나왔죠.”
김 대리가 공업용 마스크를 벗고 표정까지 다잡으며 말한다. 생각보단 직설적이다.
“하하하! 솔직해서 좋네요.”
“더 솔직해지자면 재미가 없어서 나왔습니다.”
“재미가 없어요?”
“대현전자에 있어 봤자 팀장님 떠나시면 또다시 부속품 노릇 해야 할 걸 생각하니 막막하더라고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기보다 이곳을 택하는 게 더 쉬웠습니다. 마누라를 설득하기도 쉬웠고요.”
“아내분도 동의하셨어요? 한 가정의 가장인데, 너무 지른 거 아니에요?”
“지른 거 아닌데요. 연말 보너스 1,000% 만들어 주신 분이라고 했더니 단박에 오케이하더라고요. 상장하면 지분 크게 나눠 주실 것 같다고 말이죠. 가진 것 없는 신혼부부의 논리적인 재테크 설계일 뿐입니다.”
“너무 낙관적인 거 아닌가요?”
나는 짐짓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김 대리, 내가 당신 말이 허풍이 아니게 해 줄게요. 그게 당신의 노고에 따른 내 대가예요.
“아닌데요. 사장님이 대현에 합류하시기 전에 저는 유선 전화기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놈이었습니다. 한데 사장님을 만나고선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휴대폰을 만든 놈이 되었어요. 냉정히 생각해 봐도 제 인생에 사장님 같은 천재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요? 사장님 같은 천재가 사업에 인생을 걸었다면 저 같은 일반인은 그 사업에 묻어가야죠. 그게 PDA가 됐든 뭐가 됐든.”
“하하하! 대체 뭘 보고 그래요? 아직 아무것도 없는 회사잖아요.”
“글쎄요. 아닌 것 같은데요. 한국에 이런 회사는 몇 군데 없습니다. 웨이퍼만 들어오면 반도체부터 제품까지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곳. 수동소자야 그냥 사면되는 거고. 심지어 부족한 것은 사장님이 다 채우시죠. 기획, 핵심 기술, 영업 전략….”
“결국 나를 믿고 나왔다는 말이군요.”
“저희가 바보는 아니잖아요. 평생 대기업에서 굴러 봤자 유 팀장님 같은 대박 찬스를 만날 가능성은 0.01프로도 안 된다는 거. 그렇다고 빌붙는 건 아닙니다. 저희는 여기 말고도 갈 데 많습니다. 대현전자 휴대폰 개발팀이었다고 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취직할 수 있습니다.”
“쩝!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으니 상당히 민망한데요. 그래도 김 대리 짐작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야 좀 솔직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러네요. 하하하!”
나는 웃으며 김 대리 곁을 떠났다. 옆에서 납땜을 같이 하고 있던 사원들이 알아서 소문을 퍼뜨려 줄 거다.
지금 만들고 있는 시제품으로 짐작해 보면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핸드 터미널도 제품 모양새를 갖출 것 같다. 양산 라인 또한 예상외로 괜찮은 상황이다. 나운영 그룹장이 목소리 높이지 않고 조곤조곤 논의할 정도라면 세부 튜닝만 남았다는 의미다.
한쪽 구석엔 대현전자 마크가 있는 웨이퍼가 수두룩하다.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걸로 봐서 불량 웨이퍼가 분명하다. 나운영 그룹장이 테스트용으로 불출해 줬겠군 싶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많이 도와줬나 보네.
인생 1회 차와 비슷한 인연이 2회 차에도 이어지고 있다. 백 상무를 걷어 냈으니, 이번 회 차에서 나운영 그룹장은 확실하게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나야말로 솔직하지 못했네. 뭘 이리저리 재고 있어? 그냥 스카우트하면 되지.”
나는 터덜터덜 나운영 그룹장에게 걸어갔다. 머리가 커서 방진복 모자가 꽉 낀 꼴이 우습다.
펜잡이들 승진은 주량순이고, 공돌이들 승진은 머리 크기순이라는 농담이 있는데 꽤나 잘 맞는단 말이야.
찍, 찍.
끈적이 발판으로 방진복 신발에 묻은 미세한 먼지를 뜯어내며 나운영 그룹장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진복을 입으면 모두 비슷비슷한 텔레토비가 되니 나운영 그룹장은 그제야 나를 알아본다.
“어? 왜 들어왔어? 벌써 퇴근하려고? 나 금방 하고 나갈 건데.”
“회식은 아무리 늦어도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내 말부터 들어요.”
“무슨 말?”
“2주 줄 테니까 정리하고 나와요. 부장 월급 두 달 받아 봤으니 미련 없을 거 아니에요.”
“한 번 더 받아야 퇴직금이 오르지. 퇴직금 계산은 석 달 월급 평균이잖아.”
퇴직하라고 했는데 놀라지도 않는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말이네. 외려 얘기를 나누고 있던 우리 회사 엔지니어가 더 놀란다. 대기업 부장이 고스톱 쳐서 올라가는 자리는 아니잖나.
“그쯤 해요. 돈이야 여기서 더 벌면 되니까. 권 부장에게도 같이 말해 줘요.”
“권 부장 좋지! 오 이사는?”
“안 돼요. 커넥션은 확실하게 유지되어야 해요. 그게 정헌몽 사장이 봐주는 이유니까.”
“아, 그치. 냅둬야겠네. 캬아! 역시 내 생각이 딱 맞았다니깐. 나부터 스카우트할 줄 알았지! 하하하하! 내가 대현 물량 팍팍 당겨 올 테니 염려 놓으셔.”
퍽! 퍽!
반도체 라인의 금기인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기에 내가 나운영 그룹장의 팔을 붙잡았다.
“물량 걱정은 마시고 데려올 사람은 생각하는 숫자에서 반의반으로 줄여요. 너무 막나가면 정헌몽 사장도 싫어할 수밖에 없으니까.”
“에? 스무 명으론 이곳 돌리려면 턱도 없어.”
헉! 대체 몇 명이나 데려오려고 했던 거야?
제4장 모두 모두 흥해라
시간은 흘러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10월 말.
나는 막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권재욱 팀장과 같이 자리했다. 피곤한 안색이지만 입이 귀에 걸린 것으로 보아 결과는 좋았나 보다. 전화로 보고해도 되는데, 공항에서 회사로 바로 복귀한 것만 봐도 뻔하다.
“여독도 안 풀고 바로 오셨네요.”
“빨리 오고 싶더라고요. 토이 프로젝트 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장난감 영업으로 가슴이 뛸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에그펫은 엄연히 전자 제품이라고요.”
“솔직히 이거 정발 대박입니다. 특히 일본에선 유행을 넘어 광풍이라고 할 만큼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시부야에서 한번 직접 보셔야 하는데….”
에그펫은 다마고치의 한국식 이름으로, 휴대폰에 삽입된 게임 이름이자 달걀 모양처럼 만든 독립 게임기 이름이기도 하다. 개발자들에게 작명을 맡겼더니 그런 이름이 나왔다.
권재욱 팀장에게 에그펫을 쥐여 주며 영업을 맡겼을 때 당황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진중한 표정으로 시연을 해 줬는데, 귀여운 캐릭터들이 튀어나와 애교를 피우는 화면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었다.
출시한 지 불과 2주째인데 영업팀 전화기는 끝없는 러브콜로 불이 날 정도다. 권재욱 팀장이 영업맨들을 열 명이나 데리고 합류했기에 망정이지, 그들이 아니었으면 국내 영업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초도품 3만 개는 일찍이 바닥이 났고, 지금 국내 오더만 해도 10만 개가 넘어가고 있다.
초반 전략은 일본 공략이었다. 할로윈 데이 이벤트를 빙자해 일본 오픈마켓용 K폰에 깔아서 뿌렸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납작한 달걀 형태로 별도의 게임기도 같이 출시했는데 그건 대박 차원을 넘어 시장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대현전자조차 에그펫 열풍이 심상찮음을 깨닫고 출시 일주일 만에 K폰 전체에 깔겠다고 프로그램 라이선스를 사 갔을 정도다.
에그펫을 핑계로 정헌몽 사장은 엊그제 나를 불렀으며, 에그펫 건과는 별도로 조금 의외인 제의를 했다. 그 제의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그 생각은 잠시 미뤄 두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시부야는 언제 한번 가 볼게요. 여하튼 광풍이라니 출장 결과는 좋았겠네요. 일본과 미국, 딜러는 어디고 얼마나 계약했나요?”
“50만 대 오더를 꽉꽉 채워서 왔습니다. 일본엔 30만 대, 미국엔 20만 대.”
“우와!”
내가 최대치라고 생각했던 물량이 단박에 계약되었단다. 정말 에그펫 열풍이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딜러도 믿을 만하고, 계약 조건도 아주 좋습니다. 일본엔 반다이, 미국엔 해피토이와 일괄 계약을 맺었고, B2B인데 딜러 마진율 3.5%로 결정했으니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물량도, 딜러 마진율도 모두 만족합니다. 역시 전권을 드렸더니 제대로 하시네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권 팀장은 계약서를 탁자 위에 자신 있게 내놓았다. 과찬이라고 하면서도 우쭐한 웃음이 살짝 입가를 스친다.
아직 우리 회사는 해외 영업을 뛸 여력이 없으니 B2B가 유일한 대안이다.
반다이와 해피 토이라면 공히 완구 업계에서는 네임드다. 수익률보단 대박 제품을 수입해 주가가 올라가면 되는 회사들이니 마진율 따위는 관심 없었을 수도 있다.
솔직히 3.5%면 물류비와 소매점 관리하는 비용으로 모두 지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포장지에 로고 스티커를 어떻게 붙일까를 고민하고 있으리라.
시간이 지나면 아예 라이선스를 달라고 달려오게 될 거다.
“현재 오더만 따져도 국내 10만 대, 해외 50만 대. 이야, 다음 달까지 라인 풀로 돌려야 겨우 물량을 맞추겠네요.”
“대현에 가신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일단 프로그램을 넘겼어요. 50만 카피 라이선스를 줬죠.”
“오오옷! 그럼 게임기 매출은 33억이고, K폰은 프로그램 카피 매출이 15억. 도합 월매출 48억에 원가를 제하면 대략 5억 정도가 순이익이군요.”
인력이 부족하니 권재욱 팀장이 재무 업무를 상당 부분 떠안고 있다. 벌써 직원이 백이십 명을 돌파하고 있는데, 재무를 맡길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일본에 있는 이 비서를 복귀시킬까 생각 중이다.
“월 순이익이 5억이면 순익률이 10프로! 우아, 기분 좋네요.”
나는 정말이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미래를 알고 있었다지만 머릿속에서 실현되는 것과 눈앞에서 실현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드디어 내 회사가 순익을 보고 있는 거다!
체면 때문에 춤을 못 추고 있을 뿐이다!
“사장님이 단가 책정을 잘하신 덕분입니다. 이 정도 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봐야죠. 박리다매를 해 보려 했는데, 순익이 10프로나 되다니.”
나는 그냥 운이 좋다고 둘러댔다. 제조업에서 순익 10%면 아주 장사 잘한 것이고, 에그펫에 한정 지어 보면 최적단가라 할 수 있다.
특히 나처럼 600억을 한 방에 투자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설비 감가를 3년에 걸쳐 한다고 보면 한 달에 아무 짓을 안 해도 16억씩 까먹고 있는 거니까.
따라서 제조업의 경우 출하 단가를 정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재료비야 제품 한 개당 정해지지만, 인건비와 설비 감가비는 팔리는 대수가 많아지면 1/n로 훅훅 떨어지는 탓이다.
일정 대수 이상을 팔지 못하면 인건비와 감가비 때문에 적자가 되고, 그렇다고 박리다매를 한다고 출하 가격을 너무 낮추면 재료비 때문에 수익률이 바닥을 기며, 심지어 재고가 발생하면 폭삭 망해 버린다.
즉, 판매 대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해야 소비자도 만족하고 수익률도 높은 단가 결정을 할 수 있다. 빵빵한 기획팀과 재무팀이 있는 대기업조차 신규 제품을 출시할 때는 최종 출하 단가를 사장의 결정에 맡기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다.
수십 년 뒤 2000년대 중반 중국의 샤오미가 이런 단가 전략을 정말 귀신같이 해내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나는 다마고치가 10년간 7천만 대 가까이 팔린 이력을 알고 있기에 최선으로 지를 수 있었다.
K폰 한 대당 3천 원씩 받는 조건으로 대현에 프로그램 카피 라이선스를 줬고, 게임기는 한국엔 5천 원, 일본엔 1,000엔, 미국에는 7달러에 출시했다.
그러면 게임기 한 대당 재료비가 2,500원이고 여기에다 인건비, 경비, 감가비, 세금 등등을 제하면 게임기든 휴대폰이든 한 대당 천 원 정도가 남는다.
일견 월 매출 48억에 순익 5억이 작을 수 있지만, 순이익이라는 게 내 직원들의 월급을 모두 챙겨 주고 남은 돈이라는 것이 의미가 크다.
즉, 이 성공을 발판으로 직원 월급 걱정을 덜고 핸드 터미널이라는 사업을 제대로 론칭시킬 수 있다.
권재욱 팀장이 우려했던,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이 에그펫 한 방으로 해결된 거다.
“핸드 터미널만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맞아요. 이제 정말 진짜 승부가 남았죠. 이것도 운이 좋아야 할 텐데요.”
역시 권재욱 팀장답다. 내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 듯 핸드 터미널 얘기를 꺼냈다.
원래 역사에서 PDA는 전자 업계에서 대표적인 실패 사업이었다. 결국 스마트폰까지 연결되어야 하는 내 전략에 비추어 보면, 출시했을 때부터 시장에 제대로 안착해야만 한다.
섣불리 시장에 내놨다가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면 큰 그림이 무너진다. 품질 검사도 철저하게 하고, 고객 타깃팅도 잘 잡아야 한다.
“시제품만 봤을 때는 에그펫 못지않게 대박을 칠 것 같습니다.”
“그래야죠. 영업맨들에게 고객 리스트는 좀 뽑아 보게 하셨습니까?”
“아직 정리 중일 겁니다. 일단 국내 자동차 업계와 제과 업계를 초반 타깃으로 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정석적인 접근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권 팀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부품 재고가 원가와 직결되는 자동차 업계와 동네 구멍가게까지 고객으로 가지고 있는 제과 업계에 핸드 터미널이 유용할 것은 매우 당연하다.
한데 국내 업체가 이런 선진 시스템에 대해서 얼마나 필요성을 느낄지가 문제다. 할 수만 있다면 역시 해외 진출이 답이긴 할 텐데, 아무리 권재욱 팀장이 뛰어난 영업맨이라고 해도 단박에 해외 고객을 물고 오긴 힘들 것이다.
“여하튼 그 고민은 조금 미뤄 두고 좋은 소식부터 전하러 가죠. 대형 계약을 체결했으니 오늘 소고기 회식도 좀 하고요.”
“하하! 좋습니다. 제가 양주도 한 병 사 가지고 왔습니다.”
“돈 좀 썼겠어요. 2차로 영업팀 맥주 파티는 내가 쏘죠.”
“오, 2차까지. 그럼 특별히 양주를 두 잔 드리겠습니다.”
“술잔 꽉 채워서 두 잔! 하하하!”
나는 탁자 위에 있던 계약서를 권 팀장에게 다시 쥐여 주고는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계약 체결의 환호성은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받는 게 좋다. 그게 내가 정한 룰이며, 앞으로 우리 회사의 문화가 될 거다.
- *
삐이이익.
“아아, 아아! 테스트, 테스트. 잘 들립니까?”
권 팀장이 생긴 모습과 달리 확성기를 들고 약간의 장난을 친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펜을 놓고 자연스레 문 앞에 서 있는 권 팀장을 바라본다.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종이 쪼가리가 보이십니까?”
“예에!”
“뭔가요, 부장님~?”
영업팀에서 주도적으로 장단을 맞춰 준다. 뻔히 해외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가져온 것이 계약서 말고 뭐가 있겠나.
“에그펫 50만 대 계약서입니다.”
“와아아아아!”
“자그마치 28억짜리입니다. 우린 대박 났습니다, 대박!”
“와아아아! 대박!”
영업팀을 위주로 개발팀 양산팀 할 것 없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펄쩍펄쩍 뛰며 좋아라 한다. 이럴 땐 내가 숫자로 확신을 줘야지 않겠나.
히죽히죽 웃고 있던 권 팀장이 내게 확성기를 건네준다. 조만간 사내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해야지 싶다.
“아아, 확성기 테스트!”
“오오오! 사장님.”
“오늘자로 에그펫 과제는 A급 성공임을 선언합니다. 한 달 흑자가 확실시되는 오늘, 당사 사규에 근거해 연말 보너스 1,000프로의 12분의 1, S급 고과 인력 기준으로 인센티브 83프로가 적립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올해 연말까지 더 열심히 하셔서 회삿돈을 팍팍 당겨 가시기 바랍니다.”
“와아아아아아!”
S급 고과는 두세 명에 불과할 테니 직원의 대부분은 월급 50% 정도를 보너스로 적립한 셈이지만, 뭐 어떤가? 숫자가 크면 듣기 좋잖나.
“오늘은 소고기 파티입니다. 과음만 안 하면 2차까지 쏩니다. 도망치더라도 1차는 하고 도망치세요!”
“와아아아! 사장님 멋쟁이!”
“뭣들 해! 풍악을 울려야지!”
텅! 텅! 텅!
확성기 소리를 들었는지 어딘가에 있던 나운영 그룹장이 나타나서 물병을 받치고 있던 쟁반을 빼 들고 두들겨 댔다.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우와! 우와! 와우! 오와!”
유치하게 1990년대 TV에 나오는 개그맨들이나 출 법한 춤을 춰 대는 직원들이다. 아니지. 1990년대가 맞군!
나운영 그룹장은 내게 달려와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다. 늘 자세 잡고 있던 권 팀장도 오늘만큼은 기분이 날아갈 듯한가 보다.
우리 세 명은 머리를 맞대고 어깨동무를 한 채 꽹과리처럼 쳐 대는 쟁반 가락에 맞춰 춤을 췄다. 영업맨들이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샴페인 뿌리듯 주전자로 우리 머리 위로 물을 뿌려 댄다. 뭐 어떤가? 조금 있으면 소주로 샤워를 한 텐데.
“거기 구름집이죠? 저 송 대리요. 오늘은 소고기예요. 아니, 삼겹살 말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소고기라니까요. 그리고 소주는 꼭 진로로 주세요. 아셨죠? 아이, 한 박스가 뭐예요. 전체 회식이라니까요. 열 박스는 있어야죠.”
송 대리가 회사 앞 식당 주인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구멍가게였는데 우리 회사 직원들 회식을 도맡아 하더니 어느새 건물을 올리고 간판도 ‘구름 삼겹살’로 바꿨다.
말만 삼겹살집이지 메뉴는 소고기, 쭈구미구이 등등 원하는 대로 바꿔 주는 우리 회사 회식 맞춤집이다. 이제 규모가 더 커지겠네 싶다.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다리, 다리, 다리, 다리!”
이제 사무실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좋다. 모두 모두 흥해라. 내게 붙은 사람 모두 모두 흥해라!
- *
대현그룹 본사 회장실.
정 회장은 정헌몽 사장을 앞에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끼어 있듯 앉아 있는 최 상무만 좌불안석이었다.
“엊그제 수한이 만났다며.”
“예, 아버님.”
“만나면 내한테 데려오라 안 했드나.”
“유 사장은 이제 대현의 직원이 아닙니다. 여태 기다리셨는데, 좀 더 기다리시죠. 마음이 동하면 유 사장이 아버님을 뵈러 올 겁니다.”
“니도 그라고 최 상무도 그라고… 볼 때마다 기다리라 하니 갑갑해 죽겠다.”
정 회장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정헌몽 사장에게서 시선을 떼어 최 상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후계자 싸움으로 충성 경쟁을 시킨 게 아니라는 설명을 하실 참이라면, 감히 말씀드리건대 변명처럼 들릴 뿐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게 상책입니다.”
“이봐, 임자. 그게 벌써 석 달째야. 수한이 그누마가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설득을 해야 한다고.”
“…….”
재차 고개를 돌리는 정 회장이다.
“헌몽아, 니 수한이 만나 보이 어떻드나? 그누마 큰 거 한 방 터뜨렸다든데.”
“예. 에그펫이라고 조만간 TV 광고에도 나올 겁니다.”
“얼마나 되누?”
“성장세로 보면 연 매출 기준으로 천억 정도에 순익 100억은 될 겁니다.”
“생각보다 그리 크지는 않네.”
“직원이 고작 백이십 명밖에 안 되는 회사입니다. 대현전자 직원이 6,500명에 매출이 1조 6천억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인당 매출은 대현전자의 세 배 이상입니다.”
“휴우, 그라네. 그놈답다고 해야겠네.”
정 회장은 계산법을 달리하는 정헌몽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러다 영영 훌훌 날아가는 거 아니가? 내 걱정돼 죽겠다. 수한이가 만든 휴대폰이고 통신칩이고 연신 대박을 쳤는데, 니가 추진하는 차기 제품은 내가 봐도 영 아이다. 알맹이는 고사하고 껍데기도 허접하기 그지없어.”
“유 팀장 시절에 추진하던 원가 절감 모델이 있습니다. 그걸로 차기 제품을 내면 일단은 견딜 만….”
“신성의 S폰이 훨씬 좋아 보인데이. 판은 우리가 깔고 돈은 신성이 먹게 생깄으. 결론은 하나뿐이야. 수한이 그누마 잡아야 한데이. 니하고 같이 가야 돼.”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제안은 이미 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아직 나를 안 찾아온단 말이가? 휴우.”
“기다십시오. 올 겁니다.”
정 회장은 연신 한숨을 쉬면서도 탁자 위에 놓인 차를 들이켤 생각은 없는 듯했다. 결국 답답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창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집안싸움한다고 제 발로 내 집에 날아든 봉을 쫓아낸 꼴이야. 으이그, 대체 이거 무슨 꼴이고.”
“…….”
“회장 체면 차린다고 이러고 있는 것도 우습고… 아이고, 잘하는 짓인지 모르겄다.”
정 회장 특유의 혼잣말처럼 하는 넋두리가 이어졌지만, 정헌몽 사장과 최 상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벌써 12월 초.
다사다난했던 1991년이 마무리되어 간다. 탕비실 냉장고에서 박카스를 꺼내고 있는데 영업팀 고 대리의 볼멘소리가 칸막이 너머로 들려온다.
“정 과장님, 곤란해요. 에그펫은 K폰에서만 돌아갑니다. S폰에서는 동작 안 합니다.”
-아니, 스마트 클라우드가 대현전자 자회사라도 됩니까? 당연히 S폰에서도 돌아가도록 해 줘야죠. 요즘 휴대폰에 에그펫은 기본인데!
“저희라고 안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잖습니까. 신성에서 에그펫 라이선스를 구매하지도 않았는데 어쩝니까.”
-계약을 맺으면 될 거 아닙니까. 라이선스 비용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나요!
“아이고, 그럼 SJ에서 푸시해 주시든지요. 아니면 S폰 파실 때 그냥 저희 에그펫 게임기를 끼워 주시면 되죠. 5천 원밖에 안 하는데.”
-우리는 통신사인데 게임기를 왜 끼워 줍니까? 이건 제품 스펙 개선을 요청하는 건데.
“정 과장님, 제발 저 그만 괴롭히시고 신성보고 뭐라고 하세요. 이건 해결 안 돼요.”
-어후! 신성이고 스마트고 간에 말귀를 정말 못 알아들네! 끊어요!
삐이익, 툭.
“씨… 지들은 돈 쓰기 싫고, 신성한테는 찍소리도 못 하는 주제에… 어후!”
고 대리가 전화를 끊고는 수화기를 씹어 먹는 흉내를 내며 화풀이를 한다.
“고생이 많아요, 고 대리.”
“아, 사장님.”
“이거 마시고 숨 좀 돌려요. 신성이 라이선스 사 갈 때까지 파이팅 해 줘요.”
나는 내가 마시려고 했던 박카스를 고 대리에게 권했다.
영업팀 멤버들은 하나같이 베테랑들이다. 돈이 걸린 문제에는 고객들이 아무리 뭔 소리를 해도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앓는 소리를 정말 잘한다.
대현은 라이선스비로 한 달에 15억을 지불하는데 신성은 0원이다. 영업팀에서는 물러설 수 없는 일이다.
1990년대는 라이선스 개념이 확고하지 않다 보니 SJ 담당자가 공짜로 프로그램을 깔아 달라는 엉뚱한 소리를 한 것뿐이다.
나중에 인터넷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스마트폰 유료 앱 개념이 도입되면 이런 해프닝도 땡이다. 인터넷 대중화는 몇 년밖에 안 남았으니 조금만 견디면 된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요… 신성하고 협상이 잘 안 되고 있는데요.”
“그래요?”
“사실 신성의 S폰이 점점 인기가 올라가고 있거든요. 앞으로도 판매 대수가 더 많아질 테니 라이선스 단가를 깎아 달라질 않나, 블랙마켓도 이슈화하고 있고요.”
“블랙마켓?”
“혹시 PC 통신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하이텔이나 천리안을 말하는 건가요?”
“아시네요.”
당연하지. 나도 PC 통신 세대인데. 삐삑대는 모뎀 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확실히 이때쯤일 것이다. 신세대라면 누구나 하이텔과 천리안에 계정 하나는 파 두고 있는 때 말이다.
“근데 PC통신이랑 에그펫이 무슨 상관이죠?”
“제가요, 하이텔 회원인데 최근 게임 동호회에서 ‘에구모니’가 아주 핫합니다.”
“에구모니? 뭔 소리지? 사투리 아닌가요?”
“에그펫의 짝퉁을 장난스럽게 부르는 말이에요. 이게 정식 에그펫 프로그램이 있어야 돌아가긴 하는데, 에그펫 마니아들에겐 꽤나 핫합니다. 고수들은 다운로드받아서 직접 컴퓨터와 연결해서 설치하고, 설치 못하는 이들은 돈을 주고 에그펫을 맡기기도 합니다.”
“호오, PC 통신답네요.”
나 또한 게임을 다운받아 날밤을 새웠던 사람 중 하나이기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불법이긴 합니다만… 어쩔까요? 아직 통신사들은 눈치 못 채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이버 세상의 불법 다운로드를 어찌 막나? 누군가 짝퉁 게임기를 파는 게 아니라면 프로그램 변형은 내버려 둬도 된다.
“오히려 호잰데요? 정식 에그펫이 있어야 변형 게임이 동작한다면서요? 변형 프로그램이 아무리 풀려도 대기업이 라이선스 없이 휴대폰에 그걸 깔지는 못할 테고, 우리 게임기는 그 변형품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더 많이 팔리겠네요. 좋군요.”
“어! 사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는데요.”
참 신기하단 말이야. 게임을 만들어서 올려 봤자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시간을 갈아 넣는다.
이 시대에도 열정 페이가 있었네. 조금은 안타깝다. 내가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라 일일이 그런 사람을 데려와서 쓸 수도 없고… 없고… 없… 아닌데. 난 그 방법을 알잖아.
“잠깐만, 고 대리. 숨겨 놓은 모뎀 꽂아서 하이텔로 들어가 봐요.”
“엇! 아셨어요?”
“퇴근 무렵마다 삑삑대는데 누가 모릅니까? 꽂아 봐요, 혼내는 거 아니니까.”
우리 회사는 나름 잘나가는 IT 기업이기에 두 명에 한 대꼴로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다. 고 대리는 나름 영업에서 김 대리급이니 당연히 컴퓨터가 있다.
고 대리는 얼굴을 붉히며 서랍에서 모뎀을 꺼내 연결한다. 나름 모뎀 소리를 줄인다고 스티로폼 박스로 잘도 포장해 뒀다.
삐이익, 삐이익.
모뎀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지자, 건너편 프로그래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린다. ‘누가 신성한 근무시간에 PC 통신을 해?’ 하는 표정이다.
“거기 프로그래머들 잠시 이리로 건너와 볼래요?”
“어, 사장님이다.”
한덕구를 비롯한 프로그래머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다들 고 대리가 띄워 놓은 하이텔 화면이 눈에 익은 듯한 소리부터 한다.
“이거 조만간 유료화된다고 하던데. 전화비 많이 나오는 거 아닌가?”
“사장님께서 켜라고 해서 켠 거야.”
“아아, 됐고. 월 만 원 정도는 지원 가능하니까 적당히 써요.”
“오오오!”
“여하튼 그게 문제가 아니고 다들 ‘에구모니’ 들어 봤어요?”
“예. 에그펫 짝퉁이잖아요. 경찰에 신고할까요?”
“노, 노! 이걸 양지로 끌어냅시다. 우리 회사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잖아요.”
“네? 불따(불법 다운로드)인데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된다니요?”
“우리 회사는 게임사가 아니잖아요. 하드웨어를 파는 전자 회사라고요. 이런 프로그램을 애드온 프로그램으로 변경시켜서 열정 페이를 돈으로 바꿔 줍시다. 그럼 서로 윈윈할 수 있어요.”
나는 21세기 단어를 늘어놓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애드온(Add-on) 프로그램, 열정 페이 등등 21세기 단어는 느낌이 팍 하고 오는 말들이라 굳이 뜻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옷!”
한덕구 씨가 제일 먼저 알아챈 듯했다.
“하이텔에 스마트 클라우드 이름을 걸고 게시판부터 만들어요. 거기에 기존 에그펫 프로그램을 블랙박스 코드로 바꿔서 플랫폼 형태로 오픈합시다. 하이텔 유저들이 코드를 애드온 형태로 갖다 붙이면 변형된 게임으로 동작할 수 있게. 애드온을 다운로드받은 사람들이 추천과 반대를 누를 수 있게도 해 주고, 추천 수가 일정 이상이면 정식 라이선스를 주고 유료로 전환해 주라고요. 무료 버전엔 10일만 동작 가능하도록 ‘기간 한정 코딩’도 블랙박스로 해서 오픈해 줘요.”
“우와아아아!”
몇 년은 지나야 일반화되는 프로그램 판매 방식이다. 프로그래머들은 단숨에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애드온을 21세기 게임 용어로 변경한다면 확장팩, 또는 DLC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애드온을 유료화하면 얼마를 매겨야 하나요? 우리도 먹나요?”
“우린 기기를 파는 거잖아요. 휴대폰 업체와도 기기마다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으니 우린 손해 볼 게 없지요. 애드온 다운로드 1건당 50원 정도로 책정하고 10원 정도만 우리가 먹읍시다. 이래저래 우리도 인력이 들어가니까.”
“제가 게시판 관리자를 하겠습니다.”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든다. 당첨!
“송 대리하고 업무 협의하고 업무 변경 결재 올려요.”
“넵!”
“어, 사장님… 그러면 컴퓨터와 정식으로 연결할 수 있게 에그펫에 잭도 만들고 케이블도 출시해야겠는데요? 안 그런가요?”
“담당자 당첨! 에그펫 버전 업하고, 케이블 업체 찾아서 일 처리해요. 완료되면 인사 고과에 반영토록 하고. 하드웨어는 김 대리, 코딩 업무는 송 대리와 업무 협의부터 해요.”
“만세! 오오오!”
“유료 결제는 하이텔하고 업무 협의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 이제 담당자 당첨은 끝.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을 테니 각자 리더들과 상의해요.”
“오! 달려. 달려!”
아이디어가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기에 나는 이쯤 하기로 했다.
내가 발길을 2층으로 돌리자 사원들이 다다다다 어디론가 달려간다. 또 송 대리와 김 대리를 붙잡고 서로 일을 달라고 할 것이다.
이게 우리 회사의 문화다. 철저한 차별. 업무를 기안하고 먼저 달려드는 사람이 인사 고과를 잘 받는다. 뭐든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이 제일 고생하는 법이니까.
우리 회사에서 인사 고과는 곧 연봉과 직결된다. 심지어 같은 프로젝트에 힘을 보탠 사람들도 덩달아 인사 고과가 올라간다.
파벌이 나뉘는 불합리를 제거하기 위해 하위 고과율을 지켜야 하는 법도 없다. 인사고과표에 리더가 인정하는 항목이 올라가면 인센티브율이 끝없이 증가한다.
인센티브 파이는 오로지 흑자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니 자선사업도 아니다.
- *
꾸벅꾸벅.
사장실로 올라오니 나운영 부장이 소파에 앉은 채로 졸고 있다. 권 부장은 그 앞에서 싱긋 웃고만 있을 뿐 그를 깨우지도 않는다.
잠시 탕비실 냉장고에서 박카스를 꺼내 온다고 자리를 비웠더니 그새를 못 참고 자고 있다. 정말 피곤한 모양이다.
“아우우! 나 부장님이 그러시니 나도 졸리네요. 자요, 박카스.”
“어우, 죄송 죄송.”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C조는 그냥 믿고 맡겨요. 집에도 좀 들러 보시고.”
자그마치 예순 명이나 되는 인력을 끌고 온 나 부장이다. 4조 3교대 근무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물량으로 보면 딱 스무 명 정도가 부족하다.
현 사업 규모에서 직원을 더 늘리려면 월급을 깎는 수밖에 없는데, 내 관점에선 월급을 깎느니 차라리 생산량을 깎는 게 낫다 싶어 양산팀 정원을 예순 명으로 결정했다. 당연히 나 부장은 눈코 뜰 때 없이 바쁠 수밖에 없다.
양산 라인은 몸이 좀 힘들어서 그렇지 쌩쌩 돌아가고 있다. 나운영 부장이 설비 담당자로 대현전자에서 베테랑급 남자 사원 열 명을 끌고 왔으며, 육아 때문에 퇴직했던 베테랑급 여사원들을 위주로 모집해 왔기 때문이다.
육아 휴직이 일반화되지 않은 1990년대이니 나름 머리를 잘 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회사 월급이면 대기업 여사원 못지않으니, 베테랑급 여사원도 만족해하고 있다.
“기숙사가 얼마나 편한데요. 사장님과 한 지붕 아래 있다고 하면 마누라도 뭐라 안 하고요.”
“아이고, 이틀에 한 번은 집에 가서 가족들과 저녁도 같이하고, 주말엔 목욕도 좀 하시고 해요.”
“킁킁, 이틀에 한 번은 샤워하는데. 히히히.”
나는 퇴근 좀 하라고 농담을 한 건데 작업복에 코를 가져다 대며 장난을 치는 나 부장이다. 4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 저리하는 걸 보면 이 일이 재미있긴 재미있나 보다.
하긴, 양산 사람은 노는 장비 없이 척척 돌아가는 라인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하잖나.
“핸드 터미널을 보니 어떻습니까? 김 대리 불러요?”
“아닙니다. 사장님 설명만으로 충분합니다. 영업팀이 봐도 흠잡을 데 없습니다.”
“생산팀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품 개수도 적당하고, 디자인적으로 부품이 잘못 끼워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불량률은 양산 책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나운영 팀장이 권재욱 팀장 말투를 흉내 낼 정도로 진중해졌다. 나름 핸드 터미널은 제품 품질로서 완벽하다는 의미다.
내가 QA 흉내를 내며 바닥에 떨어뜨려 보고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러 봐도 에러가 없으며, 데이터가 꼬여도 리셋 버튼 하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난 놈이다.
찌이잉, 찌이잉.
온갖 크기의 바코드를 새겨 놓은 테스트 종이를 스캔해서 영수증을 수십 번 뽑아 봐도 종이 걸림조차 없다. 매끈하게 코팅된 영수증 전용지마저 몇 번이나 개선을 했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김 대리가 해골바가지로 변했는데, 일주일은 강제로 휴가를 보내야겠다 싶을 정도로 엔지니어들이 혼을 갈아 넣은 제품이다.
“휴우, 제품은 명품인데 고객이 안 잡히네요.”
“사장님, 역시 정 회장님을 찾아뵙는 게 어떠십니까? 대현자동차에만 들어가면 이거 들불 번지듯 대박 칠 겁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 또한 이제 정 회장을 만날 때가 되었다 싶었으니까. 굳이 핸드 터미널 때문이 아니라, 대현의 제안 때문이었다.
-용인에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짓자. 그걸 대현과 함께하자.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긴 하는데 말이다.
“권 팀장, 이거 제과 업계에서는 관심 없어? 콱 물어 와 봐.”
“나 부장님, 제과 업계는 생각보다 영세합니다. 이걸 사서 납품 관리를 할 바에야 빵 봉지 몇 개 잃어버리는 게 싸다고 여기고 있어요. 저도 의외이긴 합니다만 현실이 그러네요.”
권 팀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핸드 터미널의 출고가가 문제다.
대당 26만 원. 부품 개수를 아무리 줄이고, 공정을 단순화시켜 봐도 이보다 더 내릴 순 없었다. 액정도 큼지막하고, 저장 용량도 소비자 입맛에 맞게 키우다 보니 결국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로봇태권V가 안 되게 내가 디자인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20만 원 아래로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어떤가요? 갔다 오셨지 않습니까?”
“이 비서와 같이 고객 라운딩을 십여 차례 했습니다. 일본은 가격보다 기존 고객이 누구냐고 딴죽을 걸더군요.”
“역시 일본답네요. 신규 시스템에 먼저 발들이기는 싫다 이거군요.”
보수적인 일본 문화다. 한국산 제품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미국 고객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쇼핑몰 업체 위주로 돌았는데 핸드 터미널 천 대 정도를 무상으로 제공하면 일단 시도는 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역시 미국답네요. 돈 놓고 돈 먹기라.”
“죄송합니다. 영업팀장인 제가 고객을 끌고 왔어야 하는 건데….”
미국에서야 이렇게 공짜지만 시제품을 받아 주겠다는 것 자체는 호의에 가깝다. 개발사가 미국 회사였다면 그 계약서를 들고 온갖 군데에서 투자를 받았겠지.
하나 내 회사는 엄연히 한국 회사다. 피드백이 늦기로 소문난 미국 회사와 같이 일하면 공짜 시제품이 끝도 한도 없이 들어간다. 결국 대규모 시스템 설치가 완료될 때까지 자금을 쏟아부으며 프로젝트를 이끌고 가야 할 것이다.
그건 최종 목표이지 첫 단추로 끼우기엔 너무 덩치가 크다.
대형 고객을 끌고 오기 위해선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역시 대현자동차가 최선인가? 한번 머리가 그쪽으로 향하니 좀처럼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허허벌판에 민가 몇 채와 삼겹살집이 하나 보이고, 시멘트로 포장된 좁다란 진입로, 뒤에는 산을 깎아 만든 밭이 전부인 곳. 21세기에도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곳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예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해 버렸다.
“아, 아니에요. 어디 갈 데가 있는데 여러분도 같이 가셔야겠네요. 일단 이런 꼴로 갈 수는 없으니 사우나부터 갑시다. 때 빼고 구두에도 광 좀 내고.”
“어, 어디를?”
“아, 역시 대현그룹 본사에 가시려는 거군요.”
“하하! 중립적인 곳에 가야죠. 제가 예약하죠.”
나는 ‘수정각’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수정각입니다.
“최 마담님이시죠. 저 유수한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아! 천재 과장님 맞으시죠? 기억해요. 왕 회장님과 같이 오셨던. 호호호.
“오늘은 제가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정 회장님과 정헌몽 사장님 초대해 주시고요, 저녁 7시에 가겠습니다.”
-아…알겠습니다. 상차림은 어떻게 할까요?
“제 입맛에 맞춰 보시죠.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나운영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권재욱 부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정각이라는 이름을 들어서였을 것이다.
한 끼 식사에 인당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요정임을 아는 눈치다. 들어만 봤겠지 싶다.
“사장님, 수정각에 정 회장님까지… 제가 그런 자리에 어찌….”
“어, 나도 좀 그런데….”
“이제 여러분도 그런 자리에 나서야죠. 내 사람이잖아요. 자, 사우나부터 가요. 양복도 한 벌 선물하죠.”
“그럼 운전은 내가! 나 운전 잘한다니깐!”
나운영 부장이 한 손으론 가슴을 텅텅 치며 다른 한 손으론 차 키를 달라고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린다. 벤틀리를 몰아 보고 싶었나 보다.
제5장 내 길이 향하는 곳
나 부장과 권 부장을 목욕탕으로 밀어 넣고, 나는 근처 조용한 다방으로 가서 대현그룹 비서실에 전화부터 했다.
따르릉, 따르릉.
-대현그룹 비서실입니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입니다. 비서실장님과 통화 가능한가요?”
-실례지만 어디시라고요? 실장님과 전화 통화를 약속하셨는지요?
“안 했습니다만, 유수한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아, 잠시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비서실 직원은 다소 어이없는 말투로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스마트 클라우드의 유수한 사장님이시죠? 전화기가 지직거려서 실례했습니다.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뚜. 뚜.
연결음이 세 번 반복되기도 전에 전화가 다른 곳으로 연결되었다. 최 상무 자리일 것이다.
-여보세요. 유수한 사장님?
“예, 유수한입니다. 최 상무님, 별일 없으셨죠?”
-아이고, 별일 없다니요. 제가 이 전화 기다리다 10년은 더 늙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대기업 상무님께서 제 전화 한 통에 늙으시다니요.”
-여하튼 이리 전화 주신 걸 보니 회장님을 뵙겠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겠지요? 맞지요? 수정각에서 전화가 왔던데, 주관자가 유 사장 맞지요?
최 상무는 다급히 미팅 여부부터 물었다. 혹시나 연락이 안 될까 봐 수정각에도 언질을 해 뒀는데, 마담이 이미 연락을 했나 보다. 밀약 잡기 전문가답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하면 병원에 입원하시겠네요. 하하, 만나 봬야죠. 회장님 일정을 여쭙지도 않고 오늘 저녁 7시 수정각에 예약을 해 뒀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회장님이나 정 사장님께서 시간이 안 되시면 최 상무님만 오셔도 무방합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유 사장님을 그 정도로 취급했다면 그런 제안을 드렸을 리 만무하지요. 장소도 수정각이라니 탁월한 선택이네요. 모두 참석하실 겁니다.
최 상무가 과격할 정도로 나서니 내가 되레 민망하다. 대현그룹 회장실에서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기가 눌릴 것이기에 약속 장소와 시간을 일방적으로 정했는데 단박에 오케이를 했다.
“회장님 입맛에도 맞는 장소니 괜찮을 겁니다.”
-그럼요, 그럼요. 그보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저에게 미리 알려 주실 사항이 있습니까?
“당장 결정 내릴 사안이 아니잖습니까.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최 상무는 내가 내밀 조건이 뭔지 물어 왔다. 미리 의논하고 오겠다는 의미지만 필요 없다. 조건을 내민다는 것은 결국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뜻인데, 나는 그 첫 단추부터 의견을 나누고 싶다.
-그래요, 맞아요. 그래야죠.
최 상무는 마음이 급했던지 약간 실망스러운 말투로 바뀌었지만 상관없다.
“그럼 7시에 수정각에서 뵙죠.”
-그러시죠. 모쪼록 긍정적인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요. 그럼 이만.”
-먼저 끊으세요.
“네.”
툭. 삐익.
나는 전화 통화를 마무리하고 커피를 들이켰다. 커피 맛이 씁쓸하다.
일단 핸드 터미널 론칭 건으로 만나는 측면도 있으니 손해 볼 것 없는 자리다.
하지만 정 회장 생각은 다르겠지.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비전을 보여 주며, 나와 대현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끌고 갈 생각이 분명하다.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대현이 벤처 회사를 세워 추진할 거라고. 자금도 그렇고 외풍도 막아 주겠다고 하면서 지분의 상당 부분을 요구하겠지.
뻔하다. 대현은 K폰처럼 대박 제품을 같이하고 싶은 거다.
“쉽지 않지.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처음부터 그림을 그렇게 그렸겠지.”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니. 말이 쉽지 미래에서 온 나조차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절로 나온 일이다.
가슴이 뛰는 일이지만 한숨부터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기술이야 내가 적당선에서 오픈해 나간다고 해도, 1990년대의 우리나라는 벤처에 투자할 돈이 없다. 내 기술을 구현할 고급 인력도 충분치 않고, 무엇보다 사업 초기 각 회사의 명줄을 담당해 줄 내수 시장이 꽝이다.
결국 해외 시장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건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선 정영주 회장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배 한 척 건조해 본 경험도 없으면서 백사장 위에 조선소를 짓고 26만 톤급 유조선을 납품하겠다고 했던 분이 아닌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진짜로 해낸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갈등이 생긴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신성의 이 회장이 같은 제의를 했다면 나는 웃고 말았으리라.
문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시기가 그럭저럭 괜찮다는 데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재훈이가 인터넷 브라우저를 개발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내가 초반에 그린 그림 중 살아남은 조각이라고 해야 하는데, 한국의 인터넷 광통신 붐과 미국의 IT 버블을 이용하면 대박을 칠 것 같긴 하다.
나의 핸드 터미널, 즉 PDA도 원래 역사 대비 빠른 시기에 나왔으니 IT 버블이 터지기 전에 자리를 잡을 수도 있을 거다.
내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정 회장이 정치로 뛰어드는 행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좋은 시그널 중 하나다.
‘휴우, 역시 정 회장님은 애증의 존재야.’
정영주 회장…님. 어떤 측면에서는 불도저 같은 용기가 존경스럽다가도, 어떨 땐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노인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입에서 ‘님’ 자가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양반이다. 내가 대현과의 인연을 과감하게 끊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라 할 것이다.
퉁! 퉁!
“사장님, 출발하셔야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길었나 보다. 어느새 권재욱 부장과 나운영 부장이 내 옆에 서 있었다. 권 부장이 핸드 터미널 시제품을 담아 놓은 007가방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벌써 목욕 마치셨어요? 허! 이발까지 하셨네.”
“벌써라뇨. 1시간 반이나 지났습니다. 출발하시죠, 사장님!”
나 부장이 운전기사 흉내를 내며 자신의 깔끔해진 머리를 매만져 댔다. 원래 깔끔한 권재욱 부장이야 그렇다손 쳐도 후줄근해 보이던 나운영 부장도 훤칠하게 변했다. 목욕탕 이발사가 꽤나 실력이 좋았나 보다.
- *
스르륵.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수정각에 도착했다. 벤틀리를 주차장에 놔두고 안으로 향했다.
“호호호. 어서 오세요, 유 사장님.”
“안녕하세요. 대현 쪽에선 아직 안 오셨죠?”
“예. 추운데 먼저 안으로 드세요. 따끈한 정종 한 잔 하고 계시면 오시겠죠.”
최 마담은 그 짧은 사이 내 신변 조사를 마쳤는지 과장에서 사장으로 호칭을 바꿔 부른다.
정말이지 춥긴 춥다. 넥타이를 단단히 맸음에도 불구하고 쌀쌀한 날씨에 손이 곱아든다.
살얼음이 끼어 있는 연못을 지나 대청마루가 멋진 한옥으로 들어섰다. 미닫이문 하나를 열고 들어갔을 뿐인데, 온화한 공기가 훅 하니 느껴진다.
“멋지네요.”
“이기… 어이구, 딴 세상이네.”
권 부장과 나 부장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한옥을 잘 꾸미면 외국의 특급 호텔 VIP룸 못지않게 럭셔리하다. 이곳이 딱 그러하다.
한옥답지 않게 높은 지붕에는 초롱불을 흉내 낸 조명이 멋지게 빛나고, 벽에는 여백의 미를 살려 수석과 골동품이 놓여 있다. 구석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자개장 위에는 50년은 족히 묵어 보이는 분재가 무심히 놓여 있고, 창문은 방한용 유리창을 창호 문으로 가렸다.
한쪽 벽은 통째로 뜯어 방한용 유리로 터널처럼 정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손님이 차면 또다시 현악 4중주 못지않은 멋진 음악을 가야금과 해금으로 연주하겠지 싶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최 마담이 간단한 안주와 따끈한 정종을 내왔다.
“오늘 대현과 뭘 논의하시기에 이렇게 근사한 델 오신 겁니까?”
“야근에 지친 나 부장님 회포 좀 풀라고 여기에 온 겁니다. 여기 엄청 맛집이거든요.”
“오, 정말입니까?”
“사장님, 무슨 말씀을 나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회장님을 뵈면 꼭 대현자동차에 핸드 터미널을 밀어 넣으셔야 합니다.”
나 부장과 농담부터 하자니 권 부장이 대현자동차를 언급한다. 영업 측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지. 나의 1차적인 목적도 그러하다.
“1차적인 목적이긴 하죠, 그게.”
“아, 역시 그러시군요. 제가 어떻게 손뼉을 쳐 드리면 되는지요?”
“손뼉보다 들어봐 주십사 하고 같이 자리한 겁니다.”
“예에?”
“아무런 사전 논의 없이, 편견 없이 저와 정 회장님의 대화를 들어봐 주세요. 그리고 제가 미련한 희망을 품는다고 여겨지면 절 좀 말려 주세요.”
“말려 달라고요?”
“예, 말려 주세요.”
손뼉을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말려 달라고 하니 권 부장은 물론, 나 부장도 표정이 굳어진다.
나 또한 얘기가 어찌 진행될지 모르겠다. 핸드 터미널을 걸고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한국의 실리콘밸리는 헛된 꿈일 뿐이라며 핸드 터미널만 탁자 위에 올려놓을지. 그 전에 정 회장의 의도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 *
부우우웅, 끼이익.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최 마담, 수한이 그누마 왔누?”
“예, 회장님.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어서 가자, 어서.”
바깥이 조금 부산스러워지더니 특유의 카랑카랑한 정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드르륵.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어이구, 춥다. 들아가자, 들아가자.”
“예. 회장님께서 먼저 들어가시지요.”
나와 부장들은 대청마루로 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지금에야 독립했다지만 한때는 한 식구였잖나. 이 정도 예의를 차리는 것은 당연하다. 도리어 한 식구로 있을 때는 대들었지만 말이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따뜻합니다.”
“으이야, 고맙데이.”
권재욱 부장은 영업맨답게 방석을 척척 놓으며 자연스레 자리를 정리한다. 중앙에 정 회장, 그 오른쪽에 정헌몽 사장, 왼쪽에 최 상무. 그리고 자신은 최 상무와 마주 앉는다.
자연스레 대화의 주체를 정 회장과 나로 축소해 버린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건강해 보이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으이야, 수한이 니 밖으로 나가드만 당찬 맛이 싹 없으졌네. 내 얼굴 보고 그런 말부터 하고, 내 섭섭다.”
“예의발라졌다고 여겨 주십시오. 정종이 따뜻합니다. 몸부터 녹이시죠.”
나름 마음고생을 하셨나? 정 회장의 주름이 한층 깊어진 느낌이다. 목소리도 약간 가늘어진 듯하다.
쪼르륵.
“내 먼저 물어보자. 니 내가 어떡하무 다시 회사 들어올 기고? 원한다무 임원 바로 달아 주꾸마. 니가 싫어하는 정치질 안 하게 연구소장 자리로 박아 주꾸마.”
틀렸다. 연구소장은 사내 정치를 제일 잘해야 하는 자리다. 실무에 올인하여 선봉으로서의 역할만 해 왔던 정 회장의 약점이 드러나는 말이다.
“대답하기 전에 저도 여쭤볼 게 있습니다. 왜 저에게 집착하십니까? 저 같은 인물은 대한민국에도 여럿….”
“음다. 절대 음다. 내 죽을 때까지 없을기라. 미래를 보는 눈이 그리 흔할 리 음다.”
“…….”
이게 정 회장의 강점이다. 논리적인 추론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직감.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털어놓으면 곧이곧대로 믿을 유일한 사람이다.
이런 양반이 실리콘밸리를 한국에서 만들어 보자고 하니 내가 고민이 되는 거다.
“내 생각도 아버님 생각과 같네. 유 사장, 지금이라도 자회사 개념으로 대현과 합치는 게 어떤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당장 대답을 듣자고 던진 말이 아닐세. 못 들은 걸로 하겠네.”
정헌몽 사장은 거짓말에 서툰 사람이다. 결국 실리콘밸리 건을 빌미로 내가 사업을 확장해 나가면 최종적으로 덩치가 커진 내 회사를 대현그룹과 합병시킬 생각을 하는 거다.
대현이라는 재벌 입장에선 또 다른 재벌 계열사를 탄생시키는 일이니 내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기어코 독립을 해야겠다무, 내도 생각이 있다. 수한이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내는 용인 땅을 다 사 주고, 니 회사 옆에 도움이 되는 회사들 착착 들여 놓으구마. 10년만 지나 봐라. 니 능력하고 대현의 재력을 합치무 용인은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될기라. 수한이 니가 말하는 윈윈이라는 거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러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누가 봐도 꿈에 불과합니다. 대체 왜 그런 도박을 하려고 하십니까?”
“니 그리 말할 줄 알았다. 세대차이겠지. 세대차이라. 나는 회사를 돈을 보고 세우지 않았다. 건설, 중공업, 자동차… 어렵지마는 그런 기간산업이 있으무 더 이상 사람들이 밥은 안 굶겠지 하면서 회사를 세웠다. 먹고 마시는 걸로 쉽게 돈 벌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
“그게 실리콘밸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니 무슨 소리 그리하누? 니 기술, 니 머리 그거 썩힐끼가? 내 천명이 바닥 닦으라는 천명이었으면, 니 천명은 뭐겄누? 올라가라! 헌몽이 이누마도 괜찮은 놈이다. 대현하고 대한민국까지 더 높은 데로 끌고 가 봐라. 그게 니 천명이다.”
“휴우.”
나는 식어 버린 정종으로 입술을 적셨다. 환장하겠다. 내가 무슨 사업을 하건, 그 지분을 어떻게 나누건, 투자의 안전장치는 어떻게 하고… 따위는 정 회장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 사안을 뭉뚱그려 밀어줄 테니 끝까지 달려 보라는 것이 생각의 전부다.
문제는 대현이라는 존재를 내게 족쇄처럼 매달고 있다는 것이다.
드르륵.
“날씨가 추워서 따뜻한 음식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최 마담이 조심스레 들어와 상차림을 한다. 가히 전문가다운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하겠다.
이 자리를 마련한 주관자인 내가 한숨을 쉬자 대화를 끊고 들어온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 줄 요량이다.
술자리 분위기가 돈 내는 사람 의중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마담의 몫이다.
“술도 주세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가야금 연주를 할 분위기가 아니라 여겼는지 정자로 향하는 미닫이문도 닫아 버렸다.
“탕은 식사 때 같이 올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재차 들어왔을 땐 안주와 술을 잔뜩 깔아 놓고 한동안 들어오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사라졌다.
“유 사장님, 최근 에그펫 말고 다른 제품도 개발에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최 상무가 치고 들어온다.
“아,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여기 시제품도 있는데, 핸드 터미널이라고 하는 PDA입니다. 영업맨들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컴퓨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권재욱 부장이 척 하고 받는다.
“소형 컴퓨터라고요?”
“대현자동차에서 쓰면 딱입니다. 재고 관리와 납품 업체들에 아주 도움이 될 겁니다.”
“최 상무, 연극할 필요 없다. 대현자동차에 집어넣어 주라. 수한이가 만들었으면 대박 제품이 분명할기라.”
“예.”
“헉! 감사합니다, 회장님.”
권재욱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인사를 한다.
“권 부장, 니 말고 수한이 저누마 보고 말한 기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수한아, 내 이번 건은 욕심 없다. 도와주꾸마. 대신, 앞으로 하는 거는 대현전자하고 같이해라. 이처럼 어려운 일 있으무, 헌몽이가 제대로 해 줄기라. 그럼 쉽게 갈 수 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장은 대답을….”
“오이야. 그 정도면 됐다. 술이나 채워도고.”
쪼르륵.
나는 말없이 정 회장의 술잔을 채웠다. 정 회장 특유의 결단력으로 대현자동차 건을 선물로 받았으니 당연하다.
이제 나 또한 선물을 빙자한 조건을 내걸어야 할 차례다. 정 회장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회장님.”
“말해 봐라.”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가 보셨습니까?”
“함 가 봤지. 공기 시원하이 좋더마는.”
“사무실 안의 공기는 느껴 보셨습니까?”
“으흠, 양놈들은 모두 책상에 앉아가 일하드라. 컴퓨터로 딸깍딸깍대믄스.”
다행히 실리콘밸리에 있는 회사를 견학했구나 싶다.
한국에서 미국의 벤처 회사들과 가장 비슷한 분위기의 회사를 찾는다면 장담하건대 내 회사 스마트 클라우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컴퓨터로 일 처리를 하는 곳은 손으로 보고서를 쓰고 주판으로 돈 계산하는 곳과는 직원들의 사고방식부터 다르다.
“사람들의 분위기는 느껴 보셨습니까?”
“점심시간까지 지켜봤다. 복도에서 떠들면서 밥 묵드라. 엄청 천천히 먹드마.”
나름 사람에겐 관심이 있는 정 회장이다. 이 또한 다행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끼고 왔다. 수직 계급 체계로 경직된 한국 대기업 문화와는 전혀 다르다.
“맘에 드시던가요? 회장님은 직원들 노는 꼴 못 보시잖습니까.”
“허허, 그게 노는 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것다. 양놈들이까 우리랑 좀 다르겄제.”
압축 성장하고 있는 한국 대기업의 총수인 정 회장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회사 앞마당에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늘어놓고 2~3시간 얘기 나누는 것을 일로 여기는 미국 벤처들의 문화를 한국 회사가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한국과 기술적, 문화적 격차가 큽니다. 미국에선 작은 회사가 아메리칸 드림의 축소판이지만, 한국에선 대기업이 한입에 털어먹기 좋은 먹잇감일 뿐입니다.”
“으흠… 그래, 재벌이 달리 재벌이겄나. 탐욕스러우니까 그런 이름이 붙었겠지.”
“대현은 다릅니까?”
“달라야 되겄지….”
정 회장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결국 대현도 한국의 재벌이다.
덩치 큰 공룡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다. 입은 작은데 몸뚱이가 아파트만 하니 끊임없이 먹어 대야 겨우 유지가 된다.
정 회장이 내게 집착하는 근본 원인은 그것에 있다. 끝없는 먹을거리. 그걸 위해 내 머리에 기대고 싶은 거다.
정 회장은 직감한 거다. 내가 대박 제품을 몇 개는 꿍쳐 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유 사장, 대현이 자선 단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덕 기업도 아니네. 협력 업체 상생은 아버님이 직접 세운 경영 이념 중 하나이네.”
“상생 경영 좋죠. 말만으로 따지면 그보다 더 좋은 말이 없다는 게 문제죠. 정 회장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게 더 문제고요. 대현의 직원들에게 막연한 믿음을 주거든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사장님, S폰이 K폰보다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면서요. 그 원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뜬금없어 보이지만 내가 이 자리에 나온 핵심적인 이유다.
공룡의 덩치를 키워놨는데 양질의 먹을거리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면 헛배만 잔뜩 키운 공룡은 더욱 빨리 굶어 죽는다. 나는 굶어 죽는 그 공룡의 뇌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
1970년대의 건설 경기를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대륙으로 뻗어 나갈 길을 얻겠다며 대북 사업에 투자했던 대현그룹.
그 꿈 하나로 돈을 쏟아부었지만 날아간 사업체만 서른 개 이상이며, 결국 그룹 자체가 와해되었다.
“자네 같은 인재가 없기 때문이지.”
“아닙니다. 대현의 경영 문화 때문입니다. 일례로 대현의 상생 경영이 대표적입니다. 신성의 상생 경영은 전혀 다르죠. 말로는 상생 경영이라고 하면서 괜찮아 보이는 인재가 있거나, 괜찮은 기술력을 가진 회사는 통째로 먹어 버리거든요.”
“무슨 소리인가? 기업 사냥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기업 사냥요? 제대로 하지도 못하잖습니까. 자체 기술 개발은 대현의 또 하나의 경영 방침이지 않습니까. 대현의 협력 업체는 단순히 납품 업체로서 생산력 증대만 꾀하고 있죠. 휴대폰 껍데기 디자인이 아무리 개떡 같아도 외관 불량만 없다면 무조건 사 가니까. 그토록 내가 차별성을 두라고 해도 결국 안 하시잖아요.”
“…….”
신성의 강점은 당근과 채찍을 귀신처럼 다룬다는 데 있다. 자체 기술개발, 상생 협력 같은 경영 이념은 말로만 떠들고 있다는 걸 직원들 모두가 알고 있다.
신성은 탐욕스럽다는 소리를 들어도 무리 지어 다니며 사냥감이 보이면 과감히 덮치고, 무리의 사냥꾼들을 경쟁시키고, 유능한 사냥꾼에겐 더 많은 고기를 나눠 준다.
하청 업체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경쟁시키고, 이긴 놈에겐 물량을 몰아주며 돈맛을 보여 준다. 한번 고기를 먹어 본 이들은 더 신선하고 맛난 고기를 찾기 마련이다.
“대형 초식 공룡은 뭐든 몸통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숲이 마르면 굶어 죽고 육식 공룡들의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진정 실리콘밸리를 꿈꾸신다면 덩치 큰 한 놈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장차 힘센 놈이 될 새끼들을 가운데 두고 방어진도 꾸밀 줄 알고, 어떨 땐 과감히 돌진해서 육식 공룡을 밟아 죽여 버리고, 어떨 땐 물 냄새 잘 맡는 놈을 앞세워 천 리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또 어떨 땐 병든 새끼를 미끼로 던져 주는 짓도 마다 않는 집단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실리콘밸리의 핵심 전략입니다.”
“결국… 대현의 체질을 바꾸라는 말이군.”
정헌몽 사장은 탄식에 가까운 음조로 대답했다.
정 회장은 옆에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다. 바로 앞에 신선한 전복회가 있음에도 손도 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어중이떠중이에게 돈을 주면서 맘대로 신사업 해 봐라, 라는 식으로 실리콘밸리를 꿈꾸신다면 결국 자선 사업이나 사교 모임밖에 안 됩니다.”
“구체적인 전략을 말해 줄 수 있는가?”
“그룹의 미래를 한두 가지로 축소시키고 상품 기획, 연구 개발, 생산, 품질만으로 조직을 단순화시켜야죠. 양질의 부품 업체와 외주 생산 업체를 무리 지어야 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능성 있는 회사는 무리를 지어야죠. 합치면 안 됩니다. 그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떼었다 붙였다 자유로워야 해요.”
우습지만 수십 년 뒤 성공적으로 그런 체질 개선에 성공한 기업은 신성과 히타치라고 할 것이다. 신성은 어중이떠중이 다 떼어내 버리고 전자 산업에 올인했고, 히타치는 전자 산업마저 포기하고 대형 인프라 사업에 올인해 성공 가도를 달렸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얘기군. 지금의 재벌을 넘어 위로 올라가려면… 그래, 와중에 훌륭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겠어.”
“…….”
나는 말을 아꼈다. 솔직히 나보고 그룹의 후계자를 하라고 한다면 대현전자만 떼어 내 올인한다. 가볍지만 극도로 단단하거든. 자질구레한 것을 나눠 줄 대현의 아들들은 차고 넘치질 않나.
대현의 오너 일가가 체질 개선에 실패하면 대현전자는 내가 먹어 버릴 거다. 어차피 법정 관리에 들어갈 기업이다.
“나 같은 무지렁이는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실리콘밸리로 무리 짓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라면 유 사장님이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같이 묻어가면 부자 될 수 있는데, 나 같은 놈은 손발이 닳도록 일만 하면 되잖습니까.”
여태 가만히 있던 나운영 부장이 술잔을 홀짝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말한다. 편견 없이 들어 달라고 했더니, 나에게 극한의 편견을 보여 준다.
“하하하.”
‘나 부장, 당신이 내 인생 1회 차 때 부장도 못 단 이유가 그겁니다.’
나는 나 부장에게 나지막하게 웃어 주고 말았다.
실리콘밸리는 그런 마인드의 집단이 전혀 아니다. 탐욕을 꿈으로 포장하고, 대화를 빙자해 아이디어를 제 것으로 만들고, 그런 문화를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로 모여 사기에 가까운 쇼로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그중 핵심 기술이 시대와 타이밍이 맞으면 그 회사가 대박을 터뜨리는 거다.
결국 성공한 뒤에 사업 초기 인원들의 도박이 도전적이었네, 창의적이었네, 대화를 중요시하는 문화 덕분이었네 하며 TV 다큐에서 좋게 포장될 뿐이다.
달리 스티브 잡스가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말을 그리 자주 인용했겠나.
“사장님, 영업팀장 입장에서 편견 없이 말씀드리면 대현과 함께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으니, 일단 핸드 터미널로 시작하시고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꿈꿔 보시죠.”
권재욱 부장마저 거들고 나선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우선 핸드 터미널로 시도해 보죠. 대현이 나서면 국가조달청에도 핸드 터미널을 사용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최 상무 또한 일단 시작해 보자고 한다. 이 양반도 내 회사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군. 핸드 터미널의 사용처를 정확히 알고 있다. 유통 업체 사람들은 한번 쓰면 헤어 나오지 못할 물건이다.
‘그래, 그런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업이 하나둘씩 나타나면 대현이 욕심부리지 않고 무리를 짓겠나?’ 하는 나의 우려는 접어 두는 모습이다.
여태의 재벌처럼 흡수 통합해 버리면 실리콘밸리의 역동성은 금방 사라지고, 지금도 있는 여타 공단과 다를 바 없어진다.
“유 사장, 나에게 시간을 주게. 창의적인 경쟁, 상생이 아니라 상호 경쟁적인 연합이라는 키워드를 어찌 실현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지.”
국문학도답게 정 사장이 내 말의 핵심을 ‘상호 경쟁적인 연합’이라는 적절한 단어로 뭉뚱그린다.
“그게 가능할까요? 회장님의 불도저식 상명하달 문화는 대현의 상징입니다.”
“내가 바꿔 보겠네.”
나는 ‘대현은 자동차나 중공업같이 공룡다운 모습에 올인하시죠. IT 사업체는 저에게 주시고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건 대현전자의 미래를 내게 달라는 소리니까. 대현전자는 정헌몽 사장의 것이다.
“실리콘밸리… 제가 점한 회사의 지분을 탐내시면 안 됩니다.”
“그러겠네.”
“특허도 마찬가지고요. 외려 외국 특허에 백기사 노릇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겠네.”
“투자와 생산량도 협의하셔야 합니다.”
“그러겠네.”
“최소한 5년은 견뎌 주셔야 합니다.”
“그러겠네.”
“계속 긍정만 하실 참이십니까?”
“될 수 있으면 그러려고 하네.”
“…….”
“내 최종 목표는 자네일세. 실리콘밸리 따위가 아니지.”
“나 참. 대현답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대체 뭘 믿고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술잔으로 입술을 적셨다. 사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어이가 없으리라.
“허허허! 수한이 저누마 쓴소리하는 거 보이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긴 허네.”
옆에서 정 회장이 껄껄껄 웃으며 좋아라 한다. 반항적인 모습이 내 본모습이라 생각하나 보다.
“유 사장, 나는 자네도 믿지만 아버님의 눈을 더 믿는다네. 자네는 1년 반을 봤지만 내 아버님은 평생을 보아 왔으니까. 사업 예측이 틀린 적도 없으신 데다 이토록 한 인재에 대해 확신한 적도 없네.”
“내 앞에서 잘도 내 핑계를 대는구마.”
“아버님도 바라시는 바이지 않습니까. 뭐든 이용해야지요. 올라가라면서요.”
“허허, 오늘 술맛이 아주 좋구만.”
정 회장의 젓가락이 전복회로 향한다. 쌉쌀한 전복 내장을 고추냉이에 버무려 놓은 소스에 찍어서 먹는다. 연거푸 술잔을 두 잔이나 입에 털어 넣는다.
‘오늘은 이쯤 해야 하나?’
나도 참돔의 아가미 살과 지느러미 살만 발라낸 회접시에 젓가락을 옮겼다. 맛난 부위만 선택적으로 올려놓는 수정각다운 상차림이다. ‘세상에 맛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생선회를 통째로 올리나요?’라는 마담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아고, 회는 두 점씩 먹어야 제맛인데.”
“마담 불러서 달라고 해요. 여긴 취향대로 먹는 곳이잖아요. 그쵸, 사장님?”
“맞습니다.”
“그런가? 아이고, 난 몰랐지.”
나 부장과 권 부장이 시답잖은 만담을 시작했다. 능구렁이들이라 회식의 전문가이자 분위기 조장의 전문가 아닌가. 대충 분위기 전환을 해야 하는 시점인 걸 뻔히 알고 있었다.
드르륵.
“나 부장님, 뭐 좀 더 챙겨 드려요?”
어디 몰래 카메라라도 달아 놓은 듯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 마담이다. 나운영 부장의 호칭도 자연스럽다.
“매운탕에 공기밥 한 그릇 줄 수 있나?”
“탕은 나중에 드릴게요. 냄새가 배니까. 저희 집 소고기 육전이 맛난데,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아유, 좋지. 그럼 술이나 더 해야겠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뭐, 풍악 좀 없나? 이거 영 소화가 안 되네.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
“호호, 풍류를 아시네. 언니들이 안 그래도 심심하다고 했는데.”
짝! 짝!
최 마담이 장난스럽게 손뼉을 치며 밖으로 나갔다. 3분쯤 흘렀을까? 소고기 육전과 다른 안주를 잔뜩 가져온 최 마담이 상차림을 하자 정자로 향하는 미닫이문이 자연스레 열린다.
뚱뚜둥, 뚱뚱.
지지징, 징. 따당, 따당, 따다당.
장난스럽게 가야금으로 음 높이를 한번 조율한 뒤, 곧이어 비틀즈의 ‘yesterday’를 연주하는 국악 멤버들이다. 내가 이전 회식 때 유독 카펜터스의 노래에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을 유심히 살폈던 것이 분명하다.
볼 때마다 신기하다. 가야금은 그렇다손 쳐도 줄이 두 개밖에 없는 해금으로 어찌 저런 연주가 가능하지 싶을 정도다.
“건배 제의 한번 하시죠,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