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장 챕터 2 (24/104)

제10장 챕터 2

경기도 용인.

“휴우, 청소 끝났습니다. 둘러보시겠어요?”

“이미 둘러봤습니다. 천장까지 아주 깨끗하더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목욕비 하시라고 2만 원씩 더 넣었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리 젊은 분이 사장님이라니 부럽습니다. 번창하세요.”

“말씀 고맙습니다.”

케이가 구해 준 공장 부지는 오사카처럼 빈 공장이었다. 무척 만족스러워 청소 업체도 부르고 공장 리빌딩 업체도 부르고 사무용품 업체도 불렀다. 천억이나 되는 여윳돈이 있다 해도 소소하게 수십만 원씩 결재해 주는 것도 참 재미나다.

분당에서 왔다 갔다 해야지 싶었는데, 결국 힘들어서 근처에 2억짜리 빌라 하나를 샀다. 필요하면 직원들 기숙사로 써 버리지 하면서 말이다.

공장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니 앞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사무실이 있었다. 개방형이긴 하지만 나름 사장실이라 명명한 곳이다. 내가 일하는 곳. 서가, 책상, 의자, 전화기, 컴퓨터, 커피포트, 나름 21세기 사무실에서 인터넷 회선만 빼고 있을 것은 다 있다.

“아이, 돈도 많은 사람이 책상이 이게 뭐예요? 사장답게 멋진 걸 해야죠.”

케이는 손가락으로 내 책상을 쓱 만져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20세기 눈을 가진 케이에겐 너무 단순해 보이나 보다. 단순하긴 하지만 두꺼운 흑단목으로 만든 수제 책상인데 말이다. 화려한 장식은 거치적거릴 뿐이다.

“흑단목도 충분히 멋져. 내 취향이니 상관 마.”

“커피는 취향 없죠?”

어느새 커피 한 잔을 내려서 나에게 쑥 내밀어 주었다. 맞다. 취향 없다. 뜨겁게 내린 커피면 족하다.

“이런 촌구석에 왜 왔어? 공장 터는 아주 만족스럽다고 했잖아.”

“혼자 심심할까 봐 와 봤죠. 그런데 웬걸, 이리 북적일 줄이야. 설마 팀 전체를 끌고 오신 거예요?”

웅성웅성.

케이는 창문가에 서서 앞마당을 가리키며 웃어 댔다. 하긴 나도 의외이긴 하다. 김 대리가 내가 놓고 간 물건이 있다고 하도 전화를 해 대서 여기를 알려 줬더니, 첫날엔 김 대리가 짐을 싸서 이사를 해 왔다. 그다음 날부터 송 대리를 시작으로 나머지 개발팀원들이 줄줄이 날아들었다.

“내가 끌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날아들었어.”

“자의로 온 거예요? 인기 좋았나 봐요?”

“글쎄….”

쉰 명이나 되는 개발팀에서 신입사원 몇 명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이들이 퇴직하고 나를 따라왔다. 솔직히 이렇게 많이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에게서 뭘 봤으니 대현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나를 선택했지 싶다.

-오성재 이사님이 휴대폰 개발팀장을 겸임한답니다. 잘하실 거예요. 팀장님 보고서를 하나도 안 빠뜨리고 던져 주고 왔거든요.

-김 대리도 없고, 팀장님도 없고…. 방패 없이 못 살겠더라고요. 저도 왔어요. 살려 주세요.

-차기 제품 퀄은 QA에 던져 주고 왔습니다. 알아서 퀄 내겠죠. 늘 우리보고 잘하라고 하던 놈들이니 이번엔 지들이 잘해 보라죠!

-영업 너희도 개발 한번 해 보라고 사양서 던지고 나왔습니다. 기분 째져요!

-하청 업체 사람들 몇 명 추천하고 왔어요. 저보다 일 잘할 거예요.

-나운영 부장은 부장 월급 한 번만 받고 합류하시겠다고 하던데요? 여기 주소 알려 드려도 돼요?

-사직서 던졌더니 기분은 좋은데, 밥줄이 끊겼습니다. 허니 팀장님, 절 좀 받아 주세요.

이곳에 찾아온 팀원들마다 나에게 무용담을 늘어놓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김 대리는 ‘제가 팀원들 끌고 온 게 아니고요, 그런 식으로 사표 던지라고도 안 했어요.’라며 연신 고갯짓을 해 댔다. 정헌몽 사장이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다.

텅! 텅!

누군가 기름 냄새가 잔뜩 배어 있는 나무 판재를 마구 두들겨 대고 있다. 나무판에는 ‘Hitachi’라는 로고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세관이 찍어 댄 도장이 선명하다. 물 건너온 반도체 후공정 장비다. 반대편에 있던 김 대리가 기겁을 한다.

“으악! 마! 빠루(쇠지레)를 망치처럼 휘두르면 어떡해! 장비가 깨지잖아. 판자 사이에 끼워서 지렛대처럼 써야지!”

“에? 김 대리님은 막 치잖아요.”

“휘어진 못부터 뽑느라고 그런 거잖아!”

“아, 그런 거였어요?”

“군대 갔다 온 놈이 빠루도 못 다뤄?”

“저 행정병 출신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프로그래머예요. 장비 뜯는 건 이게 처음이라고요.”

“그럼 빠루 내려놓고 컴퓨터나 만져. 저리 가! 훠이! 훠이!”

“도와 드릴게요!”

장비를 감싸고 있는 나무 판재를 뜯어내느라 김 대리가 땀을 뻘뻘 흘려 댔다. 빠루질에 익숙하지 않은 팀원들이 돕는다고 할 때마다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옆에서 지게차로 설비를 나르고 있던 아저씨가 어설픈 노가다꾼들을 보고 연신 헛웃음을 흘려 댄다.

“영차! 영차!”

쿵!

“아악! 내 책상! 송 대리님, 조심히 다뤄 줘요. 내 책상 다치잖아요.”

송 대리의 파트원이 책상을 옮기다 모서리가 부딪치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마! 사원 주제에 무슨 책상이 이리 커?”

“아니, 사장님이 사무용품은 각자 취향대로 사라고 하셨잖아요. 같이 들으셨잖아요.”

“얀마, 빨랑 힘 안 줘? 나 그냥 놔 버린다!”

“아고, 저는 화분도 들고 있어요.”

“화분도 키우냐? 여기가 식물원이야!”

1층 사무실은 사무실대로 사무용품이 끝없이 들어오고 있다. 1인당 2평씩 할당하고 사무용품과 각종 비품은 100만 원 이내에서 알아서 구입하라고 했다. 기분을 낸 게 아니고, 내 퇴직금을 팀원들이 고스란히 가져온 탓이다.

나도 몰랐는데 내 퇴직금과 인센티브 적립금이 5천만 원이나 되었기에 다른 데 쓰기도 뭐해서 1/n로 나눠 준 것에 불과하다. 팀원들도 퇴직 보너스는 있어야지.

그런 꼴을 웃으며 바라보던 케이는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가는 곳을 따라가니 ‘Hitachi’라는 로고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케이다운 관찰력이다.

“수한 씨, 사무용품은 그렇다손 쳐도 장비를 벌써 들여요? 뭐 할지도 아직 안 정했잖아요? 그리고 히타치? 언제 히타치랑 안면을 텄어요?”

“쩝. 그렇게 됐어. 솔직히 나도 의외야.”

“수한 씨가 의외인 게 있어요?”

“음, 미우라 저 사람은 솔직히 의외라고.”

“미우라? 아, 히타치 물주 얼굴마담!”

“그러고 보니 조사 결과는 어땠지?”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앞마당에선 미우라가 장비를 뜯고 있는 팀원들 틈에 끼어 연신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문뜩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는지 마구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이 꼭 내가 저 사람을 알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인생 1회 차에서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수한 말대로 의외긴 하네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다고? 당신이 조사를 했는데?”

특급 로비스트인 케이가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철저한 보안으로 유명한 신성에서도 회장끼리 나눈 대화록을 끄집어낸 사람이 아닌가. 근데 미우라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지 못했다고?

“일단 히타치 비서실에는 미우라라는 사람이 없고, 적어 준 전화번호는 비서실 내선 번호였을 뿐이에요. 43억 엔을 보낸 계좌도 추적을 해 봤지만 결국 평범한 법인 계좌였을 뿐이에요.”

“법인 계좌?”

나는 법인 계좌라는 말을 처음 들었기에 질문을 했다.

“네. 계좌의 주인은 히타치67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고, 외환 거래 수수료도 정확히 1%. 법인 계좌예요.”

“하하하!”

“왜 웃어요?”

“케이가 실수를 할 때가 다 있네. 하하하!”

“……?”

나는 케이의 말에 미우라가 어떤 인물인지 번쩍하고 깨달았다.

외환 거래 수수료는 대부분 1.75%. 그것도 양국 은행이 수수료를 절반씩 나눠 가진다. 한데 수수료가 1%? 한국의 은행이 수수료를 깎아 줬을 리 만무하고, 일본은행이 수수료를 0.125%만 가져갔다는 말이다.

아무리 법인 계좌라고 해도 말이 안 된다. 그런 계좌가 있다면 로열패밀리 계좌가 유일하다. 동북아 재벌 구조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은 케이였기에 그런 결론까지 내리지 못했을 뿐이다.

미우라가 아니라 마에다 히로아키다! 2011년 히타치에 혜성처럼 날아들어서 망해 가던 히타치그룹을 단 1년 만에 정상화시킨 전설적인 인물. 지금은 재계에서 은퇴한 선대 히타치 회장의 숨겨 놓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헛소문은 아닐 것이다.

일본 도쿄대 전기공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예일대 경영학과로 편입해 석사까지 마치고, 히타치그룹의 핵심인 히타치 제작소로 입사해 곧바로 국제 사업부문장을 맡았고, 북미 총대표와 유럽 총대표를 하더니 10년 채 되지 않아 사장에 올랐다. 말한 대로 2011년에는 그룹을 수렁에서 건졌다는 이유로 히타치그룹의 회장으로 추대받고, 우리나라로 치면 전경련이라고 할 수 있는 게이단렌(経団連)의 회장까지 되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일본 재계 총리가 된 격이다. 로열패밀리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이력이다.

5개국어를 하는 외국어 능력에다 사람 사귀는 능력은 더욱 탁월해서 일본 정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물 건너 GE 회장, IBM 회장 등과 친분을 과시하는 양반이다.

공학적인 감각도 그 못지않아 히타치그룹을 재기시킨 철도 차량 기술의 아버지다. 해당 기술을 ‘A-train’이라고 약칭하는데 한마디로 각종 부품을 레고 블록처럼 모듈화해서 값싸고 빠르게 다양한 철도 차량을 만들어 낸다.

모노레일이나 지하철은 당연하고 고속 열차까지 같은 라인에서 찍어 내는 기술이며, 2014년 영국의 도시 간 고속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히타치 혼자서 수주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인생 1회 차 때 국제면 기사에서 본 얼굴과는 위화감이 든다. 젊은 시절의 히로아키는 나름 미남이었군.

내게 온 이유도 알겠다. 실패를 모르는 양반이 히타치 제작소에서 맡은 첫 번째 프로젝트가 나 때문에 꽝이 되어 버린 거다. 히타치그룹 회장의 직계들이 히로아키를 잡아먹으려고 온갖 정치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

아무리 그룹 회장이 감싸 준다고 해도 만회할 필요가 있겠지. 물론 주범이 나라는 것을 알고 호기심에 접근한 것일 수도 있겠다.

수백억 정도는 껌값으로 여기는 로열패밀리다운 행보라고 해야 하나? 후후후. 전범 기업의 후계자를 마주했다는 생각이 드니 이참에 벗겨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전자 업계를 다 팔아 버리는 인물이잖나. 이왕 팔아 치울 거면 내게 팔아야지. 안 그런가?

“이봐요, 미우라! 올라와서 커피 한 잔 해요.”

“아! 예, 사장님.”

내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 주니 냉큼 사무실로 달려온다. 연기력 하나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히로아키 특유의 친화력이라고 해야겠지.

“어떠십니까? 장비는 맘에 드시죠?”

“비닐을 벗겨 봐야 알겠죠. 후후.”

“오! 에어 샤워기부터 설치해야겠네요. 파티클(Particle, 오염)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하니 일본에서 전문 업체를 부르겠습니다.”

“여기서 벌써 업체를 불렀습니다. 반도체 전문 업체니 에어샤워기를 포함해 공조 시설을 시작할 겁니다. 장비 오염은 걱정 마세요. 우리 엔지니어도 라인 셋업 경험이 많으니까.”

나는 계단 아래의 1층을 가리켰다. 앞마당에서 나무 판재를 뜯던 김 대리가 장비를 겹겹이 싸고 있는 비닐 포장을 헝겊으로 깨끗이 닦아 내고 지게차 기사를 시켜 조심스레 공장 안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비닐 포장을 뜯으려던 사원급 엔지니어에게 버럭 소리까지 친다.

아무리 후공정 설비라도 반도체 설비는 오염 제어가 필수적이다. 먼지 구덩이에서 장비의 비닐을 뜯는 즉시, 그 설비는 못 쓴다고 보면 된다.

“하하, 저희가 하면 되는데…. 싸게 해 드릴 텐데.”

“지금 설비가도 충분히 싸요. 이상할 정도라니까요. 하하하!”

장비를 계약하겠다는 구두 약속만 믿고 장비를 벌써 입고시키는 것부터, 내 공장이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까지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이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좀 전까지 느꼈던 위화감이 훅 사라져 버렸다. 역시 케이에게 조사를 맡기길 잘했다.

“미우라 씨, 안녕하세요. 케이라고 합니다. 수한 씨와 같이 일하는 동료예요.”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미녀라고 하시던데 사실이군요.”

내가 언제?

“호호호.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미남이 그리 말하니 농담처럼 안 들리네요.”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내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둘은 특유의 가식적인 인사말을 건네며 좋아라 한다.

“여기 입고 서류에 서명하면 되나요?”

나는 시답잖은 농담 분위기를 업무 영역으로 돌렸다. 지금은 히로아키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아, 예. 근데 설비를 살펴봐야 하지 않으십니까?”

“엔지니어 파견한다면서요. 하자가 있으면 3년 내 무상 수리. 계약서에 그리 적혀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죠, 그렇죠. 사인하셔도 전혀 리스크가 없습니다.”

나는 살짝 당황하는 히로아키를 앞에 두고 입고 서류에 쓱쓱 서명을 했다. 600억짜리 계약을 이리 쉽게 해도 되나 하는 눈치였지만, 상관없다. 미끼는 언제나 큼지막해야 의미가 있는 거다. 설비도 양호할 것이 당연하고 말이다. 낚시꾼이 상한 미끼를 쓰진 않을 테니까.

“그쪽 도련님은 안녕하시죠?”

“그럼요. 이 계약서를 들고 회사로 복귀하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아, 출근하세요? 칩거하신다고 들었는데…. 수석 졸업생 연설 중에 프러포즈했다가 개쪽당한 상처는 치료가 되었나 보네요.”

나는 이 양반의 흑역사를 조금 건드려 보았다. 일본인 중에서는 처음으로 예일대 졸업 연설을 한 양반이거든. 살짝 흥분했음인지 연설 말미에 맘에 두고 있던 여학생에게 프러포즈를 했다가 여자가 양손으로 X 표시를 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다.

물론 그 여학생이 히로아키의 집안을 몰랐기 때문이지. 서자인 그를 히타치 회장이 대놓고 밀지는 못했으니까 지질이 아시안에 불과해 보였을 터다.

대신 졸업생 파티가 벌어지는 빌딩을 통째로 빌려 메인 전원을 내려 버리는 복수를 했다고 들었다. 사이키 조명도 없이 비상용 전원으로 파티를 해야 했던 이들이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

“후후, 걔가 눈이 삔 거죠. 상처 입고 자시고도 없습니다.”

“하긴, 대재벌의 외동아들을 몰라보다니 눈이 삐었죠. 여하튼 졸업생 파티가 있는 빌딩을 빌린 거 정말 통쾌했어요. 얼마 들었어요?”

“얼마 안 했어요. 10만 불? 후후. 어, 이런….”

나는 표정을 달리하는 히로아키에게 엄지 척을 해 주었다. 히로아키는 드디어 자신이 내 말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 흑역사를 들먹이니 연기하던 미우라에서 히로아키 본인으로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 버린 거다.

“다시 인사하죠. 웰컴 투 코리아. 마에다 히로아키 씨.”

“히로아키? 히로아키! 히타치그룹의 숨겨진 왕자? 당신이에요?”

케이가 옆에서 깜짝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가린다. 늦었다. 이미 숨겨진 왕자라고 불러 버렸어.

“하하하. 아, 속이려고 한 건 아니니 오해 마세요!”

‘숨겨진’이라는 말에 살짝 인상을 붉히다가 재차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입에는 금세 정치적인 말부터 걸린다.

“당연하죠. 로열패밀리이신데. 이런 손해 보는 거래를 들켜 봐요. 누나들이 가만있겠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 이거 정말 만만찮네.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당신이 히타치 반도체 사업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

“미치겠네. 하하하.”

내가 괜히 넘겨짚은 게 아니다. 히타치 반도체를 포함해 일본 전자 업계는 지금 ‘미일 반도체 협정’이라는 대규모 공격을 받고 있다. 수십 년 뒤 2019년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 전쟁에 비견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미국에서 오래 공부했던지라 히로아키가 양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양이 일본의 반도체 업체라는 사실도 말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히타치 반도체는 2008년에 고환율과 관세 폭탄으로 8천억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겪게 된다. 누적된 적자를 합치면 그룹이 휘청거릴 수준이었기에 그룹 본사 사옥까지 팔아 가며 사업을 정리했다.

현재 사내 세력이 크지 않은 히로아키로선 기존 가신들이 ‘캐시카우를 포기하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으르렁대고 있기에 섣불리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걸 적당히 이용하면 시간을 당길 수도 있겠다. 순전히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말이다.

“무슨 거래부터 시작할까요?”

나는 ‘내게 왜 접근했냐’가 아니라 ‘뭘 도와줄까’를 물었다. 히로아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제 내가 미끼를 흔들 차례다. 미끼는 언제나 크고 신선해야 한다. 특히 재수 좋게 이런 대어가 걸리면 흔드는 방법도 세심해야 한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3권에 계속

제1장 남의 위기는 곧 나의 기회

“하하하! 거래라니 무슨 말씀을…. 지금 거래로도 충분한데요.”

“아, 그러세요? 난 또 제품 세탁하실 회사가 필요한 줄 알고 말이죠. 후후.”

내가 싱긋이 웃어 주자 히로아키는 절반쯤 차 있던 커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대답을 회피한다.

나는 일본 기업들이 공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약점이다.

실수는 반드시 수정해 내고, 실수들이 정교하게 고쳐진 작전 매뉴얼을 성경처럼 떠받든다는 거다. 성공한 사례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반복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무역 국경 우회 작전이다.

우리는 일본이 동남아시아 경제를 장악해 버린 것을 단순히 원가 절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속내를 살펴보면 대일 무역 수지 개선을 요구하는 미국, 영국, 유럽 각국의 압박을 피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일본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나선 거다. 세계의 큰형님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은 개발도상국에 관세 폭탄을 못 던졌거든.

아무리 일본 부품이 90% 이상이고, 심지어 일본 기업 로고가 박혀 있어도 동남아에서 조립되어 ‘Made in Japan’만 아니면 관세 폭탄을 피할 수 있었다.

왜냐고? 관세는 국경을 넘는 대가로 지불하는 거니까.

여기서 또 한 가지! 그럼 미국도 바보가 아닌데, 그걸 계속 당해 줬는가?

그렇지 않았다. 1987년부터 국적을 불문하고 미국에 수입되는 전자 제품들 중에 반도체에 한해서는 일본 제품이 아닌 외국 반도체가 20% 이상 들어가야 관세 폭탄을 피할 수 있다고 못 박아 버린 거다.

그게 ‘1987년 1차 미일 반도체 협정’의 골자이며, 미 상공부가 나서서 국경을 우회한 제품까지 깡그리 관세 100%를 매겨 버렸다. 그 협약이 1991년 올해 2차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갱신될 예정인데, 제품군은 한층 넓어진다. 미국에 인맥이 있는 히로아키는 그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거다.

여기까지 알고 있다면, 히로아키의 속내가 뻔히 보인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