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둥지를 떠나다
휘이잉.
저녁 무렵이 다 돼서야 공장 부지에 도착했다. 케이가 알려 준 주소를 찾아오느라고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야, 정말이지 멋진 곳이네.”
꼼꼼하게 돈값을 따지는 케이답게 공터가 아니라 나름 커다란 건물도 같이 있는 부지였다. 구매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지키는 사람도 없었기에 내부로 훌쩍 들어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창고였나 싶었는데, 실내는 네모반듯했고 콘크리트 외벽을 따라 온갖 파이프가 박혀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공장으로 썼던 건물이 분명했다. 심지어 건물 뒤편에는 커다란 가스 저장 탱크가 세 개나 있었다.
“와우! 대박이야, 대박! 유틸리티 공사는 껌이겠어!”
이 비서는 먼지가 쌓여 있다고 인상을 찡그렸지만,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물, 가스, 에어 컴프레서 등등 온갖 유틸리티가 조금만 손보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2차선 도로를 따라 빈 공장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 마음만 먹으면 추가 매입도 가능해 보인다.
역시 일본 부동산 폭락과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고 있는 거다. 그걸 고려해도 매입 가격을 생각하면 역시 케이의 수완이 대단하다.
“어우, 청소하려면 한참 걸리겠는데요?”
“하하! 일단 쓸 수 있는 것부터 파악해요. 창고로 쓸 공간을 따로 분리하고, 라인으로 쓸 곳은 유틸리티와 물류 이동을 생각해서 꾸며요. 휴대폰 조립 라인 많이 들어가 봤죠? 똑같이 꾸미면 돼요.”
“에? 꾸며요? 제가요?”
“그럼 누가 해요? 이 정도 공단이면 라인 리빌딩하는 업체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일단은 창고 쪽으로 쓸 공간만 분리해 두고 차근차근 일을 추진해 봐요. 돈은 충분해요. 인력은 될 수 있으면 한국에서 데려오거나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일본인들 위주로 뽑아야겠죠.”
“하하….”
이 비서는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왜요? 1년 반이나 봐 온 게 어딘데. 할 수 있어요. 사람도 여럿 알고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요, 정말 창고가 아니라 공장을 세우시게요?”
“당연하죠. 창고지기에게 일본 지사장이라는 이름을 왜 줍니까? 하기 싫어요? 나중에 우리 회사 상장하면 지분 1%만 받아도 대박일 텐데.”
“아뇨, 아뇨! 당연히 해야죠. 하긴 하는데요. 그냥 조립이에요? 휴대폰 조립만 하면 됩니까? 고객 요청으로 수정하거나 뭐 그런 거 안 해도 되나요?”
이 비서는 지분 1%라는 말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뻐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일본 고객을 이 비서 자신이 직접 상대해야 하는 일이 생겨 버리면, 김 대리가 고생했던 것을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엄두가 안 나는 일인 데다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하! 쫄았군요. 휴대폰 스펙을 수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우린 대현에서 북미 시장에 출시하는 휴대폰을 가져와서 일본 하청 업체들에 전달만 할 거니까. 일본 업체들이 알아서 NTT나 여타 통신 업체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수정할 겁니다.”
“휴우, 그럼 공장을 왜…. 창고만 있으면 되잖습니까?”
“으음, 휴대폰 비슷한 것을 만들어 봐야죠. 한국에도 똑같이 공장을 만들 거구요. 한국 공장은 북미 시장과 내수를 담당하고, 일본 시장은 여기서 공략하자고요. NTT도 요시다 전무만 아웃되면 우리 고객이 될 수 있죠. 오늘의 적은 내일의 동지다! 몰라요?”
“휴대폰 비슷한 것? 내일의 동지요?”
“휴대폰만큼이나 잘 팔릴 게 확실한 제품이죠. 부품 조립만 하고 동작 프로그램만 심는 수준이니까 너무 걱정 마요.”
“제품이 뭔지 여쭤봐도 되나요?”
“아직 이름을 안 정했는데…. 핸드 터미널(Hand Terminal)이라는 이름이 좋을 것 같군요.”
“핸드…폰이 아니고 핸드 터미널요?”
“으흠! 핸드 터미널.”
핸드 터미널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피자를 시키면 배달원이 ‘카드로 계산하실 거죠?’라고 물으며 들이미는 물건이다. 카드를 꽂아서 결재하고 영수증 뽑아 주고 하는 거 말이다.
물론 당장 카드 결재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은 힘들겠지만, 창고 불출 및 납품 작업을 바코드 인식으로 대체하고 영수증을 발급하는 기능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즉, 핸드 터미널이라 이름 붙였지만 초기 버전의 PDA를 만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물론 현재 기술이 미래의 PDA를 따라가지 못하니 기능을 대폭 축소하겠지만, 내 회사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최초의 제품이니 소비자들이 깜짝 놀랄 만큼 명품이 될 거다.
나의 최종 목표는 미국의 애플사처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굴지의 대기업을 만드는 것. 나의 전략은 미국 애플의 사례를 참고 삼아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TV 다큐에서는 MP3 플레이어, 스마트폰이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으로 단숨에 펑! 하고 터져 나온 제품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엔지니어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초기 작품들이 실패한 걸 바탕으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서 대박 상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애플의 아이팟은 1990년대 후반 한국의 MP3 플레이어가 어머니고, 아이폰은 1990년대 초중반 반짝하고 출시되었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 PDA가 그 어머니다. 물론 PDA 이전에도 전자수첩이 있었지만, 통신을 했다는 측면에서 PDA가 아이폰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여기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미래의 기술을 이용해 우수한 PDA를 출시한다 해도 현시대 상황상 실패 사례를 반복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 무선 통신이 허접한 이 시대에는 스마트폰이나 미래의 PDA처럼 고용량의 데이터를 마구 옮길 수가 없다. 솔직히 사람이 손수 수첩에 메모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많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3G, 4G, LTE 기술을 실현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또한 독립하는 마당에 대현이나 신성하고 휴대폰 시장을 두고 경쟁하면 망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향후 스마트폰의 어머니라 불릴 만한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기술력을 증명하고, 곧이어 터질 MP3 플레이어 사업을 선점하는 작전이 가장 현실적이리라. 그래서 나는 핸드 터미널이라 이름 붙인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
“핸드 터미널? 그게 뭔가요?”
“그게 뭐냐면, 저급한 휴대폰이죠. 송수신 기능을 문자로 한정하는 거라고나 할까.”
“저급한 휴대폰? 그걸 누가….”
이 비서의 반응은 당연하다. 문자만 송수신되는 기기를 누가 쓰겠냐 싶을 거다.
하나 일상생활이 아니라 회사 업무를 고려하면 전혀 다르다.
“영업 사원이 가지고 다니면 딱이죠. 업체에 물건 가져다주고 바코드로 납품 수량 자동 입력하고, 영수증도 알아서 딱딱 뽑아 주고. 버튼 하나 누르면 그 데이터가 본사로 휙 하니 넘어간다고요. 물류 관리하기에 그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우아! 정말 그렇군요. 비용 정산 취합할 때마다 뺑이치는데! 대박!”
이 비서는 환호성을 질렀다. 서무 노릇을 오래 해 보더니 데이터 취합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거다.
일례는 아주 많다. 개발팀처럼 잡다한 비용이 발생하는 곳에서 해당 비용마다 일일이 영수증과 대조해서 개별 정산해 주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이달 자재비 초과야, 수선비로 대신 올려. 이건 식비가 아니고 교통비로 올려야지. 술집 간 게 연구 지원비냐? 정산 불가라고. 야이, 이건 또 뭐야! 비용은 100원 단위까지 기입하라고 했잖아!’ 등등 일주일에 한 번씩 비용을 처리해 줄 때마다 서무는 머리가 빠개지지.
이 비서의 말대로 대박이 확실한 제품이다. PDA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핸드 터미널이라 이름 붙인 해당 제품은 1990년대 일본에서 처음 출시되기 시작해서 전 세계적으로 미친 듯이 팔려 나갔다. 뭐든지 근거를 남기고 꼼꼼하게 일 처리하는 일본인들이 발명한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얼마나 대박을 쳤냐면 미국에서 해당 기기가 너무 잘 팔려서 미국 상공부가 직접 나서 덤핑 제품이라고 관세 100%를 때리면서까지 수입을 줄이려고 애를 썼던 제품이다. 미국 회사들도 비슷한 제품을 내놓았건만, 소프트웨어와 바코드 인식 능력은 일제가 월등했다.
하나 지금 역사에서는 다르다. 내가 나서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왜냐고? 핸드 터미널은 결국 휴대폰 또는 스마트폰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품이니까.
통신 기술과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나와 내 팀원들이 최고다. 심지어 난 퀄컴의 칩까지 가지고 있다. 제품군이 다르니 대현이나 신성 같은 대기업들이 견제해 올 가능성도 그다지 높지 않다. 이걸로 히타치 케미컬의 소재 독점에 이어 제2의 캐시카우를 만드는 거다.
“오늘은 이쯤 하고 밥이나 먹는 게 어때요? 오사카에 왔는데 맛난 거 먹어야죠.”
“오오, 회 어떠십니까? 회?”
“어우, 좋네요. 맘껏 드시라고요.”
“사케도 한잔 하실 거죠?”
“당연하죠. 우린 차를 버리고 왔잖아요.”
나는 이 비서와 함께 공단 너머의 휘영청 밝은 불빛 쪽으로 걸어갔다.
- *
나는 사흘 동안 오사카에 머물렀다. 이 비서와 함께 업체를 찾아 공장 리빌딩을 계약하고, 대략적이나마 도면도 검토하고, 사업자등록 절차도 최대한 서둘렀다. 원래는 이틀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사흘이 지났고 결국 오늘에서야 원래 머물던 호텔로 돌아왔다.
그다지 어려운 점은 없었다. 호텔 전화번호가 바뀌어서 아침마다 하는 전화 회의 때 전화를 받는 게 아니라 내가 걸었다는 것만 달라졌으니까.
이제 일본을 떠나도 될 것 같다. 사흘이나 연락이 안 되었으니 NTT는 안달이 났을 거고, 히타치 물주는 한국에 들어가서 끄집어 올리면 되지 싶었다.
호텔 입구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요시다 전무의 여비서가 로비에서 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피곤한 기색을 보아하니 꽤나 오랫동안 속을 태웠나 보다.
“안녕하십니까, 유수한 님.”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국어 발음이 더욱 세련되게 느껴진다. 느낌이 좋다. 품에 007가방을 들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오고 말이다. 결정을 하셨군.
한데 옆에 젊은 남자도 같이 왔다. 보디가드인가?
“음, 요시다 전무가 보냈나요?”
“하이. 요시다 전무님께서 유수한 님의 거래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시겠다고 합니다.”
당연한 결과다. 한국의 대현물산 주식이 하루가 다르게 폭락하고 있거든. NTT와 거래에 사달이 났다는 소문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까.
“아이고, 그러게 좀 빨리 결정하지 그랬어요? 사흘이 지났으니 42억 엔을 지불해 드리죠.”
나는 로비의 소파에 척 하고 걸터앉아 말을 받았다.
“아, 아닙니다. 43억 엔입니다. 제가 어제 정오부터 기다렸습니다. 호텔 스태프에 물어보십시오.”
여비서는 매우 당혹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장장 24시간 동안 자리를 지킨 건가? 의도적으로 압박하려고 자리를 비운 것도 있지만, 그리 오랫동안 기다리다니.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다.
“으흠, 본의 아니게 숙녀분께 실례를 했군요. 알겠습니다. 43억 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비서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007가방을 열어 주식 증서와 각종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무기명 채권에 가까운 것들이라 서로 서명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다.
“곧바로 처리해 줄 테니 계좌번호 알려 줘요.”
“일본 제일은행입니다. 379….”
여비서는 메모를 건네주며 계좌번호를 줄줄 외워 댔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하긴 24시간을 기다렸다지 않나.
나는 호텔 프런트로 걸어가 케이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43억 엔을 입금시키라고 했다.
여비서 또한 내가 전화 통화를 끝내고 10분 뒤에 어디론가 전화를 해 보더니 입금되었다는 말을 들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불과 2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렇게 큰돈이 오가다니 새삼 내 인생이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아, 이제 이 증서와 서류는 유수한 님 것입니다.”
“고마워요.”
여비서는 007가방과 자신의 손목을 연결한 사슬을 그제야 풀었다.
“요시다 전무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들을 필요 없습니다. 이제 그 양반이랑 거래 안 합니다.”
“부디 들어봐 주십시오. 요시다 전무님은 유수한 님과 뒤에 계시는 로열패밀리님과의 관계 회복을 원하십니다. 모쪼록 대현전자가 오픈마켓에 충분히 물건을 뿌려 주시면 NTT에서 별다른 요구 없이 꾸준하게 구매를 하고자 합니다. 원하신다면 다산에 출자한 자금도 회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항복 의사다. 비서의 입을 빌려 답해 왔다고는 하지만 갑질이 대단한 일본 문화에서 이 정도로 숙이고 들어오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각을 세웠는데 다시 직접 거래를 한다고? 솔직히 믿기 힘들다.
“으흠, 진심인지 알 수가 없군요. 두고 보죠.”
이번 일로 요시다 전무는 이래저래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럼 그 자리에 새로 임원으로 오르는 이와 줄을 연결하는 것이 최선이다.
“믿으셔도 될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옆에 멀뚱히 있던 젊은 사내가 훅 하고 나섰다.
“누구시죠?”
“아, 저는 미우라입니다. 제 주인께선 히타치그룹의 로열패밀리이시죠. 제가 한국말을 좀 하는 관계로 다산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리될 줄 예상했으니까요.”
말이 많은 사내다. 명함 한 장 건네주면서 말이 끝날 줄을 모른다. 한데 하는 말마다 정보를 담고 있어 버릴 단어가 하나도 없다. 마치 연극배우 같은 느낌이 든다.
명함을 보니 히타치그룹의 기획실 소속, 미우라 과장. 직책과 직급도 심상찮다. 과장 주제에 로열패밀리의 심복 역할을 하고 있다?
“미우라 님은 히타치 물주의 비서라는 말이군요. 한데 뜬금없이 요시다 전무를 보증한다니, 무슨 말이죠?”
“아! 그 양반이 감히 우리 도련님께 직접 전화를 했더라고요. 다산에서 같이 발을 빼야 된다고. 혼자 발을 빼긴 불안했나 봅니다. 도련님께선 요시다에게 더 이상 대현을 적대시하거나 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발을 빼는 데 동참하셨고요.”
듣고 보니 어이가 없다. 항복하는 마당에 묘하게 논리를 펴서 다산이 아니라 대현의 편에 붙는다고 말하고 있다.
“하하! 웃기시네. 대현을 공격한 건 당신들이라고. 우리가 당신들을 공격한 게 아니고! 보복이라니, 무슨 개소리를 그리하시나?”
“아아,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당연히 항복이죠, 항복! 단지 헛짓거리 다시 하는 놈들이 있을까 봐 제 도련님께서 다짐을 받으셨다, 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묘하게 느물거리는 사내다. 요시다의 여비서는 어서 자리를 비키고 싶은 모양이다. 한데 눈치만 살필 뿐 자리를 뜨지 못한다. 결국 미우라의 뒷배에 있는 히타치 물주는 진정 로열패밀리가 맞다는 얘기다.
“알겠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죠. 주식은 가져왔습니까?”
“당연합니다. 여기!”
딸깍!
007가방을 열어 보이더니 내가 확인하자마자 가방을 닫아서 내 손에 척 하고 쥐여 준다. 얼마를 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계좌 이체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계좌번호는? 43억 엔 이체하면 되죠?”
“아, 예. 당연하죠. 계좌번호는 가방 안에 있습니다. 아, 섭섭해하실까 봐 계약서도 넣었으니 확인해 보시고요.”
“계약서?”
“제 도련님께서 준비하신 작은 선물입니다. 대현전자에서 설비 공급을 재개해 주신다면 필히 사례하겠다는 뭐 그런 거죠.”
뭔 말인가 했다. 히타치에서는 공동 개발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보다. 대체 설비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 놓은 거야?
“공동 개발을 말하는 겁니까? 재계약 따위는 없을 겁니다.”
“노, 노! 그런 거 아닙니다. 제안서를 드린 것뿐입니다. 백수길 상무가 저질러 버린 일이니 원가에 가져가시라고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서로 윈윈이죠. 자그마치 설비를 재료비만 받고 드립니다. 거저먹기죠.”
“설비를 반값에 넘긴다고? 우리가 그걸 어찌 믿어? 사후 관리로 개판 칠 것 같은데?”
설비 업체들이 보복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다. 물건 값을 후려치면 일단 입고시킨 뒤 셋업 기간을 엄청 잡아먹고, 제대로 돌리려면 옵션을 잔뜩 달아야 한다며 괴롭힌다.
“오! 노, 노! 설비 셋업은 히타치 제작소에서 설비당 엔지니어 두 명을 상주시킬 것이며, 장비에 하자가 있을 경우 무상 수리 보증 3년! 자그마치 3년입니다.”
솔직히 심장 근처가 뜨끔할 정도다. 저 말이 진짜라면 정말이지 공짜나 다름없다. 장비 감가상각은 3년에 걸쳐서 하기에 무상 보증 기간이 지나면 중고 시장에 아무런 제한조건 없이 내놓을 수 있다. 반도체 설비는 첨단 기술로 분류되어 잘만 하면 국가에서 세금 감면을 지원받을 수도 있고 말이다.
“왜 그런 자선사업가 행세를 하지?”
“후후, 모시는 분이 로열패밀리시면 잘 아실 것 같은데…. 제 도련님이 조만간 히타치 제작소(히타치그룹의 설비 회사)를 물려받고 싶으시답니다. 실적이 좀 필요한데, 당장 순익은 없지만 미래에 대한 투자다! 이런 식으로 자료를 꾸며 볼까 합니다.”
“그쪽도 왕자의 난인가?”
“아, 한국은 싸우고 있어요? 우린 그냥 성인식인데. 경쟁자가 없거든요. 후후….”
“성인식 한번 비싸군.”
“대현의 로열패밀리에게 알려 주시죠. 총합계 1,600억 치 장비를 단돈 500억에 드린다고 말입니다. 웨이어 그라인더, 웨이퍼 소우, 다이 본더, 와이어본더, 몰딩, 큐어 오븐, 플라즈마 클리너, 픽 엔 마운터, 리플로우, X-ray 검사 설비 등등 후 공정 라인을 통째로 신규 설비로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톡! 톡! 톡! 톡!
나는 나도 모르게 소파의 팔걸이를 두들겨 댔다. 미우라가 읊어 댄 장비들은 하나같이 PDA 제작 공정에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대현이나 신성에서 반도체 wafer만 들고 오면 그 뒤론 내 공장에서 직접 제작을 할 수도 있다.
그걸 500억에 퉁칠 수 있다고? 이거 완전히 거저먹기인데?
일단 조사부터 해 보자. 사실이라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흐흠, 지금 와서 재계약이라니. 우리 로열패밀리께서 자세가 좀 안 나오는…. 굳이 구매자가 대현전자일 필요가 있습니까?”
“아! 물론 페이퍼컴퍼니를 만드셔도 되죠. 재판매를 하셔도 서비스 계약 내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려해 보죠. 일단 제 명함부터 받으시고, 보름 뒤에 연락 주십시오.”
나는 그제야 명함을 건네주었다. 미우라가 환하게 웃는다.
“준비가 필요하신가 보군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보름 동안 다른 데 팔지 않으신다면 계약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군요.”
“이얏호!”
환호성을 지른 미우라가 양팔을 하늘로 찌르며 빙글빙글 춤을 췄다. 분명 가식적인 행동인데, 요상하게 정말로 기뻐하는 듯 느껴진다. 이상한 사람이다. 케이에게 조사를 시켜 봐야겠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봐도 되나요?”
“살펴 가세요. 본의 아니게 시간을 많이 뺏었습니다.”
“아닙니다. 43억 엔. 정말 감사합니다.”
여비서는 미우라가 춤추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봐, 숙녀분! 그냥 가면 어떡해? 내가 태워 준다고 했잖아!”
“감사하지만 다음에!”
“쳇! 밥도 사 줄 텐데….”
미우라의 표정과 감정은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어찌 이런 이가 로열패밀리의 심복이 됐지?
“그럼 다음에 연락합시다. 나도 일이 끝났으니 귀국하면 되겠군요.”
“아, 제가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아뇨. 아직 티켓팅도 하지 않았어요.”
“아이고, 여쭤볼 말이 많았는데….”
“한국에 한번 오시든지.”
나는 그길로 호텔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당연히 가야죠. 아! 선물이 하나 더 있는데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
우뚝!
“백수길 그 양반 찍어 냈어요. 근데 포기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도련님께서 히타치 케미컬 잘 부탁드린대요. 미국분들도 애 많이 쓰셨다고 전해 달랍니다. 아, 물론 이 정보는 도련님만 알고 계십니다.”
띠링.
나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유창한 한국어, 지극히 정치적인 말, 그리고 내 배후를 캐고 있다는 암시까지. 한마디도 허투루 넘기기 곤란했다.
으음, 경계할 인물이 또 생겼나? 하긴, 이 판이 원래 좀 더럽잖아?
- *
휘이잉, 쿵쿵. 콰콰콰콰콰콰, 끼이이익.
비행기가 떴다 싶었는데 벌써 김포공항에 내려앉는다. 일행도 없이 혼자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니 기분이 묘하다. 언제나 이럴 때는 이 비서가 옆에 있든, 마중을 나오든 했는데 말이다.
‘어디로 갈까?’
이대로 회사부터 들를까? 아니다. 저녁 8시가 넘었으니 집으로 가야겠다. 아니다, 혼자 소주라도 한 잔 당기러….
“여기에요, 여기! 수한 씨, 여기!”
“으응? 케이?”
“혹시나 싶어 나와 봤는데 정말 왔네요. 행동이 빨라요, 수한 씨는.”
“하하, 그냥 나와 봤다고? 몇 시간이나 기다린 거야?”
“별거 아녜요. 4시간? 여하튼 계좌 이체하자마자 바로 떴을 거라는 내 예상이 완전 적중!”
“…….”
케이는 나름 나를 무척 기다렸나 보다. 하긴, 자랑하고 싶어 죽겠지. 나도 영화처럼 돈을 허공에 잔뜩 뿌리며 마구 뒹굴고 싶으니까.
“어서 가요. 내가 좋은 곳을 예약해 뒀어요.”
“어디?”
“놀라지 마요. LK백화점에 VVIP 층을 통째로 예약해 뒀어요. 호호호, 기쁘지 않아요? 곧 백화점은 문을 닫을 거니까 밤새도록 우리 맘대로 쇼핑하면 된다고요.”
“쇼핑?”
“걱정 마시라. 이번엔 내가 다 처리해 줄 테니까요. 당신 덕분에 돈도 엄청 벌었는데, 양복에 시계에 신발까지 한 세트 쫙 뽑아 줘야죠. 기쁘지 않아요?”
“하하하, 후회하지 마. 나 쇼핑하면 그냥 막 산다.”
“그것도 한번 해 봐요. ‘여기에서 저기까지 다 줘요!’라고.”
“오호, 그거 좋은데?”
나는 마중 나온 케이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즐겁게 공항을 나섰다. 전략 변경을 했다는 것만으로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꽤나 즐겁다.
케이는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조만간 독립할 거라는 것을? 그래서 걱정 따윈 하지 말라며, 이때를 즐기자고 하는 걸까?
부릉, 부르릉.
언제 뽑았는지 최신형 벤츠를 몰고 나왔다.
“아! 그런데 시계 한도는 1억이에요. 알죠?”
“그럼 5천만 원짜리 두 개는 돼?”
“오우,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쇼핑의 기본은 좋은 물건 하나를 사야지, 양다리 걸치면 안 된다고요.”
“후후후. 알았어. 9,999만 원짜리 산다.”
“그까진 내가 봐줄게요. 여하튼 이번 일로 수익률이 얼마인지 안 물어요?”
음, 내가 너무 넘겨짚었나 보다. 정말 돈 자랑과 쇼핑을 겸하고 싶었나 보다.
“물어봐 줄게. 자랑해 봐.”
“호호호호. 내가 계산해 봤는데요, 우리 자산이 자그마치 5,200억이에요. 수익률이 170%라고요! 이게 말이 돼요? 믿을 수가 없어, 오오오!”
운전대를 잠시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로 흥분하는 케이다.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
“대부분 주식이잖아. 묶인 돈이라고.”
“물주들이 히타치 케미컬 주식을 가져갔다니까요. 계좌 이체한 돈 빼고도 유동 자금이 천억이나 남았어요.”
“그래서 이번엔 케이식 계산법이 어떻지? 내 몫은 얼마지?”
“수한 몫은 3,100억. 나 2,100억! 이번에 한해서 수수료는 없어요. 어때, 맘에 들어요?”
“…거꾸로 말한 거 아닌가?”
“아뇨, 제가 계산법을 좀 바꿨어요. 독립하려면 유동 자금을 수한 씨가 가져가야죠. 쇼핑은 덤이에요. 보너스는 같이 즐겨야죠. 호호호.”
나의 독립을 당연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야, 끝까지 같이 데려가 달라고 협박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들켰나요? 자, 오늘 쇼핑 허용치는 10억이에요. 맘껏 써요.”
“10억? 그렇다면 차부터 사고 싶은데.”
“벤틀리 괜찮죠? 딜러한테 백화점 주차장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역시 케이야.”
내 독립에 이어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자동차 취향까지 읽어 내다니. 무섭게 똑똑한 여자다. 그런 여자가 내 독립에 배팅을 한다.
- *
“이쯤이면 됐나?”
나는 출근하기 전에 전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케이가 사 준 양복은 너무 튀었기에 원래 입던 옷을 걸쳐 입었지만, 와이셔츠만큼은 톰 브라운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쇼핑할 때는 무슨 와이셔츠 한 장에 100만 원씩이나 하냐고 인상을 찡그렸지만 한번 입으니 벗을 수가 없다. 착용감은 극상이며, 묘하게 선이 살아 있는 디자인은 다른 와이셔츠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였다.
부르릉.
차 시동을 걸고 출근길에 올랐다. 벤틀리는 차고에 고이 모셔 놓고, 이 비서가 남기고 간 업무용 승용차를 타고 나갔다.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자마자 저 멀리 대현전자의 로고가 보인다. 오늘따라 유독 낯설게 느껴진다.
- *
뚜벅뚜벅.
“사장님 계십니까?”
“아, 유 팀장님. 계시긴 한데….”
“인터폰 넣어 주세요. 데일리 회의 전에 출장 보고부터 드려야 해서 말입니다.”
나는 007가방을 높이 들어 비서에게 보여 주었다. 비서는 지체 없이 인터폰을 들었다.
“사장님, 유 팀장이 긴급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 오늘 귀국하는 날이던가? 어서 들어오라고 해요.
“예”
딸깍.
여비서가 문을 열어 주며 깊숙이 인사를 했기에 목례로 답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딸깍.
내가 들어서자마자 지체 없이 닫히는 사장실의 문.
“지금 도착했습니다, 사장님.”
“어서 오게. 어서 와. 아침 회의에서 보면 될 걸, 굳이 인사를 하러 왔나?”
“서둘러야 하는 일이 있어 미리 찾아뵈었습니다.”
나는 007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정헌몽 사장은 ‘뭐지?’ 하면서 살피다가 대현물산의 주식 증서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그마치 대현물산 지분 10%다.
“이, 이게 어떻게…. 자네 어떻게 구했나?”
“비싸게 주고 구했습니다. 제 미래를 걸었더니 돈을 좀 빌릴 수 있었습니다.”
절반의 사실을 섞어 주니 거짓말이 잘도 나온다. 미래를 건 게 아니고 미래를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왜? 굳이 자네가 왜 이런 더러운 판에 끼었나?”
정헌몽 사장은 기뻐하기는커녕 외려 나부터 걱정했다. 역시, 이 양반은 이런 판에 끼기에 너무 유약한 인물이다. 아니, 자기 사람에게 너무 정이 많은 사람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결국 왕자의 난에서는 이겼어도 정 회장의 무덤에서 눈물을 머금었고, 훗날… 아비의 유훈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유서 한 장만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그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의도한 건 아닙니다. 일본 관련 프로젝트마다 삐걱거리기에 건드려 봤더니 목적이 대현물산임을 알아챘을 뿐입니다. 못 본 척할 수가 없더군요. 미리 보고드리면 말리실 게 뻔해서 그냥 제 선에서 질렀습니다.”
“아, 어째… 아니, 고민부터 했을 테지. 말릴지 말지.”
솔직해서 좋다. 아니, 정헌몽 사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임원급에 근접하면 기로에 설 때가 있다.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별들의 전쟁에서 누구 한편에 설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줄을 잘 서면 승진하고, 잘못 서면 나락으로 빠지는 게임.
한데 나는 그 끝을 알고 있다.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결국 그 사람은 토사구팽당한다. 왕자의 약점을 알고 있거든.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사람을 가신으로 끝까지 곁에 두는 것은 정 회장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특히나 정헌몽 사장처럼 형제끼리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대현물산 주식을 끌어와 정헌몽 사장에게 몰아줬다는 것이 밝혀지면, 나는 이리저리 공격받아 결국 말라 죽는다. 괘씸죄는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이거 받으시고, 후계자에 오르십시오.”
“하아…. 그래, 대가는 뭔가?”
정헌몽 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내 007가방 옆에 두었다. 사직서라고 적혀 있으니 내용을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절 잘라 주십시오. NTT는 권재욱 팀장이, 히타치는 오성재 팀장이 우연찮게 물주와 연결되어 일 처리한 걸로 꾸며 주시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데일리 회의록과 관련자들 메모를 폐기해 주시면 더욱 좋고요.”
나는 이참에 꼬리를 잘라 달라고 했다. 왕자의 난을 결론지어 버린 범인으로 나를 지목하고 정구몽 사장과 정준몽 사장이 이리저리 조사한다고 해도, 내가 내쳐져 버린 상황이라면 확신범으로 여기기는 곤란할 것이다.
대현물산을 건드린 시점부터 나는 이미 독립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케이가 내 독립을 확신한 이유일 것이다.
“자네가 왜 이 판에 끼어서…. 그래, 이리되었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이는군.”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저도 사장님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내 말은 절반쯤 사실이다. 나는 오너 일가가 이박명에게 1,750억을 주면서까지 후계자 결정 게임을 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 돈은 이라크에서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바람 맞으며 공사판에 매달린 사람들의 피와 땀이다. 그 돈은 오너의 주머니도, 이박명의 주머니도 아닌 대현건설 직원들에게 주어야 할 돈이다.
나는 말을 씹어 삼켰다.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은 쓰잘데기없는 영웅 행세이며, 가증스러운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나조차 이 상황을 독립하는 명분으로 삼고 있잖나.
“대가가 그 정도에 그칠 리가 있겠는가? 뭘 원하나?”
“대현물산 지분 10%를 퀄컴 지분 10%와 교환했으면 합니다.”
“당연한 거래군. 그리하겠네.”
정헌몽 사장이 단박에 동의한다. 그에게 대현물산의 주식은 그 어떤 주식보다 소중하다. 그룹의 후계자임을 만방에 알리는 꼴이니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거래 내역도 비밀에 부칠 수 있다. 주식 교환은 케이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 처리할 거다.
“원하는 것이 또 있을 것 같군.”
“독립하겠습니다. 일본 휴대폰 시장에서 중간 상인 노릇을 좀 하려고 합니다. 제 회사를 대현전자의 주요 협력 업체로 등록해 주십시오.”
“아하, 역시 NTT 일은 자네가 의도했던 거군. 아쉽군. 자네와 이렇게 끝내야 하나?”
정헌몽 사장이 끝까지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을 것이다. 입 밖으로 내는 즉시 나와 갈라선다는 의미였으니까.
내가 대현물산의 주식을 폭락시킨 주범이라는 뜻. 내가 대현에 잠재적인 위험 요소임을 확신시키는 말이다. 내 행동은 가신의 범주를 훌쩍 넘어 버렸다.
“여기서 공식적인 관계를 끊는 게 제가 사는 방법입니다. 제 사주에 대현의 가신은 없었나 봅니다.”
“반박하기가 어렵군. 어째 일이 이렇게…. 아버님께 말씀드릴 명분조차 없군그래.”
결국 정헌몽 사장의 생각은 정 회장에게까지 닿았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큰 용을 잡으려다 보니 그만한 칼이 필요했다고 하시면 됩니다.”
“……!”
왕을 노리는 자라면 냉혹함은 기본이다. 읍참마속이 달리 사자성어가 되었겠나.
“그리고 그 용도 죽이시면 안 됩니다. 포용하셔야 합니다. 이박명 회장에게 검은돈을 건넸다고 터뜨리지 마시고, 이박명 회장을 공금 횡령 정도로 몰아붙이세요. 언론 제보는 조금 서두르십시오. 눈치채고 외국으로 일시적이나마 잠적해 버리면 증거가 조작될 겁니다.”
“……!”
정헌몽 사장이라고 이 일에 정보나 대응 방안이 없었을 리 없다. 결국 대현물산의 지분이 정구몽 사장에게 넘어가면 돈이 오간 정보를 이용해 언론 플레이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진정한 왕자의 난이 시작되고, 대현그룹 전체는 난장판이 되었을 거다.
피비린내를 마다 않는 대현다운 싸움이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대현전자는 IMF까지 잘 살아남아 아무 문제 없이 내게 반도체를 공급해 줘야 한다.
따라서 나는 정구몽 사장의 이면 계약을 숨겨 주라는 조언까지 덧붙인 것이다. 그리 일 처리를 하면 정구몽 사장은 정헌몽 사장에게 진정 항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가져다준 주식으로 지분 싸움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기에, 패자에게 아량만 보여 주면 게임은 끝나는 거다. 최종적으로 검은돈만 회수하면 잡음조차 나지 않는다.
“열흘 정도면 업무 인수인계는 끝날 겁니다. 오늘 아침 회의는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취소하겠네. 자네 없인 의미가 없지.”
“권 팀장, 오 팀장은 챙기십시오. 곁에 둘 만한 사람들입니다.”
“내 생각도 그러네.”
“열흘 뒤에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사장실을 빠져나왔지만, 정헌몽 사장은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만 저어 댔다. 정말 아쉬운 모양이다.
하나 방법이 없어요.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입니다. 정 회장님 정도라면 이런 결말은 예측하셨을 겁니다. 그럴 겁니다.
- *
나는 개발팀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다들 갑작스레 귀국한 나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긴급회의를 하겠다며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의 앞에서 허리 굽혀 인사했고, 곧바로 퇴직 의사를 밝혔다.
“다들 바쁘신데 모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개인적인 일로 퇴직할 예정입니다. 제가 했던 업무는 서랍장 서류에 모두 남아 있으니 김 대리께서 인수해 주시고, 차후 부임할 팀장에게 잘 전달해 주십시오. 열흘 정도는 업무에 대한 질문을 받을 테니, 휴대폰으로 전화를 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밖에서 딴 길을 찾겠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이곳에서 승승장구하시길 바랍니다. 휴대폰은 쭉쭉 커 나갈 사업이니 인생을 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업무다 회식이다 하며 괴롭혀서 죄송하고, 어린 나이에 반말해서 더욱 죄송합니다. 제 퇴직금은 팀 회식비로 남겨 드리니, 혹 제게 나쁜 기억이 있었다면 모쪼록 술자리에서 털어 버리십시오.”
줄줄이 읊어 댄 퇴직 인사.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는지 팀원들은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김 대리가 유일하게 크게 소리를 쳤다.
“팀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퇴직이라뇨!”
“그리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가 좀 그러네요.”
“팀장님….”
김 대리가 질문을 하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남을 대하듯 높임말을 쓰니 말문이 막히나 보다. 나의 무표정 또한 냉정하게 보였겠지. 어째 반말보다 높임말이 더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상관없다. 회사에서의 인연은 이어지기도, 또 끊어지기도 쉬운 거다.
솔직히 이 중 몇 명은 나에게 올 것이다. 그 사람들로 PDA라는 새 판을 짜야 된다. 자의로 와야 한다, 자의로.
“최소한 환송회라도 받고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아쉽기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어이없다는 표정, 어째 이렇게 할 수 있어? 하는 분노, 한숨 소리가 내 등 뒤를 채웠지만 상관없었다. 여기서 끊어질 인연이라면 이어 갈 이유 따위는 없는 거다.
- *
따르릉, 따르릉.
“왜 이리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아직 처자빠져 자고 있는 거야!”
이박명은 아침부터 일본에 있는 백수길 상무에게 연신 전화를 걸어 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일본에서 날아온 특급 우편이 두 통이나 들려 있었다.
하나는 NTT, 하나는 히타치의 물주에게서 날아온 우편이었다. 내용은 비슷했다. 이미 대현물산 주식을 처분했다는 내용이었으며, 경영권을 공격했다는 이력 자체를 지우라고 적혀 있었다.
히타치의 편지 말미에는 대현전자 공동 개발에 따른 리베이트는 이자를 받지 않을 테니 원금만 즉시 돌려 달라고 적혀 있었다. 돈만 넘길 뿐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도 쓰여 있었다. 완전한 관계 단절을 의미했다.
대체 일본에 연락책으로 간 백수길이 업무를 어떻게 했기에 물주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돌아선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예, 백수길입니다.
“야! 이게 무슨 일이야! 주식이 지금은 폭락하고 있어도 결국 오르게 마련이라고 설득했어야지! 그 지분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어떻게 일을 이렇게 만들어!”
-저, 저도… 지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럴 순 없어. 지금이라도 살펴봐! NTT 요시다 전무야 원래 새가슴이라 그렇다손 쳐도, 히타치 물주는 회장이 직접 나선 일이야. 이렇게 발을 뺄 리가 없어. 걸린 돈이 장난 아니잖아. 일을 돌려놔! 돌려놓으라고!”
-회장님, 히타치 본사로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미 해고되었습니다. 히타치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직접 전화를 걸어 대현과 관계 회복을 했으니 절대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까지 했습니다.
“뭔 소리야? 히타치 회장한테 아들이 어디 있어! 딸만 셋인데! 대체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거야? 물주가 바뀌기라도 했다는 거야?”
-모, 모르겠습니다. 하나 후계자라는 게 사실로 보였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나자마자 히타치그룹 비서진이 몰려와 모든 자료와 업무용 승용차까지 가져가 버렸습니다. 허, 이거 발을 빼는 게….
“닥쳐! 닥치라고!”
이박명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고 뭔가 스쳐 갔다.
히타치그룹 회장에게 숨겨 둔 아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서자인 주제에 5개국어를 할 정도로 천재라고 하던데, 직계 딸들에게 공격받지 않게 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는 소문 말이다.
한데 그자가 전면에 나섰어? 히타치의 이 편지가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정말 대현과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의미인가? 대체 왜? 이제 와서 왜?
백수길의 정보가 맞다면 이박명은 수렁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한다고 직감했다.
-회장님, 이거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일본 물주가 대현물산 주식을 처분했다면 우리도 발 빼야 합니다. 대현 오너들이 경영권을 방어하려고 주가를 올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제 몫만 챙겨 주시면 저도 이 기회에….
이박명이 입술을 짓씹으며 잠시 혼자만의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전화기 너머로 애달픈 백 상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순히 동의해 줄 수는 없었다.
“잘 들어, 백 상무. 영국 브린스톤 마인즈가 남았어. 아직 기회가 있다고. 심지어 그건 자네가 끌고 온 물주이지 않나.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대책을! 브린스톤 마인즈가 이 일을 알고서 원금 돌려 달라고 하면 우리 돈 수십 수백억만 깨지는 거야! 자네 몫 따위는 그냥 날아가는 거라고.”
-헉!
“즉시 영국으로 날아가! 지분 처리는 내게 맡기라고 하고 시간부터 끌어.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끊어! 어서 날아가!”
-예!
툭.
‘일단 나도 식구들이 있는 미국에 가야 해. 다산의 이력을 지우고, 해외에서 머물며 정구몽 사장과 담판을 지어야 해. 남은 7% 지분을 넘기는 대가로 최대한 챙기고 1,750억에서 그 돈을 제하고 남은 돈은 돌려줘야…. 아, 제기랄! 차라리 처음부터 넘기는 건데.’
이박명은 보너스 차익을 노린 자신의 판단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영권 분쟁을 일으키면 주가가 오르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일인데, 어찌 일이 이렇게 돌아가나 싶을 정도였다.
벌컥!
“김 기사! 김 기사 어디 있나? 공항으로 가야 해. 어서!”
이박명은 정원으로 나서며 운전기사를 찾았다. 한데 김 기사가 저택의 정문 근처에 우두커니 서서 얼굴이 파래져 있다.
“뭐야? 왜 그러고 서 있어? 차 가지고 오라는 말 못 들었나?”
“회, 회장님 그게….”
웅성웅성!
펑!
갑자기 집 대문이 터져 나가듯 열렸다. 그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지듯 엎어졌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고 있었더니 이박명을 발견한 이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KBC 기자입니다. 이박명 회장님! 1,750억 공금 횡령을 했다는 제보가 사실입니까?”
“연합일보입니다. 이라크 건설 대금의 일부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일본 요미우리입니다. 영국의 브린스톤 마인즈라는 회사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그 회사는 또 어떤 세력입니까? 어떤 세력이 걸프전에서 대금 결재를 하고 있습니까?”
“어? 브린스톤 마인즈? 적어! 적어!”
“다산이라는 회사의 오너로서 대현자동차에 부품 납품을 독점하는 특혜를 받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다산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뭐라도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이박명은 이거 완전히 늪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요미우리 기자라고 자신을 밝힌 이는 ‘브린스톤 마인즈’를 들먹이며 비릿하게 웃기까지 했다.
NTT와 히타치라는 물주를 완전히 숨기려는 의도다. 히타치의 후계자가 보냈다는 느낌이 스쳤다. 이거 완전히 판이 틀어졌다. 튀어야 한다.
“비키시오. 나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오.”
“어디로 출근하십니까? 다산입니까? 브린스톤 마인즈입니까?”
“말조심하시오. 난 대현건설의 고문이오. 대현건설로 출근해야 한단 말이오.”
이박명은 일단 대현건설로 들어가야 함을 직감했다.
‘들어가야 해. 들어가서 항복해야 해. 그래야 내가 살아. 정씨 일가에 7% 지분에 돈까지 깡그리 넘기고….’
회장직에서는 이미 잘렸지만, 보안 유지를 위해 1년간은 대현건설의 고문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 직책을 이용하면 대현건설로 들어갈 수 있다. 반격은 나중이고 지금은 대현으로 들어가서 무조건 항복! 항복을 해야 한다. 일을 이리 만든 주범이 가늠조차 되질 않았으니까.
‘그다음엔 남은 돈을 박박 긁어 여당 총재에게 가야 해. 정계로 나서야 검찰이 날 못 건드려. 다산만큼은 지켜야 해. 그것만 건져도 나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
이박명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자들을 헤치고 꾸역꾸역 차에 올라탔고 대현건설로 향했다.
차 안에서 계산 해 보니 정치자금으로 바칠 돈이 100억은 될 듯했다. 그 돈을 바치면 여당 총재는 자신을 건져 올릴 것이고, 자연스레 시총 천억에 육박하는 다산도 조사를 피할 수 있어 보였다. 1992년에 총선과 대선이 연달아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