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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특급 기술을 얻다 (19/104)

제6장 특급 기술을 얻다

다음 날, 김포공항.

오늘따라 건물 곳곳의 색이 바래 버린 김포공항이 눈에 들어온다. 비까번쩍한 인천공항에 익숙한 나로선 김포공항이 대현의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

미련을 갖지 말자. 어제부터 마음이 좀 급해졌지만 해야 할 일만 차분히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아침이 되자마자 내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갔으니 일단 스미토모 주식은 줄줄 빠지기 시작할 거다.

다행히 내가 각성한 시간이 그다지 늦지는 않은 것 같다. 차세대 DRAM와 Flash Memory 설계를 변 상무에게 주지 않았으니까. 적당한 중립을 유지한 변 상무가 새삼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결국 대현의 등에 올라타 성공하기보단 내 뜻에 따르라고 채찍질을 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야 한다. 이것도 이번 생에 내 운인가?

멀뚱히 벽을 쳐다보며 웃고 있자니 누군가 달려와 비행기 티켓을 내민다. 이 비서다.

“팀장님, 여기 티켓.”

“고마워요.”

“여하튼 해외 출장에 제가 없어도 되겠습니까?”

“이 비서는 일본어도 할 줄 알아요?”

“아뇨.”

“그럼 한국에 있어요.”

일본 주식시장에서 투기판을 벌이는데 이 비서를 데려갈 순 없다. 업무에 바쁜 오 부장 눈이야 피하겠지만, 이 비서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울 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아, 예. 잘 다녀오십시오. 여기 슈트케이스, 비행기 표, 호텔 예약 서류, 그리고 말씀하신 테스트용 웨이퍼입니다.”

“역시 이 비서!”

꼼꼼히 출장 준비를 해 준 이 비서다. 커다란 슈트케이스에는 열어 보나 마나 필요한 것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이 양반도 끌고 가긴 해야겠다.

뭘 맡겨 볼까? 히타치 케미컬 지사장을 줄까?

“유 팀장님!”

저 멀리 택시에서 내려 뛰어오는 오 부장.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기예요, 여기!”

“헉헉. 유 팀장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젠 설명이 가능하신가요?”

다른 이는 몰라도 이 양반은 내 배에 올려야 한다. 오 부장은 반도체 외형에 출하까지 담당해 본 사람이다. 제품 외형과 고객 마케팅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다. 기술자 중에선 짧은 시간에 경영진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임원까지 달았는데 퇴직하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웃음이 나온다. 내가 만든 상황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리 빨리 퇴직하라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비행기 안에서 말씀드리죠. 탑승까지 40분밖에 안 남았어요.”

“어어….”

난 오 부장의 손에 비행기 표를 쥐여 주고 출국장으로 밀어 넣었다. 이 비서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 준다.

“잘 다녀오세요, 팀장님들.”

“이 비서, 김 대리 잘 보살펴 줘요. 나 없다고 너무 무리하지 않게! 적당히 쉬게 해 줘요.”

“염려 마세요. 김 대리 체력 좋아요. 한 달 정돈 문제없습니다.”

“한 달 아니에요. 왔다 갔다 한다고 했죠?”

“아, 예. 알겠습니다.”

    • *

콰과과과과, 쒸우우우웅.

비행기에 올라 오 부장에게 2시간 정도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었다. 내 특허 또한 보여 줬다. 반도체 패키징 구조를 변경했어야 하는데 내가 알려 주지 못했다고 말이다.

“이 LOC 구조로 메모리 제품을 꾸몄어야 했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특허 이슈는 생각도 못 하고 불량률 잡겠다고 애들만 조졌네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나라 대기업의 개발자조차 특허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특허가 문제가 되면 로열티를 줘 버리거나 또는 유사 기술로 구조를 변경하거나 공동 개발로 이끌고 나간다든지 등등 일이 닥치면 수습하는 꼴이었다.

한데 이번 건은 사안이 좀 크다. 휴대폰 매출을 살펴보니 로열티가 빵빵할 것 같아 히타치가 숟가락을 턱하니 올린 거다.

“그 불량도 Tape를 채용하는 이 LOC 구조면 해결할 수 있어요.”

“예?”

“고민하는 불량이 칩 절연막 크랙(Chip Passivation Crack)이죠?”

“헉! 어찌 아셨어요?”

“불량률은 5%나 되고.”

“끄응! 어떤 놈이 보고서를 오픈했죠?”

“어떤 놈이 아니고, 특허 문제 터지고 내가 알아본 거예요. 오 부장님, 나에겐 숨기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알아보긴 뭘 알아보나. 원래 역사에서 내가 그 불량으로 뺑이친 기억이 있으니까 아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이 양반이 이 불량을 빌미로 회사에서 잘렸나 보다. 지금처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오 부장님이 다치면 저도 다쳐요. 특히 불량 관련 건은 저에겐 숨기면 안 됩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곧 임원이 될 사람이 과장에게 명심하겠다는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솔직히 회사 내에서 날 과장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쓸데없는 일 좀 줄여 보겠다고 승진을 거부한 것뿐이다. 이젠 그런 짓을 할 필요도 없겠다.

“자, 좀 있으면 일본에 도착하겠네요. 그동안 내 특허를 마저 읽어 보세요. 히타치 기술자 만나면 저랑 손뼉 잘 맞추셔야 합니다.”

“아, 예.”

오 부장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내 특허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구조에 어떤 결함이 있었고, 내 특허가 어째서 그 결함을 커버한다는 것인지 알기 위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참 뒤에야 ‘아!’ 하고 탄식을 쏟아 낸다.

이제 아셨어요? Tape가 핵심입니다. 히타치 케미컬이 만들죠. 전 세계에서 딱 한 사람만 그걸 만들 수 있어요. 그 양반은 Tape 성분비를 회사에도 알리지 않았죠.

    • *

나리타공항에 내리자 오 부장은 매우 당황했다.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서였다.

“어, 유 팀장님. 어째서 에이전시가 안 보이죠?”

“한국 에이전시엔 미팅 일정만 잡으라고 했습니다. 걔네들이 우리처럼 하루 만에 출장을 올 수는 없을 테죠.”

“아, 그럼 어떻게….”

“걱정 마세요. 미야자키는 한국말 꽤 해요. 아내가 재일교포거든요.”

“미야자키요?”

“오늘 우리가 만날 사람. 히타치 케미컬 개발팀장이죠. 갑시다.”

“어,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가시는 길에 큰 사거리가 나옵니다. 좌측으로 꺾으시면 됩니다.”

나는 지도를 보는 척하며 가야 할 곳을 알려 주었다. 몬타배라는 자그마한 술집이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다.

부우우웅.

“네, 알겠습니다.”

오 부장은 운전을 하면서도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허 소송을 건 회사는 히타치 반도체인데, 어째서 찾아가는 곳은 히타치 케미컬인지부터가 헷갈릴 것이다.

원래 역사대로 특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히타치 케미컬이 첫 번째 단추다.

원역사를 돌이켜 보자.

미야자키 팀장은 본래 히타치 케미컬에서 그리 주목받는 인재가 아니었다. 반도체 업계에서 히타치 케미컬이라는 회사 자체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이때만 해도 일본 스미토모라는 소재 업체가 반도체 소재는 꽉 잡고 있었다. 히타치 애들이 반도체를 만드니까, 그룹 차원에서 경비 좀 아껴 보자고 히타치 케미컬이라는 소재 업체를 만들었을 뿐이다.

1980년대에서 1991년까지는 별다른 수익도 내지 못하는 지질한 회사였는데 1991년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즉, 앞으로 한 달 뒤에 스미토모의 공장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다.

화재의 원인은 반도체 활황세로 과도했던 수요를 맞춘다고 공장 설비를 무리하게 돌린 탓이니, 이번 역사에서도 화재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거다.

스미토모의 대응 방식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미토모는 일본과 미국 반도체 회사에 대해서는 그룹 차원에서 불타지 않은 재고를 풀고 긴급 양산으로 대응하지만, 한국 반도체 회사는 사장이 직접 방문을 해도 물량 배정을 거절할 게 뻔하다.

한국 반도체 사장들에게도 일본 특유의 가식적인 대접을 해 주라는 매뉴얼은 배포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대현전자의 정헌몽 사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신성의 이희건 회장도 진심으로 빡치게 된다.

원래 역사에서도 히타치 케미컬이 그 사태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때는 이때다! 하고 히타치 케미컬에선 물량을 있는 대로 한국에 풀고, 대규모 기술자까지 파견해 한국 기술자들과 합심해 공정 최적화를 같이 해 버린다.

빨리빨리 문화에 단련된 한국인답게 신성과 대현은 자사 공장에 재고로 가지고 있던 스미토모 소재가 바닥나는 한두 달 만에 그 모든 일을 해내고, 그 뒤로 히타치 케미컬이 한국에서만큼은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스미토모가 복구를 마치고 거래를 재기하겠다며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회사 근처에 오지도 못했다. 괘씸죄는 영원히 지속되었다.

놈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한국 회사들이 반도체 치킨게임의 승자가 될 줄 말이다.

미야자키는 그때 대규모로 파견된 기술자들의 리더였다. 워낙 근면 성실한 데다 한국말도 곧잘 해서 개발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그 사람이 제안한 Tape를 이용한 LOC TSOP 구조를 대현이고 신성이고 할 것 없이 개발자들이 적극 채용해 버린다.

지금이라면 특허 이슈가 걸릴 만도 했지만, 한 번 써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히타치 케미컬에서 먼저 제안해서 적극 양산 개발을 해 줬는데 로열티를 받냐? 뭐, 이런 식으로 갑과 을의 일이 전개가 되다 보니 히타치 내부에서도 특허 소송 자체를 포기해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연 매출 수천억에 달하는 반도체 소재를 사 주는 갑을 어떻게 법정에 앉히겠나.

“아! 저쪽에 간판 보이시죠?”

“아, 예. 유 팀장님.”

끼이익.

「Montabea」

몬타배라는 뜻을 알 수 없는 영어 간판이 걸린 술집 앞에 차를 갖다 대었다. 히타치 케미컬 공장에 한번이라도 출장을 가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술집이다.

미야자키 팀장의 아내가 운영하는 곳이다. 지금에야 10평 남짓한 자그마한 가게지만 조만간 한국에서 출장 온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곳이 된다. 나도 일본에 출장을 오면 언제나 들렀던 곳이다. 일식에서 묘하게 한국적인 맛이 나는 곳이라서 제법 즐겼다.

딸랑딸랑.

“いらっしゃいませ(어서 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야자키의 아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일식집에서 아줌마가 요리사인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다. 손님이 뜸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8시에 예약을 했습니다만.”

“아, 미스터 유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인사에 한국말로 대답했더니 대번에 하이톤의 한국말이 되돌아온다. 가게에 손님도 없었기에 한국말을 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이런 촌구석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니 반갑기도 한가 보다.

“이쪽 방으로 오십시오. 주문은 어떻게….”

“일행이 두어 명 더 올 겁니다. 알아서 해 주세요. 10만 엔 정도로 맞춰 주시면 됩니다.”

“아, 10만 엔….”

“하루치 매상으론 충분하죠?”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좋은 대뱃살을 구했는데 미스터 유께서 오시려고 그랬나 보군요.”

여주인은 아주 공손하게 적당한 대답을 해 준다. 이때는 10만 엔이면 이런 작은 술집은 셔터를 내릴 수 있었다.

“대신 서비스가 좀 있었으면 하는데….”

“말씀하십시오. 어떤 생선을 좋아하시는지요?”

“생선 말고요. 통역을 좀 부탁드리려 합니다. 물론 대외적으로 말이 새면 안 되는 거라….”

“아, 그러십니까? 손님도 없으니 문제없습니다.”

일본에서의 화법은 매우 간접적이다. 셔터 내리라는 말을 에둘러서 하니 아주 공손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여주인이다. 눈치가 빠르다. 차후 히타치 케미컬 사장의 아내가 될 만한 사람이다. 남편이 끼어든 일에 통역을 맡을 테니 입조심시키는 데도 문제없다.

“좋네요. 시원한 맥주 한 병 먼저 부탁해도 될까요?”

“곧 올리겠습니다.”

드르륵.

여주인이 뒷걸음질 치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내가 마치 오래된 단골집에 들른 듯 편안하게 얘기를 해 대니, 보고 있던 오 부장이 고개를 갸웃할 정도다.

“유 팀장님, 여기 언제 한번 와 보셨습니까?”

“하하! 제가 언제 와 보겠습니까. 비행기 탄 것도 이번이 두 번쨉니다.”

“허허, 그런데 어째 단골집에 온 분위기라….”

“제가 원래 좀 그렇잖습니까.”

“아, 그렇죠.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 *

“에에?”

단출하게 오이절임과 함께 내온 맥주를 한잔하고 있자니 가게 입구가 살짝 부산스러워진다. 히타치 케미컬에서 사람들이 미팅 장소를 찾아온 것이다.

미야자키 아내는 깜짝 놀랐겠지. 내가 기다린 일본인이 자신의 남편이었으니까.

원래 역사에서도 몇 년만 지나면 이런 일이 매우 잦아졌기에 결국 미야자키 아내는 이 가게를 팔아 버린다.

잘된 일이다. 수십 년 뒤에는 이곳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버리거든. 그 뒤로는 내가 신경 쓸 일 따위는 아니다.

수십 년 뒤에 이 근처에서 크게 지진이 일어날 테니 원자력 발전소 짓지 말라고 하면 일본 애들이 고맙다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겠나. 미친놈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드르륵.

“미스타 유 되시므니까?”

“아, 예. 제가 유수한입니다. 미야자키 상 되십니까?”

“네, 반가스므니다. 요기는 저와 가치 일하는 우메모토 과장입니다.”

“はじめまして, 梅本です(처음 뵙겠습니다, 우메모토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은 저와 같이 일하는 오성재 부장이라고 합니다.”

“오 부쪼(부장) 되시므니까. 반가스므니다. 자르 부탁드리므니다.”

“아, 오성재입니다. 저보다 유 팀장님께서 리더십니다.”

“오! 리더시므니까. 자르 부탁드리므니다.”

번갈아 가며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명함을 교환하며 악수를 하는 데만 5분 이상이 걸린다.

1990년대 일본 회사원들과 명함을 나눌 때는 매우 형식미가 넘쳤다. 악수를 하고 명함 전용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양손으로 받쳐 들듯이 서로 교환했다. 그것을 받아서 이름을 외운다고 앞뒤를 돌려 보면 안 되고, 내민 방향 그대로 서로의 이름을 알 수 있게끔 영어로 인쇄된 쪽을 보면서 이름을 외워야 했다. 그러곤 다소곳이 명함 지갑에 상대의 명함을 맨 앞에 곱게 집어넣어 줘야 하는 거다.

완벽한 형식미를 갖췄다. 내 행동 하나하나는 미야자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앉으시죠. 목부터 축이셔야지요.”

“고마스므니다. 제가 몬저.”

“아닙니다. 먼저 받으세요.”

쪼르륵.

잔을 모두 채우고 꿀꺽꿀꺽 한 잔을 하고 나니 미야자키는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어느덧 우리가 에이전시의 통역을 거치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 유 부쪼께서는 어찌 에이존시도 엄시….”

“하하. 말씀드릴 내용이 에이전시가 들어서 별로 좋을 게 없어서요. 혹시 옆에 계신 분도 입이 무거우신지요?”

“문제업스므니다. 펴니 말쓰므 하셔도 되므오니다.”

“아, 좋네요. 여기 술집도 재일교포가 운영한다고 해서 예약을 했죠. 여주인께 통역을 부탁드렸으니 일본어로 편히 말씀하세요.”

“아, 그래서 유 부쪼께서….”

“편하게 미스터 유라고 하시죠. 제 직급은 부장이 아니라 과장입니다.”

내가 이곳을 예약한 이유를 듣더니 ‘아, 그랬군!’ 하는 표정을 짓다가, 과장이라는 내 말에 ‘어? 근데 부장이 왜 당신을 리더라고 하지?’ 하는 표정으로 넘어간다.

“유 팀장께선 로열패밀리십니다.”

대뜸 오 부장이 나섰다. 나에게 미야자키가 하대라도 하면 곤란하다는 표정까지 얹어 댔다.

“에엣? 로야르 패미리?”

“오, 오야붕 가조끄(오너 가족)!”

“으헉!”

“그만하세요, 오 부장님.”

나는 농담을 진담처럼 해 대는 오 부장에게 맥주를 채워 주었다. 과장이 한 손으로 따르고 부장은 두 손으로 받는 묘한 장면이 연출되니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드르륵.

“주문하신 메인 요리입니다. 오늘 들어온 대뱃살은 최상품이니 먼저 드셔 보시지요.”

여주인이자 미야자키의 아내가 회접시를 식탁 중앙에 놓고는 끄트머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찻잔과 찻주전자까지 가져다 놓으며 말을 많이 할 것에 대비했다. 역시 한국인보다 일본인에 가까운 행동이다.

쪼로록.

“말씀 잘 옮겨 주십시오.”

나는 그녀의 찻잔을 채워 주고 미야자키에게 눈길을 돌렸다.

“제가 이리 갑자기 미야자키 님을 뵙자고 한 것은 우리 같은 실무진에 아주 큰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꺼낸 첫마디에 미야자키는 바짝 얼어붙었다. 한국어든 일본어든 이런 자리에서 기회라는 단어는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큰 기회라잖나.

“기회라므… 무스 말쓰므니까.”

“한국말 말고 일본어로 하십시오. 옆에 우메모토 과장도 들어야 하며, 정보가 새어 나갈 경우 누군가의 입에서 나간 것인지 명확히 해야 하니까.”

“…はい、わかりました.”

“네, 알겠습니다.”

또렷한 일본어로 대답하는 미야자키의 말을 그의 아내이자 여주인은 억양 없이 통역해 주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똘똘해 보이는 여인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나는 이들을 고객 입장에서 10년 뒤쯤 보게 되는데,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히타치그룹 본사에서 대현전자에 특허 소송을 제기할 거라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는지요?”

“아니요, 없습니다.”

“하하! 그래서 기회라는 겁니다. 실무진인 우리가 지금 나서면 대현과 히타치 두 그룹은 서로 윈윈할 수 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승진할 수 있을 겁니다.”

“말씀하십시오. 새겨듣겠습니다.”

“오 부장님, 서류 좀 주시겠어요?”

“네, 여기.”

나는 오 부장에게 서류를 두 뭉치 받아서 차례대로 미야자키에게 건네주었다. 하나는 히타치의 특허 소송을 간략하게 적은 나의 메모이고, 하나는 내가 작성했던 Tape를 채용한 반도체 구조 특허였다.

미야자키는 그의 아내가 읽어 주는 메모 내용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영어로 되어 있는 내 특허를 보고는 깜짝 놀라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당연하다. 공개되지 못하고 회사 차원에서 사장되어 버린 자신의 특허보다 내 특허가 더 발전된 버전이니까. 내가 자신의 특허를 참조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내가 미래에서 온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최적화까지 완료된 구조이니 더하고 빼고 할 것도 없다.

“이 특허는 대체 누가 작성을 했습니까?”

“제가 했습니다. 괜찮아 보이십니까?”

“아, 제 특허와 너무 비슷해서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본사에서 조사를 해 보니 미야자키 님이 특허를 가지고 계시더군요. 반도체 특허인데 어째서 케미컬 회사에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짐짓 미야자키의 이력을 모르는 척 물었다.

“제가 한때 히타치 반도체 사업부에서 근무를…. 여하튼 특허 출원은 그때 했습니다.”

“아, 회사를 옮기셨군요.”

미야자키라는 이 소재 전문가 관점에서 원래 역사를 돌이켜 보자. 꽤나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 히타치 케미컬의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미야자키는 반도체 외형 구조부터 소재 개발까지 다방면으로 능력이 출중한 엔지니어였다. 승진이 힘든 일본에서 30대 후반에 히타치 반도체의 차장까지 오른 양반이다. LOC형 TSOP 특허는 그때 작성된 것이다.

기존의 초창기 TSOP 구조를 혁신적으로 개선해 Chip과 리드프레임 기판을 Tape로 연결하자는 아주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구조 특허였다. 모든 엔지니어들이 그의 특허를 보자마자 양산 적용은 당연하고, 가격과 신뢰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히타치 반도체는 1989년에 해당 프로젝트에 20억 가까운 투자를 하며 개발에 착수했다. 당연히 개발 담당자는 미야자키였다.

초창기 개발은 매우 순조로웠지만 마지막 단계였던 1,000시간짜리 신뢰성 검증 끝단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된다. 어찌 된 영문인지 반도체 칩의 금속 배선이 모두 녹아 버리는 불량이 발생한 거다. 공학적으론 갈바닉 부식(Galvanic corrosion)이라 부르는 불량이었는데, 문제는 도통 원인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개발이 실패로 돌아가자 반대파는 개발비 20억을 허공에 날려 버린 미야자키를 맘껏 공격했다. 차분히 분석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잠재적인 경쟁자를 이참에 제거하겠다고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대기업에서 승진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자가 없어지면 자기가 위로 올라갈 확률이 높아진다. 대기업에서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 먼저 잘려 나가는 경우가 태반인 이유다. 동시에 대기업 임원들 중에 남의 약점 잡는 것만 잘하는 놈이 간혹 껴 있는 이유라고도 할 것이다.

결국 미야자키는 히타치 케미컬로 좌천당했다. 직급은 차장에서 부장으로 올라간 듯 보였지만, 회사의 크기부터 차원이 다르다.

여하튼 현 상황이 좌천당해 있는 꼴이다. 지금이야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낙담하겠지만, 조만간 스미토모 화재 사건이 터지면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할 거다. 한국 반도체 회사들이 어쩔 수 없이 히타치 케미컬 소재를 써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되니까.

미야자키와 소재 퀄을 내는 와중에 대현 및 신성의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그의 특허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이거 괜찮은데?’라는 생각에 또다시 해당 구조를 시도해 보게 될 거다.

원래 역사대로 되돌아가면 미야자키가 변경점에 집중한 데 반해, 전체 그림을 봤던 대현의 엔지니어는 LOC TSOP에 쓴 Tape 소재와 기존에 쓰던 반도체 소재가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변경점은 LOC Tape이니 그게 범인이라 여기고 Tape에서만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미야자키는 실마리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거다. 원래 엔지니어가 고정관념에 한번 사로잡히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여하튼 대현의 엔지니어 덕분에 묻혀 있던 미야자키의 특허는 재조명받게 되고, 대현에서 퀄을 받은 것을 기점으로 1993년쯤엔 반도체 구조의 표준이 된다. 자연스레 특허의 핵심인 LOC Tape는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며 대현, 신성전자 할 것 없이 전 세계에서 대히트를 친다.

히타치그룹은 특허 로열티를 받는 것보다 소재 납품 업체로서 위치를 택하게 되고, 미야자키는 Tape 성분비를 회사에 알리지 않고 딜을 걸어서 우여곡절 끝에 히타치 케미컬 사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원래 역사와 달리 오 부장이 초창기 TSOP 구조를 양산에 적용하는 바람에 히타치가 특허 소송을 걸어 왔지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초창기 TSOP 특허가 아니라 LOC TSOP 기술이다. 미래의 내 캐시카우가 될 MP3에 채용될 Flash memory에는 LOC TSOP를 적용해야 하거든. Chip(칩) 설계에 반영될 정도로 전 세계 표준이 되어 버리기에 내가 LOC TSOP 특허를 출원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최적화된 TSOP 특허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LOC Tape의 소재 성분은 모른다는 데 있다. 구조 특허는 굳이 소재 성분표를 작성하지 않더라도 출원과 등록이 가능하니까.

히타치 케미컬을 먹어 버리면 해결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원래 역사에서도 미야자키는 소재 성분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마치 코카콜라 제조법을 코카콜라 오너들만 알듯이 말이다.

따라서 나는 한 달 뒤 대박이 터지기 전에 미야자키를 내 사람으로 끌어들이든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든 소재 성분을 기필코 알아내야 한다.

문제는 또 있다. 케이가 빌려 오는 자본이 단기 자본이라는 것이다. 히타치 케미컬이 원래 역사처럼 스미토모 소재를 대체하는 단계를 거쳐 LOC TOSP 양산까지 성공하는 수순으로 흘러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3개월 내에 둘 다 성공하는 초대박을 쳐야 주식 시장에서 물주들 돈을 돌려주고도 원하는 지분율을 확보할 수 있다.

“여하튼, 보시면 알겠지만 제 특허는 미야자키 님 것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입니다. 특허 소송까지 가면 서로 다칠 뿐입니다. 외려 그 아이디어를 양산에 옮겨 서로 특허 전반에 걸쳐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크로스 라이선스라….”

미야자키는 실패한 구조를 두고 왜 이러나 싶을 것이다. 되레 TSOP로 불량이 잔뜩 날 거라 생각했는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시하자. 나는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

“아시겠지만, 이 구조의 핵심은 Tape 소재에 있지요. 히타치 케미컬 개발팀장이시니 Tape를 납품해 주시면 크로스 라이선스 딜은 쉬워지겠지요. 가격이며 신뢰성에서 큰 장점이 있으니 저희 양산에 반영하겠습니다.”

“가격, 신뢰성. 그게 장점이라니요? 그 이슈로 양산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으흠, 이런 구조를 알면서도 양산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요? 만약 저라면 쌍수 들고 개발에 투자했을 텐데….”

“…….”

“아, 어찌 된 일인지 알 법하군요.”

미야자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 개발에 실패하고 좌천당한 일은 정말이지 잊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걱정 마세요. 대현에선 반대하는 이들이 없을 겁니다. 나와 여기 오 부장님이 나서면 LOC TSOP 양산 퀄을 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당신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대현과 제가 나서는 게 문제가 아니고….”

“하하! 뭐가 문제죠? 투자를 걱정하시나요? 걱정 마세요. 이대로 양산도 안 하고 이 아이디어를 썩힐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게 아니고, 이미 그 프로젝트는 히타치 반도체 시절 실패했던 이력이 있습니다. 당장 양산은 어렵습니다.”

“으흠, 왜 그러시나요? 여기 오 부장님과 협업하면 공정 변경은 물론, 원부자재를 모두 미야자키 팀장님이 개발한 소재로 변경할 수 있습니다. 칩 절연막 소재, 세정제, 테이프, 봉지재 등등 원하신다면 모두 바꿀 용의도 있습니다.”

“어허….”

미야자키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갔다. 신규 구조로 바꾸는 것도 리스크가 넘치는데, 거기에 신규 소재까지 집어넣겠다고? 개발자 관점에서 보면 나는 미친놈처럼 질러 대고 있는 거다.

나는 외려 당신의 치명적인 불량은 소재 궁합이 안 맞아서 그랬다는 걸 힌트로 줘 봤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오히려 다행이다. Tape 성분비를 토해 낼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반인들이야 같은 물질이라면 스미토모 소재에서 히타치 소재로 변경하는 게 무슨 대단한 리스크냐고 하겠지만, 그게 소재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같은 성분의 세정제를 써도 제조사에 따라 잔유물이 미묘하게 다르다.

그런 미묘한 변경점이 쌓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량이 난다. 해결책은 고사하고 분석조차 하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라, 소재를 변경할 바엔 공정이나 설계를 바꾸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엔지니어들이 대부분이다.

하나 나는 이참에 소재를 모조리 바꿀 거다. 왜냐고? 내 통신칩 제조 공법은 십수 년의 노하우가 쌓인 극도로 최적화된 공법이다. 한데 최적화된 공법임에도 지금 수율이 50% 근처에서 놀고 있다. 왜일까?

다름 아니라 내 공법은 히타치 소재 기반의 공법이다. 원래 역사에선 지금부터 히타치 소재로 깡그리 교체되잖나.

조만간 수율 90%를 맛보게 될 대현의 엔지니어들은 히타치 소재의 광팬이 될 거다. 내가 히타치 케미컬을 꿀꺽 삼켜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소재 기술은 대현전자와 딜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그리만 된다면 못해도 연매출 1천억쯤은 거뜬할 것 같군요. 정말이지 큰 기회입니다.”

미야자키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숨을 돌렸다. 표정이 굳어진다. 기회이기도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일 거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거부 의사를 표하지도 않는다. 매출 1천억이란 숫자는 탐이 나나 보다.

21세기 한국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이 본다면 매출 1천억은 작을 수도 있다. 하나 소재 업체의 1천억 매출은 시대도 시대이거니와 제조업의 1천억 매출과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 대현의 반도체 연매출은 1조를 넘어섰지만 순익률은 대략 30%로 3천억 정도를 남긴다. 6천여 명의 직원이 그 정도의 순익을 남기는 거다.

반면 소재 업체는 기껏해야 천여 명의 직원에 순익률은 60%가 넘는다. 즉, 천억 매출이면 600억이 남는 거다. 일인당 순익률이 매우 높다. 그걸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내가 도와주면 히타치 케미컬 매출은 단박에 수천억까지 뛰어오르게 될 것이다. 내가 서둘러서 주식 매입을 해야 하는 이유다.

“네. 매출 1천억 이상이겠지요. 근데 그것뿐이라면 제가 큰 기회라고 했겠습니까?”

“그것뿐이 아니라면 대체….”

미야자키, 난 당신 마음을 압니다. 나도 한때 개발자였으니까요. 당신은 끝내 사장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죠. 당신은 내 제의를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 *

“기회는 히타치 반도체가 소송이라는 협박 카드를 날렸다는 데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되지도 않는 로열티 받겠다고 을이 갑에게 본색을 드러내는 게 그게 쉬운 결정이겠습니까?”

“아, 그렇죠. 맞습니다. 결코 쉽지 않지요.”

미야자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지금 TSOP 특허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어려운 결정 정도가 아니라 숫제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이다.

로열티 5%를 질렀지만 결국 소송 끝에 합의에 다다를 숫자는 최대 3% 수준에 불과할 터. 대현의 반도체 매출이 대충 1조니까 기껏해야 300억밖에 안 된다. 그 돈에서 수십억에 달하는 특허 소송비를 지불하고 나면 별로 남는 장사도 아니다. 그 결과 히타치는 로열티 300억을 먹는 대가로 고객이자 잠재적 호구였던 대현과 갈라서는 거다.

그럼 언제 결정을 해야 할까? TSOP가 표준이 되고 대현, 신성, 마이크론, 모토롤라, NEC, TI 등등 반도체 10위권 안에 있는 회사들이 줄줄이 양산하고 있을 때나 카드를 꺼내야 하는 거다.

내 특허가 있는 대현처럼 소송이 길어질 회사엔 로열티를 팍팍 깎아 주고, 유사 특허도 없으면서 배를 째는 회사는 국제무역기구에 제소를 해서 로열티를 내고 있던 회사들이 ‘저 회사는 로열티도 안 내고 수출을 했어! 불공정거래라고! 저따위 회사엔 관세를 잔뜩 물려야 돼!’라고 하며 마구 공격할 수 있게끔 판을 짜야 하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반도체 회사들이 ‘다들 낸다고 하니까 나도 원가에 반영하지, 뭐!’ 하며 순순히 로열티를 내기 시작하고, 1년에 한 번씩 세계 일주하듯 로열티 거두러 다니면 수천 억짜리 보너스가 생기는 거다.

“그렇지요? 기껏 300억 벌자고 대현과 소송전을 불사할 이유는 현재로선 없거든요.”

“아까 보여 주신 메모에는 취소된 공동 개발을 재기할 목적이라고 적혀 있던데 말입니다.”

“표면적으론 그렇죠. 허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시작 단계에 불과한 공동 개발이 취소되었다고 히타치 반도체가 흔들흔들하기라도 합니까? 그 정도 프로젝트 때문에 앞길 창창한 대현과 히타치의 미래 관계를 손상시킨다고요? 왜죠?”

“으흠….”

“그리 질문을 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이 일의 주도자는 회사의 미래 따윈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공동 개발이 취소되자 자기 자리가 흔들흔들하는 겁니다. 그것도 대현전자 사장에게 공동 개발을 제기하지 않으면 특허 소송으로 피해를 보게 될 거라는 협박장에 가까운 공문을 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이 커져 버린 상태라는 뜻이죠.”

“어떤 일을….”

“뻔하지 않습니까. 이미 리베이트는 과할 정도로 줬고, 설비는 제작해 버렸고,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최소한 임원급이 관련된 일이군요.”

백 상무가 히타치 반도체로 이적을 했는데 때마침 특허 소송도 날아온다? 이상하지 않나? 나름 대현전자에서 한 끗발 날리던 백 상무의 체면도 있는데 말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 애들이 그런다는 의미는 백 상무를 영입해 간 것이 아니라, 인질로 데려간 거다.

백 상무는 공동 개발을 핑계로 히타치의 누군가와 설비를 사들인다는 이면 계약을 했을 거다. 당연히 리베이트도 듬뿍 챙겼을 테고 말이다.

문제는 공동 개발이 파투가 났는데, 백 상무는 리베이트로 받은 돈을 돌려주질 못했나 보다.

하긴 백 상무 위에 이박명이라는 짠돌이가 있는데 돈을 돌려줬겠나? 결국 특허 소송으로 대현전자를 협박하고, 지분 싸움으로 대현물산을 몰아가서 리베이트에 상응하는 돈을 대현으로부터 뜯어내자는 작전으로 선회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백 상무의 영입을 주도한 이가 바로 이 사태의 핵심 인물이다. 나는 그 인물이 다산연합의 일원으로, 대현물산을 공격하고 있는 히타치 물주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특허 문제를 해결하면서 미야자키도 영입하고, 그의 소재 기술도 얻고, 백 상무와 이박명을 이 판에서 지워 내고, 돈도 벌고, 독립할 기반을 닦고! 도랑 치고 가재 여럿 건질 거다.

“솔직히 이런 일에 로열패밀리가 직접 나서면 자세 안 나오죠. 속이 시꺼먼 놈들이 임원이라는 탈을 쓰고 판을 휘저어 댄 꼴인데.”

“로열패밀리께서… 감정이 상하셨군요.”

“그 부분에서 우리에게 기회가 있는 거죠.”

“…….”

“왜 그러세요? 이번 기회로 나와 미야자키 님, 그리고 함께한 오 부장님과 우메모토 상까지! 더 높이 올라갔으면 합니다만.”

“…?”

“때론 남이 만든 덫을 역으로 이용하기도 해야 합니다. 특히나 미야자키 님처럼 타의로 밀려나신 분은 말입니다.”

“…!”

미야자키의 눈이 점점 커져 갔다. 머릿속에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아, 그러니 제가 나서서 로열패밀리를 직접 설득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대현과 협조해 LOC TSOP 양산을 성공시키고, 히타치 케미컬에서는 해당 소재를 납품하면 특허 소송 따위는 비교도 안 되게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조언은 당연하고요, 중요한 건 따로 있을 텐데요.”

“이참에 비리를 저지른 놈도 찍어 내라고 조언을 하라는… 겁니까?”

짝짝짝!

“하하하! 바로 그거죠.”

“하…하하.”

박수를 치며 웃었지만 미야자키는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가 볼 때는 지극히 리스크가 큰 일로 여겨질 것이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이미 양산에 실패했다고 여기고 있다. 섣불리 개발을 시작했다가 좌천까지 당했는데, 내 말에 따르면 실패를 반복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나.

미야자키의 웃음은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 맘을 돌려놔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살짝 털어놓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하하…하. 으흠, 미야자키 님 표정이 왜….”

“아아, 술 한 잔 받으시지요.”

나는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미야자키는 그제야 자신의 웃음이 너무 티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내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짐짓 고개를 갸웃거려 주었다.

“미야자키 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내친김에 히타치 반도체에 미야자키 님을 공격한 이들도 같이 찍어 내면 복귀하실 수도 있을 텐데…. 내가 도와도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

내가 도발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자 여태 유순했던 미야자키의 얼굴에 순간 서늘한 기운이 스쳐 갔다.

누군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면 호의만으론 부족하다. 한풀이를 도와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오 부장이 옆에서 말을 꺼냈다.

“유 팀장님,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실 것까진…. 처음 만난 자리이니 서로 기술적인 의견 타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 내가 좀 흥분하긴 했군요. 비슷한 특허를 가지신 분이라 마음도 잘 통할 줄 알았더니….”

오 부장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난 미야자키와 밀당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D-day까지 불과 한 달 남았다. 그사이에 돈도 벌고 내 앞길도 닦아야 한다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솔직히 불가능합니다. 놈들을 찍어 내긴커녕 이번 일을 벌이면 지금 제 자리도 지킬 수 없습니다.”

“아, 불량 때문에 그러시군요! 갈바닉 부식! 그렇죠?”

“허억!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제가 원래 좀 이렇습니다.”

내가 피식 웃어 버리자 오 부장이 휙 하고 나선다.

“미야자키 님, 유 팀장님은 원래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수많은 것을 꿰고 계시지요. 천재들이 좀 그렇잖습니까.”

“처, 천재?”

“예. 단언컨대 제 평생 유 팀장님 같은 천재는 보지 못했습니다. 미야자키 님도 머지않아 알게 되실 겁니다.”

오 부장의 너스레는 이쯤 하고 단판을 지어야 한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극복하지 못한 갈바닉 부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당신이 내게 협조하는 겁니다. 결정하세요. 나를 도와 이 촌구석을 벗어나든, 아니면 영원히 좌천당한 패배자로 남든!”

이 또한 도발이다. 나는 이 양반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고 있다. 이 양반이 여기 개발팀장으로 옮겨 온 지는 불과 1년 반 전이다. 평생직장 개념이 강한 일본 회사에서 텃세는 무척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미야자키는 나름 도쿄 본사에서 잘나갔던 인물. 그런 이가 이런 촌구석으로 쫓겨났는데 촌뜨기들이 경계할 만하지.

현재 그 견제는 절정에 달하고 있다. 한때 잘나가는 차장 사모님 소리 듣던 마누라가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술장사를 하고 있지 않나. 마누라가 보기에도 이곳에서는 희망이 없는 거다.

미래의 나는 고객 입장에서 이 부부와 술자리를 여러 번 같이했었다. 이야깃거리가 없었든지, 아니면 고객 접대 멘트였든지 간에 나에게 옛날 얘기하듯 이때 힘들었던 얘기를 곧잘 했었다.

나는 확신한다. 이 양반은 운 좋게도 스미토모가 이때쯤 불타 버렸기에 망정이지, 언제 회사를 때려치워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니 지금 나타난 나는 이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제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도우면 가능하다고 했잖습니까. 해결한다고!”

해결책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반도체를 감싸는 봉지재의 성분을 고분자 계열에서 저분자 계열로 바꾸면 된다. 공학적으론 노볼락(고분자 폴리머)에서 바이페닐(저분자 폴리머)로 변경한다고 하겠지만 굳이 어렵게 말할 이유는 없다.

핵심은 고분자 계열의 폴리머는 태생적으로 불순물 추출이 어려운데, 그 불순물이 우연찮게 미야자키의 Tape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켰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고분자 폴리머가 좀 더 단단해 외부 충격에 강하고 접착력도 좋아서 개발자들이 선호한다는 측면을 제외하면, 저분자 폴리머를 양산에 적용해도 큰 문제 없다.

무척 간단해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좋은 게 좋은 거야!’ 하는 엔지니어의 고정관념은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

“그게 정말이라면… 해 보고 싶습니다.”

“이제야 결심이 섰나 보군요. 한 잔 하시죠. 크로스 라이선스를 위하여!”

쨍! 꿀꺽꿀꺽.

“제가 어떻게 크로스 라이선스를 결정합니까?”

“하하! 성의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LOC TOSP 구조 특허는 각자 출원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본사로 가면 미야자키 상을 지지할 증거는 있어야 하니까.”

“그걸 어떻게 보여 드립니까?”

“으흠, 이 자리에서 간단하게 공동 특허를 적어 보죠. 오 부장과 우메모토 상이 같이 자리했으니 증인이 되어 줄 겁니다.”

“공동 특허라고요?”

“소재 개발팀장이시니 LOC Tape가 공동 특허로 적당하겠네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Tape의 구성 성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폴리이미드 80%, 실리카 12%, 액상 실리콘 4%, 페닐 에틸렌 2%, 메틸 실리사이드 1.5%….”

나는 특허 서류 뒷면에 미래에 분석되는 소재의 구성비를 최대한 적어 보았다. 미야자키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래요. 대부분 아는데… 딱 0.5%가 뭔지 분석이 안 됩니다. 그걸 몰라서 모든 회사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Tape 성분비를 어떻게 그리…. 제 생각이랑….”

미야자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오 부장이 만류하듯 나섰다.

“유 팀장님, 아무리 그래도 자사의 기술을 그렇게….”

“오 부장님, 괜찮아요. 크로스 라이선스면 원래 양사 간에 특허 독점권이 없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적당한 타이밍에 오 부장이 성분비를 적는 내 손을 잡았다. 그가 봐도 Tape의 성분비로 들어가는 물질들이 심상찮으니까. 일반적인 접착제가 아니었다.

“그래요. 공동 특허는 공동 특허답게 해야겠네! 나머지는 미야자키 님이 적어 보시겠습니까?”

“…….”

나는 적다 만 성분표를 탁자 맞은편으로 밀고는 술잔으로 입을 가렸다. 어서 적어 보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것 같아서였다.

“남은 0.5%는 나머지 99.5%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럼 당신은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겁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을 거니까.”

“그 손은 어떤 손입니까?”

“당신을 한국으로 모셔 가려고 지금은 비단을 깔고 있고, 머지않아 일본으로 되돌아오실 땐 수천억짜리 계약서를 쥐여 줄 손입니다.”

“……!”

“그 계약서로 히타치 케미컬의 사장이 되시든지, 다른 길을 찾으시든지 그건 미야자키 님의 선택이죠.”

그 순간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옆에 거북이처럼 앉아 있던 우메모토 과장이 탁자 위의 종이를 가져가더니 뭔가를 쓱쓱 적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는 미야자키가 말릴 틈도 없이 내게 내밀었다.

“나므지 영쩌므오 프로는 아세니느 시르사이드 이므니다. 미야자키 상 자르 부타드리므니다(나머지 0.5%는 아세틴 실리사이드입니다. 미야자키 상 잘 부탁드립니다).”

“우메모토 상, 한국말을 할 줄 아셨나요?”

“아주 조금. 하르머니께서 조선분….”

“아, 예.”

“君、何でごとする(자네 왜 이러나)!”

“뜨나십시오. 미야자키 상은 여기 계시를 분이 아니므니다(떠나십시오. 미야자키 님은 여기 계실 분이 아닙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인가 보다. Tape의 성분이 여기서도 한번 업그레이드가 됐던 거네. 히타치 케미컬에 와서도 꾸준히 개발하고 있었던 거야. 우메모토가 그걸 도왔고, 나름 최종본을 만들어 낸 거군. 나조차 이 비밀을 몰랐으니, 원역사에서는 우메모토가 수십 년간 미야자키의 비밀을 지켜 준 거다.

한국으로 돌아가 좀 더 뒷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이 우메모토라는 자는 정말이지 입이 무겁다. 진국일 가능성이 99% 이상이다.

쾅!

“두 분 모두 갑시다!”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탁자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어, 어….”

“두 분 모두 한국으로 갑시다.”

특히 이 우메모토라는 양반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 신분을 세탁하기에 딱이다.

탁자에 놓여 있던 종이는 오 부장이 은근슬쩍 챙겼다. 종이가 아니더라도 내가 아세틴 실리사이드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미 게임 셋이다. 수십 년간 비밀로 감춰져 있던 Tape 성분비를 알아내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 성분비는 접착제뿐 아니라 코팅까지 활용도가 매우 높다. 정말이지 대어를 낚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본인답게 잘 부탁한다는 말은 한국인 발음 못지않게 잘했다. 두 명이니 더욱 좋다. 우메모토를 대현에 상주시켜 LOC TSOP를 양산시키고, 미야자키는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정치질도 시킬 수 있다.

후다닥 미야자키의 몸값을 높여 주고, 그를 이용해 백 상무를 찍어 내면 히타치의 물주는 기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놈이 토해 내는 돈을 거둬들일 생각을 하니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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