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왕자의 난 (18/104)

제5장 왕자의 난

「버지니아 트레이딩」

증권사인지 무역 회사인지 헷갈리는 이름이긴 하지만 분당 서현동에 있다고 해서 와 봤더니 빌딩 꼭대기에 아주 잘 보이게 간판을 걸어 놨다.

삐이익, 삐이익.

유리로 된 문에 달려 있는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렀지만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안에 조명이 훤하게 밝혀져 있는데 말이다.

대략 열 번쯤 누르자 케이가 귀찮은 표정으로 나타나더니 날 알아보곤 환하게 웃는다.

철컥!

“수한! 오면 온다고 전화부터 해야죠.”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근데 문을 닫아 둘 거면 사무실은 왜 만든 거야?”

“전망이 좋잖아요?”

“이거 페이퍼컴퍼니야?”

“무슨! 대현전자와 퀄컴을 고객으로 하는 회사인데. 건실한 무역 회사라고요.”

파고들어 봐야 무슨 소리를 듣겠나. 결국 중간 딜러로 물건 선점하고 이리저리 수수료 받으며 물건 넘기는 일이 전부일 것이다. 물론 돈은 로비로부터 나오겠지.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여하튼 히타치 좀 알아봤어?”

“당연하죠! 누구 부탁인데!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요. 제법 따끈따끈한 뉴스라서 말이죠.”

“따끈따끈하다고?”

“생각보다 파리 여럿 끼었던데요? 차부터 한 잔 해야죠? 커피? 녹차? 생강차?”

“커피.”

“설탕은 안 넣죠?”

“맘대로.”

케이는 탁자에 커피 한 잔을 가져다 놓더니 화이트보드를 끌어다 놓고 뭔가를 쓱쓱 그려 갔다. 그러곤 참고 자료라는 듯 영어와 일본어로 된 보고서를 툭툭 던져 주었다. 한눈에도 고급 애널리스트들이 작성한 보고서다.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마요. 그거 한 부에 만 불씩 주고 샀으니까.”

“가져가서 뭐하게. 브리핑이나 해 줘.”

“대현물산에 꽤나 파리 떼가 끼었어요. 개인 투자자로 위장하고 있지만 투기 회사가 분명해요. 일본 NTT, 히타치, 영국 브린스톤 마인즈 등을 물주로 두고 다산 캐피탈이라는 회사가 얼굴마담을 하고 있어요.”

케이는 회사명을 두고 화살표를 쭉쭉 그어 갔다. 얽히고설켰지만 화살표의 끝은 모두 대현물산으로 향해 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적대적 M&A나 주가 조작이 의심되는 화살표들이다.

다산(多産), 다산…. 애를 많이 낳는다는 뜻의 단어. 이름부터 1980년대 한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나이 좀 먹은 이들이 사업의 번창을 바라고 짓는 이름이잖나.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그 회사의 주인이 이박명임을 알고 있다. 드디어 물 위로 올라오셨구만.

“다산캐피탈? NTT, 히타치에 영국 애들까지 뒷배로 두고 있다니. 한국 회사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 듣는 회사라는 듯 케이에게 질문을 했다.

“일단 본사가 한국에 있긴 한데, 다국적 회사라고 해야겠지요. 설립된 지 불과 1년 정도인데 일본과 영국에 지사가 있거든요. 오너는 브라이트 영(Bright Young)이라는 사람인데, 으음….”

“브라이트 영? 미국인이야?”

‘브라이트 영’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밝고 젊다는 뜻이지 않은가. 이박명이 자신의 이름인 ‘명(明)’ 자를 이용해 신분을 속이고 있네.

진중한 표정의 케이에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으니 재미가 쏠쏠하다.

“으음. 왠지 미국인은 아닌 것 같아요.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이 그래요.”

“그러네. 외국물 어설프게 먹은 이가 지었을 법한 이름이군.”

‘브라이트’라는 영국식 단어에 ‘영’이라는 미국식 단어를 섞다니 허영기가 잔뜩 끼어 있다.

“위장 신분일 가능성이 높아요. 브라이트 영은 공식 석상에 나선 적이 한 번도 없거니와, 일본 지사장인 김재일이란 사람이 실권을 휘두르고 있거든요.”

“김재일?”

“재일교포인가 봐.”

“재일교포? 아니, 잠깐만. 이름이 매우 낯이 익은데…. 다산이 뭐 하는 회사지?”

김재일은 재일교포가 아닌 이박명의 처남이다. 케이가 모를 뿐이다. 꼬투리를 잡았으니 내가 정보를 풀어 주면 그뿐이다.

“간단해요. 설비와 부품 수입 업체예요. 자동차 부품과 반도체 설비를 딜링하면서 커미션 먹고 있죠. 최근엔 원자재 수입까지 사업을 확장한다더군요. 영국 지사 설립도 그래서 한 것 같아요.”

“NTT, 히타치, 영국 브린스톤 마인즈…. 그래서 물주 구성이 그렇군. 헌데 정작 자동차 부품 물주는 빠졌네. 요상한데?”

“으음, 듣고 보니 그러네요. 대현물산을 노리는 목표가 대현그룹 전체가 아니라 꼭 대현전자와 대현상선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잠깐. 이번 공격이 단순한 주가 조작이 아니라 적대적 M&A야?”

“그야 모르죠. 후후.”

“적대적 M&A라. 김재일, 김재일…. 혹시 그 양반, 이박명 회장 처남 아냐? 이름이 똑같아!”

“후후후.”

내가 애써 꼬투리를 잡고 얘기를 하는데 케이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한다. 마치 웃음을 참는 얼굴이다. 그 웃음을 숨기려는 듯 갑자기 내게 훅 하고 얼굴을 들이밀더니 이마를 맞대고 비비적거린다.

사각사각.

케이의 머리칼이 내 머리칼과 겹쳐 사각거린다. 묘하게 향긋한 냄새가 난다.

“하아, 재미있는 농담도 1~2분이죠. 갑갑해서 못 견디겠네요. 사랑스러운 수한 씨, 논리 그만 찾고 얘기해요. 내가 그리 못미더워요?”

이 여자… 나랑 같이 농담하고 있었군. 만만찮은 여자네.

“어디까지 조사했어?”

“뭘 조사해도 당신보다 한 수 아래겠죠. 털어놔 봐요. 이 판 어디까지 가요? 크게 먹을 수 있다면, 내게 프러포즈해도 돼요. 정중하게 받아들일 테니….”

케이가 탁자를 넘어 더욱 밀착해 온다.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케이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케이가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뒤로 넘기며 머리핀을 매만진다.

“길게 말할 것도 없어. 공격하는 놈은 이박명이야. 김재일 따위가 아니야.”

“에이, 또 딴소리다. 계속 몸통은 내버려 두고 꼬리 잡고 흔들 거예요?”

“뭔 소리야?”

“내가 그리 못 미더워요? 논리가 수한답지 않게 허접하시네.”

“…….”

나는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이박명이가 꼬리라고? 그럴 리가. 원래 역사대로라면 이때쯤 이박명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주범은 이박명이야. 회사 이름도 그렇다고.

“훗!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요? 이박명 따위가 아무리 회장 소릴 듣는다 해도 전문 경영인에 불과해요. 오너가 아니라고요. 이런 대형 물주들이 그따위 늙은이를 믿고 돈을 맡긴다니 세 살짜리 어린애도 믿지 않아요.”

“……!”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뭔가 꺼림칙하다 했더니 내 생각이 미처 그곳에 닿지 못했다. 그동안 너무 바빴어. 곱씹어 볼 시간이 필요했는데….

멍청아! 역사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어떻게 해! 겉으로 드러난 사실은 왜곡되고 또 왜곡되는 거야. 결코 진실이 아니라고!

케이 앞이 아니라면 나는 내 머리통을 수십 번은 두들겨 팼을 것 같다.

“그래요. 하긴 당신 입에서 일본 자동차 물주가 끼어들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으니 뒷배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죠. 당신 생각에 동의해요. 제 생각도 몸통은 정구몽 그 양반이라고 생각해요.”

“왕자의 난이라도 벌어지고 있다는 얘긴가?”

“왕자의 난? 비유가 멋지네요.”

“섣부른 판단이야. 정 회장이 건재해. 지금 이박명을 정구몽 사장이 뒤에서 밀고 있다니 쉽지 않은 얘기야. 위험한 도박이지. 나라면 그렇게 일 처리하지 않아.”

진심이다. 정 회장은 대현의 왕. 정구몽이 아무리 그룹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히고 싶다고 해도 그 작전을 펼치기엔 시점이 너무 이르다. 내가 이박명의 다산과 정구몽을 연결 짓지 못한 이유다.

“아! 그래서 확답하지 않았군요. 신중하기도 하셔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뭔 소리야?”

“당신은 당신을 변수로 여겨야 해요. 당신 때문에 정헌몽 사장이 각광받고 있다고요. 대현전자랑 휴대폰도 그렇고, 대현상선의 카자흐 광산 건도 그렇고. 정구몽은 정말 당황스러운 거죠. 정 회장이 가만있는 게! 가신 주제에 정 회장의 의중은 묻지도 않고 정헌몽 사장을 밀고 있는데 정 회장은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어요. 작은 경고조차 없었다고요.”

“정 회장이 날 시험하고 있다, 그 말인가?”

“당연하죠. 그 할아버지가 말했다면서요. 당신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겠다고. 대현을 어디까지 이끌지 보겠다고 했다면서요.”

으드득!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제 정보통을 무시하지 마세요.”

“어디서 들었냐고!”

“신성에서요. 회장끼리의 대화를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보고서로 작성해 뒀더군요. 그걸 얻으려고 돈을 꽤나….”

쾅!

나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쳤다. 능구렁이 중의 능구렁이. 그래, 회장 정도면 가신 하나 들이는 데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지. 이박명이란 배신자가 경영권을 공격하는 마당에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보겠다?

그 말은 이미 이 판을 정 회장도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네. 이박명과 정구몽은 물론, 나마저 정 회장이라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거야.

나도 같이 놀아 줘야 해? 결국 정 회장은 내가 대현전자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하는 거다. 이거 충성 시험이다. 미치겠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내가 어느 선까지 움직여야 하나?

“빌어먹을. 나를 시험하시겠다. 그리 도와줬는데?”

“믿기지 않으세요? 대현그룹은 바보들의 집단이 아니에요. 대한민국의 엘리트 집단. 이 자료를 봐요.”

쓰윽.

케이가 서류 봉투를 가져와 뭔가를 늘어놓았다. 탁자에 흩뿌려진 커피는 휴지 대용 애널리스트 보고서로 쓱쓱 닦아 버렸다. 이제 그따위 보고서는 쓸모없다는 얘기다.

대현물산 지분율과 외환 거래 보고서다.

“대현물산의 오너 지분율은 23%, 자사주 10%예요. 정확히 33%!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어요. 이런 마당에 다산이 물주들을 끌어모은 지분율은 15%에 불과해요. 숫자상으로 전혀 게임이 안 되죠. 변수는 오너 지분율 23% 중 8%가 정구몽 사장의 지분이라는 것. 정구몽이 다산에 붙으면 25 대 23! 박빙이죠. 여기서 또 다른 변수! 이박명이 대현건설 회장 자격으로 보유 중이었던 2%마저 옮겨지면 23 대 25! 의결권 역전이에요. 경영권은 다산연합에 넘어간다고요.”

“스토리가 뻔하군. 다산연합은 대현물산의 지주 회사를 대현건설에서 대현자동차로 바꾸라고 엄청 떠들어 대겠어.”

“맞아요. 걸프전 때문에 이라크 건설 대금을 한 푼도 못 건진 회사는 지주회사로 자격이 없다! 아주 좋은 명분이죠.”

“사고는 이박명이 쳐 놓고, 떡도 이박명이 가져가는 꼴이군. 증거는?”

“여기 외환 거래 내역! 정확히 1,750억이 영국 브린스톤 마인즈에서 다산으로 입금되었어요. 영국 정부가 이라크 자산 처분권을 가진 건 알죠? 대현건설이 지은 플랜트 운영권을 챙기는 대가인지, 대현건설의 건설 수주액 16.5억 불의 계약금 10%에다가 리베이트 6%까지 아주 알뜰하게 챙겼어요.”

원래 역사에선 걸프전 이전에 대현건설은 이라크에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따냈는데 자그마치 16억 불에 달하는 대형 호재였다. 한참 돈을 쏟아붓고 나니 걸프전이 뻥 터졌고, 공사 대금은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원래 역사에선 그 일로 이박명이 회사를 떠나고, 공사 미수금은 정 회장이 사재를 털어서 해결했다고 했는데….

이박명은 제가 싸 놓은 똥을 이런 식으로도 이용하는군. 미래에 밝혀지기를 다산에 흘러들어 간 돈이 1,750억이라고 했는데 그게 결국 이라크 건설 대금의 계약금이었어? 정구몽 사장이 처리해 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웃기는 노릇이다.

“정구몽 사장은 물밑 계약을 했겠군. 다산연합의 지분 17%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1,750억을 줬어. 그치?”

“그림이 그리 그려질 수밖에요. 사방에서 갹출해서 다산연합의 주식을 아주 비싼 가격에 사 주는 연극은 할 거예요. 정구몽 사장도 이참에 비자금 좀 챙겨야죠. 명목상 대현그룹을 자신이 나서서 투기꾼으로부터 보호하겠다. 배신자 놈이 주인을 물었지만 이렇게라도 해결을 해야지 어쩌겠나. 후후. 뭐, 그런 스토리?”

“브라이트 영이 이박명이란 사실을 정 회장도 알고 있다? 정구몽이 뒷배라는 것도?”

“농담해요? 정 회장이 보통 사람이에요?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뭐 어때요? 장남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그룹을 제대로 승계했는데. 증여세 한 푼 안 내고! 크게 보면 남은 장사라고요.”

“실망이네. 그런 배신자 뱃대지 채워 주고, 나한테는 충성 시험을 해?”

“상황이 그런가 보죠.”

“내가 물로 보였나 봐. 그치?”

히타치 특허로 시작했지만 케이라는 특급 로비스트가 나서니 전체 그림이 명확해진다. 언젠가 나도 본색을 드러내긴 해야겠지만 막상 이렇게 빨리 코너에 몰리니 좀 그렇다. 정 회장이 점점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정 회장은 상황을 적극 이용하는 것이겠지만, 내 감정을 건드리셨네.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일은 내가 하고 빌어먹을 새끼가 돈 버는 경우거든. 내 아버지를 폐인으로 만든 사기꾼 새끼를 내가 끝까지 응징하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 그림이 좀 바뀌더라도 그런 새끼들이 잘 사는 꼴은 못 보지.

“이번 기회에 그냥 나랑 같이 미국으로 가는 게 어때요? 수한 정도면 실리콘밸리에서 크게 한탕 할 수 있어요. 물주는 걱정 마요. 내가 물어 올 테니.”

“너무 일러….”

“참나, 뭔 소리예요? 그깟 나이가 미국에서 뭔 대수라고.”

말실수를 했는데 알아서 나이 핑계를 대 주니 고맙네. 지금 미국 가면 안 된다. 내가 아무리 미국에서 회사를 키워 놓아도 닷컴 버블 한 방에 쓸려 나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버블에서 살아남겠다는 도박을 할 바엔 한국에서 돈을 키워 닷컴 버블로 인한 폭락장에서 크게 한탕 노리는 게 낫다.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처럼 보여.

내 그림은 그 하락장 끝에 서서 쓸 만한 회사를 쓸어 담는 것이다. 그 선봉에 재훈이를 세울 거다. 나는 그때까지 돈을 모으고, 녀석은 기술을 닦고. 그게 우리가 몇 년이라는 시간을 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여겼다. 그때까지 초심을 지키려고 했는데 말이다.

나는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케이에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좀 더 해 보자. 일단은 발등의 불부터 꺼야지. 내 의도대로.

“조금 상황을 바꿔 보지. 내게 유리하게 말이야.”

“으음, 어쩌려고요?”

“내가 맡긴 주식들을 포함해서 끌어당길 수 있는 돈이 얼마지? 일본 주식 시장에 넣었다 뺄 수 있는 돈이어야 해.”

“수한 씨가 투기판에 끼어드시겠다고요?”

“투자라고 해 줘.”

난 시험에 들지 않아. 내가 시험한다.

그리고 이왕 정 회장이 왕자의 난을 지켜보는 대가로 포기한 돈이라면 내가 먹어야지. 안 그런가?

    • *

“분명히 투자라고 했어요. 대현물산의 백기사 따위를 하는 일이라면 동의 못 해요.”

“백기사는 무슨, 호구 잡힐 일 있어? 스미토모랑 히타치를 노릴 거야. 말해 봐. 얼마나 당길 수 있어?”

“으음, 히타치는 그렇다손 쳐도 갑자기 스미토모가 왜 나와요?”

“믿든 안 믿든 그놈들을 조지면 자연스레 이 문제는 해결돼. 내 약속하지. 수익률 100%!”

“수익률 100%?”

“그래. 최소 100%. 얼마나 당길 수 있지? 일단 내 돈은 올인시켜 줘.”

“오! 당신이 올인을 해요?”

“응!”

“그럼 나도 올인해야겠네.”

케이는 특유의 웃음을 짓더니 손가락을 뺨에 대고 몇 번이나 톡톡 두드렸다. 머릿속으로 주판이라도 튕기나 보다.

“일단 수한의 현금과 주식 담보를 합치면 30억 정도는 무난할 거예요. 잠재 가치가 높으니까. 가만 보자, 그럼 내 돈도 50억. 그 돈으로 물주를 꼬드겨야 한다는 건데…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죠?”

“목표는 히타치 케미컬. 1년 내 주가 100% 상승. 5년 내 세계 반도체 소재 시장에서 점유율 25%. 내가 나서면 가능해.”

“훗! 자선사업가 납셨네요. 남 좋은 일 시키겠다고요?”

케이는 회사 성공 여부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외려 내가 회사를 키우겠다는 말에 탐탁잖은 표정을 했다.

“뭔 소리야? 한국에 지사를 세우고 히타치 케미컬 본사를 먹어야지. 지금의 히타치 케미컬은 구멍가게나 다름없어. 아주 손쉽다고. 목표는 지분율 51%. 난 14.99%, 케이 당신이 36%. 우호 지분이 확실하다면 당신 지분을 어떻게 찢어발기든 상관없어. 대신 내 지분은 등 뒤로 꽁꽁 숨겨 줘.”

케이의 표정이 환하게 변한다. 언제나 맛난 고기를 통째로 삼켜야 제맛이다.

이참에 소재 업체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되어야겠다. 대현그룹 내에서 오너 일가와 내가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선택지는 일단 접어 둬야 할 것 같으니까 말이다. 여차하면 대현전자를 쥐고 흔들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

소재 업체는 그중 하나다. 설계 기술은 내 머릿속에 있으니 문제없고, 설비 업체 정도가 다음 타깃이 되리라.

“물주들에겐 얼마나 준다고 하면 돼요?”

“지분 참여를 원하면 케이 당신 몫에서 배분해. 이자만 먹고 떨어지겠다고 하면 올해 말까지 10%면 적당하지 않겠어? 최대 15%까지는 줘도 될 거야.”

“10~15%라. 좋아요! 장담은 못 하겠지만 3억 불쯤 당겨 볼게요. 히타치 케미컬 정도면 시가 총액이 6천억쯤 되겠죠? 그럼 물주 배당 3,400억 정도 떼 주고, 확보할 지분율을 따지면 수한 당신이 900억, 내가 2,100억 정도… 총 3,400억 정도 벌면 되네요. 110%쯤 벌어야겠는데요?”

“그 정도면 오차 범위 내야. 문제없어.”

내 전 재산이 30억. 그걸 담보로 900억짜리 도박을 하는 거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걸 두고 레버리지 30배수 투자라고 부르지. 좋게 말해 투자지, 수익률이 3,000%인데 두말할 것도 없이 투기다.

케이는 50억 올인. 42배수라는 살 떨리는 투기를 앞두고도 싱글벙글 웃어 댔다. 이 무서운 여자를 컨트롤하려면 결국 내가 가진 돈이 더 많아야 한다. 큰 그림과 더불어 내 자본을 더욱 늘려야 한다.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시간은 얼마나 있어요?”

“지금부터 한 달. 한 달 뒤부터 스미토모 주가는 급락할 거야. 공매도 지르고 적당한 때 빠져. 반대급부로 한 달 뒤부터 히타치 케미컬은 급등세이니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야 해.”

일본 주식 시장에서 공매도는 공탁금의 3배수 정도 지를 수 있다. 내 돈 30억, 케이 돈 50억을 이용하면 당장 스미토모 주식을 240억 정도 공매도 할 수 있다. 수익률은 공매도의 특성상 수십 % 수준일 테니 단기적으론 100억 정도, 미국 물주들 돈이 들어오면 300억 정도 더 먹고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돈을 히타치 케미컬 사냥에 몰빵!

케이라면 그 정도는 알고도 남을 거다.

“이야, 급하기도 하셔라. 여하튼 하나만 더 물을게요. 이 일로 대현물산은 어떻게 되죠?”

“그건 몰라도 돼. 경고하건대 대현물산은 손대지 마. 자칫 잘못 건드리면 그림 다 망가져. 이거 급조한 그림이라고. 변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어.”

“그림이 망가진다. 그래요, 오케이! 알았어요. 입 닫고 있을게요.”

케이는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앞에 세우며 환하게 웃었다. 벌써부터 떼돈을 번 듯한 느낌이 드나 보다.

솔직히 정 회장 못지않게 케이도 조심해야 하는 인물이다. 지금 내 상황에서는 미국 물주와 끈을 연결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케이의 성향은 대현물산도 먹을거리가 된다면 내 그림이야 어찌 되건 투자자를 끌어들이길 주저하지 않을 터. 더 이상 깊숙이 끌어들이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정 회장도 내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데, 돈이 된다면 어디로든 튀는 미국 물주들을 왕창 끌어들였다간 미래의 내 회사가 망가질 수 있다.

대현물산은 이참에 계열 분리가 되든, 오너 일가가 경영권 방어에 사재를 털어 넣든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목표는 대현전자와 대현그룹을 연결하는 고리를 끊어 버리는 거다. NTT와 히타치를 잡고 흔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현전자는 내 거다. 그 시기와 방법이 좀 달라졌을 뿐이다.

“일본 주식을 흔드는 데 어려움은 없지?”

“물주 뒤지면 일본에 세운 페이퍼컴퍼니는 수두룩할 거예요.”

“좋아.”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일 아침 일찍 일본으로 떠나려면 준비가 좀 필요하리라. 아니, 급조한 그림에 무슨 변수가 있을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말 끝나자마자 가요? 정말 이러기예요? 저녁 한 끼는 같이해야죠!”

“지금은 바빠. 일 마무리되면 한턱낼게.”

“늘 말뿐이야. 고객 접대는 미뤄선 안 된다고요. 나도 고객이에요!”

“고객은 무슨? 동업자지!”

“어우!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여하튼 동업자님, 진심으로 고마워. 정보는 정말 알짜배기였어. 역시 케이 당신밖에 없어.”

“립 서비스는 정말 잘해요. 가요! 나도 바쁘니까!”

“일본에서 봐.”

나는 피식 웃으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조만간 ‘버지니아 케미컬 주식회사’라는 간판이 옆에 붙을지도 모르겠다.

    • *

나는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잔으로 저녁을 대신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누구를 끌어들여야 할지, 일의 순서는 어떤 식으로 밟아야 할지, 또 다른 변수는 없는지 말이다.

결론은 똑같았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정 회장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온전한 상태로 대현전자를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본, 기술, 인력… 빠른 시간 내 준비를 마치고 독립해야 한다. 결국 대현전자를 넘어 대현그룹의 갑이 되어야 한다.’

작전을 바꾸니 인력과 자본을 내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어쩌리. 케이를 만났을 때 이미 배는 띄워 보냈다. 그녀는 특급 항해사다.

    • *

같은 시각, 정 회장 자택.

정 회장은 최 상무와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어떴누? 박명이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쳐 낼 수 있제? 백 상무부터 그놈 끄나풀들도 싹 다!”

“문제없습니다. 머리 굴리고 있나 본데, 결국 돈만 날리게 될 겁니다. 은근슬쩍 소문을 뿌렸으니 대주주들은 이미 눈치챘을 겁니다. 대현물산 주가가 하락해 투기꾼들이 달려들 기회를 준 것은 순전히 대현건설 때문이고, 그 손실은 회장님께서 사재를 털어 메우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우호 지분이 분열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구몽이는 딴생각하고 있다며.”

“별것 아닙니다. 외려 이박명 그놈이 가진 지분을 뺏어 오는 경비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다산인가 뭔가 하는 회사를 파산시켜 버리면 그 돈도 금방 거덜 날 겁니다. 물주들이 이박명을 가만두겠습니까? 지옥까지 쫓아가서 돈 받아 낼 텐데요.”

“하긴 그렇지. 맞아, 그래.”

정 회장은 목이 타는지 술잔을 입에 대었다 떼기를 반복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한이 그 녀석도 알고 있을라나?”

“늦지 않게 알게 될 겁니다. 명석한 사람 아닙니까?”

“알리 주야 되는 거 아이가? 그 녀석 오해할 수 있데이. 자기 시험한다고.”

“어쩌겠습니까? 충성 시험은 필요합니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노선을 정할 겁니다. 외려 동시에 공격받고 있는 대현전자에서 좋은 뉴스 하나 만들면, 정헌몽 도련님의 가신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겁니다.”

“자네가 나에게 왔던 것처럼 말이누?”

“저를 어찌 유 팀장에게 비유하십니까? 저는 상대도 안 됩니다. 천재 아닙니까.”

“아이다. 당신 젊을 때하고 조금은 비슷하다. 주베일 공사 입찰 때 내 명을 어기고 6천만 불을 더 적어 낸 거 기억 안 나나? 수한이 그 녀석도 내가 신성하고 담합하자카이 엄청 대들더라고.”

정 회장의 말에 최 상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나라에 외환보유고 채운다고 8억 7천만 불 써내면 우리 직원들 다 굶어 죽습니다. 9억 3천만 불! 이 가격에 낙찰 못 받으면 제가 대신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 다 죽을 바엔 저 혼자 죽으면 되지요!’라며 입찰 직후 대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얘기입니다.”

“여하튼 걱정이 돼. 내가 이참에 구몽이한테 그룹 넘긴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야. 느그들끼리는 은근슬쩍 얘기 좀 허나? 대현이 바뀔라카무 헌몽이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걸 어찌 드러내겠습니까? 자연스레 그리되어야지요. 유 팀장을 이천에 계속 두시는 것도 그런 뜻 아니십니까.”

최 상무는 매우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지만 정 회장은 과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불러서 알려 주는 게 좋지 않겄나?”

“가신은 스스로 주인의 품에 날아들어야 합니다.”

“가신이라므 그리하겠지. 헌데 그 녀석이 가신 노릇이나 하려고 내게 왔겄나.”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다니요.”

“새장에 가둘 생각은 없는데…. 헌몽이 손 잡고 제멋대로 훨훨 날아도 되는데….”

“아이고,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씀 밖으로 새면 유 팀장은 사방에서 공격받다가 말라 죽습니다. 도련님도 같이 말라 죽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무 빨리 나눠 줬어. 괜히 경쟁을 시킸으. 그 녀석이 올 줄 알았으면 다 쥐고 있다가 헌몽이하고 붙여가꼬 원하는 거 딱딱 떼 줬으면 되었을그루. 지금은 얽히고설켜서 딱 떼 주지를 못해.”

“대한민국의 모든 대기업이 그렇습니다. 승자 독식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승계자는 한 명이어야 합니다.”

“그래, 승자 독식. 언제나 그게 문제지.”

정 회장은 그 뒤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최 상무는 알 것 같았다. 팔은 절대 밖으로 굽을 수 없는 법이다. 승자 독식 판에서 아들을 두고 유 팀장의 손을 들어 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유 팀장이 가신 이상의 자리를 노린다면 결국 오너 일가는 그를 내칠 수밖에 없다.

‘유 팀장, 이 판에서 오너 일가와 동격을 원해선 안 돼.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곳은 나 정도의 가신이 최선이야.’

최 상무는 그리 생각했다. 정 회장이 실행한 전문 경영인 프로젝트는 이박명 회장 하나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룹 지주회사의 회장까지 시켜 주는 과감한 실험을 했지만 윈윈은커녕 그룹이 흔들흔들하잖나.

아무리 정 회장이라고 해도 그런 실험을 두 번이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 대상이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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