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일본산(産) 파리 떼(2) (17/104)

“힘든 거 알지만 견뎌요. 솔직히 해 줄 말은 그것밖에 없어요. 원가절감과 신제품 출시를 동시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오늘 저녁에 영업팀 강 대리하고 소주나 한잔해요. 나운영 그룹장하고, QA도 부르든지. 아, 조립 하청 업체인 주 사장도 불러요. 손바닥 비빌 거면 다 모아 놓고 한 번에 비비세요.”

“술 마실 시간도 없습니다.”

“그것도 업무입니다. 하세요. 주 사장 지갑 털지 말고 이거 써요. 자세 나오게 일식집에 가서 비싼 거 시키고요.”

나는 법인 카드를 쑥 내밀었다. 자그마치 한 달에 500만 원을 경비로 쓸 수 있는 A급 법인 카드다.

내가 대신 나가면 안 되냐고? 회사에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면 안 된다. 그럼 진짜 소 잡을 일이 생겼을 때 쓸 칼이 없어진다.

“늘 이러시니까 개발팀을 뭣같이 보잖습니까?”

“응? 누가 감히 김 대리를 뭣같이 봅니까? 당신은 A급 인재에요! 팀장인 내가 인정하는데 어떤 놈이 그따위 소리를 합니까?”

“휴우….”

“견뎌요. 올해 상반기가 깔딱 고개에요. 원래 덤핑 앞두면 개발자가 제일 힘들잖아요.”

“하아….”

“정 힘들면 내가 나갑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자세 더 안 나옵니다.”

“잘 알면서 왜 그래요?”

“팀장님 나이는 도저히 가늠을 못 하겠어요.”

“시답잖게 나이 얘기는 왜 해요? 가서 영업팀 강 대리에게 회식하자고 하세요. 은근슬쩍 달래 주라고요.”

이처럼 김 대리의 말을 끝까지 받아 주는 것은 일종의 대규모 스트레스 해소라고 할 수 있다. 김 대리는 자연스레 팀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나는 자연스레 내 의도를 팀원들에게 내비치는 행위이기도 하다.

개발팀은 제품 출시의 리더인 동시에 부서 간의 윤활제 역할도 해야 한다. 하기 싫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김 대리는 아직 체감이 되지 않겠지만 개발팀에서 주야장천 임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물론 이런 대화는 나에게 주는 이득이 더 크다. 내가 로열패밀리라는 소문은 진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고 있지만, 팀원들이 나를 대하는 자세는 여전하거든.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산전수전 다 겪은 부장이나 할 법한 말투가 나오고, 과장인 주제에 임원들이나 할 법한 딜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시하잖은가.

“팀장님, 그 회식에 저도 참석해도 되나요?”

저쪽에서 송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묻는다.

“송 대리는 왜요?”

“주 사장 쪽에 조립 라인 확장 지시하셨잖아요. 외주 관련 부서가 다 모이는 자리잖습니까.”

“…그러네요. 가서 QA 좀 꼬셔 봐요. 신규 라인 퀄하면서 샘플 좀 흘리자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후훗!”

“하하! 꼴을 보아하니 손바닥은 김 대리가 비비고, 떡은 송 대리가 먹겠군요.”

“저도 같이 비벼야죠. 백지장도 맞들면 낫잖아요.”

“하하하!”

김 대리는 히죽거리는 송 대리를 보며 ‘야이, 또 내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 하는 눈초리를 날렸지만 송 대리는 김 대리의 옆구리를 툭툭 찔러 대며 웃어 대기만 한다. 팀원들의 성격이 업무에 녹아나고 있다.

김 대리가 우직하다면 송 대리는 빠릿빠릿하다고나 할까? 역시 차기 개발팀장은 김 대리가 하는 것이 좋겠다.

일의 진행 속도 대비 팀원들의 직급이 못 쫓아오는 것이 문제이긴 한데… 뭐, 할 수 없다. 2년쯤 뒤엔 특진을 좀 시켜 줘야 할 것 같다. 내가 과장으로서 팀장을 맡고 있는 선례도 있으니까.

띠리리리.

내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강 대리, 기다리라고….”

-비서실입니다. 사장님께서 지금 뵙자고 하십니다.

영업팀 강 대리라 여기고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10분 정도 걸립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무적인 통화가 끝나고 시계를 봤더니 아직 점심시간이 한참 남았다. 단순히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말은 아닐 테고, 회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다.

친히 불러 주시니 후다닥 달려가는 충성심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오전에 결재할 것이 있으면 김 대리가 대신 해요. 천만 원 이상 결재는 남겨 두고요.”

“예. 알겠습니다. 멀리 가십니까?”

“글쎄. 가 봐야 알겠네.”

나는 재킷을 걸쳐 입고 쪼르륵 사장실로 달려갔다. 사무동은 왜 회사마다 저리 구석에 두는 걸까 싶을 정도로 멀다.

사무동에 들어서니 입구에 ‘경축! K폰 수출 5억 불 달성!’이라는 현수막이 아직도 걸려 있다. 석 달 전 1억 불일 때는 그룹 차원에서 엄청난 잔치를 벌였는데, 이젠 5억 불이 되어도 무척 당연한 일인 듯 현수막 하나 걸치는 것으로 퉁치고 있다.

똑똑.

“사장님, 유 팀장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안으로 드시지요.”

“네, 고마워요.”

사장실로 들어가는 것조차 이런 형식적인 통과의례가 있는 시대. 대학교를 졸업한 아리따운 여성이 하루 종일 데스크에 각 잡고 서 있는 업무가 당연시되는 시대다.

10년만 지나면 대표적인 인력 낭비로 꼽히는 일이 되지만 말이다.

“어서 오게, 유 팀장.”

“부르셨습니까?”

“이리 앉게나.”

“예.”

나 또한 각을 잡고 인사를 하니 자리에 앉자마자 따끈한 차가 탁자에 놓인다.

“요즘 많이 바쁘겠지?”

“사장님만 하겠습니까? 기지국 때문에 골치 아프시잖아요.”

“SJ 놈들이 그리 나올지는 몰랐네.”

최근 일을 말하는 것이다. 대현에서 기지국을 세워 줬더니 실제로 판이 벌어지자 SJ가 안면을 바꾸곤 완성된 기지국의 운영에 대해서 대현에 하청을 맡으라고 하고 있었다. 기지국을 인수하려니 땅값이 올라 버렸거든. SJ야 기지국을 추가로 만들면 되니까 굳이 돈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종의 갑질이지만 미래를 생각해 보면 대현이 전혀 손해날 장사가 아니다. SJ 애들이 통신망 운영권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로 번져 가는지 예측을 못 하고 있을 뿐이다.

하긴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거다. 유리한 주파수를 선점한다고 로비를 엄청 해 대고 있을 것이며, 정부 보조금을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온 힘을 쏟아붓고 있을 터.

“SJ 놈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차후 통신망이 인터넷 서버 형태로 확장되면 SJ는 지금의 결정을 진심으로 후회하게 될 거다.

“후후, 자네 말은 언제나 날 들뜨게 하는군. 알았네. 여하튼 그것 때문에 부른 것은 아니니까 안심해.”

“그럼 무슨 일로….”

“이것 좀 보겠나?”

내게 내민 것은 영어로 된 서류였는데 척 봐도 법률적인 용어가 잔뜩 기재되어 있었다. 마치 빚 갚으라는 독촉장처럼 벌건 줄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자세히 읽어 보니 특허 로열티 청구서다. 발신자는 일본의 회사인 히타치 반도체이고, 수신자는 대현전자의 대표 이사, 즉 정헌몽 사장 앞으로 되어 있다.

“으음? 히타치가 로열티를 달라고요?”

“자네가 적용한 TSOP인가 뭔가 하는 반도체 외형이 히타치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특허비를 요청하고 있네. 자그마치 휴대폰 도매 판가의 5%를 달라고 하는군.”

“판가의 5%라고요? 미친놈들 아닙니까?”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고 높게 지른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하긴 하네.”

“잠시만요. 생각 좀 하고요.”

원래 역사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기에 일단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TSOP 구조의 특징은 기존 반도체 외형을 2mm에서 1mm 이하로 줄였다는 데 있다. 일본 히타치 애들이 특허를 낸 구조인데, 원래 역사에선 생산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외형은 비슷하지만 대현의 TSOP 내부 구조는 상당히 달랐으니까.

나는 서류 뒤쪽을 계속해서 읽어 보았다. 특허 위반이 분명하다며 내부 구조를 상세하게 분석한 보고서가 딸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현의 TSOP는 히타치의 특허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반도체칩 상부를 Tape로 붙이는 구조가 아니고, 칩 하부를 리드 프레임 기판에 붙이는 타입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오성재 부장이 왜 Tape를 쓰는 LOC 구조를 쓰지 않은 거지?

‘젠장! 내부 구조를 확인했어야 하는데. 이런….’

그제야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았다. 내가 시간을 너무 앞당겼던 것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대현과 신성 할 것 없이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히타치 TSOP 특허 이슈를 아주 자연스럽게 피해 갔다.

1991년 퍼스널 컴퓨터 붐으로 인해 1992년부터 폭발적으로 반도체 수요가 늘어났고,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반도체 회사들이 검증되지도 않은 LOC TSOP 구조를 생산에 집어넣어 버렸다.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수십 개의 특허가 등재된 것이다.

그 일이 벌어진 계기도 매우 우연이었다. 수요가 폭발하던 시기에 반도체 주요 소재 공급 업체 중 한 곳이었던 일본 스미토모 케미컬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당연히 한국 반도체 회사들은 소재를 수급하지 못해 난리가 났다.

그 대안으로 엉겁결에 히타치 케미컬이라는 히타치그룹 내의 조그마한 회사가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고, 단숨에 스미토모를 제치고 대형 소재 납품 업체가 되어 버린다.

소재 업체가 히타치 케미컬이라는 것이 주요했다. 결국 히타치는 그룹 차원에서 특허 싸움을 벌이기보다 소재를 팔아먹는 조건으로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는 것을 택한다.

기술 검토를 해 보니 양산되는 TSOP 구조가 TSOP 원천 특허와 차이가 있다 보니 승소하기 쉽지 않겠다고 여긴 탓도 있으리라.

내가 단추를 조금 잘못 끼웠다. 첫 번째 실수는 대현의 기술 진입 시점이 빠르다는 것을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 실수는 내가 양산형 LOC 구조 특허를 이미 제출했다는 사실을 오성재 부장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나리오만 써 놓고 무대에 올리지 않은 격이다.

잘못 끼운 단추를 원래대로 좀 돌려야겠다.

‘그러고 보니 한 달 뒤에 스미토모가 불타지? 깜빡할 뻔했군. 일본엔 내가 직접 가야겠어.’

마치 일이 잘못될까 봐 히타치가 내 기억을 환기시켜 준 꼴이다. 원래 역사가 꾸역꾸역 내 머릿속을 채워 갈 때쯤 정헌몽 사장의 말이 들려왔다.

“유 팀장을 부른 건, 대응책을 세우기 전에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네. 자네와 오 부장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할 거야. 나름 방어를 하라고. 히타치에는 법무 팀을 붙여서 시간을 좀 끌고, 로열티는 절반 수준으로 깎아 볼 테니까.”

나름 나를 배려해 준 거다. 이 사실을 사내에 공지하겠지만 최소한 반대파로부터 방어할 자료 정도는 만들라고 말이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거 사장님 앞으로만 왔으니 한 달만 이슈 안 되게 해 주십시오. 그동안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으음? 어찌할 셈인가?”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어 보겠습니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진행 사항은 실시간으로 보고드릴 테니 안심하시고요. 오성재 부장과 같이 가겠습니다.”

“오성재 부장까지?”

오성재 부장도 데려가야 한다. 사장이 공식화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일은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곧이어 오 부장은 이사로 승격 발표가 날 텐데, 이런 악재 속에 내버려 두면 이미지에 금이 간다. 임원 달자마자 흠집이 나면 안 된다. 그는 내 사람이다.

게다가 일본 간 김에 크게 한탕하고 오면 될 것 같다. 국내 주식시장을 휘저으면 결국 내가 저지른 나비효과로 내가 다칠 수 있지만, 일본 주식 시장이야 나랑 무슨 상관인가? 치고 빠지면 그뿐이다.

스미토모 주식을 공매도 때리고, 히타치 케미컬을 미친 듯이 긁어모으면 되는 거다. 케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으려면…. 그렇지만 핵심 인력이 둘이나 한 달 넘게 자리를 비우면 어쩌나? 특허 이슈도 이슈지만 한 달 뒤면 신성이 덤핑하는 시기와 겹치지 않나. 그 또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일이네.”

“비행기 타면 2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간간이 자리를 비우는 수준일 겁니다.”

“그렇긴 하군. 그럼 전략은 무엇인가?”

“별거 아닙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죠. 일본 애들도 파벌 싸움 잘하잖습니까.”

“이이제이?”

“히타치에 친한파 사장 세우고 오겠습니다.”

“그게 가능하겠나? 으흠, 자네라면…. 그래! 내 한 달은 막아 보지. 진척 사항은 수시로 보고하게.”

“감사합니다.”

정헌몽 사장은 고민을 마무리 짓고 책상으로 걸어가 특허 로열티 청구서를 서랍 안에 넣어 버렸다. 공식화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럼 온 김에 식사나 같이할까?”

“죄송하지만 나중으로 미루시죠.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국하려고요.”

“바로 출국한다고?”

“예. 일본 애들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놈들입니다. 지금 한창 시나리오 짜고 있을 텐데, 서두르지 않으면 아무리 찔러도 태도 안 바꿉니다. 사달이 나기 전에 방향 틀어야죠.”

“듣고 보니 그렇군. 내 허락하지. 출국하시게.”

“옙!”

“호텔은 최고급으로 잡게.”

“감사합니다.”

나는 어깨를 툭툭 털어 주는 정헌몽 사장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곧바로 연구소로 패키지 개발팀 오 부장을 찾아갔다. 다짜고짜 업무 정리하라고 지시하고는 데리고 나왔다.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내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오라고 말이다.

나는 나대로 움직였다. 이전에 작성한 특허 서류부터 챙기고, 이 비서에게 시켜서 히타치의 한국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히타치 케미컬과 기술 미팅 잡고, 비행기표와 호텔 예약 등등 출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탁했다.

나는 그길로 분당으로 향했다. 일종의 촉이 발동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김 대리를 설득하긴 했지만 일본 고객 NTT 건도 잘 안 풀리고, 뜬금없이 히타치가 특허 소송을 하겠다고 하고 있다. 일본과 얽힌 일들마다 모두 삐걱거린다. 케이가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얘기부터 하고 출국하든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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