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일본산(産) 파리 떼 (16/104)

제4장 일본산(産) 파리 떼

타타타타.

‘반도체 두께를 TSOP 기술로 절반 이하로 줄였으니, 차기 휴대폰 모듈에는 양면 실장을 적용해 봐야겠어. 그럼 더 얄팍해지니 잘 팔릴 거야. 으흠, 그러면 적층형 캐패시터로 전환하는 공정 기술은 변 상무에게 알려 주고…. 이때쯤 폴리실리콘 배선을 모두 텅스텐으로 바꿔야 해. 양면 실장을 해도 전력 소모량과 스피드는 오히려 개선될 거야. 대충 내년까지 개발하게 하면 얼추 시간이 맞겠군.’

정 회장의 의도를 리스크로 인식하는 것, 정헌몽 사장과 코드를 맞추는 것, 적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것 등등 머리가 복잡하지만 무엇보다 내 일을 제때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변수를 파악할 겸 원래 역사 대비 1년 정도 앞당긴 시나리오를 가다듬었다.

설익은 기술을 사용했다가는 대형불량사고를 유발할 수 있으니 신중해져야 했다. 퍼런 바탕 화면에 DOS 기반의 워드프로세서로 타이핑을 하고 있자니 새삼 세월이 느껴진다. 그래도 사무실에 다섯 대밖에 없는 컴퓨터 중 하나를 내가 쓰고 있으니 팀장 버프라고 할 것이다.

-고객 퀄(Qualification, 품질보증 절차) 샘플이 더 필요하다고요, 김 대리님!

“이봐, 강 대리! 샘플을 20대씩이나 줬는데 그게 또 왜 필요해? 기껏 해 봐야 기판 사이즈 좀 줄인 게 전부잖아. 최종 사용자는 그 차이를 알 수도 없다고!”

키보드 타이핑 소리 너머로 김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화기 너머로 김 대리 못지않게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또 싸움이 붙었구나 싶다.

-아니, 제품 코드가 변경됐는데 퀄을 해야죠. NTT라는 대형 고객선이 요청하는데, 당연히 샘플 줘야죠.

“야이씨! 코드 변경될 때마다 가져간 샘플이 여태 몇 갠 줄 알아? NTT? 그 쪽발이들이 구매한 양이 얼마야? 1만 대? 2만 대? 꼴랑 그거 사 가는 주제에 샘플은 자그마치 200대 넘게 가져갔어! 원가로 따져도 4천만 원이 넘는다고! 내 2년 치 연봉보다 많아!”

-지금 그게 문제예요? 이번 샘플 못 넣으면 입고 안 시킨다잖아요! 그리고 쪽발이가 뭐예요? 일본 고객들도 그 말은 알아듣는다고요! 입 밖으로 내선 안 돼요! 아시겠어요?

“내 입으로 말도 내 맘대로 못 해? 영업이나 똑바로 해! 퀄한다고 가져간 샘플도 모두 뒷구멍으로 챙기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그래, 그건 접대비라 치자. 그놈들은 창고에 물건만 쌓아 두고 시장에 풀지도 않잖아! 그리고 샘플 입고시킨 지 이틀 만에 또 제출하라고? 개발 샘플 투입이 무슨 장난이야?”

-그럼 불량이 없게 하시든지요! 변경점 있을 때마다 불량품이 기어들어 오잖아요. 영업팀에서 얼마나 싹싹 빌고 있는지 알아요?

“야이씨! 자꾸 영업팀에서 네고(단가 할인) 치니까 그렇지! 단가 올려! 올리면 싸구려 부품 안 쓰잖아!”

-장사를 하면 남아야 할 거 아니에요! 출고가 500불 정책은 사장님께서 직접 세우셨다고요!

“그럼 일본향 특이 사양이라도 북미향과 일치시켜! 제품 코드가 대체 몇 개야!”

-아니, 고객 사양을 개발팀에서 왜 왈가왈부해요! 우리가 갑이에요? 갑이냐고요!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유 팀장님께 직접 보고할 거예요!

“맘대로 해, 새꺄!”

쾅!

수화기가 부서져라 내리찍어 버리는 김 대리다. 개발팀원 중에 제일 선임이라 그런지 고객 관련 이슈가 생기면 그를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량 양산이 시작되면 라인에서 짜불짜불 발생되는 불량 해결하랴, 부품 원가절감하랴, 차기 제품 실험하랴, 고객 샘플 및 품질 보증 대응하랴. 개발자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그 와중에 가장 어려운 점은 제품에 변경점이 발생될 경우 이미 한차례 완료했던 고객 샘플 및 품질 보증 프로세스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일본 고객을 만나면 짜증을 넘어서 지옥문을 열어 재낀 거나 다름없다. 가격은 싸게, 디자인은 멋지게, 품질은 완벽하게 등등 하나에서 열까지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으니까.

더욱이 일본향 제품은 특이 사양이 많기에 다른 데 팔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당연히 소모한 리소스 대비 매출은 형편없다. 일본이 수출업체의 무덤, 갈라파고스 군도라고 불리는 주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 수출을 지켜보고 있다. 심지어 대리들의 전화 싸움은 어찌 보면 내가 주도한 제품변경점 관리 규정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자그마한 변경점이라도 발생하면 개발자가 내부 품질 부서와 품질 검증을 거치고, 고객에겐 제품 변경점을 고지하는 규정을 정헌몽 사장을 등에 업고 사규에 박아 버렸거든.

차후 내 팀원들이 내가 목표로 삼는 글로벌 회사의 임직원이 되려면 지금부터 훈련받아야 한다.

회사 덩치가 커지면 자잘한 품질 문제는 실무 조직에서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일일이 나설 수도 없으며, 그런 상황까지 몰리면 내 회사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내 전화기로 불똥이 옮겨 붙었지만 바로 받지 않았다. 김 대리가 내 자리로 걸어와 멀뚱히 전화기를 바라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신제품 개발팀, 유 팀장입니다.”

-팀장님, 휴대폰 영업 담당 강주선 대리입니다. 다름이 아니고요….

“대충 알고 있으니까, 전화 끊어. 김 대리하고 애기하고 전화 줄 테니까.”

툭!

무슨 일이 있어도 팔은 안으로 굽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 *

“팀장님, 이래 가지고는 일 못 하겠습니다. 이거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에요. 원가절감과 제품 개발을 동시에 진행하는 업무 형태는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요?”

“네?”

“바꾸자면서요? 어떻게 바꾸냐고요?”

“일본향 제품도 북미 출하 제품처럼 바꿔야죠. 변경점 없이 현재 모델로 양산하고, 원가절감은 차기 제품에 반영해야 합니다.”

“북미 제품은 출고가가 500불입니다. 관세 붙으면 대충 570불 정도 되죠. 그걸 AT&T 애들은 799불에 팝니다. 수익률이 자그마치 39%죠. 우리 수익률은 어찌 될까요? 표준 원가 200불에 관세, 경비 다 붙이면 결국 400불쯤 되지 않나요? 출고가 500불이니 수익률은 25%쯤 되나요? 지극히 높은 숫자지만 배가 좀 아프죠. 안 그래요?”

나는 대뜸 대화의 수위를 높였다.

AT&T라는 거대 미국 회사가 듣보잡인 대현전자의 휴대폰을 사 주는 이유가 뭐겠나? 버리는 셈 치고 한번 실험해 봤더니 품질은 모토롤라와 견줄 만하고 순익도 엄청나니 욕심이 난 거다.

일제도 아니고 후진국 아시아 제품을 주력 제품으로 내세운다는 이미지 추락을 감안하고도 남는 돈이 워낙 크니까 하는 거다.

대현이 대당 100불만 남기며 북미에 물량을 풀고 있는 이유 또한 비슷하다. 휴대폰으로 번 돈을 통신칩을 포함한 반도체 사업에 몰빵하고 있어서다.

일본 애들 반도체 사업 경쟁력은 급락하고 있고, 모토롤라를 비롯한 고만고만한 휴대폰 사업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 통신칩의 고객이 될 수밖에 없다.

내 팀은 단순히 개발 업무를 하는 게 아니다. 내 덕분이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쟁터의 선봉에 있는 거다. 작은 승리에 도취해 계단에 잠시라도 머물면 단박에 무너져 내린다. 현재의 대현은 이미지는 물론, 기술적으로도 글로벌 넘버원이 아니다.

“북미 애들이랑 일본향 제품이 무슨 관계가….”

“에이, 왜 이래요. 김 대리는 휴대폰 샀어요?”

“네?”

“샀냐고요. 직원들에겐 10% 깎아 주잖아요.”

“제가 돈이 어딨습니까?”

“하하, 바로 그거에요. 국내 제품 출고가는 수출 대비 훨씬 싸죠! 40만 원, 거의 원가로 주는 겁니다. 그걸 SJ가 45만 원에 팔아요. 통화비 노리는 애들이라 휴대폰 팔아서 남는 돈은 거의 대리점에 주고 있다니까요. 봐 봐요, 둘 다 거의 안 남기고 휴대폰을 풀고 있는데도 생각보다 안 팔려요. 북미에선 미친 듯이 팔리는데, 국내에선 안 팔린다고요. 왜죠?”

“휴우. 원가절감…해야겠네요.”

김 대리의 답은 너무나도 뻔했다. 누가 생각해도 휴대폰은 너무 비싼 물건이니까.

1991년에 대리급 평균 월급이 약 150만 원이다. 그것도 최근 임금이 껑충 뛰어서 그 정도다. 아직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30만 원이 넘는 물건은 굉장한 고가품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정부 보조금이 풀리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현재까진 아니다.

“영업팀 애들한테 고맙게 생각해요. 우린 돈 받고 일본 놈들 붙여서 원가절감 제품에 대해 품질 실험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까칠한 일본 애들이 자잘한 불량까지 알려 주니까, 우리가 북미 시장에서 한탕하고 국내 시장도 끌어올릴 준비를 할 수 있는 거라고요.”

대현은 준비를 해야 한다. 신성이 불과 한 달 뒤면 휴대폰 가격을 15% 다운시키며 북미에 덤핑 공세를 시작할 테니까. 대현이 북미에 진입한 뒤 6개월 뒤라고 했으니 신성이라면 칼같이 시간을 지킬 거다.

15% 정도 가격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며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회사의 고객은 최종 소비자가 아니라 통신사다. 한 달에 100만 대 넘게 파는 통신사 입장에서는 100만 대당 1,000억 가까이 남겨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

AT&T라면 100~200억을 광고비로 지출하고 이런 저런 할인 이벤트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수고를 알아서 잘도 할 거다. 결국 판은 커지고, 대현에도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갑질이 시작되는 거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데 손을 놓으면 어떡하나? 당연히 그땐 기존 제품은 가격을 내리고 AT&T에 이런 것도 있다면서 신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기존 제품의 순익률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고가 제품 이미지는 신제품으로 끌고 나가야 하는 거다.

절대로 제품 가격이 하락하는 경향을 고객에게 보이면 안 된다. 그따위로 장사를 하기 시작하면 그 판은 치킨게임을 넘어서 레드 오션으로 변해 버린다. 제 손으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치킨게임은 서로를 죽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도 미친 듯이 뛰어야 하는 게임이다.

“아무리 그래도 업무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신제품 개발과 원가절감을 어떻게 같이 합니까?”

“그래서 인원을 어느 정도 보충했잖습니까.”

“보강 인력이라고 해 봐야 모두 신입사원입니다. 당장 도움이 안 됩니다.”

“도움이 되게 해야죠. 신입사원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각종 경험치를 책상 서랍에 두지 말고 문서화를 시켜요. 당신의 보고서를 그들이 읽게 하라고요.”

“하아…. 팀장님,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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