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찬스 카드 (14/104)

제2장 찬스 카드

“날로 먹다니…. 정 사장,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난 기회를 놓치기 싫을 뿐이야. 자네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사람, 기술, 자본이죠. 매출은 그 결과입니다.”

“음! 국문학과 출신답구만. 그럼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훗, 도전이지! 결국 사람이다. 도전은 경험을 낳는다이가!”

“역시…. 허면 유수한 군은 어떤가?”

“운이죠. 사업이 크든 작든 운발 좋으면 뭐, 끝이죠.”

“…….”

“자슥, 무당답네!”

엉뚱한 내 말에 다들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솔직히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선 사업에 운보다 중요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수많은 선택지에서 매번 올바른 결정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운이 따라야 하는 게 아니겠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거대 기업들, 소니, 야후, 노키아의 임직원들이 노력을 안 했겠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눈이 갑자기 까막눈이 되어 버렸겠나?

한정된 시간에 어느 길로 들어설지 선택하는 것은 솔직히 운에 가깝다.

“운이라…. 재미있는 말이군요. 저는 시간 관리라고 봅니다. 위기 대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고, 좁게 말하면 제때 투자하는 게 될 수도 있겠지요.”

“신성답네. 매번 간 보다가 휙 달려들겠다는 말 아이가. 여우맨쿠로.”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겠군요, 회장님.”

여우 같다는 정 회장의 말에 이 회장은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이 시대의 4대 재벌은 경영 문화가 극명하게 달랐다. 회장의 리더십이 제각기 달랐던 이유일 것이다. 회사원들이 모이면 4대 그룹의 문화를 술안주 삼아 사냥에 비유하기도 했다.

대현은 사냥감이 보이면 ‘너 사냥감? 나 사냥꾼!’ 하며 이것저것 재지 않고 냅다 도끼 들고 찍어 댄다. 준비랄 게 없으니 결국 피투성이가 되면서 고기를 얻는 형태다.

신성은 ‘사냥감의 약점은? 사냥감의 공격 패턴은? 합당한 무기는?’ 하면서 한발 늦게 도착하는 한이 있어도 효율적으로 사냥감에 치명타를 가하고, 그 대가로 제일 맛있는 부위를 가져간다.

그에 반해 LK그룹은 ‘어? 벌써 잡았어? 준비하느라 또 늦었네. 많이 다쳤지? 치료해 줄게. 대신 고기 좀 가져간다.’ 하며 과분할 정도의 준비물을 늘어놓고 뒤처리를 하는 대가로 고기를 얻어 간다.

마지막으로 서우그룹은 좀 특이해서 ‘사냥감은 여기만 있는 게 아니잖아. 저 산에 가서 혼자 먹을래.’ 하면서 너부러져 있는 무기와 치료제를 슬쩍해서 다른 산에서 사냥감을 노린다.

“통신칩인가 뭔가 이거 큰 건이긴 한가 보이. 그쟈?”

“그 또한 아니라곤 못 하겠습니다.”

“후하하! 조카가 이런 모습 보이는 건 첨이누!”

“CDMA 기술에 신성도 한 표를 보태겠습니다. 시장 확대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희건 회장은 적기 투자를 빌미로 정 영주 회장에게 협업을 제의하고 있었다. 명석한 양반이다. 휴대폰 사업이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것보다 훨씬 크게 성장할 것을 눈치채고 있다.

“한 표? 누구에게 무슨 표를 보탭니까? 벌써 대현이 판 깔아 놨는데 신성의 도움이 왜 필요합니까? 숟가락 얹을 생각 꿈도 꾸지 마십시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회장들이 협상한다 해도 내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 정 사장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내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 여태 가만히 있던 진제대 상무가 말을 받았다.

진제대 이 양반은 미국 유학파 중에서 국비 1세대라 불리는 수재 중의 수재다. 솔직히 나보다 몇 배는 더한 독종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인종 차별이 여전했던 1980년대의 미국에서 스탠퍼드 박사까지 했고, 아시아인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HP를 거쳐 IBM의 선임 연구원에 올랐다. 단순히 일본 애들보다 영어 실력이 나아서 그랬다고 폄하하기는 어렵다.

“유 팀장, 상황을 크게 보라고. 지금 일본과 미국이 반도체 전쟁을 하고 있어. 지금은 미국에 반도체라고 써 붙이고 빈 상자를 들이밀어도 팔리는 때야. 대현에선 물량이 달리지 않나? 수율 높은 메모리 쪽에서 물량 밀어내고, 수율 달리는 통신칩은 우리 회사에서 OEM하면 서로 윈윈하는 거야.”

“왜 남의 회사까지 걱정하고 그래? 그보다 수율 달리는 건 어찌 알았어? 끄나풀이라도 심은 건가? 상도의는 아예 시궁창에 처박은 거야?”

진제대 상무가 반말하면 나도 반말하면 된다. 그는 내 상사가 아니라 그냥 경쟁사 직원이다.

“끄나풀이 아니고…. 그 정도 정보는 공공연하잖나.”

“아, 됐고. OEM을 빙자해서 통신칩 공정을 베낄 셈이잖아.”

“이봐, 유 팀장.”

“진 상무, 선수끼리 왜 이러지? 현미경으로 통신칩을 수십 번은 까 봤을 텐데 디자인이 왜 궁금하겠어? 심지어 로열티만 내겠다면 당장 퀄컴이 달려가 줄 텐데! 실제로 궁금한 건 공정 기간을 어떻게 45일까지 줄일 수 있었느냐? 그거잖아! 끄나풀이 대체 누구야?”

내가 볼 때 뻔하다. 신성이라면 미국에 수출된 K폰 수십 개를 역수입하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게 없는 일이다. 그럼 칩 디자인을 알아낸 것이나 다름없다. 설계팀 수십 명이 달라붙어 칩을 한 층 한 층 벗겨 내고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면 회로도를 그려 낼 수 있으니까.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전자 현미경으로도 보기 어려울 만큼 회로 선폭이 줄어들지만 아직은 1990년이다.

문제는 디자인을 알아도 제때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적 공정을 잡을 때쯤 그 칩 장사는 끝나거든.

진제대 상무 정도면 처음엔 회로도를 살피려 했다가 막상 칩을 까 보고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메모리 대비 두 배는 복잡한 회로를 신성의 표준 공정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만들었다고 하니 단박에 회장을 찾아간 거다. 당장 대현과 OEM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이다.

OEM은 말마따나 디자인, 공정, 원부자재를 대현이 알려 준 그대로 작업해서 로고까지 대현이라 새기고 납품하는 거다. 신성의 엔지니어라면, 공정 레시피 넘어가면 공정 최적화 방식을 금방 깨닫고 메모리 반도체에 응용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으흠! 오해는 마시게. 끄나풀 따위는 필요도 없으니까. 자네의 천재성은 이미 업계에 파다하거든. 여기 진 상무도 반도체 분야에서만큼은 천재라 할 수 있지. 나는 두 천재를 엮어 보고 싶었어. 통신 시장 개막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큰 기회일세.”

“흐흠, 나두 궁금했던기라. 이 회장이 저리 말하기에 저누마를 데려온기라.”

“아버님!”

정 회장이 국화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이 회장의 말을 거들었다. 빈 잔으로 나를 척척 가리킨다.

“와 이러누. 니는 안 궁금하나?”

“아버님!”

정 사장이 얼굴을 붉혔지만 정 회장은 피식 웃어 버렸고, 맞은편 이 회장은 천천히 국화주를 음미할 뿐이었다.

그게 신호였는지 진제대 상무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 식탁 앞으로 내밀었다.

“공짜는 아닙니다. 4메가 디램(DRAM) 연구 백서입니다. 신성의 모든 노하우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아까운가 보다. 이때의 신성은 DRAM 기술에 한해서는 대현보다 2년은 앞서 있었다. 그 기술을 들이밀며 딜을 하는 것은 내 통신칩 기술이 미치도록 탐이 난다는 뜻이리라.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진 상무가 이 회장을 얼마나 설득했을까? 진 상무 이 양반, 도박을 할 줄 아는 인간이다.

“필요 없습니다.”

“무당아, 받아 주라.”

“회장님.”

“점 한번 치바라. 서로 주고받으무 우리나라가 일본 따라잡는 거 얼마나 당기지누?”

“왜 주고받아야 합니까. 일본 정도는 정 사장님만 계셔도 충분합니다.”

“얼마나 당기지누?”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회장님.”

“얼마나 당기지누? 말해 봐라.”

정 회장은 내 말에 아랑곳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의 질문이 반복될수록 내 눈엔 그의 덩치가 점점 커져 보였다. 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는 걸까? 피식 웃으며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눈에서는 안광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휴우…. 최소 5년 정도.”

“5년? 후후, 그거밖에 안 되나? 솔직해지바라!”

“길게는 10년쯤….”

나는 정말 대답하기 싫었다. 솔직히 반도체와 IT 산업은 정교한 계획을 바탕으로 하는 신성그룹에 잘 어울리긴 한다. 정말이지 내가 아는 미래에 신성 회장이 끼어든다면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대박이긴 하다.

하나 맘에 안 든다. 천재들의 시너지? 일본을 이겨? 애국?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내 밥상에 손대지 마십시오. 내 목표는 성공한 회사원 따위가 아닙니다. 어이없게 무너져 버린 대현전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 귀족으로 거듭나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고 싶을 뿐이란 말입니다.

내 마누라 유럽 여행 수십 번 보내 주고, 내 아들 외국 유학 보내고, 부모님에게 200평짜리 집을 사 줘도 ‘이야, 그 재산에 저 정도밖에 안 해? 참 검소한 집안이네!’ 하는 소리를 듣는 그런 귀족이 되고 싶다고요!

“으이고, 내 살아생전에 좋은 거 보고 가겠네. 흐흐.”

“아버님, 이건 아닙니다. 어찌 경쟁사와 기술 협업을 합니까?”

“뭐이 경쟁사고? 경쟁은 선진국하고 해야지, 우리끼리 왜 허누? 그리고 이게 다 국민들 잘 먹고 잘 사는 길이야. 거국적으로 생각해야지.”

“회장님 조언대로 신성에서도 통신사를 SJ로 밀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해. 무당 이놈도 SJ가 주인이라카드라.”

정 회장과 이 회장이 흐뭇해하면서 안도하는 표정을 나눴지만, 나는 정말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SJ를 밀어 통신 시장을 가속화시키고, 4메가 DRAM의 설계도를 얻어 대현이 개발 리소스를 좀 줄였다고 해도 이건 절대 남는 장사가 아니다. 신성의 인적 자원과 이 회장의 머리는 결코 만만찮다. 너무 강력한 경쟁자다.

내 그림은 대현이 선두로 나서서 큰 것만 먹고 나가면 신성이 쫓아오면서 나머지 자잘한 경쟁자들과 먹을거리를 두고 싸우는 식이 되어야 하는 거다. 신성이 대현과 같은 출발선에서 움직이면 아무리 내가 있어도 큰 그림이 망가질 수 있다.

“회장님, 거국적인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이런 딜은 안 됩니다.”

“흐흐, 거국적이라는 말이 맘에 안 들디가?”

“안 듭니다. 사업의 목표는 애국이 아닙니다. 보상의 대상도 임직원이며 아무리 크게 봐도 고객까지지, 국민 전체가 되려야 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물밑 계약은 자서전에도 못 씁니다. 임직원들이 피땀 흘려 만든 특급 기밀을 회장님이 친히 나서 빼돌리는 격입니다.”

“그려. 듣고 보니 그러네. 하긴 거국적이란 말을 이런 곳에 쓰면 안 되겄네. 흐흐.”

정 회장은 내 말에 이놈 봐라? 하는 표정을 했다. 나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이따위 원론적인 일에도 제 목소리를 못 낼 거라면 그냥 미국으로 가고 만다. 퀄컴 지분 4.99% 정도면 1991년에 나스닥 상장까지만 기다리면 종잣돈은 걱정 안 해도 된다. 투자 이민도 가겠다.

“아버님, 유 팀장 말대로 이래서는 안 됩니다.”

“느그들이 하도 그라니까 내 솔직히 말해 보꾸마. 내 본심은… 보고 싶은기라!”

“뭘 말씀이십니까?”

“난 저놈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다! 그로 인해 내가 세운 대현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단 말이다!”

정 회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정 사장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내는 태생이 농사꾼이지. 열심히 일하는 거이 잘허구, 남한테 무시당해두 잘 견디지. 내가 차관을 어찌 빌렸겠누? 양놈들이 무시할 때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손바닥 비비기는 좋았기 때문 아니가! 허허.”

“아버님….”

“가만있으라, 마! 글구 무당 니도 잘 들어 보이라. 내가 농사꾼이니, 내 아들내미도 그렇고 대현 전체가 농사꾼 기질이 돼 버렸어. 그라무 이 대현이 어디까지 가겄누?”

“…….”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인정하는 사내는 딱 세 명뿐이 없었어. 형님은 벌써 갔고! 저기 포항제철에 처박혀 있는 사내랑 여기 눈앞에 있는 이 양반만 남았다.”

정 회장은 이희건 회장에게 피식 웃어 줬다.

“그란데 니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졌지. 무당도 이런 무당이 없으스. 헌몽아, 이누마 앞세우고 큰 산 한번 넘으 바라. 잘 될기다. 뒤에서 쫓아오는 놈이 있거든 니가 다 막아 주라.”

“아버님, 그런 말씀을 이곳에서….”

“적은 보이야 되는기야. 승냥이는 다른 승냥이가 사냥감을 노리면 같이 나타난데이.”

“저희 신성에 여우라 하시더니 이젠 승냥이가 되었습니까?”

정 회장의 말에 이희건 회장도 끼어든다. 말투에 느긋한 표정이 녹아난다. 내심 승냥이라는 말이 그리 듣기 나쁘지 않은가 보다. 그래, 지금의 신성에 부족한 게 승냥이 같은 공격성이지.

“승냥이가 싫으모 범이라 해라. 그래도 마찬가지다. 내가 볼 때 이 휴대폰인가 뭔가 이거이 큰 산이다. 이 큰 산에서 살아남는 포수 한 명이 다 먹는기라. 가죽이고 고기고 싹 다! 지금은 판부터 키울 때 아이가!”

“후후. 회장님, 비유가 과하십니다.”

정 회장의 눈이 번쩍번쩍 빛나더니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광기마저 품은 느낌이 들었다. 이희건 회장이 농담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가당찮았다.

꼴꼴꼴. 꿀꺽!

“에휴! 내가 지고 말지. 나이 든 분이랑 싸워서 뭐하겠어.”

“이누마는 말을 꼭 이래 해. 귀여워 죽겠다카이!”

나는 국화주를 가득 채워 단숨에 삼키곤 썩 내키지 않지만 끝내 동의를 했다. 판을 키우라는 한마디에 그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참에 크게 먹어 보시겠다? 그래, 언젠가 판을 키우긴 해야지.

“여쭤봅니다. 첫 번째 승냥이는 누구로 생각하십니까?”

“휴대폰은 미국 놈들! 반도체는 일본 놈들이지! 죽이뿌라. 신성이랑 힘 합치믄 이참에 다 지워 버릴 수 있다!”

봐라. 대번에 원래의 의도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희건 회장은 애써 못 들은 척 술잔을 기울였다.

“덤핑은 어디까지 하실 건가요?”

나는 좀 더 직접적으로 물었다. 정 회장의 말은 대현과 신성이 담합해 덤핑 치자는 의미니까. 못해도 수백억, 많게는 수천억까지 손해를 감수하는 치킨게임이다. 앞에 앉아 있던 진제대 상무도 ‘어? 이게 그런 딜이었어?’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K폰으로 돈 좀 번다 아이가. 그거 다 집어넣어삐라. 신성 느그들도 합류할기제?”

“대현과 같은 물량, 가격은 대현보다 낮춰서 시장에 풀겠습니다.”

“얼마나 낮출라꼬?”

“대현의 시장가보다 통신칩은 5%, 휴대폰은 15% 가격 다운하겠습니다.”

“언제?”

“4메가 칩은 대현과 동시에, 통신칩은 대현보다 3개월 뒤, 휴대폰은 6개월 뒤에 시장에 풀겠습니다. 그 정도면 대현은 흑자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뒤 제품부턴 누가 먼저 1등으로 달아나느냐 하는 진짜 실력대결이겠지요.”

“이 말 잘 들었제? 우리 대신 손해 보면서 판 키워 준다 안 하누. 허허허! 좋다이!”

이희건 회장의 말에 정 회장은 대단히 만족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나 또한 연신 국화주를 들이켰는데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목이 타서 국화주를 마셔 댔으니까.

벌써부터 치킨게임을 해 보자는 회장들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직원으로 있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온갖 제품에서 벌어졌던 치킨게임은 극히 의도된 것이었다.

이 게임의 특징은 제품 가격이 한 달 단위로 드라마틱하게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일단 판이 커지면 1등은 시장에서 대규모 흑자를 보고, 2등은 재투자 가능한 정도의 흑자, 3등은 힘겹게 현상 유지, 4등부터는 대규모 적자가 누적되는 게임이다.

정 회장은 ‘대현이 줄곧 1등을 하면 되는 거잖냐!’ 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맞은편에 앉은 진제대 상무가 연구 백서를 내 앞으로 밀어낸다. 이제 내 것이니 챙기라고 말이다.

‘그따위 것은 필요도 없어!’

그 정도로 선물을 대신한다고? 정 회장님이야 치킨게임 단합 정도로 만족할지 모르나, 나는 아니다. 칼자루를 쥐었으면 휘둘러야지! 선물을 안 주면 내놓으라고 하면 그뿐이잖나. 그 대상이 신성 회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틱!

나는 연구 백서를 맞은편으로 튕겨 내며 피식 웃어 주었다. 그러면서 이희건 회장과 눈을 마주쳤다.

“명색이 신성 회장님이신데 이 정도로 끝내실 건 아니죠?”

“뭘 원하나, 유수한 팀장?”

    • *

나는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이런 근사한 자리에 개인적인 선물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개인적인 선물이라….”

“대현전자 직원이 회장님께 뇌물을 원할 정도로 엉망은 아닙니다.”

“으흠, 그렇군. 뇌물은 뇌물인데, 뇌물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군.”

이 회장은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정 회장과 정 사장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찼다.

“내가 가진 게 명함밖에 없군. 같이 식사하자고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테니 연락하시게. 회장님도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정 사장도 그리하고.”

푸르스름한 종이에 살짝 금테가 둘린 명함에는 이름, 신성회장이라는 직책, 그리고 전화번호만 달랑 적혀 있었다. 언제든 전화하면 받을 수 있는 핫라인이다. 부르면 언제든지 만나 주고,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뜻이다. 괜찮은 선물이다.

“후후, 나는 됐다. 니 한 장 더 가지라.”

정 회장이 내게 명함을 밀어 주었다. 정 회장도 이 명함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거다. 하긴, 정 회장이 이 명함을 가질 이유는 없다.

나로선 땡큐다. 대현에서 독립하는 일이 꼬이면 나중에 신성의 MP3 사업체를 달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원래 역사에서 신성에서 분리시켜 버리는 벤처 사업이 아니던가. 그 정도면 차선책이 될 수 있다.

“유 팀장, 내 것도 가지게. 대신 덤핑 물량 어찌할지 이 자리에서 보고하게.”

정 사장도 대뜸 명함을 내게 밀어 대며 차분하게 읊조렸다.

덤핑 단합은 시장 파이를 키우는 일이지만 너무 과하면 제 살 깎아 먹다 죽는다. 그렇다고 물량 공급이 달리면 시장 점유율조차 까먹어 버린다. 이 회장 앞에서 단합 물량에 대해 확답을 받고 싶은 거다.

그리고 정 회장 앞에서 내가 자신의 가신임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도 느껴진다. 명함을 받는 대가다.

“예, 사장님. 일전에 증량하라고 명하신 통신칩 3천만 개 물량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현재 칩셋 수율이 50%인 것을 감안하면 라인 한 개를 통째로 할당하는 일이다. 원래 역사에서 모토롤라가 3년 누적 기준으로 휴대폰 7,500만 대를 팔아 재끼니 3천만 대면 신성이 껴들어도 재고가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할인 정책의 일정과 가격도 회의를 한번 하지 않았던가. 그 숫자가….”

“예, 현 통신칩 시장가에서 20% 깎아서 20달러를 무너뜨리면 어떨까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휴대폰은 출고가 500불 이하로 원가절감 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도 않은 회의 결과를 줄줄 읊어 댔는데도 정 사장의 표정은 변함없다. 외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정 회장은 이미 덤핑을 논의했었다는 정 사장의 말에 살짝 놀라는 기색이다. 이 정도면 명함 하나 더 챙기는 값으로 충분하다.

“덤핑 물량은 3천만 개, 통신칩은 20달러, 휴대폰은 출고가 500불 기준입니다. 저희는 3개월 뒤부터 시작합니다. OEM 통신칩은 신성에서 직접 오픈마켓에 뿌리시죠. 그 물량 또한 3천만 개입니다.”

정헌몽 사장은 이희건 회장이 퍼센트로 얼버무린 숫자를 명확히 했으며, OEM 판매까지 맡겨 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현전자의 매출 실적이 늘어난 꼴이다.

이희건 회장은 진제대 상무의 표정을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개당 20달러라. 물량이며 가격도 적절하군. 대신 4메가는 물량에 제한이 없고 가격도 10달러는 지키도록 하지. 개발비가 꽤나 들었으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자 정헌몽 사장이 지체 없이 동의를 표했다.

“다들 약속 잘 지키래이. 내가 다 들었구마.”

“그래야지요.”

정 회장의 다짐에 이 회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명함 세 개를 안주머니에 챙겼고, 정 사장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발 너머 가야금 연주를 즐기며 술잔을 비워 갔다.

정 회장과 이 회장은 금세 표정을 달리하더니 요즘 골프가 예전처럼 잘 안 된다는 둥, 산행도 전과 달리 쉽지 않다는 둥, 그렇다면 사슴피 한 그릇 대접하겠다는 둥 별의별 잡담으로 시간을 채웠다.

회장들이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이유는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나는 마담에게 공책을 한 권 가져오라고 해서 국화주를 커피 삼아 통신칩셋의 공정 표준을 작성했다.

회사마다 장비가 다르니 공정 조건은 살짝 달라지겠지만 공정 순서, 소재, 두께와 선폭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노트 다섯 장을 빼꼭히 채워 줬더니 진제대 상무는 작게나마 신음성을 흘렸다. 내가 공정 순서만 300회가 넘는 표준을 앉은자리에서 작성할 줄은 몰랐나 보다.

“당신 정말 천재로군.”

“뭡니까? 날 무시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고….”

“이 4메가 연구 백서도 가져가요. 혼자 한 것도 아닐 텐데 이리 쓰면 안 되지.”

“왜….”

“필요 없어요. 우리 디자인은 신성과 밑바닥부터 다르니까.”

“…….”

말은 안 했지만 가져가면 외려 피곤하다. 신성의 디자인이 지금이야 쌈박하지만 나는 그보다 수십 년은 앞서 있는 기술자다. 변 상무가 백 상무를 밟고 내게 완전히 돌아서면 DRAM 디자인도 알려 주면 그뿐이다. 외려 이 백서는 대현의 임원들이 내 디자인에 반항할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

나는 수정과로 입을 헹구며 내 큰 그림을 조금 살펴보았다. IMF라는 핵 펀치에 아슬아슬하게 대현이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때부터 판 키운다고 돈을 써 버리면 대현의 체력이 너무 약해지는 것 아닌가 해서 말이다. 그리고 키운 판에서 살아남으면 너무 커 버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예 새로 회사를 세워? 아니야, 그건 필패다. 내 그림은 개인이 맨땅에 헤딩해서 완성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내 기억 속의 정 회장과 실제 정 회장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외려 정헌몽 사장이 나와 코드가 잘 맞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알고 있는 원래 역사의 시점을 조금씩 앞당길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래도 찬스 카드 세 장은 얻었군. 이걸로 일단 만족해야 하나?’

나는 이 회장의 명함이 든 안주머니를 쓰다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