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장 곳간의 쥐 (12/104)

제11장 곳간의 쥐

“팀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금형 여섯 벌? 이게 뭡니까? 스무 벌을 더 만들라고 했잖아요.”

“한 달 안에 스무 벌은 불가능합니다. 국내 사출금형 업체 실력으론 여섯 벌이 최선입니다.”

“그럼 신규 업체를 발굴하든지 기존 업체보고 사람 늘리라고 하세요! 스무 벌 채워요!”

“지금 있는 일제 금형만 해도 10만 대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과다 투자예요.”

금형 담당 김 대리의 의견은 일반론에 가깝다. 세계 시장을 통틀어도 1세대 휴대폰 시장은 정말 콩알만 했거든. 다 합쳐도 10만 대쯤 될까? 그것도 미국, 영국을 제외하면 수백 대 아래로 훅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2세대는 다르다니까!

심지어 정헌몽 사장이 출고가를 600불로 정했다. 미국 애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싼 가격이다.

“과다 투자? 김 대리, 내가 말했죠. 스무 벌도 모자란다고요. 사장님이 출고가를 600불로 정했습니다. 모토롤라 애들보다 25%는 싸요. 우린 미친 듯이 찍어 내고, 불량 줄일 생각만 하면 된단 말입니다.”

“아! 팀장님, 이거 잘못되면….”

“내가 옷 벗을 겁니다. 당신은 안 잘리니까! 걱정! 말고! 발주하세요! 어서!”

“그럼 일본 금형업체에 추가 발주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안 된다고 했죠! 한 벌 말아먹는 셈 치고 국내업체에 벌당 2억씩 줘 버려요. 그럼 사람 늘리고 금형수정도 즉각 할 거 아닙니까. 일단 스무 벌로 고쳐서 결재하니까, 그리 추진하세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금형비에 수십억을 쓰는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규모의 투자이며, 더욱이 국산 금형을 쓰는 것은 품질적인 측면에서 멍청한 짓이었다.

그러나 의지의 한국인이 아니던가. 국산 금형을 쓰면 한 벌당 1억씩 아낄 수 있다는 장점 하나만으로 결국 1990년대 중반부터는 국산 업체들이 일본 업체를 따라잡는다. 많은 기업들이 불량률에도 불구하고 가격 때문에 국산 금형을 선택해 줬거든. 지금 대현이 시작하면 그 시간은 분명히 앞당겨진다.

휴대폰은 디자인이 승부처! 피드백 빠르고 보안 유지가 용이한 국내 업체를 키워야 한다. 나중에 스마트 폰까지 생각한다면 국내 업체를 키우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팀장님….”

“일단 해 봐요! 차세대 개발팀의 핵심 인력이 그 정도도 못 합니까? 파트원 이끌고 외근 나가세요! 며칠 출근 안 해도 되니까 돌아올 때 인당 계약서 한 장씩 들고 와요. 빈손으로 오는 사람은 인사고과 D로 깔아 버릴 겁니다!”

“으흑….”

쫓겨나듯 자리로 돌아가는 김 대리 뒤로 송 대리가 결재판을 들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판을 비롯해 각종 부품 수급을 맡겼는데 김 대리와 달리 100만 대 물량을 발주해 놨다. 맘에 든다.

“결재….”

“이야, 잘했네요. 추가로 더 찍으라고 하세요. 일단 결재합니다.”

“더, 더요?”

“그래요. 신규 업체 발굴해서 더 찍어요. 국내 기판 업체여야 합니다. 일본 애들 배 불려 주기는 싫잖아요. 안 그래요?”

“얼마나….”

“있는 대로! 다 산다고 해요, 다! 몽땅 다!”

국내 기판 업체, 수동 부품 업체 모두 합쳐 봐야 100만 대 물량이 고작이다. 그것도 아마 생산량을 부풀려 견적을 낸 부품업체 사장이 있기에 가능한 수량일 것이다.

불량 골라내고 양품 조립하면 글쎄, 초도 물량 10만 대는 어찌어찌 쳐 낼 수 있을 거고…. 100만 대 생산은 정말이지 험난할 거다.

“엑? 팀장님, 그 재고 다 어쩌시려고요.”

“재고 걱정을 개발자가 왜 합니까? 물건 못 팔면 영업 놈들 탓이죠!”

개발자들의 약점. 샘플 몇 대 만들어 보고 양산 제품 품질이 동일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수십 대일 때 품질이 다르고, 수백 대, 수천 대, 수십만 대로 증가할수록 품질 제어는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그때 원부자재가 달리면 대처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재고를 쌓아 두는 한이 있어도 초도품 원자재는 창고에 잔뜩 쌓아 둬야 한다.

“그리고 조립은 외주로도 보낼 거니까! 업체 섭외하세요.”

“외, 외주요? 몇 군데나요?”

“최소 세 군데! 환경 안전 규정 패스했고, 전자 제품 조립해 본 이력이 있는 회사부터 알아봐요.”

“팀장님, 지금 한창 사내 라인 퀄하고 있는데….”

“개발자는 언제나 백업을 준비해야 하는 겁니다. 송 대리도 외근 나가세요! 빈손으로 오면 인사고과 D입니다!”

“헤헥!”

요즘 내가 하는 짓이 모두 이렇다. 사내에선 사장님 지시라는 말 한마디로 온갖 팀장들을 협박해 반도체 웨이퍼(Wafer)를 라인에 꽉꽉 밀어 넣고, 외부로는 팀원들을 돌려 온갖 하청 업체를 끌어당겼다.

사내에서 사고를 치든, 업체에서 사고를 치든 임기응변이 가능토록 조치하는 거다.

당연히 일반인들에겐 과도해 보이겠지. 나에게 적대적인 이들은 미쳤다고 혀를 내둘렀고, 호의적인 사람들은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아무 상관 없다.

대현은 이 기회에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야 한다!

    • *

따르르릉.

“차세대 개발, 유수한입니다.”

-언제 올 거누, 언제! 이놈아! 그룹에 그 일만 있는 줄 알누? 어이?

으흑! 오늘은 왜 전화를 안 하시나 했다. 정 회장님께서 또 전화기를 씹어 드실 듯 호통을 치신다.

정 회장이 날 본사로 소환하고 있지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정 회장과 얘기하다 보면 또 다른 프로젝트가 생길 것이 뻔하니 가서는 안 된다. K1 폰 10만 대 출하는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아이고! 회장님, 제가 정말 바빠서요. 점괘는 다음 주에 봐 드릴게요.”

-어디 점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짔누! 당장 안 올라오누! 니 내 끼라캤제!

“사장님이 대신 가셨고요. 저는 바빠서…. 어, 케이! 잠깐, 잠깐! 바로 갈게! 기다려!”

-마! 내 말 아직이데이. 이느무 시끼 어디 전화 끊을라카누!

통화는 늘 이런 식으로 마무리된다. 정헌몽 사장이 본사로 올라가 현황 보고를 했고, 정 회장은 보고까지 들은 마당에 나를 보러 이천 공장에 내려오기엔 자세가 안 나오니 유선으로 호통치는 정도로 끝난다.

툭!

“호호. 또 회장님이에요? 올라가서 뵙지 그래요?”

전화를 끊자마자 내 앞에 서 있던 케이가 피식 웃는다. 전화를 끊는 데 이용하기 편하다. 여성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니까.

“너무 바빠서 안 돼. 일단 10만 대 출하부터 하고 뵈어야지.”

“호! 밀당 하는 거예요?”

“밀당? 역시 대한미국인이네. 시답잖은 소리 말고, 무슨 일이야?”

“오늘 P.O.(Purchase Order, 구매요청)가 떨어졌어요. 축하해요.”

“이야. 드디어 AT&T가 확실하게 발 담갔네. 고생했어. 정말 고마워.”

케이가 내민 서류는 AT&T가 서명한 구매 요청서였다. 영업팀에 가기 전에 케이 손을 거치다니 역시 로비스트답다. 구두로 구매 요청받은 것과 서류로 받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제가 한 일은 별거 없어요. 어윈 사장이 AT&T 사외 이사에게 지분 좀 나눠 주고, 로열티 중 일부를 배분하겠다고 이면 계약을 했거든요. 저는 곁에서 법률적 자문만 했을 뿐이에요.”

케이는 손가락으로 지폐를 비비는 흉내를 내며 어윈이 로비 좀 펼쳤다는 말을 대신했다. 역시 로비스트의 천국인 미국답다. 어윈 이 양반, 돈을 좀 쥐여 줬더니 대뜸 로비부터 펼쳤네.

하긴 대박치면 로열티도 장난 아니고, 나스닥 상장까지 노려 볼 테니 꿈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일이고 말이다. 내 덕분에 그 시점이 조금 앞당겨졌다고나 할까.

“그래도 ‘양산 품질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이라는 나라 들어 봤냐?’ 이런 공격을 받았을 거 아냐.”

“샘플 받아 보곤 그런 말이 쑥 들어갔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뇌물 좀 먹였다고 10만 대나 발주하겠어요?”

“여하튼 수고했어.”

나는 케이에게 엄지 척을 해 주었다. 말은 저리 하지만 어윈이 케이의 도움 없이 그렇게 과감한 로비를 하지는 못했을 거다. 케이가 나와 어윈 사이의 간격을 잘 메워 주고 있다. 대현의 영업팀은 솔직히 케이 덕분에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하고 있는 거다.

“에고, 잘됐네. 여하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케이, 불량이나 고르러 가자.”

“저 같은 엘리트를 그런 데 쓰시다니요?”

“차기 무역회사 대표께서 그러시면 안 되지. 공급업체 실상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Give & Take. 케이는 이번에 이면 계약으로 퀄컴 산하에서 제품 딜러를 하겠다며 회사를 세운다고 했다. B2B 사업에서 중간 상인으로 콩고물 좀 얻어먹겠다는 의미겠지만, 나도 이용해 볼 만하겠다 싶어 용인해 주었다. 나 또한 퀄컴의 주요 정책 결정권자니까.

“후후, 알았어요. 헌데 이러다가 모두 잠 못 자서 죽는 거 아니에요?”

“회장님이 그랬어. 잠 다 자면서 선진국 언제 따라잡느냐고. 아! 선진국민은 잘 모르는 말이지.”

“대한미국인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농담 그만하고, 가지.”

“오키.”

케이는 명목상 퀄컴의 법률 고문으로 와 있지만 내 일만큼은 무조건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불량을 고르는 것도 잘한다. 버튼 눌러 보고 송수신 체크하고 음질도 확인하는 등등. 불량이 발견되면 케이스를 뜯어 현미경으로 보고, 부품 교체며 납땜 Re-work까지 곧잘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때 휴대폰 조립에 있어 자동화는 전혀 셋업되어 있지 않다. 수백 명의 여직원들이 조립해서 휴대폰을 출하 검사대에 올려놓으면 수십 명의 엔지니어들이 손수 이 짓거리를 하는 거다. 그중에 한 명이 나다.

나라고 모든 일을 알 수는 없다. 특히 사업 초기 제품 불량은 내 프로젝트에 가장 큰 리스크. 자잘한 불량이면 몰라도 치명 불량은 내가 직접 알아야 한다. 치명 불량이 발생될 시 즉각 내게 보고가 올라올 것이라 믿는다면 큰 오산이다.

본질적으로 엔지니어들은 불량을 자기 손에서 해결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골든타임을 놓치고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진다.

나는 이번 생에 내 미래를 남의 손에 두지 않는다. 불량 선별을 손수 하는 이유다.

힘들긴 하다. 말이 휴대폰 10만 대지, 이 단순한 작업을 보름 안에 해내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검사는 휴대폰을 이해하는 개발자나 품질 엔지니어나 할 수 있지 단순 작업자들이 못한다. 그리 생각하면 이런 일을 곧잘 하는 케이는 정말 능력 있는 엘리트가 맞다.

여하튼 이 정도론 물량을 감당 못한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모토롤라는 이보다 못한 휴대폰으로 1991년에1만 2천만 대를 팔고 그 뒤로 3년간 누적해 7천 5백만 대를 팔아재낀다고. 물론 그러고도 몇 년 뒤 망해 버렸지만.

그러니 대현은 이번 기회에 더 찍어야 한다! 더! 더!

    • *

그 시각 서울 강남 모처.

“어우, 저 인간은 회장이라는 사람이 꼭 수육을 1인분만 시켜.”

“정말 민폐예요. 그러고도 꼭 제일 큰 룸을 비워 달라잖아요.”

“그뿐이니? 점심시간 다 지나서 꼭 점심 특가로 달라잖아.”

문밖에서 주인과 서빙 아주머니가 쑥덕거리고 있었지만 방 안에서는 듣지 못했다. 벽이 두꺼운 지하 1층 식당인 데다 방방마다 달려 있는 미닫이문도 신경 쓴 곳이기 때문이다.

탁!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 허. 그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회장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곰탕 한 그릇씩에 수육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다. 대현전자의 백 상무와 이박명 대현건설 회장이었다.

둘 다 표정이 썩어 있었지만, 최근 회장직을 내놓으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에 시달리는 이박명의 표정이 훨씬 더 심하게 썩어 있었다.

“빌어먹을. 공동 개발은 확실히 날아간 건가?”

“예. 변 상무가 아예 개발 장비도 딴 업체로 바꿔 버렸습니다.”

“참 나. 일본 고객들이 참담했겠네. 받은 거 토해 내라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구만.”

“돌려줘야….”

“으이그, 내 밑에 있을 땐 일을 잘만 하더니 대현전자에선 왜 그 모양이야?”

이박명은 아예 백 상무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말을 이어 갔다. 외려 일그러지는 백 상무 표정에 비릿한 웃음까지 얹어 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하튼 대규모 선행투자로 유동자금을 말리는 작전은 현재로선 어려워 보입니다.”

“자랑이다! 그래, 대현전자가 미국에서 대형 수주를 받는다는 소문이 사실이야?”

“음… 대형 수주까진 아니고 휴대폰 10만 대를 계약했다고 합니다. 대충 매출 700억쯤 됩니다.”

“커허! 초도 매출이 700억부터 시작해? 대형 수주 맞네. 아주 일을 끝까지 말아 드시는구만. 대현전자가 기업 공개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겠어! 뭔 말인지 알아들어?”

“예…. 최소한 올해 상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장외 지분도 안 풀리고. 이 모든 게 그 빌어먹을 어린놈의 새끼 때문에.”

“자네 탓은 조금도 없어?”

“그 새끼 때문에 제 수족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더 이상 대현전자에선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보내 주시면 결초보은하겠습니다.”

“어이구, 정치를 어찌했기에 헌몽이가 당신을 버려? 하다못해 떨거지 변 상무가 당신 자리 꿰찼다며!”

“그 모든 게 정 사장이 무당 새끼에게 훌러덩 넘어갔기 때문에!”

“말끝마다 그 새끼, 그 새끼 탓을 해? 머리를 써! 내 머리 말고 당신 머리를 쓰란 말이야! 머리가 달리면 손발이라도 빨랐어야지! 4년 전에 잘만 했으면 국회의원 배지 벌써 달았어!”

“이번엔 돈도 충분했고…. 회장님 공천은 따 놓은 당상 아닙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대현건설 임원 자리도 괜찮습니다. 돈줄은 계속 필요하실 것 아닙니까.”

백 상무는 알고 있었다. 이박명도 대현건설 회장 자리가 위태롭다는 걸 말이다. 회장직을 내놓기 전에 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읍소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넌지시 정치자금을 대겠다는 의사 표시까지 하면서 말이다.

“아냐. 더 이상 그룹 내에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해. 영감탱이가 알아 버린 것 같다고.”

“예에?”

“돈줄이 마르고 있어. 멍청한 늙은이. 경제를 몰라! 물밑에도 돈이 흘러야 경제가 돌아가지. 국회의원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여자도 좀 붙여 주고, 내기 골프도 같이 치고 해야 되는 거라고. 그걸 어떻게 내 돈으로 해? 회사일인데 회삿돈으로 해야지. 빌어먹을.”

이박명은 혼잣말처럼 주절대더니 남은 수육 두 점을 한꺼번에 입에 넣고 꾹꾹 씹어 삼킨다.

“그럼 제가 어찌…. 자리는….”

“머리를 쓰라고 했지? 다른 식이 되어야 해. 대현물산을 노리는 작전 같은 거.”

“예에? 대현물산… 아! 순환출자!”

“눈치는 빠르네. 혹시 들어 봤어? ‘바이 코리아’라고 말이야.”

“바이 코리아요?”

“그래. 한국을 사자는 말이지. 외국 애들한테 정보를 슬쩍 흘리면 우리에게 기회가 생길 수도 있어. 떡고물이 큼지막하게 떨어질 거야.”

“…?”

“그 무당 새끼가 판 벌인 게 있는데 그걸 역이용하면 돼. 양놈들이 침을 질질 흘릴 게 뻔해.”

“그놈이 판을 벌여… 대현물산… 대현건설 출자 회사… 아! 한소 경협에 뭔가 있군요.”

“크크크. 몰라도 돼.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예! 당연합니다, 회장님.”

백 상무는 바이 코리아라는 말에 굿바이 코리아가 연상되었으며, 한국을 사자는 말이 한국을 팔자는 말처럼 들렸다. ‘커다란 떡고물이라니. 설마 대현그룹을 통째로 사냥하겠다는 말인가? 대기업을 어찌 사냥해?’ 하며 연신 머리를 굴릴 뿐이었다.

    • *

같은 시각 대현그룹 본사 회장실.

툭. 삐이익.

“이누마! 또 전화 먼저 끊었어. 내 이누마 다리몽둥이를 콱 마!”

정영주 회장은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책상 앞에 서 있던 그룹 재무팀장 최 상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명목상 비서실이 있지만 최 상무는 정영주 회장에게 비서실장을 능가하는 인물이다. 무협지 표현을 빌리면 주인을 모시는 모사나 다름없다. 군량 보급도 하고, 장수 영입도 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참으십시오. 유 팀장 대신 정헌몽 사장이 보고하러 온다잖습니까.”

“최 상무! 당신이 그라니까 이누마가 안 올라온다 아이누!”

“회장님, 유 팀장은 아직 떡잎입니다. 지금 너무 껴안으시면 도련님마저 유 팀장을 경계하고, 사방에서 공격받아 말라 죽습니다. 진정 아끼신다면 여물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 보호해 줄라꼬 안 그라누! 안 되겠다. 내가 이천에 가 볼끼라. 앞으로 우예 될란가 물어보면 되지, 뭐.”

정 회장은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의 앞을 최 상무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막아섰다.

“아, 왜 그러십니까? 제가 회장님을 모신 지 20년쨉니다. 회장님도 결국 후회하셨지 않습니까. 이런 방식으로 유 팀장을 챙기시면 제2의 이박명을 만드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놈 얘기는 왜 꺼내누! 그놈 사조직까지 깡그리 정리하라 안 했누! 그것도 무당 녀석이 조언한기라.”

정 회장은 얼굴을 잔뜩 붉혔다. 이왕 마음을 정한 김에 조사를 해 보니 대현건설 회장직을 이용해 검은돈을 가지고 논 정황이 드러난 거다.

한 꺼풀 더 벗기면 확실해지겠지만, 그랬다간 회사에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니 조용히 정리 모드에 들어갔다. 비리를 드러내더라도 회사 밖으로 내보낸 뒤에 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이박명의 현재 직책은 대현건설의 회장이다.

“너무 일찍 품으시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밑바닥에서 오롯이 커 와야 자기 사람도 만들고, 뜻도 바르게 세웁니다. 속이 시꺼먼 놈들이 맘먹고 유 팀장을 물들이면 어쩌시려고요.”

“그 누마는 달라. 남한데 휘둘릴 놈이 아니란 말이루. 내 그누마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후련한기 불안감이 사라진단 말이누.”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조만간 수출 건 마무리되면 그때 내려가셔서 하고 싶은 말씀 하시면 됩니다. 유 팀장도 그때쯤이면 격을 갖춥니다. 맘껏 승진시키셔도 되고요.”

“으이그….”

“회장님.”

“그래, 니 말이 옳긴 옳지. 기다려 줘야지. 헌데 뭔가 꺼림칙해. 꼭 뭐를 놓친 기분이 든다 아이누.”

“신성과 함께 큰일을 계획하셨으니 그러시겠지요. 도련님이 좀 있으면 오실 텐데, 먼저 의논하시면 되잖습니까.”

“헌몽이하고 얘기하라고? 아니다. 무당 놈 얘기 들을 게 아니면 그냥 둘 다 모르는 게 낫다.”

정 회장은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그는 유독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늘그막에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게 될 줄은 몰랐다.

『재벌을 넘어서 귀족으로』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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