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K폰 만세
1990년 6월 1일.
통신칩을 라인에 투입한 지 대략 60일쯤 지났다. 웨이퍼 250장을 10개의 랏(Lot)으로 나눠 투입했다곤 하지만, 마지막 랏의 수율은 25%나 나왔다. 목표치인 45일은 만족하지 못했지만 개발팀원 전원이 실시간으로 불량과 싸운 결과다.
사실, 선두로 달리던 3개 랏을 말아먹었을 때는 솔직히 나도 불안했었다.
“유 팀장, 전화가 오긴 오는 건가?”
“가만있어요. 유 팀장님도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
탁자 위에는 대현의 칩셋이 장착된 초도 K폰 3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성심성의껏 물량을 흘려 준 나운영 라인 그룹장, 우리 팀 못지않게 고생한 패키지 개발팀의 오성재 부장도 같이 자리했다.
퀄컴의 기술이 들어가긴 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대현의 기술로 만들어 낸 CDMA 단말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실험을 위해 연구소 꼭대기에 소형 기지국을 만들었는데, 단순 계산으로는 반경 5km까지는 커버 가능할 것이다.
세 명을 밖으로 내보낸 지 한참인데 전화가 안 오니 불안불안하다. 잘돼야 하는데. 나 또한 100% 확신이 없었기에 나운영, 오성재 부장을 제외한 타 부서 사람은 부르지 않았다.
부르르르르.
“오옷! 울렸어! 울렸어!”
K폰이 탁자 위에서 펄쩍펄쩍 뛰자 팀원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일단 기분은 좋다. 통화 품질은 몰라도 송수신은 된다는 말이잖나. 진동 기능도 매우 정상적이다.
철컥!
얄팍한 폴더를 열어젖히니 키패드의 백라이트가 반짝거린다. 통화가 연결되었다는 표시다. 액정 화면에는 감응 정도를 나타내는 안테나가 최대치를 표시하고 있다.
기분이 더욱 좋아진다. 목소리! 목소리를 들려줘!
“여보세요? 누구죠?”
-우아아아아아! 팀장님, 저 김 대리예요. 성공이에요, 성공!
“우아아아아아!”
휴대폰 너머로 김 대리의 목소리가 들리자 회의실이 떠나갈 듯 팀원들의 환호성이 채워진다.
아니야, 성공은 아직 일러. 거리를 확인해야 해.
“알았어요, 알았어. 지금 어디에 있어요?”
-회사 앞 소고기집요. 반경 2km는 족히 됩니다!
“우와아아아아!”
김 대리답게 멀리 가지 않았다. 나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까지만 나아가서 전화를 했다.
팀원들이 환호성을 울렸지만 나는 조금 실망했다. 현재도 시장에 근거리 무전기는 차고 넘친다. 실패는 아니지만 성공이라 하기엔 이르다.
부르르르.
내가 실망할 사이도 없이 다른 휴대폰이 또 울린다.
“누구죠?”
-오오오오, 저 송 대리요. 팀장님 이거 대박이에요! 선명하게 들려요!
“어딥니까 어디?”
-5km 밖에 있는 사원 아파트 옥상요. 우와아아아! 대박!
“5km!”
“이야! 됐네. 성공한 거 맞지, 유 팀장!”
“성공이에요? 그럼 저 야근 멈춰도 되죠? 우아아아!”
사원급 팀원들이 탁자 끝에 매달려 소리친다. 휴대폰이 잘 터지는 아파트 옥상인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대박이다.
우린 무전기 따위를 개발한 게 아니야. 명실상부한 휴대폰을 개발한 거다. 단 6개월 만에, 그것도 신생팀이 이룬 성과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부르르르.
마지막 K폰 시험은 케이에게 맡겼다. 그녀에겐 최대한 멀리 가 보라고 했다.
내 휴대폰을 미국시장에 들고 가서 초기 고객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맡겼더니, 실험을 직접 해 봐야겠다고 나섰다. 그녀의 휴대폰이다.
“케이?”
-예, 미스터 유. 이거 정말 잘 만들었는데요? 미국에서도 통하겠어요. 이어폰으로 통화를 하다니…. 핸즈프리라고 광고하죠.
“우아아아!”
팀원들의 환호성에 명확하진 않았지만 케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언제나 침착하고 시니컬한 그녀인데 목소리가 떨려?
“어디야, 케이?”
-말씀드렸잖아요. 핸즈프리로 통화하고 있다고. 운전 중이에요.
“운전? 대체 어딘데?”
-좀 전에 호법분기점 지났어요. 회사에서 10km는 족히 될 거예요.
“호법?”
-제대로 된 기지국부터 세우라고 조언한 점 사과 말씀드릴게요. 미스터 유가 옳았어요.
후후, 케이가 내게 사과를 해? 미국 물 먹은 여자가 감탄할 정도면 대박 확정이다.
“와아아아아아! 10km! 10km래요, 팀장님!”
“유 팀장님, 세계 최초 CDMA 휴대폰 개발! 축하드립니다.”
“오올. 오 부장, 이게 세계 최초였어? 그럼 나도 이제 부장 다는 거야? 알지? 나 유 팀장 줄이다! 확실하게 해! 으아아아아!”
똘똘한 오 부장이 제일 먼저 축하해 준다. 나 그룹장도 찰싹 달라붙는다.
이럴 땐 선언을 해 줘야 한다. 아무리 관련 부서가 힘을 보탰어도 성공은 우리 팀원들의 노력 덕분이다.
쾅!
나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치며 크게 소리쳤다.
“차세대 개발팀 전원! 오늘 업무 모두 재껴요! 팀장 직권으로 오늘부터 전원 사흘간 포상 휴가입니다! 내일 새벽까지 팀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내가 냅니다! 들려요, 김 대리? 소고기부터 구워 놔요!”
“팀장님 멋쟁이!”
“뭐해요, 다들 달려가요!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당신들입니다!”
“우아아아아!”
벌컥!
우당탕탕!
다다다다다.
“성공! 성공!”
“성공! 성공이야!”
“이제 맘껏 잘 수 있어! 야근 끝났어!”
“와아아아아아아!”
“내가 뭐랬어! 된다고 했지! 우리 팀장 무당이라고!!!”
“만세!”
수십 명의 팀원들이 모두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 연구소 통로를 마구 빠져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내게 갈굼당하며 야근을 넘어서 밤샘을 밥 먹듯 했던 이들이니 해방감이 장난 아니겠지.
솔직히 나도 기뻐 죽겠다. 칩셋의 수율이 25%나 나왔을 때 여차해서 휴대폰이 실패하면 칩이라도 팔아먹어야지 싶었는데, 결과적으론 최고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뭐, 뭐야? 쟤들 왜 저래?”
“뭐가 성공이라는 거야?”
“K폰인가 뭔가 만든다고 그러더만.”
“그 무전기? 유선 전화기도 못 만드는 놈들이 무슨.”
연구소의 타 부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구는 내 팀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무슨 상관인가?
아무리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실험했고, 신호 간섭이 별로 없는 1990년대라곤 하지만 소형 기지국 출력으로 10km나 떨어진 곳에서 통화가 가능한 휴대폰이다. 제대로 된 기지국을 만들면 반경 15km는 족히 커버할 거다. 1990년대 말에 가서야 휴대폰 통화 반경이 15km로 넓어지는 걸 감안하면 솔직히 내 예상을 뛰어넘는 품질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책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회사 밖으로 달려 나가는 팀원들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K폰 초도품 30대를 담아둔 007가방 하나를 들고 사장실로 직행했다. 프런트의 비서가 당황했지만 피식 웃으며 직접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면담 예약도 하지 않고 사장실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예외적인 일이다.
“사장님, 차세대 개발 유 팀장입니다.”
“오! 유 팀장, 무슨 일인가요?”
“오늘 제가 대박친 것 같습니다. 긴급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대박?”
“K폰이 완성됐습니다. 제 예상을 넘는 월등한 품질입니다.”
“K폰이 벌써? 유 팀장 예상을 넘어요?”
“여기 있습니다.”
나는 K폰 하나를 정헌몽 사장에게 건네고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전화를 걸었다. 시제품이라 전화번호 대신 개발용 코드를 입력하는 것이지만 무슨 상관인가.
휴대폰이 부르르 떨어 대자 자연스럽게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대는 정헌몽 사장이다. 매우 직관적인 디자인이라 그리 행동하는 데 어색함이 전혀 없다.
“들리십니까?”
“어헛?”
“음질이 선명하지 않습니까? 대박입니다.”
“으흠?”
“양주나 몇 병 주세요.”
“양주?”
“임원들이 먹는 좋은 걸로 주시면 감사죠.”
“근무 중에 술은 안 되지 않나요?”
“오늘 업무 접었습니다. 팀원들도 모두.”
“하하!”
나는 폴더를 닫고 정헌몽 사장에게 걸어갔다. 그는 피식 웃으며 서재 아래 칸을 뒤지더니 양주를 세 병이나 꺼내 주었다. 해외 출장이 잦은지라 이런 양주는 수두룩하다.
“로열 살루트, 밸런타인, 까뮤. 하하, 좋네요.”
“술 좀 아나요?”
“마실 줄만 알죠. 가격은 알고 싶지 않네요. 코냑이든 위스키든 목구멍에 퍼부어 버릴 거라.”
“정말 이거 대박인가요?”
“대박이죠. 몇십 년 묵은 양준데.”
“술 말고 폰.”
“에이, 대박은 무슨! 초대박이죠. 이참에 언론 플레이 좀 하시죠. 물론 사장님께서 직접 말입니다. 기자 회견도 좀 하시고. 술값은 여기 시제품과 발표 자료로 퉁치죠.”
탁!
나는 그의 책상 위에 007가방을 올려놓았다. 기자들에게 나눠 줄 휴대폰과 함께 한 달 내내 낑낑거리며 만들어 두었던 발표 자료까지 있었다.
기술적 배경과 예상 질문은 물론 어떻게 기자회견 무대를 꾸며야 화려해 보일지 등 소소한 것까지 모두 담아 두었다.
“내가 직접? 으흠, 유 팀장도 같이 나가야죠.”
“같이 나가긴 너무 어립니다, 제가.”
“후후. 틀린 말은 아니군요.”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 내가 무대에 나가지 않아도 이 일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올해 연말까지 천만 대. 물량은 미국 시장에 80%, 국내에 20% 할당하면 어찌어찌 될 겁니다.”
“천만 대? 허허. 출고가는요?”
“사장님께서 결정하셔야죠. 표준 원가는 대충 30만 원 정도 됩니다.”
“유 팀장 생각은 어떻죠?”
“출고가로 700불은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모토롤라 애들이 800불에 휴대폰을 팔고 있으니, 딜러들도 마진을 10%쯤 남길 수 있습니다.”
“많이 비싸군요. 그 가격에 팔린다면야 정말 대박이겠어요. 수익률이 50%가 넘다니….”
표준 원가는 광고비, 재고 및 반품률을 고려하지 않은 금액이다. 재고 따윈 생기지 않을 테니 순수익율이 30% 밑으로 떨어지진 않을 거다. 초기 휴대폰 사업자들이 호황을 누렸던 이유다.
“국내에선 선착순 만 명에 한해 특별 할인가로 50만 원까지 가능하다고 하면 어떨까요?”
“선착순 할인 판매?”
“만 개쯤 뿌리면 그 담부턴 그냥 불티나게 팔릴 겁니다.”
“기지국도 없잖아요. 고객도 잡지 못했고.”
정헌몽 사장은 역시 능구렁이다. 점잖은 양반 행세를 하지만 휴대폰 사업에서 걸림돌이 될 만한 일을 벌써 조사해 두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인프라가 있으니 고객이야 금방 걸릴 테고, 국내는 저희가 나서서 서울과 경기도부터 커버하시죠. 기지국 설립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죠? 우리가 기지국을 세운다니?”
“가방 안에 다 있습니다. 저는 술 마시러 갑니다. 사흘 동안 찾지 마세요.”
“하하! 유 팀장은 괴짜군요, 괴짜.”
“무당보단 낫네요. 여하튼 이 양주 잘 마시겠습니다.”
“하하하! 가 봐요! 축하해요! 맘껏 즐겨요!”
그길로 바로 소고기집으로 퇴근했다. 양주병을 들고 회사 정문을 통과하니 보안요원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봤다. ‘이거 보안 위반 아니잖아. 우리 회사가 술 만드는 곳인가?’ 하며 피식 웃어 주니 무사 통과였다. 조만간 보안요원들도 내 얼굴을 알게 될 거다.
- *
와글와글.
회사 앞 고깃집에 도착하니 시끌벅적하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뭐하고 있었어요! 아직도 안 취했어요?”
“우아아아! 팀장님 오셨다!”
“뭡니까? 누가 삼겹살 구우랬어요? 소고기로 배 채워야죠! 여기 양주도 있는데!”
“아악! 봐, 팀장님이 구라친 거 아니라고 했잖아. 삼겹살 다 버려! 아니다, 송 대리 너 먹어!”
“아! 왜!”
식탁 위에 삼겹살이 순식간에 한쪽으로 밀리고 마블링이 멋진 소고기가 주르륵 깔린다. 고기를 나르는 식당 주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다들 잔 들어요. 건배해야죠.”
“뭐라고 해요?”
“뭐긴, 뭡니까. K폰 만세죠. K폰 만세!”
“K폰 만세! 만세! 만세!”
“오아아아아!”
팀원들과 함께 오후 3시부터 새벽 3시까지 장장 12시간을 술독에서 뒹굴었다.
내심 술 취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고 여겼는데, 취해 보니 나름 괜찮았다. 양주를 넘치도록 따라서 보리차 마시듯 마셔 댔다. 안주로 육즙 가득한 소고기를 기름장에 찍어 먹으니 정말이지 꿀맛이다.
퇴근 무렵에는 소식을 들은 온갖 부서장들이 양주를 한 병씩 들고 회식에 끼어들었다.
“팀장님, 포상 휴가 사흘 정말이에요?”
“출근하고 싶으면 해요. 나는 출근 안 할 거니까.”
“우아아아아! 멋쟁이!”
1990년대답게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식당에서 노래도 부르고, 케이한테는 미국식 뽀뽀 축하도 받고 난리도 아니었다.
뒤늦게 참석한 기획팀 부장은 변 상무의 명을 받고 왔다며 회식비마저 계산해 줬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소고기는 A++로 배터지게 먹었고, 2차 맥줏집을 거쳐 3차, 4차…. 여하튼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4차쯤에는 어느 일식집에서 눈앞에서 참치 대가리를 해체하며 술을 마셔 댔다.
그 뒤로는 입에 뭘 넣었는지 어디에 있는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고, 결국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택시에 올랐고 푹신한 침대에 휙 던져진 기억이 끝이다.
- *
“으으윽, 머리야. 역시 술은 섞어 마시면 안 돼.”
다음 날 깨고 보니 강남의 미란다 호텔이었다. 물병이 놓인 탁자 위에 호텔 로고가 선명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큼지막한 글씨로 써 놓은 쪽지도 보였다.
술 깨시면 회장님께 직접 보고하시라는 사장님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허후! 깨자마자 무슨 충성 시험이냐.”
나는 쪽지를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대현그룹 본사라면 여기서 버스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그뿐이다. 하지만 가면 안 된다. 정헌몽 사장은 날 시험하는 거다. 내가 정 사장의 도움을 받아 성공리에 프로젝트를 완수했다는 그림을 그려 줘야 하거든.
내가 직접 정 회장에게 K폰 개발을 완료했다고 보고해 봐. 그럼 내가 일을 독자적으로 처리했다는 그림이 되어 버리잖아. 그랬다간 내가 오르던 계단이 뚝 끊어진다.
정헌몽 사장은 나보고 아버지의 가신이 될 거냐, 아니면 자신의 가신이 될 거냐? 하고 묻는 거다. 당연히 나는 후자다.
흙수저가 나대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로열패밀리한테 잘못 보이면 그냥 한 방에 훅 가는 거다. 이쯤 해야 한다.
‘제가 주인공인 건 정헌몽 사장님만 알아주시면 충분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이 일의 핵심이다.
이대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푹 자야지 싶다. 내일 모레쯤 회사 출근하면 정 회장님께 보고는 되어 있을 거고, 내 밥상에 숟가락 얹어 대는 사람들 중 이 사람, 저 사람 고르기만 하면 된다.
내게 그동안 호의적이었던 사람이 누가 있었지? 그동안 중립적이던 사람들은? 회식 때 누가 참석했었지? 누가 태도를 바꿨지? 어젯밤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 재택근무에서 할 일은 충분하다.
- *
사흘 동안 나는 분당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간간이 TV로 뉴스만 시청했을 뿐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데 썼다. 일기장처럼 꾸며 서재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이 집은 이 비서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간단한 가재도구와 TV만 있을 뿐 그 흔한 유선 전화기도 없다. 잠금 장치도 이중이고, 도둑이 들어 봐야 가져갈 것도 없으니 보안은 문제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뚜. 뚜. 뚜. 뚜.
정각 9시를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뉴스가 시작되었다. 30년 전 딱딱한 표정의 TV 앵커를 보니 새삼 촌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안녕하십니까? KBC 9시 뉴스입니다. 오늘은 이례적으로 경제계 뉴스로 시작하겠습니다. 제계 1위 대현그룹에서 세계 최초로 2세대 이동 통신 단말기를 만들었습니다. 일부 부자들의 사치품으로만 여겨지던 휴대폰이 순수 국내기술로 눈앞에 성큼 다가왔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시지요.
오! 사흘째가 되니 드디어 K폰 기자 회견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또록또록한 앵커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오늘 오후에 있었던 기자 회견 장면으로 화면이 훅 넘어간다. 대현그룹 본사의 컨퍼런스 룸을 통째로 기자회견장으로 꾸며 놓았다.
단상에는 정헌몽 사장이 직접 K폰을 들고 기자들에게 기술 설명을 하고, 통화 품질을 확인시켜 주듯 일부 기자들과 통화를 해 보기도 했다. 내 조언대로 대현전자에 설치했던 시험용 기지국을 본사로 옮겨 시현한 것이다. ‘잘 들립니까?’, ‘오오, 선명하게 들립니다.’ 하는 정도의 통화였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깜짝 놀라는 기자의 표정이 우습다.
휴대폰을 이용한 통화는 간단하게는 기지국과 교환기, 유선 케이블과 전파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휴대폰은 전파를 통해 기지국과 연결되며, 기지국과 기지국은 광케이블을 통해 연결된다. 그 사이에 교환기가 개입하여 무선 통화에 따른 여러 가지 기능을 맡게 되며 기지국의 숫자가 늘어나면 기지국 제어기도 끼어든다. 물론 휴대폰은 교환기에 위치가 등록되니 고객은 전화번호만 알고 있으면 그뿐이다.
시현은 간단한 실험용 기지국과 중계기 앞에서 실행되었지만, 통신 업체들은 전혀 다른 눈으로 볼 것이다. CDMA 통신 기술이 매우 안정적이며, 통신 품질도 우수하다는 것을 실증한 것이나 다름없다. 기자회견을 통해 통신 업체들이 우려하고 있던 기술적 이슈들이 한 방에 날아가고 있다.
정헌몽 사장의 등 뒤에 펼쳐진 실크 스크린에는 대현그룹의 로고와 함께 K-Phone 로고가 번쩍번쩍하고 있다.
-대현전자가 내놓은 K폰의 핵심 기술이 뭡니까?
-국내 기술로 통신 품질을 확보했다는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단말기를 공급받을 통신 회사는 어디이며 계약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수출은 언제쯤 가시화되는 겁니까? 접촉 중인 곳이 있는지요?
커다란 컨퍼런스 룸이 있는 호텔의 한 층을 모두 빌려 기자회견을 했는데 수많은 대외 기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이었다.
이때는 국내 기술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 뉴스가 되던 때라 세계 최초로 CDMA 휴대폰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거의 백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단상에서 질문 세례를 받던 정헌몽 사장은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을 뭉뚱그려 답을 해 주고 있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모바일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급등세이기 때문에 기존의 통신 방식으로는 유선전화처럼 깨끗한 통화 품질을 얻기는 기술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따라서 당사는 CDMA라고 통칭하는 무선신호분할기술을 이용해 차세대 휴대폰을 개발하였으며, 이는 세계 최초라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퀄컴사와 협업하긴 했습니다만, K폰의 국산화율은 60% 이상으로 국내 기술의 비중이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이에 국내 공급과 수출 계약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는 더욱 활발하게 일어날 거라 확신합니다.
-SJ그룹이 2세대 이동통신사로 내정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접촉 중이신가요?
-현재 정부 입찰 진행 중이니 이 자리에서 특정 기업을 언급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신성과 LK는 아직 단말기를 만들어 내지 못했는데 거국적인 차원에서 국내 기업에는 기술 이전이 이루어질 수 있나요?
-(뭔 개소리야?) 일단 CDMA 기술 자체는 정부부처에 통신 표준으로 제시하였으니, 신성과 LK도 그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휴대폰 개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력이 대현 못지않은 회사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질문 세례를 편집해 KBC는 다이내믹하게 뉴스를 전달했고, 기사 말미에는 각종 석간신문에서 찍어 댄 뉴스의 헤드라인을 턱턱 띄워 내며 국산 K폰 출시를 알렸다.
「대현전자, 세계 최초 CDMA 폰 개발」
「대현전자, 순수 국내 기술로 2세대 세계 통신 시장을 뚫어 내다」
「대현전자, 미래를 활짝 열어젖히다」
「대현전자, 핸드폰 대중화 시대 여나」
모든 헤드라인이 대현전자로 시작했다.
뉴스는 국내 박사와 해외 전문가의 인터뷰까지 실어 대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개발인지 붕붕 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왜 이러나 싶을 정도다.
뭐, 뻔하다. 지금 한창 제6공화국의 최대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수서 사태로 정치권에선 난리가 나고 있었거든.
1989년에 택지 개발 지구로 사전 공시했으니, 당연히 주택공사에서 무주택자에게 분양할 아파트를 지을 것으로 여겼는데 웬걸, 뚜껑을 까기 시작하니 조합에 특별 공급하겠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그린벨트에 묶여 있던 땅까지 풀면서 농협, 경제기획원, 국세청을 비롯해 기업체 26개가 대상에 올라와 버렸다.
노른자위 땅을 한부그룹이 독식하는 것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뜬금없이 해당 조합에 언론사와 군부대가 포함되기까지 했으니 한마디로 아는 놈들끼리 주택복권 나눠 먹기식이었다. 대중에 알려지면 난장판이 될 테니 언론 통제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 와중에 대현의 국산 휴대폰 개발 소식은 정권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아이템이었던 거다. 덕분에 대현전자는 전 국민을 상대로 공짜로 광고를 한 셈이다.
이번 생에 대현은 참으로 운이 좋다. 내가 운이 좋게 해 준 것도 있지만 말이다. 물론 덕분에 수서에 사 드린 부모님 댁에도 따뜻한 볕이 들 테고.
-이어서 한소 정상 회담이 예견되어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선 어떻게 준비가….
딸깍!
나는 TV를 꺼 버리고 양복을 갖춰 입었다. 푹 쉬었더니 숙취 따위는 흔적도 없다. 역시 간이 젊으니 좋다.
아담한 정원을 지나 문밖으로 나가자 이 비서가 문 앞에서 꾸벅 인사를 한다. 어떻게 이리 딱 맞췄지?
여하튼 그는 오늘 점심때부터 중형 세단을 몰고 와서 내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역시 비서가 천직인 사람이다. 눈치 하나는 백단이다.
“이제 출발하세요? 점심때쯤 출발하실 줄 알았는데….”
“괜찮아요. 사장님 퇴근 안 하셨을 겁니다. 근데 이 차 어디서 가져왔어요?”
“업무용 차량입니다. 인사부에 유 팀장님 모시러 간다고 하니까 빌려 주던데요. 제일 큰 차로.”
“그래요? 어떻게?”
“팀장님은 로열패밀리… 후훗!”
“이야, 구라 잘 쳤네요?”
“저는 유 팀장님 심복이잖아요. 픽업된 건 우연이라지만 제가 이런 행운을 놓치겠습니까?”
“날 만난 게 행운입니까? 회사에서 줄 잘못 서면 한 방에 훅 갑니다.”
“에이, 훅 안 가게 행동하시잖아요. 제 눈이 아무리 동태눈이라도 천재는 알아봅니다.”
“듣기는 좋네요. 가요.”
대기업 임원이 되려면 일단 임원처럼 행동하는 것이 우선이다. 업무용 차량이라도 빌려서 사내에서 차로 왔다 갔다 하고, 팀원을 운전기사로 앉히는 꼴값 떠는 행태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팀장들 중에선 눈에 띄게 되고 인사부며 구매부며 눈치로 먹고사는 간접 부서 애들이 ‘혹시나’ 하며 자신들의 수첩에 이름을 올리고 뭐라도 하나 더 챙겨 준다. 그러면 자연스레 임원 승격에 1순위로 오르게 되어 있다.
이 비서는 그런 행태를 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질적으로 깨치고 있다고나 할까? 체대 출신인 그가 공대 출신인 팀원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도 비슷한 연장선일 것이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 건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정 회장이 득달같이 사람을 보냈을 테니까.
모든 상황이 내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다. 좋다.
부우웅.
“이천으로 가요.”
“에? 강남이 아니고요?”
“회장님이 아니라 사장님 뵙겠다고 했잖아요.”
“아, 잘못 들은 게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이 비서는 그길로 분당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내달렸다. 아무리 밤에 고속도로를 거쳤다곤 하지만 1시간 남짓 만에 회사에 도착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 *
밤 11시가 다 되어 갔기에 사무동은 나를 제외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웬일인지 비서실도 텅 비어 있었기에 방문을 노크했다.
똑! 똑!
“들어와요.”
“예, 사장님.”
“역시, 유 팀장이군. 근데 출근 시간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헌몽 사장은 피곤한 기색이지만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아직 12시가 안 지났으니 출근 약속은 지켰습니다.”
약속대로 사흘 만에 출근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정헌몽 사장도 그 약속은 믿었던지라 비서진을 모두 퇴근시키고 혼자 사무실을 지키는 성의를 보인 거고.
“덕분에 자세 좀 세웠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가?”
“에이, 무슨 말씀을. 모두 사장님이 하신 일인데요. 저는 명령에 따른 것뿐입니다.”
“후후. 아버님도 그리 생각하실까?”
“전부는 아니라 해도 상당 부분 그렇다고 믿으실 수밖에요. 실제로 일도 하셨잖아요.”
“하긴, 사흘 동안 그리 많은 일을 하라고 던져 놓고 가다니….”
“보고서에 적어 두긴 했는데 정말 시간 맞춰 다 하실 줄은 몰랐네요.”
“하하. 감히 사장을 갈구는가? 자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네. 이리 와서 앉게. 이제 나도 한잔하고 싶으니까.”
사흘 만에 정헌몽 사장의 말투가 변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살짝 가까워진 느낌이다.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맡은 사람이면 언제나 스포트라이트 받게 되어 있지. 정헌몽 사장은 사흘째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하지만 K폰을 마무리 지으면서 정말이지 신이 났을 것이다.
꼴꼴꼴꼴.
책상 아래에서 호리병처럼 생긴 양주병을 꺼내 잔을 채우더니 서가의 아랫부분을 턱으로 가리켰다. 내가 쫄래쫄래 가서 열어 보니 화이트 치즈와 초콜릿이 잔뜩 있었다. 코냑인가 보다. 화이트 치즈와 초콜릿을 안주 삼으면 향이 기가 막히지.
“이야, 사장님께서 친히 사규를 위반하시다니요.”
“우리끼리 비밀로 하지. 나는 자네와 이런 비밀을 더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네. 터놓고 술잔을 기울일 친구 따윈 없거든. 모두 적이야. 심지어 형제들까지도 말이지.”
정헌몽 사장은 나와의 대화를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쪼로록, 쨍.
“캬아! 찌릿하니 좋네요.”
잔을 채우고 건배와 함께 한입에 털어 넣으니 알싸하고 좋다. 그런 나를 보면 정헌몽 사장이 웃어 댔다.
“미녀를 그리 다루면 쓰나?”
“네? 미녀? 이 술요?”
“코냑을 마실 땐 혓바닥으로 한 모금 얹어서 입천장에 부딪쳐 봐. 향이 짜릿할 정도로 강렬하지. 강렬한 키스 못지않다니까. 코냑을 미녀라 부르는 이유가 뭐겠나?”
인생 2회 차인 나조차 몰랐던 방법이다. 역시 나 같은 놈은 싸구려 소주나 어울렸던 건가?
정헌몽 사장이 알려 준 대로 코냑을 마셔 보니 정말이지 꽃밭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룸살롱 벽에 배어 있는 퀴퀴한 양주 냄새 따위는 비할 바가 아니다.
꼴깍.
“이야, 정말인데요. 키스가 이리 좋은 겁니까? 우와! 해 봐야겠다.”
“연긴지 진짠지 알 수가 없군. 하하하!”
내가 유난을 떨자 정헌몽 사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서 여지없이 일 얘기로 빠져든다.
“말한 대로 국내에선 SJ, 미국에는 AT&T로 샘플을 보냈네. 외려 SJ보다 미국에서 단박에 연락이 오더군. 샘플로 30대를 보내 달라고 말이네. 품질 기준을 패스하면 최소 10만 대를 구매하겠다더군.”
“바로 10만 대 주문할 겁니다. 그리고 두 달쯤 뒤엔 100만 대를 요청할걸요.”
“…….”
“석 달 뒤에는 500만 대쯤 요청할 거고요. 그때쯤 국내 통신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물량 달라고 난리가 날 거고.”
“허!”
AT&T는 미국 통신회사 중의 넘버원. 그쪽에서 수주를 받으면 휴대폰 사업은 날개를 다는 거다. AT&T는 무조건 넘어온다. 원래 역사에서 모토롤라가 로열티 5%를 요구하는 뻘짓을 하잖나.
AT&T가 퀄컴의 CDMA 방식을 채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퀄컴은 무조건 모토롤라 로열티의 절반만 받겠다고 나섰다.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아니… 아니야. 반년 전에 한소 정상회담을 예측한 자네가 아닌가? 이제 의심 따윈 하지 않아. 외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할 뿐이지.”
“모든 신문을 꼼꼼히 읽고 분석하시면 됩니다.”
“내가 왜 분석하나? 자네가 있는데.”
“으음,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유일하게 의심이 가는 게 있다면 SJ라네. 정말 통신 사업자로 낙찰되나? 솔직히 사업 대비 너무 덩치가 작아.”
“대통령하고 사돈까지 맺는 강수를 뒀는데 낙찰은 당연한 결과죠. 지금에야 뭐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10년쯤 지나면 4대 재벌 못지않게 크게 성장할 겁니다.”
“5대 재벌가가 되는 건가?”
“아마도요.”
솔직히 관심 없다. 내가 이 판에 끼어든 마당에 SJ가 IMF를 잘 넘길지 못 넘길지는 관심 밖이며, 확실한 것은 살아남는 재벌 중 하나는 내가 될 거다.
왜냐고? IMF며 그 뒤에 이어지는 정치적 파도에 대현은 어쩔 수 없이 무선통신 사업부를 분리하잖나. 그때가 내가 귀족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때가 될 것이다. 나 스스로 대현에서 독립할 기회를 만들 것이며, 버려진 사람들을 내 손으로 건져 올릴 거다.
이번 생엔 내 미래를 남의 손에 맡기는 바보짓은 절대 안 해. 난 인생 2회 차다.
“좋아. 그럼 기지국은 얼마나 만들어야 하나?”
“단순히 기지국이라 통칭했지만 중계기와 기지국 컨트롤러를 포함한 시설입니다. 반경 35km마다 하나씩 지어야죠. 케이블도 연결해야 하니 대현건설을 움직이시죠. SJ와는 직접 물밑 접촉에 나서시고, 일단 대현이 공사비를 지불하고 SJ가 국비를 지원받으면 그때 대현에 공사비를 갚는 조건! 그렇게 제시하신다면 SJ는 사장님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일 겁니다.”
“모든 리스크는 대현이 진다? 그 전략인가?”
“네. 굿판 화끈하게 벌여 주고, 떡은 나중에 먹고.”
“건설비는?”
“AT&T! 걔네들이 줄 겁니다. 석 달 내에.”
“어찌 확신…. 아니, 그래. 믿어 보지.”
“퀄컴 애들 불렀습니다. 기지국을 세우는 데 적극 나설 겁니다.”
“좋아.”
나는 퀄컴 엔지니어를 불렀다고만 했을 뿐, 최강의 로비스트를 미국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무기를 모두 알려 줘서야 되겠는가.
쪼로록, 쨍.
코냑을 한 잔 더 한 나는 회사 근처 사원 아파트로 돌아왔고, 정 사장은 그날 이후 한동안 이천에 출근하지 않았다. 대현건설, SJ를 빙글빙글 돌더니 미친 듯이 빌딩 옥상과 땅을 사 댔다.
자신의 사재를 몽땅 털고도 모자라 은행에 자신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대규모 대출까지 받아 가며 그 짓을 했다. 설비를 들일 때는 은행 대출이 힘들어지자 6개월짜리 어음도 찍어 냈다. 서울, 경기도 일대를 커버하는 데만 못해도 600억은 들었을 것 같다.
기획팀에서 ‘K1 프로젝트’라는 타이틀로 팀을 조직하고, 입국한 퀄컴 엔지니어도 끌어들여 지도에 빨간 점을 찍어 댔다. 어렵게나마 사장님 명령이라고 삐대서 살펴봤더니 정확히 반경 35km마다 땅을 매입하고 공사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무선 사업이란 게 참 괜찮은 사업이다. 아파트 짓는 것과 달리 사회 기간망이 그다지 필요 없다. 전기 끌어와 첨탑 세우고, 소방시설, 냉각기, 교환기, 중계기 등등 설치하고 문 닫아 걸면 땡이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빌딩 옥상을 사 버리면 더없이 좋다.
정헌몽 사장은 단순히 국내 무선 사업을 본격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인프라는 10년만 지나면 대현에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다. 지금에야 음성 통화만 한다고 여기지만,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노릇을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