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사장이 주는 선물
회장 주관의 비밀회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팀 전원에게 인사 발령이 떨어졌다. 그룹 소속의 차세대 개발팀이 아니라 ‘대현전자 차세대 제품 개발팀’이라고 나름 자세한 부서명으로 말이다.
팀장인 내 직급은 과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로젝트가 정해졌으니 대현전자로 자리를 옮길 것이며, 영전임이 분명하니 승진하라는 의미였다.
뚜벅뚜벅.
경기도 이천, 대현전자 공장에 자리를 잡은 지 불과 두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어? 무당님이다. 나 봤어, 봤어.”
“오! 정말 무당처럼 생겼다.”
“천재라잖아. 영어도 잘한대!”
“라인에서는 미친개라고 하던데?”
“그리 안 보이는데. 순하게 생겼잖아.”
등 뒤에서 여사원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당 팀장, 소년 과장, 숨겨 온 막내, 미친개 등등 온갖 별칭이 따라붙었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역대 최연소 과장이자 팀장으로 이천 공장에 자리를 잡자 결국 소문은 정 회장이 미국에서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무당 교포를 만나서 애를 얻었다고 결론지어졌다.
하도 황당한 이야기인지라 내 앞에서 굳이 사실 여부를 묻는 이도 없었기에 해명할 기회마저 없었다. 뭐, 귀찮기도 하지만 도움 되는 일이 더 많으니까.
개발팀 사무실이 있는 연구소 건물을 빠져나와 사장실과 기획팀을 비롯한 간접 부서들이 밀집되어 있는 사무동으로 향했다.
건물로 들어서면 입구에는 크게 붓글씨로 ‘도전(挑戰)’이라 적어놓은 현판이 보인다. 정 회장이 직접 쓴 것으로 각 그룹들마다 하나씩은 있는 현판이다.
도전이라는 단어는 대현그룹에 아주 잘 어울린다. 도전이 무모하거나 맹목적이지만 않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말이다.
도전이란 단어는 대현의 가장 큰 장점이자 가장 큰 약점이다.
「1990년 긴급 경영 회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대회의장에 들어서니 오버헤드 프로젝터(OHP)가 스크린에 제목을 띄워 놓고 있었다.
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임원진에 묵례를 하고는 말석에 자리했다.
3월 초에 사장 주관으로 경영회의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연초에 1년짜리 경영 목표를 수립하는 데 수정에 수정을 거치다 보면 2월 말에 겨우 목표 수립을 한다. 자연스레 1/4분기 경영 현황 리뷰는 건너뛰고 6월쯤 돼서야 사장 주관으로 상반기 경영 회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데 3월에 긴급 경영회의를 한다는 것은 목표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정헌몽 사장이 직접 소집을 했다. 솔직히 나는 지겹기만 하다. 2세대 통신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눈앞에 떠오르고 있는데, 이런 소모적인 회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삐익.
회의 간사가 마이크 전원을 올리자 수군거리던 회의장이 일순간에 조용해진다. 대현전자의 왕께서 회의장에 들어온다는 의미니까.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에 들어서는 정헌몽 사장에게 묵례를 건넨다. 정 사장이 좌우를 둘러보며 착석을 하니 간사의 긴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부터 대현전자 사장님 주관으로 긴급 경영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 목차는 다음과 같으며, 각 팀장님들께서 직접 발표하겠습니다.”
“시작하세요.”
“예. 첫 번째 발표는 1/4분기 현황으로 기획팀에서 발표하겠습니다.”
정장을 차려입은 기획팀장이 앞으로 나와 연초 대비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그래프와 숫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 시답잖은 숫자 놀음일 뿐이다. 일본 엔화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그나마 들을 만했을 뿐, 그 예측이 틀어졌을 때 어떤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이때는 대현이라는 대기업조차 리스크 관리를 경영에 고려하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대마불사’ 즉, 대기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매출을 늘릴 수 있냐’는 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현그룹이 사라져 버린 걸 두 눈으로 보고 온 나로서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발표다.
이어지는 것은 반도체 칩 설계실장을 맡고 있는 백수길 상무의 발표였다. 시답잖은 얘기들이었기에 나를 쳐다보며 말하는 꼴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차세대 4메가 DRAM은 일본 선진사와 설계부터 공동 개발을 추진 중입니다. 히타치(Hitachi)나 엔이시(NEC)가 기술 이전에 호의적인데, 히타치로 결정하는 것이 타탕합니다. 차후 캐패시터 공정을 트렌치(Trench, 수직 구멍)에서 스택업(Stack-up, 적층형) 방식으로 재편하는데 있어 히타치가 기술적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이미 결정한 상황을 내 앞에서 반복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헌몽 사장이 이례적으로 발표를 중간에 끊었다.
사장 주관의 회의는 매우 경직된 형태를 가진다. 수십 장에 달하는 회의 자료는 사전에 배포되고 그중 일부만 발표한다. 그 외는 모두 참조 자료일 뿐이다.
결국 이런 회의의 목적은 의사 결정 사항을 정리하고, 사장이 최종 결정을 뭇 임원들 앞에서 공식화하는 데 있다. 사장이 내심 정해 왔던 결정이 발표 내용에 의해 바뀐다면 사장은 재검토를 명하며 재차 고민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중간에 발표를 끊는 경우도 없으며, 백수길 상무처럼 이미 결정된 사항을 반복해서 발표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상대적으로 공정이 쉬운 메모리도 이러한데, 통신용 칩셋도 당연히 공동 개발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걸 말씀드리기 위해 굳이 이전 자료를 펼쳤습니다.”
“통신칩은 비메모리 반도체니 변 상무의 업무 영역이지 않나요?”
“아, 예.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헌데 변 상무님은 업무 파악도 못 하시는 것 같고, 그 밑에 누군가는 달랑 설계도 한 장 들고 와서 라인을 휘저어 대니…. 허허, 애들 장난도 아니고… 통신칩 개발도 저희 메모리 설계실에서 담당했으면 합니다. 자그마치 순수 개발비만 30억 넘게 들어가는 일이고, 장비 투자까지 뒤따른다면 수백억에 달하는 돈인데 어찌….”
어찌 어린애한테 맡기냐? 회장님의 숨겨 둔 아들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이따위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풉….”
나는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공동 개발이 자랑이다, 병신 새끼.
이 시대에는 이런 놈들이 많다. 외국에서 기술 좀 배워 왔다고 까부는 놈들인데, 결국 기술을 배워 온 게 아니라 그런 기술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아 온 것에 불과하다.
돈 있고 백 있는 집안에서나 해외 유학을 보낼 수 있었던 시대상에 비춰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부잣집 아들이 절박해 봐야 얼마나 절박했겠어? 결국 누군가 했던 말처럼 기술은 사 오면 되고 머리는 빌려 오면 된다고 여길 뿐이다.
“유수한 팀장, 백 상무가 업무를 인수하겠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헌몽 사장이 내 상사이자 연구소장인 변 상무를 제치고 직접 물어 왔다. 변 상무가 입술을 꾹 깨문다.
좀 기다리세요. 이거 왠지 촉이 오니까. 자세 잡게 해 줄 것 같네요.
“일본 놈한테 기술 넘기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시죠. 설마 그따위 결정을 하려고 물으시 건 아니죠?”
나는 어린애 버프를 이용해 막말을 해 보기로 했다. 이미 라인의 그룹장들에겐 미친개라 불리고 있으니 회의실에서 미친놈 소리 들어도 별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용기는 프로젝트 성공에서 필수 요소에 가깝다.
“으흠! 100% 국산화가 가능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자신 있나요?”
정헌몽 사장은 언제나 정중하다. 웬만큼 화가 나지 않으면 국문학과 출신답게 차분한 문장을 늘어놓는다. 나의 어린애 버프와 찰떡궁합이라고나 할까.
“당연하죠. 뭐, 기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놓고 공동 개발을 논할 뿐이에요. 지가 모르니까 다들 모르는 줄 알고. 하하하!”
“유 팀장! 설마 나보고 하는 소리요?”
“그럼요. 당연하죠.”
“뭐라고? 사장님 앞에서 무슨 그런 망발을!”
“당신이 먼저 내 발목 잡아 놓곤, 손 밟혔다고 그러면 어째요? 허 참, 웃기시네.”
“뭐? 이런….”
“조언 하나 하죠. 히타치 애들이 스택업 공정 당장 투자해야 한다고 하죠? 그거 지네들 장비 팔아먹으려고 하는 수작이니까 무시해요. 4메가에는 그냥 트렌치 캐패시터 공정을 그대로 써요. 스택업은 16메가 DRAM에 써야 하는 기술이고, 2년 뒤에나 투자하면 돼요. 그때 되면 장비가도 훅 떨어져 있을 테니까. 해서, 지금 통신칩은 공정이고 설계고 변경 없습니다.”
내 일을 넘기기는커녕 백 상무의 최대 프로젝트인 공동 개발이 아예 틀려 먹은 전략이라고 한껏 쏘아 주었다.
백 상무는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반도체에서 투자 시기를 놓치면 어찌 되는 줄 알아?”
“헐? 누가 투자 시기 놓치래요? 제대로 하라고 했잖아요! 공동 개발 따위로 돈 낭비할 필요 없다고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셔!”
믿으라고, 2년 안에 일본은 미국과 반도체 무역 전쟁에서 그냥 녹다운당한다니까.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한테 밀리고, 통신칩을 비롯한 비메모리 반도체는 미국 회사한테 한 방에 밀려난다고. 괜히 공동 개발로 일본 애들 명줄을 늘려 줄 필요가 없다니까.
“스택업 설비는 대현전자의 미래야. 그 투자를 미루라니 말이 돼? 어? 내 팀원들이 밤새워서 공정 개발하고 있고….”
“아! 열심히 공정 개발하세요. 열심히 하셔서 16메가 때 쓰시라고요. 지금은 기존 설비를 늘려서 냅다 찍어 대야 하는 때라고요.”
“뭔 소리야! 냅다 찍어 대라니! 대현전자를 구멍가게 취급하는 건가?”
“어이구, 매출 1조에 세계 시장 점유율 3.7%!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우십니까? 우습네요. 후훗!”
30년 뒤에는 세계 시장 3위에 우뚝 서지만 이 당시에 대현은 미국, 일본 그리고 신성전자에도 밀려나 극히 작은 파이를 먹고 있을 때다.
지금은 물량으로 치고 나가야 할 때다. 내년부터 반도체 업계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 들이닥친다고.
“뭔 이따위 놈이….”
“말조심해요. 사장님 앞입니다.”
탁!
“그만! 둘 다 그만!”
적당한 타이밍에 정헌몽 사장이 손바닥 치기 한 번으로 분위기를 끌어내린다. 그는 묵직한 침묵을 잠시 즐기다 묘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 왔다.
“유 팀장, 내 귀에는 우리 회사 물량을 모두 팔아치울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못 할 것 없죠. 아무리 찍어 내도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는데 뭐 어렵겠습니까.”
“수요를 못 쫓아간다고?”
“그럼요. 월 1억 개를 찍어내도 부족합니다.”
“월 1억 개?”
“네, 그것도 부족합니다. 올 하반기부터 월 단위로 1메가 7천만 개, 4메가 3천만 개는 필요하게 될 겁니다. 통신용으로 SRAM과 칩셋도 월 천만 개는 찍어야죠. 그때 가선 라인을 풀가동해도 감당 못 할 물량이니 지금부터 열심히 찍어 놓으면 어렵게나마 대처 가능할 겁니다.”
1990년은 IT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시기다. 1989년엔 모토롤라가 ‘세계 최초의 포켓 휴대폰’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마이크로택이라는 제품을 이미 내놓았다. 한국까지 아직 바람이 불어오지 않아서 그렇지 미국에선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 800g짜리 벽돌폰이 아니라 350g짜리 일자형 휴대폰이거든.
내 디자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있다. 두께 2cm에 총무게 200g의 폴더형 휴대폰이다. 휴대폰 두께와 중량 확대의 주범인 수동 소자의 기능을 통신칩으로 대체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물론 메모리 반도체도 사이즈를 줄여야 하는데 그것도 시도할 것이다.
여하튼 모토롤라가 불을 지핀 모바일폰 시장은 처음엔 미적지근하다가 올해 6월부터 폭발하기 시작한다. 왜냐고? 일본 정부가 미국과 무역 전쟁의 일환으로 환율 방어에 나서면서 엔화가 바닥을 친다. 일본 전자 부품값이 내려가면서 모토롤라가 폰 가격을 대폭 할인하니까.
그래서 미국발 2세대 통신 시장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연이어 한국 반도체 회사에 대형 호재가 생긴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윈도우 3.0이 같은 시기에 출시하거든. 퍼스널 컴퓨터가 불티나게 팔리고, 반도체는 시장에 내놓자마자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런 호황은 1992년 4월 윈도우 3.1이 발매될 즈음 PC 시장 크기가 다섯 배로 커지면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 이어진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컴퓨터에 DRAM 모듈을 더 많이 꽂을수록 컴퓨터가 빨라진다는 것을 알아차리니까.
물론 원래 역사대로라면 대현은 이런 대호황기에 절반만 성공을 거둔다. 내가 볼 땐 실패에 가깝다. 환율이 떡락하기 전에 일본 회사와 공동 개발을 하면서 스택업 캐패시터용 설비에 과다하게 투자하고, 그게 생산으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일본 애들이 원래 계약대로 설비 안정화를 도와주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의 반도체가 생각보다 빠르게 미국 시장을 잠식하면서 일본 놈들 본사 매출을 갉아먹는 꼴이 되어 버렸거든.
그러니 대현은 막 태동기를 벗어나는 통신용 칩셋 사업에는 뛰어들지도 못했다. 신규 투자 설비는 돌리지도 못했고, 기존 설비로는 쏟아지는 양산 물량을 맞추기에도 빠듯했다. 결국 고민 끝에 신규 개발 인력과 여분의 자금을 기존 라인을 확충하는 데 모두 밀어 넣어 버렸다.
선후가 바뀌어 버린 투자 형태였고, 양적 팽창으로 당장 돈은 벌었지만 미래를 까먹어 버린 꼴이었다.
그래도 대현전자는 돈을 잔뜩 긁어모았으니 크게 한번 점프할 기회가 남아 있었지만, 1992년 정 회장이 대선에 출마하면서 그마저도 꼬꾸라졌다.
정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참패했고,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대현그룹에 정치 보복을 시작한다. 정부가 나서 대현그룹의 세무 조사를 실시하고, 은행 대출을 막아 버리고, 설비 수입에도 제동을 건다. 일례로 수출입 신용장을 발급하는 데 기한을 석 달 이상 끌어 버렸기에 정 회장은 명예 회장직에서도 물러난다고 백기 투항을 해 버린다.
반도체 호황기에 힘입어 그런 일련의 과정을 5년이나 억지로 이겨 낸 대현전자건만 연이어 터진 IMF라는 거대한 망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뒤통수를 감싸 쥐고 털썩 나자빠져서는 투자 여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반도체만 남기고 전망 밝은 휴대폰, 디스플레이, 통신 서버 등등 돈 될 만한 것들은 모두 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잘못되었던 첫 단추를 다시 끼우려는 거다. 지금부터 방향을 틀면 대현전자는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정당당히 내 몫을 챙길 거다.
“무슨 근거라도 있어? 네놈이 시장 조사를 어떻게 해? 이게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알아?”
백 상무가 못 참겠다는 듯 불쑥 튀어나온다.
“백 상무님, 저도 명색이 팀장인데 이놈 저놈 하십니까? 아유, 천박하기도 하셔라. 나이 헛드셨네. 밑에 직원들 엄청 괴롭히겠어요. 훗!”
“이이익.”
“백 상무, 그만하세요. 유 팀장도 그만하고.”
“아, 예. 죄송합니다, 사장님.”
내가 사과를 하니 정헌몽 사장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백 상무에게도 사과하라는 의미 같았다.
“백 상무님, 제가 말이 좀 심했나요? 미안합니다. 후후.”
“으으….”
탁!
“백 상무, 그만하시라고요! 유 팀장이 사과했으니 자리에 앉아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결국 상황을 정리한 정헌몽 사장이 재차 나에게 물었다.
“유 팀장, 근거는 있나요?”
“그룹 재무팀에서 들으신 것 없으신가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마치 사장과 내가 독대하듯이 말을 주고받으니 다른 임원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대현전자의 사장 정도면 정보의 채널 자체가 질을 달리한다. 온갖 고급 정보가 넘쳐 나며,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사장의 능력이다.
내가 이 회의에서 얻을 것이 있다. 대현의 가신들이 정헌몽 사장에게 줄을 대고 있는지 아닌지 여부다. 정 회장이 직접 입막음을 시켰음에도 그룹 재무팀의 최 상무가 일본 환율에 대한 정보를 정헌몽 사장에게 알려 줬다면 설명 따윈 필요 없다.
“…그게 유 팀장의 정보였나요?”
툭 튀어나오는 정헌몽 사장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이제 보니 결론은 이미 정해 놓고 온 거잖아? 그럼 이 회의의 목적은? 결국 내게 선물을 주려고 만든 회의라는 확신이 든다.
물론 대가는 나의 충성 서약이다.
- *
“그런 추론을 누가 하겠습니까?”
“그렇군요.”
슬쩍 찔러봤는데 손쉽게 대답이 나온다. 역시 정 회장과 내가 차 안에서 얘기했던 정보가 샜어. 최소한 그룹의 재무팀장은 정헌몽 사장에게 줄을 섰다. 가신들 입장에선 한 성격 하는 정구몽과 정준몽 사장보단 온화한 품성의 정헌몽 사장을 그룹 회장으로 밀고 싶겠지.
그러고 보니 나 또한 그중 한 사람이네. 성격 때문에 줄 섰다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말이야.
“설비 투자는 유 팀장 얘기대로 기존 라인을 확장하세요. 기획팀은 기존 예산안을 파기하고 DRAM 기준으로 월 1억 2천만 개 생산 가능토록 조정하세요. 기한은 이번 달까지입니다. 최종 결재는 내가 하지요.”
“예, 기획팀에서 추진하겠습니다.”
정헌몽 사장이 대뜸 선언하듯 말을 내뱉자 백 상무는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 소리 못 했다.
외려 대현전자 기획팀장이 후다닥 예스맨으로 행세했다. 기존 라인을 확충하는 것은 공동 개발 건보다 훨씬 간단하거든.
옆에 앉은 구매팀장도 살짝 웃는다. 신규 설비가 아니라 기존 설비를 확충한다면 구매가를 후려칠 수 있다.
“통신용 칩 업무는 유 팀장이 계속 맡으세요. 생산팀은 월 2천만 개 생산 라인을 할당하세요.”
“예, 사장님.”
“물량을 다 못 채우면 유 팀장은 시말서감입니다.”
“감사합니다. 시말서 쓸 일은 없을 겁니다.”
“믿고 싶군요.”
정헌몽 사장은 내 말에 차분한 명령을 이어 갔다.
“공동 기술 개발도 이대로 홀드합니다. 스택업 연구는 연구소에서 자체 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16메가에 채용할 거라면 3년 정도는 시간을 줄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변 상무님만 믿습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간 공동 개발건으로 뒷전으로 밀렸던 변유광 연구소장이 진중한 표정으로 다짐을 한다. 제대로 된 결정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저 양반이 스택업 기술 국산화에 성공하니까.
대현전자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백 상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가 눌러 왔던 반대파가 득세하는 꼴이 아닌가.
“대전략이 바뀌었으니 뒤의 발표는 들을 필요 없겠군요. 혹시 빠진 게 있나요?”
정헌몽 사장은 회의 마무리에 들어갔다. 백 상무의 반론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백 상무를 제외하고 나를 향하는 타 임원들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역시 이 회의는 내게 주는 선물이다. 나에게 파벌을 안겨 주시겠다?
또는 협박이기도 하다. 내가 충성하지 않으면 파벌에 밀려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오키! 이왕 선물을 준다고 하니 냉큼 받아야지. 한번 줄 때 확 잡아당겨야 한다.
“이번 기회에 통신용 반도체는 규격을 달리했으면 합니다.”
“규격이라고요?”
“예, 사장님. 휴대폰을 좀 얇게 하려면 TSOP 적용이 꼭 필요합니다.”
“으흠… 그건 반도체 조립 쪽 담당인가요? 연구소에 팀장이 누가 있죠?”
봐라, 대뜸 내게 팀장급을 연결시켜 주려고 하잖은가.
“패키지 개발팀은 연구소가 아니라 생산 기술팀에 속해 있습니다.”
“으음? 생산 기술이라고요?”
“지난번 조직 개편 때 백 상무님의 의견을 채용하셨지 않습니까.”
“아, 그랬나요? 뭐, 생산 기술 소속이라고 해도 기술 개발은 가능하겠죠. 누군가요?”
“예, 사장님. 오성재 부장이라고 합니다. 제가 맡고 있습니다.”
“오 팀장, TOSP? 여하튼 그거 부탁드려요.”
“맡겨 주십시오. 업무 필달….”
오성재 부장은 내가 인생 1회 차에서도 눈여겨봤던 인물이다. 의리 있고, 일도 잘한다. 성격이 대쪽 같아서 결국 백 상무에게 공격당해 퇴사했지. 연구소 소속에서 생산 쪽으로 쫓겨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살려 드릴게.
“사장님, 패키지는 칩을 보호하는 껍데기입니다. 그걸 왜 바꿉니까? 제품 신뢰성을 떨어뜨릴 게 분명합니다.”
사장이 직접 명한 업무를 성공시키는 것은 승진한다는 보증서나 다름없다. 오 부장은 흥분을 감추며 대답했는데, 백 상무가 급히 말을 끊고 들어온다. 자신이 연구소에서 내친 인물인데 승진하면 곤란하겠지.
“신뢰성 확보 여러 차례 증명했습니다. 백 상무님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니지요.”
“이봐, 오 부장. 그 TSOP란 게 반도체를 종잇장처럼 만들었던 그거 아냐? 그까짓 게 어떻게 칩을 보호해?”
“두께 1t(1mm)짜리가 종잇장입니까? 백 상무님은 데이터를 믿지 않으시죠. 유 팀장님은 이성적이니 믿으실 것 같군요.”
“물론이죠. 내 휴대폰의 고객도 이성적인 분들이니까. 냄비에 넣고 끓일 것도 아니고.”
“끓여도 견딥니다. 걱정 마십시오.”
대기업은 참으로 희한한 곳이다. 감정적인 강경파와 이성적인 온건파가 붙으면 강경파가 무조건 이긴다. 여태 오 부장이 밀린 이유겠지.
이럴 때 돌파구는 딱 한 가지. 나처럼 ‘내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하면서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된다. TSOP는 몇 년 내에 국제 규격이 된다고.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요. 회의 마치도록 합시다. 회의록은 유 팀장이 작성하고 내 결재 후에 배포토록 하세요.”
“…제가 회의록을요?”
“제일 젊은 사람이 해야지 않겠어요?”
“아, 예.”
정 사장이 회의장을 빠져나가고 나는 간사와 함께 회의록을 작성하느라 1시간이나 늦게 나왔다. 백 상무의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되고, 반대파에 합류했음을 공식화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여러모로 정헌몽 사장은 아주 사소한 면에서도 신경 쓰는 타입이다.
나는 회의록을 결재판에 얹어 직접 사장실로 올라갔다. 간사를 내세우지 않았다. 굳이 나를 지목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니까.
- *
쓰쓰슥.
회의록을 읽어 보지도 않고 쓱쓱 서명하는 정헌몽 사장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의미다.
“어째 선물은 마음에 드나요? 조심해요, 파벌은 양날의 검이니까.”
정 사장이 고개도 들지 않고 서명을 하면서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왜냐고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다.
“솔직히 설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습니다. 기존 휴대폰과 칩이며 외형까지 달라지니 우려하실 만하잖습니까.”
“잘 팔릴 것 같아서요.”
“…….”
“왜 그리 생각했냐고요?”
“하하….”
“안 믿을 수가 없었거든요.”
정헌몽 사장은 책상 안쪽에서 보고서를 꺼내 건네주었다.
나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본사 비서실을 통해 정 회장에게 건넨 카자흐스탄 프로젝트의 대응안이었다.
로비 대상을 그토록 완벽하게 골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룹 재무팀뿐 아니라 회장 비서실도 정헌몽 사장에게 줄 서고 있었다.
“이거… 비서실이 호박씨 깠군요.”
“뭐, 부자(夫子) 간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겠죠. 아! 이것도 있네요.”
“일본 환율 예측 보고서겠군요. 그룹 재무팀에서 줬나요?”
“음, 보여 줄 필요가 없겠군요. 물밑에서 조사해 보니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요.”
“일본 주식에 들어가긴 늦었습니다.”
“그 말도 들었어요. 그래도 공동 개발은 미뤄야죠. 설비가가 싸지는 건 매우 당연하니까.”
이쯤 되니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당신 누구예요? 정말 고등학생 맞나요?”
“유수한입니다. 대학생이며, 대현전자의 과장이기도 하죠.”
“정말 무당인가요? 후후. 꼭 내 동생뻘처럼 느껴진다니까요.”
“동생보단 차라리 무당이 좋겠습니다.”
“하하하!”
정헌몽 사장이 크게 웃었다. 뭐 어쩌랴. 어린애 취급당하기 싫다고, 나는 미래에서 온 40대 아저씨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가 봐도 됩니까?”
“질문 안 끝났는데….”
“…….”
“당신 내 편인가?”
갑자기 하대를 한다. ‘당신 하는 거 봐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나 나는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당연합니다, 사장님.”
“듣기 좋네. 믿어도 될까?”
“그럼요. 원하시는 곳에 다다르실 때까지 저를 데려가 주시기만 한다면.”
“……!”
나의 충성 서약은 조건부. 외려 믿음이 증폭될 것이다.
“발목 잡는 놈 있으면 보고하고. 신규 사업 아이템은 바로 가져와요.”
“당연합니다, 사장님.”
나는 충성 서약을 마치고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휴대폰을 들이밀었는데 신규 사업 아이템을 더 가져오라니. 정헌몽 사장은 이 사업이 얼마나 커질지 감이 안 오는 거다. 하긴 누가 알았겠어.
여하튼 큰 선물을 받긴 받았네. 정헌몽 사장은 백 상무를 버리고 가신으로 나를 택했다. 공격당하지 말라고 반대파를 모아 나에게 붙여 줬다. 어우,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네.
휴대폰 설계는 이미 끝났고, 칩만 뽑아내면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온갖 종류의 반도체 불량을 골라내고 최종 제품으로 만들어 납품했던 하청업체 사장이었다.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다.
- *
“아니, 유 팀장. 이게 말이 됩니까? 초도 제품을 45일 만에 뽑으라니요.”
“나 그룹장, 단위 공정 셋업은 모두 끝났는데 왜 못 한다는 겁니까?”
“아무리 핫 런(Hot Run: 긴급 제조)이라고 해도 90일은 족히 걸립니다.”
내가 통신칩을 생산라인에 투입했더니 생산을 담당하는 나운영 그룹장이 런을 세워 버렸다. 내가 30년 뒤에나 가능한 일정을 적은 게 이유였다. 이때는 표준 공기(工期)가 석 달이었지. 솔직히 내 실수다.
“음… 일단 런은 집어넣고 공정을 좀 바꿉시다. 그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뭐라고요? 단위 공정 셋업을 끝낸 지가 엊그제인데 공정을 바꾼다고요?”
“공정 셋업을 다시 하는 게 아니고 순서만 최적화해도 공정 시간이 훅 줄어들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 그룹장이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했다. 내 말이 이해 안 되겠지. 1990년이면 대현전자가 설립된 지 10년도 안 된다. 이 양반도 기껏해야 7~8년 차에 불과하다.
이봐, 나 그룹장. 나는 이 바닥에서 20년 이상 굴렀어. 설계, 공정, 제조 그리고 판매까지 안 해 본 게 없다고.
“공정 레시피(공정 순서도) 어딨어요? 누가 가지고 있죠?”
반도체 공정 표준은 요리사나 쓸 법한 ‘레시피’라는 단어로 통칭한다. 원부자재, 설비, 공정 조건 등을 기재한 문서이기에 레시피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레시피를 달라고 하자 등 뒤에 있던 개발팀원 한 명이 퍼런 종이책을 내밀었다.
반도체 라인에서는 먼지가 날리지 않는 무진지(無塵紙)를 쓰는데, 일반 종이와 구별하려고 퍼렇게 염색한다. 표지 앞에는 핫 런을 의미하는 시뻘건 스티커가 떡하니 붙어 있다.
수십 일 연속 야근을 보장하는 스티커이기에 조건반사적으로 내 몸이 움찔거린다.
괜찮아. 난 팀장이야.
레시피를 받아 들고 공정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세 겹이나 장갑을 낀 탓에 손이 둔하긴 하지만 X 표를 치기엔 그다지 문제없었다.
“음! 21번, 28번 포토 공정 합치죠. 32, 37번도 합치고 128, 132번도 합치고. 비아(Via) 공정은 한꺼번에 합치죠. 62번, 78번, 112번, 130번, 142번에서 한꺼번에 뚫어 버리는 거죠. 세척 공정은 불산 25% 희석액으로 일괄 변경합시다. 그럼 세척 공정은 절반으로 줄겠네요. 그리고 218번 이후의 배선 공정에서는 폴리 실리콘에서 모두 메탈 증착으로 바꾸죠. 타이(Ti), 피티(Pt) 위에 폴리 알루미늄(Si을 섞은 Al)을 깔면 소결 공정도 빼도 되니까….”
내가 반도체 공정의 30% 가까이를 날려 버리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거된 공정이 대부분 시간을 길게 잡아먹는 공정이다.
“유 팀장님, 아무리 초도품이지만 이따위 공정으로 뭘 하겠다는 말입니까?”
“나 그룹장님, 해 보셨어요? 해 보고 말씀 하시는 겁니까? 물론 처음엔 불량이 엄청나겠죠. 헌데 이건 말마따나 초도품이에요. 동작 샘플 수십 개만 얻으면 되는 런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공정을 스킵하면 동작 샘플 수십 개는커녕 한 톨도 안 나와! 크크크.”
라인 그룹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비웃었다. 본심이었는지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내가 원하던 바다. 나름 인생 1회 차에서 이 양반과 친했는데 존댓말 쓰려니 나도 갑갑했거든. 술을 떡이 되게 퍼마시는 게 조금 흠이긴 하지만 동료애가 있는 양반이다. 바지사장으로 나간 내게 장비와 원부자재를 끊임없이 교환해 주었다. 총대 메고 나간 사람 서럽게 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당신 지금 웃었어? 내가 지금 엄청난 아이디어를 공짜로 알려 줬는데 웃어? 당신 바보야?”
“뭐? 바보?”
“바보 같은데? 똥이랑 된장도 구별도 못하잖아. 생각해 봐. 이 중 하나라도 효과 있으면 10년 치 원감 절감은 하고도 남겠다. 그게 다 누구의 성과가 될까? 내가 지금 개발팀에서 보고서 쓰겠다고 했어?”
“씨이… 뭐라는 거야?”
도발을 시작했더니 나 그룹장의 표정과 말투가 훅 달라진다. 좋아, 이래야 얘기가 통하지. 회사에서 겸손? 존중? 이런 가식적인 행동은 협업의 전조가 아니다. 회피와 발목 잡기의 전조일 뿐이다. 욕이 살짝 입에 걸리면 그때부터 협업의 시작이다.
분위기가 조금 살벌해지자 난 손을 휘휘 저어 주변의 엔지니어들을 멀리 보냈다. 나는 그룹장에게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나 그룹장, 이 레시피 잘 봐 봐. 개발팀은 실험을 안 했어. 보고서를 못 쓴다고. 그냥 개발팀장이 미친놈처럼 45일 만에 제품 뽑으라고 하니까 당신이 경험에 근거해서 극약처방을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실제 양산에도 적용할 만하더라. 이런 스토리 못 써? 진짜 바보 되고 싶어? 내 애들 시켜서 보고서 한번 써 볼까? 이거 효과 짠하다. 알아?”
“미친…. 수율 빵 프로 나오면? 시말서는 내가 쓰고?”
“시말서든 뭐든 내가 알아서 한다고 약속하지. 헌데 신경 썼는데도 결과가 그렇다면 몰라도, 나 몰라라 해서 수율 빵 프로 나오면 나 가만 안 있어. 이 레시피대로 하면 초도 수율 10%는 나와.”
“10%? 어떻게 그리 확신해?”
어느새 서로 반말을 하고 있다. 초도 수율 10%면 양산 적용 가능성이 있는 공정이다.
“보고도 몰라? 회사 전체를 뒤져 봐. 이렇게 레시피 줄줄 읊을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있을 것 같아? 나 천재라고.”
“…….”
“이건 기회야. 백 상무가 당신을 내게 붙여 줬으니 그룹장 중에서는 꼬붕이라는 말인데…. 내가 볼 때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거야. 운이 틔었어!”
“흐흐흐. 아 씨, 이걸 믿어, 말아?”
“믿어. 이거 잘되면 당신은 단박에 부장 다는 거야. 승진 회식에 부르면 2차는 내가 쏜다.”
“유 팀장, 미성년 아냐? 2차를 어째 가?”
“셔터 내리라고 하지, 뭐. 내가 그 정도 돈은 있어.”
“정말 로열패밀리야?”
“믿든지 말든지.”
내 말에 나 그룹장이 싱긋이 웃는다. 이 양반 성향에 나의 이런 말투는 궁합이 아주 잘 맞지.
“잘못되면 유 팀장 책임이야.”
“수율 10%는 나온다고 했지!”
“열심히는 할게.”
“그럼 나는 열심히 기도할게. 뺑이 쳐 봐. 우리 애들 굴려도 돼.”
“해 보지, 뭐. 크크크. 근데 유 팀장 진짜 고등학생 맞아?”
“왜 이래? 나 대학생이야. 그리고 대현전자 과장이자 팀장이라고!”
“런 집어넣어. 오늘부터 달려 줄게. 포토 마스크 수정되는 대로 바로 집어넣고.”
“걱정 마. 척척 대령할게.”
나운영 그룹장.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아. 미래에 내게 의리를 지켰다고 과거인 지금 이렇게 보답을 받잖아? 끝내 부장 진급 못 했던 거 내가 해결해 줄게.
- *
런은 그날부터 쉴 새 없이 흘러갔다. 라인에서는 연신 놀라움과 환호성이 줄을 이었다. 정말이지 안 될 것 같은 공정인데 불량 없이 척척 기어 나오니 놀랄 수밖에 없다.
“오! 유 팀장 그 사람 정말 천재 맞나 봐!”
“회장님도 무당이라고 부른다잖아.”
“나 그룹장님이 이 데이터 오픈하지 말라고 했어. 혼자 먹기로 하셨대.”
“정말? 승진 따 놓은 당상이네! 잘 보여야겠다.”
라인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자본, 기술, 인력.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의 3대 요소가 갖춰지는 소리기도 했다.
더 이상 준비 따위는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