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차세대 개발팀(2) (8/104)

잠시 딴생각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내 앞엔 9첩 반상이 차려졌다. 식탁 중간에는 볏짚 위에 살짝 쪄 낸 어른 손바닥 두 개는 될 법한 굴비가 몇 마리 놓여 있다.

여주인이 손수 보리굴비를 뜯어 세팅해 주는 것만으로 10만 원짜리 수표 몇 장이 팁으로 주어지고, 그에 대한 서비스로 인삼주가 통째로 식탁에 올라 술잔이 오간다.

“약주 한 잔 하세요, 회장님.”

“근무 시간에 뭔 술이누.”

“에이, 술이 아니라 약주예요. 반주로 딱 한 잔만 하세요.”

“뭐, 딱 한 잔이데이.”

이렇게 점심시간이 허투루 흘러갔다는 이유로 정 회장의 퇴근은 또 늦어지겠지. 저녁 8시쯤 자기는 퇴근하면서 내 사무실에 들러 열심히 일하라는 덕담도 해 주고. 그러면 내 퇴근은 좀 더 늦어지지.

회귀해서 안 좋은 점이 이거다. 지겨운 회사 생활이 너무 일찍 시작되었다는 것. 그것도 1980년대 근면 성실 야근이라는 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 있던 회사 생활 말이다.

‘아하… 빨리 가자. 빨리 가라, 시간아.’

나는 주문처럼 되뇌며 인삼주로 살짝 입가심을 했다.

회귀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술을 마셔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그게 소주가 아닌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사장님, 여기 보리굴비 세 마리랑 인삼주 한 병 포장 좀 해 주실 수 있죠?”

“집에 가서 드시게요?”

“네, 식구들 반찬에 올리게요. 아버지랑 반주도 같이하고….”

“아이고, 효자시네.”

“효자는 무슨. 오늘 밤까진 괜찮겠죠?”

“비닐로 잘 싸 드릴게. 말린 생선이라 상하지 않으니 안심하셔.”

회귀해서 더 좋은 점은 이렇게 비싸고 맛난 것을 거리낌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밤참으로 기숙사에서 라면을 끓여 먹던 인생 1회 차보다 훨씬 럭셔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아버지와 한 상에서 좋은 안주에 좋은 술 두어 잔 나누다 보면 편하게 잠들 수 있어 좋다.

이런 인생 2회 차를 내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둥, 일을 통해 국가에 공헌하고 있다는 둥 하는 현학적이자 범국가적인 개소리로 포장하고 싶진 않다.

사람에겐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실증 가능한 행복의 조건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나와 내 식구, 사무실에서 날 돕고 있는 인생들의 비루함부터 걷어 내는 것이 내가 귀족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으며, 미래를 봐 주고 보리굴비와 인삼주를 산다.

그렇기에 나는 무당도, 천재도, 심지어 효자도 아니다.

    • *

1989년 11월 30일.

“팀장님, 시간이….”

“잠시 기다려주세요.”

하루에 12시간 가까이 업무를 보고 틈나는 대로 특허를 쓰다 보니 시간이 정말 빨리 갔다. 내게 쉴 시간 따위는 없었다. K폰 사업도 챙겨야 하지만, 1989년에는 정말이지 반도체 업계에서는 신기술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올 때라 한시라도 빨리 특허를 제출해야만 했다.

기존 대비 훨씬 얇은 반도체 외형 특허, NAND 플래시, MP3 관련 특허 등등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벌써 특허 출원만 서른 건이 넘어갔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으냐고? 절반은 맞는 얘기지만, 발명자가 한국 직장인이라면 전혀 상관할 바 없는 일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직무 특허는 개인이 아니라 회사가 소유했고, 경쟁사에 로열티를 받는 무기로 쓴 게 아니라 경쟁사의 로열티 요구를 무력화시키는 방패로 썼을 뿐이니까.

미국처럼 로열티를 내지 않으면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 있는 나라라면 몰라도, 한국처럼 수출 지향적인 나라가 로열티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천 기술이 없는 탓이라고?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따위 소릴 한다.

애플이 MP3를 발매하면서 한국에 로열티 줬다는 말 들어 봤나? CDMA 통신 표준으로 채택된 대한민국 특허가 로열티 받았다는 소리 들어 봤나?

심지어 IBM에서 원천 특허를 수백억씩 주고 구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기업은 적극적인 특허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니 대한민국 회사가 발명자에게 특허료를 챙겨 주기는 어렵지.

결국 직무 발명이라는 이름하에 출원 보상금으로 10만 원 안짝의 돈만 주고, 실제 양산에 적용되어도 100만 원 정도의 보상이 전부였다. 사실 미국을 제외하고 여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특허료로 부자가 된 사람이 없는 이유이며, 시답잖은 특허로 로열티를 뜯어 가는 특허 전문 회사가 모두 미국에 있는 이유다.

그러니 내 특허는 열심히 엔지니어들을 갈아 넣어 제품 양산에 성공할 대현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며, 원래 역사에서 시장을 선점했어도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주기는커녕 매출의 수%를 로열티로 바쳐야 했던 흑역사를 지우는 용도일 뿐이다.

우두둑.

“우, 목이야.”

내가 목을 풀며 시답잖은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자니, 내 책상 앞에서 이 비서가 연신 쓴웃음을 지으며 날 쳐다보고 있다. 어윈이 공항에 도착하려면 불과 1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이러고 있으니까 그렇다. 김포공항을 오가려면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운전할 사람이 다름 아닌 이 비서거든.

“팀장님, 이제 그만 가시죠.”

“어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아까부터 계속 그 말씀만 하시고…. 지금 공항으로 출발하셔야 해요.”

“그럴까요?”

“그러셔야죠. 회장님 주관 회의가 2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늦으면… 어후.”

“으음, 늦으면 회장님께 혼나겠지요?”

“당연하죠. 아무리 막내아들이 귀여워도….”

“뭐라고요?”

“앗!”

이 비서도 나를 정 회장의 (숨겨진) 막내아들로 생각하고 있나 보다.

하긴 정 회장이 모르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기 애가 몇인가 하는 거다. 굳이 내 입으로 ‘난 혼외 자식이 아니야!’ 하고 소리치기도 뭐해서 한 번 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밀리다시피 차에 탔고 시동까지 켜져 있던 차는 쏜살처럼 빌딩을 빠져나갔다. 이 비서는 운전석 보조석에 ‘웰컴, 어윈 제이콥스!’라는 피켓도 마련해 두고 있었다. 확실히 이 양반은 경호원이 아니라 비서가 적성에 맞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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