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차세대 개발팀
대현그룹 본사의 자그마한 사무실.
차세대 개발팀
문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부서명 표지판이 달려 있었다. 기껏해야 40평 남짓한 사무실 안에 나와 이 비서를 비롯해 스무 명의 인원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통로를 제외하곤 책걸상, 컴퓨터, 프린터, 복사기 등이 즐비하고, 벽 쪽의 서가에는 온갖 전문 서적과 논문 잡지가 꽉 들어차 있어 흡사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다.
정영주 회장이 나를 위해 마련해 준 공간이다. 재택근무를 하려 했는데, 월급 받는 놈이 출퇴근 안 한다고 한 소리 하면서 말이다.
미국에서 돌아왔더니 어느새 사원증과 월급 통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왕 벌어진 일이라 나는 대현전자에서 기술 영역별로 우수 인력을 뽑아 올리고 팀을 꾸렸다. 내 직급이 대리라는 핑계로 팀원을 대리급 이상은 뽑지도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원래 역사보다 몇 년은 앞선 신규 휴대폰 개발이다. 모든 것이 기존 틀에서 벗어난 일이기에, 실패 경험이 많은 고참 엔지니어들과 함께 일하면 거부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팀장님, 이대로 사출 금형을 제작해도 되나요? 아직 내부 기판도 사이즈가 안 나왔는데.”
“K폰의 핵심은 외형 디자인에 있다고 누누이 말했잖아요. 외형에 내부 기판을 맞출 거니 그대로 진행해요. 그 목업(Mockup)에 표시한 고정핀 위치는 나중에 수정할 수 있게 스페어 모듈 몇 개 더 만들어 놔요.”
“알겠습니다.”
금형 담당 김근업 대리는 내가 목업을 안주머니에 넣어 보고 셔츠 윗주머니에 넣어 보고, 왼손 오른손으로 저글링하듯 휙휙 던져 보자 불안스레 쳐다보았다.
깨져도 상관없다. 목업은 실제 제품을 만들기 전에 디자인의 검토를 위해 손수 기계로 깎아 만든 모형이니까.
여하튼 모형에 불과하지만 내가 원했던 대로 제법 얇고 그립감도 그럭저럭 괜찮았기에 기분이 좋았다. 이 정도면 조만간 출시될 모토롤라의 벽돌폰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름도 코리아를 대표하는 폰이라는 의미에서 K폰이라 정했더니, 정 회장도 좋아라 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걸리버’라는 코믹한 이름을 달았을 것이다. 모바일 폰이 사치품이던 시절에 그따위 이름을 붙이다니 대현의 마케팅 능력은 정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사치품엔 세련된 이미지를 심어야 하는 거잖아.
여하튼 K폰의 핵심 기술은 기존 폰의 면적을 유지하면서 총 두께는 2센티미터로 줄이는 것에 있었다. 30년 뒤에 2센티짜리 휴대폰이면 방탄판이냐며 기겁하겠지만, 이때 기준으론 멋들어진 디자인이다. 지금은 배터리의 두께만 해도 최소 5밀리니 이게 최선이다.
김 대리가 외근을 나가니 송수신 모듈 담당인 송기주 대리가 내 자리로 후다닥 달려온다. 다 모아 놓고 회의를 해도 되겠지만 다른 엔지니어들의 시간을 뺏는 일이다. 사실 전체 일을 가늠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팀장님, 송수신 모듈과 스피커 사양을 수정했습니다. 최종 검토 좀….”
“사이즈는요?”
“송수신 모듈은 변함없고, 스피커 크기는 원형 2.5파이, 두께는 4밀리로 최종! 수정했습니다.”
“생각보다 큰데요? 더 못 줄이는 거 맞습니까?”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보다 더 작게 하면 말씀하신 1W 출력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0.8W로 줄이고 두께를 3밀리까지 맞춰야겠네요. 배터리 쪽에서 1밀리 두꺼워져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 그럼 걔들이 고쳐야….”
디자인 도면을 가져온 송 대리는 창 쪽에 앉아 있는 배터리 파트를 쳐다보곤 인상을 구긴다. 또 점심시간에 담배 뻑뻑 피워 대며 서로 한 따까리 하겠네.
“인상 피세요. 이번이 마지막 수정이고, 더 이상 안 바꿉니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로 돌아가는 송 대리다.
이해해라. 팀원끼리 손발을 맞추기 시작한 지 불과 보름이다. 그리고 신규 폰이라는 프로젝트도 사실상 급조된 것이잖나.
다행인 점은….
벌컥!
“뭐하누? 밥 무러 가야지.”
“오늘은 팀원들이랑 같이 식사할게요. 꼭 적어야 하는 특허가 있어서 말이에요.”
“쓰읍! 어른이 가자면 따라나서야지. 월급을 공으로 먹을라카누!”
“밥값 하는 거 안 보이세요? 특허는 생각날 때 적어야 하는 거라고요.”
쿵!
“내랑 밥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퍼뜩 안 나오누!”
“아, 예….”
문 앞에서 발을 구르며 소리치는 정 회장에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이것이 다행인 점이다.
정 회장이 내 사무실을 하루에 한두 번은 꼭 들른다는 사실은 내가 또 다른 혼외 자식이라는 소문의 증거로 포장되고 있다. 소심한 수준이지만 반항까지 해 보는 내 행동이 그런 소문에 더욱더 불을 지피고 있다.
자연스레 팀원들은 나를 단순한 대학생이자 초짜 대리가 아니라, 로열패밀리의 막내로서 경영 수업을 하고 있는 미래의 사장으로 보는 것이다. 최소한 팀 내에서만큼은 내 말이 곧 법이 되는 이유다.
- *
나는 털레털레 자리에서 일어나 정 회장을 따라나섰다.
하긴 그에게는 나와의 점심 식사가 중요한 일과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묵직한 서류 가방을 든 임원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잖나. 또 점괘가 어떤지 내게 물어볼 참인가 보다.
피곤하다. 나라고 옛날의 대현에서 벌어진 시시콜콜한 일을 다 기억할 리가 없잖은가.
“니, 뭐 묵고 싶누?”
“뭐, 메뉴는 언제나 회장님이 고르시잖아요.”
“니 메뉴가 늘 이상하니까 안 그러누. 그래, 오늘은 특별히 보리굴비 무러 가자.”
“좋아요. 가시죠.”
정해진 바나 다름없는 메뉴 선택권을 행사하고 나니 차가 스르륵 하며 앞으로 미끄러져 나타난다.
철컥 차문을 열어 주는 이 비서는 정말이지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다. 정 회장이 사 주는 점심은 정말 맛나거든. 하는 일이라곤 앞차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고, 별관에 따로 앉아 덩달아 임원급 대접을 받으면 기분 좋지.
부우웅!
점심 먹으러 가는 데 최소 30분, 길게는 1시간도 걸린다. 곤지암, 양평, 하남, 기흥, 이천 등등 대부분 온천 아니면 골프장 근처에 있는 맛집을 순방한다. 누가 회장의 차에 올라탔는지에 따라 음식점이 정해진다고 하겠다.
보리굴비집이라면 오늘은 기흥 쪽인 것 같고, 보아하니 30분짜리 회의인가 보다.
“그래? 오늘 재무팀에서 내 결재가 필요하다고?”
“예, 회장님. 대현건설에서 신규 은행 대출이 필요한데, 대출 금리가 내린다는 정보가 있어서 착공을 보름 정도 미루는 것이 어떤가 해서 말입니다.”
“보름씩이나? 최 상무! 그래 가꼬 공기(工期)를 맞추겄나?”
“현재 걸려 있는 게 기존 경험했던 플랜트 쪽이라 공기에는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
“니, 믄 소리 하누? 공사란 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는 경우가 있디가? 공기 하루만 지연돼도 나가는 돈이 수억이다. 모르나?”
“그래도 평균 대출 기간이 3년이나 됩니다. 0.5%만 금리가 내려도 수익성이 월등히 개선됩니다.”
나보고 들으라는 듯 정 회장이 그룹 재무 담당 최 상무와 큰 소리로 대화한다. 뒷자리 중간에 나를 앉혀 두고 말하니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다. 굳이 보조석이 비어 있는데도 꼭 나를 여기 앉힌다.
“에이, 꼬마 무당! 니 생각은 어뜻누?”
“저는 직급은 대리이며, 직책은 팀장입니다. 무당이 아니고요.”
“어따~ 마, 이누마는 꼭 말을 그리 시작해. 부장 시키 준다캐도 말도 안 듣고. 니 생각은 우옛나 말이다. 말해 봐라.”
“제 점괘는요.”
“점괘 말고 니 생각!”
꽁!
내가 사원증을 부채처럼 흔들며 반항을 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꿀밤이다.
“에이, 생각할 게 뭐가 있어요. 기다려야죠. 12월이면 금리 내릴 텐데. 최소 0.5%, 크게는 1%까지. 재무팀에서 그것도 분석 못 해요? 당연한 일을 소문이라고 보고하면 어떡합니까?”
“어, 유 팀장. 어찌 그리 확신….”
“니 무슨 근거로 그라누? 어이?”
정 회장은 언젠가부터 내 의견을 물을 때 근거를 따로 묻는다. 그의 의도는 알 것 같다. 나를 이용해서 옆에 앉은 임원을 교육시키는 거다.
이렇게 차에 태우는 임원들은 그룹에서 특별 관리하는 인원들이다. 충성스럽고, 머리도 좋고. 속칭 가신(家臣)들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내가 추론하는 방식을 익히게 만들고 싶은 거다. 특히나 최 상무는 대현의 비서실장이나 다름없는 최측근이다.
“에휴! 너무나도 당연하죠. 지금 미국이 주도한 플라자 협의가 서서히 빛을 보고 있잖아요. 미소 데탕트로 정치 분위기도 좋고. 내년부터 월가 애들이 크게 한 방 당길 때잖아요. 걔들이라고 돈이 넘쳐 나갔어요? 월가 애들의 정계 로비는 벌써 끝났을 거고, 12월에 들어서자마자 금리 내리면 은행들에 크게 한 방 빌려서 타국 주식시장을 휘젓고 다닐 요량인데. 그럼 어찌 되겠어요? 우리나라도 금리 내려야지.”
“뭐라꼬?”
“어… 그러고 보니 요즘 일본 주식시장과 홍콩 주식시장이 과열 양상이긴 합니다.”
재무팀 상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뒤적거리더니 그래프를 회장에게 보여 준다.
수출 주도형 경제를 가진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국 놈들이야 신경도 안 쓰지만.
“홍콩 주식이야 영국 애들이 뒷배니까 적당한 타이밍에 큰손들이 빠질 거고 일본 애들은 뭐, 우짤란가 모르죠. 여하튼 이런 와중에 자국 통화 가치 급등을 막겠다고 금리 올리면 완전히 미친놈 되는 겁니다. 대한민국 경제 관료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에요. 미국 애들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것을 모르진 않으니까. 양놈들은 아직 우릴 신경도 안 쓰거든요.”
“으이? 그라므 지금이 기회 아이가? 우리도 바짝 땡기가 일본 주식시장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가?”
정 회장의 촉수는 참으로 대단하긴 대단하다. 내 말에 일본 주식시장이 과열되고 결국 거품이 빠질 것을 예상하고 있다. 물론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이라 칭할 정도로 그 낙폭이 사상 최대일 것은 짐작도 못 하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알려 줘서는 안 된다. 정 회장이 그 판에서 욕심부리면 내가 그린 큰 그림이 엉망이 된다.
“회장님, 제발 정치랑 돈놀이는 하지 마세요. 대현은 그런 측면에선 젬병이라니까요. 지금 들어가면 주식 사지도 못하고 제때 팔지도 못해요. 금종이 사서 똥종이로 판다니까요.”
“뭔 소리 하누? 미국 애들 한탕 할 게 분명하면 주식 공매도 하면 될 거 아이가?”
“일본 애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우리보다 주식시장 경험이 몇 배라고요. 외국인이 공매도 한다고요? 지금에 와서 일본에 자회사를 세우고 공매도 가능한 자본금 채우려면 6개월은 후딱 가요. 그리고 공매도 주식 인도받으려면 최소 1년 보유하는 조건으로 계약할 텐데요? 그때 되면 그냥 개털 되는 겁니다.”
“회장님, 유 팀장 말이 맞습니다. 이게 미국이 퍼붓는 막바지 마중물이면 지금 들어가면 상투 잡는 꼴입니다.”
“으음…. 니 쫌 더 일찍 오지 뭐하고 있었누!”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럼 전 중학생이에요.”
“…….”
회장은 내가 빨리 합류하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어쩌라고. 난 한 달 전에 회귀한 사람이다. 여기서 또 죽으라고? 또 회귀할 확률이 지극히 낮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너무 지겹다.
나는 얼른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입니다. 빨리 귀족이 돼서 30대를 즐기고 싶다고요.
“적당히 타이밍만 맞는다면 한국에선 최대 수혜자가 신성그룹이 되겠군요. 흘려 줄까요, 회장님?”
재무팀 최 상무가 꽤나 적당한 질문을 해 왔다. 이때 신성그룹은 신성물산의 자회사를 일본에 두고 있었다.
원래대로 내버려 둬도 신성은 신성물산이 보유한 일본 주식을 꽤나 적당한 타이밍에 던지고 빠져나온다.
신성 회장직을 물려받은 이희건 회장이 1990년대 전반에 걸쳐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다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 미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반도체 무역 전쟁을 펼치기 시작하는 정황을 포착하고 사운(社運)을 걸었지. 정말이지 머리도 좋고 운은 더더욱 좋은 사람이다.
물론 운은 정 회장이 더 좋다. 나를 만났으니까.
“으음, 됐다. 전경련에서 보면 내가 슬쩍 알리 주지, 뭐.”
“아, 예. 그러시는 게 좋겠군요.”
“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무당이 금종이 사서 똥종이 판다 안카누? 어이?”
“아, 예. 이를 말씀이십니까.”
정 회장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말로 충성 시험을 병행한다. 개인적으로라도 주식 노름을 하면 눈 밖에 날 거라는 뜻이다.
백이면 백, 이런 사람은 보안에 철저하다. 가신들의 목적은 오로지 승진하는 데 있다. 승진하면 돈이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믿음은 이들에겐 종교나 다름없다.
“무당아, 니는 해도 된다. 니는 똑똑하다 아니가.”
“안 합니다. 돈도 없고요.”
“뭔 소리누? 니 내가 준 돈 벌써 다 썼누?”
“다 쓰긴요. 나중에 출장 가서 써야 해요.”
“니, 자꾸 외국에서 돈 쓸기라? 이번에 자그마치 3만 불 넘게 썼드마. 그거 다 외화인 거 모르누?”
“쩝! 그거 남는 장사라니까요. 두고 보세요.”
“어이구, 그래서 가져온 기 5천만 불짜리 계약이누? 소련에 투자한다캐사코 양놈은 또 왜 데려오누?”
“에이, 그 정도 프로젝트를 서로 붙여 줘야 그 양반이 다급해지죠. 퀄컴은 그만한 가치를 한다고요.”
“그래서 그 연극에 나까지 끌어들인다 하는기루?”
“연극이 아니고요, 매우 심각한 회의입니다.”
“야들이 좋아라 하것다. 아! 최 상무, 니 이 얘기 다른 데 하면 안 된데이.”
“아, 예. 물론입니다.”
어쩌다 보니 얘기가 퀄컴 건까지 흘러갔고, 최 상무는 영문을 모르는 일임에도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윈이 한국에 온다는 것과 한소 경협 건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시키는 것은 나와 정 회장만 아는 일이다.
어윈이 입국하겠다고 한 날짜는 11월 30일. 소련 영사관이 대한민국에 개관하는 다음 날이다. 어윈은 끝까지 정보의 신빙성을 검토했나 보다.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제대로 성공만 하면 대현은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난 반도체 초호황과 더불어 CDMA 피처폰이라는 초대박 아이템을 선점하게 될 거다. 우우, 살 떨려.
- *
식당 앞에 도착하자 여주인이 손수 나와서 차 문을 열어 줬다.
벌컥!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아이고, 잘 지냈누? 오늘 보리굴비는 제일 실한 놈으로 골라서 줘야 덴데이. 이누마 잘 먹여서 열심히 일 시켜야 한다 아이루.”
“아유, 이를 말씀이세요. 큼직한 놈으로 준비해 놨으니 안으로 드세요.”
“으이, 그래. 내 이래서 맨날 여기 오느기라.”
“더 자주 들르세요.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