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첫 번째 비즈니스
“무당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러세요, 칼잡이 아저씨.”
칼잡이라 불린 사내는 엄연히 이태훈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깨끗이 무시해 줬다. 나한테 선생님, 수한 님, 학생님 등등 온갖 호칭을 시도해 보더니 결국 무당님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나도 칼잡이로 호칭을 정했다.
칼잡이는 공항 쪽 게이트를 통과하는데도 자신이 먼저 나서겠단다. 해외 출장이 처음인 것이 분명하다. 비행기 타는 걸 무척 위험한 일로 여기는 모습이다.
“휴우,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이제 비행기만 타면 되겠습니다. 게이트가….”
“뉴욕은 1번 게이트예요.”
“아, 그렇죠! 이쪽으로….”
“일단 쇼핑부터 해요. 이 꼴로 가면 좀 그러니까.”
“예?”
“따라와요.”
나는 칼잡이를 데리고 면세점 안쪽으로 쑥 들어갔다. 1989년이긴 하지만 공항 면세점에서 백화점 못지않은 쇼핑이 가능하다.
구두부터 시작해 양복과 넥타이까지 각자 150만 원이나 되는 돈을 지출했다. 먹지도 못하는 것에 돈을 쓰는 게 아깝지만 백화점보다 싸니까 만족하자.
특히 시계는 비싼 티가 철철 넘치는 것으로 500만 원이나 주고 구매했다. 천박한 금색이 아니라 백금으로 마무리한 명품이다.
나중에 중고 시장에 내놓으면 되지 하며 돈을 썼다. 졸부 행세를 하긴 싫지만 이번 출장엔 잠시 필요하다.
“우우… 제가 이런 옷을 입어도 되나요?”
“대현전자 차세대 개발팀장 비서잖아요. 이 정도는 입어 줘야죠.”
“예? 누가 팀장이고, 누가 비서죠?”
이 양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이게 뭐 비밀 첩보 영화라도 돼? 내가 당신 비서 노릇 하리? 이래 봬도 타고난 노안이야. 고등학생처럼 안 보인다고!
“당연히 내가 팀장이고, 당신이 비서죠!”
“예? 무당님이 팀장님이에요? 그럼 부장님이 되신 겁니까? 허억!”
“그냥 팀장님이라고 불러요.”
“아, 옙! 팀장님.”
내가 훅 하고 말을 날리니 자세를 척 하고 바로 잡는 칼잡이다.
“잘했어요, 이 비서.”
“제가 옆에 설까요?”
“그래요, 가죠.”
정중하게 옆에 자리한 이태훈 비서가 내 가방을 들고 따라왔다. 뽑고 보니 꽤나 쾌활하고 조심성도 있는 것 같다. 적응력도 괜찮다. 무당이란 호칭을 단박에 팀장으로 바꾸고, 이 비서라고 부르니 당장 비서처럼 행동하잖은가.
이 비서에겐 검은 정장을, 나는 콤비 스타일로 밝은 하늘색 재킷에 감색 바지와 감색 구두를 착용했다. 이 정도면 얼뜨기 아시안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넥타이에 금색 핀을 꽂는 촌뜨기 패션 따윈 하지 않았다.
휘이이이이잉. 카캉!
“허허헉!”
“안전벨트 해요.”
“허허헉! 뜬다! 뜬다!”
“윽, 조용히 좀 해요, 이 비서.”
제트 엔진이 발진하자 누군가 뒤통수를 확 잡아당기는 느낌이다. 비행기를 처음 타면 제일 놀라는 일 중 하나지.
하나 인생 1회 차에 수많은 출장을 겪어 봤던 나는 또다시 지겨운 비행이 시작됐군 하는 느낌뿐이다.
서울에서 뉴욕까진 15시간 가까이 걸린다. 정말 지겹지만 그래도 가야지.
1989년에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꽤나 성공한 사람이라는 증거처럼 여겨졌다. 돈도 돈이지만 해외여행 자체가 그리 자유롭지 않은 시기였으니까. 정 회장이 직접 챙겨 주지 않았다면 사흘 만에 여권과 미국 비자를 얻어 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 *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항공 기장…. 현재 뉴욕은 맑고 청명한 날씨에 기온은 섭씨 5도입니다. 모쪼록 승객 여러분을 다시 뵙길 바라며, 즐거운 여행 하시길 바랍니다.”
기내 방송으로 흐릿한 잠에서 깨어난 나는 드디어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옆에서 연신 창밖을 내다보느라 정신없는 이 비서를 보니 새삼 외국에 왔구나 싶다.
비행기에서 내려 렌터카 업체부터 찾아 들어갔다. 렌터카 업체는 대현그룹과 계약되어 있었기에 서류를 제출하는 것만으로도 추가적인 보험 처리도 필요 없이 차를 빌릴 수 있다.
경비를 아끼려고 한 건지 렌터카 업체는 매장도 제일 작고 찾기도 힘든 곳에 위치해 있었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서류를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있는 백인 놈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코리아? 크크크. 오! 꼴에 VIP로 되어 있네. 헤이, 차 몰 줄은 알아? 차량은 이 번호대로 차고에서 찾으면 되고 기름은 채울 필요 없어. 헌데 GPS는 쓸 줄 알아? 케헤, GPS라는 말부터 설명해 줄까?”
“닥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차 키나 가져와.”
허접한 백인 새끼가 대뜸 혀를 미친 듯이 굴려 가며 조롱한다. 영어를 못한다고 단정하고 있음이다. 1980~1990년대에 미국 출장 가면 누구나 한 번씩 당하는 일이다.
입국 심사관이 비즈니스 목적으로 입국한다는 나를 두고 조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참는다 해도 이따위 놈에게까지 인종차별 당하고 싶지는 않다.
“What? 너 내 말 알아들어?”
“닥치라고 했지. 매니저 불러. 이 회사는 직원 교육을 어찌 시키는 거야.”
나는 ‘Shut up!’을 반복하며 차분하게 매니저를 찾았다.
“헤이, 이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너하고 말하고 싶지 않아. 닥치고! 매니저부터! 불러!”
“아, 진정해. 진정하라고.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
“고객인 내가 참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미안하면 차 키부터 내놔.”
“미안해. 여깄어. 가져가.”
“뭐해, 날 따라와야지! 차 흠집 있는지 확인해야 하잖아!”
“어, 그래…. 알았어.”
인종차별을 당할 때 가만있으면 정말 병신 되는 거다. 유창한 영어도 필요 없이 큰 목소리로 또록또록하게 매니저 부르라고 하면 단숨에 제압된다. 그러면 유태인 매니저가 나오고,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어 온 그들은 겉으로나마 인종차별이라면 길길이 날뛰거든.
자식이 졸았는지 내줄 수 있는 차에서 가장 좋은 차를 건네줬다. 중소형 쿠페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중형 벤츠를 가져왔다.
렌터카 서류에 꼼꼼하게 위치별 차량 흠집을 기입하고 일일이 확인시켰다. 서류에 서명을 하더니 후다닥 사라져 버린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 비서가 내 일 처리를 보고 감탄했다.
이런 일은 비서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누가 비서고 누가 팀장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차 키를 휙 그에게 던졌다.
“운전할 줄 알죠, 이 비서?”
“아, 예. 당연하죠. 맡겨 주십시오.”
“이런 일이 있으면 훅 하고 나서요. 이제 나와 눈치껏 손뼉을 맞춰야 해요.”
“예, 알겠습니다.”
철컥! 부르릉.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척 하고 고개를 숙인 이 비서가 휘익 돌아서 내게 차문을 열어 주고는 운전석에 자리하며 삽시간에 시동을 걸었다.
렌터카 차고를 빠져나가다 우뚝 서 버린다.
“근데… 어디로 가죠? 호텔로 가는 길을 모르는데.”
“호텔은 무슨. 일정표 확인 안 했었어요? 제이콥 컨벤션센터로 가요. 컨퍼런스를 거기서 하잖아요.”
“아, 그랬죠. 그런데 거긴 또 어떻게 가죠?”
“GPS를 써 봐요. 원래는 주소를 입력해야 하지만 제이콥 컨벤션센터 정도면 이름으로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아, 예.”
내가 차에 달려 있는 무전기처럼 생긴 놈을 가리키자 이 비서가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 본다. 영어를 곧잘 하니 메뉴판을 읽는 데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일반화되는 것은 한참 뒤지만, 미국에선 이때부터 초창기 내비게이션이 상용화되고 있었다.
애기 손바닥 크기의 녹색 액정 화면에 줄을 쭉쭉 그어 놓은 수준에 불과하지만 지도를 보는 것보단 훨씬 낫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Turn Right, Turn Left’ 정도만 알아들어도 웬만큼 길을 찾아갈 수 있거든.
GPS는 크게 보면 무선 통신의 일종이다. 즉, 미국은 이때부터 벌써 개인용 무선 통신의 활용도에 대해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상태였다.
미국에선 모토롤라가 벌써 초창기 휴대폰 시장을 열었고, 불과 서너 달 뒤에는 마이크로택(MicroTAC)이라는 350g짜리 휴대폰을 내놓으며 대박을 친다. 그 판에 대현도 끼어들어야 해. 이 기회를 놓치면 북미 시장에 진입하기까지 몇 년은 기다려야 할 거야.
잠시 생각을 하고 있자니 GPS에서 ‘Go Straight!’ 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온다. 액정 화면엔 서쪽을 향해 직선이 쭉 그어졌다. 그 선이 닿는 곳에 퀄컴이라는 사냥감이 있다.
“됐죠? 이 녀석이 시키는 대로 가면 돼요.”
“이야! 신기하네요.”
이 비서는 열악한 1980년대 서울 도로에서 운전을 해서 그런지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능숙하게 하이웨이를 거쳐 뉴욕 시내를 찾아 들어갔다.
30년 뒤의 대한민국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외려 도로 사정이 허접해 보였지만, 이 비서는 연신 길에 기름 발라 놓은 거 같다며 신나 했다. 1시간도 안 돼서 허드슨 강이 눈앞에 펼쳐진 컨벤션센터로 들어섰다.
개장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곳답게 번쩍번쩍하다. 미국답게 주차장은 여의도 광장 못지않게 크다. 10년쯤 지나면 이곳도 교통지옥이 되지만 아직까진 괜찮다.
「Global Electrical and Electronic Technology Conference」
빌딩 앞에는 큰 현수막과 더불어 안내판이 사방에 깔려 있다. 이 컨퍼런스는 미국전기공학자협회 주관으로 해마다 열리는 학회다. 실리콘 밸리가 훅 하고 커져 버리는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샌프란시스코로 개최지를 옮기지만 아직까진 뉴욕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는 엄청난 해지. 인터넷의 기본 개념인 ‘World Wide Web’에 대한 기술과 휴대폰의 CDMA 기술이 이 컨퍼런스에서 오픈되었거든.
파급력이 컸던 것은 인터넷 기술이다. 팀 버너스리라는 영국인이 대형 권력과 자본에 맞서 차별 없는 정보의 나눔이 필요하다며, 인터넷 기술을 특허 등록 없이 공개해 버린 것이다. 그 대인배 덕분에 인터넷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된다.
물론 인터넷 태동기라 대부분의 공학자들은 인터넷의 파급력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주목했을 뿐이다. 설익은 감자이기에 나 또한 섣불리 건드릴 생각은 없다.
그에 반해 퀄컴의 CDMA 기술은 아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인터넷과 달리 기술 자체로는 거의 완성형에 가까웠지만 모토롤라의 TDMA 방식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였다.
내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 나는 그 틈새를 이용해 초대박 계약을 해 볼 생각이다.
내가 사람들을 끌어들여 자체 기술 개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시장에 진입하기까지 시간도 촉박하고 무엇보다 나는 미국인이 아니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기술에 인종차별이 어딨냐고? 누가 만들든 잘만 만들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칠 수 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대한민국에서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봐라. 안 쓴다. 외려 미국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아이디어만 제공할 뿐이다.
그럼 특허 소송을 하라고? 100% 진다. 아시아 한쪽 귀퉁이에 있는 나라에서 그런 기술 있었다고 한다면 배심원들은 콧방귀만 뀔 뿐이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아시안은 1990년대까진 일본인밖에 없었다.
“팀장님, 여길 방문하시겠다고요?”
“등록만 하면 세미나도 참석할 수 있어요. 우린 대현전자 사람이잖아요. 같은 업계라고요.”
“아! 그렇군요. 헌데 팀장님도 처음일 것 같은데 어찌 그리 잘 아시나요?”
“책 좀 읽으면 됩니다.”
이 비서는 책 읽으라는 내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하는 행동이 책에 나온다고 곧이곧대로 믿다니 순진하다.
하긴 너무 자연스럽긴 하지. 난 전생에 이런 컨퍼런스에 수십 번이나 들락거렸으니까. 여하튼 내 행동 때문인지 어느새 그의 입에선 팀장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빌딩 안으로 들어서니 프런트에서 백인 할머니가 컨퍼런스 등록을 도와주고 있다.
“헬로, 여기서 컨퍼런스 등록을 하면 되나요?”
“네, 그렇습니다. 어느 세션에 참석하실 거죠?”
“전시회랑 통신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합니다만.”
“아! 그럼 서류를 작성하시고, 여기에 체크하시면 됩니다. 등록비는 75달러네요.”
내가 인사를 하고 능숙하게 영어를 해 대니 친절하게 대답을 해 준다.
이런 곳에서 영어를 할 땐 문법에 맞지 않아도 상관없다. 큰 소리로 단어를 늘어놓기만 해도 충분하다. 내가 돈을 지불하는 갑이거든. 미국은 돈을 주고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게는 매우 관대하다.
“미스터 유, 미스터 리. 대현 일렉트로닉스! 우리 컨퍼런스에 처음이시군요.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좋네요. 처음 참석했으니 기부를 좀 하고 싶네요. 파티에 써 주세요.”
“오! 미스터 유, 감사합니다.”
나는 등록을 마치고 명찰을 받으며 수표책부터 꺼내 들었다. 협회에 기부한다는 명목으로 만 달러짜리 수표를 작성하고 현찰로 10달러를 얹어 백인 할머니에게 건네주었다.
명목상으론 도와줘서 고맙다는 팁이지만 속내는 세미나 후에 열리는 파티에서 좋은 자리에 배치해 달라는 일종의 뇌물이다.
능숙한 비즈니스맨의 행동이 배어 나오자 백인 할머니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10달러나 팁으로 받았으니 대박이지. 이 당시에 10달러면 그녀 일당을 20% 정도는 키워 준 격이다.
아무리 아시안이라고 해도 협회에 만 달러를 기부했으니 앞자리에 배치해도 문제없을 것이란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미스터 유, 파티는 오늘 저녁 7시에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프런트 할머니가 내 명찰에 기부자를 표시하는 금색 스티커를 붙여 주고, 컨퍼런스 웰컴 파티에 명패를 가져다 놓겠다며 내 명함을 한 장 가져갔다. 누가 나올지 기대가 된다.
뚜벅뚜벅.
“팀장님, 돈을 그렇게 써도 되나요? 나중에 회사로 들어가면 외환법 위반으로….”
프런트를 빠져나오자 대뜸 이 비서가 난감한 표정으로 묻는다.
“걱정 마세요. 여기 영수증 있잖아요. 난 개인에게 돈을 준 게 아니고 협회에 준 거에요. 이런 건 경비 처리가 돼요. 그리고 이 수표책은 회장님이 직접 주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역시 팀장님!”
이 비서 이 양반, 꽤나 조언을 할 줄 안다. 이때는 외국에서 함부로 돈을 쓰면 입국할 때 잡혀 가거든. 내가 괜찮다고 하니 엄지 척을 하며 뒤로 훅 하고 물러난다.
컨퍼런스에서 제공하는 머핀 하나와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고 세미나를 듣다 보니 반나절이 휘리릭 사라졌다.
혹시나 싶어 세미나를 몇 시간이나 듣고 있었지만,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발표자로 나오지도 않았다. 역시 본격적인 작전은 파티를 노려야 한다.
웰컴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전시회장으로 들어갔다. 참여 회사의 배치도를 꼼꼼히 살피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안 올 리가 없지. 지금 투자 자금이 바닥나서 망하기 직전이거든.
「퀄컴(Qualcomm)」
작은 부스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나는 전시회장에서 퀄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덩치 좋은 백인이 멀뚱히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는 싱긋 웃어 주며 가까이 갔다.
‘심심한 참인데 뭐 재미있는 거 있나요?’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코리아의 대현전자에서 왔습니다. 이 회사는 어떤 곳인가요?”
“코리아? 대현전자?”
“88올림픽!”
“아! 일본 옆에….”
“일본 옆이 아니라 텍사스 옆에 있죠. 한국은 일본보다 미국에 더 가깝거든요.”
“하하하! 텍사스 옆!”
껄껄 웃어 주는 백인과 명함을 주고받았고 악수를 하면서 손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백인과 얘기할 때는 절대 밀리면 안 된다. 겉으론 매우 신사답게 행동하지만 분명 눈 아래로 보거든. 농담도 거침없이 건네야 하고, 손도 두드려 주며 누가 갑인지 분명히 해 줘야 한다. 게다가 얼굴만 봐서는 동양인의 나이를 도통 가늠하지 못하니 내가 꿀릴 것도 없다. 심지어 영어는 높임말 따위도 없잖은가.
“난 대현전자의 유수한이라고 합니다.”
“난 퀄컴 사장 어윈 제이콥스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내가 받은 명함엔 ‘어윈 제이콥스’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찍혀 있었다. 몇 년 뒤 우리나라에서 대박 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먼저 1990년대 CDMA PCS 폰이 대규모로 상용화되면서 퀄컴의 칩셋은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다.
그렇다고 이 양반이 우리나라에 은혜를 갚았냐? 웬걸,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공동 개발이며 상용화 기술 등등 온갖 도움을 줬음에도 타국 대비 로열티를 더 높은 비율로 가져갔다. 은혜도 모르는 시끼!
“허! 그런데 대현전자라니 뭐 하는 회사죠?”
“훗! 대현자동차 알아요?”
“오오, 대현모터스.”
“같은 그룹의 반도체 회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반도체(Semiconductor)!”
어윈은 반도체 회사라는 소리를 듣고 눈이 둥그레졌다. 기본적으로 퀄컴은 반도체 설계 회사다. 지금 실현시켜 보려고 하는 통신용 칩셋을 그 어떤 반도체 회사도 채용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그래서 말인데, 당신 회사도 반도체 회사인가요? 저기 그림은 반도체 칩 같은데?”
나는 모르는 척 벽에 걸린 프레젠테이션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요! 정확히는 통신용 칩입니다. 기존의 잡음 신호를 완벽히 제거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 내장되어 있지요.”
“으잉? 통신용 칩셋인가요? 어후! 모토롤라와 경쟁이 안 되잖아요. 잘 들었어요.”
“자, 잠깐만!”
나는 모토롤라를 언급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랬더니 어원이 대뜸 내 손을 턱 잡았다.
덩치 큰 백인이 손목을 잡으니 내가 휘청거렸고, 이 비서가 척 하니 얼굴을 어윈에게 들이밀었다.
“헤이, 우리 팀장님(Team Owner)께 뭐하는 거야? 손 못 놔?”
“어… 쏘리 쏘리. 내 말이 다 끝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손 놔!”
“아, 쏘리 쏘리. 정말 미안합니다.”
이 비서가 찌릿한 눈빛으로 대응해 주니 어윈이 바짝 얼어붙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 교육시킨 보람이 있다.
어때, 어윈? 왠지 내가 아시아에서 온 귀족 같지? 날카롭게 생긴 보디가드도 옆에 달고 다니고 말이야.
“당신이 팀 매니저인가요?”
“명함에 시니어 매니저라고 적혀 있잖아요. 그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비서가 내 호칭을 팀장이라는 뜻으로 Team owner라는 이상한 단어를 쓴 데다 내 명찰에 붙어 있는 금색 스티커를 발견하고는 어윈의 표정과 행동이 한층 공손해졌다. 어윈은 훅 하고 내게 빠져든다. 만 불짜리 배지가 빛을 발한다.
“우리 회사 기술을 소개할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20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뇨, 필요 없어요. 난 메모리 쪽 사업을 맡고 있어서 통신용 칩셋은 내 영역이 아닙니다.”
“아!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들어만 주세요.”
“정 그렇다면 어디 한번 해 봐요. 10분입니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며 털썩하고 의자에 앉았다.
“우리가 가진 기술은 코드다중분할(CDMA) 기술이라고 합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모토롤라가 주도하고 있는 인공위성 기반의 통신 기술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그리고….”
어윈의 발표는 10분이 동안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전문적인 통신 기술 단어를 써 대니 옆에 앉은 이 비서는 머리가 깨질 듯한지 눈을 찔끔 감고 고개를 의자 뒤로 젖혀 버렸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어윈은 이때 벌써 기존의 통신 방식인 주파수분할다중접속(FDMA) 및 시간분할다중 접속(TDMA)은 다수의 소비자를 감당하는 데 무리가 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용 무선 통신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음… CDMA는 좋은 기술로 보이긴 하는데, 모토롤라의 통신 규격과 전혀 다른데요? 게다가 미 국방성이 제시한 인공위성 국제 통신 규격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잖아요. 그래도 돼요?”
나는 딴죽을 걸어야만 했다. 이대로 고개를 끄덕이면 딜이 안 되잖아.
그렇다고 아예 파투를 낼 수도 없다. 내버려 두면 대한민국의 SJ를 비롯한 유수 업체들이 뒷생각 별로 안 하고 퀄컴을 파트너로 끌어들이거든.
“TDMA와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이 대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원천적으로 잡음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고요. CDMA 방식으로 기지국을 세우는 게 답입니다. 솔루션이라고요.”
“그걸 누가 믿어요? 칩셋을 개발하는 데만 수십만 달러가 쓰일 거고, 기지국을 세우면 수백만 불이 추가될 텐데 그걸 누가 해요? 아! CDMA형 단말기를 만드는 것도 문제네. 수백 불짜리 폰을 샀는데 기지국 주변에서만 전화가 된다고 하면 누가 써요?”
“그러니까 충분히 기지국을 세워야죠.”
“아무리 대현전자가 투자에 나선다고 해도 1억 불이 전부예요. 감당 못한다고요. 기지국에 투자하느니 통신 위성 한 대 빌리면 충분하단 말입니다.”
내가 1억 불을 언급하자 어윈은 순간 표정을 달리했다. 이때의 1억 달러는 미국인이 들어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1989년에 재산이 50억 불 정도면 세계 10대 부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말실수처럼 1억 달러라는 미끼를 던졌더니 어윈이 훅 하고 물었다.
“통신 위성을 한 대 띄울 비용이면 기지국 수백 곳을 세울 수 있습니다.”
“누가 직접 띄운답니까? 미국이 벌써 띄워 놨잖아요? 우리 같은 통신 사업자는 그냥 사용비만 내면 되는데?”
나는 아예 통신 사업자처럼 행세했다. 구라를 치는 데 한계 따윈 없다. 논리만 있으면 되는 거다.
“통신에 혼선이 생긴다니까요. 처리 용량이 따라가질 못합니다.”
“정말? 해 봤어요? 그리고 무선 통신을 수백만 명이 동시에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머지않아 수백만 명이 폰을 들고 다니며 통신하게 될 겁니다. 그리될 거라고요.”
“응? 그래요?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잘 들었어요.”
“이봐요! 미스터 유!”
“잘 들었다고요.”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이봐, 미스터 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스를 빠져나왔다. 미끼를 물었다고 바로 낚아채 버리면 물고기가 바늘을 털어 버리거나 바위틈에 훅 들어가 버린다. 제대로 낚으려면 목구멍 너머로 바늘째 삼켜 버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퀄컴은 지금 벤처 기업에 불과하다. 퀄컴은 우리나라에서 CDMA 기술 협업이 공식화되는 1991년에야 나스닥에 상장하고 대박을 터뜨린다. 앞으로 1년 정도는 기회가 있다.
도박이긴 하지만 내가 굽히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어윈이 자의적으로 내게 다가오도록 해야 한다. 그는 내 명찰을 봤으니 파티에 무조건 참석하게 되어 있다.
- *
“팀장님, 이거 분위기가 영 적응이 안 됩니다. 제가 있어도 되는 자립니까?”
“왜요? 와인 맛있잖아요.”
“아, 테이블 또 치웠네요. 아깝게시리.”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요. 미국 놈들 돈이 넘치니까 이러는 겁니다.”
와인 한 잔 하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먹다 남은 음료수잔, 스낵, 케이크 접시들을 테이블보 통째로 쓰레기통에 담아 치워 버렸다.
음식이야 그렇다손 쳐도 쓸 만한 식기들도 쓰레기 취급해 버리는 문화에 이 비서는 울분마저 느끼는 모양이다. 자본주의 200년, 소비는 미국을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이다. 얘들의 돈을 우리가 왕창 가져가도 되는 이유다. 웬만큼 가져가선 티조차 안 나거든.
웅성웅성.
컨퍼런스 주관자가 각 세미나 세션의 우수 발표자들을 무대로 불러 질의응답, 자유롭게 토론이 이어진다. 그러는 와중에도 엔지니어들이 흰 테이블보가 연신 교체되는 탁자에 모여 앉아 각자의 주제로 토론이 한창이다.
겉으로 보면 창의적인 토론 문화라 하겠지만, 속으론 모두 눈치를 보고 있는 거다. 이런 컨퍼런스는 자신을 어필해서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어떨 땐 상대방 기술을 슬쩍 엿볼 수도 있고, 리베이트가 오가거나 기술 투자가 성사되기도 한다.
“어쨌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물론이죠. 아! 저기 온다. 시작해 볼까요?”
나는 파티 입구에서 퀄컴 사장 어윈이 두리번거리며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와인잔을 들고 한참 전에 명함을 교환했던 모토롤라 엔지니어에게 다가갔다.
“이번 저희 회사의 기술은 차세대 모바일의 혁신을 가져올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단말기 하나만 들고 있으면 인공위성을 통해 세계 어디로든 국제 전화를 맘껏 할 수 있다고요!”
모토롤라 엔지니어는 여러 명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이 했던 발표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이때의 모토롤라는 한창 주가를 날리고 있었지.
“아, 실례해요. 아까 말씀 나눈 대현전자의 유수한입니다. 대화에 껴도 될까요?”
“아, 미스터 유.”
금빛 배지를 달고 있는 내가 쑥 끼어드니 자리 하나가 생긴다. 역시 돈이 좋아.
“방금 발표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본사에 연락해 봤더니 기술적으로 아주 매력이 있다더군요. 모토롤라도 국제협력팀이 있죠? 코리아엔 언제 들어오십니까?”
“으음, 코리아? 글쎄요. 저는 아직 듣질 못했네요.”
“그래요? 의외네요. 코리아에선 정부 차원에서 무선 통신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모토롤라가 빠지다니…. 으흠.”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모토롤라 엔지니어는 ‘아!’ 하고 가식적인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들어 본 것 같네요. 코리아!”
땡큐, 그 정도 립 서비스면 충분해.
“맞아요. 정부 차원에서 기간망을 구축하고 저희 대현전자가 단말기를 개발 중이죠. 모토롤라는 저희로선 첫 번째 고려 대상이죠. 업계 표준 아닙니까.”
“하하하! 업계 표준이라. 당연하죠! 저희 TDMA기술은 완벽한 솔루션이니까요. 곧 미국에서 표준이 될 테니 그대로 따라 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제가 그 개발자입니다.”
“오호, 그러시군요.”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 양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내용은 들어 뭐하나. 노린 것은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모토롤라라는 글씨가 선명한 명찰이며, 퀄컴의 어윈이 그걸 보고 다급해지길 바랄 뿐이다.
내가 무대 앞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있으니 자연스레 어윈이 근처로 다가왔다. 모토롤라 녀석이 하도 떠들어 댔음인지 어윈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때 이 비서가 쑥 하고 가로지르며 등으로 어윈을 막아선다. 깍듯하게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팀장님, 여기 팩스가 도착했습니다.”
“으음, 팩스가 벌써 왔어요?”
“네, 긴급 요청하셨잖아요.”
“……?”
내가 아무렇게나 휘갈겨 팩스지로 옮긴 것에 불과한 종이를 건네받자 모토롤라 엔지니어가 흘끗 쳐다본다. 봐도 모르지. 한글을 어찌 알아?
“생각보다 회신이 빨리 왔네요. 오! 안 그래도 본사가 모토롤라와 공동 개발을 제의했는데 누가 핵심 개발자인지 알아 오라고 하네요.”
“오! 역시 일본인들은 정말 빠르네요.”
나름 립 서비스라고 아무 말이나 해 대는 모토롤라 엔지니어다. 핵심 인력이라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켜 보이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도 구별 못 하고, 이 비서가 굳이 영어로 말을 하고 있는 이유도 알아채지 못하는 녀석이다. 이제 좀 꺼져 다오. 바람잡이 역할 고맙다.
“후후, 인력도 스카우트해 보라고 하네요. 어떠세요? 제가 로비 좀 해 볼까요?”
“하하하! 이 자리에서요?”
“안 될 것 없죠. 핵심 인력이면 지금 당장 임원으로 모셔 가고 싶죠. 연봉 20만 불 정도?”
“으흠.”
“너무 적은가요? 저희가 미국 사정에 밝지 않아서. 아, 외국 임원에게 집은 따로 계약해 드립니다. 차도 빌려 드리고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훅 하고 들어가니 모토롤라 엔지니어는 흠칫 당황한다. 내 명찰은 금색 스티커로 번쩍거리고, 심지어 비서도 부리고 있으니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없는 거다. 얼굴과 달리 말과 행동에 꽤나 연륜이 묻어나니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지?
“미스터 유, 말씀 좀 나눠도 될까요?”
“오! 어윈, 지금 제가 좀 바쁜데. 이분과 대화 중이라.”
“잠시면 됩니다. 잠시면….”
“으음. 이 비서, 이분과 명함 교환하고 발표 자료 원본 좀 카피하고, 원하시면 이력서까지 좀 챙겨 주겠습니까?”
“아, 예. 문제없습니다.”
이 비서가 당황하는 모토롤라 엔지니어의 허리를 감싸며 부드럽게 자리를 피했다. 와인을 잔뜩 먹이라고 했으니 알아서 처리할 거다. 눈치 없게 연락이 오면 검토 중이라고만 하면 그뿐이고.
“조용한 데로 가죠, 어윈.”
“그러죠.”
어윈을 이끌고 아까 봐 뒀던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아래층으로 빙글 돌아가는 계단이 있었지만 비상용 계단인지 오가는 이는 없었다. 바람이 차갑긴 했지만 강가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이 아주 멋진 것이 조용히 얘기하기는 딱 적당했다.
“하실 말씀이란 게 뭐죠?”
와인잔을 난간에 올려놓고 어윈에게 집중했다.
“어, 그게…. 그래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해 주세요. 검증되진 않았지만 내 CDMA 기술은 차세대 무선통신의 표준이 될 겁니다.”
“후후. 후진국 아시안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리 말하시나요? 투자라니.”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대현은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반도체 회사도 있고, 통신 사업에도 발을 뻗으려 한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조사 많이 하셨군요.”
초창기 한국 회사 중에선 대현이 가장 유명했다. 미국인들은 자동차를 수출하는 회사라면 관념적으로 대형 글로벌 회사로 여겼으니까. 그리고 원래 역사대로라면 대현이 액셀 자동차 불량으로 회사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을 때지만, 지금은 적극적인 리콜 대응으로 어느 정도 호평을 받고 있다. 확실히 회사 이미지와 국가 이미지는 직간접적으로 비즈니스에 영향을 끼친다.
“딱히 그래서가 아닙니다. 몇 시간 전 나와 미팅을 했을 때도 투자를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에이, 그건 미끼죠. 그냥 이리저리 던져 보는 말에 불과하다고요.”
“미끼?”
“말 그대로. 난 오늘 어윈 당신을 처음 봤어. 당신 말을 믿기 전에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야지 않겠어? 보라고. 돈이 넘치는 아메리카에서 그것도 백인 사업가가 애송이 아시안의 돈이 필요할 정도로 절박하다는 것을 알아냈잖아?”
나는 표정이 드러날까 싶어 와인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차갑게 먹으니 쌉쌀한 게 맛나네.
내 말투는 어느새 어윈을 아래로 두는 격이 되었다.
난 어윈이 처한 상황을 슬쩍 찔러 댄 거다. 직설적으로 풀어낸다면 ‘야, 너는 그 기술로 벤처 자금이 넘쳐 나는 미국 본토에서도 투자를 못 받았으면서 왜 나를 물고 늘어지냐? 솔직히 나 너 못 믿겠다.’ 하고 긁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걸 알기에 어윈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비즈니스 화법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가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을 한발 먼저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윈이 이 상황에서 가장 리스크라 생각하는 게 뭐겠어?
그는 오늘 나를 처음 봤지. 나를 어떻게 믿겠어? 투자를 얻어 내려는 목적으로 찾아왔지만, 내가 급한 마음에 덜컥 투자하겠다는 얘기를 꺼내면 사기꾼으로 의심부터 할 게 아닌가.
그럼 이 밀고 당기기는 물 건너가는 거다. 이럴 땐 내가 먼저 어윈 당신을 못 믿겠다고 해야 한다. 그럼 반대급부로 어윈의 마음속에선 나에 대해 없던 믿음도 불쑥 생긴다.
척 보기에도 수백만 원짜리 슈트에 고급 시계, 나 못지않게 깔끔한 차림의 비서, 문법에 맞진 않지만 자신감 넘치는 영어, 의심부터 해 대는 화법. 그 모든 것이 내가 갑의 위치에 익숙해져 있음을 증명해 준다. 어윈의 눈에 맺혀 있던 일말의 의심이 스르륵 풀려 나간다.
‘빙고!’
- *
“으흠! 뭐, 절박한 것은 사실입니다. 통신 회사들이 나보다 모토롤라 방식을 선택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알게 될 겁니다. 내 기술이 솔루션이라는 걸 말이에요. 그 전에 투자할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당신은 어찌 보면 행운아입니다. 믿어 주세요!”
“뭐, 기술 검토를 해 봐야겠지만…. 아냐, 솔직히 괜찮아 보이기도 해. 헌데 딱 거기까지라고. 의심이 들어! 왜 미국 통신사들이 투자를 안 할까? 내가 미국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는 건가?”
내가 느물거리자 어윈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혁신은 언제나 기득권에 거부당하기 마련입니다. 모토롤라 놈들이 로비를 잘해서 그럴 수도 있고. 여하튼 내 기술은 아예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는 곳에서 그 우수성이 드러날 겁니다. 예를 들어 재팬, 아니 코리아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하하! 내가 무슨 그룹 회장도 아니고 기껏해야 팀장이라고. 솔직히 나조차 윗선에 보고를 할 때 어윈 당신의 칩셋보단 모토롤라 칩셋을 수입하자고 할 거야. 양산 준비도 안 된 당신 회사를 밀었다가 개털….”
“아니,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내가 확신해요.”
어윈이 내 말을 중간에 끊어 버렸다. 그러곤 단호한 표정으로 와인잔을 들던 내 팔을 잡았다.
어윈의 눈이 번쩍번쩍한다. 꿈을 좇는 벤처 사업가의 눈빛 그대로다.
현재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공동 개발자를 배신하고 5%가 넘는 로열티를 매겨 가며 돈독이 올랐던 미래의 퀄컴 사장이 아닌데?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성공하고 아들한테 사업을 넘겼지? 아들에게는 이런 초심까지는 물려주지 못했던 건가?
“날 어찌 믿고?”
“난 당신의 눈빛을 믿어. 말로는 내 기술을 폄하하지만 당신은 내 기술의 잠재력을 꿰뚫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미팅 때 내 기술의 단점을 그리 소상히 말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잖아?”
어윈의 억양도 훅하고 바뀌었다. 단어 선택과 억양을 달리하면 영어도 우리나라 반말처럼 공격적으로 변한다.
“이야, 만만찮네.”
“대체 목적이 뭐야? 모토롤라에 공동 개발을 제의하러 왔다고는 하지 마. 그건 확실히 아니야.”
“워워워.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하라고.”
나는 내 팔뚝에 매달린 어윈의 손등을 툭툭 털어 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 눈빛을 읽었다고? 대단한데?
강한 긴장감이 생기면서 담배 한 대가 절실했지만 참았다. 이번 생에 담배는 절대 안 피운다. 와인으로 입만 적시고 말을 이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뻥을 치기는 좀 그렇잖나.
“세상에 돈은 많지. 근데 권력이 없으면 참 따먹기 힘든 게 돈이야. 안 그래? 내가 기껏해야 반도체 메모리 담당인데, 이 정도 권력에 만족하긴 싫거든. 영역을 넓혀야 하는데, 어쭙잖게 단말기 사업까지 맡겠다고 하면 윗선에서 동의하겠어? 그렇다고 양산까지 하고 있는 모토롤라 칩셋을 자체 개발하겠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 들을 테고. 그래서 당신한테 접근한 거야. 신규 칩셋 개발로 대박을 친 다음 단말기 사업까지 먹어 보려고. 그럼 사장 자리 한번 노려 볼 수 있지 않겠어?”
준비한 영어를 주절거렸는데,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윈의 표정이 진중해지는 것을 보니 알아듣긴 했나 보다. 역시 내가 출장용 영어는 잘하지. 어려운 단어가 없거든.
“후후. 역시 나한테 투자할 생각이었군?”
“뭔 소리야? 선택지 중 하나지. 내가 못 먹을 바엔 판을 망쳐 버려야지. 이동통신이라는 대규모 국책 사업에 검증도 안 된 기술로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고 언론 몰이도 하고 말이야. 내가 그 정도도 못 할 것 같아? 크크크.”
내가 킥킥거리자 어윈이 당황한다. 맞는 말이잖은가. 성공하긴 힘들어도 망치는 건 쉽다.
이봐, 나는 미국보다 훨씬 경쟁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온 놈이야. 공짜 따윈 없다고.
“원하는 게 뭐야?”
“뭔 소리야? 당신이 내놓을 수 있는 게 뭔지부터 말해 줘야지. 으으, 춥다.”
“내 사무실로 가자고. 여기서 멀지 않아.”
“됐어. 오늘은 너무 늦었어. 내일 호텔로 와. 저기 하얏트 호텔에서 머물고 있으니까.”
“이봐, 미스터 유! 이대로 가면 기회를 놓치는 거야.”
“나를 도발할 생각 따윈 하지 마. 당신이야말로 12월 2일이면 투자비가 날아가니까.”
“뭐? 12월 2일?”
날 쫓아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던 어윈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1989년 12월 2일이 어떤 날인지 미국인들이 모를 리 없다. 미소 양국 정상들이 몰타에서 만나기로 예정된 날이거든. 냉전 종식을 선언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날이 뭐 어쨌다는 거야? 하는 궁금증이 들겠지.
딜을 할 때는 상대방 스스로 정보를 캐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가 생기고, 아무리 큰 건도 한 방에 딜을 할 수 있는 거다. 특히나 이 일은 어윈이 안달복달하며 적극적으로 나서 줘야 하는 거다.
원래대로라면 어윈은 내년에 SJ와 극적으로 계약을 성사시키고 한국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업계 표준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나스닥에서 대박을 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어윈을 몰아붙이는 이유다.
나는 그길로 이 비서를 찾아 호텔로 돌아와 버렸다.
아마도 어윈은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신문이란 신문을 모두 뒤져 가며 12월 2일이 한국과 대현전자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검토하느라 말이다. 그 수수께끼를 제멋대로 해석하면 내가 확신컨대, 있는 거 없는 거 다 싸 짊어지고 나한테 온다.
- *
다음 날 오후.
“이 비서, 체크아웃해. 비행기 표는 공항 가서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자고.”
“팀장님, 정말 귀국하시게요? 이왕 왔는데 관광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일하러 온 건데 관광은 무슨. 미국엔 퀄컴 빼고는 더 건질 게 없으니 돌아가야지.”
“어, 으….”
“체크아웃하시라고.”
“옙!”
정말이지 퀄컴을 제외하곤 건질 게 없었다. 인터넷 천재 개발자들이 참석했다면 이 기회를 노려 헤드 헌팅이라도 할까 했는데, 미국에서도 인터넷은 아직 설익었다.
하긴 1989년에 world wide web 기술이 오픈되었으니 아직 아이디어 자체가 떠오르기에도 이르다. 그렇다고 각 연구소로 쳐들어가 ‘네가 나중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만드는 개발자야. 그러니 나랑 같이 일하자.’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원래 역사대로 개발자들이 경험치를 쌓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벌컥! 다다다다.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어윈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미스터 유!”
“이제야 오다니…. 하마터면 못 볼 뻔했잖아.”
어윈의 눈이 체크아웃을 하고 있는 이 비서에게 향한다. 다급히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는 테이블에 서류 뭉치를 잔뜩 얹어 놓았다. 딱 봐도 특허와 설계 도면이다. 서류 사이에 뉴욕 타임지며 신문 조각도 끼어 있었다.
“이봐, 자네 말이 사실이었어. 소련이 냉전을 종식하는 대가로 서방 7개국에 차관을 요청했고, 그중에 코리아도 있더군. 대략 30~40억 불 수준이 될 거라던데. 그중 일부가 대현의 자금이었나? 그걸 로비해 줄 수 있다는 말이고? 코리아 대통령이 유럽 4개국을 순방 중인데 최종 목적지가 헝가리더군. 거기서 딜이 이루어지는 건가?”
봐라, 혼자서 소설을 써 왔다.
1989년은 아직 국제 금융 시스템 자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다. 국가가 보증을 서는 신용장이 없으면 수표는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던 시대다. 큰 덩치의 자금을 움직이기 위해선 미국, 일본, 홍콩, 영국 주식시장이 아니라면 차관의 형식으로 오갈 수밖에 없다. 어윈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문제는 거기서 당신이 줄 게 뭔지 알려 주는 거야.”
“미스터 유가 다리를 놔 줄 돈이 얼마인지 알아야지. 여기 가져온 서류는 최소 3억 불 치는 된다고 생각해.”
“농담해? 벤처 신화인 마이크로 소프트가 나스닥에서 대박 쳐서 3억 5천만 불 정도를 벌었어. 퀄컴이 그에 버금간다고?”
“줄 수 있는 돈이 얼마야? 그걸 말해 줘.”
“이 양반이 진짜! 그래, 알아보려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겠지. 차관으로 풀린 돈은 3억 8천만 불 정도 되고 그중 1억 9천 정도가 회사채로 풀릴 거야. 욕심부리지 마! 내가 볼 땐 기껏해야 5천만 불 정도만 투자받아도 대박이니까. 계약 조건은 대현 지분 14.99%, 내 지분 4.99%, 그리고 칩셋을 팔 때 로열티의 49%는 대현이 먹는 거로 하자고. 그리한다면 당신 칩셋이며 휴대폰은 내 팀을 움직여서 만들어 주지. 대현전자와 크로스 라이선스도 맺게 해 줄 테니 다른 반도체 특허는 신경 쓸 거 없어. CDMA 기술이 대박이라고 언론 플레이 하는 것도 내게 맡겨.”
“너, 너무한 거 아냐?”
“훗! 생각해 봐. 5천만 불이야.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만져 보겠어? 뭐, 그조차 잘됐을 때의 얘기지만, 내게 지분 4.99%를 준다면 목숨 걸고 도와주지. 잘 생각해. 반은 사기고 나머지 반은 도박인 사업 아이템에 인생을 걸 사람이 있을까?”
“사기도 도박도 아니야! 내 기술은 완벽해.”
“웃기고 있네. 양산은커녕 시제품이라도 만들어 봤어? 칩셋에 보안 서킷은 있고? 기지국도 없는데 동작 테스트할 방법은 있나? 호환되는 휴대폰이 지구상에 존재하기라도 해? 한마디로 이건 미친 짓이라고.”
“으으….”
어윈의 CDMA 칩셋이 상용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다. 아무도 그리 큰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길 생각을 못 했거든. 모토롤라 방식이라는 검증된 무선 통신 기술이 있는데 굳이 모험할 필요가 어디 있나?
특히나 CDMA 칩셋의 핵심 기술은 칩셋마다 개인용 ID를 부여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보안 서킷에 대해선 미처 생각을 못 했다는 걸 깨달았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대한민국의 전자통신 연구소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거든.
“11월 29일 소련 영사관이라는 특급 은행 창구가 생겨. 그리고 12월 2일 큰형님들이 서로 사인하면 돈은 일단 그 창구로 넘어가거든? 그럼 배 떠나는 거야. 생각 있으면 그 전에 한국으로 날아와. 단언컨대 그때 또 딜을 할 생각이면 돌아갈 차비도 챙겨 주지 않을 거야.”
나는 데드라인까지 알려 주고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툭!
물론 이런 일에 미끼가 빠질 수는 없다. 나는 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어윈에게 던져 줬다. 봉투 안에 있는 것은 현금 2만 불. 나와 이 비서가 가져올 수 있는 최대치의 현금이었다. 어윈이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기엔 충분하고도 넘친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어윈은 한참 동안 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준 돈 때문이 아니다. 내가 어윈이 가져온 특허 서류나 설계 도면을 뒤적거려 보지도 않았거든. 그럼에도 보안 서킷을 언급했으니 내가 이미 그의 기술에 대한 사전 조사를 모두 끝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절반은 사실이다.
맘대로 생각해. 그리고 더 소설을 써 봐. 그럼 더욱 더 불안해질 거야.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
찌잉!
내 뒤통수에서 누군가 2만 불짜리 지렁이를 매단 낚싯바늘을 꿀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케이! 목구멍에 걸렸어. 어윈, 당신은 이제 절대 못 빠져나간다.